중국 천안문 사태 (천안문 6.4 항쟁 )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주도로 1989년 4월 15일에 시작되었으며, 중국 공산당 정부의 군대가 전차들을 앞세워 유혈 진압하여 1989년 6월 4일에 비극적으로 끝을 맺은 중국의 민주화 운동.

학자들이 천안문 항쟁 혹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공식 명칭은 아니다.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감안하여 한국에서도 거의 천안문 사태로 부른다. 따라서 언론에서도 거의 대부분 천안문 사태라고 언급한다. 일각에서는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이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쓰인다고 비판한다.

강경 반중 인사들은 피의 일요일, 천안문 대학살(Tiananmen Massacre) 등으로 부른다. 다수 학자들은 '1989년 톈안먼 광장 항쟁(Tiananmen Square Protests of 1989)'이라고 부른다. 1976년 천안문 사태와 구분하는 뜻으로 '제2차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도 제법 알려져 있다.

 

 

 

 

 

 

1.

다가오는 톈안먼 33주기...인민해방군이 짓밟은 자유화 운동

 

 

< 조선일보,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2.05.28.  >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3회>

 


국가의 철학이 바뀌면 국민의 운명이 바뀐다...한반도의 현대사를 보라

“국가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state)”이 바뀌면 그 나라 국민의 운명이 바뀐다. 세계 여러 나라의 경제 발전사를 경험적으로 탐구해 온 여러 경제학자의 주장이다. 국가의 철학이 사회·경제적 기본 제도를 결정하고, 그 제도에 따라 국민 개개인의 삶이 바뀔 수밖에 없다.

국가의 철학이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면 개개인은 창의력과 자립심을 잃고서 정부의 명령을 맹종하는 노예적 삶을 면할 수 없다. 국가의 철학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때, 혁신과 창조의 정신력이 발휘되어 비약적 경제성장이 가능해진다.

한반도의 현대사가 바로 그 점을 웅변한다. 북한은 공산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을 국가의 철학으로 삼아 온 결과 극빈의 전체주의 체제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 보편적 인권, 법의 지배를 국가의 철학으로 삼아 왔기에 최첨단 산업기술과 문화 콘텐츠를 가진 세계 10대 부국으로 성장했다.

지난 70여 년 중국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마오쩌둥 시대(1949-1976) 국가의 철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었다. 그 결과 중국은 대기근의 참상과 문화대혁명 “10년의 대동란”을 겪으면서도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이후 덩샤오핑은 실용주의의 기치 아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후 불과 한, 두 세대 만에 경제 규모 세계 제2위까지 도약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실용적 개혁개방으로 경제 성장...그러나 국가 철학은 개조 못해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 철학”이라고 선언했다.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은 투쟁 철학 대신 경제성장을 위한 실용적인 개혁을 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마오쩌둥의 주술을 벗어던졌기에 중국의 경제는 연평균 10%의 초고속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국가의 철학을 개조할 수 없었다.

덩샤오핑이 1990년대 천명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모순어법 속에 중국이 당면한 국가 철학의 딜레마가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덩샤오핑은 경제개혁을 주도했으나 국가의 철학을 바꿀 수는 없었다. 국가 철학으로서의 사회주의가 폐기되면, 중국공산당 역시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은 국가의 철학을 둘러싼 이념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고수하는 보수파와 경제적 자유화를 넘어 정치개혁까지 요구하는 개혁파 사이의 대립으로 펼쳐졌다. 2차 대전 이후 동아시아 신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발전 궤적을 추적해보면, 1) 경제적 자유화가 2) 정치적 민주화로, 3) 다시 법제 개혁을 거쳐 4) 새로운 헌정 체제로 나아가는 국가 개조의 선순환을 보여준다.

1980년대 중공중앙은 1) 경제적 자유화에서 2) 정치적 민주화로 가는 제1단계의 변화 자체를 좌초시켰다. 그 결과 개혁개방 이후 경제적 자유화와 정치개혁을 이끌었던 이른바 “덩(샤오핑)-후(야오방)-자오(쯔양)” 체제가 1989년 톈안먼 민운(民運, 민주화 운동)을 끝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불과 10년 만에 덩샤오핑 정권은 광장의 시위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다. 자유와 민주를 외치는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마할 수 있는 대항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결국 “철학적 빈곤”이었다.

 


자유화 투사 리훙린, 1980년대 중국 공산당의 일당 독재 공개 비판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1회>에서 잠시 소개했던 리훙린(李洪林, 1925-2016)은 베이징에서 폐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며 민주화를 추구했던 대륙의 자유인이었다. 그는 1980년대 중국공산당의 반(反)자유화 운동에 맞서서 “신(新)계몽 시대의 자유화 운동”을 이끌었다.

1925년 랴오닝성 서북부 궁벽한 가이핑(蓋平)현의 빈민굴에서 태어난 리훙린은 6세 이후 부모와 함께 유랑 걸식하듯 황허강 유역을 떠돌며 살아야만 했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학문에의 뜻을 굽히지 않고 독학을 이어갔던 그는 힘겹게 산서(陝西)성의 시베이(西北) 농학원(農學院, 농업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리훙린은 1946년 3월 30일 중국공산당 지하당 특위 서기였던 그의 스승의 인도로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이후 당의 지령에 따라 학생운동에 투신한 리훙린은 국공내전의 포화 속에서 감시망이 좁혀져 오자 국민당의 봉쇄망을 뚫고 중공 혁명의 성지 옌안으로 갔다. 그는 옌안에서 지식분자에 대한 정풍(整風)이 몰아쳤을 때 잠시 투옥되어 고초를 치렀지만, 공산당원으로서 그의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다.

1950년대 내내 리훙린은 중공중앙 정치연구실에서 복무했다. 대약진운동 당시 그는 후차오무(胡喬木, 1912-1992)의 명령에 따라 인민의 철강생산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 후차오무는 1941년부터 1966년까지 마오쩌둥의 비서로서 활약했던 인물인데, 1980년대 중공중앙에서 “마오쩌둥의 기치를 다시 들고” 개혁개방에 반대했던 강경 보수파였다. 리훙린은 그렇게 후차오무의 수하에서 공산당의 정책을 홍보하고 선전하는 일에 몰두했는데······.

1959년 대약진운동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당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사상적 전기가 찾아왔다. 후베이성 우한에서 장즈쉐이(張治水)라는 한 대학생이 마오쩌둥 앞으로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하는 3만 자의 서신을 써서 올린 사건이었다. 서신을 먼저 읽은 리훙린은 대기근의 참상을 당 중앙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우선 자신이 직접 편집하던 <<사상계 동태(動態)>>지에 그 서신의 축약본을 게재하고, 중공중앙에 그 서신의 원본을 발송했다.

바로 그때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앙의 영수들은 장시(江西)성 루산(廬山)에 모여서 마라톤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가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하며 마오쩌둥의 실책을 비판했다. 이에 격분한 마오쩌둥은 작심하고 펑더화이와 그의 직속 부하들을 반동집단으로 몰고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장즈쉐이의 서신을 받아 읽은 마오의 측근 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베이징에 전화를 걸어서 인쇄된 간행물을 모두 파기하라 지시했다. 이후 서신을 써서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한 장즈쉐이와 리훙린은 모두 당을 공격한 “소(小)펑더화이”로 낙인 찍히고 박해를 받았다. 리훙린이 맡아온 <<사상계 동태>>는 정간(停刊)당했고, 리훙린은 농촌에 하방되어 “노동 단련”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당은 리훙린에게 우경(右傾) 사상을 교정하라며 하방시켰지만, 농촌의 참혹한 현실을 몸소 체험한 그의 사상은 더욱 오른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의 질곡서 해방되지 않고선 진흙탕서 벗어나 현대화의 큰길로 갈 수 없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중국 지식계에서는 개혁파의 영수 후야오방(胡耀邦)이 이끄는 사상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후야오방은 당시 사상해방운동에서 일군의 맹장들이 출현했다고 말했다. 리훙린은 분명 자유화의 맹장이었다. 그가 쓴 글들이 잇달아 지식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리훙린은 “신(新) 계몽시대”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1978년 초 리훙린은 문혁 시절의 집단 폭력과 개인숭배의 광열을 비판하는 “과학과 미신”을 발표했다. 훗날 그는 “마오쩌둥의 질곡에서 해방되지 않고선 중국이 진흙탕에서 벗어나 현대화의 큰길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작심하고 이 글을 썼다고 회고했다.

이어서 1979년 1월 리훙린은 “영수(領袖)와 인민”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1) 영수가 인민에 충성을 바쳐야 하고, 2) 오직 인민이 역사를 창조하며, 3) 영수는 하늘이 낸 인물이 아니라 실천 중에 성장한 일개 인간일 뿐이며, 4) 인민은 영수를 비판할 수 있고, 5) 영수는 1인이 아니라 다수의 지도자를 의미하고, 6) 종신제와 후계자 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며, 7) 개인숭배는 용납될 수 없다는 일곱 가지 주장을 펼쳤다.

덩샤오핑이 민주장 운동을 탄압한 직후인 1979년 4월 리훙린은 <<독서(讀書)>>지를 창간했다. 창간호의 권두에 “독서엔 금구(禁區, 금지된 구역)가 없다!”는 그의 시론이 실렸다. 독서에 금구가 없기 위해선, 모든 책이 다 출판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책이 다 출판될 수 있기 위해선,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표할 수 있어야만 한다. “책을 읽을 권리”를 내세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이 글은 새로운 시대에 맞게 “국가의 철학”을 개조하라는 실로 강력한 요구였다.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은 막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한 후 사회주의 4항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4항 기본원칙이란, 1) 사회주의 노선 견지, 2) 무산계급 독재 견지, 3) 공산당의 영도력 견지, 4)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견지를 의미했다. 경제개발을 위해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하지만, “국가의 철학”은 절대로 바꾸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당시는 누구도 입을 열어 덩샤오핑을 비판할 수 없는 엄혹한 시국이었다. 바로 그때 리훙린이 덩샤오핑에 직격탄을 날렸다. 1979년 5월 19일 인민일보에는 리훙린의 시론 “대체 어떤 사회주의를 견지하나?”가 게재되자 중국 지식계에 일대의 환호성이 터졌다. 크게 고무받은 리훙린은 나머지 3개 기본원칙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마침내 완성된 리훙린의 “4대 기본 원칙” 비판은 중국 지식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인민해방군 투입한 톈안먼 대학살로 사상투쟁 종식...리훙린 책은 지금도 금서

1999년 자유의 해방구 홍콩에서 리훙린의 <<중국사상운동사 1949-1989>>가 출판됐다. 톈안먼 대학살이 발발하고 꼭 10년 되던 해였다. 지금도 중국의 금서 목록에 올라 있는 이 책에서 리훙린은 1949년 건국부터 1989년 톈안먼 대학살까지 40년의 역사를 중국공산당이 일으키고 이끈 “사상투쟁”의 역사로 정리한다. 여기서 사상투쟁이란 중국공산당의 지시 아래 다수 인민이 소수의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군중 폭력에 의한 정치운동을 의미한다.

마오쩌둥이 지배하던 27년의 세월 중국의 전 인민은 틈만 나면 정치 집회에 나가서 구호를 외치며 “인민의 적”을 향한 분노와 적의를 표출해야만 했다. 끝도 없는 사상투쟁의 연속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개혁개방 시대가 열렸지만, 1980년대 중국공산당은 끊임없이 사상투쟁을 이어갔다.

그 중 “정신 오염 청소” 운동(1983-1984)과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 운동(1986-1992)이 대표적이었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중공중앙의 사상투쟁은 자유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개혁 세력의 저항에 부딪혔고, 급기야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낳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리훙린은 중국공산당이 톈안먼 대학살을 감행함으로써 40년 동안 지속됐던 강압적인 사상투쟁을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종식했다고 질타한다.

“최후에는 ‘무기의 비판’이 ‘비판의 무기’를 대체했다. 인민 해방군의 탱크와 총기는 물론 자유화의 붓대보다 강력했다. 6.4 대학살 이후 인민 해방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자유화의 전군(全軍)은 몰락했다. 자유화 운동 세력이 일망타진되었기에 ‘반(反)자유화 투쟁’의 대상도 사라졌다. 비판 대상이 없어졌기에 더는 군중을 동원한 사상투쟁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1844년 26세의 청년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고 썼다. 이 구절은 사회주의 혁명가 사이에서 무기를 들고 투쟁하라는 정치 구호로 활용되었다. “무기의 비판”이란 이론투쟁이 아니라 무장투쟁을 의미한다. 민초가 막강한 관군에 저항하는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1989년 톈안먼의 시위 군중은 “비판의 무기”만을 휘둘렀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인민 해방군을 “비판”하지 않았다. 시민의 정당한 비판 앞에서 논리가 막혀버린 중국공산당은 “무기”를 들고 시위 군중을 제압했다.

 

 

 

 

2.

톈안먼 33주기 애도의 물결... “젊은이를 어찌 다 죽일 수 있으랴”

 

 

< 조선일보,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2.06.04. >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4회>

 
톈안먼 기억을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영국 대사 “민간인 사망자 최소 1만명”

33년 전 오늘 중국 정부는 20만 병력을 투입해서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자유와 민주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군중을 학살했다. 실제 희생자의 수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9년 6월 30일 베이징 시장 천시통(陳希同, 1930-2013)은 학생 38명을 포함한 241명이 사망하고 3000여 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사망자가 천 명을 훌쩍 넘어 수천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2017년 10월 공개된 주중 영국대사 도널드(Alan Donald)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사망자의 총수는 최소한 1만 명에 달한다.

톈안먼 민주화 운동 33주년을 앞두고 최근 베이징시 인민 정부 산하 톈안먼 지구 관리위원회는 5월 25일에서 6월 15일까지 텐안먼 광장의 당일 방문 예약을 모두 중단시켰다. 광장에 군중이 운집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톈안먼 어머니회” 등 톈안먼 희생자 유가족은 특히 삼엄한 감시를 당하고 있다. 해외로 망명한 톈안먼 민주인사는 중국 내 가족들과 자유롭게 전화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2021년 7월 후베이(湖北) 지방법원은 인권운동가 인쉬안(尹旭安, 1974- )에게 4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그가 트위터에 올린 톈안먼 추모식의 사진을 결정적 증거로 채택했는데, 죄명은 “싸움을 걸고 문제를 일으켰다”는 의미의 심흔자사죄(尋釁滋事罪)였다. 오늘날 심흔자사죄는 인권운동가와 민주인사를 체포하고 처벌할 때 적용되는 이현련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법이다.

2021년 10월 광둥(廣東) 지방법원은 인권운동가 장우저우(張五洲, 1969- , 여)에게 톈안먼 일인 추모식을 거행하고 홍콩 국가안전법에 반대를 표명했다는 이유로 2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장우저우에게도 공무집행방해죄와 심흔자사죄가 적용됐다.

2021년 12월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지방법원은 인권운동에 전념해온 블로거 천윈페이(陳雲飛, 1967- )에게 심흔자사죄로 4년 형을 선고했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천윈페이는 2015년 톈안먼 희생자 추도회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이미 체포된 전력이 있었다. 당시 고작 스무 명이 참석한 추모식의 현장에 100명의 경찰이 들이닥쳐서 그를 “국가권력 전복 선동죄”와 심흔자사죄로 체포했다. 결국 2019년에야 만기 출소한 천윈페이는 불과 2년 만에 다시 갇힌 몸이 되었다.

역시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황치(黃琦, 1963- )는 톈안먼 실종자를 찾기 위한 톈왕(天網) 인권센터를 세운 인권운동가이다. 그는 1999년 중국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고발하는 인터넷 사이트 “64톈왕(天網)”을 창시했고, 2000년 황치는 “국가 기밀 불법 보유죄”로 체포되었다. 2006년 출옥한 그는 곧바로 다시 “톈왕”을 재건했지만, 그해 8월 18일 불의의 사이버공격으로 사이트가 폭파되어버렸다. 2019년 황기는 “고의성 국가 기밀 누설죄”와 “불법성 국가 기밀의 해외 누설죄”로 1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 밖에도 중국 당국은 해외에서 체류하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가들을 여전히 감시하고 압박하고 있다. 베이징 대학 법대생으로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슝옌(熊焱, 1964- )은 19개월간 죄명도 없이 악명 높은 친청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출옥 후 그는 기독교도가 되어 1992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군에 입대하여 군목으로 복무했던 슝옌은 최근 뉴욕시 하원 선거구에 민주당 대표로 출마했는데, 최근 그는 다섯 명의 중국 정부 요원들이 그를 스토킹하며 회유와 협박을 가하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홍콩에서 추모식 없앤 중국 공산당...톈안먼 희생자 추모제 2020년 이래 금지

1989년 이래 자유의 허브 홍콩에서는 톈안먼 대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민주와 인권의 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홍콩의 교회에선 해마다 64 희생자 추도예배가 거행되었고, 빅토리아 공원에서는 대규모 시민들이 참여하는 추모식이 거행되어왔다.

2020년 6월 3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홍콩 국가안전법이 통과되었다. 2021년 3월 30일에는 베이징의 입맛에 맞게 홍콩 선거제가 개편되었다. 최근 홍콩 정부는 베이징의 눈치를 보면서 노골적으로 톈안먼 관련 활동 전반에 대대적인 압박과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열리던 빅토리아 공원의 톈안먼 희생자 추모제는 2020년 이래 금지되었다. 2021년 홍콩 경찰은 톈안먼 희생자 추모 집회를 개최한 26명의 민주화 인사들을 구속했다.

2014년 “우산 혁명”의 젊은 영웅 조슈아 웡(Jushua Wong, 黃之鋒, 1996- ), 반중 기업인이자 빈과일보(蘋果日報)의 발행인 지미 라이(Jimmy Lai, 黎智英, 1947- ), 2019-2020년 홍콩 시위를 심층 보도한 언론인 과이니스 호(Gwyneth Ho, 何桂藍, 1990- ) 등 26명의 민주 인사들이 4개월에서 1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죄명은 대부분 선동죄였다. 2020년 톈안먼 대학살 추모식에 타인들을 참석하라고 권유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1월, 홍콩 법원은 인권변호사 초우항퉁(Chow Hang-tung, 鄒幸彤, 1985- )에게도 2020년과 2021년 톈안먼 추모회에 참석해서 선동했다는 죄명으로 22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초우 변호사는 “애국민주 운동을 지지하는 홍콩 시민 운동연합회”(이하, 홍콩 연합회)의 부의장이다. 2021년 6월 홍콩 경찰은 홍콩 연합회가 운영해 온 “6.4 기념관”의 폐쇄를 명령했다. 홍콩 연합회가 이에 불응하자 홍콩 경찰은 3개월 후 기념관을 습격해서 강제로 폐쇄하는 강공책을 펼쳤다.

 


홍콩대학에 있던 톈안먼 대학살 희생자 기리는 상징 ‘치욕의 기둥’ 2021년 철거

2021년 12월 23일 홍콩 대학에서 “치욕의 기둥(Pillar of Shame)”이 사라졌다. 청동, 구리, 콘크리트로 제작된 “치욕의 기둥”은 8미터 높이로 2톤쯤 나가는 대형 조형물이다. 1997년 홍콩 반환을 몇 주 앞두고 덴마크 조각가 갈쉬오트(Jens Galschiot, 1954- )가 완성한 이 작품은 1997년 6월 3일 톈안먼 8주기 추모식에 맞춰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이후 “치욕의 기둥”은 1998년 12월 홍콩 대학으로 옮겨져서 23년간 그 자리에 줄곧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울퉁불퉁 땅 위로 솟아오른 원통 모양이지만, 자세히 보면 꿈틀꿈틀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형상이다. 누가 봐도 톈안먼 대학살의 희생자를 기리는 자유와 인권의 상징이다. 이 작품의 밑동에는 “6.4 도살(屠殺)”라는 큰 글씨 옆에 “늙은이가 어찌 젊은이를 다 죽일 수 있으랴(老人豈能夠殺光年輕人)!”란 글귀가 초서(草書)체로 새겨져 있다.

최근 수년간 중공중앙은 홍콩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극단적 조치로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급기야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생명으로 하는 대학이 어떤 압력에 시달렸는지 “치욕의 기둥”을 철거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갈쉬오트는 작품을 덴마크로 옮겨오려 했지만, 어느 운송업체도 정부의 “보복이 두렵다며” 나서지 않았다. 학생들은 항의하며 경찰의 감시를 피해 “번개” 집회를 열기도 했지만, 톈안먼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는 홍콩 정부의 시도는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치욕의 기둥”은 중국어로 흔히 “국상지주(國殤之株)”라 번역된다. 중국어에서 국상(國殤)은 흔히 순국열사를 가리키지만, 여기서 “상(殤)”자는 본래 일찍 죽는다는 뜻이다. 국상이라는 단어는 “국가 때문에 요절했다”는 항의의 의미와 함께 “나라를 위해서 일찍 순절(殉節)했다”는 안타까운 칭송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국가 폭력으로 꽃다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다.

이제 홍콩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조형물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자유의 허브 홍콩에서 톈안먼 대학살을 규탄하고 희생자를 추모할 수 없다면, 이제 중국의 영토 내에서 6.4의 기억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은 없게 된다. 어둠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중국공산당의 만행이 중국의 인민을 망각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다.

 


대만에서 계속되는 톈안먼 추모제...“‘치욕의 기둥’ 재건할 것” 선포

홍콩에서 톈안먼 희생자를 추모할 수 없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1989년 톈안먼의 민주투사들은 올해부터 대만에서 톈안먼 추모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3월 21일 국제 중국 민주화 운동단체 “화인 민주 서원”의 대표들은 대만에 모여 홍콩 대학에서 철거된 치욕의 기둥을 재건할 것을 선포했다. 그들은 또한 원작자 갈쉬오트를 초빙해서 제막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학생대표였던 왕단(王丹, 1969- )도 이 운동에 동참할 의사를 밝혔다.

30년에 걸쳐 톈안먼 대학살에 관한 3부작의 역사서를 저술한 재미 망명가 우런화(吳仁華, 1956- )는 이날 현장에서 “인권엔 국경이 없다”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출생지와 상관없이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 1980년 한국 광주의 희생자들과 1947년 대만의 2.28사건 희생자들의 고통을 추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톈안먼 대학살이 중국에서 일어난 중국만의 사건이 아니라 인류가 희생당한 범인류적 사건이라는 자각이다. 우리는 모두 한 국가의 국민이기 이전에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깨달음이다. 때마침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금지돼버린 홍콩의 추모 집회를 대신하기 위해 올해부터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런던, 파리, 서울, 타이베이, 울란바타르, 시드니, 오슬로, 암스텔담 등 세계 각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글로벌 추모대회를 거행한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인의 뇌리에서 어둠의 기억을 지우려 하지만, 절대로 인류의 공동 기억을 파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우런화는 1990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 30년에 걸쳐 톈안먼 대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세 권의 방대한 역사서를 펼쳐낸 집념의 역사학자이다. 그는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바쳐 톈안먼 대학살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해야만 했을까? <계속>

 

 

3.
‘개혁개방’ 덩샤오핑이 톈안먼 대학살 감행한 이유는?

 

 

< 조선일보,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2.06.18.  >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6회>

 


대한민국 친중 세력의 편견과 아집, 모순과 불합리 담긴 ‘짱개주의’

지난 6월 9일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짱개주의’를 내세웠다”고 주장하는 친중공 성향의 책을 한 권 추천하면서 “언론이 전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라는 트윗을 날렸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언론에 “슬픈 중국”의 실상을 기록해 온 1인으로서 전직 대통령의 그 발언을 묵과할 수 없다. 그 짧은 글귀 속에 대한민국 친중공 세력의 편견과 아집, 모순과 불합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중국 밖의 지식인이 중국공산당 정부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비판하면, 중국 안팎의 친중주의자들은 으레 “서구중심주의,” “오리엔탈리즘” 등의 현학적 상투어를 들이대며 중국공산당을 옹호한다. 특히 구미의 지식인이 중공 정부를 비판할 때, 이들은 “인종주의”의 프레임을 씌우고 반발한다. 중국 내부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의 실상을 비판하는데, 비판자의 피부색이 왜 문제가 되는가? 오히려 정당한 비판에 반발하는 자들이야말로 “중화 중심주의,” “중국 특수주의,” “중국 예외주의,” “아시아 우선주의,” “황색 인종주의” 등 낡고 뒤틀린 20세기적 편견에 빠져 있지 않은가?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등은 서구만의 가치가 아니라 유엔 헌장에 명기된 인류의 보편가치이다. 세계 196개 유엔 회원국은 유엔 헌장에 따라 기본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을 보장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하물며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하나인 중화인민공화국임에랴! 중국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의 실태를 고발하는데, “제국주의적 내정 간섭”이라는 중공의 반발은 궁색하기만 하다. 14억 중국 인민은 “보편가치”에서 벗어난 예외적 인류라는 말인가? 근대 서구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설파한 공자(孔子)의 휴머니즘에 따라도 중국공산당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는 용납될 수 없다.

오늘날 중국인들도 인권, 자유, 민주, 법치를 갈망하고 있다. 다만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국의 인민은 민주를 향한 “타는 목마름”을 억누를 수밖에 없을 뿐이다. 탱크와 장갑차로 중무장한 20만 병력을 투입해서 수도를 통째로 점령하는 광폭한 권력 앞에서 비무장의 시민들이 저항을 이어갈 수는 없는 까닭이다. 1970-80년대 한국과 대만 등의 권위주의 독재 하에선 민주화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지만, 북한이나 중국 같은 전체주의 체제 아래서는 민주화 운동의 불길조차 일어날 수가 없다. 특히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은 민주의 싹을 자르고 불사르는 전체주의적 인권유린이었다. 중공중앙은 대체 왜 그토록 잔악무도한 대학살을 감행해야만 했는가?

 


탱크 장갑차 무장 20만 병력 투입...보수파로 기운 덩샤오핑, 개혁파 제압 노려

1989년 “베이징의 봄”이 전 세계에 보도되고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민주, 자유, 부패 척결을 외치며 평화롭게 시위하는 학생과 시민을 향해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20만 병력을 투입했다. 그 20만 병력은 국가의 수도를 에워싸고 들어와서 점점 포위망을 좁혀가다가 일격에 도심을 탈취하는 군사작전으로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학살하고 진압했다. 진정 중공중앙이 대학살을 감행할 때 시위를 해산하고 인민을 겁줘서 굴복시키려는 일차원적 의도밖에 없었을까? 그 목적이 다였다면 인명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시위대를 해산하는 전술이 없었을 리 없다. 비근한 예로 1976년 4월 톈안먼의 시위를 진압할 때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13년 전 이미 군 동원 없이 톈안먼 광장의 시위를 큰 무리 없이 진압했던 중공중앙이 1989년 6월에는 20만 병력을 동원하는 실로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49년 1월 국공내전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의 군대가 베이징을 “해방”한 후, 그토록 대규모의 병력이 수도를 점령한 사례는 없었다. 덩샤오핑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20만 병력의 출동을 명했는가?

우선 그 당시 동원된 군병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래 표와 같이 베이징 주위 경기(京畿) 지역 방위 부대 외에도 랴오닝성의 선양(瀋陽), 상둥성의 지난(濟南), 심지어는 베이징에서 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난징(南京)에서도 대규모의 군부대가 동원되었다.


지난주 소개했던 “톈안먼 대학살”의 연구자 우런화(吳仁華, 1952- )는 톈안면 대학살의 최종결정자인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과 중공중앙의 보수파에겐 두 가지의 더 큰 이유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덩샤오핑과 양상쿤(楊尙昆, 1907-1998)이 이처럼 방대한 병력을 동원해서 이처럼 주도면밀한 군사작전을 진행한 것은 분명 평화롭게 시위하는 학생들과 학생들을 성원하는 시민들을 진압하는 목적뿐 아니라 동시에 그들은 중공 당내에서 정변(政變)을 막고, 군대의 병변(兵變)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吳仁華, <<六四事件中的戒嚴部隊>>, 27쪽)

덩샤오핑과 양상쿤의 입장에서 당내에서 “정변”을 획책할 수 있는 요주의(要注意)의 인물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과 중공중앙 정치국 상위의 후치리(胡啓立, 1929- ), 중앙서기처 서기 루이싱원(芮杏文, 1927- ), 통전부(統戰部) 부장 옌밍푸(閻明複, 1931- ) 등이었다. “정변”이란 권력투쟁을 통해 정부의 권력이 교체되는 상황을 이른다. 1989년 상황에서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정권의 구심을 탈환하는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979년부터 개혁개방 초기부터 덩샤오핑은 흡사 두 날개의 새처럼 좌우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하는 “보수파”와 시장주의 자유화를 지향하는 “개혁파”를 끌어안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보수파에 기운 덩샤오핑은 이미 1987년 1월 15일 개혁파의 영수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을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파면했다. 후야오방에 이은 개혁파 영수 자오쯔양 역시 6.4 대학살 이후 가택 연금을 당해야만 했다.

덩샤오핑으로선 군대의 동원이야말로 일거에 개혁파를 제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덩샤오핑은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국무원 총리의 직책을 모두 밑 사람에 양보한 채로 오직 중앙군사위 주석의 직위만을 견지하고 있었다. 본래 어떤 국가든 군권을 장악하고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군대의 최상위 통수권자이지만, 동시에 의회가 군사 명령계통을 결정하고 군사 조직을 창설하거나 개편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는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통해서 군의 정치적 개입은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근대 입헌주의의 군사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달리 중국은 정부 내 권력분립을 이념적으로 부정하기에 270만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에 귀속된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은 최고 영도자가 정변의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20만 병력을 통원해 수도를 통째로 점령하는 대규모 무력 시위를 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민주적 절차의 국민 총선거가 아니라 내전을 통해 군사작전으로 건설된 나라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중국에서조차 군권의 장악은 절대로 쉬운 일일 수 없다. 당내 권력의 역학관계에 따라서 군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 자체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마오의 兵法 활용...“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쿠데타를 막아라”

덩샤오핑은 분명 마오쩌둥의 선례를 통해서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증험했던 듯하다. 73세의 고령으로 전 중국으로 문혁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고 정적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던 마오쩌둥의 정치권력도 실은 그의 군사 대권에서 나왔음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덩샤오핑이 몰랐을 리 없다.

문화혁명 관련 야사(野史)에 따르면, 문혁의 공식적 개시를 3개월 앞둔 1966년 2월 마오쩌둥은 이미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여서 베이징을 통째로 포위하는 친위(親衛)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마오쩌둥의 “2월 병변(兵變)”이다. 1965년 11월 베이징을 떠나 남방에 머물던 마오쩌둥은 현실적으로 남방의 병력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고 국방장관 린뱌오(林彪, 1907-1971)와의 긴밀한 조율 아래 랴오닝성 선양(瀋陽) 군구의 정예부대 제38군을 베이징으로 진격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선양 제38군은 본래 1950년 한국전쟁에 투입됐던 병력으로 전 중국 육군 유일의 기계화 부대였다. 마오쩌둥은 1644년 만주족이 진입했던 바로 그 산해관(山海關)으로 선양 제38군을 진입시켜서 베이징을 포위하는 작전을 짰다. 소련의 침략에 대비하라며 베이징의 수도방위부대를 산시(山西)와 네이멍구(內蒙古)의 중·소와 중·몽의 국경지대로 “천릿길 야영” 훈련을 보낸 후, 마오쩌둥이 베이징의 빈틈을 위협하는 무력 시위를 벌였다는 이야기다. 이 가설의 진위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군에 대한 막강한 장악력이 없었다면 마오쩌둥은 결코 문혁을 일으키고 이끄는 정치권력을 발휘할 수 없었음엔 틀림없다.

마오쩌둥의 권력 기반을 꿰뚫고 있었던 덩샤오핑은 1989년 상황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이야말로 군부의 병변(兵變), 곧 쿠데타를 막기 위한 최선의 묘수라 여겼을 수 있다. 덩샤오핑으로선 군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선 군사 훈련을 넘어 실제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1989년 5월 말부터 톈안먼 진압의 명령을 받은 군부 장성들이 중공중앙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는 조짐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9년 5월 말 군부 일각의 항명... 군 투입 반대 연명 성명서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은 문혁 당시 최초로 군부의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지목됐던 비운의 장성이었다. 홍위병의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투신한 후 불구가 되었음에도 그는 들것에 실려 다니면서 계속 조리돌림을 당해야만 했다. 그의 딸 뤄뎬뎬(羅點點, 1951- , 본명 峪帄)은 1989년 당시 해군 병원 문진과의 주임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중공중앙이 군대를 투입해 시위 군중을 진압하려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뤄뎬톈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뤄뎬뎬은 아버지 뤄루이칭의 군맥(軍脈)을 총동원하여 군부의 중요한 인물들을 곧바로 접촉했다. 1989년 5월 22일 단 하루 만에 그는 1955년 장군 직위를 수여 받았던 해방군 상장(上將, 중장과 대장 사이 계급) 중에서 7명의 서명을 받아 냈고, 곧이어 계엄 지휘부에 톈안먼 광장에의 군대 투입을 반대하는 연명(聯名) 성명서를 작성해 올렸다. 물론 해방군 원로 상장 7인의 연명 성명서 관련 뉴스는 중국 관영 매체에선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다만 무력 진압을 주장해 온 덩샤오핑 등 중공중앙의 강경파는 군부의 반대 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뤄뎬뎬은 그 후 긴급 체포되어 1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한 후에야 덩샤오핑의 딸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지만, 군직은 박탈당했다.)

군부 원로의 반발에 부딪혀 무력 진압을 포기한다면, 중공중앙의 군권 장악력은 급속히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덩샤오핑과 양상쿤은 더욱 강경한 무력 진압을 결정한다. 1983-1988년 덩샤오핑의 아래서 국가주석직을 맡았던 리셴녠(李先念, 1909-1992)의 조카딸 류야저우(劉亞洲, 1952- )는 공군(空軍)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내부 보고서에서 당시 베이징 군구 병력은 지역 사정에 영통(靈通)한데다 학생들과 연계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톈안먼 무력 진압에 적합하지 않다며 다른 지역의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계엄군의 구성이 베이징 부대뿐만 아니라 선양, 지난, 난징의 부대까지 혼합된 다지역의 복합 부대로 구성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병사와 시민 사이의 유대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1989년 5월 말 계엄군을 1차 투입했을 때, 학생과 시민들은 군사 차량을 몸으로 막으면서 굶주린 병사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절대로 시민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 설득했다. 이에 진입이 막혀버린 계엄군은 즉각 군부대를 철수해야 하는 긴급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러한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1989년 6월 초 계엄군을 새로 정비한 후 중공중앙은 새로운 기동 전술을 펼쳐서 톈안먼 대학살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상세한 내용은 차후 당시 계엄군 병사의 진술을 근거로 서술할 예정이다.)

 


대학살 참상 알고도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 시대착오적 친중공 사대주의

톈안먼 대학살을 감행함으로써 덩샤오핑은 당내의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군부의 저항 집단을 선제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으로선 일거양득의 권력 게임이었지만,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비참하게 사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에 대한 비판은 자유와 민주를 중시하는 세계시민의 당연한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짱개주의”를 내세운 게 아니라 낡고 부패한 좌파 기득권 세력이 권력 유지를 위해 시대착오적 “친중공 사대주의”를 내세웠다. 중국 현대사의 참상을 직시한다면 그 누구도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라 칭송하는 비례(非禮)의 우(愚)를 범할 순 없다.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식 외교 석상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그 나라의 지식정보 체계가 마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진정 대통령이 “전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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