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파니파타 (법륜스님)
“출가 수행자는 말 많은 세속인들한테
욕을 먹거나 불쾌한 말을 듣더라도
거친 말로 대꾸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수행자는 적대적인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이기거나 남에게 지는 일이 없다.
남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보았다.”
“오늘 부처님의 말씀은 칭찬에 너무 들뜨지 말고, 비난에 기죽지 말라는 얘기가 요지입니다. 그러려면 남과 비교해서 내가 잘났느니 내가 못났느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났다 하면 우쭐되고, 못났다 하면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이 평등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평등하다는 것은 비교해서 ‘높다’, ‘낮다’, ‘같다’ 이렇게 하지 마라는 뜻이에요. 상대적인 관점을 갖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일체중생이 다 평등하다는 것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각각 가진 모습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
먹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음식을 약으로 먹는다는 것에 목적을 둔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맛있는 것, 더 비싼 것, 더 모양이 좋고 색깔이 좋은 것을 찾습니다. 거기에는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보니까 먹는 것을 갖고 기가 죽고 우쭐되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래서는 괴로움이 끝이 안 난다는 거예요.
입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추위를 피하고 몸을 가리는 것에 목적을 둔다면, 누구나 다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 모양 있는 것, 비싼 것을 따지니까 좋은 옷 입었다고 우쭐되고, 나쁜 옷 입었다고 기가 죽는 고통이 발생하게 됩니다.
사는 집도 마찬가지예요. 잠을 자고 생활하는 최소한의 공간으로 집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다 안정된 집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더 좋은 집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집 문제가 영원히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비교해서 조금 낫다고 우쭐대고, 조금 부족하다고 기죽고, 동등하지 못하다고 불평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에게 비교해서 우열을 논하거나 이기고 지는 문제로부터 해방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요즘 우리가 읽는 경전의 내용이 모두 그런 말씀들입니다.
이런 삶의 문제뿐만 아니고 논쟁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옳으니, 그게 옳으니, 논쟁에서 이겼느니, 졌느니, 비겼느니 이런 걸 따짐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번뇌에서 못 벗어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얘기하십니다. 남이 뭘 먹든, 뭘 입든, 어디서 잠을 자든, 그걸 갖고 번뇌할 필요가 없어요. 비교해서 잘났다고 우쭐대지도 말고, 비교해서 못났다고 비굴하지도 말고, 나는 그냥 내 갈 길을 가면 됩니다.
‘나의 제자 수행자들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보면 그렇게 잘 안 되죠. 산에 사는 동물들도 기가 죽어서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자기가 잘났다고 우쭐대지 않잖아요. 각자 태어난 존재대로 생활을 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늘 기가 죽거나 우쭐댑니다. 인물이 잘났다고 우쭐대고, 키카 크다고 우쭐대고, 재능이 조금 있다고 우쭐대고, 재물이 있다고 우쭐대고, 지위가 높다고 우쭐대고, 옷 잘 입었다고 우쭐대고, 칭찬받았다고 우쭐댑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우쭐대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기가 죽게 되는 거예요.
즐거움이 있으면 반드시 괴로움이 따릅니다. 그걸 갖고 즐거웠다면 그걸 갖고 괴로울 수밖에 없고, 그걸 갖고 우쭐되었다면 그걸 갖고 기죽을 수밖에 없고, 그걸 갖고 교만했다면 그걸 갖고 비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로 나를 삼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놔버리게 되면 비굴할 것 없이 당당해지고, 교만할 것 없이 겸손해지게 됩니다. 항상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본래 집착할 바가 없다
참 쉬운 길인데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이 법의 이치를 탁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경전에는 법문 한 번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내용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아무리 명상을 해서 1선에 들었니, 2선에 들었니, 3선에 들었니, 4선에 들었니 해도, 이치를 깨달아서 우쭐대는 마음과 기죽는 마음에서 벗어난 것보다 못해요. 그래서 수행의 계위에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 5선정을 지나서 수다원과를 얻는 내용이 나오는 겁니다. 이교도의 정진 방법으로는 평생을 노력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인데, 이치를 한마디 딱 듣고 깨달으면 이미 앞서 있을 수 있어요. 쉽게 말하면, 어떤 욕망이 있는데 이를 악 다물고 억제해서 거기로부터 초연한 척하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치를 딱 깨달아 집착을 버리면 노력할 것도 없어집니다.
속으로는 재물과 명품에 집착하면서, 겉으로는 참고 억누르고 초연한 척하는 방식으로는 해탈과 열반에 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도달한 것 같더라도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 되듯이 금방 허물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를 딱 깨달아서 본래 집착할 바가 없는 줄 알아버려서 우쭐댈 것도 없고 기죽을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아 버리면 애쓸 것도 없고 오랫동안 노력할 것도 없어집니다.
도금한 금덩어리를 실제 금인 줄 착각하게 되면, 아무리 잊을래야 잊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나 칼로 그어보고 ‘도금한 거네’ 이렇게 딱 알아버리면 집착할래야 집착할 것이 없어집니다. 기억할래야 기억도 되지 않는 것과 같아요. 불교의 가르침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본질이 무슨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겁니다.
‘나라 할 것도 없고, 내 것이라 할 것도 없고, 그래서 집착할 바가 없구나’
이렇게 알아버리면 자연스럽게 괴로움이 소멸됩니다.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면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시간과 공력만 들뿐이지 얻는 성과는 적습니다. 얻었다고 기뻐하지만 결국 지나 놓고 보면 또 새로운 문제가 발생을 합니다.
칭찬과 비난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
그런 이치를 지금 우리가 읽는 수타니파타에서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칭찬하는 것은 그 사람이 보기에 좋아서 칭찬하는 거예요.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나하고 관계가 있다면, 한 사람은 칭찬하고, 한 사람은 비난하는 것이 맞지가 않잖아요. 칭찬과 비난은 그들의 문제예요. 칭찬하는 것도 그들의 문제이고, 비난하는 것도 그들의 문제예요. 칭찬하면 ‘감사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되고, 비난을 하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 우쭐댈 것도 없고 기죽을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좋게 봐주니 감사할 뿐이고, ‘그의 관점에서 내가 이렇게 비치는구나’ 이렇게 알아서 혹시 내가 개선할 점이 있는지 살펴보고, 개선할 점이 있으면 개선하면 나한테 좋은 일이죠.
그가 오해한 것이라면 그의 문제니까요.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맘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내식대로 고집하라는 게 아니라 자신을 살피되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바깥에 기준을 두니까 사람 지위가 얼마나 높냐, 돈이 얼마나 많으냐, 인물이 얼마나 잘났냐, 아는 게 얼마나 많으냐, 학벌이 얼마나 높냐, 이런 걸 갖고 부러워하기도 하고 사람을 무시도 하는데, 그런 집착으로부터 떠나버리면 남으로부터 기죽을 일도 없고 우쭐 댈 일도 없이 나는 내 인생을 그냥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하루하루 만족스럽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가자는 말씀을 이번 4차 백일 정진 기간 동안 수타니파타를 통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