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아와 기적의 기원 (차명수 지음, 해남)
◇ 기아와 기적의 기원
(차명수 지음, 해남)
이 책은 정통 국사학계에 던진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지적 도발이다. 서문부터 노골적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주장이 있다면 (우익, 좌익 같은 딱지를 붙이려 하기보다) 신뢰할 수 있는 통계와 현실감 있는 모델을 들고 나와 반박하면 된다.’ 감성적 민족주의 같은 것은 내버리고 오직 ‘팩트’로만 승부하자는 거다.
우선 인구변동과 산업현황 등을 담은 다양한 통계를 인용해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의 경제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18∼19세기 내내 양반과 평민을 막론하고 생활수준이 악화된 조선 말기와 비교하며 ‘후기 조선사회는 오늘날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적었다. 여기에는 국사학계에서 성군으로 떠받드는 영·정조 시대가 포함된다.
저자는 붕당정치 붕괴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적 리더십이 땅에 떨어지고 소유권 보호와 계약 이행 등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유지되지 못한 데서 경제 피폐의 원인을 찾고 있다. 반면 조선총독부가 식민 지배를 위해 구축한 제도나 자유주의 경제정책은 1960, 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의 고도성장 원인을 자본 축적이나 높은 교육수준에서 찾는 기존 시도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기술 발전이나 인적·물적 자본 축적이 빠르게 일어난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고도성장의 비밀은 산업혁명과 인구변천을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시킨 역사의 우연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역사의 우연에 식민지 시대가 포함된다.
(서평 : 김두억 명지대 교수, 나라경제 2015년 1월호)
영·정조 시기 농업생산성,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률 얼마나 될까?
근대성장이론을 통해 본 한국 경제의 300년 역사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많은 좌파 경제학자들 은 자신의 전공을 경제사라고 에둘러 표현하곤 했다. 이러한 변장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경제사 연구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가 되면 한국에도 근대경제학이 상당히 확산되지만, 대부분 경제사 연구자들은 근대경제 학을 ‘비역사적’이라고 치부하고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 로 전통적인 주제에 천착했다.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크게 변화한다. 마르크스주의나 역사주의적 관점에서는 전혀 연구되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하지만 경제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현상들을 탐구한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 다. 학자들은 조선시대 양반 지주 가문의 장부 등을 분석해 농업생산성, 지대(地代) 등을 추계함으로써 18, 19세기 농업생산성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이것은 18세기 영·정조 시기에 농업생산성이 증대되고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움트고 있었다는 기존 인식을 정면으로 뒤집는 결과였다.
조선시대 쌀값, 양반들의 평균수명 통해 장기 경제동향 파악
같은 시기에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은 식민지기 우리 나라의 GDP를 추계하는 작업을 몇 년에 걸쳐 수행했다. 1980년대 말 일본 학자들이 내놓은 추계와 비교할 때 정확도 면에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추계는 식민지 조선 경제에 대해 기존 관점과는 매우 다른 여러 가지 양상들을 보여줬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식민지 조선의 경제 성장률이 대공황 등으로 전 세계 경제가 극심한 침체를 보이고 있던 당시 기준에서 보자면 매우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행려사 망자(行旅死亡者)들의 신장 추이 또는 공장의 노동생산성 변화를 측정한 결과 등으로부터도 확인이 됐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 각 도별 쌀값 동향을 파악한 뒤, 이들 간의 가격수렴 정도를 추정한다거나 족보나 개인 기록 등을 이용해서 조선시 대 양반들의 평균수명, 출산율을 측정하는 작 업, 또 조선 후기 산림이 황폐화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연구 등 우리나라 경제의 장기 동향을 파악하는 데 기초가 되는 다양한 장기시계열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꾸준히 이뤄졌다. 이러한 연구성과들 중 일부는 저명한 국제 학술지에 게재되기도 해 세계경제사 연구에도 기여했다.
최근 발간된 차명수 교수의 「기아와 기적의 기원: 한국경제사, 1700-2010」(해남출판사, 2014)는 지난 20 년간 진행된 우리나라 경제사학계의 ‘계량경제사 혁명 (cliometric revolution)’을 종합한 책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한국 경제 통사(通史)들이 역사학적 기반 혹은 마르크스주의 같은 역사주의적 논리 체계를 근거로 쓰였던 것에 비해 이 책은 경제학에 기반 해서 종합을 시도했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으나, 소득·노동·자본·저축 등 이 책의 각 장들은 거시경제학 또는 경제성장론의 기본 얼개에 해당하는 부분 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이 다루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기존 통사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저자는 근대경제성장 이론을 활용해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 간의 관계를 풀어간다.
한국 경제 장기적 변화를 경제학 관점에서 개괄한 통사(通史)
경제학을 기반으로 한 종합이라는 이 책의 시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한국 경제의 장기발전 연구에 존재하는 암묵적 단절의 극복이다. 19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은 경제학에 기반해서 연구가 진행되는 데 비해 해방 전후까지는 역사주의적 틀에 기반해서 연구가 이뤄졌다. 이러한 이분법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방식으로 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둘째는 보편성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근대성장이론에 기초해 경제의 장기변동을 이해하는 문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리 학계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우리는 다르다’ 또는 ‘한국사는 특수하다’라는 입장 을 취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대응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역사는 특수하다. 하지만 많은 특수한 개별 국가들의 역사들 간에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야말로 보편성을 지향하는 노력이며, 보편성을 확인해야 특수성도 진정 의미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본 연구는 최근의 세계사 연구들 그리고 경제학의 보편적 논리에 기초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세계사 속에 위치지을 수 있는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해주는 귀한 작업이다.
이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먼저, 필자가 보기에 이 책에 포함된 많은 내용들은 해당 내용과 관련된 일정 수준의 강의를 듣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상당 부분은 사실상 학술 논문에서나 적절할 법한 논의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책 전반에 걸쳐 회귀분석표를 그대로 제시한 것은 권위주의적이라고 느껴지기조차 한다. 이러한 부분들을 보면 저자가 상정하는 독자들은 저자의 언명과는 달리 교양을 지닌 일반 독자가 아니라 대학의 한국경제사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이 아닐까 싶다. 즉 외형과는 달리 내용 면에서는 일반교양서보다는 대학 강의교재에 가까워 보인다는 생각이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좋은 연구가 제대로 된 큰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반면 훌륭한 연구는 큰 그림, 즉 우리 나라 역사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에 대한 일반적 양상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많이 배출될 수 있다. 통사와 개별 연구 간의 이러한 관계를 고려할 때, 그동안 한국 경제의 장기적 변화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개괄하는 통사가 나오지 못한 것은 경제사 연구의 걸림돌이자 연구 부족의 결과 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족한 기초연구나마 엮 어서 최선의 큰 그림을 그리는 선구적 업적이 나온다면, 이 큰 그림이 제시하는 주요 문제를 탐구하는 좋은 연구가 따르고, 이것을 바탕으로 역사의 본질을 보다 잘 드러내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선순환이 이뤄져 학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차명수 교수는 이러한 선순환을 창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부족하나마 기존 연구들을 근거로 큰 그림을 그리는 것, 즉 한국 경제가 지난 3세기 동안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종합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향후 한국경제사 연구의 발전과 확산에 크게 기여할 것을 그리고 많은 독자들의 관심이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