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시인(詩人) 이야기

신동엽 시인 (1930-1969)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1. 9. 8. 12:13

I. 신동엽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

 

     (전경인게시판 - 신동엽 관련 학술 연구 및 활동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게시판)

    http://www.shindongyeop.com/sdy/theme/sind/html/business/01.php

 

이 글은 계간지 『푸른사상』 2019년 봄호와 여름호에 실린 "신동엽 시인 타계 50주기 특별 대담"의 일부입니다. 

 

 

(1)

 

맹문재 : 안녕하세요. 신동엽 시인 타계 50주기를 맞이해 시인의 아드님과 대담을 갖게 되어 매우 의미가 깊네요. 신동엽 시인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분이므로 한 번에 정리하기가 힘들 것 같아 이번에는 인병선 선생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말씀을 들을까 해요. 인병선 선생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시는데, 어떠신지요? 

신좌섭 : 연세 탓인지 기력이 약해지셔서 긴 시간 대화를 하는 것은 힘듭니다. 금년에 85세입니다만, 비슷한 연세의 분들 중에 아직 활동적인 분들도 많은데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신 탓인지 약해지셨네요. 기억력도 다소 떨어지시고. 금년 아버님 50주기 행사가 여러 곳에서 있는데,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만 가려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아요. 

맹문재 : 내내 건강하셔야 할 텐데요. 저는 언젠가 청담동에 있는 짚풀생활사박물관에 가서 인병선 선생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그 뒤 뵐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어느 때부턴가 뵐 수 없어 궁금해 하고 있었어요. 

자료에 따르면 인병선 선생님은 1935년 평안남도 룡강군에서 태어나 보통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동안 오빠가 의용군에 끌려가고 아버지는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아버지는 농업경제학의 권위자인 인정식 동국대학교 교수였지요. 그 상황에 대해 말씀을 들은 것이 있는지요? 

신좌섭 : 어머님은 당신의 오빠(저에게는 외삼촌)에 대해서도 특별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갖고 계십니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어머님은 외삼촌(인병완, 1930년생)이 본인을 대신해서 의용군에 들어갔다고 기억하고 계세요. 어머님이 1935년생이니까 11살이던 1946년에 일가족이 북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는데, 아직 국민학교를 마치지 않아 혜화국민학교에 들어갑니다. 혜화국민학교를 마치고 이화여중에 들어갔는데, 1950년 6월말~9월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이화여중(당시에는 6년제 여자중학교) 운동장에서 의용군 모집 선동 연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무슨 생각에서인지 어머님이 손을 들었답니다. 그런데 “너는 아직 어려서 의용군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지요. 집에 돌아와 이 말을 하자 오빠가 “너는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나서야 하면 내가 나선다.”고 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외삼촌이 의용군에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억이 아주 깊은 미안함으로 남아 있지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일제강점기 농촌경제학자였던 외할아버님에 대해서는 그리움과 섭섭함이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움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여자들만 서울에 남겨놓고 북으로 가신 것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겠지요. 외할아버님은 납북이 아니라 월북이었습니다. 원래 사회주의자였고 당시 정국에서 신념을 따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념과는 별도로 여자들은 서울에 남겨두고 싶었겠지요. 남쪽에 남은 외할머님과 어머니는 1.4 후퇴 때 제주도로 피란을 가게 됩니다. 

외할아버님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리지요. 10여 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을 남기셨는데, 농촌경제학자,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이론가로서 수차례 투옥되고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을 중시하는 견해, 어떤 이유에서든 일제 말기에 친일 성향의 글들을 쓴 것 때문에 친일학자로 지탄하는 견해가 공존합니다. 때문에 외할아버님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해방 후 고향을 떠난 것은 친가가 지주 집안이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인데, 막상 남한에 내려와서는 ‘빨갱이의 딸’이라고 피해를 볼까봐 아버지를 숨기고 살아야 했고, 민주화 이후에는 아버지가 ‘전향 지식인’으로 낙인찍혀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굴레를 좀 덜어낸 것이 1992년입니다. 『인정식 전집』(1~5)을 펴낸 것인데, 어머니로서는 큰 용기였지요. 경제학을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외할아버님의 저서, 논문을 전국 헌책방을 뒤져 찾아내 영인본으로 묶었습니다. 전집에는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이 발문을 쓰셨지요. 어머니에게 『인정식 전집』의 발간은 복잡한 감정의 대상이었던 외할아버님을 한 발 떨어져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전환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맹문재 : 인병선 선생님은 1·4 후퇴 직전 어머니와 단 둘이 제주도로 피란 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는데,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눈에 선하네요. 그곳 생활에 대해 들으신 것이 있는지요? 

신좌섭 : 제주도에는 3년간 머물렀다고 하는데, 원래 목적지는 부산이었답니다. 산문집 『벼랑 끝에 하늘』을 보면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 사람들이 운항하는 전차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으나 넘쳐드는 피란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갑자기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려 버렸답니다. 

외삼촌은 1950년 여름 무렵 의용군에 들어갔고 외할아버님도 월북한 상태였습니다. 『인정식 전집』의 연보를 보면 1953년 월북한 것으로 나오는데, 어머니 기록에 의하면 1․4 후퇴 이전에 북에 가신 것입니다. 곧 돌아온다고 말씀하셨다니까 실제로 1․4 후퇴 이후에 서울에 다시 오셨을 가능성도 있지요. 1953년은 최종 월북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에서의 생활이 궁핍했을 것이야 익히 짐작할 수 있지요. 먹고 살려고 엿장수를 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하셨습니다. 외할머님이 엿이라도 떼다가 팔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신 모양입니다. 워낙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셨겠지요. 그런데 아침에 시장에서 엿을 떼어 엿판에 들고 제주 읍내를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팔리지 않아 저녁에는 엿에 까맣게 때가 타서 팔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하셨지요. 외할머님이 기독교를 믿으신 것은 그때였습니다. 기댈 곳이 없었겠지요.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돈암동의 한 교회를 다니셨는데, 매일 새벽 기도를 나가셨지요. 

 외할머님은 이북 출신 특유의 생활력으로 가난한 딸과 사위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도 하셨습니다. 당시 대개의 여성이 그랬듯이 학교를 다니지 못했는데 아주 비상한 기억력과 총기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우리 삼남매가 “할머니 학교 다녔으면 맨날 우등했겠다”고 놀리곤 했지요. 

맹문재 : 그 외할머니께서 언제 돌아가셨는지요? 외할머니의 다른 친척은 없는지요? 재미있는 일화가 있으면 좀 들려주세요.  

신좌섭 : 제가 예과 2학년이던 197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964년경 정릉 흥천사 인근에서 회갑연을 한 것으로 기억이 남아있으니까 75세쯤 되셨을 때 돌아가신 것이지요. 

이북에서 함께 내려온 친척이 몇 분 계셨어요. 외할머님과는 종종 왕래가 있었는데, 이분들만 만나면 전형적인 이북 말씨가 튀어나오곤 했지요. 외할머님은 워낙 부지런하고 검약한 분이라서 시장에서 상인들이 버린 우거지를 주워 오시곤 하셨어요. 그것으로 우리들 된장국을 끓여주셨지요. 겨울에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으셔서 늘 스스로 ‘독일제’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독일제’가 튼튼함의 대명사였지요. 

맹문재 : 참으로 대단한 어른이셨네요. 인병선 선생님은 나중에 서울로 전학 와서 고등학교 3학년을 다녔고 공부를 열심히 해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곧 신동엽 시인과 결혼하게 되어 학교도 그만두고 시인의 고향인 부여로 내려갔어요. 엄청난 결심을 하신 것인데, 그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신동엽 시인의 미발표 산문집인 『젊은 시인의 사랑』에 실린 편지들을 보니 1953년부터 교제한 것으로 보이네요. 

신좌섭 : 이화여고 졸업반이던 1953년부터 교제를 하셨지요. 아버님이 그해 봄 대전에서 전시연합대학으로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친구 소유의 서점(돈암동 사거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책을 사러 왔던 어머님과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요. 

당시 외할머님은 돈암시장에서 작은 포목상을 하던 때이고 집도 근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46년 북쪽에서 서울로 내려왔을 때에도 혜화국민학교를 다녔으니까 내내 혜화동, 돈암동 일대에 사셨던 셈입니다. 

아버님도 돈암동 집 근처 서점에서 어머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서점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돈암동 사거리에 서점이 있었을 만한 곳은 현재 성신여대 사거리 국민은행 길 건너 정도(아리랑 고개 방향)였을 거예요. 그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아침저녁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길 건너 국민은행 쪽보다 소규모 상점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을 처음 만나고 이듬해 1954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입학했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배우는 사변적인 서양철학을 아버님의 독특한 세계관이 뒤덮어버린 셈이었지요. 또 1954년 여름방학 때 아버님을 따라 부여에 처음 다녀오고 공부에 대한 생각이 점점 멀어져 간 것 같아요. 그해 가을 아버님이 동두천에서 육군 6사단 정훈부 군복무를 시작했는데, 2대 독자라는 이유로 이듬해 의가사 제대를 했어요. 그 뒤 1955년 가을 약혼을 하고, 1956년 결혼식을 올렸지요. 여러 연보에 1957년 결혼으로 되어 있는데, 문학관에도 남아 있는 청첩장을 보면 1956년이 맞습니다. 

학교를 중퇴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사랑이 첫째 이유였겠지만, 부여를 다녀오면서 당시 한반도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점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이런 곳에서 철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회의가 들었겠지요. 전쟁 중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오빠와 월북으로 헤어진 부친에 대한 그리움을 아버님에게서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이 외삼촌과 1930년 생으로 동갑입니다. 외삼촌은 어머니나 외할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엄청나게 똑똑하고 지적인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였고요. 또 주위에서는 어머니를 ‘빨갱이 딸’이라고 백안시하는 분위기였으나, 아버지가 외할아버님을 진심으로 존경한 것도 호감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어머니 친정 쪽에서는 두 분의 결혼에 반대가 심했습니다. 월남민들이라서 친척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타향살이니 서로 뭉쳐 살아야 하는 입장이었는데도, 어머니는 결혼을 반대한 분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오래도록 소원하게 지내셨습니다. 친척들이 반대한 것은 신랑 집안이 너무 가난하고 당시까지도 아버님이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어머니의 산문집 『벼랑 끝에 하늘』을 보면 부여 시댁살림이 너무 어려워서 한동안 ‘이화양장점’을 운영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양장점 자리를 기억하는 친척 분이 있는데, 그분에 따르면 부여터미널 맞은편 현재 백마약국 자리(구아리 254)라고 합니다. 양장점을 생각해낸 것은 외할머님이 포목상을 하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맹문재 : 두 분의 결혼 시기를 바로잡아주셔서 다행이네요. 지금까지 인병선 선생님의 23세 때(1957년)로 알려져 있거든요. 결혼한 뒤 신동엽 시인은 맏딸을 얻었고, 충남 보령군에 있는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어요. 그런데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어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인병선 선생님은 아이를 데리고 서울 돈암동으로 올라가 한동안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어요. 1959년 1월 28일까지의 편지들을 읽어보니 그 사정이 그지없이 애절해요. 그때의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신좌섭 : 제가 태어나기 전이니까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는 누이입니다. 2살 무렵이었겠지요. 결혼해서 첫딸을 낳은 뒤 떨어져 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어요? 당시 아버님 편지를 보면 그리움이 절절합니다. 

어머니의 산문집 『벼랑 끝에 하늘』에도 나오지만 당시에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폐디스토마를 폐결핵으로 오인한 탓일 겁니다. 아버님의 지병에 대해서 다소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1951년 국민방위군 대구수용소를 빠져나와 귀향할 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민물 가재를 잡아먹어 간디스토마에 걸렸고, 이것이 나중에 간암의 원인이 되었다”는 글들이 있습니다만, 붕어나 잉어 같은 민물 생선은 주로 간디스토마, 민물 가재나 게는 주로 폐디스토마의 원인이 되지요. 아버님이 아침상 앞에서 종종 언급하신 것은 민물 가재이고, 따라서 1958년 각혈의 원인인 폐디스토마가 그때 생긴 것일 거예요. 돌아가실 때의 사망 원인인 간암은 별도의 지병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30세(1959년)에 필명 석림(石林)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을 했어요. 입선 작품은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였어요. 작품이 게재된 신문을 받아든 인병선 선생님께서는 뒷산으로 올라가 몇 시간 동안 우셨다고 「당신은 가신 분이 아니외다」라는 산문에서 밝히셨어요. 왜 그렇게 기쁘셨을까요? 남편이 시인이 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요?

신좌섭 : 시인으로 세상에 인정받게 되었다는 기쁨이 무엇보다도 컸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버님과 결혼하고 나서 친정 친척들로부터 서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드디어 내 남편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는 기쁨이 아니었을까요?

맹문재 : 인병선 선생님의 아호가 추경(秋憬)이에요. 신동엽 시인이 편지를 쓸 때 부르던 이름인데, 어떤 의미인지요?

신좌섭 : 가을 추, 그리워할 경인데, 글쎄요.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아호로서는 다소 쓸쓸한 느낌을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만난 것이 1953년 무렵이니까 10대 후반, 20대 초반 어머님의 상황이나 정서가 그랬을 거예요. 당시 어머님의 사진들을 보아도 그런 느낌이 들지요.

맹문재 : 인병선 선생님께서 신동엽 시인의 작품들 중에서 어떤 작품을 애송하셨는지요?

신좌섭 : 주위에서는 으레 「껍데기는 가라」나 「산에 언덕에」를 낭송해달라고 했겠지요. 많은 문인들이 두 가지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아마도 예언자적인 면모를 보이는 「빛나는 눈동자」에 가장 공감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 시는 일종의 자화상으로도 파악됩니다. 선지자, 예언자적인 이런 모습에 사실 반하신 것이고요. 제가 전문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빛나는 눈동자

                         신동엽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魂)을
갈가리 찢어
꽃풀무 치어 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의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孤孤)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의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오, 인간 정신 미(美)의
지고(至高)한 빛.

 

맹문재 : 첫 시집 『아사녀』(문학사, 1963)에 수록된 작품이지요. 다시 읽어보니 어두운 시대에 맞서고자 하는 시인의 지사적인 정신이 느껴지네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등단한 해에 맏아들 좌섭도 얻어 집안의 경사가 겹쳤어요. 신동엽 시인은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와 교육평론사에 취직했고, 그 이듬해에 명성여고의 교사 생활을 하셨어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경제 활동을 하신 것으로 보여요. 명성여고 교사 생활과 관련해서 들은 말씀이 있는지요?

신좌섭 : 아버지가 가장 존경한다고 한 분이 할아버님이십니다. 할아버님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어떻게든지 가족을 잘 돌보려고 애쓰셨지요. 특히 중요한 순간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할아버님과 마찬가지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가정을 돌보고 싶어 하셨을 거예요. 어머님이나 누이의 회고에도 나오지만 아버지의 저희 3남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어요.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한다고 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리는 삶은 용납하기 싫어하셨을 거예요. 그렇지만 결코 넉넉할 수 없었지요. 당시 표현으로 ‘쥐 꼬리만한 봉급’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사실 큰 일이 있을 때는 포목상을 하던 외할머님의 도움을 종종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명성여고 교사 생활은 즐겁게 하신 것으로 기억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고 누이가 「대지를 아프게 한 못 하나 아버지 얼굴 가에 그려놓고」라는 글에서 회상했듯이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뭔가 문제의식을 갖고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교육을 하셨지요. 국어라서 더 그랬겠지만, 시험문제도 으레 주관식이었고요. 어쩌면 당시 인생 최고의 시기를 누리셨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지난 가을 방송한 팟캐스트 「내 마음 끝까지」에서도 제가 언급했습니다만, 몇몇 제자 분들은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도 집으로 종종 찾아와 우리들과 놀아주곤 했습니다. 주로 문예반 학생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중 한분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교류가 있었어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33세(1962년)에 둘째 아들 우섭도 얻어요. 1녀 2남의 자식을 두게 되는데, 정섭 따님과 둘째 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신좌섭 : 누이 정섭은 서울대학교 미대를 졸업하고 독일 카셀대학에서 다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 화가로 활동하다 1990년대 초 캐나다로 이민 가 살고 있습니다. 사실 누이는 감수성이 예민해서 1970~80년대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견디지 못했어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시대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재능을 잘 발휘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동생 우섭이는 대학을 마치고 조그맣게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예술적 재능이 있는 편인데, 소박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타계합니다. 39세의 나이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워요. 인병선 선생님께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겠지요. 그런데 다행히도 잘 이겨내시고 짚풀 문화 연구의 대가가 되셨어요. 짚풀 생활사를 평생 동안 조사하고, 채록하고, 수집하고, 저서를 간행하고, 짚풀생활사박물관까지 세우셨어요. 또한 시인이 되어 『들풀이 되어라』라는 시집도 간행하셨어요. 그와 같은 생활을 곁에서 보셨을 텐데 소개를 부탁드려요.

신좌섭 : 어머님이 짚풀생활사박물관을 개관한 것은 1993년이지만, 짚풀문화에 관심을 갖고 답사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유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무렵부터입니다. 1969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출판사 교정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등 늘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70년대 초부터 경기도 마석과 대성리 중간쯤에 있는 새터라는 곳에서 음식점을 시작했지요. 이것이 장사가 제법 되어서 1980년경에는 기본적으로 먹고살만한 형편이 되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좀 생기니까 안에 억눌러놓았던 욕구가 분출하여 선불교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좋은 카메라를 사서 주변의 사물들을 사진에 담기 시작하셨습니다. 타고난 감각도 있으셨고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물들을 찍으니까 제법 좋은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83년 무렵 민학회(民學會) 답사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라져가는 농촌 생활상을 카메라에 담고, 짚으로 만든 농촌 생활 용구들을 수집하고 증언을 채록하기 시작했지요. 이것들이 어느 정도 축적되자 1993년 청담동에 박물관을 개관했는데, 당시만 해도 작은 규모의 전문박물관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입니다. 그 때문에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았고, 다른 소장가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짚풀문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지와 농촌공동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아버지, 농촌경제학자였던 외할아버님에 대한 그리움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외할아버님은 일제강점기 농촌경제학의 권위자였는데 학문적으로만 농촌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농촌문화에 깊은 애정을 갖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속에 내재해 있다가, 좀 여유가 생기니까 치솟아 오른 것이지요.

이런 연구 결과들을 모아서 『짚 문화』, 『풀 문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짚풀문화』등의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짚풀문화와 토착 생활사에 대한 관심은 나중에 중국 운남성 소수민족에 대한 관심으로도 옮아갑니다. 1992년 태국 치앙마이와 중국 운남성을 답사해서 그곳에 사는 소수민족의 생활상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삶의 모습을 추적했지요. 1천 3백여 년 전 동아시아로 흩어진 고구려, 백제 유민(디아스포라)의 흔적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서 『우리 민족 찾아 아시아 대장정』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농민의 가마니 생산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모아서 『가마니로 본 일제 강점기 농민 수탈사』라는 자료집을 묶어 내기도 했는데, 짚으로 엮은 가마니라는 것이 농촌 수탈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입니다.

맹문재 : 짚풀생활사박물관은 현재 비영리법인으로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병선 선생님의 역사의식 및 공인 인식과 집념이 그저 존경스럽습니다. 1982년에는 유족과 창작과비평사 공동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이 제정되어 지금도 시행되고 있어요. 소개를 좀 부탁드려요.

신좌섭 : 박물관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소규모의 비영리법인을 설립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박물관, 미술관이 1천 개가 넘지만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곳이 아니면 창립자 사후에 지속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박물관 창립자들은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이익이 창출되는 것도 아니어서 후손들은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염려하신 것이지요.

1982년에 처음 ‘신동엽창작기금’을 제정했어요. 지금은 ‘신동엽문학상’이지만 2003년 21회까지는 ‘창작기금’이었습니다. 아버님이 펜클럽 작가 기금을 받아 서사시 「금강」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이 배경이 되었지요. 사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일정 기간 작품에만 전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따라서 아버님이 펜클럽 작가 기금을 받아서 「금강」을 집필한 것처럼 좋은 기회를 후배 문인들이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머님과 ‘창작과비평사’가 함께 시작한 일입니다. 금년 2019년이 벌써 37회네요.

맹문재 : 저는 이 세상의 모든 위인들 뒤에는 헌신한 분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전태일 열사 뒤에는 이소선 어머니가 있었고, 헬렌켈러 뒤에는 설러번 교사가 있었듯이 신동엽 시인의 뒤에는 인병선 선생님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기원해요. 바쁘심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해요.

 

 

 

(2)

 

 

맹문재 : 안녕하세요. 두 번째 대담을 갖게 되어 감사해요. 지난번에는 신동엽 시인과 아내(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신동엽 시인의 친가 쪽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신동엽전집』(창작과비평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대담에서 제가 언급하는 기록들은 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에요. 신동엽 시인의 부친 및 모친의 존함과 생몰 연대, 그리고 생활 형편은 어떠하였는지요? 

신좌섭 : 이번에 간행된 『신동엽 산문전집』(창비)에 수정했는데, 아버님의 출생 일시는 1930년 음력 윤 6월 10일 축시(丑時)입니다. 양력으로는 8월 4일이지요. 8월 18일은 호적상의 생일입니다. 

할아버님은 평산(平山) 신씨(申氏) 연순(淵淳)이고 1894년 갑오년 음력 8월 9일생입니다. 97세까지 사셔서 1990년 음력 8월 7일에 돌아가셨습니다. 평소에 담배는 하셨지만, 술은 아예 드시지 않고 소식(小食)하는 습관이 몸에 밴 분이었습니다. 부여군에서 주는 장수상(長壽賞)까지 받으셨지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21년간 부여 동남리 집에서 먼저 떠난 외아들의 흔적을 지키면서 사셨지요. 

할머님은 광산(光山) 김씨(金氏) 영희(英嬉)이고 1910년 경술년 5월 11일생입니다. 1971년 5월 19일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지 2년 뒤인데, 외아들을 잃고 상심의 세월을 보내셨지요. 할머님은 손맛이 좋아 술 담그는 솜씨가 뛰어나고 흥도 많으셨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부소산 고란사에서 친구분들과 어울려 연회를 즐기던 장면도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님 기록에 망처(亡妻)로 밀양 박씨(密陽 朴氏)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을 낳으신 광산 김씨 할머니는 후처인 것이지요. 

지금 문학관 앞의 집 주소는 동남리 501-3번지인데 원래 아버님이 태어나신 곳은 동남리 294번지입니다. 지금의 궁남지 사거리에서 궁남지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 두 블록 들어가 있는 곳이지요. 그렇지만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어린 시절 사진의 배경이 현 문학관 앞의 집 501-3번지인 것으로 볼 때 동남리 294번지에 거주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태어난 곳을 뜻하는 생가 터는 294번지이고, 현재 문학관 앞에 있는 집은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옛집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맹문재 : 부친 신연순의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신좌섭 : 할아버님은 외아들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경상북도 금릉(金陵)에 살았는데, 부친 신현철(申鉉喆)을 따라 경기도 광주, 충남 서천 등을 전전하다가 부여군 옥산면을 거쳐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정착했다고 하지요. 한때 농사를 지어보기도 했지만, 부칠 땅이 없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모시 장사를 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다가 40대 후반부터 임천면(林川面)에서 대서사(代書士)를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부여군청 옆으로 자리를 옮겨 사법서사 일을 돌아가실 때까지 하셨지요. 할아버님의 친필 글씨를 갖고 있는데 정자체에 아주 꼼꼼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성격도 글씨체처럼 차분하고 꼼꼼하셨지요. 

맹문재 : 모친 김영희의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신좌섭 : 할머님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가 한 분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님의 손위 처남이었던 셈인데, 197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큰 아들이 지금 부여에서 인테리 금방을 하는 김동수 사장입니다. 김동수 사장께서 할아버님을 고모부라고 불렀지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의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산문집에 실린 편지들을 읽다보니 화숙이, 을숙이 여동생이 있는데요. 

신좌섭 : 바로 아래 ‘명숙, 동숙, 화숙, 을숙’ 4명의 여동생이 있지요. 동생들에 대한 아버님의 사랑이 무척 깊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바로 아래 명숙, 동숙 고모는 동선동 서울집에 상당 기간 함께 기거하면서 살림살이를 도왔고 아버님은 동생들의 취직과 결혼에 신경을 많이 쓰셨지요. 막내인 을숙 고모는 현재 짚풀생활사박물관 일을 돕고 계시고, 다른 고모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아 자주 만나지는 못합니다. 

할아버님의 첫 번째 부인인 밀양 박씨 슬하에 ‘동희’라고 딸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에게는 이복누이이지요. 1990년 할아버님 장례식에 오셨는데 부산에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1942년(13세)에 부여국민학교를 졸업했지요. 7살 때 입학한 것으로 보이는데 학교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신좌섭 : 문학관에 보존되어 있는 당시 통지표를 보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국민학교 때의 것은 아니지만 몇몇 노트를 보면 필기 습관이 아주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개념들의 체계를 도식화하고 요점을 짚어 설명해놓은 재미있는 노트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이나 할머님 기억에 의하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혼자서 논둑길을 걸으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습관을 갖고 계셨다고 합니다. 성격은 다소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편이었지요. 

국민학교 5학년(1942년) 때에는 내지성지참배단(內地聖地參拜團)에 부여국민학교 대표로 뽑혀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충남 지역 각 학교에서 선발된 일본인 학생들과 보름 동안 일본을 다녀오셨지요. 

1930년생이니까 국민학교 때 한글을 배울 기회는 없었는데, 집에서 따로 공부를 하신 모양입니다. 지금도 생존해계시는 동창분이 아버님에게 한글을 배워 깨쳤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1953년(24세)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어요. 사학을 전공하게 된 연유나 목표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신좌섭 : 아버님은 부여국민학교를 마치고 1945년 4월 전주사범학교에 들어갔는데, 1948년 동맹휴학 가담으로 퇴학을 당한 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셨던 것 같습니다. 1949년 7월 공주사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다니지 않고 그해 9월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서 1953년 대전 전시연합대학을 통해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64년에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지만,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셨습니다. 

그래서 학력을 요약하자면 부여국민학교, 전주사범학교, 단국대 사학과를 다니신 것인데, 국문과에는 공주사대와 건국대 두 번이나 들어갔다가 그만두신 셈이지요. 정작 국문과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느꼈을까요? 아무튼 전쟁 중이라고는 하지만 사학과는 충실히 마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의 시에 표현된 역사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단국대학교가 독립운동 하던 분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인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고요. 당시 단국대 사학과 교수진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신동엽 시인이 사학과에서 수학한 것은 역사의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신동엽 시인은 1957년(28세) 인병선 여사와 결혼을 했고, 그해에 맏딸 정섭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실제로 직업이 없는 상태로 결혼을 한 셈인데 어떻게 가정생활을 영위하셨는지요? 

신좌섭 : 연도 기록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이번에 출간된 『신동엽 산문전집』에서 고쳤습니다. 결혼하신 것은 1956년 10월이고 누이가 태어난 것이 1957년입니다. 

결혼 초에 어머니가 부여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먹고살 궁리를 하다가 ‘이화양장점’을 차린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요. 양장점은 몇 개월 정도 운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돈벌이를 위해 당시 부여에 있던 큰 성냥공장에 성냥 재료로 공급할 미루나무를 키우면 돈이 될까 등등 많은 궁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밑천이 없는 상황에서 허황된 생각이었겠지요. 

누이가 태어나자 여러 인맥을 통해 구직운동을 해서 1958년 6월 충남 보령의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취직이 됩니다. 그래서 아버님, 어머니, 누이 세 사람이 보령에 가서 사는데, 익숙하지 않은 산골생활이 무척 팍팍했던 모양입니다. 아버님 시 중에 「얼마나 반가웠으면」이 그 당시에 쓴 것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궁둥방아를 찧는 것은 갓 태어난 누이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나 돌아올 때마다 
해햇거리며 궁둥방아를 찧어쌓을 것이랴. 

이웃과 이웃 서로 등 대고 지내는 각박한 소읍 
찬바람 속에서 오직 마음 통하고 지내는 사이는 
우리 세 식구뿐이었기에. 
   
바람에 쓸려 어쩌다 흘러들어간 산촌 
장날이면 헤어진 장꾼들만 오가는 길갓방 
우리 셋은 싸움의 터전을 거기 잡고 
양식을 물어들이기 시작했던 그날에. 

앉혀만 놓아도 십상 넘어지기 좋아하는 
까아만 그 두 눈 속에 
인적 드문 산골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오는 내 모습이 
얼마나 반가웠으면 나 돌아올 때마다 
해햇거리며 세상 모르고 궁둥방아를 찧어쌓을 것이랴. 

―「얼마나 반가웠으면」전문 


그런데 그해 가을 폐디스토마가 발병하여 아버님은 계속 각혈을 하게 됩니다. 교장선생님께서 아버님이 위독하다고 부여에 편지를 보냈지요. 백방으로 조치를 해도 낫지 않아 결국 어머니와 누이는 서울 외할머니 댁으로 올라오고 아버님은 학교를 사직하고 부여로 돌아가 투병과 창작에 몰두합니다. 결핵이라고 여겨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다행히도 그 이듬해인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하고, 그해 봄 외할머니 집에서 멀지 않은 돈암동 개천가에 셋방을 얻어 가족이 합치게 되었지요. 그 후에는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합니다. 1960년 월간 교육평론사에 취직한데 이어 1961년 명성여고 교사로 취직해 돌아가실 때까지 재직하지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의 등단 얘기를 좀 더 듣고 싶네요. 신동엽 시인은 1959년(30세)에 필명 석림(石林)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했어요. 입선 작품은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였지요. 그런데 투고한 작품이 20행 이상 삭제되었고, 작품의 낱말들도 바뀐 채 신문에 게재되었어요.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신동엽 시인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말씀이 없었는지요? 

신좌섭 : 김형수 시인은 이것을 “K-Pop 경연대회에 판소리를 들고나간 격”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했던데,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신춘문예에 그런 장시(長詩)를 내는 사람이 있나요? 신춘문예 발표가 난 후 1월 4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퍽 섭섭한 게 하나 있소. 내가 보낸 시의 그 모습이 아니구료. 내가 가장 생명을 기울여 엮은 절정을 이루는 시구들이 근 40행이나 삭제돼 있구료. 그리고 내가 정성을 들여 개성을 표현한 낱말 하나하나가 평범한 말로 교환이 돼 있고. 그러나 이것도 그들의 뜻을 나만은 이해될 것 같기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으오.”라고 쓰고 있어요.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못내 섭섭했던 것은 틀림이 없었지요. 그래서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서둘러 내면서 여기에 삭제, 수정되기 전 원래의 시를 실었어요.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신춘문예 심사과정에서 수모를 당했지만 아버님은 이 시를 무척 아끼셨습니다. 시집 『아사녀』의 3부에 실은 것도 그렇고 어떤 분에게 영문 번역을 의뢰한 일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대표작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등단한 해에 맏아들 좌섭도 얻었어요. 집안의 경사가 겹쳤지요.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와 월간 교육평론사에 취직했어요. 그리고 몸담고 있는 출판사에서 『학생혁명시집』을 엮었어요. 그 시집에 당신의 시 「아사녀(阿斯女)」를 수록했어요. 4·19혁명의 의지를 담고 있는 작품인데 다음과 같아요. 교육평론사에 근무할 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요? 


모질게도 높은 성(城)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 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에서 읍 
학원(學園)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 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餓鬼)들은 
그예 도망쳐 갔구나. 
  
―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旗幅)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보았나? ―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4월 19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 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운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三韓)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운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오른 아사달(阿斯達) 아사녀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 
쥐구멍을 찾으며 
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 
흘러가버리려마, 너는. 
오욕(汚辱)된 권세 저주받을 이름 함께.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 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 개나리 · 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 해 바닷가의 촌 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怒濤)처럼 일어난 이 새 피 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億劫)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戰士)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아사녀(阿斯女)」 전문
 

신좌섭 : 『학생혁명시집』이 나온 것이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입니다. 원래 책 제목은 『혁명기념현상당선(革命記念懸賞當選) 학생혁명시집』으로 되어 있지요. 부여 문학관에 초판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아버님은 4·19에서 큰 희망을 보셨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었구나/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하는 구절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지요. 저야 한 살 때니까 아무 기억이 없지만,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4·19 당시 아버님은 매일 온몸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흥분한 얼굴로 집에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는데,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때였을 것입니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상기된 얼굴로 동선동 집에 들어오시던 아버님이 기억납니다. 

흥미로운 것은 1960년 1월 월간 『교육평론』에 실은 시가 「싱싱한 동자(瞳子)를 위하여」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4월 혁명을 예언하고 있는 것 같은 작품입니다. 


도시에 밤은 나리고 
벌판과 마을에 
피어나는 꽃불 
   
1960년대의 의지 앞에 눈은 나리고 
인적 없는 토막(土幕) 
강이 흐른다. 
   
맨발로 디디고 
대지에 나서라 
하품과 질식 탐욕과 횡포 

비둘기는 동해 높이 은가루 흩고 
고요한 새벽 구릉 이룬 처녀지에 
쟁기를 차비하라 

문명 높은 어둠 위에 눈은 나리고 
쫓기는 짐승 
매어달린 세대(世代) 

얼음 뚫고 새 흙 깊이 씨 묻어두자 
새봄 오면 강산마다 피어날 
칠흑 싱싱한 눈동자를 위하여. 

―「싱싱한 동자를 위하여」전문 


맹문재 : 시를 읽어보니 놀랍게도 정말 그러하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1년(32세) 명성여자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어요. 작고할 때까지 교편생활을 하셨는데, 학교생활에 대해서 좀 들려주세요. 

신좌섭 : 그 시기는 아버님 일생에서 정착기이자 황금기였습니다. 불교 이념으로 설립된 학교였으니 정서적으로도 어울렸을 것이고, 야간부 교사라서 출근에도 여유가 있었지요. 당시 학교가 종로구 관수동에 있었는데, 얼마 전 신동엽학회 회원들과 답사를 해보니 돈암동 집까지 걸어서 퇴근하더라도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입니다. 종로 5가를 거쳐 올 수 있는 경로이기도 하고요. 오고가는 길의 지명과 흔적이 시에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무척 즐기셨고 학생들도 많이 따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학생들이 너무 따라서 어머님이 경계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돌아가신 후에도 몇몇 학생들이 종종 찾아와 서글피 울다가곤 했습니다. 오페레타 「석가탑」 출연진도 전부 명성여고 학생들입니다. 학생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무척 즐기셨지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의 학교 생활이 눈에 선하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3년(34세)에 시집 『아사녀』(문학사)를 간행해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데다가 등단한 지 이른 시기에 간행한 셈이지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신좌섭 : 『아사녀』 마지막에 사족(蛇足)을 보면 “제3부의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1959년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신춘 현상문예작품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당시 이 시는 심사위원들 사이에 그리고 신문사 측과의 사이에 이른바 어려운 문제가 개재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로, 지상에 나타날 때 군데군데 20수행(數行)이 삭제되어 있었다. 여기 그것을 보완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일차적인 목표는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원래 모습으로 보여주려는 데에 있었겠지요. 이어서 “제2부는 정착생활을 하는 동안에 씌어진 작품들 가운데서 손에 닿는 대로 몇 개 추려보았다. 단 「나의 나」만은 스무 살 때의 것. 방랑생활, 군대생활을 포함하는 나의 어려웠던 서른 살 고비가 낳아놓은 것 가운데 이것도 아쉬움을 참고 몇 편만 골라 옮겨 쓰면서 제1부라 했다.”라고 하여 시기별로 대표적인 시 몇 편을 추가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등단작까지 왜곡되어 있는데다가 자신을 적절히 알릴 기회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총 123쪽에 하드카버로 되어 있는데, 제자(題字)와 장정(裝幀)이 좀 독특합니다. 제자는 박태준(朴泰俊), 장정은 어머니 인병선(印炳善)으로 되어 있어요. 얼핏 기억에는 출간을 외할머니가 도와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맹문재 : 1966년(37세)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최일수 연출)을 국립극장에서 상연했어요. 그 상황에 대한 소개를 좀 부탁해요. 

신좌섭 : 1966년 2월 26∼27일 국립극장에서 시극동인회(詩劇同人會) 제2회 공연이 열립니다. 동인회는 그때 3개의 창작극을 공연했는데, 그 중 하나가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이었지요. 당시 기사를 보면 화려해요. 신동엽 작, 최일수(崔一秀) 연출에 주요 배역으로는 최불암(崔佛岩, 남자 주인공), 김애리사(金愛利士, 여자 주인공), 최현(崔賢), 문오장(文五長) 등이 등장합니다. 쟁쟁한 인물들이지요. 

당시 공연 팜플렛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면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진달래 산천」이라는 서경적(敍景的)인 시를 쓰면서 시극(詩劇)을 생각해보았다. 이따금 국내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보면서도 시극을 동경하게 되었다. 발레를 보면서도 시극을, 합창을 들으면서도 그리고 교향곡을 들으면서도 점점 구체화되어 가는 시극에 대한 갈망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 지금 내가 써가고 싶은 시극은 나의 필요에 의해서 새로이 등장하는 문학 형태상의 또 다른 새 장르여야 할 것이다.” 

시극에 큰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시극동인회 조직을 보면 아버님이 사무간사와 기획위원을 맡고 계셨습니다.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의 연출을 맡았던 최일수 선생님은 아버님과 함께 기획위원으로 되어 있고요. 많은 열정을 할애한 것이지요. 

1998년 8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가극 「금강」의 초연(문호근 연출)이 있었는데, 그때 ‘아! 아버님이 저런 것을 하고 싶었겠구나.’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젊어서부터 기타도 잘 치셨고 노래도 아주 잘 부르셨던 것은 감안하지 않더라도 위 글만으로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의 음악적인 재능도 알게 되었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7년(38세) 12월 장편서사시 「금강」을 『한국현대신작전집』(을유문화사) 제5권에 발표했어요. 이 상황에 대해서 듣고 싶네요.

신좌섭 : 1967년 국제PEN클럽 작가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해년 가을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동선동 집 근처 여관방을 구해 일정 기간 나가 계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아이들이 셋이었으니 집에서 대작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물론 작품의 토대는 그보다 한참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951년 충남 일대의 백제 사적지와 동학농민전쟁의 자취들을 두루 답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밑거름이 되었겠지요. 전쟁 중에 어디를 돌아다녔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전쟁 속의 인간과 고통을 눈과 가슴에 담고 싶었을 것입니다. 체 게바라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민중의 고통과 혁명의식에 눈을 떴던 것처럼 사고의 틀이 정립된 때가 바로 그 시기, 시집 『아사녀』의 사족(蛇足)에서 말한 ‘방랑생활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님은 1950년 7월∼9월 인공치하에서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을 지냈고 인민군이 퇴각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빨치산 대오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두 달 뒤 대오를 이탈해서 국민방위군에 들어가지요. 1951년 초 국민방위군이 해산되자 다시 대구, 밀양 등을 전전하다가 그해 4월경 부여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전쟁 중의 행적 때문에 린치를 당하고 한동안 대전에 거주하면서 백제와 동학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두루 답사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아마도 그 시기의 방랑이 민족의 현실을 통찰하고 동학사상의 현장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서사시 「금강」 집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국제PEN클럽 작가 기금의 지원을 받아 「금강」을 집필하셨는데, 이것이 훗날 창작과비평사와 우리 가족이 함께 신동엽창작기금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미 성취를 한 사람에게 문학상을 주는 것보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기금을 주어 좋은 작품이 나오도록 한다는 발상이었지요.

맹문재 : 장편서사시 「금강」의 창작 과정을 잘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것이지요. 이 작품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좌섭 : 시 자체의 크기나 무게도 그렇지만 담겨 있는 역사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학과를 다니신 것도 이 같은 지향성 때문이었겠지요. 「금강」을 발표한 직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동학(東學)을 소재로 한 장시를 엮어보리라는 첫 생각은 4·19 봉기에서 느낀 민중의 연상(聯想)”이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민중에게 되돌려 읽히게 하는가”를 고민한 끝에 “시종 생활어를 구사하면서 스토리를 교향시극(交響詩劇)처럼 엮어나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생활어로 쓰인 서사시 「금강」,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오페레타 「석가탑」, 동양라디오의 「내 마음 끝까지」 방송대본 등을 보면 아버님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또 다른 서사시 「임진강」을 구상 중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남북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서사시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임진강」을 남기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에요. 

맹문재 : 또 다른 서사시 「임진강」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정말 아쉽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8년(39세) 5월 오페레타 「석가탑」(백병동 작곡)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연했어요. 극(劇) 장르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네요. 

신좌섭 : 오페레타 「석가탑」은 드라마센터에서 상연되었는데, 대본 신동엽, 작곡 백병동, 주최 명성여자중고등학교, 협연 공군교향악단, 연출 문오장, 지휘 임주택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연진은 모두 명성여고 학생들이고요. 

아버님의 창작 폭은 서정시, 장시, 산문시, 서사시, 오페레타, 시극 등으로 넓었습니다. 1967년에 쓰신 라디오 방송대본 「내 마음 끝까지」도 있지요. 좀 더 사셨으면 더 많은 실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님은 시와 노래, 춤이 어우러진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출연하는 집체극을 하셨을 거예요. 

​맹문재 : 1968년 김수영 시인이 타계해 신동엽 시인이 『한국일보』에 「지맥 속의 분수」라는 조사를 썼어요. 조사에서 김수영 시인의 타계를 두고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고 “민족의 손실”이라며 슬퍼했어요. 또한 “신형, 사실 말이지 문학하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무슨 무슨 주의의 노예가 될 순 없는 게 아니겠소?”라는 김수영 시인의 말을 인용했어요. 

신동엽 시인은 1967년 『중앙일보』에 월평을 쓰면서 김수영 시인의 시 「꽃잎」(7월)과 「여름밤」(9월)을 논지의 본보기로 내세우고도 있어요. 1968년 『창작과비평』에 시작품 「보리밭」「여름 이야기」「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그 사람에게」「고향」 등도 발표해요. 언젠가 김현경 여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에 따르면 김수영 시인이 추천하셨다고 하셨어요. 이와 같은 면을 보면 두 분 사이에 친교가 있었던 것 같은데, 들은 바가 있는지요? 

신좌섭 : 염무웅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1966년 『창작과비평』 발간 초기에는 시를 싣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다가 1967년부터 싣기 시작했는데, 그때 김수영 시인에게 추천을 요청하자 아버님을 추천했다고 들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 말씀에 따르면 실제로 김수영 시인이 1960년대 초반 아버님의 시를 보고 크게 기뻐서 흥분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향아」였을 것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아버님의 작품 「아니오」에 대해서 “강인한 참여 의식이 깔려 있고, 시적 경제를 할 줄 아는 기술이 숨어 있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 쉬고 있고,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고 평한 것을 기억하지요. 

아버님도 한 시평에서 “김수영 씨의 「꽃잎」을 읽으면서 한국의 하늘 아래 맑게 틔어 올라간 한 그루의 정신인(精神人)을 보았다. 그의 마음의 창문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온몸 전체가 그대로 삼베 적삼처럼 시원스럽게 열려 있는 소통로(疏通路)이다. (중략) 깊고 높은 진폭은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 가슴 트이게 만든다.”(「7월의 문단― 공예품 같은 현대시」)라고 쓰셨지요. 

김수영 시인이 1921년생이니까 아홉 살 차이였고 서로를 깊이 존중했다고 하지만 그리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정서나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 않아요?

맹문재 : 두 분의 관계를 좀 더 살펴봐야겠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9년 4월 7일(40세)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타계합니다. 자택 주소는 서울 동선동 5가 46번지이고,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월룡산 기슭이네요.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매우 놀랐고 슬펐겠지요. 벌써 50년 전의 일인데, 그때의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신좌섭 : 동선동 5가 45번지일 거에요. 구중서 선생님의 회고를 보면 소설가 하근찬 선생님이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의 무덤은 어느 산기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조사를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계십니다. 

또 유해가 집 대문을 나설 때 명성여고 학생들이 “여행을 떠나듯/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이미 끝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지금,/이 시간의 물결 위/잠 못들어/뒤채이고 있는/병 앓고 있는 사람들의/그 아픔만이 절대한 거”라는 아버님의 시 구절을 목메면서 읽어 올렸다고 해요. 당시 저는 열 살 때라서 그저 분위기만 기억하고 있지요. 파주 묘소에 아버님을 묻고 돌아오던 황토길의 스산함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기는 합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에 대한 귀한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좀 더 알고 싶은 이야기들은 다음 기회에 또 듣기로 하겠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해요.

 

 

(3)

 

 

맹문재 : 이번 대담에서는 신동엽 시인의 「금강」을 함께 읽어보려고 해요. 장편서사시 「금강」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지요. 이 작품의 의미로 어떤 점을 들 수 있을까요? 김종철은 「4·19정신과 우리의 시」에서 “60년대에 대부분의 시인들이 제대로 소화도 못한 외국의 문예사조를 흉내내며 자기도 이해 못할 시를 쓰고 있을 때 신동엽 시인은 “<공동체적 사랑>을 노래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네요.

신좌섭 : 1960년대 한국 문단을 보면 사실 「금강」과 같은 장편 서사시를 구상하고 집필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서화, 후화를 포함해서 총 30장(章), 4,673행이라는 스케일도 그렇지만 동학과 3․1운동, 4․19혁명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는, 그리고 4․19혁명의 좌절 이후 민중에 의해 이루어질 또 다른 격변을 예견하고 이것을 꿈꾸도록 이끄는 역사의식 역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백낙청 선생님은 1989년 단행본으로 엮어낸 「금강」의 발문에서 『신동엽전집』이 사후 15년 가까이 금지된 것은 주로 「금강」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합니다. 1969년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뒤 1975년 전집이 나오자마자 판매 금지가 되었는데, 당시의 운동권 학생들은 전집 복사본을 만들어 몰래 돌려 읽었고 전집에 실린 시 중에도 「금강」에 가장 매료되었습니다. 서사시 「금강」자체가 「금강」 서화에서 이야기하듯 “떡잎이 솟고 가지가 갈라져/어느 가을 무성하게 꽃피리라”던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의 “이야기의 씨들”이 되었던 것이지요.

김종철 선생님이 평했듯이 “공동체적 삶”을 노래한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껍질만 수입된 외래문화인 서구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엊그제, 그끄제에”도 누리던 본연의 “하늘”, “영원의 얼굴”, “우리들의 깊은 가슴”을 다시 일깨우는 지향성이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적, 누린 적이 없던 것을 가져야 한다고 외치는 것과 “우리들에게도/생활의 시대는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힘을 갖습니다.

「금강」이 전혀 난해하지 않은 평범한 시어들로 쓰인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님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4·19 봉기에서 느낀 민중의 연상(聯想)”을 “어떻게 민중에게 되돌려 읽히게 하는가”를 고민한 끝에 “시종 생활어를 구사하면서 스토리를 교향시극(交響詩劇)처럼 엮어나갔다”고 회상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중에게 직접,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 같은 지향성은 아버님이 문학을 시작한 본래의 동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1948년 그러니까 18세 무렵에 쓴 메모에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 휑한 눈으로 양지바른 담장 아래 꾸벅꾸벅 졸고 있는 무기력한 동네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한탄을 표하면서, 이들을 일깨우기 위해 시와 음악, 회화, 무용이 어우러진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글이 나옵니다. 시를 쓰는 본연의 지향점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등단작인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외에 난해한 시가 거의 없는 것은 이 같은 지향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맹문재 : 「금강」의 의의를 잘 들었습니다. 「금강」을 창작한 동기나 창작하는 동안의 일화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는지요?

신좌섭 : 1967년 12월에 「금강」을 발표했는데, 같은 해 9월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6년 동안 동학을 테마로 오천행의 서사시를 완성”했는데, 가제(假題)가 “동학, 그리고 4월의 하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4․19혁명을 중심에 놓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이상(理想)이 우리 자신의 역사 속에 어떻게 존재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또 어떻게 발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지요. 금년에 발간된 『산문전집』에 실린 노문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원래의 제목은 “하늘을 보아라”였답니다. 그런데 고향 부여의 친구들이 “대작에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고 반대하여 결국 “금강”으로 바꿨다고 해요.

아버님의 노트를 보면 동학을 주제로 한 작품은 1956년 가을부터 구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 조사의 목록에 수운(水雲)의 『동경대전(東經大全)』, 이호천(李昊天)의 『대순전경(大巡傳經)』, 윤백남(尹白南)의 『회천기(回天記)』, 최인욱(崔仁旭)의 『초적(草笛)』, 전영래(全榮來)의 『전라산천(全羅山川)』, 최재희(崔載喜)의 『동학과 동학란』, 일본판 『이용구전(李容九傳)』 등이 나열되어 있고, 1960년 봄, 여름, 가을, 1962년 여름에 호남지방, 속리산 일대, 설악산 일대, 금강 연안지방을 현지 답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조사를 1956년 무렵부터 했을 뿐 원래의 착상은 1951년~53년 무렵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버님은 1950년 인공치하의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을 지낸 연유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빨치산 대열에 합류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들어갔던 국민방위군이 해산된 후에도 다시 남도 일대를 방랑했습니다. 1951년 고향 부여로 돌아온 후에도 린치를 당하는 등 머무르기가 어려워 대전에 거주하면서 친구 구상회 선생과 함께 충남 일대의 백제 사적지와 동학농민전쟁 자취들을 답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출발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님이 1951년 11월 10일에 쓴 시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원제 「잊지 못할 像들이여」)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장의 비명을 울리며 전기고문받던/그래도 나에게 위안을 잊지 않던/이름없는 영웅 내 감방의 친구여… 꽁지벌레처럼 쫓아다니는 학정자의 학살을 피하여/서울로 망명할 때/남부여대의 피난민이 오르내리는 천안고개/호젓한 소롯길에서… 탈옥수의 심정으로 챗죽에 끌려 남하할 때/찬눈을 뭉쳐 먹어가며 넘던 문경새재 고개에서… 피비린 낙동수를 반찬삼아/주먹밥 먹던 교육대에서”와 같이 당시의 잊지 못할 이미지들을 묘사하고 있지요. 이런 경험들이 훗날 「금강」에 담겨져 나온 것입니다.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신동엽 시인은 「금강」을 아주 오랫동안 구상하고 준비하셨네요. 「금강」은 1967년 12월 『한국현대신작전집』 제5권(을유문화사)에 발표되었어요. 그 후 1년 남짓 활동하다가 신동엽 시인은 1969년 4월 7일 타계하지요. 「금강」이 발표된 뒤 “최근에 출간된 시들 가운데 단연코 가장 중요한 시적 업적의 하나가 될 것이다.”(김우창), “가장 많은 문제성을 지니면서 우리 시에 많은 시사를 던져주고 있는 시가 「금강」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조태일), “60년대가 거둔 작품 가운데서 가장 의의 있고, 값진 수확의 하나임에 틀림없다.”(조남익) 등의 평가가 있는데, 더 소개할 만한 것이 있는지요?

신좌섭 : 수많은 평이 있지만, 예를 들어 백낙청 선생님은 “(여러 논의에도 불구하고) 농민전쟁을 3․1운동과 4.19를 거쳐 오늘로 이어지는 현재적 사건으로 파악하고 그 구체적 과제를 민족자주·민중해방으로 파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동엽의 선진성을 짐작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런 역사의식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시각이었지요. 신경림 시인도 “시적 역사의식의 탁월함”을 논하고 있고, 채광석 시인은 “민중에의 굳은 믿음을 토대로 분단 상황의 극복 주체를 기층 민중에게 두는 미래전망의 대하적 구체화”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역사의식”,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의 민중”이 주요 키워드였던 것 같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금강」의 후화 「종로 5가」에 등장하는 소년의 모습에서 전태일을 떠올리듯이 4․19 이후 이어질 계급운동의 필연성을 예견해놓은 것도 그렇고요.

최근에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원시반본(原始反本) 사상과 같은 근대 민중 종교 사상과의 연계성을 논하는 시각, 봉건왕조―식민지―분단―전쟁―독재로 이어지는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각, 알랭바디우의 메타정치적 서사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각 등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 민중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네요. 주지하다시피 「금강」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토대로 해서 1919년 3·1운동, 1960년 4·19혁명으로 맥을 잇고 있지요. 신동엽 시인이 이와 같은 역사의식을 가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신좌섭 : 우리 민족이 숱한 고난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결국 민중에 의해 역사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직시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군가가 8․15를 빼놓은 것에 대해 무척 불만스러운 평을 한 적이 있는데, 사실 8․15 해방은 갑자기 던져진 것이고 민중에 의해 전취된 것은 아니지요.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민중에 의해 이루어진, 그래서 한 단계의 새로운 각성을 이룬 역사적 사건들이 제대로 된 세상으로 다가가는 경로라고 파악하고 이것들을 연결한 것이겠지요.

물론 동학농민혁명이나 3·1운동, 4·19혁명 모두 좌절로 끝났지만, “하늘”을 본 사람들은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숨죽여 이야기하고 언젠가는 다시 폭발해 한 단계 더 높은 이상을 성취하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 저도 공감해요. 신동엽 시인은 “금강,/옛부터 이곳은 모여/썩는 곳,/망하고, 대신/정신을 남기는 곳”(제23장)이라고 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토대로 왜 금강을 선택했을까요? 백제정신의 재현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신좌섭 : 아버님 고향이 백제의 옛 수도 부여입니다. 백제는 1,360년 전에 멸망했지만, 부여는 멸망의 역사가 모두의 기억과 삶 속에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독특한 지역입니다. 멸망은 두 가지를 가져왔지요. 디아스포라, 그리고 압제와 무기력. 어린 시절 부여에 가면 “멸망한 역사 속에서 체질화된 무기력”을 생생하게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 수백의 부여군민이 모인 자리에서 부여의 특성으로 “학습된 무기력”을 언급했더니 참가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찬란했던 백제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가슴 두근거리는” 이야기들 덕분이지요. 「금강」 5장에 나오는 시구 “백제,/천오백 년, 별로/오랜 세월이/아니다.//우리 할아버지가/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몇 번 안 가서/백제는/우리 엊그제, 그끄제에/있다”처럼. 

모여서 썩고,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긴다는 것은 멸망한 백제, 백제의 상징이면서 모든 썩은 것들이 모여 흐르는 금강, 그리고 실패한 혁명의 공통된 유비(類比)일 것입니다.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긴다는 것”은 “죽고 대신 정신을 남긴다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금강」 26장에서 하늬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 역시 “죽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것”이었지요. 

맹문재 : 부여 사람들의 독특한 정서가 이해되네요. 작품을 따라가며 좀 더 읽어보려고 해요. 우선 ‘서화(序話) 2’에는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라고 노래하면서 1960년 4월, 1919년, 1894년의 역사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조태일은 「신동엽론」에서 “사멸하지 않는 영원한 이상, 생명, 자유, 사랑”이면서 “영원한 민중적인 여러 요소”를 뜻한다고 보았는데요.

신좌섭 : 『산문전집』에 실린 노문 선생님(당시 부여 경찰)의 회고에 따르면 1953년 가을 지리산 빨치산 잔당들이 부여로 도피해서 경찰과 장시간 교전을 벌인 일이 있는데, 이때 빨치산들이 전투 막판에 굴속에서 여러 차례 외친 구호가 “하늘을 보아라”였다고 합니다. 이 구호에 깊은 인상을 받아 평생 집착하는 이미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시작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통틀어 하늘은 절대자로서의 특별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근대 민중 종교 사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했지요. 「금강」 23장에서 전봉준이 목매이기 직전 남긴 한마디도 “하늘을 보아라!”였습니다. 

동학혁명과 3․1운동, 4․19와 같은 좌절한 혁명을 거론하면서 “잠깐 빛났던 하늘”이라고 표현한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늘은 “민중 자신이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라는 자각, 주체의식, 완전한 해방”, 그리고 “깨달음의 상태, 질곡에서 벗어난 온전한 세계관” 이런 것을 복합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하는가」에서의 이미지도 마찬가지이지요.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고 했는데, 「금강」 6장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언제부터였을까,/살림을 장식하기 위해 백성들 가슴에/달았던 꽃이, 백성들 머리 위 기어올라와,/쇠항아리처럼 커져서 백성 덮누르기/시작한 것은”.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부질없는 것을 추구하다보면 그 추구하는 대상이 쇠항아리처럼 커져서 우리를 덮누르지요. 이 같은 질곡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야말로 하늘을 본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합니다.

맹문재 : “하늘”의 구체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네요. 제1장에서는 1862년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혁명, 1871년 경상도 문경에서 일어나 농민군 관아 습격 사건, 황해도와 평안도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혁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2장에서는 수운 최제우가 팔도강산을 걸으면서 학대받고 질병에 고통당하는 농민들의 실정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1860년 4월 5일 수운은 “영원의/빛나는 하늘”를 보았습니다. 이날은 최제우가 천도교를 창시한 날인데, 앞에서 보았던 ‘하늘’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신좌섭 : 제2장에서 수운의 깨달음을 예수, 석가의 깨달음에 견주어 기술하고 있지요. 수운의 사상은 백성들이 학대받고 질병에 고통당하는 선천세계가 끝나고 후천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후천개벽의 사상이고, 그리고 이것이 백성들 자신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깨달음이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하늘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원불교나 증산교 같은 근대 민중 종교 사상 모두 다를 바가 없지요.

맹문재 : 그러하지요. 제3장에서 화자는 “너”의 “빛나는 눈동자”를 발견하고 잊을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의 빛나는/그 눈이 말하는 것은/자시다, 새벽이다./승천이다”라고 비유도 하고, 그 눈은 “아름다운 눈”이고 “인간 정신미의/지고한 빛”이라고도 합니다. 신동엽 시인은 오페레타 <석가탑>의 대사를 쓰면서도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세운 아사달의 ‘눈동자’를 주목했습니다. 신동엽 시인에게 ‘눈동자’는 어떤 상징성이 있을까요?

신좌섭 : 눈동자는 여러 시에 등장하지요. 예를 들어 「종로 5가」에서도 소년은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로 등장하고, 시 「싱싱한 동자(瞳子)를 위하여」에는 “얼음 뚫고 새 흙 깊이 씨 묻어두자/새봄 오면 강산마다 피어날/칠흑 싱싱한 눈동자를 위하여”라고 눈동자가 등장합니다. 

여러 맥락에서 볼 때 눈동자가 상징하는 것은 그 주체의 본성일 것입니다. ‘천진하게’ 크고 맑은 소년의 눈동자는 별도로 하고 「빛나는 눈동자」나「석가탑」에서 아사달의 눈동자는 ‘깨어있는, 꿰뚫어보는, 영원을 지향하는, 흔들리지 않는’과 같은 이미지인데, 「빛나는 눈동자」를 읽으면 저는 세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전봉준, 김수영, 신동엽’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지금도 사진을 쉽게 볼 수 있는 세 사람 모두 실제로 빛나는 눈동자를 갖고 있었지요. 「금강」 3장의 빛나는 눈동자는 인물로 치면 시인 자신, 수운, 혹은 전봉준의 눈동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로 보면 ‘민중의 혼, 정신’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오히려 세상이/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빛나는 눈동자./너는 세상을 밟아디디며/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뚜벅뚜벅 혼자서/걸어가고 있었다.’ 같은 시구에서 그 같은 연상을 할 수 있습니다.

맹문재 : 궁금했던 면이었는데 비로소 이해가 되네요. 제6장에서는 “우리들에게도/생활의 시대는 있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즉 지주도 없고, 관리도 없고, 특권층도 없고, 그 대신 평등한 노동과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외세를 자랑처럼 모시고 들어왔고 갈라진 조국에 살기 때문에 마치 “너와 나의 쌀밥에/누군가 쇳가루 뿌려놓은 것 같”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생활의 시대”는 언제일까요? 

신좌섭 : 제5장에서 백제, 마한의 원시공동체적인 삶을 이야기한 후에 곧바로 “생활의 시대”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한 땅의 부리달이라는 사내가 다섯 살배기 아들을 맴매하자 동네 할아버지 아소가 부리달과 자기 자신을 사흘 밤낮 벌주는 장면이 나오지요.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동네가 마음을 모으던 생활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6장에서는 보다 상세한 모습이 그려지는데, 요약하자면 “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의/무정부 마을/능력에 따라 일하고/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원시공동체를 이상적인 삶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이상적인 삶이 왜곡되는 모습이 “언제부터였을까,/살림을 장식하기 위해 백성들 가슴에/달았던 꽃이, 백성들 머리 위 기어올라와,/쇠항아리처럼 커져서 백성 덮누르기/시작한 것”으로 표현됩니다. 

위 본연의 “생활의 시대”가 「시인정신론」에서 말하는 원수성(原數性) 세계일 것이고, 쇠항아리가 덮누르는 왜곡된 삶의 시대가 차수성(次數性) 세계, 그리고 다시 본연을 회복하는 삶의 시대가 귀수성(歸數性) 세계일 것입니다. 이 같은 3단계의 독특한 설정은 간혹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시인이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논하는 일종의 ‘문명기획자’여야 한다는 아버님의 지론에 부합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가 하면 4․19의 혁명으로서의 좌절만이 아니라 근본적 한계를 은근히 경계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사실 진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이 전취되지 않는 한 껍데기만의 혁명이지요.

맹문재 : “생활의 시대”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설명이네요. 제10장〜제11장에서 “하늬”는 북한산 골짝을 헤매다가 궁에서 도망나온 여자를 만납니다. 황해도 해주 여자였는데, 아버지가 경복궁 개축공사에 끌려와 등짐을 지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 장사를 지내드린 뒤 돌아가다가 노파에 끌려 궁으로 들어간 사연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밭,/백제의 씨”인 두 사람은 금강 언덕으로 가기로 합니다. “하늬는,/김진사네집 머슴/돌쇠가 주워다 기르고 있었”는데, 배고파 울다가 김진사집에서 쫓겨나 “부소산 너머 뒷개 사는/조할머니가 앞치마에 꾸려다/길”(제8장)러졌습니다. 허구적인 인물인 신(申)하늬를 작품에 등장시킨 의도는 무엇일까요? 

신좌섭 : 하늬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킨 것에 비판적인 견해가 있는데, 전지적 시점의 화자(話者) 외에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서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봉준 등 역사적 인물의 실제 삶에 매이다보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적지 않지요. 이 같은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장치로 파악되고 이런 점에서 볼 때 필수불가결한 등장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하늬의 출생과 다리를 절게 된 사연, 김진사에게 몸을 더럽힌 아내의 자살, 진아와의 만남, 하늬가 전봉준과는 다른 투쟁노선을 주장하거나 혁명의 실패 후 형장으로 찾아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장면, 아기 하늬의 탄생, 그리고 수십 년 후 종로 5가의 소년으로 이어지는 서사가 하늬가 필요했던 중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금강」이 역사적 사실, 허구적 인물, 전지적 시점의 화자, 그리고 틈틈이 등장하는 또 다른 화자와 같은 다층적 구조를 가진 데에는 작가 자신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애초 「금강」을 집필할 때 시와 음악, 회화, 무용이 어우러지는 “교향시극(交響詩劇)”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지요.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오페레타 「석가탑」, 라디오 방송 대본, 생전에 추진했던 오페라 「아사녀」, 기획 단계였던 서사시 「임진강」 등과 더불어 ‘종합 문화기획자’로서의 모습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문명기획자’로서 대중을 각성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시의 영역을 넘어서서 ‘종합 문화기획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금강」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맹문재 : 「금강」에 대한 폭넓은 해석을 해주셨네요. 제12장〜제17장까지 동학농민혁명의 상황을 그렸습니다. 제12장에서는 전봉준이 서장옥의 소개로 1888년 동학에 입도한 사실이며 속리산 기슭에서 전봉준이 해월 최시형을 만난 사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해월은 1898년 44년간 탄압에 쫓기면서 동학조직을 하다가 서울 광화문 밖 교수대에서 순교했습니다. 제13장에서 전봉준은 서울 서소문 밖 객주집에 묵으며 인심과 세정을 살피면서 “충청도 사람/신하늬와 의형제를 맺”습니다. 제14장에서는 1892년 호남 삼례역에 3천 명의 군중이, 1893년 광화문 광장에 3천 명의 군중이 모여 동학을 허락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전라도 관찰사는 허락하지 않았으며 왕은 사흘 동안 추위와 허기에 99명의 군중이 쓰러졌는데도 답이 없었습니다. 15장에서는 1893년 전주 익산, 고부 등에서 폭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제16장〜제17장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상황을 그렸습니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5천명의 농민이 고부 군청으로 진격해 관아를 불태우고 무기고를 부수고 전주성까지 입성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 교리가 토대로 된 것인지, 아니면 농민들의 의식에 의해 발생된 것인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좌섭 : 「水雲이 말하기를」이라는 시를 보면 ‘수운이 말하기를/하눌님은 콩밭과 가난/땀 흘리는 사색 속에 자라리라./바다에서 조개 따는 소녀/비 개인 오후 미도파 앞 지나가는/쓰레기 줍는 소년/아프리카 매 맞으며/노동하는 검둥이 아이,/오늘의 논밭 속에 심궈진/그대들의 눈동자여, 높고 높은/하눌님이어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현실의 권력만이 아니라 천상의 절대자도 인정하지 않았고 깊은 사색에 의해 우주의 허무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하늘님이 될 수 있다고 했지요. 이 같은 정신을 토대로 한 ‘사람이 하늘’이라는 교리가 썩을 대로 썩은 조정과 탐관오리, 외세의 침탈에 분노하던 당대의 농민정신과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동학 이후에도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 등이 등장하여 한국 근대 민중 종교사상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맥락에서 보면 그만큼 민중의 요구가 차고 오를 데까지 올랐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동학의 교리와 학정에 시달리던 민중의 요구가 만나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한 것입니다. 

  

맹문재 : 동학농민 운동을 통합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일리가 있네요. 제18장에서는 왕실의 파병 요청을 받은 청나라가 6천 명을 이끌고 상륙하자 일본군도 5천4백 명이나 이끌고 인천에 상륙해, 결국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난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20장〜23장에서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은 동학농민들의 씨를 말려버린 다음 왕족과 흥정해서 조선을 식민지 국가로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1894년 일본군대는 왕군과 함께 금강 방면으로 남진했습니다. 전봉준도 전 동학 농민군에게 논산벌로 모이길 긴급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최신식 화력을 갖춘 일본군에게 대패해 10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전사했고, 동학농민의 가족은 학살당하고 곤욕당했습니다. 전봉준도 참수되었습니다. 신하늬는 전봉준에게 전주성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그 길로 서울 밀고 올라가/중심 도려냈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밤으로, 산으로,/오륙십명씩,/2백여 개의 유격대 나누어/북상시키십시오”라고 제안합니다. 신하늬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좌섭 : 작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특별 출연’시킨 하늬의 입을 통해 한 말이니 아마도 작가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전주성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밀고 올라가자는 강경파 입장은 실제로 동학군 내에 존재했던 것으로 압니다만, 유격대 이야기는 작가의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님은 당시에도 국제 정세에 밝았고 중국 혁명이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독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아쉬워했을 것이고 그 대안을 하늬의 입을 빌어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맹문재 : 그럴 수 있겠네요. 제23장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김개남, 성재식 등의 참수된 머리가 서소문 밖 장터 네거리에 효시된 모습을 본 영국의 비숍여사는 “혁명지도자들/얼굴마다,/서릿발이, 엄숙하고/잘생겼더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신동엽 시인이 비숍 여사의 글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에서도 비숍 여사가 나오지요. 

신좌섭 :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 한글로 번역된 것은 1990년대이니까 아마도 두 분 다 일어판으로 접하셨을 거예요. 문학관의 소장 목록에는 없는데, 오래전 책장에서 비슷한 제목의 일어책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집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비숍 여사가 19세기 말 한국의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반면 백성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편이었고,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 김개남, 전봉준 등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혁명 지도자들의 위엄을 외국인의 눈으로 통해 표현하고자 했겠지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이 읽은 비숍 여사의 책이 발견되면 좋겠네요. 학계와 문단에서도 큰 관심을 보일 것이에요. 제24장∼26장까지 동학 농민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진아는/아들을 낳았다,/복슬복슬한/아기 하늬,”(제26장)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반도의 아침이 열리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역사는 조금씩 전진하는 것으로 보고 있네요. 

동학농민혁명이 지난 다음해 정월 보름날 서정리 역에서는 왕군, 왜군, 동네 토반, 유림들이 합세해 마을 농민 27명을 능지처참했는데, 신하늬는 자진해서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신하늬의 순정무구한 정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신좌섭 : 아버님의 여러 글을 보면 “영원의 하늘”을 꿈꾸는 사람은 으레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요. 「금강 잡기(雜記)」의 여승들이 그렇고 오페레타 「석가탑」의 아사녀도 그렇고요. 「시인정신론」에서 말하는 ‘원수성(原數性), 차수성(次數性), 귀수성(歸數性)’ 세계에서 귀수성 세계로의 길은 머나먼데 차수성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그러나 “영원의 하늘”을 본, 깨달은 자의 길은 죽음, 씨앗을 남기는 죽음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다소 난해한 시 「강」에서는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죽이는 자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말이지요. 아마도 이 모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맹문재 : ‘후화(後話) 1’에서 작품의 화자는 밤 11시 30분 종로 5가 네거리에서 길을 묻는 소년을 만나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소년의 눈동자가/내 콧등 아래서 비에/젖고 있었다.”라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이 어린 소년을 작품의 후화에 등장시킨 의도는 무엇일까요? 

신좌섭 : 그 바로 앞 26장에서는 진아가 아기 하늬를 낳고, 하늬는 스스로 형장으로 걸어 들어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기 하늬로부터 기껏해야 2대가 더 흘렀을 시기이지만, 세상은 이미 크게 달라졌고 아기 하늬가 농사꾼이 되었다면 그 아들은 대지에서 뿌리 뽑혀 서울로 이농한 공사판 막노동자, 또 그 아들은 공장 노동자가 되어 있을 시기입니다. 동학, 3․1운동, 4․19에 이은 또 다른 혁명, 특히 계급혁명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금강」에 하늬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킨 것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가 있는데, 아기 하늬의 탄생, 종로 5가의 소년으로 이어지는 서사가 하늬가 필요했던 중요한 이유의 하나일 것입니다.

 

맹문재 : “하늬”의 존재가 좀 더 이해되네요. ‘후화(後話) 1’에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9년 3·1운동, 1960년 4·19혁명을 소개하면서 점점 피를 적게 흘린 점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오리라,/갈고 다듬은 우리들의/푸담한 슬기와 자비가/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우리 세상 쟁취해서/반도 하늘 높이 나부낄 평화”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찬란한 혁명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신동엽 시인이 꿈꾼 세계는 가능할까요?

  

신좌섭 : 4·19혁명 이후 1980년 5월의 잔혹한 역사가 있지만, 이것은 군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자행된 것이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년 겨울 촛불혁명을 돌이켜보면 ‘찬란한 혁명의 날’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무혈혁명 역사를 전 세계가 부러워하고 있지요. 

 

이 같은 역사적 통찰이 무척 놀랍습니다만, 살아계셨다면 2019년 오늘도 아직 멀었다고 말하셨을 거예요. 계층 간 이동이 완전히 단절되고 계급사회가 고착되었을 뿐더러 「금강」 6장에 나오는 “큰 마리낙지―새끼낙지―말거머리”의 지배구조, “갈라진 조국,/강요된 분단선.”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맹문재 : 오늘 「금강」 읽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깊이 있는 말씀 감사해요.

     

맹문재 시인과 신동엽 시인의 아드님이신 신좌섭 교수님 대담을 통하여 그동안 잘못 알려진 부분을 바르게 고칠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유익했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신동엽 시인 50주기를 맞아 진행된 대화는 여기까지입니다. 

 

 

 

 

 

II. 

 

 

통일·반독재·저항… 신동엽의 수식어 깨고 싶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세계일보 2020-07-19] <8>신동엽 ‘전경인 정신’ 잇는 ‘의예과 교수’·시인 신좌섭

올해는 신동엽 시인 탄생 90주년을 맞는 해다. 독자들의 뇌리에 서사시 ‘금강’과 서정시 ‘산에 언덕에’, ‘진달래 산천’, ‘껍데기는 가라’ 등으로 남아 있는 선생의 작품 세계는 오랜 금기의 세월을 뚫고 이제 우리 시대의 최전선에 서 있다. 선생의 작품은 분단과 독재 시대에 민족과 저항의 키워드로 줄곧 소환됐고 또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빚어진 인류 문명의 위기에 즈음해서 선생의 시적 사유와 실천과 형상은 어떤 대안적 지평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장남 신좌섭 서울대 의예과 교수를 통해 이러한 선생의 현재적 가치와 그 확장성을 들을 수 있었다.



● 토착정서의 핵심 가치, 전경인 정신

아들의 입장에서 신동엽 선생의 가장 중요한 저력이랄까 자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가난한 농민으로 태어나 스스로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토착정서랄까 농경정신을 가장 기본으로 생각하신 것이 하나고요. ‘백제’라는 멸망했으나 끊임없이 정신이 호출되는 나라가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아닌 게 아니라 선생은 토착정서를 통해 동학을 비롯한 민중종교 사상을 소화해냈고, 사회주의나 아나키즘도 자기 것으로 거르고 녹여 받아들였다. 이러한 힘으로 선생은 전쟁과 독재 치하에서도 정결하고도 견고한 삶으로 일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인 김수영이 선생을 두고 한 “너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지 않은 시인”이라는 평이 떠올랐다. 1950년대 한국 시단을 유행병처럼 휩쓴 모더니즘 열풍에서 비켜서면서 신동엽 선생은 등단작 제목처럼 ‘이야기하는 쟁기꾼’으로 훤칠하게 등장한 것이다. 1959년 신춘문예 입선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두고 신동엽문학관장 김형수 시인이 “케이팝 경연대회에 판소리를 들고 나간 격”이라고 한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선생이 강조한 ‘전경인(全耕人) 정신’은 이러한 토착정서의 핵심 가치가 된다.

“얼마 전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께서 생태를 이야기하려면 신동엽 시의 도가적 상상력을 읽으라고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아버님은 단순 기능자를 벗어나 온전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린 정신을 강조하셨죠. 스물두 살에 쓰신 ‘엉뚱한 이론’이라는 산문에서는 두뇌 운동의 탈선과 과잉을 비판하셨는데, 문명의 맹목적 확장을 경계하신 거지요.”

선생의 사유 저변에는 초기부터 노장사상, 원시반본 정신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신 교수는 아버지의 현재적 의미를 이러한 대안적 사유 곧 ‘대지적 상상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심층적 원천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버지의 작품은 이상적인 새로운 세상에 관해 암시를 주는 작품이어서 정말 아낀다”는 신 시인의 장남 신좌섭 서울대 의대 교수는 시와 오페레타, 시극, 방송대본 등에 진력하면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 줬던 ‘신동엽의 작품세계’가 더 도드라지길 바라고 있다.

● 민족과 저항을 넘어 ‘시인 신동엽’으로

이렇게 신동엽 선생은 ‘민족시인’이라는 그간의 규정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대지, 전경인, 흙 같은 원초적 개념을 통해 아버지의 시가 새로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지향으로 말미암아 선생의 작품은 어떤 시인들보다 내구성과 확장성이 크게 다가온다. 그는 “아버지 앞에 붙었던 통일, 반독재, 저항이라는 호칭이 한 시대의 요청에 의해 주어졌다”면서 이제 수식어가 달라질 때가 온 것 같다고 했다. ‘산문시’나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등을 읽어 보면 신동엽 시인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은 사유 체계에서만이 아니라 장르 선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다양한 장르를 통한 실험정신이 선생을 폭넓은 ‘시인 신동엽’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신 교수는 “해방 직후에 가난한 민중들에게 깨달음을 주려면 시와 음악과 무용 같은 종합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고 떠올렸다. 기타를 끼고 살았고, 노래도 잘 불렀던 아버지는 오페레타 ‘석가탑’,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같은 동시대 누구도 꿈꾸지 못한 양식들을 남겼다. 선생은 서정시, 서사시, 장시, 산문시, 오페레타, 시극, 연극, 방송대본 등에 모두 진력했다. ‘금강’을 술회하는 인터뷰에서는 교향시극 쓰듯이 썼다고 토로했고, 타계 직전에는 서사시 ‘임진강’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 작품이 완성됐다면 한국문학은 빼어난 분단 서사시 하나를 더 간직하게 됐을 것이다.

이제 신동엽 시인의 텍스트는 시전집과 산문전집, 그리고 몇 종의 평전으로 완미하게 정리된 듯하다. 하지만 아들로서는 미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더 방대하고 정치한 자료를 망라한 본격 평전이 나와야 합니다. 쓰는 시절의 한계가 있을 수 있고, 자료의 한계도 있었을 겁니다. 약전(略傳)을 넘어 보완된 자료를 텍스트로 한, 그때는 안 보이던 것을 담은 평전이 나오길 고대합니다.”


● 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트라이앵글

신 교수의 할아버지는 경북 분이었는데 부여로 흘러들어와 극진한 사랑과 전적인 신뢰로 외아들 신동엽의 큰 힘이 돼 주었다. 그 사랑과 신뢰는 신동엽의 인생 갈피마다 회복과 의지의 원천이 됐을 것이다. 1990년에 돌아가셨으니 아들이 떠난 후 21년을 더 부여를 지키신 것이다. 신 교수의 외할아버지는 사회주의에 바탕을 두고 이론을 전개했던 농업경제학자 인정식 선생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전향을 했고, 해방 후에는 북으로 가셨다. 남쪽에 남겨진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이때부터 힘겨운 생을 사셨다.

“어머니를 매개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결되는 것을 느껴요. 외할아버지 전집을 읽으면 사라져 가는 농촌문화를 안타까워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버지의 생태학적 견지와 어머니의 짚풀문화가 연결되면서, 세 분이 아스라하게 연결되는 것을 느낍니다.”

신 교수의 어머니 인병선 여사는 ‘짚풀문화’에 애정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면서 실물적 자료들에 대한 섭렵과 고증과 수집을 마다하지 않았다. 짚풀문화와 관련한 자료 연구로 짚풀문화가로서 입지를 세우기도 했다. 1993년에 개관한 짚풀생활사박물관이 바로 그 결실이다. “그것들은 빨리 삭아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진이나 녹화로 다 기록해 세월이 흘러도 재현할 수 있도록 만드셨어요. 이제 박물관장도 제가 맡았어요. 저희 가계(家系)가 모두 제게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 오랜 생애의 빛과 빚을 품은 ‘시인 신좌섭’

신 교수는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한 1978년, 의사라는 안정된 비전을 던지고 10년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군대를 포함해 13년간 바깥에서 내면을 다지고 돌아왔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사회에 기여하는 의사를 양성할 수 있을까에 최선의 관심을 두고 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과, 숙의민주주의에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을 결합하는 일입니다.” 퍼실리테이션은 사람들 사이에 소통과 협력이 활발하게 일어나 합의에 도달하도록 하는 행위를 말한다. 신 교수는 이러한 범주가 부모님의 생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 우리는 아버지라는 거대한 산그늘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짐을 지고 그것을 완성해 가는 ‘숙의민주주의자 신좌섭’의 모습에 가닿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경인’ 정신의 현대적 실현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에게 이처럼 오랜 생애의 빛이자 빚으로 우뚝하시다.

신 교수는 생애에서 두 번의 큰 고통을 겪는다. 2014년에 겪은 참척의 슬픔과 최근에 겪은 병고가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2017년에 첫 시집을 냈고, 작년에는 아버지 50주기로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이제부터는 차분하게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일은 시작(詩作), 아버지와 어머니의 남겨진 일들, 퍼실리테이터로서의 활동일 것이다. 신 교수는 몇 번이고 ‘차분하게’라는 말을 반복했다.

신동엽 선생과 자신의 작품 중 애착이 가는 시편을 들려 달라는 부탁에 신 교수는 아버지의 ‘좋은 언어’와 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 자신의 ‘좋은 언어를 주소서’를 조심스럽게 건넨다. 1970년 유고로 발표된 ‘좋은 언어’는 “때는 와요/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이야기할 때”라면서 언어 과잉의 세계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좋은 언어를 주소서’는 시집 ‘네 이름을 지운다’ 마지막에 배치한 작품으로서 “이승엔 더 이상/아름다움을 담을 그릇이 없나니”라면서 아버지에 대한 경모(敬慕)를 숨기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작품은 이상적인 새로운 세상에 관해 암시를 주는 작품이어서 정말 아끼고 있다”고 했다. 인병선 여사의 “그의 시는 지금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우리 속에서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들에게도 그대로 해당했던 것이다. 신동엽 시인의 ‘전경인’ 정신을, 아들의 웅숭깊은 사유를 통해 새로 만날 수 있었던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