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시인(詩人) 이야기

유홍준 _ 다시 그 공장에 가보아야겠다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1. 9. 15. 06:51

유홍준

 

다시 그 공장에 가보아야겠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 (문학사상 2014)

 

 

1962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1998년 《시와 반시》 신인상에 〈지평선을 밀다〉 등이 당선되어 등단했고, 시집으로 《喪家_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시선집으로 《북천- 까마귀》가 있다. 젊은시인상,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론이 있으면 일은 잘 돌아가지 않아도 그 이유는 알게 된다. 실천을 하면 일은 돌아가는데 그 이유는 모른다.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면 일도 돌아 가지 않고 그 이유도 모르게 된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11


그 공장엘 근 이십 년을 다녔다. 그런데 떠나온 지 육 년이나 지났다. 그 공장에서 사고를 두 번 당해 내 왼손 검지와 오른손 손목엔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다. 여름이 되면 감출 수가 없는 이 흉터를 보고 사람들은 신기해 하기도 하고 징그러워하기도 한다. 이상하다. 그 공장엘 한번 가봐야지 가봐아지 하면서도 안 가게 된다. 그렇게 오래 다닌 공장인데도 그렇다. 아니, 가보고 싶긴 한데, 왜일까 자꾸만 미루게 된다.


가끔 눈을 감고 그 공장에서 일하던 때를 떠올려보면 끔찍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그곳에서 그런 일을 했던가 싶기도 하다. 엄청난 덩치의 기계와 소음과 열기와 속도.… 그러나 삶이 나를 다시 또 그렇게 내몰면. 어쩔 수가 없다, 나는 또 그렇게 그 공장 일을 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게 삶이고 목숨이니까.
 
그 공장은 진주 MBC 근처 우리 집에서 남강 둑을 따라 조금 하류 쪽으로 내려가면 있다. 1공장이 있고 2공장이 있는데, 나는 2공장에서 일했다. 생산부 가공과 C반 반장이 내 직책이었다. 글쎄, 내 작업복 이름표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공장은 돌아가지를 않고 흉물이 되어 멈춰 서 있다. 그 공장의 기계들은 중국 쪽에 팔렸다고 한다. 기계는 그렇게 팔렸는데 그 공장 땅은 덩치가 커서 누가 사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내가 돌리던 기계가 뜯어져 없어졌다고 하니까 괜히 마음이 이상하다. 그 기계는 내가 이십 대 후반부터 사십 대 중후반 장년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내 청춘을 다 바 쳤던 기계다. 날이면 날마다 붙어살던 기계다. 그런 그 기계가 이제 없어졌다고 한다.


내가 다니던 그 공장은 하얀 종이를 생산하던 종이공장이었다. 눈부시게 하얀, 티 없이 맑은, 종이를 생산하던 그 공장에서 나는 단 하루 쉬는 날도 없이 삼교대 근무를 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생산, 생산이라는 말이 참 친근하고 좋다.
하얀 종이를 오래 들여다보면 쉬이 안질이 간다는 말이 있다. 시력이 나빠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종이를 나는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펄프를 물에 풀어,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하느님 같다
흰 눈을 내려
세상을 문자 이전으로 되돌려놓는 조물주 같다

 

티 없는, 죄 없는
순백
無化의 길……


더욱 완전한 백지에 이르고자
없애고 없애고 또 없애는 것이 제지공의 길이다, 제지공의 삶이다, 마치 거지의 길이며 성자의 삶 같다


그러므로,

 

오늘도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자꾸만 문자를 잃어간다, 문맹이 되어 간다

 

문명에서- 문맹으로

 

휴일없이
삼교대 종이공장 제지공들은 출근을 한다 


아, 그래, 생각이 난다. 그 하얀 종이 위에 티끌만 한 흠집이라도 생기면 불량이었다. 그러면 나는 고향이 경북 의성인 직장 상사에게 불려가 혼쭐이 나곤 했다. 경위서며 시말서를 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불량이 나고 경위서 를 쓰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나면 에이씨〜 이 짓 안 하면 못 사나 정말! 열두 번도 더 나는 그 공장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 공장에서 나는 시를 배우고, 시를 쓰고, 시인이 되었다. 심지어 시집을 두 권씩이나 내기도 했다.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한 일들이 거기에서 일어났던 거다. 맞다, 제지공장 작업복을 입고 시를 쓴다는 것은 만만치가 않았다. 밤늦게 퇴근을 하다 남강을 바라보면 까닭 없이 무언가가 밀려올라와서 서럽기도 했다.


“오래전에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 성자이거나 폐인”이라고 한 이는 시인 박용하다. 그런 시를 쓴 박용하도 어느 한 시절 몹시 배가 고팠던 적이 있었나 보다. 누렇게 시들어 땅 위에 떨어진 목련 꽃잎을 내려다보며 ‘카스테라 빵 껍질’ 같다고 했으니까.


내가 다니던 그 공장에도 목련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나는 목련 중에서도 공장에 뿌리를 박고 사는 목련은 참 서글프고 처량하다는 생각을 했다. 목련은 차갑고 종이는 뜨거웠을 뿐, 둘은 색깔이 같았다. 목련 꽃잎은 차갑고 하앴지만 갓 기계를 통과해 나온 종이는 정말로 뜨겁고 하했다. 사실 종이는 물로 만드는 건데 최종 단계에선 그 물기를 모두 제거해야만 했고, 그러자니 자연 뜨거운 드라이기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갓 나온 종이는 손을 대기가 힘들 만큼 뜨거웠다.
불량이 났거나 지절(紙絶)이 난 종이를 우리는 파지라고 불렀다. 그 파지는 다시 처음 단계로 돌아가 커다란 믹스기 같은 곳에 갈리고 물에 풀려 종이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일테면 종이도 윤회를 했다.  우리는 그 파지 쌓아두는 곳을 좋아했다. 야근 때가 되면 더러는 그 파지 속으로 기어들어가 토막잠을 자기도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 속으로 파고 들어가 등을 대고 누우면, 좋았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종이를 뒤집어쓰면 아늑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종이의 체온이 내 등짝으로 전해져올 때의 느낌, 그 느낌, 갓 구운 빵 같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종이에 이미 나의 코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때도 나는 시인이었다. 종이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누우면 이상한 감정들 이 몰려오곤 했다. 종이를 깔고 종이를 덮고 누워 기계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막연히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는 시를 생각했다.


소음은 나의 노래
소음은 나의 자장가
소음 없이 난 이제 하루도 못 살아! 
도시로 나와 이십여 년, 소음굴 속에서만 살았다
소음 중독자가 되었다 
태양인에서 
소음인으로 
마침내 騷音人으로 나의 체질은 바뀌었다 
24시간 연중무휴 제지 기계가 
고속으로 돌아가는 종이공장에서
소음 없이는 못 사는 
이제 소음 없이는 못 자는 소음인 


얼마 전에 고향엘 갔다가 알았다
소음을 견디는 것보다
적막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소음 없는 고향은 견딜 수 없어
소음 없는 고향에선 도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어
하룻밤도 못 자고 나는 도망쳐왔다
매음굴보다 더 지독한
나의 정든소음굴 속으로


저 봄 언덕에 꽃이 피거나 말거나 

저 가을 들판에 벼가 익거나 말거나 

너 없이는 못 살아 정든 소음아 *

 

* 〈소음은, 나의 노래〉, 《나는 웃는다》, 창비, 2006


맞다, 내 몸은 아주 규칙적인 기계음에 길들여져갔다. 하얀 종이 속에 들어 가 몸을 웅크리고 그 규칙적인 기계음들을 들으면 저절로 곤한 잠에 빠져들 었다. 그것은 아주 매혹적이고 야릇하고 묘한 것이었다.


나는 내 생애 첫 소설을 그 파지 더미 속에서 썼다. 1990년 진주상공회의소 주최 공단문학상을 받은 단편 〈출장일기〉가 그것이다. 지금 그 소설은 내 기억 속에 첫사랑처럼 남아 있다. 그런데 그 공장의 관리자들은 파지 속에 들어가 자는 것을 한사코 말렸다. 이웃 공장에서 커다란 사고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야근이었고, 이웃 공장 한 근무자가 파지 더미 속에 들어가 잤고, 지게차를 모는 동료 근무자가 그 사람이 들어가 자는 파지 더미를 들어서 믹스기 같은 곳에 집어넣어버렸다 고 했다. 아침에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하나 없어졌고, 아무리 찾아도 안 보였 고, 평소에 근태가 좀 안 좋았던 사람이었고. 몰래 담치기(?)를 했나 했고, 그러다 그냥 집에 갔겠거니 하고 퇴근들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만 하루가 지나도 그 사람의 행방은 나타나지 않았고, 종이에서 불량이 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새하얀 종이 위에 까만 사람의 머리카락이 간혹 박혀나왔다고 한다. 그제야 사람들은 알았다고 한다. 몰려오는 잠을 참지 못해 파지 더미 속으로 기어들어간 그 사람은 파지를 치우는 동료 근무자에 의해 파지와 함께 믹서 같은 그곳에 밀어 넣어졌고 산산조각으로 갈려 종이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요즘도 나는 간혹 그 생각을 한다. 파지 속으로 들어간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종이는 재생되고. 재생되고. 또 재생된다. 버려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점점 더 질이 나쁜 종이로 전락하며 돌고 돈다. 새하얀 아트지였다가 스노우 화이트지였다가 백상지였다가 신문용지였다가 마침내 우리가 똥종이라 부르는 누런 포장지로 혹은 박스용지로 점점 더 질이 나쁜 종이로 변해갈. 뿐, 종이는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파지 속에 들어가 자던 그 사람의 주검은 여전히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의 수많은 물건들에는 그런 주검들이 스며 있다. 나는 공장엘 다니면서 그것을 알았다. 우리가 쓰는 수많은 물건들, 그것들 속에는 다 그런 고통, 그런 주검, 그런 희생들이 스며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잘 모르거나 아예 잊고 산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우리가 신고 다니는 신발,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 우리가 사용하는 이 컴퓨터가 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서 왔는데 말이다. 


가보나 마나 내가 다니던 옛 공장은 쓸쓸할 것이다. 정문 앞 바리케이드는 벌겋게 녹이 슬어 있고 출근카드를 꽂아놓던 그 나무함과 수백 명의 얼굴과 이름을 다 알고 있던 그 경비 아저씨의 웃음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 요란하던 옛 기계들과 푸른 작업복들과 희로애락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옛 동료들, 그 옛일들은 마치 이제 아주 내 인생에 없었던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내 인생의 가장 많은 날들을 그곳에서 보냈는데도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곳에서 돈을 벌어 집을 샀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고, 그 나마 아쉬운 대로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허탈하고 허망하다. 이제 그 공장은 완전히 문을 닫았고, 몇 년째 저렇게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 그렇다. 제가 살던 곳에 다시 돌아온 사람은 성자 아니면 폐인일 것이다. 그것이 나는 두려웠고, 그래서 그 공장에 가는 걸 자꾸만 미뤄왔던 것이다. 성자와 폐인을 하염없이 유보하며 그냥 나는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외면해지는 것이 아니다.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 할 건 내가 그 공장에 다녔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나를 낳고 길러준 고향을 잊지 말아야 하듯이, 그렇다, 나는 그 공장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공장은 내 고향이다.
 
저 산중 절간
두 눈 질끈 감은 스님은
좌정하고 염주 돌리며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리고
저 고요한 성당
미사포 쓴 수녀님은 하염없이 고개 처박고
묵주 돌리며 로사리오 기도를 올리지만
내가 다니는 종이공장
제지 기계는
베어링을 돌린다
스님보다도 오래, 수녀님보다도 더 끈질기게
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리며 용맹정진을 한다
소음이라 부르는 기계의 염불 소음송을 외우며
오직 한 길 생산도를 닦는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내가 믿는 건 이 공장 이 기계의 크신 능력뿐.


오늘도 나는 푸른 생산 도복을 입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치나니
일용할 양식 내리시는 기계신 앞에*

 

* 〈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린다〉, 《나는 웃는다》, 창비, 2006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겪고 자란 필연적인 경험들, 그것은 곧 그 사람의 뼈대같은 것일 게다. 제지공이면서 시인으로 몸부림을 치며 살았던 세월들, 그 경험과 기억들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그렇다, 규격화된 제품만을 요구하는 공장에서 내 시는 잘못 생산된 불량품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규격화된 것들은 이제 다 잊히고 없는데 어쩌자고 내가 ‘사라고 만든 이 불량품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내 왼손 검지와 오른손 손목에 남아 있는 이 커다란 흉터처럼.


시란, 어떤 사람이 보면 신기한 것이고 어떤 사람이 보면 징그러운 것일까? 오늘 저녁엔 자전거 타고 천천히 남강 둑을 따라가서 흉물이 되어버린 그 공 장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