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시인(詩人) 이야기

허연 _ 빗나간 것들에게 바치는 헌사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1. 9. 15. 17:37

 
허연

 

빗나간 것들에게 바치는 헌사

 

 

<시인으로 산다는 것> (문학사상 2014)

 

 

1

 

난 인간의 신념이나 약속을 믿지 않는다. 인간을 믿지 않는다. 인간에겐 입장과 생존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난 인간을 찬양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구름무늬 표범이나 붉은점모시나비를 찬양하라면 하겠지만 인간을 찬양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이 내세우는 명분은 아무리 고매하거나 근사해 보여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콤플렉스나, 치부를 감추기 위한 가면이나, 이익이나 보상심리가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이다. 물론 난 인간을 찬양하지 않을 뿐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는다. 단지 인간과 세렝게티 평원의 하이에나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간혹 인간을 넘어선 인간이 있다고는 한다. 아마 정신적으로 거대 공간과 거대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난 인간을 찬양하는 시를 쓰지 못했다. 나에게 인간이란 늘 측은하기는 하지만 감동적이지는 않은 대상이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쓴 시들은 결국 내 안에서 쓰여지는 자폐적인 병증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읽어줄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은 내 시 창작에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난 어떤 시가 한국말로 쓰여지는 시의 정답인지 잘 모르겠다. 교과서에 나왔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시의 상당 수를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나쁜 시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쓴 시롤 몇 번 읽어 봐도 어느 날은 좋고 어느 날온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나는 판단을 유예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그저 내가 알고, 사는 만큼만 시를 적는다. 난 서을 태생이다. 시 쓰는 다른 친구들처럼 야트막한 마율과 시냇물에 대한 기억이 없다. 소를 끌던 아버지도 없었고, 머리에 수건율 동여맨 어머니도 없었다. 여러 시인들의 시집에 꼭 등장하곤 하는 농촌이나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상징적 사건이나 인물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난 그저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일찌감치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고, 도시인 대부분이 하는 것처럼 출퇴근하는 직장을 다니면서 이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절친한 문우들이 인도니 네팔이니 하는 곳을 가자고 할 때 "나는 덥고 벌레 많은 나라는 가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다 구박을 받곤 하는 서울 놈일 뿐이다. 문제는 그런 내가 시를 쓴다는 거다. 하고 많은 일 중에 시를 쓴다는 거다. 시나 평론을 부지런히 읽지도 못하고, 시적인 냄새라고 해봐야 한 달에 한 번쯤 시단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나 맛보는 내가 시를 쓴다는 거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어울리지 않는 짓이다.

 


2


내가 왜 시인의 길을 가게 됐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 운명이었던 것 같기도하다.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당시로는 드물게 머리를 쇼팽처럼 기른 예술가적 분위기를 풍기시는 분이었다. 하지만 이 예술가적 풍모는 수업 시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부터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선생님은 잡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예술가의 풍모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신 건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이었다. 한 방송사에서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촬영하는 무슨 하이틴 프로가 있었는 데, 그 프로의 ‘우리 학교 명물'인가 하는 코너에 선생님이 출연해서 클래식 기타 연주를 하신 것이었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반백의 장발. 비스듬히 세운 기타. 거기서 흘러나오는 선율, 무심해 보이는 선생님의 표정은 하나의 정지 화면이자 ‘완성’이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내 영웅이었다. 수학에 관심도 없으면서 수학 시간만큼은 충실하려고 애썼고, 다른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딱딱한 수업을 지겨워할 때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잡담이라고는 안 하시던 선생님이 ‘법어’ 한마디를 남기셨 다. 그 ‘법어’를 듣는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둣한 충격을 받았다. 법어의 내용은 이랬다.
“너희들 중에 글을 쓰고 싶은 사람 있지. 예쁜 여학생을 보고 화가 나는 사람은 글을 써도 돼. 하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 손이나 잡고 싶은 놈들은 그냥 살아.”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예쁜 여자를 보면 늘 화가 났다. 배어나오는 자신감이나 그늘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분위기에 화가 났던 것 같다. 사춘기 소년에게 미모의 여인은 계급이자 권력으로 다가왔다.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운을 예감하던 소년에게 구김살 없는 미모의 여성은 느끼한 적으로 다가왔다. 햇살보다는 그늘이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그 무렵부터 나는 내가 감히 글을 쓰는 사람으로 천명을 받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3


내가 만약 노래를 잘했더라면 혹은 노래를 만드는 걸 배웠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있어 시는 내가 나이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노래다. 내 노래는 ‘어디 가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냥 간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내 노래는 그즈음의 나일 뿐이다. 난 내 노래가 정서를 함양하거나, 혹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내 노래가 나의 밥이 되거나 명예가 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내 시는 나만의 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몇 명의 독자들이 내 공화국을 찾아주는 건 하나의 정치적 승리다. 결코 문학 정신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고흐 같은 욕심이었다.
빗나가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을 증거하고 싶었다. 그 무렵 내 시는 그랬다. 불행히도 난 누구에게도 시를 배우지 못했다. 오로지 내게 시를 가르쳐주고, 시의 길을 일러준 사람들은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던 오래전 세상을 떠난 시인들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다니던 예술학교 구내식당의 비빔밥 값이 천 원이었다. 그 천 원이라는 돈은 손바닥만 한 판형으로 출간되던 민음사 세계시인선의 가격과 같았다. 용돈이 넉넉하지 않던 나는 오전 내내 비빔밥과 말라르메를, 비빔밥과 로트레아몽을, 비빔밥과 오든을, 비빔밥과 에즈라 파운드를 놓고 고민을 해야 했다. 다행히도 말라르메와 로트레아몽과 오든과 파운드가 비빔밥을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학교를 2학년까지 다니고 군대를 갔는데, 그 무렵 나는 책 읽기에 빠져 있었다. 전투적이었다. 릴케의 말처럼 이 우주를 한없이 알고 싶었다. 외출이나 휴가를 나와서 책을 사들고 들어가면 늘상 고참들에게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때 나는 묘수를 냈다. 서점에서 제목만 봐도 질려버릴 만한 어려운 책을 사들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 방법이 성공을 거두어서 다행히 책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때 할 수 없이《원예학 입문》같은 책까지 읽었던 것 같다. 재미있었다.
난 내 기억력에 대한 과신이 있었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는 외가 쪽 집안 어른이었던 벽초 홍명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시곤 하였다. ‘말도 마라, 그 양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신문을 다 읽고 나서는 그 내용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줄줄 외셨다.” 무슨 신문이었는지, 그때 신문은 몇 면이나 발행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외할아버지의 회상은 어린 시절 내 우쭐함의 한 가지 근원이었디.


내게도 이 기억력 유전자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읽는 책들이 언젠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근사한 이론가가 되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 숱한 문장들을 보며 오로지 내가 쓸 문장만을 생각했을 뿐이었다.《원예학 입문>을 읽으며 나는 내 악보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4


1991년 등단을 했다. 여름날 여자친구 손을 잡고 찾아간 을지서적 잡지 코너에서 가장 예쁜 문예지를 골라 즉흥적으로 투고를 했고, 그것이 얼떨결에 등단으로 이어졌다. 등단을 하고 가장 먼저 친해진 문우가 같은 해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던 김중식이었다. 그와 내가 절친이 된 계기에는 김수영이 있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우리는 어느 가을날 도봉산 자락의 김수영 무덤을 찾아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영국 빵집 사이로 난 길을 한참을 걸어 무덤에 도착했고, 경건하게 소주를 따라놓고 우리는 그 시절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김수영의 시〈헬리콥터>를 비장하게 읽었다. 하늘 아래 우리만 있는 것 같았다. 산을 내려와 수유리 허름한 시장통에서 소주를 마시며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질 불안한 미래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짐승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짐승이 지배한다고 생각했던 땅에서 우리는 시만을 생각했고, 그것이 우리가 갈 길이라고 감히 믿었다. 동시에 우리는 결국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패배라는 게 두렵지 않았다. 우리에겐 시가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순혈주의 같은 게 있었던 귀여운 청년들이었다.


출퇴근하는 직장을 다니면서 시적 자아를 지키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다행인 건 그 고통이 내게는 달갑다는 사실이다. 일터에서 지하철에서 혹은 식당에서, 나는 매일매일 사적 자아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한다. 내 노래를 부르기 위한 투쟁을 한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른다. 그래도 좋다. 내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까.


밥을 위해 일을 하지만 그 일이 내 사적 자아를 위협하는 순간은 비일비재하다. 딜레마이기도 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 하지만 사적 자아만 지킬 수 있다면 그 어떤 일도 내게 위협이 되진 않는다. 단지 나는 많은 시간과 물리력과 내 건강을 일터에 쓰고 있을 뿐이다. 그 대가로 나는 나만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됐다. 노래를 할 수 있어서.


사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미술가나 연극배우나 가수나 발레리나 모두 치열한 일터에서 사적 자아를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인정 받는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그들은 밥 앞에서 정직했고, 예술 앞에서 정직했다. 그들에게 밥과 예술은 수백 수천 시간외 노동과, 수백 수천 시간의 인내의 대가로 오는 사적 자아의 발현이었다.

멀리서 보는 발레리나는 아름답고 가볍지만 무대 위 가까이서 본 발레리나는 충격적일 정도로 땀범벅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땀으로 범벅이 된 발레리나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그 정도의 땀은 흘려야 창조적 산물이 나오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문학 낭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5


한동안 시를 떠나 있기도 했다. 나는 종주먹을 쥔 나쁜 소년처럼 세상에 나가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밥을 해결해주는 직장을 다녔고, 혁명이고 뭐고 다 지나가버린 거리에서 매일 술을 마셨으며, 나비 떼 같은 사랑을 했다.
내가 결코 비범하지 않은 그저 그런 시정잡배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세월이었다.  시를 떠나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세월이었다. 아무것도 아쉽지 않았고, 어떤 문학도 그립지 않았으며, 문학판의 어떤 일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난 이상한 진실을 깨달았다. 말하는 법, 분노하는 법, 사랑하 는 법, 싫고 좋은 것을 구분하는 법을 모두 시에서 배운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시의 법을 따라 살았으므로 나는 시를 벗어나서 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겸연쩍은 일이긴 했지만 나는 다시 시를 쓰기로 했다. 그 심정을 담아 쓴 시가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이 됐던〈나쁜 소년이 서 있다〉였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십 년 만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쓰는 행위가 곧 시임을 알게 됐 다. ‘잘 쓴 시’, 좋은 시’라는 말도 큰 의미가 없음을, 심지어는 시를 발표하고, 시집을 내고 하는 일도 ‘시’의 본질 안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일임을 알게 됐다.


살아 있는 누구도 날 동화시킬 수 없으며. 누구도 날 감동시킬 수 없다. 이것이 나의 질병이다. 오로지 죽은 자들만이 가끔 나를 흔든다. 죽었기 때문이다. 이 부족사회에서 나는 제사장 같다. 존재하지 않는 부족의 혼을 불러오는 자다.
인간은 별거 없다. 다 그저 그렇고 그렇게 산다. 목적 없는 자는 없고, 남을 위해 사는 자도 없다. 그런 인간이 유일하게 위대한 건 죽는 날이 온다는 거다. 현실계에서 사라지는 것. 그것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위대함이다.


아쉽다. 내게 너무나뚜렷한 모국어가 있다는 게. 가령 희화시켜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이 부럽다. 헝가리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 영국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카자흐스탄에서 보내고 대학 은 러시아에서 다니고 결혼은 베트남계 프랑스인이랑 해서 지금은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사람. 늘 나는 나의 상상력과 언어가 부질없고 부박하기를 원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오독이 되기를 원한다.


나의 언어가 뚜렷하고 명쾌한 의미와 음가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내 언어와 싸운다. 언어와 싸우는 것이 과도하고 가당치 않은 책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난그렇게 하고 싶다.
 

6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는 인간과는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시는 최적화된 어떤 사람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시인은 숙주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잘났든 못 났든 간에, 혹은 그 사람이 자신이 쓴 시가 생산되는 구조 전체를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시는 원래 있었던 것이 단지 새로운 조합으로 만들어져 어떤 몸을 빌려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과감하게 이야기하면 시는 우주 어딘가에 원래 있었던 주술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 몸과 정신을 시가 찾아들기 쉬운 최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나의 시 쓰 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게 잘 안 될 때가 더 많다.


물론 시는 몸과 정신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 몸과 정신을 닮는다. 인간이 하는 일이 있다면 단지 그 정도일 뿐이다. 시로 하여금 몸을 닮게 하는 일. 나는 어쩌다 시를 세상에 꺼내놓는 팔자가 됐다. 난 사실 그 팔자에서 도망 치고 싶을 때가 더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인이라는 보직은 멋지지도 않고 자랑스럽지도 않다. 다행스러운 건 내가 시정잡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따라서 난 시정잡배의 시를 쓸 것이다. 

누군가 내 시에 대해 부도덕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내 시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내 시에 대해서 지나친 예술 취향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또 누군가는 내 시에 대해 연애시가 너무 많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또 누군가는 너무 낭만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난 잘 모르겠다. 왜 시가 부도덕하면 안 되는지, 왜 시가 비관적이면 안 되는 지, 왜 시가 예술 취향이면 안 되는지, 왜 연애시가 많으면 안 되는지, 왜 너무 낭만적이면 안 되는지 잘모르겠다.


모든 시는 불온하고 모든 시는 제멋대로 쓰여져야 한다. 모든 시는 그즈음의 외마디 비명이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은 시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세상이 그것들을 꼭 받아줘야 할 책무는 없다.


시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는 결코 친해질 수 없다. 내가 시인으로 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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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허연, 세속도시의 신표현주의자

<김도언의 시인의 얼굴> 네 번째 시인: 허연
(채널 예스, 2015.7.13)



그는 자신의 내력이나 연혁을 구조화하는 동안 양산되는 수많은 추상적 조건 속에서 다양한 구상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수많은 구상적 이미지들을 떠올려보는 건 온전히 독자들의 행복일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는 인간과는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시는 최적화된 어떤 사람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시인은 숙주 일지도 모른다. … 더 과감하게 이야기하면 시는 우주 어딘가에 원래 있었던 주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 몸과 정신이 시가 찾아들기 쉬운 최적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나의 시 쓰기다.”
-허연, 「빗나간 것들에게 바치는 찬사」,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서(문학사상, 2014)


시인의 인상, 이미지의 파편들

주관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그의 인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 글은, 내가 그로부터 받은 인상과 축적된 이미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하는 선에서 매듭되어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만큼 그의 이미지가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다자적이고 난해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를테면 수많은 ‘소립자’로 이루어진 다면체다. 

보헤미안, 까뮈, 댄디, 카프카, 모순, 자기소외, 사무엘 베케트, 부조리, 데카당, 코스모폴리탄, 아웃사이더, 아나키즘, 니힐리스트, 보르헤스. 제임스 조이스.

시인 허연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단어들을 기준 없이 무작위로 배열해봤다. 그는 정말 까뮈 같다. 나른하고 텅 빈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볼 때, 그는 밀납 같은 엄정함으로 현실 너머를 응시하는 실존주의자의 표정을 갖는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이방인들의 가장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표정이 그러했다고 믿는다. 그는 또한 카프카 같다. 창백한 얼굴로 넥타이를 매고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똑같은 직장으로 출근과 퇴근을 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여덟 시 이십 분쯤 출근해 저녁 일곱 시쯤 퇴근하는 걸 반복하는데,(그의 직장은 신문사여서 심지어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퇴근 후엔 술을 마시면서 세속의 명령을 집행한다는 측면에서, 그는 보험국의 심사원으로 ‘위장근무’하며 예술적 자의식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카프카의 비애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재현하는 자다. 그는 콧날이 오똑한 체코인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들이 방심한 채 육체에 쌓인 피로를 푸는 심야에, 책상 앞에 등불을 켜고 앉아 고유한 언어의 칼날을 조탁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저자의 소문과 사실을 다루는 부박한 세속적 조직과 성스러운 시의 제단을 끊임없이 오고간다는 측면에서 모순적 상황과 매순간 부딪쳐야 하는 부조리한 니힐리스트일 수밖에 없으며, 모국어와 순혈이라는 생래적 조건을 여일하게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래디컬한 코스모폴리탄이다. 그가 부단히 전위를 탐하며 실험과 부정을 멈추지 않을 때 그는 새뮤얼 베케트의 표정을 가지며, 집요하게 고전과 이상의 활자에 몰입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언어의 무의식을 해독해내고자 할 때 그는 보르헤스나 제임스 조이스의 표정을 갖는다. 그리고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위장한 채, 익명적 상황을 가공하고 연출하면서 자신이 나고 자란 회색의 거대도시를 활보할 때, 그러니까 쇼핑을 하고, 연애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 욕망을 소비할 때 그는 눈에 띠는 보헤미안이고 댄디며 기꺼이 아웃사이더다. 

쉽게 설명할 수도 없고, 설령 쉽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만만찮은 민망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백이지만, 나는 그의 시와 글들을 따라 읽으면서 일찌감치 그에게서 육친적인 동질감을 읽은 적이 있다. 같은 유전자형을 가진 피가 강제하는 기질과 지향의 유사성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랄 만한 것들인데, 그가 수줍지만 명료한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 집단에 속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할 때, 편집증적인 에고에 자폐적으로 침잠하며 자멸을 꾀할 때, 단독자의 태도로 힘이 모이는 곳을 못 견뎌할 때, 자아를 분열시킨 망명자의 욕망으로 먼 곳을 동경할 때, 나는 여지없이 그에게서 피의 동질성을 읽어냈던 것이다. 아, 여기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상처를 안고 가는 사람이, 내가 걷고 싶은 길을 몇 걸음 앞서서 걷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라고 자백하게 하는 사람, 그가 내게는 시인 허연이다. 

텍스트로만 접하던 그를 처음 본 것은 십여 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한 출판사의 에디터로 일하고 있던 나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였던(그는 현재 같은 신문사(매일경제신문)의 문화부장으로서 재직 중이다) 그의 취재원이 되어 공적인 용무를 가지고 만났던 것이다. 이런 일은 이후 두세 차례 반복됐는데 그때마다 그와 나는 정확히 주어진 용무만을 마치고는 서둘러 돌아서기만 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가 몇 번 ‘곁’을 내주려는 기미를 보였을 때조차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같은 내상을 가진 이들끼리의 연대가 얼마나 자욱하고 매캐한 연기를 피워낼지, 어지간히 숫기가 없던 나는 그 수상한 쾌감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문단 술자리 같은 데서 마주쳤을 때도 어떤 신호를 교환하듯 눈인사만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쭈뼛거림 같은 것이 왜 전혀 없었겠는가. 나는 몇 번이고 돌아서서 그에게서 내가 읽어냈던, 그 비밀스러운 육친적 동질감을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시도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타자가 안전거리 이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정한 방어적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처절하게 내습을 당해본 자의 핍진한 체험에서 오는 것처럼 보였다. 삶으로부터 피습당한 자의 표정을 가진 시인이라니.  

이런 소이연을 상기해보면 인터뷰어로서 내가 그를 점지하고 만나기로 한 것은 어쩌면 매우 내밀하면서도 필연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장소인 강남의 북카페에 나타난 그는 사제복처럼 칼라가 없는 블랙 라운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와 아주 잘 어울리는 입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의 친가 쪽이 일찍이 개화한 천주교 집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집에서는 자식 중 한 명은 꼭 사제나 수녀가 되는 전통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를 그 적임자로 꼽았다고 한다.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그는 혈족이 부여한 자신의 운명에 절대적으로 순응했다고 한다. 착실하고 모범적이고 믿음직한 아들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는 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고 저항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부터 들어봐야겠다.


성스러운 것의 대체재로서의 시



김도언 : 선배님 집안에 사제나 수녀가 나오는 전통이 있다고 들었어요.

허연 : 나는 소위 말하는 서울의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어. 할아버지가 제국대학을 나온 건축기사셨고, 할아버지가 지은 일본식 건물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사였고, 아버지는 미군부대 같은 곳에서 통역관 같은 걸로 일하는 모던보이였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삼남매를 앉혀놓고 누나한테는 너는 대학교수가 되고, 나한테는 사제가 되고, 동생한테는 의사가 되라고 했어. 영광스럽게도 내가 전통을 이을 대상이 되었던 거지.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난 신부가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어. 그래서 특별대접을 받기도 했고. 시네마천국의 토토처럼 신부님 미사 볼 때, 수발을 드는 복사라고 있는데 그걸 하는 순간이 되게 행복했고.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그게 싫어졌던 거야.

싫어진 가장 큰 이유는 고등학교 때 세상에 여자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런데 성직의 길은 여자랑 유리되는 거잖아. 그리고 내가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또 생각보다 게으르다는 걸 알게 되었어. 또 하나 치명적인 건 내가 사람을 안 좋아하더라고. 사제가 되기에는. 그런 이유로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포기했던 거야. 그걸 집에 이야기하니까 난리가 났지. 그 전까지는 예민하고 공부 잘하고 눈물도 많고 그런 학생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돌변하게 되었어. 꼴찌도 해보고 경찰서도 들락날락하고 집안에서도 버려지고. 그 무렵에 내가 왜 이럴까 생각을 해봤는데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난 사실 이런 말이 되게 싫었어. 너는 천상 기자다, 천상 은행원이다, 천상 교사야, 이렇게 규정하는 것들이 싫었던 것 같아. 그러면 어떤 식으로 나만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찾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는데 막연히 그게 창작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미술반이어서 미대를 생각해보기는 했는데, 미대 갈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고. 공부도 안 됐고. 그런데 그때, 사회학을 공부했던 외삼촌이랑 방을 잠깐 같이 쓴 적이 있었는데 외삼촌 책 중에 외국 시집이 많이 있었어. 그걸 사전도 찾아보면서 보고. 그러다 그때 만난 거야, 문학을.

김도언 : 문학을 우연히 만났군요. 그렇다면 특별히 이렇다 할 상처와 콤플렉스 같은 게 없었던 건가요?

허연 : 어느 사이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서 지금 한국 나이로 오십이 되었는데 사실은 진짜 후회하고 있어. 사제의 길을 가지 않은 걸.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가치 있는 삶이었던 것 같아. 그게 나를 계속 따라 다녀서 내가 과격하게 나쁜 짓을 할 때도 사실은 그 콤플렉스가 작용한 거 같고, 내가 과도하게 슈퍼에고를 부릴 때도 그게 작용하는 거 같고. 

김도언 : 숙명으로 주어졌던 길을 가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 콤플렉스가 있으시다는 거죠.

허연 : 그래 운명을 부정하고 거부했던 사건, 그게 나를 만든 큰 부분이었던 것 같아.

중요한 발언이다. 운명을 부정하고 거부했던 것이 콤플렉스로 작용하면서 자신을 만들어냈다는 시인의 자기진단. 그러니까 어떤 대역을 수행하는 자가 자기근원을 응시하면서 지금의 자리를 성찰하는 것. 그의 시편에서 수없이 만났던 자기부정, 자기소외, 자기조롱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사제라는 성스러운 직분을 대체하기 위해 택했던 것 역시, 신성에 대한 자부 없이는 견뎌내기 어려운, 저 오르페우스가 가르쳐준 직업 시인이었다는 것. 성스러움을 피해 또 다른 성스러움 속으로 숨어든 시인의 운명. 하지만 시인은 대체재로 선택한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영 마뜩찮아 한다.

그의 말대로, 그는 문제적 첫 시집 『불온한 검은피』(세계사, 1995)을 펴낸 이후 시의 자리로부터 훌쩍 떠난다. 그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황병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그는 그것을 시와 이격된 자신의 현실을 상징하는 어떤 기표로 받아들이며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공백은 길게 이어지는 듯했지만 그는 화려하게 귀환한다. 첫 시집을 출간하고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을, 그리고 다시 4년 만에 세 번째 시집(『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을 상재한 것이다. 독자와 평단은 재능 있는 유니크한 시인의 귀환을 환영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굵직굵직한 문학상도 주어졌다. 사실 그의 귀환은 2000년대 시단을 화려하게 수놓은 젊은 시인들이 호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첫 시집을 읽으며 문학수업을 했던 김경주를 위시한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적 멘토를 시의 제단으로 다시 불러냈던 것. 그러므로 그의 최근의 시업은 시적 서사의 연역적 역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시간들에 대해 그 자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세속과 성스러운 제단 사이의 왕복

김도언 : 현대시세계로 91년에 등단을 하시고 그동안 세권의 시집을 내셨는데, 첫 번째 시집이 나오고, 두 번째 시집이 나오기까지 공백이 꽤 길었잖아요. 그 공백기가 생업에 전념하는 동안에 어쩔 수 없이 생겼다는 걸 이해하는데, 공백이 길다 보면 다시 시로 귀환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마치 스톤헨지에서 유물이 발굴된 것처럼 다시 시를 쓰고 주목을 받기 시작하셨어요. 세 번째 시집 나올 즈음해서 문학상도 받으셨고요. 선배님 자신이 시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악조건에 처해 있었는데, 다시 시로 돌아오고 시 현장에 복귀하실 수 있었던 동력이 뭔지 듣고 싶어요.

허연 : 사실 시를 누구한테 배워본 적이 없어. 내가 다닌 예술학교도 초창기였던 때라 스승도 없었고, 등단도 어떻게 하는 줄 몰랐어. 다만, 자그마한 파장으로 엄청난 물결을 일으키는 몇 마디 말 같은 걸 보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시를 썼지. 그러다가 별다른 준비 없이 어린 나이에 등단을 하게 됐어. 그리고 입학원서 내듯이 출판사에 시 원고를 보내서 시집이 나왔지.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바빠서도 그랬거니와 시를 많이 못 썼는데, 어느 날 문득 그런 걸 깨달았어. 나는 시에서 다 배웠다. 내가 웃는 거, 우는 거, 말하는 거, 화내는 거. 전부 다 시가 가르쳐준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야. 그래서 시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다시 시를 썼던 것 같아. 근데 신문사 같은데 다니면서 어떻게 시를 쓰느냐고 사람들이 자주 묻는데, 답은 굉장히 간단해. 시 생각만 하는 거지. 나는 기본적으로 시인을 그렇게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단히 멋진 족속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면역체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삶 이외의 공간이나 삶 이외에 어떤 진공상태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

김도언 : 신문사 기자로 일을 하는 동안 시에 몰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시를 쓰지 못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시절에 괴롭지 않으셨어요? 내가 시인인데, 지금 생활 속에 너무 매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잖아요. 또 직업상 문학적인 텍스트를 접해야 했잖아요. 그런 자극이 있어서 더 괴로우셨을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견뎌내고 참아내셨는지.

허연 : 몇 가지 나름의 방식으로 견딘 것 같은데, 우선 감수성, 감성 같은 걸 훼손하지 않게 해준 건 술과 연애였던 것 같아. 허구한 날 술 마시고, 연애하고 그랬던 것 같고. 또 한 가지 모범생들을 이기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아. 신문사에서 일하는 동료들 대부분이 모범생들이니까. 그 친구들을 이기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고. 살아 숨 쉬는 다른 작가나 시인들이 내 경쟁자라는 생각은 솔직히 안 했어. 내가 오만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생각이 안 들더라고. 남의 걸 봤을 때,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도 없고. 온 마음을 다해서 어, 얘 진짜 잘 쓰네, 이런 걸 느끼지도 못했어. 이상하게 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선 감동이 잘 안 와.

김도언 : 예, 그런 말씀 많이 하셨어요. 살아 있는 인간을 혐오한다는 말씀도. 그런데 어떻게 세속의 조직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허연 : 가족을 괴롭히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하잖아. 카프카는 거의 죽는 날까지 보험사에서 일을 했고, 엘리엇은 공공의 적으로 법정에 선 적도 있는 은행원이었고. 나는 사실 기자라는 내 직업이 콤플렉스였던 것 같아. 내가 기자의 모습이 아닌 채로 어느 장소에 갔을 때, 기자라고 하면 그 자리를 나와 버렸고. 반대로 기자로서 어디에 가는데 윗사람들이 시인이라고 소개하거나 하면 짜증을 내고. 그래서 어디 갈 때 나를 어떤 자격으로 대해 달라 미리 부탁을 할 때도 있었어. 의도적으로 아주 칼같이 분리를 한 거야. 훈련을 하니까 되더라고. 그런 노력을 했어. 

김도언 : 그 분리, 그 자아의 분리를 선배님처럼 극단으로 가지고 간다는 것. 그게 저는 상당히 경외스러워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신문사 문화부 기자라는 세속적인 직분과 시인이라는 성스러운 직위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그는 과부하가 걸려 격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주변 지인이 거의 강제적으로 치료를 받게 했다고. 그 분리와 분열의 공포를 기꺼이 앓아내는 시인의 모습, 어찌 애틋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앞서, 신문사에서 일할 때 모범생들을 이기는 쾌감 같은 게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매우 인상적으로 들렸는데, 내 생각에 영민한 그는 ‘시를 쓰는 기자’로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질서와 생리를 모두 조롱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포지션을 명료하게 의식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는 이쪽의 가면과 저쪽의 가면을 번갈아 써가는 식의 위장전술로, 현실적으로 나약하고 무기력하면서 시의 생리에 투신하는 문학주의자들의 ‘순결’도 조롱하고, 세속적인 원리와 이익 앞에서 결사적으로 담합하는 기성사회의 모범생들도 모두 다 조롱했던 것. ‘허연류’라고 말할 수 있는, 독특한 모순과 부조리의 시학이 촉발되는 이 절묘한 스탠스를 그 말고 과연 어떤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제 직접 자신의 시에 대해 발설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허연식 태도, 허연 스타일의 탄생

김도언 : 문학적인 질문을 드려볼게요. 선배님이 91년도에 등단하셨는데, 그게 매우 상징적인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 80년대적인 정서라는 것이 90년대 등단해서 시적활동을 하신 분들한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저는 선배님 첫 번째 시집을 보면서, 개인적인 욕망, 불안, 공포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게 굉장히 신선했거든요. 선배님은 시인이 된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90년대에 시인이 되면서 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의식이 있으셨는지. 저는 첫 번째 시집에 그런 게 많이 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개인적인 내력을 그렇게 필터링도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게 신선했어요. 90년대의 시인으로서 어떤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는지요?

허연 : 솔직히 이야기하면, 시를 쓸 때는 몰랐고. 나중에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주니까 내가 한 짓이 좀 유별난 짓이구나 생각을 했지.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사회구성체 논쟁이 승할 때였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사람이나 감정을 패턴화하고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게 싫었어.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지. 물론 나도 그 나이 때 책 읽은 사람처럼 사회에 분노해서 과격한 모임도 했었고, 노동해방문학 세미나 같은 것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손가락질을 받고 그랬어. 예를 들면, 그 당시에는 무조건 이애주 같은 사람이 최고의 춤꾼이라는 거야. 나는 미하엘 바리시니코프가 더 좋은 춤꿈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 손가락질을 받는 거야. 그렇게 패턴화 시키는 게 싫었고 그래서 돌아서서 씁쓸해했지.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키재기하는 듯한 모습도 많이 봤고. 그런데 내 정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게 어떤 의미에서 90년대적인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 나는 시위하러 갈 때, 손수건도 다림질을 하는 사람이었거든.

김도언 : 시위할 때 얼굴을 가리는 손수건을 다리미로 다렸다구요? ‘댄디’라는 코드가 읽혀요.

허연 : 당시 어떤 문예지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내 시집을 비판했는데, 내용이 이런 거야. 서구취향이라고. 시 제목을 심야특급이라고 하면 되는데 왜 미드나잇 스페셜이라고 하느냐고. 다 그렇게 쓰는 이유가 있거든. 어떤 말이, 후렴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난 사람의 경험이 그 사람한테 장착이 되고 그게 그 사람을 뚫고 나와서 뭔가 이루어지는 게 시라고 생각해, 그런 측면에서 시인은 훌륭한 악기 같은 거지. 악기는 불행해도 상관없어. 문학이 나오는 데는. 나는 훌륭한 악기가 되기 위해 지식과 교양에 편집증적인 관심을 갖고 있어. 그래서 문학과 직접 관계된 어떤 일을 하기보다는 내가 일상 속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들을 많이 훈련했던 것 같아. 훌륭한 악기가 되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어류도감, 지리부도 같은 것도 많이 봤지.

김도언 : 제가 선배님 시에서 아주 인상적으로 발견했던 요소가 자기조롱, 자기풍자 같은 거예요.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작품에서 그게 가장 잘 나타나는 것 같은데요. 선배님은 자기조롱이나 자기풍자를 상당히 전략적으로 하시고 있는 것 같아요. 선배님 문학에서 자기조롱이나 자기풍자가 가지는 의미는 뭘까요?

허연 : 어떤 태도 같은 거겠지. 나는 솔직히 내가 천재인 줄 알았어. 나를 천재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너무나 기억력이 좋았고, 읽은 건 줄줄 외우고 그런 정도였고. 우리 집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 것처럼. 그런데 서른 살이 넘어가고 어느 날 깨달았어. 내가 글을 조금 읽고, 조금 폼 잡을 줄 아는 시정잡배였구나라는 걸.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 그래도 마인드컨트롤을 했고, 시정잡배의 시를 쓰기로 마음먹었어. 나는 시정잡배다. 그때 막 홀가분하게 살았어. 심지어 전화 받을 때도 아, 나 잡배인데, 그러곤 했어. 자기조롱, 자기풍자는 그런 거겠지.

김도언 : 선배님 어느 인터뷰에서 첫 번째 시집에 실린 시들을 쓸 때 테러리스트가 되어 세상을 조져보자는 생각으로 쓰셨다고 했는데, 내가 세상을 조질 수 있는 테러리스트가 되려면 그 자격을 일단 자신한테 부여를 해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버려야 되잖아요. 그걸 버려야 내가 부담 없이 조질 수 있거든요. 그런 게 아닐까. 지금 잡배라고 표현하신 게.

허연 : 세 번째 시집을 쓸 때는 늙은 파이터의 기분이 들더군. 늙은 파이터의 도전장 같은. 내가 원하는 천사는 이런 거다. 니들과는 다르다. 내 방식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고.
 

고독하고 세련된 신표현주의자

김도언 : 시인 이수명은 90년대 시인들을 언급하면서 그 전시대 시인들과 90년대 시인들의 다른 점을 공동체에서 개인을 끄집어낸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그러면서 박상순이나 강정 등을 언급하죠. 저도 선배님의 시를 읽으면서 선배님의 주된 관심은 선배님 자신이라고 생각했어요. 에고, 자기 자신. 저는 선배님이 자기 자신을 가지고 놀면서 거기서 느끼는 유희 같은 게 선배님 시 속에 표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허연 : 등단을 했는데, 동료들도 낯설고 나도 낯설더라고. 나는 사실 장터에서 나물장사를 하는 엄마도 없었고, 동구 밖 이런 것도 뭔지를 모르고. 내가 그려낼 수 있는 것이 대다수 시인들하고 다르더라고. 생각을 해보니까 서울 한복판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시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 대부분이 향토색이 있는 지방출신 친구들이더라고. 난 시를 세상에 내놓을 때 어떤 기준이 있는데 그걸 지금도 견지하려고 애쓰고 있어. 세상에는 무언가를 주장하고, 앞서가는 사람들이 늘 있겠지. 그런데 그들이 가끔씩 뒤를 돌아봤을 때, 어, 저기 허연이 있네, 하는 섬뜩한 대상이 되고 싶었어. 잘 나가고 싶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어떤 행렬을 비웃는 시를 쓰고 싶었고, 그것이 내 시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거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나 자신이 교과서였어, 내 자신이 스승이었고, 내 자신이 경멸의 대상이었고. 가끔은 내가 너무 사랑스럽고, 가끔은 내가 너무 저주스럽고, 가끔은 내가 너무 야비하고 쪽팔리고, 가끔은 내가 좀 한심하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내가 대상화가 되었던 것 같아.

김도언 : 인간의 삶에서는 모순과 부조리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선배님의 경우 그게 태생적인 건지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건지 궁금해요. 선배님이 무언가를 욕망하는데 물리적인 조건은 그걸 좌절시키기도 할 테니까요.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가 발생하고 거기서 모순이 발생할 때 어떤 면에서는 선배님이 그걸 개선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허연 : 그렇게 사는 게 사실은 되게 힘들어. 난 소위 ‘절친’이라 부를 만한 사람도 없고 누구에게 먼저 연락하거나 하는 일도 드물어. 어차피 말도 잘 안 통할 거 같고. 난 모순과 부조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하는 편이지. 그래서 이런 사회적 태도가 있어. 나는 평소에 사람들한테 착하게 대해. 예의를 굉장히 중시하고. 사실 회사라는 것도 그래. 일터잖아. 계약관계에서 일하잖아. 회사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 안 건드려. 주변사람들 하고 아무 문제 안 일으키고 정말 다시 안 볼 사람 아니면 예의바르게 지내고 불편한 건 살짝 살짝 피하고. 문학적 욕망이 좌절할 때도 아픈 걸 티를 안냈어. 그러면 내가 불쾌해. 그런 것에 내가 반응하는 게 나 스스로에 대해 잘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말라르메랑 싸우고, 백석이랑 싸우고, 김종삼이랑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 옛날에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세 가지를 무서워했대. 공산주의와 자본, 그리고 갈리마르(문학출판사). 히틀러가 두려워 한 갈리마르 속에 문학의 위대한 속성이 있는 거야. 권력 자체가 나븐 게 아니지, 교체되지 않으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거야. 나는 내 문학이론을 어떤 권력의 지형이나 계보에서 펼쳐 보이고 싶지 않거든. 그냥 나는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서 소비되고 싶어. 우리가 아웃사이더를, 언더그라운드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잖아. 그런 언더그라운드로 남고 싶은 마음이 있고.

시인 허연은 자신의 문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꼽아달라는 주문에 ‘나쁜 소년’을 들었다. 그것은 그가 가장 즐겨 쓰는,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진 페르소나다. 글의 앞머리에서 나는 시인 허연을 ‘수많은 소립자로 이루어진 다면체’라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내력이나 연혁을 구조화하는 동안 양산되는 수많은 추상적 조건 속에서 다양한 구상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수많은 구상적 이미지들을 떠올려보는 건 온전히 독자들의 행복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가 안젤름 키퍼와도 같은 신표현주의자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세속적 조건에 새로운 입체성을 부여하고 싶어 한다. 그는 어떤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쉽다. 내게 너무나 뚜렷한 모국어가 있다는 게. 가령 희화시켜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이 부럽다. 헝가리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 영국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카자흐스탄에서 보내고 대학은 러시아에서 다니고 결혼은 베트남계 프랑스인이랑해서 지금은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사람. 늘 나는 나의 상상력과 언어가 부질없고 부박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오독이 되기를 원한다. 나의 언어가 뚜렷하고 명쾌한 의미와 음가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내 언어와 싸운다. 언어와 싸우는 것이 과도하고 가당치 않은 책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다.” 

그는 자신의 기원과 혈통과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자신이 재구성되기를, 재발견되기를 꿈꾸는 것일까. 그것이 새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것은 얼마나 도저한 탐미적 욕망인가. 성과 속의 경계에서, 정신을 앓아내며, 육체의 피로를 즐기며 오늘도 정금의 시를 길러내고자 하는,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고독하고 세련된 세속도시의 신표현주의자다.
 

 

허연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에서 「단행본 도서의 베스트셀러 유발 요인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시 창작에서의 영화이미지 수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학교 미디어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고전탐닉』등이 있다. 한국출판학술상, 시작작품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