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史記列傳, 사마천

강태공(姜太公)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1. 11. 5. 12:39

강태공
태공망(太公望)

본명 강상(姜尚)
별칭 강자아, 여상(呂尚), 강태공(姜太公)
직업 정치가, 병법가
활동 기간 주(周)나라

 


1. 태공망의 생애

 

1.1 태공망의 이름과 출신


흔히 강태공(姜太公)으로 알려져 있는 강상은 동쪽 바닷가 동해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이 되어 우임금이 물과 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그들은 순임금과 하나라 시대에 여(呂) 또는 신(申) 땅에 봉해졌다. 성은 강씨(姜氏)였다. 하나라와 은나라 때는 방계의 자손이 신과 여 땅에 봉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평민이 되기도 했다. 강상(姜尙)은 그 후예다. 

 

‘동해’는 지금의 강소성과 산동성 일대의 바닷가를 지칭한다. ‘사악’은 요순 때 사계절을 관장하는 벼슬의 이름으로 사방의 산악을 관리했다고 한다. 여(呂)는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서쪽 일대, 신(申)은 하남성 남양시 일대로 추정된다. 여상은 이름이 상(尙), 자가 자아(子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상은 여상(呂尚), 태공망(太公望)이라고도 불리는데 여상은 봉지인 여(呂)에서 성을 취하여 부른 것이고, 태공망은 주 문왕과의 일화와 관련이 있다.



1.2 사마천의 《사기》의 제태공세가에서의 여상과 주문왕


여상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사(師)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몇 가지 말을 사마천의 《사기》의 제태공세가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1>

 

“여상은 동해(東海) 근처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이 되어 우임금이 물과 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그들은 순임금과 하나라 시대에 여(呂) 또는 신(申) 땅에 봉해졌다. 성은 강씨(姜氏)였다. 하나라와 은나라 때는 방계의 자손이 신과 여 땅에 봉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평민이 되기도 했다. 강상(姜尙)은 그 후예다. 본래의 성은 강씨지만, 봉지를 성으로 삼은 까닭에 여상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2>

 

또 다른 일화에 따르면 당초 여상은 나이가 70세에 이르도록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오직 글공부만 열심히 했다. 그의 아내는 글공부만 하는 무능한 남편을 힘겹게 먹여 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일을 나가면서 멍석에 깔아놓은 보리가 비에 젖지 않도록 단속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여상은 방 안에서 공부하느라 소나기가 쏟아지는데도 비가 오는 것을 몰랐다. 여상의 아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멍석에 널어놓은 보리 대부분이 젖어 물에 떠내려간 상태였다. 화가 난 아내가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여상이 이같이 탄식했다.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이제 80세가 되면 운이 트이는데 그것을 못 참고 떠나가다니 안타깝다!”

혼자가 된 여상은 위수의 강가로 집을 옮겨 반계(磻溪)라는 곳에서 매일 낚시를 했다. 미끼를 끼우지도 않은 채 곧은 낚싯바늘을 물에 드리웠다. 물고기를 잡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알아줄 군주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주문왕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천제(天帝)가 나타나 현인을 보내줄 것을 약속했다. 주문왕이 곧 사람들을 시켜 꿈속에서 본 현인을 찾게 했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점복을 관장하는 태사(太史)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점괘가 이같이 나왔다.

“사냥할 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나 큰 곰도 아니고, 패왕의 보필이 될 사람이다.”

당시 태사는 곧 주문왕에게 위수(渭水) 근처로 사냥을 나가면 반드시 현인을 만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주문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 북쪽으로 나아갔다. 위수는 지금의 위하(渭河)로 섬서성 중부를 흐르고 있다. 주문왕은 도중에 위수의 지류인 반계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을 보게 되었다. 가까이 다가간 주문왕은 천하의 정세에 관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여상의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육도》의 첫 편인 〈문사(文師)〉는 그 내용을 상세히 소개해놓고 있다. 주문왕은 여상의 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고는 곧 수레를 함께 타고 돌아와 국사(國師)로 모셨다. 후대인들은 여상을 태공망(太公望)으로 칭했다. 주문왕의 조상인 고공단보(古公亶父) 태공이 간절히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이다.

 

<3> 


《사기》의 한 일화에 따르면 당시 태공망 여상은 박학다식하여 은나라 주를 섬겼으나 주가 포악무도하자 이내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이후 제후들에게 유세했으나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 마침내 서쪽으로 가서 주문왕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사마천은 이 설도 매우 유력하다고 판단해 개략적인 내용을 소개해놓았다.

 

<4>


〈제태공세가〉에 실려 있는 또 다른 일화에 따르면 당초 여상이 처사로서 바닷가에 은거할 당시, 마침 서백(西伯)으로 불리고 있던 주문왕이 지금의 탕음현 북쪽으로 추정되는 유리(羑里)에 구금되었다. 주문왕의 측근인 산의생(散宜生)과 굉요(閎夭)가 여상을 불러내 대책을 논의했다. 여상이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서백은 현명하고 또 어른을 잘 모신다고 한다. 그를 어찌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세 사람은 곧 미녀와 보물을 구해 은나라 주에게 주문왕의 죗값으로 바쳤다. 덕분에 주문왕은 구금에서 풀려나 주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일화는 여상이 주문왕을 위수 가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일화와 배치된다. 구성은 약간씩 다르나 여상이 지우(知遇)를 입지 못해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주문왕을 만났다는 기본 내용만큼은 모두 동일하다. 어느 설화가 역사적 사실에 맞는지 여부를 논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모두 주문왕과 여상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동준 <무경십서, 2012, 역사의 아침>의 종합 결론  


여상이 제 발로 서쪽으로 주문왕을 찾아갔다는 일화가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듯싶다. 《삼국지》 배송지 주에 인용된 《위략》과 《구주춘추》에는 제갈량도 유비를 제 발로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도 후대인이 만들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태공망의 일화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그같이 보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다. 

 

1.3 여상과 주의 건국

 

《사기》의 〈주본기〉와 〈제태공세가〉에 따르면 당시 주문왕은 여상을 얻은 뒤 매사를 그와 의논하며 정사를 펼친 덕분에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다.

일례로 공평한 정사를 펼치며 지금의 산서성 평륙현 북부에 있는 우(虞)나라와 섬서성 대려현 동남쪽에 있는 예(芮)나라의 분쟁을 원만히 해결하자 사람들이 ‘천명을 받은 주문왕’이라 칭송했다. 백성의 지지를 배경으로 주문왕은 곧 지금의 섬서성 노현 동쪽에 있는 숭(崇)나라, 감숙성 영대현 서남쪽의 밀수(密須), 섬서성 빈현과 기산 일대의 견이(犬夷) 등을 정벌했다. 이어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서남쪽에 풍읍(豐邑)을 크게 건설했다. 천하의 3분의 2가 그에게 귀순하게 되었고, 이는 모두 여상의 계책 덕분이라는 것이 《사기》의 견해다.

풍읍은 주문왕이 기존의 기(岐)를 버리고 새 도읍으로 정하면서 명칭이 풍경(豐京)으로 바뀌었다. 풍경의 명칭은 풍하(灃河)의 서쪽 언덕에 위치한 데서 나왔다. 주문왕은 풍경으로 천도한 것을 계기로 주군의 나라인 은나라를 공벌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결전을 앞두고 주문왕이 병사하고 말았다. 뒤를 이어 아들 희발(姬發)이 보위에 올랐다. 그가 주무왕이다. 그는 먼저 풍하 동쪽 언덕에 새로 도성을 세웠다. 이것이 호경(鎬京)이다. 풍경과 호경은 풍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에 있었다.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풍경에는 주왕실의 종묘가 남아 있었던 까닭에 주나라가 건립된 이후에도 서주의 왕들은 늘 풍경에 머물며 국사를 처리했다. 사가들은 두 곳을 하나로 묶어 풍호(豐鎬)로 칭했다.

당시 은나라 주왕은 비중(費中)을 등용해 국정을 담당하게 했다. 〈은본기〉에 비중은 아첨을 잘하고 사리사욕만 채울 줄 아는 소인배로 묘사되어 있다. 은나라 백성 모두 그를 미워했다고 한다. 이때 은나라 주왕은 훗날 진(秦)나라의 선조이며 비렴(蜚廉)의 아들인 악래(惡來)를 등용했다. 〈은본기〉는 악래가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를 좋아했으므로 이 때문에 제후들과 은나라의 사이가 더욱 멀어졌다고 기록해놓았다. 진시황 사후 진나라가 이내 패망하면서 만들어진 전설일 공산이 크다. 은나라 주의 서형(庶兄)인 비간(比干)이 간언을 했으나 주가 듣지 않았고, 상용(商容)이 매우 어질어 많은 백성이 따랐으나 주가 등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패망한 왕조의 인물은 모두 악인으로 몰리게 마련이다.

주무왕은 풍경에서 호경으로 천도하자마자 본격적인 은나라 공벌 준비에 나섰다. 그 사이 은나라 주왕은 서형인 비간을 죽이고, 충간을 하는 기자(箕子)와 태사(太師) 자(疵) 등을 옥에 가두었다. 많은 현신과 명장이 하나둘 주왕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황음무도한 모습을 보였다. 당초 주왕의 또 다른 서형인 미자(微子)는 비간을 찾아가 함께 떠날 것을 권했다. 미자는 지금의 산동성 노성현 동쪽 미(微) 땅을 봉지로 갖고 있었다. 모친이 정실이 아닌 까닭에 태자가 되지 못했다. 비간은 미자의 권유를 받자 이같이 말했다.
“신하는 죽더라도 군왕에게 충간을 해야 한다.”


그러고는 계속 간했다. 주가 대로했다.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7개나 있다고 들었다!” 곧 좌우에 명하여 비간의 가슴을 쪼개 심장을 꺼내보였다. 기자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여 남의 노비가 되고자 했으나 주왕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 주무왕이 막 군사를 이끌고 출발하려 할 때 두 노인이 나타나 주무왕이 탄 말의 고삐를 잡으며 정벌을 만류했다.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형제였다. 두 사람은 도덕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주무왕을 찾아와 이같이 간했다.  “주왕은 비록 폭군이나 모든 제후의 군주입니다. 신하로서 군주를 치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게다가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뿐입니다. 정벌을 멈추고 덕치를 베풀도록 하십시오.”

주무왕은 이를 듣기는커녕 오히려 두 사람을 즉시 추방했다.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두 사람은 신하가 군주를 뒤엎는 세상을 비관하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주무왕이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맹진(孟津)에서 제후들을 모았다. 맹진은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 동북쪽에 있었던 황하의 옛 나루터다. 사서에는 맹진(盟津)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주무왕이 이곳에서 제후들과 맹서한 후 은나라를 친 데서 나온 것이다.

주무왕이 은나라의 성읍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맹진에 이르자 그의 휘하로 모여든 제후가 800명에 달했다. 이때 세찬 눈보라와 비바람이 몰아쳤다. 홀연히 사해의 해신(海神)과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이 사람으로 변신해 하늘의 뜻이 주나라에 있음을 말하면서 적극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 덕분에 대군이 무사히 황하를 건널 수 있었다. 당시 주무왕은 사흘 동안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것을 흉조로 여기며 몹시 두려워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태공망 여상은 오히려 그 비가 무기를 깨끗이 닦아주는 길조(吉兆)라고 말해 주무왕을 고무시켰다고 한다. 《당리문대》의 ‘권 하’는 정반대의 일화를 실어놓았다. ‘권 하’의 해당 대목이다.

“태공망이 주무왕을 도와 목야(牧野)에 이르렀을 때 공교롭게도 뇌우(雷雨)가 퍼부었습니다. 깃발과 북이 모두 찢어지자 군심이 흉흉해졌습니다. 이때 산의생이 길흉을 점친 뒤 길조가 있을 때 진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병사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기에 점복을 이용해 신의 도움을 빌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때 태공망이 일갈하기를, ‘썩은 풀과 말라빠진 거북등으로 무엇을 물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신하로서 군주를 치고자 하는 것이다. 점괘가 불길하다고 해서 어찌 훗날 다시 거병할 날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주무왕과 함께 곧바로 진격해 은나라를 멸했습니다.

산의생이 먼저 점복을 통해 승리의 결정적인 계기가 왔는지를 알고자 했고, 태공망은 그 계기가 이미 왔다는 것을 알고 점치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방법은 다를지라도 결정적인 계기에 올라타 임기응변으로 승리를 거두어 대사를 이루고자 한 점에서는 같습니다.   "신이 ‘음양의 술수는 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결정적인 계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 때 이를 적극 활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조정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일의 성사 여부는 오직 인간의 부단한 노력으로 일을 추진하는 인사(人事)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은나라 수도인 조가(朝歌) 근교의 목야는 지금의 하남성 급현 부근을 말한다. 《당리문대》에 나오는 일화는 당시 주무왕이 은나라 주왕의 군사를 물리친 ‘목야전투’와 관련해 다양한 일화가 전래되었음을 뒷받침한다. 여상이 승리를 견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공통된다.

주무왕은 병거 300대, 용사 3,000명, 무장한 병사 4만 5,000명을 이끌고 제후들과 함께 목야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대회를 열었다. 은나라 주왕은 군사 17만 명을 모아 70만 대군이라고 큰소리치며 영격에 나섰다. 양측의 군사가 목야에서 대치했다. 목야전투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전쟁으로 간주되고 있다. 주무왕은 여상에게 용사 몇 명을 보내 싸움을 이끌도록 했다. 여상의 용사들이 돌진하자 주무왕의 정예부대인 용사 3,000명이 병거 300대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랐다.

당시 주무왕은 주왕의 목을 벤 뒤 행군할 때의 지휘용 깃발인 태백기(大白旗)에 매달았다고 한다. 이어 기자를 풀어주고, 비간의 묘에 봉분을 해주고, 상용이 살던 마을을 표창했다. 그는 또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에게 봉토를 나누어주고 은나라 선왕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주나라 건국의 대공을 세운 여상은 지금의 산동성 동부 지역을 봉지로 받았다. 그곳이 바로 제(齊)나라다. 제환공이 여상의 후손이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지 2년 만에 홀연히 죽고 말았다. 뒤를 이어 나이 어린 아들 희송(姬誦)이 보위에 올랐다. 그가 주성왕(周成王)이다. 주무왕의 동생인 희단(姬旦)이 섭정을 했다. 그가 바로 공자가 성인으로 떠받들었던 주공(周公)이다. 주공의 동생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등이 주공을 의심했다. 곧 무경과 손을 잡고 난을 일으켰다. 주성왕이 주공에게 명해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주공이 3년에 걸쳐 이들을 토벌하자 주성왕이 미자에게 지금의 하남성 일대를 봉해 은나라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곳이 바로 송(宋)나라다. 송나라는 전국시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장자(莊子)는 송나라가 패망할 당시의 유민이다. 

 


1.4 제(齊)나라 건국


문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했다. 2년 후 임금은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가두었다. 무왕이 주 임금을 정벌하기에 앞서 거북점을 쳤는데 징조가 불길하게 나오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공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오직 여상만이 무왕에게 강하게 정벌을 권하였고, 무왕은 마침내 정벌에 나서 상을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었다. 무왕은 사상보(무왕은 여상을 사상보(師尙父)라 했다.)를 제(齊)의 영구(營丘)에 봉했다.


여상은 동쪽의 봉국으로 가서 정치를 고쳐 그곳의 습속에 따라 예를 간소하게 했다.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어업과 소금업의 이점을 잘 살리니 많은 인민들이 제로 와서 제가 큰 나라가 되었다. 또한 주 성왕(成王)이 어릴 때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키고 회이(淮夷)가 주를 배반하자 여상에게 다섯 등급의 제후와 아홉 주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정벌권을 부여했다. 정벌권을 가진 제는 더 큰 나라가 되었고, 영구를 도읍으로 삼았다. 태공이 약 백 살 넘어 죽고 그 아들의 아들로 제나라는 이어졌다.

 

 


2. 현대적 의미


강태공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서백에게 등용되어 입신출세하였다. 강태공은 많은 세월 위수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했는데, 사실은 고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세월을 낚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러한 강태공의 고사를 잘 알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저 한가롭게 낚시나 하러 다니는 사람, 혹은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 낚시광을 일러 강태공이라 부른다. 강태공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때를 기다려 제후 자리에까지 오른 강태공의 생애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일 것이다.

 


3. 관련 서적


《봉신연의(封神演義)》
명(明)대 신마소설(神魔小說) 《봉신연의(封神演義)》 는 100회로 이루어진 장회소설로, 신마소설은 신과 마의 다툼을 소재로 한 소설로 노신(魯迅)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 에서 처음 쓰인 용어이다. 봉신연의의 자세한 창작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략 융겅(隆慶, 1567~1572)에서 만력(萬曆, 1573~1619) 연간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육서성(陸西星)이라는 설과 허중림(許仲琳)이라는 설이 있다.
강태공이 주(周) 문왕(文王),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상(商)의 주(纣)를 토벌한 역사적 배경을 그리고 있으며, 많은 고사이야기와 강태공 이야기 이외에 다양한 신선, 요괴 및 闡敎, 截敎의 도교 교파 간의 싸움이 등장한다.

《강태공전》
《강태공전》은 작자와 창작 연대 미상의 조선후기 한글소설이며, 《강태공실기》라고도 한다. 《강태공전》은 역사적 사실로 전승되어오던 ‘무왕벌주(武王伐紂)’ 설화를 강태공의 일대기를중심으로 비현실적이고 신이한 요소를 더하여 소설로 꾸민 작품이다. 필사본 10종, 경판 방각본 3종, 활자본 8종이 현존한다. 강태공전은 봉신연의의 한글 축약 번안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강태공전》은 강태공을 중심으로 《봉신연의》를 재구성했다. 따라서 봉신연의에 비중 있게 등장하던 여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는 매우 간략하게 다루거나 심지어 생략하고 있다.

《육도삼략(六韜三略)》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주나라 강상(강태공)이 썼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병법서이다.
《육도(六韜)》의 ‘도’는 원래 활집이나 칼전대를 말한다. 여기서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 파생되었다. ‘도’는 바로 병법의 비결을 뜻한다. 육도의 명칭은 전체의 내용을 6개의 도로 나눈 데서 나왔다.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가 그것이다. 6권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자는 1만 6,800여 자다. 《삼략》의 4배 분량에 해당한다. 여타 병서와 비교할 때 매우 많은 편에 속한다. 《육도》는 오랫동안 주나라의 건국공신인 태공망 여상(呂尙)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적으로 볼 때 지금으로부터 3,000년도 넘는 까닭에 역대 병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병서에 해당하는 셈이다.

 


4. 관련 고사성어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한번 저질러진 일은 되풀이하지 못한다.

상(商)나라말기 주왕(紂王)은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나라를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있었다. 이에 주의 무왕이 아버지 문왕의 유지를 받들어 강상(姜尙)등의 도움으로 난을 일으켜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상(商)나라를 무너뜨린 뒤, 주(周)나라를 세웠다.  본래 강상(姜尙)은 동해의 한 마을에서 가난하게 사는 선비였다. 그가 마씨(馬氏)와 결혼을 했는데 늘 책만 읽고 가정은 돌보지 않아 끼니를 이을 수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였다. 이에 마씨(馬氏)는 집을 나가 버렸고, 강상(姜尙)은 허구헌날 낚시질만 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서백(西伯)을 만나 입신출세하여 제(齊)나라의 시조가 되었을 때 집을 나간 마씨(馬氏)가 돌아와서 이제는 밥 굶을 일 없으니 다시 살겠다고 했다. 강상(姜尙)이 마씨(馬氏)에게물을 길러오라 시키고, 물을 길러오니 다시 마당에 부으라고 하였다. 마당에 물을 부으니 이제는 그것을 다시 동이 주워 담으라고 하자 마씨(馬氏)가 땅에 엎질러진 물을 어찌 주워 담을 수 있냐고 따졌다. 이에 강상(姜尙)이 말했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복수불반분, 覆水不返盆) 한번 나간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수구초심(首丘初心)|-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근본을 잊지 않는 마음


강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 영구(營丘)에 봉해져 계속해서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 살았으나 주(周)나라에 와서 장례(葬禮)를 치렀다.


이를 두고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고지인유언 왈호사정구수인야(古之人有言 曰狐死正丘首仁也;음악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즐기며 예란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옛사람의 말이 있어 말하기를 「여우가 죽을 때 언덕에 머리를 바르게 하는 것은 인(仁)이다.」라고 했다.여기서 유래된 말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다. 이는 《예기(禮記)》 단궁상편(檀弓上篇)에 나오는 말이다.

 

 

 


참고자료


사마천,《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유수민, 『封神演義』 속 哪吒 형상 小考 : 道敎的 토착화 및 幻想性과 관련하여, 한국중어중문학회, 중어중문학 61, 2015.8, 3-26
유수민, 조선후기 한글소설 <강태공전>의 <封神演義> 번안 양상 小考, 한국중어중문학회, 한국중어중문학회 학술대회 자료집 , 2016.11, 283-287
중국 위키백과 - 太公望(태공망)
중국 위키백과 - 六韜(육도)
고종문,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본기』, 키메이커, 2015
《예기(禮記)》 단궁상편(檀弓上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