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사마천의 사기 열전
1. 사기열전은 어떻게 서술되었는가
사기열전은 서술에 있어 인물의 비중을 고려하여 안배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독자에게 극적인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대립되는 인물을 같은 편에 놓는 경우도 많다. 또한, 유림, 혹리, 자객, 유협, 골계 등 유사한 직업군을 한데 묶어 차례로 배치함으로써 인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열전이란 말을 풀이할 때 열이 배열이나 서술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데에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는 듯하다. 전은 보래 경전의 주석을 가르키는 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두로 전해진 것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전기로 받아들여져 왔다. 사마천은 전기를 개인의 역사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라고 하면 주인공의 삶을 전부 담아야 하는데 사기열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실도 더러 있다. 예컨대 두 번째 관인열전을 보면 관중과 안영에 대한 서술은 철저히 무시되고 그들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두 일화가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사마천은 열전에서 인물에 대해 나열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그 인물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특징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중니제자열전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은 후반부에 이름만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또한 사마천은 자신이 입수한 문헌 가운데 될 수 있는대로 도덕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들을 먼저 고르고 거기에 평가를 더했다. 독자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화를 입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인물의 행동에서 본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으면 아예 그를 무시하고 다른 이의 전기에 곁들여 포함시키기도 한다. 진나라 말기에 권력을 휘둘렀던 환관 조고의 경우 다른 인물들의 열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이사열전 후반부는 조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로 한다. 사마천은 인물들의 개별적인 유형에 입각해서 자신을 포함하여 당대를 움직인 인물들을 재구성하고 그런 근거를 그 이전의 경서와 제자서 뿐 아니라 민간의 구전에서 취하는 유연성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사기에서 자료의 취사 선택 범위는 어디인가? 사기는 시간적으로 2000여년을 포괄하지만 이 중 과반수가 한나라 시대의 것이다. 무제는 한나라의 제5대 황제로서 고제, 혜제, 문제, 경제의 통치를 거치면서 중앙집권체제가 확고해졌을 때의 통치자이다. 이 시기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면서 학술이 번성했다. 따라서 각 분야마다 대표적인 학자가 탄생했으니 경학가요 평론가인 동중서, 문장가 사마상여, 군사전략가 위정과 곽거병, 천문학자 당도, 탐험가 장건, 음악가 이언년 등 걸출한 인물이 무제의 수하에 있었다. 이런 면에서 사기가 후한의 무제 때 탄생한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다.
2. 사기 열전에 기록된 시대의 인물들은 누구인가?
사기 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사기의 백미로서 열전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백이 열전은 지조와 소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관안 열전에서는 진정한 우정을 다룬 관포지교의 고사가 담겨있고,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안다는 관중의 정치관도 배어 있다. 명재상 안영과 마부 이야기는 안영의 뛰어난 안목을 보여 준다. 전국시대에 활약한 병법가들을 다룬 사마 양저 열전, 손자 오기 열전, 오자서 열전도 있다.
상군 열전에서는 법과 원칙의 소유자 상군, 즉 상양에게서 냉철한 개혁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소진 열전과 장의 열전은 합종과 연횡이라는 전략으로 천하를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의 처절한 두뇌싸움을 보여주는 명편이다. 두 사람은 같은 문하에서 배웠지만 나중에 정치적 라이벌 관계가 된다.
지혜주머니라고 불린 저리자와 어린 나이에 기지가 뛰어났던 감무 이야기도 있고, 외척이면서 정치에 참여한 양후도 열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인재를 예우하여 수천 명의 식객을 거느렸던 전국 사공자, 즉 맹상군 전문, 평원군 우경, 위 공자 무기, 춘신군 황헐의 여러 일화도 엿볼 수 있다.
피를 뿌려서라도 군주의 위엄을 지킨 염파와 화씨벽을 지키려는 인상여의 기개를 다룬 염파 인상여 열전에는 사나이의 의리, 큰 나라끼리의 사귐에는 법도가 있다는 선비의 마음가짐, 나라의 위급을 먼저 생각하는 지식인의 자세가 담겨 있다. 전단 열전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노중련 추양 열전에서는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을 보여 준다. 청빈한 지식인을 보여 주는 굴원 가생 열전에서는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진귀한 재물은 사둘 가치가 있다고 한 투자가 여불위는 진시황의 생부라는 전설적인 요소가 더해지면서 열전의 주요 인물로 자리했으며,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의리파 인물의 충절에 담긴 자객 열전은 진시황을 죽이려 한 형가를 비롯한 다섯 명의 자객을 다루고 있다. 이사 열전은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신의 위치에 달려 있다는 냉혹한 현실주의자 이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진시황의 최측근이면서 동시에 재위 계승의 농간을 부리다가 자결하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다.
53권 남월 열전부터 동월 열전, 조선 열전, 서남이 열전 등은 한나라 변방 지역의 민족들 사이의 충돌과 화해의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밖에도 사기 열전에는 청렴한 관리와 엄격한 법 집행을 하는 혹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혹리 열전에서 사마천은 혹리 열두 명이 행적을 통해서 한 무제의 무모한 행적을 비판하면서, 법령이 늘수록 도둑이 느는 이유가 있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또한 유협 열전에서는 춘추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유협의 세계를 담고 있다.
이처럼 이사 열전이나 골계 열전에서 볼 수 있는 주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 자객 열전에서 보이는 구도의 설정 능력, 여불위 열전에서 볼 수 있는 구성방식이나 희극적 효과의 운용은 중국인의 문사체 관념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례이다.
일반 역사서와 달리 사기 열전에는 주관적 서술이 적잖이 드러나 있는데 그럼에도 사마천 자신의 사료 비판 능력과 어우러져 탄탄한 역사 서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사마천의 혼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기 열전의 서술방식에는 냉정한 이성과 처절한 열정을 갖고 살아간 시대의 거장들의 숨결이 행간마다 녹아 있다. 사기 열전이 폭넓은 독자층을 끌어들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사기 열전은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세계관과 인생관 위에 개인적인 비극을 역사의식으로 승화시켜 시대를 살아간 인물을 조명해 나갔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무왕의 제왕인 공자와 시대에 저항을 택한 백이와 숙제를 등장시키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쳐 나간다.
사실상 사기 130편 가운데 인물 전기로 구성된 것이 112편인데, 이 중에 57편이 비극적 인물의 이름으로 편명을 삼았다. 그리고 20여 편은 비극적 인물로 표제를 삼지는 않았으나 들여다보면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나머지 70 여편에도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편에서 비운의 인물이 등장한다. 격동의 시대를 약 120여 명이라는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냈으니 결국 사마천에게는 비극이야말로 시대의 표징이었던 것이다.
한나라 초기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이성 왕 이야기의 주인공들인 한신, 팽월, 경포 등 3명은 모두 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나름대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패배한 영웅 항우의 모습을 그린 항우 본기와 함께 읽으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리요?’라고 소리 높이 외쳤던 진섭을 그린 진섭 세가와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여 일생을 고민한 비극적인 인물들도 있다. 굴원, 조조, 위 공자 등이 그들이다. 굴원은 직언을 거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했고, 어질고 능력있는 위 공자 무기는 폭음으로 죽었다. 조조는 종묘의 담을 뜯어 문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저잣거리에서 죽었다.
국가에 헌신했으나 비극을 초래한 자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자가 이사이고 황헐과 주보언도 빼놓을 수 없다. 춘신군 황헐은 합종으로 진나라에 맞서 20년간 재상 노릇을 하다가 간사한 음모에 휘말려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현자 불우의 비극도 있다. 제가 부분에 배치된 공자를 비롯하여 노자 한비 열전에 나오는 한비, 이 장군 열전의 이광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기 열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 사마촌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들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사기 열전을 생명력이 넘치는 산 역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본위의 역사를 서술해 낸 작가의 노력 덕분이다. 사마천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인물들을 현재에 생동하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