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2. 1. 26. 08:54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건 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백성호의 현문우답 (중앙일보)

 



한국 불교사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 중 딱 하나를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불교계에서는 원효 대사(617~686)를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上) 원효 대사는 무예 뛰어난 화랑 출신…“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처럼”


원효(元曉)를 우리말로 하면  ‘첫 새벽’입니다.
그러니 원효 대사는 ‘새벽 대사’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신라인들이 그를 순우리말로 “새벽”이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새벽 대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년)에 태어났습니다.
진평왕의 왕비 김씨는 ‘마야(摩耶) 부인’이었습니다.
선덕 여왕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어머니 이름은 ‘마야데비(Mayadevi)’였고, 통상 ‘마야 부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니 신라의 왕비가 붓다의 어머니 이름을 본따서 똑같은 호칭을 썼습니다.
이것만 봐도 신라의 국가적 지향이 ‘불국토(佛國土) 건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원효의 고향은 지금의 경북 경산이었습니다.
출생부터 험난했습니다.
원효의 부모는 만삭의 몸으로 밤나무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찾아와 길에서 출산을 해야 했습니다.
원효의 아버지는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밤나무에 걸고
임시로 앞을 가렸습니다.
노상에서 힘겹게 원효를 출산한 어머니는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붓다의 출생이 떠올랐습니다.
둘은 태몽도 닮았습니다.
인도의 마야 부인은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왔고, 원효의 어머니는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서 아이를 가졌습니다.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마야 부인은 룸비니의 들판에서 무우수 나뭇가지를 붙들고 싯다르타를 낳았습니다.
노상 출산 후 7일 만에 마야 부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효는 날 때부터 결핍을 안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낳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부재’는 원효의 유년기에 존재론적 결핍감을 강하게 안겨주지 않았을까요.

세계 종교사에서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불교를 세운 붓다는 어머니를 일찍 잃었고, 동정녀 출생의 예수는 친아버지가 없었고,

이슬람교를 세운 무함마드는 유복자였습니다.

다들 삶과 죽음, 존재의 상실을 깊이 체험하며 성장기를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 와중에 그들이 던졌을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을까요.

원효 역시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을 수도 없이 자신에게 던지며 자랐겠지요.

 


#풍경2

원효 대사가 창건한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 전경. 원효는 삼국통일 후 전쟁의 상처에 허덕이는 민중을 위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불교를 알렸다. 

진평왕 때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삼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던 시기였습니다.
원효가 열두 살이 됐을 때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현(김유신의 아버지) 장군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다가 원효의 부친 설이금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열두 살 때 원효는 고아가 된 셈입니다.
그런 원효를 할아버지가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원효는 아버지를 여읜 열두 살 때 화랑이 됐습니다.
마음속에는 고구려를 향한 깊은 복수심도 있었겠지요.
열여섯 살 때(선덕여왕 1년)는 무술제 경연대회에서 장원도 했습니다.
원효는 무예가 상당히 뛰어났습니다.
특히 검술 실력이 빼어났다고 합니다.

이듬해에는 조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효는 화랑으로서 전쟁에도 수차례 참여했습니다.
처절한 전장과 숱한 죽음을 목격했겠지요.

부모의 죽음, 조부의 죽음, 전쟁터의 죽음을 겪은 원효는 삶을 무상함을 절감하며 출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자신이 살던 집을 희사해 ‘초개사(初開寺)’라는 절을 세웁니다.
또 어머니가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밤나무골 불땅고개 옆에 ‘사라사’라는 절을 지어 모친의 혼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입산수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풍경3

 원효는 자신이 쓴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일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밥을 먹어 배고픈 창자를 위로할 줄 알면서도
   진리의 불법(佛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네.”

이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저는 여기서 원효의 ‘출가 이유’를 읽습니다.
그가 찾는 것은 삶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모래로 밥 짓는 삶에서 쌀로 밥 짓는 삶으로 바꿀 수 있게끔 지혜의 눈을 갖추는 일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원효는 나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하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훗날 그가 깨달음을 이룬 후에 왜 하필 시장통 하층 민중의 삶으로 들어갔는지
그 이유가 ‘새의 두 날개’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풍경4

삼국시대 때 중국은 당나라였습니다.
당나라와 인도는 머나먼 거리였습니다.
당시 중국 승려들은 목숨을 걸고서 서역을 거쳐 사막을 건너 인도로 갔습니다.
인도 땅에 있는 붓다의 말씀,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도로 가는 길은 산적과 도적도 많았고, 지형도 험준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인도로 10명의 승려가 갔다면 고작 2명만 살아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온 승려들은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모두 풀었습니다.

중국 승려들이 한문으로 번역을 끝낸 다음에는 산스크리트어 불교 원전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만큼 뜻이 통하게 정확한 번역을 했고, 중국화한 불교 경전에 자부심이 컸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나라에는 신라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불교 경전들이 있었고, 
깊은 안목을 가진 고승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원효는 그런 당나라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34세 때 여덟 살 아래인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릅니다.
당시에는 서해안 뱃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원효와 의상은 육로를 통해 고구려를 거쳐 요동 땅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그만 고구려의 국경수비대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원효와 의상은 신라의 첩자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서로 첩자를 보내 정탐을 했고,
삼국이 다 불교 국가였기에 승려로 위장하기가 수월했습니다.
그러니 의심을 살 만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감옥에 갇혀 수십 일간 고생한 끝에
다시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中)원효는 왜 무덤 속에서 깨달았나…“마음 바깥에 법이 없다.”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삼국의 치열한 쟁탈지였던 서해의 당항성을 신라가 차지했습니다.
당항성에는 중국으로 가는 항구(지금의 경기 화성)가 있습니다.
당나라로 가는 뱃길이 열린 셈입니다.

45세의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다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10년 세월이 흘렀지만 진리에 대한 원효의 갈망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원효와 의상은 당항성으로 가다가 어두운 밤에 큰비를 만났습니다.
인가를 찾아 헤매다가 길가 언덕에서 땅막(땅을 파서 만든 토굴)을 겨우 찾았습니다.
얼른 들어가 비를 피하고 거기서 하룻밤 잠을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원효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은 그냥 땅막이 아니라 무덤 안이었습니다.
그때가 장마 철이었까요.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습니다.
두 사람은 무덤 안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야 했습니다.

#풍경2

첫날밤, 땅막 안에서 원효는 단잠을 잤습니다.
이튿날 밤은 달랐습니다.
무덤 안이라는 걸 안 원효는 밤에 자꾸 귀신 생각이 났습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요.
만약 우리에게 무덤 안에서 하룻밤을 자라고 한다면 밤새 그런 생각에 뒤척이지 않을까요.
찝찝한 생각에 숙면을 취하기가 힘들지 않을까요.

원효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지난밤에는 땅막이라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오늘 밤은 무덤이라 귀신의 장난에 잠을 잘 수가 없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땅막과 무덤은 분명 하나의 장소인데,
어젯밤은 왜 번뇌가 없었고
오늘 밤은 왜 번뇌가 생겼을까.
그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지 않았을까요.
원효는 마침내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대각(大覺ㆍ큰 깨달음)을 이룹니다.
죽음의 공간인 무덤 안에서 원효는 오도(悟道ㆍ진리를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心生卽 種種法生)
 마음이 멸하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心滅卽 龕墳不二)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앎이라(三界唯心 萬法唯識)
 마음 바깥에 법이 없으니 무엇을 따로 구하리오. (心外無法 胡用別求)”

원효는 깨달았습니다.
땅막 때문에 잠을 잘 잔 것도 아니고,
무덤 때문에 잠을 설친 것도 아니구나.
둘 다 마음 때문에 그리된 것임을 원효는 크게 깨쳤습니다.

이건 그저 땅막과 무덤에 국한되는 깨달음만은 아닙니다.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아는 순간, 번뇌와 보리(菩提ㆍ깨달음의 지혜)가 둘이 아니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원효에게는 그 모두가 통하는 마음 하나만 남습니다.

원효는 그걸 “일심(一心)”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일상에도
온갖 파도가 칩니다.
슬픔과 기쁨, 괴로움과 즐거움의 파도가 수시로 몰아칩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삶은 출렁거립니다.
솟구쳤다 가라앉고, 솟구쳤다 가라앉으며 우리는 멀미를 합니다.

원효는 그 모든 파도가 실은 하나의 바다임을 깨쳤습니다.
슬픔의 파도든, 기쁨의 파도든 그게 실은 하나의 바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일심(一心)”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아무리 희로애락의 파도가 몰아쳐도 원효의 바다는 그저 고요할 뿐입니다.

#풍경3

이쯤되면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니, 원효의 깨달음 일화에서
왜 해골물 이야기가 안 나오지?
이런 물음표를 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건 기록에 따라서 좀 다릅니다.
『송고승전』에는 땅막이 아니라 무덤임을 알고서 깨쳤고,
『종경록』에는 시체 썩은 물을 마시고 깨쳤고,
『임간록』에는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쳤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원효의 깨달음, 그 핵심은 해골바가지가있느냐, 없느냐에 있지는 않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고 곤히 잠을 청했던 평온한 마음과 밤새도록 귀신 생각에 잠을 설쳤던 번뇌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마음(一心)임을 깨달은 겁니다.
그게 원효의 깨달음입니다.

‘일심(一心)’을 뚫은 원효는 달라집니다.
그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되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됩니다.

왜냐고요?
그는 무덤과 땅막, 삶과 죽음, 그물과 바람이 둘이 아님을 깨쳤으니까요.

원효는 여덟 살 아래인 의상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나라로 가지 않겠다.”
10년 넘는 세월을 기다렸던 당나라 유학을 원효는 기꺼이 포기합니다.
당나라 유학에서 얻고자 했던걸 이미 얻었기 때문입니다.

의상은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습니다.
훗날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의상은 신라 화엄종의 개조(開祖)가 됐습니다.

원효는 다시 신라의 서라벌(경주)로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