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협(遊俠)의 역사가 만든 결사체,‘도원결의’
유협(遊俠)의 역사가만든결사체,‘도원결의’
천하를 도모한 자 치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하지 않은 자는 없다. 춘추전국 시대의 영웅들이 그러했고, 진시황의 진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통치자는 무도한 피의 역사를 감추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유학(儒學) 으로 대표되는 문(文)을 내세우고 협객(俠客)으로 대표되는 무(武)를 감췄다. 문무쌍전(文武雙全)의 정치술《政治術》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약육강식은 여전했다. 사람들은 실리를 위해 명예와 신의도 팽개쳤다. 이러한 때, 자신을 믿는 자들을 위해 삶의 고통을 해소시켜 주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바로 유협(遊俠)이다. 예양(豫讓)에서 시작된 유협은 조말(曹沫), 전제(專諸), 섭정(攝政), 형가(荊軻) 등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명멸했다. 사마천은 유협을 일러 “그 행동이 비록 정의에 들어맞지는 않으나 그 말은 틀림없이 믿을 만하고 그 행동은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며, 한 번 허락한 일은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어려움을 무릅쓰면서 남을 도와 죽고 사는 것을 잊는다. 그러면서도 자기 재주를 자랑하지 않고 그 덕을 내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고 말했다.
유협은 신의(信義)를 중시한다. 신의야말로 이들의 핵심 신조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유협을 흥내 내는 무리들이 생겼다. 힘센 자를 중심으로 무리를 지어 재물을 모으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위세를 떨며 행패를 부리는 건달패들이 마치 유협인 듯 활보했다. 그들은 자기 조직만의 삽혈맹서(歃血盟誓)라는 특수한 신고식을 가졌고,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맹세를 통해 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들은 조직을 세력화하여 지역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순자는 “의기를 세우고 위엄과 덕으로 복종케 하며 사사로운 사귐을 맺음으로써 세상에서 세력을 떨치는 자를 일컬어 유협이라 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전횡을 비판한 바 있다.
유비 • 관우 • 장비도 난세에 한나라를 구하려고 도원결의를 한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협정신이 당시에 각종 결사(結社)의 형태로 지속 되었던 것을 나관중이 종합하여 만든 것이다. 도원결의로 맺어진 이들의 생사를 초월한 우애와 충의는, 난세를 살아가는 일반 민중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줄 뿐 아니라 중국인과 중국사회에 ‘죽을 때까지도 변치 않는다.’ 는 신의를 탄생시켰다. 나아가 형제와도 같은 군신관계는 이상적인 유교정권의 전범(典範)을 창조했다. 도원결의가 허구임에도 일반적으로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욕을 버리고 목적을 향해 합심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 도원결의(桃園結義)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마치 엄연한 사실처럼 오랜 세월동안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피를 나눈 형제들도 이루지 못하는 일들, 현실 사회에서 파생되는 공통적인 소망과 기원 등이 ‘도원결의’ 로 발현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도원결의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인간 사회의 염원을 담아내는 도구로서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