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중국의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인물 "유비"
중국의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인물 "유비"
『삼국지연의』, 최고의 주인공인 유비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유비는 말수가 적고 상대방을 겸손하게 대하며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 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즐겨 호협(豪俠)과 사귀었다고 한다. 아무런 밑천도 없이 정치적 신념만 강했던 유비가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인적 네트워크였으리라.
유비에게는 자신의 본심을 감추는 교활함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간적 매력이 있었다. 이것은 전투력이 약한 유비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청나라 말기에 태어나 사천대학 교수를 역임한 이종오는 “후흑(厚黑)이 천하를 통치한다.”는 요지의 후흑학(厚黑學)을 주장하였다. 후흑이란 낯가죽이 두꺼우며 마음이 시꺼멓고 음흉함을 뜻하는데, 천하의 영웅호걸이란 바로 이러한 후흑에 뛰어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조를 심흑(心黑)의 고수로, 유비를 면후(面厚)의 고수로 꼽았다. 이 둘 중 누가 더 대가일까? 자신의 속마음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생각을 숨기고 말을 숨기고 게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연기까지 하는 유비야말로 누가 뭐라고 해도 후흑의 대가이다.
유비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조뿐만 아니라 관우에게도 뒤쳐진다. 그런데 유비는 항상 인(仁)과 의(義), 그리고 한 황실 부흥을 외쳤다. 대의명분을 외친 까닭에 재능과 지식은 부족했지만 후덕한 군주로 존경받을 수 있었다. 유비가 삼고초려하며 제갈량을 얻을 때 내세운 대의명분도 한 황실의 부흥이었 다. 하지만 유비의 행적을 보면 그는 반드시 대의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명 말청초의 대학자 왕부지는『독통감론(讀統監論)』에서 유비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유비는 형주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정견도 없이 여기저기 전전할 뿐 이었다. 한나라 황실의 원수인 동탁을 쳐부술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고, 영토 확장에 집착해 한나라 황실을 부흥시키는 일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 자신도 한중왕이라 칭하고, 조비가 헌제를 폐하고 제왕을 참칭하자마자 유비도 늦었다는 둣이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 이에 신하가 대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간언하자 오히려 화를 내며 좌천시켰다.”
『구주춘추(九州春秋)』에는 유비의 생각을 보여 주는 글이 있다.
“나와 조조는 물과 불의 관계다. 조조가 엄격하면 나는 관용을 베푼다. 조조가 난폭하게 굴면 나는 덕으로 대한다. 조조가 책략으로 나오면 나는 성실함으로 나아간다. 항상 조조와 반대로 행동해야만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유비 역시 당대 최고의 영웅인 조조의 성품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그의 움직임에 따라 유리한 정치적 소신을 펼친 것이었다.
중국인은 대의명분을 따른다고 하지만 항상 실리적이다. 대의명분도 따지고 보면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교묘하게 이익을 극대화하는 최고의 전략으로 대의명분을 활용할 뿐이다. 유비는 이런 면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고, 중국인들은 이러한 유비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삼았다.
진수는 유비에 관해 말하길, “임기응변과 책략이 조조보다 못했기에 영토가 넓지 않았지만, 힘든 상황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조조의 신하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을 받아들이기에는 조조의 그릇이 작다고 생각해 그와 이익을 다투지 않았기에 해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지더라도 진 것이 아니라고 믿는 중국인의 불패사상의 신화를 그에게 부여했다.
유비가 조조의 견제를 피해 가며 지냈던 시절은 대부분 그에게 힘이 없던 시기였다. 유비는 자수성가한 정치인이다. 조조와 원소, 손책과 유표 등과 비교해보면 정치적 자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혼자서 개척하고 만들어 가야 했다.
인의와 대의명분으로 무장하는 것은 밑바닥 정치판에서 터득한 유비의 전략이었다. 게다가 한 황실의 후손이라는 명함까지 갖추자 정치적 입지는 일약 황제의 반열에 오른다. 이제 필요한 것은 유비 자신을 따르는 백성과 천하의 민심이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형주의 유표를 공격하는 혼란을 틈 타 제갈량이 형주를 취하라고 한 때나, 익주의 유장이 유비에게 원조를 청했을 때 직접 빼앗지 않은 것은 조조라는 강적으로부터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는 냉철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유비는 이것을 ‘은의(恩義》를 배신 할 수 없다’ 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바꿔 천하의 민심을 얻는 데 이용한 것이니, 이쯤 되면 천하의 영웅들조차도 유비를 가히 후흑의 시조라고 아니 할 수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