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三國誌 기행, 허우범

9. 원소가 조조에게 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2. 2. 15. 08:50

원소가 조조에게 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원소의 고조부(高祖父)는 후한 말기의 군웅인 원안(袁安)이다. 원소 집안은 이 때부터 4대 연속 삼공(태위, 사공, 사도)의 지위에 오른다. 삼공은 신하로서는 최고의 자리다. 그러므로 원소는 ‘명문가’ 출신의 고상한 인품과 교양을 소유한 귀족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원소의 중앙정계 진출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가문과 용모, 인품 등을 보고 천거하면 우선적으로 벼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 말기에 권력을 장악한 동탁이 여포의 손에 죽은 뒤, 천하를 호령할 최고 유력자는 원소였다. 그러나 원소는 천하를 호령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조조에게 내주었다. 최고 최대 최선의 적임자가 바로 원소 자신임을 모두가 인정할 것이라고 자만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조는 원소와는 출신 배경이 상당히 다르다. 부친은 환관의 양자이고 돈으로 높은 벼슬을 샀기에, 조조는 귀족이라 하더라도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난 조조는 고상한 인품은 둘째 치고 잔악한 교양미를 갖추었으니 청년시절을 함께 지낸 원소는 꺼림칙하였으리라. 


원소의 패배는 조조가 헌제를 허도로 이끈 뒤에 후견인의 입장에 섰을 때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왜 그럴까? 원소는 귀족가문으로 최고의 명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신하에 불과했다. 반면 조조는 황제를 모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대의명분을 구실로 천하를 움직일 수 있었으니, 그 어떤 군웅이라 하더라도 조조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조조가 정치적으로도 단번에 원소를 능가해 버리자 원소는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성격 면에서도 임기응변과 결단력이 부족한 터라, 원소는 월등한 군사력과 인기에도 불구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후한서』에도 원소가 조조에게 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밖으로는 후덕하고 너그럽게 행동했으며, 걱정과 기쁨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본성이 교만하고 고집이 센 까닭에 좋은 것을 찾는 데는 많이 부족했 다.그러니 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원소는 자식과 집안 단속에도 실패하여 결국 가문을 멸문지화(滅門之禍)로 이끌고 말았다. 원소에게는 담(課), 희(照), 생(尙)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막내 상은 후처 유씨의 자식으로, 원소는 막내 아들을 가장 사랑했다. 원소가 죽자 유씨와 그의 자식 상이 한 짓이 전론(典論)』에 전한다.


“유씨는 강샘이 심해 원소가 죽자마자 다섯 명의 애첩을 모두 죽였다. 그러고도 질투심이 사라지지 않아 죽은 자가 저승에서 다시 원소와 지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 죽은 첩들을 삭발하고 얼굴에 먹물을 부어 혼이 서로 만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그녀의 아들 상은 애첩들의 식구들까지 모두 주살했다.”


원씨 집안의 행태가 이러했기 때문에 원소가 죽고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암투가 벌어진 것은 필연이며 이 과정에서 조조에게 멸망하였으니 어쩌 천운만을 한스러워 할 수 있으리오.

 

진수는 원소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겉으로는 관대하게 보이지만 질투심이 많고,모략에 뛰어났지만 결단력이 부족했다. 수하에 인재가 있었지만 능력을 활용하지 못했고, 착한 자를 보듬어 안을 줄 몰랐다. 그리고 적자가 아니라 첩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음으로써 예법보다 정에 치우치는 바람에 망하고 말았다.”


원소에게도 순욱, 곽가, 허유, 저수, 전풍 등 출중한 모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원소의 인간적인 결함이 너무나 컸기에 세 명은 조조의 참모가 되었고 두 사람은 죽음을 당했다. 원소는 시기와 멸시로 훌륭한 인재를 잃었으니 이는 곧 아망과 비전을 잃은 것과 같다.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인재야말로 든든한 자산이 아닐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