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三國誌 기행, 허우범

10. 난세에도 학문을 꽃피운 '형주학파’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2. 2. 15. 11:12

난세에도 학문을 꽃피운 '형주학파’

 

후한 말기는 전란의 시기다. 난세를 활보하는 군웅들의 각축은 중원의 모든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었다. 아홉 왕조의 도읍이었던 낙양이 전란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고, 낙양에 버금가는 장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시는 영토 확장의 거점이자 수성(守成)의 발판으로서만 존재할 뿐, 도시의 기능인 문화적 창조력과 넘치는 생명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때 각축장의 한가운데 위치한 형주는 전란의 무대에서 비켜나 있었다. 어째서 일까?


형주도 유표가 다스리기 전에는 매우 불안한 지역이었다. 『후한서』에 전하길, ‘형주의 민심은 혼란을 좋아하고 세상은 두려움에 놀라 떨며 외적은 서로 부추기고 꾀어내어 온갖 곳에서 들끓고 있다.”고 했다.


서기 190년, 유표가 형주자사로 부임하여 살펴보니 이러한 원인이 종적(宗賊) 임을 알았다. 이는 한 마을이나 한 지역을 단위로 못된 짓을 일삼는 일족으로 구성된 도적단이었다. 이에 유표는 괴월의 계책을 이용하여 종적의 수령 55명을 의성(音城)으로 불러내어 모두 주살했다. 종적의 수령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으스댈 때 번개처럼 몰살시킨 것이다. 체제를 재정비한 유표는 양양을 치소로 삼고 10만 명의 군사를 갖추어 외적의 침공에 대비하고 밖으로는 침략을 하지 않았다. 군웅할거시대에 중립을 지키면서 내정에 치중하여 형주가 전란에 휩싸이지 않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유표가 다스리는 형주가 이처럼 변화하자 전화를 피해 주변지역의 유민들이 형주로 향했다. 당시 10만 호가 넘는 유민들이 몰려왔는데, 그 속에 300명이 넘는 망명 지식인이 있었다. 유표는 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우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이로 인해 형주의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유명한 학자와 지식인은 물론 지식욕에 불타는 젊은 인재들도 형주로 향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건안칠자의 한 사람인 시인 왕찬(王粲, 후주 유선의 사부인 춘추 학자 윤묵《尹默), 유비에게 제갈량과 방통을 추천했던 사마휘(司馬微), 제갈량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인 방덕공(龐扈公), 제갈량의 벗들인 최주평(崔州平), 서서(徐庶), 석광원, 맹공위, 마량 등 다양했다. 젊은 인재들의 대표는 제갈량이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학문을 익혀 학식도 출중했지만 형주로 모인 많은 지식인들과의 토론과 냉철한 사색을 통해 당대 최고의 정치적 식견을 체득하게 되었다.


수경선생 사마휘가 제갈량과 서서 등의 인재를 기르며 형주에 은거할 수 있었던 것도 유표의 이러한 학문우대 정책 때문이었다. 학문적 경향도 선진적이었다. 즉 그 이전까지의 학문은 훈고장구(訓詁章句)라 하여 경전의 정독을 통한 뜻풀이에 치중하였다면, 형주의 학문경향은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을 읽어내는 것으로서 다양한 현상의 배후를 이해하고 정곡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이는 후한의 대유학자인 정현(鄭玄)의 학문을 계승 • 발전시킨 것으로 “미사 여구를 쓰지 않고 너저분한 반복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형주목인 유표가 직접 참여하여 완성한 『오경J 주석집인『후정(後定)에서 나타나는 바, 제갈량의 독서법도 바로 이러한 학문적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형주는 병가필쟁의 중심지였다. 유표는 조조와 손권, 그리고 유비 등이 형주를 노리는 와중에도 이곳을 인재들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유표는 우유부단함과 시기심 많은 성격 때문에 원대한 비전과 전략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유표가 추구했던 세계관이 그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유표는 모름지기 학문과 교육을 통한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구가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세였기에 유표는 자신의 생각을 구현할 수 없었다. 유표가 추구한 세계관은 왕필(王弼)이라는 천재를 거쳐 다음 시대에 현학(玄學)으로 이어지는 사상사적 계보의 기틀을 마련했으니, 그의 정신은 난세가 지나서 빛을 본 것 이다. 올곧은 정신은 난세에 주춤거리기는 하지만 결코 사그라지는 법이 없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 인 것도 이처럼 끊임없이 자유로운 정신을 모색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