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서서,불량배에서 효자로 거듭나다
서서,불량배에서 효자로 거듭나다
서서가신야에서 유비를 만나 군사(軍師)가 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단복(單福)’ 이었다.
『위략(魏略)』에 따르면 서서는 젊었을 때 무예에 정통한 불량배였는데, 특히 장검을 잘 쓰는 자로 알려졌다. 어느 날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다가 잡혔는데, 관리가 저잣거리에다 세워 놓고 제보자를 기다렸다. 하지만 워낙 못된 불량배였기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동료에게 구출된 것을 계기로 서서는 못된 짓거리에서 손을 떼고 잘못을 뉘우치며 허름한 옷을 입고 학문에 힘썼다. 하지만 그가 예전에 사나운 불량배였음을 알고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서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하고 경학을 읽으며 묵묵히 수양에 매진했다. 그야말로 개과천선한 것이다. 어느 정도 수양을 끝 낸 서서는 학문에 전념하고 싶었다. 형주는 난세에도 학문적 분위기가 자유로워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서서는 형주로 가서 제갈량을 위시해 많은 친구들과 사귀고 유비를 돕는다.
서서의 벼슬은 위나라의 어사중승(御使中承)까지 오르는데, 이때도 줄곧 복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말년에 서(庶)로 나온 것을 보면 그 즈음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런데 서서가 어째서 단복이 되었을까? 그것도 서복도 아닌 단복이 되었으니 너무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나관중이『삼국지연의』를 쓰면서『위략』의 '서서전'에 기록된 “원래 단가의 자식이다(本單家子)”라는 문구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후한은 가문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단가’ 란 평범한 집안 또는 서민의 집안을 뜻하는 말인데, 이렇게 하찮은 집안에서 자기 능력만으로 고관이 된 사람들을 일컬어 ‘단가출신’ 이라고 하였다. 이를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만들면서 잘못 이해하여 성을 단씨로 만든 것이다. 청나라 때 대학자인 전대흔(錢大昕)도 '단가(單家)’ 라 한 것을 성으로 생각하 는 것은 심히 무지한 일이라고 평했다.
서서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조조가 서서의 노모를 데려온 것은 유비가 조조군의 추격을 받아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던 중 당양에서 조조군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힌 때였다. 이에 서서가 유비와 이별하고 조조를 알현하였으니, 서서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조조를 찾아간 것이다. 또한 서서는 유비에게 말하기를, 함께 천하의 패업을 이루고 싶지만 노모를 잃은 마음이 어지럽고 쓸모가 없어서 이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죽을 때까지 조조에게 계략을 베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서서는 훗날 위나라의 우중랑장, 어사중승 등을 맡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북벌을 단행할 때도 서서가 여전히 직책을 맡고 있자 제갈량이 그를 경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관중의 서서에 대한 효행담은 무엇 때문일까? 이곳에도 조조 악인 만들기의 은밀한 전략이 배어 있다. 즉 조조가 서서의 노모를 잡아와 유비 에 대해 험담하자 노모는 한나라의 도적은 조조라고 호통치며 벼루로 때렸다거나, 모사 정욱이 가짜편지를 썼다거나, 서서를 본 노모가 ‘바보같은 놈!’ 이라 노하며 목매어 자살한 것 등은 모두 조조를 악인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다.
역사적으로 서서는 유비와 헤어지고 나타나지 않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두 번 더 등장한다. 조조가 남하하기 전에 유비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로 나오고, 적벽대전 때 촉오 연합군이 화공으로 나올 것을 알고 방통을 다그쳐 마초의 장안습격을 빌미로 전쟁터를 빠져나오는 장면이다. 하지만 서서의 행동은 『삼국지연의』에서조차 무리가 따른다. 서서가조조에게로 오자 모친은 아들을 꾸짖고 자살했는데, 어째서 조조를 돕는단 말인가. 이렇게 되고 보니 효자 서서의 이야기가 오히려 서서를 부끄럽게 만든 꼴이 되었다. 모종강도 이 부분에서 『삼국지연의』를 비평하여 말하길, "허도에 노모의 묘가 있으니 조조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가까스로 설명하고 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