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제갈량은 어디서 농사를 지었을까?
제갈량은 어디서 농사를 지었을까?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국내외 관광객 수가 늘어나자 중국 각지에서는 특정 명사나 현인, 그리고 그들과 연관된 명승고적지를 만들기에 분주하다. 이는 관광객 유치를 통한 지역경제 살리기 사업의 일환인데, 서로가 무리하게 진행하다 보니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기보다는 야사나 전설 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전국시대'의 명의였던 편작의 본적이 어디인가? ,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인으로 중국 4대 미인의 하나인 서시의 고향이 어디인가 등이 그것이다. 제갈량이 주경야독하며 살았던 곳이 어디인가 하는 제갈량의 ‘궁경지’논쟁도 주요 관심거리다.
이 논쟁은 원나라 때부터 현재까지 근 800년 동안 계속된 논쟁으로 중국인들이 제갈량 을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제갈량의 고향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기남(沂南)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를 따라 형주의 양양현 융중으로 왔다. 그러므로 융중은 제갈량의 제2의 고향인 셈이다. 그런데 제갈량이 융중에서 보낸 10년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천하가 존경하는 제갈량이 천하경영의 웅지를 구상한 곳이라면 그곳에 살고 있는 후세인들 또한 자부심이 대단할 것이 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이 시작됐고, 지금의 호북성 양양과 하남성 남양이 맞붙었다.
양양에서는 「한진춘추」'의 “제갈량은 남양의 등현에 살고 있는데, 등현은 남군 양양성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이름을 융중이라 한다.” 는 기록에 근거하여 제갈량은 융중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남양에서는 제갈량의「출사표」에 나오는 "신은 본래 평민의 신분으로 남양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라는 구절을 인용해 남양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실제 장소로 양양은 고웅중(古隆中》을, 남양은 와룡강(臥龍商) 무후사를 내세운다.
남양군은 전한 때부터 존재했다. 후한 때는 형주에 속했는데, 치소(治所)는 완현이라 하여 지금의 하남성 남양에 있었다. 융중은 당시의 남양군 등현에 속한 한적한 산촌이 었다. 그 위치가 남군의 양양현과 가까워서 양양성을 기준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는 지금의 호북성 양번시의 서쪽 13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고융중이다. 지금의 남양시는 후 한 때는 완현으로 불렸기 때문에 당시의 남양과는 다르다. 그리고 당시의 완현은 조조의 영토였다. 와룡강 또한 사서에 있는 지명이 아니다. 사람들이 제갈량을 ‘와룡’ 이라 부른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이토록 확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소모적인 궁경지 논쟁을 펼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주희로 대표되는 성리학자들이 ‘촉한정통설’ 을 앞세워 전국 각지에 제갈량의 사당을 세우기 시작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원대 이전까지는 현재의 남양시를 궁경지로 여긴 적이 없었다.
청나라 때 고가형(顧嘉衡)이란 관리가 남양지사로 왔다. 양양과 남양의 사람들이 제갈량의 궁경지로 어느 쪽이 맞는지를 확실하게 설명해 달라고 했다. 고가형은 오랫동안 내려온 첨예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그리하여 순간적인 기지로 대련(對聯)을 썼다.
"마음이 이미 조정에 있는데 선주와 후주를 논하여 무엇할 것이며,
이름이 이미 천하에 높은데 양양이다 남양이다 굳이 나눌 필요가 있겠는가.”
心在朝延 原無論先主後主, 名高天下 何必辯蘘陽南陽
제갈량을 칭송하며 두 지역의 상호공존을 꾀하였으니 가히 지혜로운 관리라 아니할 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