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적벽대전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던 조조
적벽대전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던 조조
적벽대전이야기는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허구적인 부분이 가장 많기도 하다. 제갈량의 설전군유와 지격주유, 감택의 사항서(詐降書), 방통의 연환계, 제갈량의 차동풍(借東風) 등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들이다. 장간도서와 초선차선은 적벽대전 이후의 일이다. 또한 이 전쟁은 관우와 어떠한 연관도 없다. 이 모두가 나관중이 문학적으로 다채롭게 지어낸 것일 뿐이다.
조조는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남하했다. 그런데 유종의 항복으로 너무도 쉽게 형주에 무혈입성했다. 게다가 유비를 공격해 곤경에 빠뜨렸다. 전투다운 전투없이 형주를 차지했으니 조조는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손권마저 무찌르는 것이었다. 조조는 자신의 보병과 기병에 유종의 수군을 얻어 수십 만의 군대를 구성했다. 이는 곧 조조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천혜의 지형을 배경으로 강동에 웅거한 손권이라도 단숨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조조의 이러한 자만심과는 대조적으로 군사들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먼 곳에서 강행군한 군사들은 피곤했고, 남쪽의 날씨와 환경에 익숙하지 못해 치명적인 역병까지 걸렸다. 그러니 초반부터 패하는 것은 당연했다. 조조의 수군을 불태운 것은 누구일까? 「선주전」과「주유전」에서는 손유연합군이라고 하고, 「곽가전」과「오주전」에서는 조조 자신이라고 한다. 「강표전」에 의 하면 조조가 손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 “적벽에서 싸울 때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어쩔 수 없이 배에 불을 지르고 나 스스로 물러난 것인데, 오히려 주유가 명예를 얻었다.”고 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전염병에 걸린 조조군은 초기 전투에 패배하고 강의 북쪽인 오림에 주둔하였다. 그 뒤 주유의 부장인 황개의 건의로 연합군이 화공으로 공격해 오자 조조군은 당해 낼 수 없었다. 조조의 군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역병에 걸려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조가 나머지 배들을 불태우고 퇴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조군에게 치명타를 입힌 역병은 어떤 것이었을까? 호남성 장사에서 발굴된 한나라 때의 무덤인 마왕퇴(馬王堆) 1호묘와 호북성 강릉현에서 발굴된 무덤의 남녀 시신을 해부한 결과 모두에게서 주혈흡충(住血吸蟲)의 알이 검출되었다. 이는 물속에서 부화하고 중간 숙주인 소라나 우렁이 등에 기생하다가 물속으로 유출된다. 익혀 먹지 않은 음식물을 통해 장으로 들어 가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병원체들이 모공을 통해 인체에 들어가 장점막과 간장, 혈액 등을 파괴한다. 이 병에 감염되면 발열, 복통, 설사 등이 뒤따르고 중증인 경우에는 내장에 물이 차서 복부파열로 이어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병증은 오랜 세월 동안 풍토병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1920년대가 되어서야 주혈흡충병으로 알려졌고, 한나라 때의 시신을 통해 조조군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입힌 전염병이 주혈흡충병에 의한 급성감염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조조가 적벽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할 즈음, 가후는 조조에게 형주를 수습하고 회유정책으로 강동을 복종하게 하라고 권유한다. 만일 조조가 이 건의를 받아 들여 강릉에서 군사들로 하여금 남방환경에 적응하며 충분히 쉬게 한 뒤에, 이듬해 봄에 오나라로 진군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배송지는 「가후전」의 주석에서 조조의 패배를 다음과 같이 썼다.
"적벽의 패배는 조조의 운이 나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병이 돌아 조조군의 기세가 한풀 꺾였고, 때마침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불길을 북돋았다. 진실 로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니,어찌 사람을 탓하겠는가?”
하지만 패배의 근본 원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조조의 교만과 적에 대한 무시에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초보적인 전술을 무시했기에 치욕을 당한 것이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르고, 교만과 무시는 스스로를 망친다는 역사의 준엄한 가르침을 우리는 오늘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