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三國誌 기행, 허우범

32. 권력찬탈의 평화적 수단, 선양(禪讓)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2. 2. 16. 11:02

권력찬탈의 평화적 수단, 선양(禪讓)

 

덕 있는 자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위(王位)는 선양(禪讓)되었다. 즉 황제의 자리를 자식에게 세습하지 않고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양위한 것처럼 덕 있는 이에게 제위를 물려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설상의 이야기이고 실제 왕조는 부자 세습이나 종친 세습으로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선양의 형식을 빌려 왕조를 찬탈한 것은 조조의 아들 조비가 처음이었다.

 

조비는 부친인 위왕(魏王) 조조가 죽자 연호를 연강(延康)으로 바꿨다. 헌제가 힘은 없지만 황제 자리에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연호를 바꿨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황제를 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요순의 전설을 빌미로 짜고 치는 고스 톱인 양, 세 번의 사양을 거친 뒤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 받았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만천하에 공표함으로써 정통성을 획득하고 손쉽게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220년, 조비는 스스로 위나라 황제가 됐다. 하지만 위나라는 조예, 조방, 조모, 조환 등 5대 만에 단명했다. 264년에는 사마소가 진왕(晉王)에 오르고 265년에는 그 의 아들인 사마염이 원제인 조환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았다. 조비가 한나라의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은 방법 그대로 조환이 진나라에게 선양했으니 사필귀정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진나라는 곧 북방유목민족인 오호(五胡)의 침략으로 무너지는데, 오호십육국의 하나였던 후조(後趙)의 태조 석륵 은 조씨와 사마씨의 선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짐이 한 고조를 만난다면 당연히 그의 신하가 되겠다. 한신이나 팽월이라면 어깨를 견줄만하다. 광무제를 만난다면 중원을 두고 한판 승부를 벌이겠다. 호각지세일 것이다. 대장부는 일을 벌임에 있어 정정당당해야 한다. 조맹덕과 사마중달이 세상 사람들과 고아, 과부를 속이고 여우처럼 잔꾀를 부려 천하를 얻은 것은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된다.”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 사마덕문도 송왕 유유에게 선양을 했다. 송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또한 제(齊)나라를 세운 소도성 장군에게 선양이라는 미명 아래 제위를 빼앗겼다. 이처럼 역사는 평화를 가장한 정권찬탈 의 연속이었고, 이는 비단 중국만의 일은 아니다. 덕은 항상 외롭고 덕망 있는 자는 가까이에 없으니 어찌 요순의 시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자리를 만들고 저마다 자리를 탐낸다. 자리는 교만과 나태로 인간을 부추기며 자신의 위세를 높인다. 그리하여 인간이 서로를 누르고 차지한 자리는 항상 한 뼘 머리 위에서 인간을 손짓한다. 인간이 만들었으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자리다. 그러나 오늘도 세상은 자리로 인해 시끄럽고 자리 때문에 싸운다. 자리가 벌이는 한판 놀음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있음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