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제갈량이 마속을 처형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
제갈량이 마속을 처형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
"승상은 저를 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모셨습니다. 이제 저는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죽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바라옵건데 승상께서는 순임금이 곤을 죽이고 우를 대신 등용한 때를 생각하소서. 그러면 죽어서 구천을 헤매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철저히 준비하고 시작한 북벌은 마속이 가정을 잃음으로써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모종강도 마속의 실가정(失街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가정전투에서 패배한 공명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애써 차지한 남안, 안정, 천수는 포기하게 된다. 이에 기곡의 군사들도 모두 철수해야 했고, 서성의 군량 또한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하후무를 사로잡고, 최량과 양롱의 목을 베고, 상규와 기현을 점령하고, 왕랑을 꾸짖고 조진 역시 격파한 게 모두 무의미하게 되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마속의 실수는 제갈량이 북벌에서 거둔 혁혁한 전과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법치주의 원칙을 내세운 제갈량은 마속을 어떤 식으로든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완(將街}은 마속의 처벌에 반대했다. 전쟁 중에 장군을 처형하는 것은 적에게 이로움만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진의 역사학자 습착치는 약소국이자 인재 또한 부족한 촉나라에서 마속과 같은 인걸을 처단한 것이 위나라를 이길 수 없었던 원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속을 처형해야만 했던 제갈량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가정을 수비함에 있어 마속보다 뛰어난 장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반대를 무릅쓰고 마속을 기용했다. 그리고 마속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가정을 잃었다. 이는 유비 사후. 촉나라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제갈량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또한 이때까지 제갈량에게 밀려 기회를 엿보던 반대파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기도했다.
제갈량 역시 마속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공평무사한 법 집행을 중시한 제갈량이 마속의 죄를 가볍게 묻는다면 촉나라를 세우는 데 참가한 익주그룹이나 인재 배치에 반대했던 자들로부터 비판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군주를 대행 하는 승상 제갈량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오로지 법치(法治)’의 실행이었다. 공평무사(公平無私), 공명정대(公明正大)만이 정치세력 간의 알력을 잠재울 수 있고, 민심을 수습하며 나아가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처형하여 촉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도 제갈량 생전에만 유지되었으니 제갈량의 고뇌가 얼마나 심하였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