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 지지 않겠다는 마음과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오늘 (백영옥의 말과 글)이 나심 탈레브의 “당신이 싫어하는 다른 이들의 행동을 타인에게 하지 마라”를 원용하여 행복도 좋지만 불행에 지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마음을 가져보자는 제안은 각자가 행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게 만들고 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이 좋은지보다 무엇이 나쁜지 더 명확히 판단할 수 있고, 돕지는 못해도 결코 피해는 입히지 않겠다는 결심은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행해지지 않겠다는 마음과 그렇게 연결되어 최소한의 행복을 가질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는 어느 때보다 행복을 갈망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이 선(善)이고 행복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면 그것을 행함에 있어 기준이 매우 상대적이기 때문에 달성하기가 어렵다는 점은 오늘날 행복 부재의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타인을 대하라는 마태오 복음에서 설파된 서양의 인간관과 내가 싫어하는 것을 타인에게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논어에서의 동양적 인간관(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勿施於人)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실행하기 어려운 서양적 인간관보다는 남과 비교할 필요 없이 남에게 피해를 안주겠다는 단순함에서 출발하여 각자가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동양적인 인간관이 오늘날 행복 부재를 치유하는 근본적 방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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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247] 불행에 지지 않겠다는 마음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2022.04.09>
한국인이 유전적으로 행복감을 느끼기 힘든 민족이란 글을 읽었다. 전 세계에서 ‘아난다마이드(anandamide)’의 수치가 가장 낮다는 것이다. ‘아난다마이드’는 신경 전달 물질로 이것이 분비되면 통증이 완화되고 기분이 좋아지는 등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 흥미로운 건 행복해지기 힘든 유전적 특성이 한국을 빈국에서 부국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웬만해선 만족하지 못하는 유전적 특성이 불안에 대한 감수성을 높였고, 늘 위기라는 인식 속에 치열함을 삶의 디폴트 값으로 만든 것이다.
문제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물어도 나오는 ‘행복하고 싶어서!’라는 보통의 대답이 한국에선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UN의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도 경제력에 비해 낮은 순위다(작년 61위, 올해 59위). 게다가 행복은 집착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역설적인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행복에 대한 전략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나심 탈레브는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기대하는 바로 그 행동을 다른 이들에게 하라”라는 마태복음의 ‘황금률’보다 “당신이 싫어하는 다른 이들의 행동을 타인에게 하지 마라”라는 ‘은율’을 실천하자고 제안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무엇이 좋은지보다 무엇이 나쁜지 더 명확히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함도 좋지만 악함이 없는 것만큼은 아니다. 돕지는 못해도 결코 피해는 입히지 않겠다는 결심은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행해지지 않겠다는 마음과 그렇게 연결된다.
똑같은 폭우라도 한 지역에선 가뭄 해소이고, 한 지역에선 강의 범람을 일으킨 원흉일 수 있다. 긴 세월을 두고 보면 어떤 것도 쉽게 좋다 나쁘다 얘기할 수 없다. 빈민 지역을 여행하다 지갑을 도난당한 지인이 없어진 돈을 가난한 이웃에게 한 기부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식상한 비유지만 컵에 든 물을 ‘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과 ‘반이나’ 차 있다고 믿는 이의 삶이 같을 수는 없다. 불행에 지지 않겠다는 마음도 이토록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