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지하 인터뷰 (2003년 8월 <월간조선>)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 별세... 향년 81세
2003년 8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고백
[조선일보 2022.05.08 ] 김지하(본명 김영일) 시인이 8일 향년 81세 나이로 별세했다. 토지문화재단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생활 끝에 이날 강원 원주시 자택에서 타개했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한 고인은 1954년 원주로 이사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 미학과 졸업 후 1969년 시 '황톳길' '녹두꽃' 등을 발표하면서 공식 등단했다.
주요 시집으로 황토(1970), 남(南)(1984), 살림(1987), 애린 1·2(1987), 검은 산 하얀 방(1987),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나의 어머니(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화개(2002), 유목과 은둔(2004), 비단길(2006), 새벽강(2006), 못난 시들(2009), 시김새(2012) 등이 있다.
고인은 체제 비판 활동으로 수 차례 투옥되고 사형 선고까지 받은 바 있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시위에 가담했다 체포됐고, 1970년 정경유착을 질타한 오적(五賊)을 발표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배후자로 지목돼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문인과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풀려난 바 있다. 법원은 2015년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과 오적필화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며 15억원의 국가배상판결을 했다.
그는 지난 2003년 그동안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방대한(3권 분량) 회고록 '흰 그늘의 길'을 펴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기도 했다. 당시(2003년 8월) <월간조선> 인터뷰를 소개한다.
회고록 「흰 그늘의 길」 펴낸 金芝河
『李鍾贊씨와의 쿠데타 얘기는 진지하기는 했지만 그저 한번 해본 소리』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고백
●『어째서 자꾸 反美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300만 또는 600만의 인민들이 끼니를 거르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코냑이나 마시고 있는 세상(북한)에 대해 긴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金 芝 河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중동高·서울大 문리대 미학과 졸업. 명지大 문예창작학과 석좌 교수.
10년 걸려 완성한 대작
시인 金芝河(김지하·62·본명 金英一)씨가 회고록 「흰 그늘의 길」(학고재)을 내자 신문들이 다투어 인터뷰를 하거나 책 소개를 하는 등 법석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金씨의 전력 때문에 이 회고록이 현대사의 그늘 속 미로를 찾아가는 희미한 불빛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金씨 삶의 기록이 주는 매력은 권력이라는 이름의 질곡에 저항해 온 「운동권」의 투쟁적인 면모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마르크시즘에서부터 儒·佛·仙의 동서양 사상을 편력하고 동학교도임을 자처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적 길 찾기는 사람에 따라서는 더 큰 감명을 받기에 충분하다. 金씨의 방대한 회고록 「흰 그늘의 길」은 이러한 운동권으로서, 사상가로서의 난해하고 거대한 갈래들을 한눈에 꿰뚫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는 셈이다. 책이 출간된 다음날인 7월10일 출판사 「학고재」의 응접실에서 金씨를 만났다. 얼른 보기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고, 말투마저 약간 어눌하여 왕년의 「대한민국 3대 구라」 중 한 사람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렇게 방대한 분량(「흰 그늘의 길」은 全3권, 원고지 4200장의 대작이다)을 쓰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1991년 동아일보에 「모로 누운 돌부처」라는 제목으로 일부 발표하다가 그만두었는데 2001년 9월부터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다시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여 올해 6월30일에 연재를 마쳤으니 시작부터 책이 나오기까지 줄잡아 10년이 넘게 걸린 셈입니다』
1991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회고록을 갑자기 중단한 이유를 金씨는 제1권의 「글머리에」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십년 전 「동아일보」에 게재된 제1부에서는 엄밀히 말해서 가족사와 내 개인의 진실은커녕 최소한도의 사실마저 정면에서 온전하게 부딪치지 못한 채 금기의 장벽과 타협하고 말았다. 그래서 6·25 전쟁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가서 나의 회상은 마침내 큰 장벽에 부딪쳐 중단되고 만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라고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이 명백한 한 마디가 없이는 나의 회상은 전체적으로 그 회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흰 그늘의 길」, 금기의 장벽 허물고 다시 써 내려간 것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금기의 장벽과 타협」한 회고록을 그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10년이나 뜸을 들이다가 이번에 그 금기의 장벽을 허물고 다시 써 내려갔다. 그래서 나온 것이 「흰 그늘의 길」이다.
―글은 무엇으로 씁니까.
『만년필이나 볼펜이나, 그런 것으로 써요. 두드리는 것(컴퓨터)은 안 좋습니다. 두드리다 보면 상상력이 달리고, 글맛도 이상해지고, 생각 굴러가는 것이 달라요. 그러나 컴퓨터의 원리에 대해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디다』
―하루에 어느 정도 씁니까.
『한창 때는 하루 100장(200자 원고지)은 쉽게 썼습니다. 새벽부터 기운이 동해서 쓸 때는 신들린 듯이 써 내려갈 때가 있었습니다. 「붉은 악마」 얘기나 「촛불」이 그런 경우고, 「오적」은 단 사흘 만에 신들린 듯이 썼는데 오자나 탈자도 없었어요. 내 글씨는 漢字를 비뚤게 써서 알아보기 어려운데 신들린 듯이 쓸 때는 이런 현상도 없었습니다. 신명이 난 거지요. 그러나 요즘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느립니다. 최근 2~3개월은 먹(墨)도 잘 안 하고, 슬럼프 중의 슬럼프에 빠져 있습니다. 좀 놀아야 이게 풀리겠어요』
―회고록이라는 글의 형식이 마음에 듭니까?
『칼 융도 「회고는 위선의 향연」이라 했어요. 그러면서도 그는 임상체험에 관한 글은 썼습니다. 지독한 공산주의자인 아티셀은 「환상도 사실이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환상이라는 것이 어디 딴 데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체계인 바에야 사실이 아닐 수도 없는 거지요. 루소가 대표적인 예인데 서양에서는 회고록이 중요한 글의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나름으로 미덕도 있었는데, 동양에서는 그런 글이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염치 때문이었을까요?
『글쎄, 그렇다면 나는 상놈이라서 이런 글을 썼는지…』
―지나온 삶을 한 편의 글 속에 농축시켜 놓는다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닐까요?
『갇힌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죠. 읽어보세요. 해방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나의 회고록은 포스트 모더니즘과는 다르지만 해체적인 것, 기존의 회고록들과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중심을 가지고 線的(선적)인 흐름을 따라갔어요. 그러나 의식이 복잡한 상태에 들어가면 흐트러지기 시작하여 문체마저도 전혀 달라집니다. 시작과 끝이 달라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는데 성공 여부는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회고록 제1권의 「아버지」를 「아버지 金孟摸(김맹모)는 공산주의자였다」로 시작한다. 계속해서 그는 「이 한마디는 나의 육십 생애 안에 깊이깊이 감추어진 비밀 주문 같은 것이다. 未堂(미당)이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한 마디에 그 일생이 결정되었듯이, 내게도 이 한 마디가 나의 생애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고 쓰고 있다. 그는 아마 끝끝내 그 비밀을 가슴속에 묻어 두려고 했던 것 같다. 불과 10년 전 동아일보에 회고록이라는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던 글에서도 밝히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이번 글에서 그는 미당이 詩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유와 구속을 동시에 얻었듯이, 그 흉내를 내어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고 쓰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난 생애를 통하여 「온갖 형태의 억압과 자기검열로 봉인된 내 삶의 깊은 시간의 비밀」로 침잠해 있던 기억을 백일하에 드러내놓았다.
金씨의 선친은 광복 전 게릴라 운동을 준비했고 6·25 전쟁 때는 빨치산으로 입산했던 공산주의자였다. 이 사실을 자기 검열로 봉인해 두었던 일 때문에, 즉 『그동안 아버지의 사상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내 행동이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석연치 않았던 일에 대해 그는 『가령 韓日회담반대운동에 헌신적이면서도 민족주의비교연구회에 가입하지 않았고, 마르크스주의에 親緣性(친연성)을 가졌음에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던 일』 등을 꼽았다. 역설적으로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를 두지 않았더라면 金씨는 「지독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건강은 어떤 편입니까?
『이 글을 중간 정도 쓸 때까지는 괜찮았어요. 마지막 원고를 넘긴 올 초부터는 다리가 무거워 일어날 때는 한 번 꺾어서 일어나고, 기운이 없어집디다. 병원에 입원해서 전부 검사했어요. 나쁜 데가 한두 군데 아니고 많아요. 정신신경과 치료도 계속 중이라 치료제를 계속 복용하고 있고… 그래서 절로 갔습니다. 지난 2년간 집사람과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고찰을 찾았습니다. 옛 사람들 정말 뭘 알았던 게지. 고찰에 가면 기운이 돌아와요. 고찰에 며칠 머물면 개운해지고 기운도 생기고, 뭔가 달라요. 최근에는 부산 범어사에 가서 머물다 왔는데, 기운이 뻗치는 절이었어요. 서울로 올라오니 또 가물가물해집니다』
―장모님이신 朴景利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대목에서 잘못 말하면 마누라한테 혼이 나는데… 장모님은 예부터 훌륭한 소설가로 알고 있었는데 「토지」를 연재할 때부터 작품을 읽어 보았습니다. 「토지」에 옥관 스님이 연곡사로 들어가는 길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고개를 넘어 절로 돌아가는 가을길의 묘사인데 낙엽이 지는 주변 풍경과 옥관 스님의 미음속 번뇌가 기막히게 잘 묘사되어 있었어요. 한국에도 이런 작가가 나올 수 있었구나, 감탄했습니다. 내 보기에 최고의 소설가입니다. 지금도 글을 쓰고 계십니다. 나도 계속 쓰시라고 권했고요. 「노인이 되면 절이나 성당에 가거나 농사 짓거나 아니면 글을 써야 합니다」고 했더니 대답을 안 합디다. 그런데 최근 「나비야 청산 가자」를 내놓았어요』
―朴景利 선생님이 최고의 소설가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잔재주가 아닌, 역사를 보는 눈과 인간을 보는 시야가 정확하잖아요. 그게 이유입니다. 그런 눈을 가진 소설가가 별로 없습니다. 나는 춘원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어요.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재주는 기막힌데 근본이 틀렸어요』
―부인에게 고생 많이 시켰지요?
『그럼요. 덕택에 지금은 꼼짝을 못합니다. 「젊었을 때 잘하라」는 옛 사람들 말이 맞아요. 요즘은 싱크대에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만 들어도 밥 못 얻어먹지나 않나 하고 놀라는 처지가 됐습니다. 이건 농담이고. 李文求가 살았을 때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 감옥에 가서 너무 오래 살았고, 정치투쟁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문학적으로는 대작을 썼을 테고 식구들도 제대로 돌봤을 텐데」하고. 어떤 이들은 지난날의 내 삶의 행적을 두고 「역사의 대세를 따른 것인데 후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고 개인의 슬픔은 따로 있는 거예요. 지금 와서 아내에게 잘하려고 하나 방법을 모릅니다』
『쿠데타는 그저 한번 해본 소리』
―지나온 길에 대해 후회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현실을 생각하면 지난 과거에 내가 잘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럿이 같이 움직였기 때문에 판단 이전의 문제라고 봅니다. 문학자로서 이제 좀 잔잔한 시선으로 가만히 보고 싶어요』
―얼마 전에도 反戰연대의 10인 성명에 이름을 올려 여전히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주었는데요.
『그건 사실은 상식적인 평화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무슨 대단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잘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사회 변혁을 위하여 온몸으로 살아온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내면적인 사상의 천착에 힘을 다하고 있는 까닭은 나이 때문입니까? 세상이 달라져서 더 이상 변혁시켜야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까?
『지금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그리고 나에게 뭔가 안 맞아요. 시절이 달라졌습니다』
金씨의 회고록이 나오자 신문들이 가장 재미있는 대목으로 관심을 가진 부분이 「1970년대에 李鍾贊(이종찬) 前 국정원장과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金大中을 대통령으로 앉히고 운동권을 대거 정부에 진출시킨다는 계획까지 수립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신문에서는 이 대목을 李鍾贊씨에게 들려주고 李씨의 반응까지 실은 신문도 있었다. 李씨의 반응이라는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이란 원래 무한한 것이라서…』 정도였다.
―그때 李鍾贊씨도 진지하게 쿠데타 이야기를 했던가요?
『물론이지요. 농담으로 할 이야기가 따로 있지요. 죽는 일인데. 朴正熙는 내가 詩人이었기 때문에 살려 주었지 아니었으면 간단하게 죽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진지하게 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걸 믿었을까요? 쿠데타가 쉬운 일이 아닌데 그저 한번 해본 소리였지요』
―그때 만약 쿠데타나 혁명을 일으켜 성공을 했더라면 그 권력은 썩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썩었겠지. 권력이 썩고 안 썩고의 문제 역시 얼마나 자기 수양이 잘 돼 있느냐의 차이, 즉 정도의 차이라고 봅니다. 수행을 한 인간들에게도 스캔들이 생기는데 하물며 수양도 없고 지도사상도 없는 무리가 권력을 잡았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뻔하지』
―북한의 현실은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그러한 문제에 대한 남쪽 지식인들의 역할도 요구되고 있습니다. 북한 얘기를 좀 해볼까요.
『지난번 「화두」라는 책에 대한 간담회에 나갔더니 난데없이 누군가가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해요. 300만 또는 600만의 인민들이 끼니를 거르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코냑이나 마시고 있는 세상에 대해 긴 이야기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金日成은 사회주의하는 목적을 인민들에게 흰 쌀밥에 고깃국 먹고 기와집에 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말하고는 끝이었습니다. 오늘도 북한에 관한 이야기는 같은 말로 끝입니다』
「이해관계(정치적 욕망) 때문에 목숨 바쳐 싸울 사람」으로 金大中씨 지목
―李鍾贊씨와 「쿠데타 모의」를 할 때도 金大中씨를 지도자로 상정했고, 그 뒤에도 정치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지요?
『지난날 反파쇼운동의 선두에는 장준하, 김수환 추기경, 김재준 목사, 천관우, 함석헌, 장일순 선생 같은 분들이 서 있었습니다. 어느 때 내가 그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은 개전 초기라 선생님들이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원래 학 같은 사람들이라 싸움이 진흙탕 개싸움이 되면 모두 날아가 녹나무 위로 가버릴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나 감옥에 가서 썩겠지요. 그러므로 이 운동의 선두에는 이해관계 때문에 목숨을 바쳐 싸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가 「이해관계(정치적 욕망) 때문에 목숨을 바쳐 싸울 사람」으로 지목한 사람이 金大中씨였다.
―金大中씨는 어떤 사람이고 두 사람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金泳三씨와 金大中씨 두 사람 다 네댓 차례씩 만나 보았습니다. 앞세울 지도자감으로 누가 적당한지 검토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런 사람을 내세워야지 金芝河가 나서서 왕왕대 봐야 누가 따라오겠어요. 한데 金泳三씨는 손은 크데요. 돈을 주기에 「당신이 내게 주었으니 이미 내 것이 되었다. 내 돈을 당신에게 주니 갚은 셈이다」하고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웃음이 참 좋아 매력이 있어요. 영락없는 도련님 스타일이에요. 그러나 머리가 문제였습니다.
金大中씨를 처음 찾아간 것은 그가 大選에 첫 출마했을 때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의 일입니다. 첫 만남에서 떠보려고 내가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는 사꾸라라고 하던데 어찌된 거요」했더니 두 시간 반을 떠듭디다. 나는 백기완, 황석영씨와 함께 「대한민국 3대 구라」로 불리기도 합니다만 金大中씨도 만만찮아요. 정신없이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비록 3류 이론가이기는 하지만 공부는 하는구나. 기억력도 좋고, 문장 구성력을 보니 조직력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金大中씨와의 첫 만남에서 일어서면서 나는 한마디했습니다.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지도자는 말이 적어야 된다고 들었습니다」 하고요. 나중에 보니 金大中씨는 역시 독한 데가 있습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정치를 그만둔다고 했다가 어물어물 번복하는 등 행태를 보고 중앙일보에 「도둑놈 담 넘듯 하지 말라」고 썼더니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YS와 DJ 두 사람, 특히 DJ는 집권 이후 만나 보거나 무슨 제의를 받은 일은 없었나요?
『집권 기간 내내 서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서운할 것도 없었어요. 우리가 지향해 온 방향에서 인물 선택을 잘못한 것이지요. 여러 가지 잘못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정치 9단」이라 마지막에는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접지 못했습니다. 남북관계를 트면서 저쪽에 돈을 갖다 준 방식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중대한 남북교섭의 역할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기에는 왕년의 李厚洛이 훨씬 윗길이었어요』
『나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공명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金씨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물이 지형을 따라 한 곳으로 흐르듯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중심축으로 몰리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상」이었고 더 나아가 「우리 사상」이었다. 정치 얘기를 하다가도 어느덧 말머리는 사상으로 흘러들었고, 문명 이야기를 하다가도 사상이 나왔다. 그가 구축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로서의 사상, 그리고 인간과 사회가 지향할 수 있는 가치로서의 사상체계였다. 서양으로부터 빌려 온 너덜너덜한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흙에서 만들어 낸 토종 냄새가 나는 사상, 그러면서도 인류 보편성을 지닌 사상, 金씨는 시인, 혁명가이기보다 우리 민족 구성원에게 이런 사상의 토대를 제공하고 싶다는 큰 욕망을 지니고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儒·佛·仙은 물론이고 동학과 증산도, 단학에 이르기까지 종교, 사상의 편력이 어디에 이르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 사상」에서 뭔가를 찾아내고 재구성하려는 뜻은 잠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찾아낸 우리 사상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기 앎을 알아야 「♥」이 됩니다. ♥은 대긍정의 ♥입니다. 어떻게 대긍정의 ♥에 도달하느냐, 역시 내 앎을 알아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고집 센 민족입니다. 예를 들어 불교는 이미 도입된 지 1600년이 지나 거의 민족종교화했는데도 그에 대비한 우리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단하게 전개되어 온 것이 그 예입니다. 이처럼 자기 앎에 토대를 두고 다른 앎에 대해 알아야만 ♥의 대긍정에 도달한다는 얘깁니다』
내 앎을 알아야 대긍정의 ♥에 이른다는 어려운 말로 시작했으나 金씨의 이야기는 분명한 가닥을 잡고 예의 그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문화의 대혁신이 필요합니다. 과거로 가는 문예부흥과 미래로 가는 문화쇄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예부흥과 문화쇄신을 관통하는 독특한 세계관, 그것에 토대를 두고 자연과학이 성립하고, 그것에 토대를 두고 사회과학을 구축하며, 정치·경제·교육도 그것에 토대를 두고 실현되는 것, 다른 명칭이 없으니 한 마디로 「사상」이라 불리는 그것을 찾아내고 싶었어요. 나는 그것을 구하고 싶어 이것저것 온갖 것을 집어먹으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제 삶은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어쩌면 내가 실패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더라도 뒤를 이어 내 생각을 수정하면서 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현상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은 해체의 시대입니다. 해체되고 분산되는 속에서도 중심 노릇하는 뭔가가 있고, 찾으면서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해체하면서도 해체하지 않는 모순, 역설에 기초를 둔 삶이지요. 속물은 겨우 이렇게 표현하지만 고승대덕들은 이미 이를 명쾌하게 밝혀 놓았어요. 이를 현상 속에서 찾아내자면 글로벌과 로칼의 합성어인 글로칼리즘이 있고, 反美이면서 反美가 아닌 것, 미국을 비판하되 미군철수 주장이나 미국 대사관을 쳐들어가는 우스운 짓을 하지 않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효순이와 미순이의 참사를 재발 않도록 보장을 받으면서 미군철수라는 우스운 주장을 꺼내들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해체이면서 해체가 아닌 것입니다』
―미군 철수를 꺼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뭡니까?
『간단하지요. 미군이 철수하면 일본이 再무장할 것이고, 중국도 당장 군사비를 늘릴 것입니다. 남북한도 그동안 군사비를 줄여 복지예산으로 쓰던 돈을 다시 군사비로 털어 넣어야 할 것이고요. 그 다음은 뭐겠습니까. 어쩌자고 자꾸 反美 얘기가 나오는지 답답해요』
『인생이란 뭔지 알면 그날 죽어도 좋다』
金씨의 정신은 동학에서 증산, 그리고 단군의 神市(신시)에서 周易(주역)과 正易(정역)으로 옮겨 가면서 마침내 「내 앎을 알고 대긍정에 이르는」 체계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 문제는 그 파장이 얼마나 클 것인지, 흔히 하는 말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지난 1년간은 좀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에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명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金씨의 예감처럼 그의 삶은 실패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또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장자의 逍遙遊(소요유)편에 나오는 大鵬(대붕)처럼 그의 상상력과 세계를 꿰뚫어보는 직관이 뱁새들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아득한 창공에 있다는 점이다. 그 大鵬은 말한다.
『인생이란 게 뭔지 알면 그날 죽어도 좋겠습니다. 도대체 어렵습니다』
그는 그 알기 어려운 것을, 보통 사람들을 대신하여 알기 위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2. [Why] 시인 김지하, 문호(文豪) 박경리에게서 '화엄개벽'을 보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어머니들, 아이들 억압하지 마세요"
여성의 힘 되살아나는 새 문명사가 '화엄개벽' "장모는 주역의 대가"
"창조적 발상은 여성에게 의존할 수박에 없어"
< 조선일보 문갑식 기획취재부장, 2009.10.17 >
시인(詩人)은 화가 나 있었다. 얼마 전 스웨덴에 간 걸 두고 뒷얘기가 있었다. 노여움에 불을 지른 건 '노벨문학상을 노린다'는 해석이었다고 한다. 김지하(金芝河·68)의 스웨덴행(行)은 한·스웨덴 수교 50주년 강연 때문이었다.
"내가 ○나 △같은 졸때기도 아니고…, 문학을 상(賞) 타려고 해? 괴로워서 하는 거잖아! 전 이미 옥중(獄中)에서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이라는 로터스 특별상(1975년)을 탔어요. 상(賞)하고의 인연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이야기에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친구 이야긴 묻지도 마. 정치 얘기도 안 할 거고." 경망(輕妄)의 대표격인 한 인물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제야 흡족한 듯 그가 '숙제'를 냈다.
"잡지에 글을 썼어요. 박경리(朴景利) 선생 평론인데 제목이 '흰그늘과 화엄(華嚴)'이야. 200자 원고지 400장짜린데 꽤 어려워. 다 읽고 오세요. 근데 말투가 조폭(組暴) 같은데, 토건(土建)업자 냄새도 나고?…."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토지(土地)문학관은 산속에 있었다. 자궁(子宮) 속 태아(胎兒) 같은 모습이었다. 앞은 황금빛 들판이었다. 내방객은 드물었다. 시인은 약속했던 낮 12시가 훨씬 지난 1시쯤 나타났다.
김지하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흰그늘과 화엄'의 보충자료라며 육필(肉筆) 원고 복사본을 건넸다. "여기가 남에게 잘 안 보여주는 곳"이라며 방으로 안내했다. 목판 속에 새겨진 박경리가 사위와 기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인연
문학청년 시절 김지하는 서울 정릉 박경리 집에 가끔 갔다고 한다. 한번은 김동리(金東里)의 집에 갔다 허탕친 후 박경리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유현종(劉賢鍾), 김국태(金國泰)와 함께 그는 맥주를 얻어먹었다.
1972년 10월 유신(維新) 선포 때도 그곳에 갔다. "기관원들이 잡으러 올 게 분명하니 며칠만 숨겨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박경리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딸 김영주는 어머니에게 "매정하다"고 했다.
터덜터덜 뒤돌아 나가는 그에게 김영주가 달려왔다. "어머니가 혼자 살다 보니 성격이 그렇다. 이해해 달라"며 대신 사과한 것이다. 소설(小說)의 산맥(山脈)과 시의 거봉(巨峯)이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친구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설악산으로 숨기 위해 새벽 골목길을 나서다 친구 집 앞 담벼락에 백묵으로 뭔가를 썼다. '민주주의 만세.' 그 문구가 훗날 절편(絶篇)으로 탄생했다. '타는 목마름으로'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박경리론'이란 평론이 꽤 어렵더군요.
"제 전공이 미학(美學)이잖아요. 박 선생 문학을 정리하려고 벼르다 이번에 그 글을 썼습니다."
―장모의 문학을 평하는 게 쉽지는 않지요.
"장모가 돌아가신 후 기념행사가 많았어요. 매번 그런 자리 나가기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궁리하다 내용으로 그분의 기념비(紀念碑)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아시아권에서 상(賞)을 만들 계획도 있고요."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토지' 소설 세 편을 분석했습니다. '흰그늘의 미학'으로 시작되는데 무슨 뜻입니까.
"게로니모스 하이로미에라는 15세기 이탈리아 시인이 '흰 눈부심을 거느린 검은 악마들의 시위'라는 시를 썼습니다. 윤리적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땝니다. 종교 지도자의 사생아 30명이 여자를 끼고 거리를 활보할 정도였어요. 정신 질서가 붕괴될 때 나타난 게 옛 희랍 인문학입니다."
―희랍의 인문학이 흰색, 윤리적 타락은 검은색이라는 건가요.
"검은색을 다 부정할 순 없지요. 죽여 없앨 수도 없고. 어스름 저녁 물빛을 보면 반짝하고 흰빛이 순간적으로 비쳐요. 융합되는 것, 그게 바로 흰그늘입니다."
―일전에 칼럼에서는 '욕이 많아지는 게 르네상스가 온다는 증거'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측천무후(아내)'가 절대 욕하지 말라고 했는데, 피렌체나 베네치아의 귀족, 귀부인들이 당시 쓴 욕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했어요. 우리도 남자 성기(性器)를 가리키는 말이 PC방 상호(商號)가 될 정도잖아요. 그게 네오(Neo) 르네상스가 올 징조지요."
―박경리 선생의 '시장과 전장'에서 시인은 '경제적 삶의 흙탕물 속에서 끝내 삶의 신조를 버리지 않는 젊은 여인의 하얀 이미지'를 흰그늘이라 했습니다.
"그건 서세동점기(西勢東漸期), 근대문명의 변화와 압력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 서사(敍事)의 압권이지요. 여성이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갈 것인가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아시안 네오(Neo) 르네상스를 위한 미학'이 바로 흰그늘이란 말에 숨어 있습니다. 박 선생은 대단한 분이었어요."
―수년 전부터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가 온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올까요.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나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미 세계가 다극(多極)체제가 됐다고 선언했습니다. 중국 해남성(海南省)에서 열린 포럼에서도 자본의 중심이 동아시아에 와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가는 데 마음 간다'는 말 알죠?"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가치잖아요. 자본 중심이 옮겨왔으면 가치 중심도 동아시아로 오게 됩니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놀라요. 예지자(豫知者)의 면모를 느꼈습니다."
―그런 소설을 왜 평론가 백낙청은 멜로 드라마적 조작이라고 평했을까요.
"크게 잘못한 거지요. 하버드대에서 엘리어트나 좇던 사람이 6·25를 어떻게 제대로 알겠어요. 깊이 새긴 뒤에 평필(評筆)을 들어야지."
―박경리 선생이 생전(生前)에 시인의 분석에 동의하던가요.
"사위와 장모가 작품을 놓고 논할 수는 없지요."
■파국
박경리론은 '흰그늘'에서 '검은 암소(牝牛·빈우)' '검은 구멍(玄牛·현우)'과 '화엄개벽(華嚴開闢)'으로 확장된다. 검은 암소는 주역(周易)에 등장한다. 모성(母性), 생산력, 포용력, 부드러움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여성의 힘이 되살아날 때 도래할 새 문명사가 불교(佛敎)와 동학(東學) 용어를 합친 화엄개벽이다. 시인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과 '토지'에 이 암시가 숨어 있다"며 "표는 안 냈지만 장모는 주역의 대가"라고 했다.
―하필 여자가 '검은 암소'나 '검은 구멍'입니까.
"복희씨(伏羲氏)가 동굴 속에서 여자, 아이들과 7년을 보냅니다. 거기서 인류 최초의 문자인 '결승'을 만들어 가르치지요. 검은 굴 속에서 깨달음의 흰빛이 나오는 거지요. 영화 '워낭소리' 봤어요?"
―못 봤습니다.
"그 영화 세 번 봤는데 사람들이 숨죽여 우는 대목이 있어요. 농부가 아끼는 소가 늙어 병이 드는데 시커먼 우리 속에서 웁니다. 그 눈물이 하얘요. 시커먼 구멍 속에서의 흰빛, 그게 숨은 모성입니다."
―여성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온다는 건데….
"이미 왔어요. TV 드라마나 영화에 유독 '어머니'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잖아요. 영화 '마더(Mother)', '엄마를 부탁해', 이미 어머니가 아이콘(icon)이 됐습니다. 아버지의 시대는 간 거지요."
―시인께서 이런 주장을 하기 전에 페미니스트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르죠. 3000년 전 세상은 모계(母系)사회였어요. 그 위치가 주(周) 문왕 이후 상실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를 철천지원수, 부르주아 대(對)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처럼 봅니다. 헤겔, 칸트부터 다윈까지 가세한 남성 가부장제 권위라는 반동만 자초했지요."
―검은 암소, 검은 구멍 다음에 황상(黃裳)이란 말이 나옵니다. 중국 한대(漢代)의 노장(老莊) 학자 왕필(王弼)이 한 말인데요.
"황상은 '여성 왕통(王統)'을 뜻합니다. 여성 임금을 들어올려야 혼돈이 극복되고 개벽기의 전환적 대안이 된다는 거지요. 조건은 있어요. 여성 왕통을 보완해주는 남성 지혜자가 꼭 필요합니다. 지금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나 재상총권(宰相總權)이 배합돼야 합니다. 이건 과학적으로도 증명돼요."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요?
"태양(陽) 위주의 사고체계가 변하고 있어요. 요즘 기후현상을 온난화로만 설명하지만 실제 태양열은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태양열이 아닌 태양빛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달(陰)은 새롭게 조명됩니다. 미국 NASA의 이탈리아 과학자 에밀리아노 포플러가 달에 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아예 물의 벨트가 있다고 했어요. 우주의 변동이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게 경제현상입니다."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태양열에 대한 버블(Bubble·거품) 현상이 가져온 게 뭡니까, 금융위기잖아요. 경제뿐 아닙니다. 신종플루나 동남아를 강타한 쓰나미도 우주의 변동과 관련 있습니다."
―'황상'이 박근혜(朴槿惠) 한나라당 의원을 연상시키는데요.
"허허, 그렇게 보여?(여기서 시인의 표정이 싹 바뀌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날 죽이려 했지만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두 가지 면에서 인정해. 일본 극우재벌의 돈을 안 썼고 청와대 캐비닛에 달러가 그득했지만 다 남 주고 정작 본인은 막걸리에 북어포만 먹었잖아."
사단(事端)이 결국 일어났다. '시인이 이토록 박경리 문학에 매달리는 게 평생 돈벌이 못하고 장모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이라는데…'라는 말을 꺼낸 직후였다. 이후의 상황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었다.
"나, 몇살이야?"(시인) "우리 나이로 예순아홉이시죠."(기자) "당신은?" "(큰일 날 태세여서 잽싸게 두살 얹어) 오십입니다." "그런데 그리 싸가지 없는 질문을 해? 뭐? 황상에서 박근혜가 연상돼? 천박한 질문 같으니!"
기자는 부글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위층의 김영주 토지문학관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20분쯤 뒤 파투의 위기가 지나갔다.
■ 2막
대화는 독방(獨房) 이야기로 재개됐다. "참 무서운 거야.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밀고 들어오면 정신이 끝장나는 거야. 그때마다 교도관들이 '박 대통령께 용서해달라는 각서를 쓰라'는 거야."
그는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내가 위대해서도 아니고 아내도, 아이들도 보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배신할 순 없잖아. 나중에 보니 세계 각국에서 그때 수십억원을 지원해줬어요. 난 한 푼도 못 받았지만."
옥고(獄苦)의 후유증으로 시인은 지금까지 12차례나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내가 노무현 정권 때 정신병원에 3번이나 갔어요. 병원비는커녕 안부전화 한 통 거는 놈도 없더군."
―제가 범인들만 쫓다 보니 질문이.
"한 대학에서 석좌교수를 했어요. 그때 얼마나 기뻤다고. 영국에 유학 간 작은놈 도와줄 수 있으니 얼굴 좀 펼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학교에 가니 노무현 전 대통령 얼굴이 잔뜩 붙어 있는 거야."
―그래서요.
"학벌 없는 그이가 대통령이 된 거 그걸 존경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대통령이 개인이야? 돈 받아먹고 조사하는 게 국가의 공적 과정이잖아. 왜 도망가? 우리나라에 한 해 자살자가 1만3000명으로 세계 4위인데 '베르테르 효과'란 거 있잖아, 다 따라 죽어? 그걸 조장하는 게 교육이야? 집사람한테 말했어요. '기분 나쁘면 그만두라'고 하더군. '너희 같은 놈들하고 같이 산다는 게 창피하다'고 하고 관뒀지. 올라올 때는 통쾌했지만 아버지 위해 기도하는 둘째 놈 생각하니 눈물이 나. 실존적 문제거든."
―그만 하시지요.
"내가 서울대 미학과에서 올 A였어요. 구한말 김홍집(金弘集) 재상 있었죠? 그분 손자가 김정록 교수님이라고 중국 북경대에서 모택동(毛澤東)도 벌벌 떨게 한 대학자 곽말약(郭沫若)의 제잡니다. 그 동양사상사의 대가가 날 예쁘게 봐 '교수하라'고 했는데 제가 '썩어서 싫다'고 했어요."
―왜 그런 말을.
"한 교수가 강독(講讀) 시간에 특정 학생만 시키는 거야. 어느 날 새벽 낙산에서 운동하고 오는데 그가 그 교수 집에 청주 병을 들고 서 있더군. 교수가 칙사대접하며 술병을 받는 걸 보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내가 공부를 더 하려고 학부만 8년 다녔어요. 그때 읽은 책들이 지금의 기초가 됐지. 중정(中情)은 '직업적 학생혁명가가 되려는 고의적 장기 학적 보유자'라고 했지만. 우리 증조부, 조부가 동학혁명 했고 아버지는 코뮤니스트였어요. 월출산(月出山)에서 빨치산도 했고. 난 절대 공산주의에 안 빠져요. 아버지가 빠진 게 뭔지 공부는 했지만. 지금 관료 중에 마르크스의 '자본론' 읽은 사람이 몇이나 돼? 다 엉터리 좌파지. 자, 어디까지 얘기했지? 그래 여성에 의한 획기적 재분배, 우리 역사에 전례가 있어. 우리 인제 이성적으로 하자고."
―어떤 전례인가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드에서 벽화를 보고 놀랐어. 중앙에 고구려인이 있는 거야. 시(市) 입구에 서 있는 돌에는 '초포나타'라고 쓰여 있어요. 고구려 졸본성(卒本城)이야. 당(唐) 이세민이 왜 고구려를 없애려 안간힘을 썼겠어요. 고구려부터 중앙아시아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거든. 중국은 자기들을 포위한 걸로 봤겠지. 이 부족연맹들의 시장(市場)이 얼마나 복잡했겠어요. 그걸 획기적으로 재분배한 게 여성이 참여하는 신시(神市)의 전통에서 나온 겁니다."
―남성은 왜 획기적 재분배를 못할까요.
"월가(街) 앞에 항상 탐욕이라는 수식어가 붙죠? 대표적인 남성적 시장이지. 지금 외식(外食)이 증가하잖아. 그것도 여성이 맡아야 해요. 얼마 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만나서 '왜 포스트 한류(韓流)를 시장에 맡기느냐'고 했어요. 말은 그럴듯하지만 직무유깁니다. 잘 이해를 못하더군. 창조적 발상을 하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하는데 그건 여성의 아이디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과학에서 역사까지 종횡으로 달리는 주장을 세상이 이해할까요.
"누군가 편지를 보냈어요. 겉봉투에 '金美親(김미친)'이라고 썼더군. 미쳤다는 거지. 신비주의자로도 보이고."
■ 어머니
시인은 '종합병동(病棟)'이라 불릴 만큼 여러 병으로 고생했다. 그런데 작년 말 '백학선생'의 제자라는 104세 한의사를 만나 쾌차했다. 약 없이 잠들 수 없었던 그는 요즘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다고 했다.
몸이 개운해지니 기억도 돌아와 시작(詩作)에 한창이다. 이름이 '땡'이라는 고양이에 정을 들여 같은 이름의 시집을 낼 계획이다. '화엄 개벽 모심의 길'을 비롯한 몇권의 책과 오역(五譯) 화엄경도 쓰고 있다.
―아직도 세상은 '오적(五賊)'의 시인으로 기억합니다.
"그 시를 사흘 만에 썼는데 아무도 믿지 않아요. 그 시를 쓴 후 절망했어요. 붕어 키우느라 온도 맞추고 집 안에 에스컬레이터 있다고 썼는데 다 상상이었거든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절 껴안으며 '김지하, 넌 애국자야'라고 하는 겁니다. 시적 상상이 사실이었다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고양이에 애정을 느끼는 건 무슨 이윤가요.
"스톡홀름 가면서 파김치가 됐어요. 꿈에 '땡'이가 떠올라요. '야옹!' 하면서. 내가 늙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돌아와 보니 땡이도 내 방문 앞에서 그렇게 울었대요. 정(情)의 정체가 뭘까, 여성성 아닐까요."
―모든 여성이 다 온화하고 획기적 재분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희랍신화에 이시스와 고르곤이라는 여신(女神)이 있습니다. 이시스가 백색을 뜻하는 모성의 상징이라면 고르곤은 제 새끼를 씹어먹는 흑색입니다.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와 베네치아에도 그런 부류들이 있었어요. '파스쿠치'라 불렀죠."
―어떤 인간들이었습니까.
"파스쿠치들이 약소국 그리스의 성전(聖殿) 유물을 헐값에 사 메디치가(家) 같은 명문가에 비싸게 되팝니다. 그렇게 축적한 부(富)로 희귀한 정력제를 사먹고 우아와 음란을 오가지요. 르네상스가 와야겠죠? 파스쿠치들은 어둠이죠. 아시안 네오르네상스가 온다고 하면 웃는 이들이 많은데 우리 주변에도 징조가 있어요."
―뭡니까.
"고르곤이나 파스쿠치 같은 여자들 안 보여요?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로 번 돈을 들고 아이들 팽개치고 향락에 빠진 여자들이오. 여자들 얼굴이 하나같이 희지요? '맨하탄 화이트'거든. 지금은 눈 주위 컴컴하게 칠해 마귀 같은 여자가 많잖아. 색마(色魔)가 악마(惡魔)로 변한 거죠. 옛날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여자들이 거리를 활보하잖아. 사실 박 선생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도 독하기 그지없습니다. 불륜도 저질렀고. 그런데 그 안에 다 장치가 숨어 있는 겁니다."
―무슨 장친가요.
"서희가 소설 마지막 부분에 스님과 대화합니다. 법화(法華) 신앙인데, 법화는 화엄세계에 들어가는 꽃무늬입니다. 알면 알수록 장모님이 참 묘해요, 생각할수록."
―'토지'도 펄벅의 대지(大地)와 같은 개념이 아니겠군요.
"단순한 땅이 아닌 인간이 발 딛고 사는 세계의 근거, 삶의 정체(正體) 같은 겁니다. 그게 화엄이고요."
―시인의 어머니는 어땠습니까.
"어렸을 적에 그림을 잘 그렸어요. 양반 가문인 어머니는 그걸 못하게 했어요. 두 손을 묶고, 제가 발가락에 붓 끼워 그림 그리면 발까지 묶었어요. 아버지와 백부가 기술자여서 연장이 그득했는데 그것도 못 만지게 했어요. 제가 지금 컴퓨터를 못 다뤄요. 집에 뭐 고장나도 못 고치는 기계치(痴)가 됐죠. 그래서 미학과를 택한 겁니다."
―그림과 미학이 무슨 관계입니까.
"억눌림을 당하면 자기 검열을 하게 됩니다.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 택한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겁한 절충이었지요. 이 말 꼭 써주세요.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아이들 억압하지 말라고."
북한 서열 22위인 '간첩 대장' 이선실이 "민족의 제단에 김지하를 바치겠다"며 그의 주변에 거액을 뿌렸다. 시인에게 반(反)정부 성명 발표를 종용해 옥사(獄死)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고백에는 함축이 많다.
장모는 사위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런 박경리를 운동권은 핍박했다. 시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시스와 고르곤의 틈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장모에게서 '어머니'를 본 것이 아닐까.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긴 사연을 듣고 나서야 시인이 말한 '흰그늘' '검은 암소' '화엄개벽'이 명료해졌다. 그가 박경리라는 큰 품을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 기자에게 시인은 여러 번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게 인터뷰가 잘되려고 그랬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격정(激情)마저 없었다면 시인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가슴의 한(恨)을 잠시라도 풀고 후련해질 수 있다면 욕 천 마디가 대수랴.
4. 김영주 (2011.02.28)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남편 정신병원 12번 입원, 그리고 완치… 밖에선 김지하를 잘 몰라"
옥중의 김지하를 순교자 만들려는 계획거절하자 운동권서 따돌림
출감 후 이혼할 결심도 운동권측과의 갈등으로 남편, 정신발작 일으켜
<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2011.02.28 >
어느 날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까지 내가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이젠 완전히 나았어요. 잠을 자도 꿈에 안 시달려요. 병원·한의원 어디서도 못 고친 걸 장병두 할아버지가 낫게 해줬소. 내 처와 자식들도 그렇게 나았소. 그런 분을 의사 면허증이 없다고 환자를 못 보게 막습니다. 법과 제도가 사람 살리는 걸 막고 있는 격이오. 그분 연세가 105세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소. 전통 춤·노래·공예 부문에 '인간문화재'가 있듯이, 그분을 전통의술 부문 '인간문화재'로 만들 순 없겠소. 그분 비방이 합법적으로 전수될 수 있게 말이오."
장병두옹은 사회적 논란이 됐던 인물이다. 한쪽에서는 그를 '현대판 화타'로 떠받든다. 암·당뇨·간질·백혈병·중풍 등 난치병을 그가 고쳐왔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는 한낱 '무면허' 한의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2006년 의료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다. 이는 제도의학과 민간의술의 충돌이기도 했다. 그는 1·2심에서 똑같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고령(高齡)의 나이를 감안해 판결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그에 대한 검증은 사실 불가능하다. 설령 그의 치료 효과를 봤다 한들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지하가 그동안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모처럼 그 가족이 '건강'해졌다는 스토리는 들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강원도 원주로 가서 김지하 대신 부인 김영주(65)씨를 만났다. 김지하보다는 좀 더 객관적으로 얘기할 것 같았다. 토지문화관 관장인 그녀는 어머니 박경리(朴景利)를 쏙 빼닮았다. 말에는 경상도 억양이 남아있었다.
"외부에서는 김 시인(김지하)이 어떠했는지 몰라요. 출감(1980년)한 뒤로 늘 술에 절어 살았죠. 5년쯤 지나니 도저히 못 참겠더라. 제가 이혼하려고 했어요. 김 시인이 '이혼은 못 한다. 대신 당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해서, 환경을 바꾸면 좋아질 것 같아 전남 해남으로 이사갔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김 시인의 속을 뒤집어 놓았어요. 그들이 떠나간 뒤 헛소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위 운동권 동지·후배들의 집단따돌림, 이에 대한 분노·배신감·피해의식 등이 복잡하게 작용했겠지요. 그때부터 정신병원에 12번이나 입원했어요. 발광해 들어가면 약을 한 주먹씩 먹였어요. 몸이 고릴라처럼 부어 멍하게 앉아있어요. 조금씩 약을 줄여가고 그렇게 1년쯤 지나면 사회 활동을 합니다. 세상 일에 대해 못 견뎌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발작하고. 1991년 시위 때 분신자살이 유행하자, 운동권 세력을 향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조선일보에 쓴 것도 그러했던 거죠."
당시 나는 현장을 취재했다. 아침에 눈뜰 때면 '지금 어디서 누군가 또 자살할지 모른다'고 괴로워했다. 열댓명이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유행처럼 자살했다. 그때 김지하가 작심하고 쓴 '죽음의 굿판' 칼럼은 세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운동권 동지·후배들로부터 욕설과 비난, 협박 전화가 끊이질 않았어요. 우리 집에 경찰을 보내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스트레스를 못 견뎌 정신병원에 또 들어가고. 지나고 보면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이 저 사람의 소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 사건 이후 운동권에서는 김지하를 '변절자' '생명사상 교주'로 욕했지요. 어린 후배조차 소위 인연을 끊었습니다.
"조직적으로 매도하고 따돌렸어요. 그 모욕감에 김 시인이 술 마시고 들어오면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쪽에서 보면 '배신'과 '변절'일 수도 있지요. 김지하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김 시인은 '나는 달라진 게 없다. 나는 어떤 조직에 들어간 적도 없고, 모든 운동조직은 나 스스로 만들었다. 나 자신은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면 저네들이 변절자다. 내가 변절한 적은 없다'고 했어요.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동지'라는 사람들이 김 시인을 죽이려 했고, 그게 안 되자 그를 따돌렸어요."
―납득이 안 되는군요. 동지들이 수감 중인 그를 왜 죽이려고 하며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김 시인은 형무소에 들어갔지만 '투사'가 돼 죽으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게 7년이나 오래 독방 수감 생활을 할 줄은 자신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세력은 김 시인을 소위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요. 박정희 체제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는 문건을 옥중에서 계속 쓰도록 요구했어요. 박정희로 하여금 김 시인을 죽이도록 해 김 시인을 '투사'나 '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 동력으로 박정희 체제를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박경리)가 '동지들이 김지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했어요. 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어요. 그러니 우리 모녀도 죽이려고 했어요. 누가 동지고 적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증거도 없고. 어떤 피해의식에 근거한 망상 아닙니까?
"세상에서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것이 있어요. 당시 첫 번째 오는 택시는 안 탔어요. 그렇게 납치될 뻔한 경험을 했거든요. 이런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지나간 일은 덮고 가려고 했어요. 선과 악 모두가 당시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김 시인을 매도하고 건드려요. 그것에 쇼크를 받고 정신병원에 갑니다. 폐인에 가까운 상태였어요. 사람 사는 게 아니었어요. 발작을 일으켜 집을 나가면 제가 찾아서 병원에 데려가요. 그러면 퇴원시켜달라고 전화로 난리칩니다."
―김지하는 어떤 사람입니까?
"억세고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면이 있긴 하나, 순한 사람이에요. 결혼 전에 이 사람에게서 세 가지를 봤어요. 굉장히 여성적인 모습과 속이 텅텅 빈 허(虛)한 느낌, 그리고 골짜기가 많은 큰 산 같다는 인상이었어요. 앞의 둘은 부정적인 느낌이었는데 들어맞았어요. 마지막은 모르겠어요. 골짜기에 가만히 있으면 편할 것 같았는데 살아가면서 아직 그런 맛을 못 봤어요."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동료 문인들과 함께 정릉의 우리 집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왔어요. 제가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였어요. 그가 '오적(五賊)'을 발표한 시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때는 시를 읽어보진 않았어요. 그다음 왔을 때는 '수배받고 있으니 숨겨달라'고 했어요.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엄마로서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를 보내면서 마음이 안됐어요. 어릴 때 외할머니가 제게 '너는 복(福)이 많아 잘 살 것'이라고 했는데, 내 복의 절반을 저 사람에게 떼줬으면 했어요. 결혼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이었어요. 수배가 풀리자 그가 다시 나타났어요. 엄마가 결혼을 허락했어요. 하지만 내가 그런 인생을 살게 될 줄은 몰랐죠. 정치적으로 그렇게 휘말릴 줄은 몰랐던 거죠. 딸을 보면서 평생 속상해한 거지."
―1973년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듬해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감됐는데(당초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돼 1980년 석방됐다).
"자기가 붙잡혀 들어갈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 준비를 다 해놓은 뒤였어요. 그러고는 저와 결혼을 한 거죠. 그때 결혼 안 했으면 결혼 못 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이었지요. 감옥에 들어가면서 생후 몇 달 안 된 아들까지 남겨놓았으니…."
―그런 남편과 같이 살았다는 점만으로도 김 관장께서는 충분히 대단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버리겠습니까. 김 시인이 멀쩡하면서 애를 먹였다면 같이 안 살죠. 병이 나서 그러니 누가 데려갈 사람도 없지, 할 수 없는 일이죠. 저는 상황에 매달려 질질 끌려왔어요. 그 상황을 책임질 수밖에 없었어요. 김 시인은 외부 강연에서는 '마누라 덕분에 어쩌고저쩌고' 해놓고, 막상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삐쳐요. 어떨 때는 집을 나가버려요(웃음). 하지만 매일 한 주먹씩 정신병 약을 먹고 지금껏 살아있다는 게 대단해요. 장병두 할아버지 치료를 받을 때 그 약을 끊으라고 하니 겁을 냈어요. 약 안 먹으면 잠을 못 드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떻게 장병두옹의 치료를 받게 됐습니까?
"발작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이들은 상처받고 무서워했어요. 둘 다 대학을 못 갔어요. 이제 서른살이 넘었지만 결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무의식에 있는 것 같아요. 김 시인에게 '당신이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서 있어줘야 한다'고 말해왔어요. 어느 날 큰아이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그때는 제가 죽고 싶었어요. 병원에 데려가도 소용없고. 한 지인의 소개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장병두 할아버지를 찾아간 겁니다."
―김 관장 본인도 치료를 받았다면서요.
"저도 만날 아팠어요. 하체에 감각이 없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의 약을 먹고 어느 날 앙가슴에서 울화로 맺힌 불덩어리가 확 빠져나가는 걸을 느꼈습니다. 그분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생명의 은인이지요."
장병두옹의 구술(口述)로 엮은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란 책에서 김지하가 서문을 썼다.
'큰아들은 나의 발광을 보고 극도의 우울증에 사로잡혔다. 작은아들도 내 발광에 놀라 뇌신경의 반이 마비돼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있다…. 두 아이가 선생에 의해 완전히 치료됐다. 우리 식구 중 끝까지 잘 치료가 안 되고 끝없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아내도 어느 날 몇 시간 몸부림치다 기적처럼 치유의 경험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렸는데도 김지하 마음속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와의 통화에서 "과거에 내가 어려울 때 이명박씨는 3000만원이나 도와줬다. 지난 정권 때 정신병원에 세 번이나 입원했지만 그쪽에선 아무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운동권 사람들이 많이 들어간 지난 정권에서 비리가 터져나왔을 때는 참지 못했어요. '도둑질이나 해먹고 너희가 인간이냐'며.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욕을 해대요. 그래서 아예 휴대폰을 빼앗아 버렸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도 자살 행위를 비판해 더욱 적을 만들었지요."
―이제 본인을 위해서라도 분노를 비우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습니다.
"김 시인도 그걸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도 처음 '서푼짜리 노여움을 풀어라'는 말부터 했어요."
―그런데 박경리와 김지하 중 누가 더 문학적 천품을 타고난 것 같습니까?
"모두 대단한 사람이지요. 엄마는 친구도 없이 딸 달랑 하나와 살았어요. 글을 그렇게 많이 고쳐요. 파지가 산더미 같았어요. 원고를 쓰면 제게 읽어보라고 했고, 제가 고쳐주곤 했어요. 어떤 때는 제가 읽기 싫다고 하면 화를 냈지요. 너무 가까이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몰랐어요. 김 시인은 천상 시인이에요. 모든 시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탁월한 시들이 많아요. 하지만 산문 쓰는 것, 어려운 글 쓰는 것은 못마땅해요. 내가 '누구 읽으라고 그런 글을 쓰나'고 타박하면 화를 벌컥 내요. 참견한다고."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장병두옹은 올라오는 길에 잠깐 만났다. 105세의 나이란 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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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지하 (2018.03.05)
[최보식이 만난 사람] “내가 못났다는 거요… 난 씩씩한 사람이 못 돼, 겁이 굉장히 많고”
[시인 김지하 단독인터뷰]
”영원한 진리 아닌 마르크시즘
진보 혁신 떠드는 놈들이 100년 전 하던 얘기를 똑같이, 좀팽이 깡통 좌파로구나“
”감옥에서 박정희 죽음 소식 교도관이 전해주는 순간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2018.03.05 >
시인 김지하와 통화를 한 것은 대규모 3·1절 집회를 열겠다는 보수 진영의 신문 광고 때문이었다. 주최 측 대표 명단에 ‘김지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내 목을 걸고 감옥에 간 게 '민주' 앞에 놓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잖소. 개헌을 한다면서 민주주의 앞에 '자유'를 뺀다는 것에 좋지 않게 생각해. 그래서 내 이름을 넣어도 좋다고 한 것인데, 내가 보수의 리더인 것처럼 광고가 실렸다고 했소? 내 나이 칠십팔이오, 몸도 아픈 내가 지금 정치하게 됐소? 글도 시(詩)도 안 쓰고, 그림이나 그리며 원보 엄마(부인 김영주)만 모시고 사는데…."
술 한 병 들고 강원도 원주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술·담배 안 한 지 오래됐소. 당신도 꽤 늙었구먼. 우리가 얼굴 안 본 지 10년 됐나, 20년 됐나. 김대중 시절 당신 인터뷰로 그쪽 사람들에게 많이 시달렸지…."
―보수 진영에서는 이런 난국에 김 선생께서 나와주셨으면 하더군요.
"내가 어떻게 우파의 리더가 될 수 있겠소.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오."
―새로운 길이라는 게?
"한마디로 정의하고 얘기하는 게 힘이 들지만, 우리 전통 속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찾는 것이나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여성성(女性性)에 주목하는 것인데…."
―지금 현실의 긴박성과는 떨어진, 너무 추상적인 답변이군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신문기자처럼 말해야 하나, 정치가처럼 말해야 하나. 안 그렇지 않소? 그런 얘기 할 수 있으면 내가 왔다 갔다 하며 돈을 벌지. 나는 아름다울 미(美), 배울 학(學), 미학 전공이오. 예술의 원리와 효과에 관심 있고, 연극 연출, 그림, 시를 해왔잖아. 그렇게 해온 사람의 말이란 애매하고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거지."
―제가 이해 못하면 독자도 이해를 못합니다. 현 정권이 가고 있는 방향은 맞는다고 봅니까?
"이해를 안 하려고 하는 것이지. 현 정권이 모두 맞는다고 생각하면 당신을 이렇게 만나 떠들겠어. 간혹 어떨 때는 이 자식들 봐라, 마르크시즘은 영원한 진리도 아닌데, 그 자체가 변화·발전·진보하는 것인데, 100년 전에 하던 얘기를 똑같이 하나, 진보 혁신을 떠드는 놈들이 그걸 집착해, 좀팽이 깡통 좌파로구나 여기지. 그놈의 똘마니들이니까."
―'그놈'이 누구입니까?
"신문 기사를 보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 감동받았다고 했더군. 내 인생의 책이라고 그랬나. 백낙청은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로 행세하고 있고…."
―리영희나 백낙청은 어려운 시절 함께했던 동지(同志) 아니었나요? 관계가 왜 이렇게 비틀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지주(地主) 집안에 그 시절 하버드대 대학원을 나온 백낙청이 민중을 운운하는 이중성 때문인가요?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한 그가 어떻게 한국 문학사의 심판관을 해. 내가 장모(박경리)를 알기도 전에, 그는 박경리 소설 '시장과 전장'을 형편없이 깠어. 그런 심미관(審美觀)을 보고 그를 더 우습게 봤어. 리영희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월남전 타령이고, 외신(外信)에 나오는 걸로 자기 사상인 양 떠들었어. 1973년인가 신경림 시집 '농무(農舞)' 출판기념회에서 비위가 틀려 이들과 대판 싸웠어요. 그 뒤 한 선배가 '함께 안 가면 이 동네에서 당신이 외톨이 된다'고 말려 억지로 친해졌던 거지."
―5년 반 전쯤 본지(本紙) 기고문을 통해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깡통 좌파'라고 공격해 화제가 됐지요.
"내가 감옥 독방에 갇혀 있었을 때 교도관을 통해 바깥과 연락했어요. 한번은 리영희·백낙청·고은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교도관이 앉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고은이 '박경리에게 손자를 업고 시청 앞에서 김지하 석방 플래카드 들고 시위하라고 했더니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라고 떠벌리자, 리영희·백낙청이 낄낄 웃더라는 거야. 그 얘기를 교도관에게 전달받았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을 때 '역사와의 화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김지하가 이렇게 변절할 수가 있나'라는 당혹감도 있었습니다.
"여성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소. 인류 역사의 변화가 감지됐어요. 동학에 의하면 후천(後天) 시대가 도래하고,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는 우주가 여성성으로 바뀌며 그늘이 빛을 감싸게 되며, 천부경(天符經)에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오고…."
그의 설명이 십여 분 넘게 이어져, 중간에 말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박근혜 후보에 대해 '부모님이 흉탄에 돌아가셨고 18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내공이 있을 거다'라고 했지요?
"제 아비로부터 정치를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친하게 지낸 선후배들이 찾아와 좋게 얘기를 하며 '박근혜를 한번 만나라'고 했어요. 내게 찾아오겠다는 전갈이 왔을 때, '지학순(池學淳) 주교의 무덤에 가서 정권 잡으면 유신 체제처럼 안 하겠다고 큰소리로 다짐하고 오라'고 하니까, 실제 그렇게 하고 찾아왔어요."
―그 전부터 알아온 게 아니라 그때 처음 봤다는 것이군요.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그의 아버지 얘기를 꺼냈어요. 감옥 독방에서 내가 미친 증세가 와서 100일간 참선을 했어요. 참선이 끝나는 바로 그날 박정희가 죽었어요. 교도관이 전해주는 순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소.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나처럼 박정희 미워한 사람 별로 없었을 텐데. 다음 날 교도소 TV를 통해 미사를 집전하는 김수환 추기경을 봤어요. 그분이 한참 침묵한 뒤 '인생무상'이라며 나와 똑같은 말을 하더군. 그때부터 내가 웃기 시작했어요."
―이런 얘기를 들려주니까 박 후보는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웃지도 울지도 않고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부모가 총 맞아 죽고 난 뒤 18년을 고독 속에서 지내면서 생긴 내공이 아닌가 싶더만. 그래서 내가 '당신을 잘 모르지만, 이런 고통을 에너지화해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중요한 것은 문화인데 모든 것을 문화와 연결시켜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소."
―그렇게 평가했던 박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는데.
"제 아버지에게 정치를 배웠으면 치밀한 정치 패거리가 있겠지, 그 패거리가 돕지 않겠는가 했는데. 그게 안 보였어. 임금처럼 만기친람이었어. 어디서 최순실이 같은 여자가 튀어나와 야단법석이 될 줄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어."
―구속 수감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떤 감상이 있습니까?
"이명박도 구속시키려고 하지 않소. '적폐 청산'이 말은 그럴 듯하나, 정치가 사람 잡아 조지는 것인가. 그게 정치요? 할 말은 많아도 나는 이제 하지 않아."
―김 선생을 보면, 짧았던 젊은 날의 어떤 신념과 선택이 그 뒤의 길고 긴 세월을 모두 결정짓는 것 같습니다.
"젊은 날 나는 정치(시국투쟁)를 할 생각이 없었소. 옆에서는 자꾸 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조직에는 안 들어갔지. 나는 시·연극·드라마 같은 문화에 관심이 있었소. 대학 시절 은사는 내게 '노자(老子)를 읽어라. 허무에서 배워라'고 했고, 또 '서양 미학을 배우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말고 거리의 미학자가 되라'고 했소. 그런 괴상한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나는 시 쓰고 거리의 미학자가 된 거 아니오."
―'허무(虛無)'를 공부했다면서 어떻게 독재 정권과 맞서는 투사가 되고 저항 시인이 됐습니까?
"우리 집안은 동학(東學)이었소. 전기기술자인 아버지는 자생적 공산주의자였소. 하지만 6·25 때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진짜 공산주의 그룹에서 아버지 계열은 청산됐어. 그 뒤 자수하고 전기조명 기사로 국군에 편입됐어. 6·25가 끝나자, 공산주의자로 찍혔던 고향 목포에서 원주로 이사를 오게 된 거요. 내 나이 열세 살 때. 왜 집안의 영향이 없었겠소. 마르크스 책을 봤지만 내 성향은 운동조직과 맞지 않았소. 유물론·변증법·잉여론 같은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6년 반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난 뒤로는 생명사상을 들고 나왔지요? 운동권 진영에 '김지하가 변했다'며 당혹감과 충격을 줬지요?
"감옥 안에서 '동경대전'을 읽고 동양 정신의 세계로 들어갔지요. 생명과 환경, 농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사실은 그 이전부터 내 안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들이지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만날 얻어터지기만 하고 빛을 못 보고 살았지요."
―'김지하'라는 이름을 얻었고, 서로 모셔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 거요? 그게 좋은 거요? 그걸 바라고 살아온 사람 같소? 잘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잘못 살아왔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돌아보면 어떤 점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습니까?
"많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못났다는 겁니다. 나는 씩씩한 사람이 못 돼. 원래 겁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오. 감옥을 예감하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결심해야 돼. 적당히 결심하지 못해. 집사람은 이를 잘 알지. 그래서 고통 받았지. 집사람한테 늘 미안해. 워낙 고생을 많이 했어."
―그런 기회는 없겠지만, 가정해서 또 한 번 삶이 주어지면 이렇게 살 겁니까?
"남들에게는 어떻게 비쳤을지 모르나 내가 찾으려는 것은 아름다움이었지. 나는 어둠 속의 '흰 그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늘에서 기적 같은 흰빛, 그런 아름다움을… 내가 살아온 삶을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원리를 찾아가겠다는 바람은 변함없소."
이제 그는 걸음걸이가 불편한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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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지하 별세 (2022.05.08)
저항시인 김지하 별세... “난 좌파·우파·중간파도 아니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의 시인
< 김성현 기자 2022.05.08 >
“스무 살이던 4·19 시절부터 가르침과 깨우침을 줬던 사상이 민세(民世) 안재홍의 중용(中庸)이었다. 내가 평생 걸어온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큰 힘이 된다.”
8일 별세한 시인 김지하(81·본명 김영일)는 지난 2011년 민세상 사회통합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직후 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세상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민족운동가·언론인·역사학자로서 민족 통합을 실천했던 안재홍(1891~1965) 선생을 기리는 상이다.
전립선암 등으로 투병하던 시인이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전 고백처럼 그의 80여 년 삶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역설적으로 ‘중용’이었다.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청년 김지하는 학부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64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에 나섰다가 4개월간 복역한 것이 시작이었다.
1970년에는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과 장성(將星),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서 부정부패와 비리를 질타하는 저항시 ‘오적(五賊)’으로 다시 필화를 겪었다. 당시 시인이 풍자적 의미로 썼던 ‘오적’은 지금도 사회적 병폐를 풍자하는 상징적 언어가 되고 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1980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그의 미학과 8년 후배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굴곡진 삶 중에서 시인과 민주화 운동 투사로서의 업적뿐 아니라 ‘민족 예술 1세대 대부’로서의 역할도 컸다. 특히 1960년대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인이 길러낸 후배들이 ‘김지하 사단’이 되어 미학·예술 분야의 중추가 됐다”고 말했다.
투옥을 거듭하는 중에도 시인의 절창(絕唱)은 대학가와 저항 세력 사이에서 시와 노래로 은밀하지만 지속적으로 불려나갔다. 그의 시에 곡조를 붙인 ‘타는 목마름으로’와 ‘새’ 같은 민중 가요가 대표적이다. 1975년 옥중에서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의 ‘로터스’ 특별상을 받았다. 당시 수상을 계기로 그의 석방 여부가 국제사회의 인권 문제로 떠올랐다.
역설적으로 그가 유불선(儒佛仙)과 동학 사상, 생명론에 경도되기 시작한 것도 투옥 시절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 시인은 본격적으로 생명 사상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1991년 일부 학생 운동권이 반독재 투쟁을 이유로 분신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택하자,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조선일보 칼럼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시인은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면서 생명을 경시하는 투쟁 방식을 정면 비판했다.
일부 세력은 그를 ‘변절자’와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시인은 그의 구명운동이 계기가 되어 출범한 민족문학작가회의로부터 제명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인은 “나는 작가회의에 아예 가입한 적이 없다”고 받아쳤다. 하지만 훗날 “박정희 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7년이나 수형 생활을 했고, 좌파 진영이 극단적이던 시절에는 그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좌우로부터 지독한 비판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시인이 중용의 길을 걷고 있다는 방증”(김진현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라는 재평가를 받았다. 2018년 본지 인터뷰에서 시인은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외동딸인 김영주(1946~2019) 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과 1973년 4월 결혼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작가)씨와 차남 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학관 관장)씨가 있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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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김지하는 암흑시대를 밝힌 촛불 하나”
이문열 “한때 헹가래 받았다가 떨어져 냉담한 대접받는 사람 돼”
유홍준 “민족 예술 1세대의 대부”
정과리 “詩로 현실문제 적극 대응”
<조선일보 김미리 기자/ 윤수정 기자 2022.05.09 >
김지하 시인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문단 및 문화계 인사들은 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들에게 김지하는 촛불이었고, 민족 예술 1세대의 대선배였으며, 한편으로 인간 생명을 재해석한 시인이자 철학자였다. 시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문화계 인사 4인의 육성(肉聲)을 싣는다.
● 이문열(소설가)
젊은 시절 내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서 보자고 해 만났다. 그때 난초 한 포기를 그려준 것이 첫 만남이었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내가 죽기를 바라는가보다, 왜 죽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거 같다”면서 그는 괴로워했다. ‘한때 헹가래를 받으며 솟구쳤다가 다시 떨어져 냉담한 대접을 받는 사람 기분이 이렇겠구나’ 생각했다. 2005년 독일에서 만났을 때 여러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게 마지막이다. 쓸쓸하고 슬프다.
● 김훈(소설가)
암흑시대에 촛불 하나가 살아서 감옥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솔 출판사 김지하 전집에 연보가 자세히 나와 있다. 김지하가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무진기행’의 김승옥 선생이 “나는 김지하와 서울대를 같이 나왔는데 이 사람은 빨갱이 아니다”라고 증언을 했다. 김승옥 선생, 선우휘 선생이 그분을 위해 탄원서를 참 많이 썼다. 말년에는 내면에 너무 몰두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후배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많이 했다.
●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시인, 민주화 운동 투사로서의 업적도 크지만 ‘민족 민중 예술 1세대의 대부’로서 우리 문화사에 큰 업적을 남긴 분이다. 1960년대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을 중심으로 민족 예술을 이끌 후배들을 길렀다. 당시 교유한 이애주, 임진택, 김민기, 오윤, 김영동 등 소위 ‘김지하 사단’이 춤, 연극, 미술, 국악 등 각 예술 분야에서 김지하 미학의 각론을 폈다.
● 정과리(문학평론가)
저항 반독재투쟁 선봉에 섰던 분이다. 투쟁의 방식을 시를 통해 했고, 시가 바로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분이다. 동시에 후배들에게는 천진하면서 허심탄회했고, 달변이었다. 말년에는 적막하고 외로운 심상이 시에 그대로 드러났다. ‘민족시인’으로 축소되기엔 생명주의라는 강한 선이 그분의 시에 있었다. 그걸 온전히 밝혀 재평가하는 것이 한국 시문학의 중요한 관문이 될 것이다.
<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소설가 김훈은 9일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고인이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칼럼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원제 :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를 먼저 언급했다.
당시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자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던 시절이었다. 생명사상을 강조하던 고인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하며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소름 끼치는 의사 굿을 당장 걷어치워라"고 했다. 이 사건으로 고인은 진보 진영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김훈은 "이 칼럼은 학생들의 저항 자체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주된 흐름은 죽음을 만류한 것"이라면서도 "운동권에 의해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시국에 대한 감수성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운동권에서는 이 칼럼을 크게 받아들여 당시 반(反) 김지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며 "그 일이 김지하 선생 입장에서도 평생의 상처가 됐고 한국 정신사에서도 갈등으로 남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척분'(滌焚·불사른 것을 씻어냄)이라는 고인의 시를 언급했다.
'스물이면/혹/나 또한 잘못 갔으리/품안에 와 있으라/옛 휘파람 불어주리니, 모란 위 사경(四更) 첫이슬 받으라/수이/삼도천(三途川) 건너라'는 내용의 짧은 시다. 고인은 칼럼 이후 논란이 커지자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김훈은 "죽은 원혼들을 달래는 짧은 시인데 시국 속에 매몰돼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며 "그때는 이 시의 메시지를 경청할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지하의 생애에 관련해서는 이 시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그 시대의 갈등에 대해서도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선생은 말년이 가까워져 오면서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너무 많이 하셨다"며 "본인도 상당히 소외감을 느꼈을 것 같은데 시 '척분'처럼 첫 이슬을 받고 쉬이 삼도천을 건너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7. 시인 김지하 [만물상] < 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 2022.05.10 >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김지하가 옥중에서 시 ‘타는 목마름으로’(1975)를 발표했다. 7년 뒤 창비에서 동명의 시집을 내자 당국은 다음 날 금서(禁書) 조치를 내렸다. 서점들은 리어카에 시집을 싣고 대학에 들어가 파는 것으로 맞섰다. 그 시절 시인 김지하는 민주화 장정의 선봉에 선 투사였다. 청년들은 김지하의 ‘오적(五賊)’과 ‘타는 목마름으로’를 기도문처럼 외웠다.
▶ 그랬던 김지하가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의 사망과 이어진 분신 사태를 계기로 동지들과 갈라섰다. 진보 진영은 언론에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를 기고한 그를 변절자로 몰았다. 당시 대학 도서관 벽에 연일 나붙었던 대자보는 화법이 묘했다. 앞쪽엔 더는 죽지 말라 썼지만, 뒤에선 분신한 이들을 열사라 칭송했다. 어느 쪽이 진심인지 묻고 싶었다.
▶ 김지하는 훗날 “사형수로 6년 가까이 복역했지만 민주 투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술회했다. 감옥 안에서 그는 생명 사상을 잉태하고 숙성시켰다. 유신에 대한 저항도, 죽음의 굿판을 향한 분노도 뿌리는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을 향한 비원이었다. 세상을 편 갈라 보는 이들 눈에 그런 김지하는 이해 못 할 사람이었다. 옥중에서 박정희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잘 가시오”라 한 것도, 2012년 대선 때 독재자의 딸을 지지한 것도 배신으로 비쳤을 뿐이다.
▶ 김지하는 평생 시의 힘을 빌려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다. ‘시란 어둠을/ 어둠대로 쓰면서 어둠을/ 수정하는 것// 쓰면서/ 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속3′ 일부)이라고 했다.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가 깊은 내상을 입어 쓰러지고 힘겹게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동지라 믿었던 이들의 비난에 충격받아 정신병원에 12번 입원했고 평생 두통에 시달렸다.
▶ 김지하가 미국을 둘러보고 돌아와 2007년 여행기를 냈을 때 그와 따로 만난 적이 있다. 처음엔 “탁 트인 애리조나 사막을 달렸더니 끔찍했던 두통이 사라졌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공항에 몰려와 왜 미국 갔느냐고 비난하면 어쩌나 걱정돼 귀국 비행기 안에서 두통이 도졌어. 그런데 입국장에 아무도 없더라고. 마음이 얼마나 놓이던지, 아픈 게 싹 가셨지.” 김지하는 여린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저항시 쓰고 사형수 되고 한때 동지였던 이들에게 변절자 소리까지 들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싶었다. 시인 김지하가 그제 영면에 들었다. 편 가르기도, 다툼도 없는 곳으로 떠났다. 이제 편안하기를 빈다.
8.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 "먹고 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悲哀) - 김훈 산문 라면을 끓이며 중에서
〈문학동네에서 출판한 김훈 산문『라면을 끓이며』에서 마지막 5부글 『1975년 2월 15일 박경리』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제가 이 책을 광고하려는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좋은글은 가끔 필사를 하곤 합니다.
갓난아이~어린소녀~여자~엄마~할머니가 되고보니, 이글을 읽으면서 가슴 한편이 먹먹해 집니다.
같은 동질감을 느껴보기도 하면서 한편에는 시대가 많은 변화를 가져온것에 벅찬 감정도 가져봅니다.
김훈작가님의 글 속에는 삶과 죽음의 보편성과 개별성에 관한 허무의 냄새가 짙게 배여 있습니다.
냉정하게 써내려가는 지난시대의 이야기가 마음을 울게 하네요!
1975년 2월 `5일은 낮 최고기온이 영하 7도였다. 며칠째 퍼붓던 눈이 멈추고, 날은 흐렸다. 흐린 날이 저물자 기온은 영하 12도 아래로 떨어졌다. 얼어붙은 거리에 북서풍이 불었고, 그날 밤 서울 영등포구 고척동 영등포교도소 앞 거리에는 라면 껍질과 연탄재가 북서풍 속에서 회오리치면서 솟구치고 있었다. 1974년 7월 13일에 군사재판에서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형법상의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던 김지하는 1975년 2월 15일 밥 9시 40분께 형집행정지로 영등포교도소에서 출감했다
나는 그날 아침 10시께부터 서울 영등포교도소 정문 앞에서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긴급조치가 선포되던 1974년부터 신문기자의 업을 시작했던 나의 밥벌이였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었다.
희망이란 없었다.
이쪽저쪽으로 나눌 수 있는 일은 아닐 테지만 사람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포기한 사람과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아마도 포기한 사람쪽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스물일곱 청춘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이란 것이 부재한다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포기 하지 않은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들을 향해 필사적인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기자들은 스스로의 소망이나 지향성을 외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폐기처분해버린 소망과 지향성이 타인에 의하여 불붙여지기만을 기다리며서, 그 기약없는 겨울을 통과해 나가고 있었다.
그날 영등포교도서 앞에는 대낮부터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교도소 쪽은 김지하의 석방 시간을 예고하지 않았다.
또 예고했다 하더라도 정치범의 석방 시간에 관한 약속을 법무 당국은 번번이 지키지 않았고,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출소자들을 새벽이나 심야에 교도소 뒷문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므로, 기자들은 하루종일 교도소 문을 지키고 있는 수 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교도소 앞 거리에서 나무토막이나 종이상자를 주워와 모닥불을 대거나 혹은 인근 음식점에서 내다버린 구공탄 재에 아직도 남아 있는 불기 주변에 모여 언 발을 녹여가면서 교도소 청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교도소 문이 열리고 김지하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기자들은 저녁을 먹으러 갈 수 없었다.
교도소 정문 앞은 텅 빈 벌판이었고, 그 벌판 가장자리에 매우 더러운 몰골의 중국음식점이 있었다.
우리는 수습기자 한 명을 그 음식점으로 보내 짬뽕을 주문했다.
그런데 배달되어온 짬뽕 국물은 차게 식어 있었다.
우리는 내버린 연탄재 주변에 모여 그 차가운 짬뽕을 후루룩 거리며 들이마셨다.
지방판 마감은 대체로 오후 6시였다.
김지하가 5시 30분 이전에 출감하지 않는다면, 조간기자들은 지방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간기자들은 교도소 안으로 전화를 걸어서 "야 풀어주려면 제발 지방판에 맞춰서 풀어주라. 지방 독자는 사람이 아니냐"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교도소측 답변은 출소자들에 대한 소장의 정신 훈화가 남아 있고 또 교도소 담장 밖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어 있어 출감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하루종일 추위에 떨고 나서 지방판을 포기해버린 저녁에, 우리들은 연탄재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얼음이 잡혀 오는 짬뽕 국물을 마시면서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나는 보았다.
아마도 오후 5시 30분쯤이 아니었을까.
내가 짬뽕 그릇에 입을 대고 국물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쳐드는 순간, 교도소 정문 맞은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저물어가는 교도소 정문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인네 옆에는 영업용 포니 투 택시가 한 대 정차해 있었는데, 그 여인네가 출소자를 마중하기 위하여 대절한 택시였다.
아마도 운전기사가 연료를 아끼느라고 택시 안의 히터를 꺼버린 모양이었다.
아이 업은 여인네는 자동차 밖에서 떨고 있었다.
그 여인네는 자꾸만 허리춤을 추켜올려 미끄러져내리는 아이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저 여인네가 혹시 박경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짬뽕 그릇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기자의 무리를 떠나서 그 여인네 쪽으로 접근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멀리서는인상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여인네는 과연 박경리 선생님이었으며, 그 아이는 그 아버지가 수배망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1974년 4월19일날 태어난 강岡*이가 틀림없었다.(강은 후에 원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흑산도에 도피중이던 김하는 아들의 출생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때의 이야기가 김지하의 시 「초생달」 (『김지하 시선집』 1권 솔출판사, 1993, 264쪽)에 적혀있다.
김지하는 1973년 4월7일 김영주와 혼인하였고 강은 그로부터 1년 후인 1974년 4월 19일 태어났으므로, 강은 그 부모의 신혼 초에 점지된 것이 확실하고 강이 태어난지 일주일 후에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이 발표되고 바로 그날 흑산도에 피신해 있던 그의 아버지 김지하는 검거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박경리 선생님의 등에 업힌 저 아이는 생후 10개월 미만일 터였다.
태교였던가
원보는 초생달을 무서워한다
초생달이 걸리는 밤마다
이불 뒤집어쓰는 원보에게
까닭을 듣는다
'애기들을 죽여요 초생달이,
날카로운 피 묻은 칼이
내 눈 속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정녕 태교였던가
보름달 차기 전 그 한밤
사리때 오기 전 숨어 지내던
남녘 바다의 그 한밤
어둑한 뻘밭에 내던져진 웬 애기
마지막 비명을 미미하게 웃으며
찍어 가르는 찍어 가르는
붉은 초생달에 가위눌리던 그때
그 밤 제 아비의 흉한 꿈
아아 태교였던가
원보는 지금도 초생달을 무서워 한다
- 「초생달」 전문
어쩌자고 생후 10개월 미만의 어린 것을 업고 영하 12도의 강추위 속에 바람 부는 교도소 앞 광장장으로 나온 것인지 나는 알 수 가 없었다.
아마도 집안에 아이를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박경리 선생님 쪽으로 바짝 접근해서 그분이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할 위치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분을 마음 놓고 관찰했다.
"여기 박경리가 왔다"고, 나는 내 동료 기자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나 혼자서 그분을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분은 담요로 만든 방한화에 버선을 신고 있었다.
발이 몹시 시려왔던지 이따금씩 방한화를 벗고 손으로 언 발을 주물렀다.
등에 업힌 아이는 머리끝까지 온통 포대기로 감싸고 그 포대기 위를 다시 두꺼운 숄로 덮어서 아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그 여인네는 몸을 흔들어서 아이를 얼렀다.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그 여인네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인네가 그때 아이에게 한 말을 들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울지 마라 느 아비 곧 나온다.' 아마 이런 말이었을까. 그 여인네가 아기를 업은 포대기는 매우 낡아 있었다.
포대기는 누빈 포대기였는데 허리 부분을 넓게 접어서 아이의 등에 힘이 걸리게 바싹 조였으며 아이의 엉덩이 밑으로 포대기끈을 여러 겹 둘렀다.
그래도 그 여인네의 야윈 몸으로부터 아이는 자꾸만 흘러 내리는 것이어서 여인네는 자꾸만 몸을 추슬러 아이를 끌어올렸다.
아무도 그 여인네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 여인네는,
교도소 정문 앞에서 들끓는 그 어떤 사람과도 무관해 보였다.
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돋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無名)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그런 풀포기의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런 그 여인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시대도, 긴급조치도, 국가보안법도, 무슨무슨 혐의도, 성명서들도, 군법회의도, 김지하도,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만, 그 여인네의 등에 매달린 아이가 발이 시려우면 안 될 텐데, 그런 걱정만을 했다.
지방판 마감이고 유신독재고 뭐고 간에 어서 빨리 저 여인네의 용무가 끝나서 그 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이 추운 언덕의 바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나에게 없었던 따듯한 것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울음에 가까운 따듯한 것들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지금 그 20년 전의 따스함의 정체를 겨우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나에게 감염된 그 여인네의 모성이었으며 허름하고 남루한, 그 풀포기와도 같은 무력과 무명의 모습이야말로 그 여인네의 힘의 모든 원천이었음을, 가로등 하나 없는 교도소 앞 광장은 캄캄하게 어두워졌고,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밤 9시께 옥문이 열렸다.
나는 언덕 위의 박경리를 버리고 김지하를 맞기 위해 교도소 정문 앞으로 내려가서 기자의 무리 속에 섞였다.
이제 김지하가 나타나면 기자 동료들 사이에서는 서로 김지하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난투극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구두끈을 졸라매었다.
그날 영등포교도소에서 출감한 정치범은 모두 12명이었는데 대부분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걸려든 학생들었고, 김지하와 박형규, 백기완이 이날 석방의 초점이었다.
적어도 기자들에게는 그랬다.
밤 9시부터 학생들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학생 한 명이 나올 때마다, 만세 소리가 터지고 마중나온 사람들이 〈우리 승리 하리라〉를 불렀다.
교도소 정문 안쪽에서, 구내 가로등 불빛속에 머리를 빡빡 깎은 김지하가 나타나 정문 쪽으로 걸어오자, 교도소 정문 밖 사진기자들은 전원이 전투배치되었다.
그들은 교도소 철문 위로 기어올라가거나 교도소 수위실 지붕위로 몰려 올라갔다.
취재기자들은 제2선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팔꿈치로 인접 기자를 찍어서 물리치고 또 딴지를 걸며 쑤시고 들어가는 전법으로 김지하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일군의 기자들 속에 낄 수 있었다.
고은, 천승세, 조태일, 김광협 들이 목이 터져라고 만세를 불렀고, 학생들이 김지하를 무동 태워서 캄캄한 교도소 앞 광장을 미친듯이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김지하는 그때 무동 위에서 기자들에게, "나는 종신형을 받았다. 이제 풀려나니 세월이 미쳤는지 내가 미쳤는지 아니면 둘 다 미쳤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내가 관련된 민청학련 사건은 순수한 민주구국투쟁이며 정정당당한 합법운동이다. 이제 참으로 끔찍스런 사실이 낱낱이 공개될 것이다. 나는 부패한 정권, 무능한 권력과 끝끝내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나는 김지하에게 바싹 붙어서 취재를 하면서도, 교도소 광장 건너 언덕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그 아이 업은 여인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김지하가 무동을 타고 아우성을 치며 광장을 휩쓰는 안에도 그 여인네는 어둠 속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여인네는 다만 바라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김지하는 출감한 옥문 앞에서 장모를 만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의 안부를 물을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김지하는 무동을 타고 기세를 올린 후 그의 지지자·찬양자 무리가 미리 준비해놓은 승용차에 올라타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날 밤 명동성당에서 하룻밤을 새웠다.
김지하가 떠나버린 어둠 속에 그 여인네는 혼자 오래오래 서 있었다.
아무도 그 여인네를 알아보지 못했다.
김지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기자단의 대부분은 김지하의 승용차를 따라 명동성당으로 향했고, 환영 나온 학생들, 기독교인들의 무리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교도소 앞 광장은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고, 아직도 출감하지 않은 백기완을 기다리는 사람들 몇 명이 남아 있었다.
나는 김지하가 출감하던 순간을 기사로 엮어 전화로 본사에 송고하고 다시 백기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백기완은 밤11시께 석방되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기자단은 백기완의 석방이 늦어지는 이유를 교도소 당국에 추궁했다.
이미 발이 시려서 마비 지경에 이르렀고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기자들은 악에 받쳤다.
기자들은 교도소 당국에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교도소 당국의 설명은, 백기완의 긴급조치 위반 부분은 형집행정지가 되었으나, 그로부터 6년 전에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또 있어서, 그 벌금 10만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교도소 담 밖에 알려지자 즉각 모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군중들, 기자와 학생들 대부분이 김지하를 뒤쫓아서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사람이 없으니 모금이 될 리가 없었다.
기자들은 모금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해받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나는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다만 만져볼 뿐, 그 돈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때 나는 또 박경리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분은 10만 원에 얽힌 백기완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던 모양이다.
박경리 선생님은 어느새 언덕에서 내려와 교도소 정문 앞 광장에 있었다.
그분은 아이를 감싼 포대기의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러더니 가까이 있던 웬 대학생을 불렀다. "학생, 이 돈을 좀 보태시오!" 라고, 다만 그렇게 그분은 말했다.
그러고는 그분은 대절해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 안에서 그분은 등에 업었던 아이를 풀어서 무릎 위에서 재우고 있었다.
시간은 밤 12시에 임박하고 있었다.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놓고 그분은 다만 잠든 어린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분을 뒤쫓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만 백기완의 출감 모습만을 추가로 썼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새벽 2시께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9. 문정희 | 시인 (한겨레 2022.05.26)
시인 김지하 선생이 81살로 우리 곁을 떠났다. 5월8일 초여름 푸른빛이 눈부신 날이었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두려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진실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1970년 5월, 담시(이야기시) ‘오적’(五賊)을 발표함으로써 그는 힘없는 시에 천둥번개 같은 힘과 가락을 부여했고 동시에 주눅 든 세상을 크게 뒤집어놓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그 유명한 담시 ‘오적’이 실린 1970년 <사상계> 5월호에서였다. 문학이 뭔지도 모른 채 문단에 등단한 20대 초반의 내가 처음 청탁받은 잡지가 <사상계>였다. 그런데 나의 시가 실린 <사상계> 5월호가 출간된 날, 당시 편집장 김승균씨로부터 필자용 책을 건네받은 다음날이었던가. 저녁 뉴스를 보다가 나는 그만 큰 충격에 휩싸였다. 김지하 시인과 김승균 편집장이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텔레비전 긴급 뉴스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오적’은 이 땅을 폭풍처럼 타올랐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럈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기를 하나 쓰것다…” 이렇게 시작하는 ‘오적’은 부패한 권력집단을 통쾌하게 풍자 비판하고 있었다. 짐승스러운 몰골의 다섯 도둑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판소리로 패러디한 전무후무한 시였다. 시인 김지하는 그때부터 생애를 저항과 도피와 체포와 구금으로 살게 되고, 반체제 저항시인의 상징이 됐다. 그가 입은 푸른 수의를 보며 그 시대 지식인이나 작가들은 선망과 부채의식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감옥에서 갓 출소한 후였던가? 시인 김지하를 조태일 시인 등과 함께 만났다. 시집 <황토>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광화문 신문회관(현 프레스센터)에서였다. 그는 한마디로 불화살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축하객보다 정보원이 더 많은 출판기념회에서 박덕매라는 여성 시인이 “…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라며 시 ‘황톳길’을 낭송하자 누가 농담처럼 “애인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시인은 대뜸 커튼 뒤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보여주었다. 초로의 어머니가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진정 좋은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꽃이 피고 사랑이 어떻고 하는 시가 아니라, 현실을 언어로 투시하는 힘과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진실로 아름다운 시인이 되고 싶었다. 페미니즘 등의 용어조차 알지 못한 때였지만 나는 그날 진정한 사나이를 본 것 같았다. 미국 기자 님 웨일스의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아나키스트 혁명가 김산의 한 이미지가 겹쳐 떠오르기도 했다. 빛나는 용기의 화신으로 반체제 시인이 되어 그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져 갔다. 몸은 독방에 갇혀 고통을 치러야 했지만 정신은 저항에서 생명으로, 한(恨)에서 용서까지 생명사상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1998년 미국 펜클럽 회장으로 방한한 수전 손택과 베를린 국제인권위원회 위원장은 김지하를 크게 거명했고 한국 투옥 작가들의 석방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오에 겐자부로를 위시한 일본 지식인·문인들이 보내는 존경과 성원도 뜨거웠다. 독일 브레멘 방송국에서 온 시인 미하엘 아우구스틴이 김지하의 목소리를 담아 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았다. 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미국 시인도, 아프리카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유수의 문학상과 인권상이 그를 주목하고 추앙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의 소식은 수배, 잠행, 도주, 수감, 구금, 사형이라는 단어와 함께 들려왔다. 그렇게 병들고 엄혹한 시대의 어떤 시간을 뚫고 가끔 김지하 시인의 소식을 개인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기쁘고 슬픈 기억으로 남는다. 주소도 없는 곳에서 난초 수묵화, 혹은 글씨가 그의 본명인 영일(永一)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배달되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대학로였던가? 다시 만난 김지하 시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병이 깊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힘들게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에는 저승꽃이 가득했다. “남은 것은 병과 허명(虛名)뿐이다.” 시인은 그런 말을 했다. 늘 쫓기고 고통받는 애비 때문에 놀란 아이들 얘기를 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절망적인 정치 현실과 부패한 권력집단을 향해 서릿발 같은 저항으로 일관했던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비상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다. 종횡무진 동서양 철학과 사상을 설명하느라 차가 식는 줄도 몰랐고, 음식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홍용희는 김지하의 시 세계를 저항에서 생명의식으로, 그리고 죽음의 상상력과 대지적 생명력의 비장하고 절박한 정조를 넘어 애린과 화엄적 자아로 가는 세계라고 했다. 음과 양의 서열 구조가 아니라 여성성으로서의 생명성인 한(恨)에서 눈부신 용서와 화해까지 후천개벽 흰 그늘의 사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한 젊은 시인과 얘기를 나누다가 나는 그만 발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젊은 시인은 볼멘소리로 그동안 간직한 김지하 선생의 난초 묵화를 찢어버렸다고 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때부터 화가 났는데, 박근혜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젊은 시인은 김지하 시인을 진정 깊이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을 마지막 본 것은 한국 주재 스웨덴대사관에서였다. 그날 각국의 외교관들 앞에서 그는 해박한 지식과 신념에 찬 말을 쏟아냈다.
김지하 시인의 부고가 전해지던 날, 나는 그의 글씨를 다시 꺼내보았다. ‘영겁천심월(影劫天心月). 마고 소서노 미실 황진이 고판례 …소영(素影).’
그는 유언처럼 내게 말했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나 케이트 밀릿 같은 서양 페미니스트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역사 속의 여성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모악산(母岳山)의 교조 강증산의 아내 수부(首婦) 고판례(1880~1935)에 관해서는 여러 일화와 자료를 일러주었다. 남편의 배 위에 발을 얹어 놓고 “사람이 하늘이다. 여자와 남자가 똑같이 하늘이다”를 외치며 인본주의 퍼포먼스를 벌인 이야기였다.
어느 시에서 나를 ‘시 귀신 정희’라 불렀던 김지하 시인! 나는 시성(詩聖)이나 시선(詩仙)이라는 말보다 시 귀신이 몇배나 더 좋다. 그러나 끝내 그 말을 전하지 못했다. 이 시구가 실린 시집 <새벽강>(시학사, 2006)을 최근에야 보았기 때문이다.
불화살 같았던 시인 김지하와 함께한 50여년! 부자유와 폭력과 고통의 시대였지만 진정 용기 있는 시인이 있어 외롭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10. 위악자 김지하를 위한 변명
< 임진택 , 중앙일보, 22.06.24 >
생명사상의 선구자 김지하를 추도하며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 창작판소리 명창
2022년 5월 8일 김지하 시인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49일이 되는 6월 25일, 가까운 지인들이 서울 천도교 대교당에서 김지하 시인을 추모하는 문화제를 만들어 고인의 혼백을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는 마지막 재(齋)를 마련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김지하만큼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1970년대 김지하는 빼어난 서정시인이자 파격적인 풍자시인으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있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그는 배신자 혹은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힌 대표적 인물로 오인되었다. 김지하처럼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받은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난 마당에, 이제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불편한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그것도 파격적으로….
김지하 시인은 위악자(僞惡者)였다. 위악자는 내가 만들어낸 신조어(新造語)다. 위선자(僞善者)의 반대말이다. 위선자가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위악자가 비난받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지하가 왜 위악자인지, 왜 더 이상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지, 변명해보고자 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첫 옥고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 위반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유신독재 정권은 이 사건에 터무니없는 용공조작을 시도했다. 김지하는 사건에 자신이 연루되자 직감적으로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자신이 빠져나가려고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며, 무엇보다 남은 학생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자신은 물론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심지어는 윤보선 전 대통령까지 끌어들인다. 도저히 빨갱이일 수 없는 저명인사들이 등장함으로써 공안당국의 용공조작은 민망 무색한 꼴이 된다. 그리하여 독재정권은 다음 해 2월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들 대부분을 가석방한다. 김지하의 ‘목숨을 건’ 위악적(僞惡的) 지략이 일단 성공한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풀려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중하고 근신했을 법한데, 김지하는 그렇지 않았다. 장모인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정릉 집에 머물고 있던 김지하는 거기에 찾아온 동아일보 이부영 기자(전 국회의원)의 요청으로 옥중수기를 써 내놓은바, 3회에 걸쳐 연재된 ‘고행-1974’의 핵심 내용은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며, 인혁당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었다.
유신 독재자는 노발대발했다. 민청학련을 용공으로 만들기 위해 인혁당 사건을 갖다 붙여놓은 것인데, 인혁당이 조작이면 민청학련도 당연히 조작 아닌가? 하여 유신 독재자는 유언비어(?)의 발설자 김지하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오호, 그로 인해 김지하의 6년 독방 수형 생활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사형선고까지 받고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사람이면 당연히 ‘착하게’ 살아야 함에도 김지하는 ‘착하게’ 살지 않았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김지하는 ‘악한 사람’이었다. 김지하는 선한 사람이면서 악한 역할을 자처한 위악자(僞惡者)였다. ‘목숨을 건’ 위악자였다.
박근혜 지지로 진보로부터 배척
김지하가 민주 진보진영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 혹은 비난을 받게 된 계기가 두 번 있었다. 하나가 1991년에 벌어진 소위 ‘죽음의 굿판’ 필화사건이다. 당시 과도한 공안 탄압과 경찰 진압으로 시위 대학생이 맞아 죽거나 자결을 택하던 상황에서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 운운하고 나섬으로써 민주화 운동이 타격을 입게 된 사건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대한 오해가 개재되어 있다.
먼저 그 칼럼이 실린 조선일보 지면을 제대로 한번 살펴보라. 그 칼럼의 원제목은 분명히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이다.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는 중간 크기의 글자로 된 또 다른 소제목일 뿐, (물론 그같은 내용이 글 안에 들어있다 하더라도) 필자가 원래 정해놓은 그 칼럼의 방향이자 주제는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다. 그런데 자극적인 소제목이 갑자기 부각되면서 필자의 언설(言說)이 침소봉대(針小棒大)되어 만파(萬波)를 일으킨 것이 바로 ‘죽음의 굿판’ 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은 굳이 그러한 발언을 하지 않아도 충분한 명예를 누리고 있던 김지하가 섬망(譫妄) 중에 저지른 위악적 행위의 자해적 결과였다.
김지하가 민주 진보진영의 사람들로부터 결정적인 비난을 받게 된 또 하나의 빌미가 ‘박근혜 지지’ 사건이다. 당시의 정치평론 중에는 “김지하가 박근혜의 품에 안겼다”는 식의 비유적 표현까지도 떠돌고 있었다. 여기에도 중대한 오해가 개재되어 있다.
김지하는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다. 박정희 폭압정권은 김지하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고문했다. 김지하 자신이 황량한 독감방에서 일체의 면회와 운동마저 금지된 상태로 6년을 보냈다. 그러한 김지하가 대선 당시 박근혜의 방문을 받아들인 데는 이유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박정희와의 악연을 끊고 국민통합의 길을 모색하자는 것, 또 하나는 생명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하자면 여성이(혹은 여성적인 것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를 만나려면 배론성지 지학순 주교 묘소를 먼저 참배하고 지난 일을 참회하고 오라는 것 등이었다. 이는 ‘박근혜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까지 품에 안으려는’ 행동이었다고 봄이 옳다. 아마 상대 후보인 문재인이 찾아왔더라도 김지하는 당연히 방식을 달리하여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사건은 김지하 스스로 후에 자신의 위악적 행동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술회했으므로 일단락되는 것이 필요하다.
김지하가 세상을 떠나자 대다수의 언론이 그를 ‘저항시인’으로 부각했다. 작품 중에서는 정치풍자 담시(譚詩) ‘오적(五賊)’과, 민주화를 염원한 서정시의 걸작 ‘타는 목마름으로’를 대표작으로 꼽았다. 그 시들이 김 시인의 대표작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김지하를 저항시인으로만 칭하는 것은 그의 세수(歲數) 여든 가운데 전반부 반절에만 해당하는 내용이다. 감옥에서 나온 1980년 이후 김지하는 시인과 더불어 사상가로, 생명운동가로 거듭났다. 그것도 아주 탁월한, 기실 전무후무한 사상가로.
1982년 김지하는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에 관련한 최초의 보고서를 초안하였다. 이 보고서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비롯하여 원주캠프의 활동가들이 함께 읽고 토론하여 완성한 것이 바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이다.
‘지하 형님’은 그 문건이 완성되자마자 어느 날 조용히 나에게 그 문건을 보여주었다. “죽음의 먹구름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로 시작되는 첫 대목부터 나는 그 문건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탐독(耽讀)했는데, 한참을 기다려주던 지하 형님이 평가(?)를 구하는 것 아닌가?
나는 글의 내용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급하게 이렇게 말을 지어냈다. “형님, ‘공산당 선언’ 이후 최고의 선언이 나왔습니다.” “그래?” 지하 형님이 뜻밖이라는 듯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기분은 좋으신 것 같았다. 나는 지하 형님이 더 물어보면 어쩌나 좀 걱정이 되었는데, 사실은 내가 ‘공산당 선언’을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항시인에서 생명운동가로
그 문건은 후에 주요 내용이 재정리되어 김지하의 산문집 『남녘땅 뱃노래』(두레출판사)에 ‘삶의 새로운 이해와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 바, 기실 오늘날 우리와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40년 전에 벌써 예견한 내용이었다.
‘생명의 세계관’의 핵심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극복한 일원론적 세계관을 설파한 것으로, 이는 천동설을 부정한 지동설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사고의 전환, 문명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것임에도 아직 일반화(보편화)되고 있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이제 충격적인 ‘불편한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김지하 시인은 밀폐된 독감방의 외로운 면벽 생활에서 깊은 병을 얻었다. 그것은 정신적인 증상으로,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불치의 천형(天刑)이었다. 감옥에서의 고통스러운 인내와 사유는 한편으로는 섬광(閃光)처럼 생명에 대한 깨달음으로 왔고, 한편으로는 섬망(譫妄)이라는 어두운 그물이 그를 감아 죄었다. 그가 불시에 저지른, 정상을 벗어난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은 대체로 그 섬망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 정신 착란과 연관이 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육체적 고통과 한계 속에서도 처절하리 만큼 치열하게 인간과 사회의 변혁과 완성을 고뇌하고, 지구와 우주 생명에 대한 전 일체적 깨달음에 다다른 김지하의 구도(求道)적 일생을 경외해야 마땅하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우리는 그가 그토록 애타게 알려주고 싶었던 생명의 길, 평화의 길로 이 세상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 창작판소리 명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