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사람 이야기 _ Interview

우리가 몰랐던 ‘우리들의 송해’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2. 7. 4. 10:09

우리가 몰랐던 ‘우리들의 송해’
'30년 지기' 신재동 전국노래자랑 악단장 & '송해평전' 집필자 오민석 교수
최측근이 전한 인간 송해의 진짜 모습


< 여성조선 이근하 기자, 2022.07.03 >


 
아흔여섯 노장이 영면에 들었다. 30년 넘게 전국 방방곡곡 서민들의 감정을 매만져줬던 ‘우리들의 송해’. 세상은 그가 새기고 간 힘찬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송해가 6월 8일 별세했다. 34년간 <전국노래자랑>을 이끈 노장의 비보는 국민을 울렸다.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국민 MC 송해는 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떠났다. 

송해의 삶은 한국 현대사와 대중문화 변천사를 관통한다. 1927년 4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중 피난길에 올랐다가 혈혈단신 남하했다. 건강을 당부하며 눈물짓던 어머니와 툇마루에 앉아 있던 여동생이 스물셋 송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송해의 본래 이름은 복 복자에 빛날 희자 ‘복희’였는데, 상륙함에 실려 망망대해를 헤맬 때 바다 해자를 따 ‘송해’라 새로 이름 붙였다. 

1955년 창공악극단에 입단해 시작된 희극인의 삶. 스물아홉 살 송해는 노래는 물론이고 연기와 진행 등 다재다능한 재주를 보였다. 1960년대 대중문화의 중심이 극장에서 방송으로 이동하면서 그의 활동 무대도 TV와 라디오로 옮겨졌다. 1964년 동양방송(TBC) 개국 이후 다수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문화방송(MBC)과 전속계약을 맺은 뒤부터 당대 유명 코미디언들과 무대를 누볐다. 1975년부턴 17년 동안 택시운전사들을 위한 라디오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해 큰 인기를 얻었다. 

막힘없어 보이던 희극인의 일상은 1986년 아들 창진 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흔들렸다. 자식을 앞세운 아버지는 난생처음 방송 펑크를 냈고 한동안 모든 일을 멈췄다. 낙심하던 그를 다시 일으킨 게 <전국노래자랑>이다. 송해는 1988년 5월 <전국노래자랑> 마이크를 넘겨받은 뒤로 전국 곳곳, 지구 정반대편 파라과이 등 해외까지 유랑했다. 그리고 다신 가지 못할 것만 같았던 고향 이북에도 다다랐다. 2003년 8월 평양 모란봉 공원에서 열린 <평양 노래자랑>은 송해가 꼽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모친과 누이가 살아 있다면 승용차로 30분 걸릴 거리였다. 연락해보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그는 하지 않았다. 행여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전해졌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에 오르는 모든 이들과 교감했다. 출연자들이 챙겨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웃고 울었고, 악단장이나 카메라 감독을 무대로 끌어들여 함께 어울리기도 예사였다. 평생 ‘딴따라’를 자처했고 이에 자부심을 가졌다. 2003년 보관문화훈장 받았을 때 수상 소감이 “나는 딴따라다. 영원히 딴따라의 길을 가겠다”였다. 2014년 은관문화훈장 수상 땐 “대한민국 대중문화 만세”라고 외치기도 했다. 

송해는 1000만 명의 시민을 만났다. 그들 중 누군가는 ‘땡’이었고, 누군가는 ‘딩동댕’이었지만 송해는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 나 역시 늘 <전국노래자랑>에서 내 인생을 딩동댕으로 남기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위로했다. 진심을 다해 사람을 좋아했던 사람. 2014년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제일 부자는 사람 많이 아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누구냐. ‘송해’다 그 말이야.”

 

# 송해의 사람들


고인의 말마따나 송해는 ‘사람을 많이 아는 부자’였다. 송해의 사람들, ‘30년 지기’ 신재동 전국노래자랑 악단장과 ‘송해 평전 집필자’ 오민석 교수에게 송해를 물었다. 

 

01_ 신재동 전국노래자랑 악단장
“<전국노래자랑>의 주인은 관객이라고”


매주 버스를 타고 함께 달렸다. 숙소에 도착하면 간단히 짐을 풀고 나와 술잔을 기울이고, 다음 날 <전국노래자랑> 녹화가 끝나면 서울로 돌아와 술을 곁들인 담소를 나눴다. 신재동 전국노래자랑 악단장과 송해가 그렇게 보낸 세월이 올해로 30년째다.  

“30대 초반에 <전국노래자랑>에 들어가서 지금 예순이 넘었으니까 반평생을 송해 선생님과 보냈네요. 선생님은 단원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는 시절을 같이 지났어요. 그 집에 수저가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우리는 식구였어요. 선생님을 보내드리면서 눈물을 참고 참았는데, 관이 딱 보이는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더라고요.”

신재동 단장은 6월 10일 KBS 본관 앞에서 치러진 노제에서 <전국노래자랑> 시그널 송을 지휘했다. 고인과 함께한 마지막 연주는 평소와 달리 느리게 그리고 아주 슬프게 흘렀다. 

신재동 단장이 고 송해의 실물을 마지막으로 본 건 별세 3주 전이다. 송해가 떠나기 3일 전 신재동 단장이 건 전화가 둘의 마지막 대화였다. 휴대폰 너머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현장에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 단장은 송해가 죽음이 코앞에 왔음을 예견했던 것 같다고 했다. 

“2주 전에 지인한테 의상을 하나 맞춰달라고 하셨어요. 살이 많이 빠져서 새로 맞추시려나 보다 했었는데, 그 옷을 입고 <전국노래자랑>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시려고 했던 거예요. 옷이 나오는 날 입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신재동 단장 역시 송해를 보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3주 전 만난 자리에서 만져본 송해의 다리는 뼈와 가죽뿐이었다. 고인은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식사를 제대로 못했을뿐더러 잦은 설사로 급격히 체중이 줄었다. 지난해 5월 신재동 단장과 고인이 호흡을 맞춘 온라인 토크쇼 <송해의 인생티비> 때도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였었다. 

“무대만 오르면 저절로 대본이 머릿속에 정리되던 분인데 그날은 동문서답을 하셨어요. 화두가 자꾸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어? 정리가 안 되시나? 이거 큰일이다’ 속으로 좀 놀랐어요. 그러고선 한동안 컨디션이 좋았었는데 떠나시기 3일 전 통화 때 말씀하시더라고요. 대본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당연하게 정리돼야 하는데 이젠 그게 안 된다고요.”

30년 동안 곁에서 본 고인은 건강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오후 4시가 되면 꼭 사우나에 들러 땀을 흘렸고 쉼 없이 움직였다. 활동량만큼 식사량도 많았다. 1박 2일 여정의 <전국노래자랑> 촬영을 떠날 때면 오전 7시 악단 팀과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11시쯤 휴게소에서 점심 식사를 챙긴 뒤, 저녁에는 마을에서 열리는 만찬을 즐겼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엔 빵과 우유 등의 간식 준비도 잊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아침에 먹은 것도 소화가 안 됐는데 선생님은 매끼를 정말 잘 드셨어요.(웃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보이면 그 자리에서 서슬 퍼렇게 화를 내시고 뒤끝이 없으셨죠. 잘 드시고 열심히 움직이시고 그때그때 감정을 표현하셨던, 그게 건강 비결이 아니었을까요. 선생님이 싫어하시는 건 정해져 있었어요. 방송을 위해 각자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에요. 누구보다 주변을 살갑게 대하시면서도 일에 관해서는 오금이 저리도록 살벌하셨어요. 화가 다 풀리는 데까진 5분도 안 걸렸지만요.”(웃음)

고인은 ‘<전국노래자랑>의 주인은 무조건 관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신재동 단장이 기억하는 송해는 늘 자신을 낮추고 출연진을 치켜세우는 진행자, 정치·사회·경제·문화예술 경험을 두루 섭렵해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한 진행자였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서 딱 든 생각이 ‘정말 큰 박물관 하나가 사라졌구나’. 하다못해 김치찌개 하나만 두고도 해박한 지식을 쏟아내셨어요. 관객들, 시청자들도 다 알아봤을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께 <전국노래자랑>을 150세까지 맡아달라고 하셨겠죠. 선생님은 ‘나는 무대에서 죽을란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비가 쏟아져도 눈이 퍼부어도 관객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선생님도 ‘이 녹화는 그대로 간다. 무조건 끝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녹화 후 복귀하는 버스 안, 송해가 뒷좌석으로 몸을 돌려 신재동 단장의 눈을 바라볼 때가 있다. 여기서 같이 내리자는 신호다. 하차와 동시에 시작된 술자리는 5차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신 단장의 표현에 따르면 1차, 2차는 소주로 적시고 나머지 장소는 양주로 적신다. 

“안주는 특별할 게 없었어요. 돼지갈비 좀 드시고 이후로는 마른안주나 과일 같은 거. 선생님은 치아가 좋아서 젊은 사람도 먹기 힘든 고기 힘줄을 그렇게 잘 씹으셨어요.”(웃음)

송해를 추억하는 신재동 단장의 목소리엔 울음과 웃음이 섞여 있었다. 30년간 동고동락한 수많은 순간들이 생생한 듯했다. 신재동 단장은 고인을 향해 행복을 빌었다. 

“선생님 못 입고 가신 새 옷 입고 하늘에서 사모님, 아드님, 지인들 만나서 행복하게… ‘천국노래자랑’ 하시면서 행복하게 계세요.”


 

02_ 오민석 '송해 평전' 저자 
“술잔도 공평해야 했다”


고인이 남기고 간 흔적들 중, <나는 딴따라다>(2015)는 아주 농밀한 기록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오민석 단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1년 내내 송해와 동행하며 써내려간 ‘송해 평전’이다. 아주 오래전 서울 인사동에서 우연히 처음 마주쳤던 두 사람. 그로부터 20년 후 낙원동 사우나, 길거리에서 각각 조우한 둘의 인연은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물었어요. 영문학자가 왜 연예인 평전을 썼냐고. 선생님도 ‘나 같은 딴따라 이야기를 왜 대학교수가 쓰느냐’고 하셨지만, 영국이나 미국 대학의 영문과에서는 대중문화 연구가 굉장히 오래전부터 돼왔어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 과정 등 역사의 한복판에 계셨던 선생님의 이야기를 쓰다 보면 근현대사를 훑을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대중문화사, 방송사가 날줄 씨줄로 엉켜 있으니 이분의 삶이 하나의 큰 박물관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거죠.”

송해 평전을 쓰겠다는 사람들이 더 있었지만 송해의 선택은 오민석 교수였다. 그 이유는 오민석 교수도 알지 못했다. 언젠가 이유를 물었지만 송해가 대답 없이 웃기만 하더란다. 두 사람은 1년간 매일 만났다. 오전에는 오민석 교수가 송해에 관해 궁금한 점을 묻는 형태의 인터뷰를 했고, 점심 식사를 함께한 뒤 송해가 평소 일정대로 움직이면 오 교수는 그 옆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잠만 따로 잤을 뿐 제가 선생님의 별의별 자리에 다 껴들었어요.(웃음) 당신의 평전이 준비 중이라는 게 자랑일 수도 있는데, 선생님은 저를 소개할 때 ‘이분이 영문학자이고 시인인데 우리 세계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하러 다닌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단 한 번도 평전에 대해 언급하신 적 없다가, 책이 출간되고선 무척 좋아하셨어요. 영광이라고, 죽을 때까지 자랑이라고요.”

두 사람의 대면은 두 달 전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안부 전화가 오갔고, 오민석 교수는 송해가 떠나기 3일 전에도 통화를 나눴다. 돌이켜보면 고인은 오민석 교수에게 끝인사를 남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평전은 2015년에 나왔는데 새삼스럽게 그거 써줘서 고맙다고 세 번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어요. 저는 ‘책을 계기로 선생님과 친해졌고 취재까지 8년을 가까이서 봬 영광이고 자랑입니다’라고 얘기했죠. 선생님이 코로나 확진 여파로 굉장히 약해지셨어요. 눈으로 뵙기가 민망할 정도로 살이 빠져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별세) 연락 받고 막 울었어요. 날이 지날수록 빈자리가 더 허전합니다.”

평전이 아니더라도 오민석 교수와 송해의 대화 주제는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1세대 대중음악’은 빼놓을 수 없는 화두였다. 공중목욕탕에 손님이 둘밖에 없는 날이면 온탕 밖 계단에 나란히 앉아 소위 트로트, 뽕짝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손으로 허벅지를 두들겨가며 가사를 음미하곤 했다. 또 다른 공통분모는 ‘빨간 뚜껑 소주’였다. 송해는 그것을 ‘빨간 딱지’라 불렀다. 

“늘 ‘공평’을 중시하시더니 술자리에서도 서로 똑같은 양을 마셔야 했어요.(웃음) 저도 술이 센 편인데 술을 마시다가 위기를 느끼게 한 유일한 분이 선생님이세요. 하루는 마포에서 빨간 딱지 각 5병을 마셨는데 강남에서 한잔 더 하자시기에 ‘헉’ 했죠. 발렌타인 31년산 한 병을 또 마셨어요. 온더락으로 마시려는데 선생님이 ‘무슨 얼음이야. 이건 스트레이트로 먹는 거지’라고 하세요. 그때 선생님 연세가 아흔둘이었어요. 제가 정신력으로 이를 악물고 술을 마셔보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웃음) 

송해의 생전 하루는 낙원동 사무실 출근으로 시작됐었다. 신문을 읽거나 방송 스케줄을 검토하며 오전을 보냈고, 오후 한 시가 되면 원로 연예인들이 사무실에 몰려들었다. 원로 연예인들의 사랑방 격인 이곳을 송해는 매달 400만~500만 원을 들여 30년 가까이 운영했다. 

“왜 구태여 사무실을 운영하시느냐 여쭸더니, 나만 돈을 버니까 내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덕분에 오갈 데 없는 원로 연예인들이 거기서 만나고 밥도 먹고, 마작도 두고. 근데 선생님은 오후 4시가 되면 여지없이 마작을 멈추고 목욕탕에 가셨다가 오후 6시에 사무실 문을 닫았어요. 계속 마작을 하게 두면 저 양반들 몸 상한다면서요.”

오민석 교수의 추억 속 송해는 정도 눈물도 많은 어른이었다. 서먹한 사이일 때도 밥을 뜨면 반찬을 올려주던 어른, 상대방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어른, 여유가 생기면 아파트 공동 화단에 꽃을 심던 어른, 특유의 카리스마까지 갖춘 어른. 

“평전을 쓰려면 선생님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데, 제가 자꾸 빠져드는 바람에 선생님을 밀어내려고 애썼던 기억이 나요. 선생님과 못 나눌 말씀까지 다 해봐서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선생님이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신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너무나 그립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