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준비하는 삶 살고자 ‘살아서 장례식’하는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
‘살아서 장례식’ 치른 서길수 교수
1.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2020.02.24 >
‘죽음’ 준비하는 삶 살고자 ‘살아서 장례식’하는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
죽음은 누구나 공평하게 가야하는 길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경우는 적다.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준비하고 ‘연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서길수(75) 전 서경대 교수. 그는 특히 ‘살아서 치르는 장례식‘을 통해 주변인들에게 장례(葬禮)문화를 새롭게 인식시키고 있다.
"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서 조문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게 좋겠다.' 그러려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 교수는 고구려발해학회(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중국의 동북 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에 맞서 싸운 학자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우리가 '고구리'를 '고구려'로 잘못 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2009년 정년퇴직한 뒤에 "삶과 죽음에 대해 공부하겠다"며 갑자기 머리 깎고 3년을 강원도의 한 산사(山寺)에서 보냈다. 그는 "책을 펴낼 때마다 장례식 겸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내 장례식을 몇 번 더 치를지 나도 궁금하다"고 했다. "내 죽음을 내가 보며 가게 해달라고 유언했다. 연명치료도 하지 말고 가능하면 집에서 세상을 떠나야한다. 숨을 거두면 알리지 말고 빨리 화장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살아서 장례식’ 치른 서길수 교수의 장례철학
2019년 12월21일 오후 1시 서울 이화여대 근처의 한 강연장. 서길수 교수가 한복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문상객을 맞았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중(喪中)인 큰며느리가 밝은 얼굴로 접수를 맡았다. 부의함은 없었다. 『고구려의 본디 이름 고구리』, 『장수왕이 바꾼 나라 이름 고리』 등 신간 저서 두 권을 필요한 사람만 샀다.
한 조문객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를 표하러 왔는데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살아계시네요" 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됐다. 이날 3시간 동안 누구도 울지 않았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 행사는 축사(고구려발해학회 회장 공석구), 축가(민족음악 가수 전경옥 ‘바람의 빛깔’, ‘함께 아리랑’ 2곡), 서길수 교수의 장례식 강의(책 2권에 담은 내용 함께 나누기), 참석자들과의 대화(서길수 교수와의 대화-삶과 죽음에 관하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 행사에서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 교수는 살아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에 대해 “나는 늘 마음에 죽음을 새기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자식들에게 할 유언을 준비하면서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생각했다.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죽어서 누가 오는지도 모르는 장례식보다는 내가 살아서 조문을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장례식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대신 죽었을 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부고 없이) 조용히 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정년퇴직한 지 10년이 되었다. 2012년까지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삶과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하고 2012년 가을, 산에서 내려와 나머지 삶은 ‘함께 나누는 삶(回向)’을 살기로 했다. 나누는 삶이란 지금까지 내가 얻은 것을 정리하여 남겨주는 것을 뜻한다. 하산하고 동아일보 인터뷰(2012년 9월19일)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남은 생은 책 쓰며 나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 것이다’라고. 그러므로 내 장례식은 책이 한 권 나올 때마다 한 번씩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살아서 장례식을 치른 서 교수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은 출판기념회로 대신했다. 몇 번을 해도 좋은 장례식을 하자는 것이다. 한 번을 하면, 책 1권을 나눈다. 100번을 하면 책 100권을 나눌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죽기 전까지 가능한 한 많은 장례식을 했다”면서 “저는 제 장례식에서 ‘내 죽음을 내가 보며 가게 해 달라.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연명치료를 하지 말고, 가능한 한 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장례식에서는 ‘숨을 거두면, 장례식을 하지 말고, 화장터와 연락이 되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화장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24시간 안에 하되, 주검은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조용히 떠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라고 했다.
한 참석자가 ‘장례식에는 울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서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이 명상 주제는 1967년(24살)부터 주어졌다. 당시 대학 3학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엄격하게 진행 법식에 따라 곡(哭, 울음)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모두들 수근거렸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장례식에는 왜 울어야 하는가? 1991년(48살) 12월2일,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장례식에서는 울어야 하는가? 이 명상주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주신 화두(話頭)였다. 울어야 하는가? 안 울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의 답은 ‘죽음(死)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1992년(49살) 2월22일 체선(體禪)을 시작해 내 생에서 처음으로 진지한 수행(修行)을 시작했다. 체선은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관(觀, 念)하는 수행법이다. 지도하는 선생님과 첫 대면에서 한 첫 질문이 죽음이었다.
‘선생님께서도 죽음에 대한 고통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걸 없애려고 노력하십니까?’, ‘하지 않습니다.’ ‘아예 두려워하시고 두려운 상태를 그대로 두십니까?’
죽음, 그것은 영원히 두렵다. 두려움은 두려움일 뿐이다. 두려움 자체가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선택을 하고 망설이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니까 고통이 온다. 두려움은 다 드러내면 고통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체선의 원리”라고 답했다.
서길수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
서 교수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에 대해 "삶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년퇴직할 때 는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들어선 셈이다. 누구는 '인생은 그때부터'라고 하지만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생사(生死) 문제를 확연히 알고 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죽음 공부를 한 것에 대해서도 "1992년부터 '관법(觀法)수행'을 시작했다. 인터뷰하면서도 이야기하는 나를 내가 보는 식이다. 죽음은 전체 생애에서 마지막 부분이다. 입시 공부, 취직 공부는 열심히들 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면 서 교수는 깨달음을 얻었을까. 왜 3년 만에 하산한 걸까. 그는 "3년 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것이다. 내 그릇으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았다. 불교에 ‘회향(回向)’이라는 말이 있다.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뜻이다. 남은 생은 정리하고 책을 써 남겨주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2014년 봄에 육종암 판정을 받았는데, 수술 받으면 '다리를 절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왼쪽 허벅지에서 암 덩어리를 도려내보니 18㎝ 크기였다. 암이라는 진단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를 관찰했다. 수행을 검증할 기회였다. 현실을 인정하고 큰 업(業)을 하나 떼어낸다 생각하니 후련했다.
병원에서 사람들은 사실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다. 암 자체보다는 암에 대한 걱정과 고통 때문에 죽어간다. 옛날에 읽은 아라비아 우화가 떠올랐다. 한 청년이 바그다드에 가는데 동행자가 생겼다.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업어줬더니 그 동행자가 '나는 사실 바그다드 사람들을 죽이려고 가는 페스트균인데 원래는 절반을 없앨 생각이었지만 네가 도와줬으니 3분의 1만 죽이겠다'고 했다. 약속을 어겼을 때 불러낼 수 있는 주문까지 가르쳐주면서 먼저 가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이 바그다드에 도착해보니 절반이 죽었다. 그 페스트균을 불러내 따지자 한다는 말이 '정확히 3분의 1만 죽였는데 나머지는 놀라서 죽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제 고통보다 훨씬 더 키워서 고통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서 교수의 육종암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수술 받고 두어 달 뒤에 문제가 생겼다. 퉁퉁 부어오른 거다. 의사도 당황했다. 암에 칼을 대면 더 번성할 수 있다는데 그거로구나 싶었다. MRI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1주일이 죽음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골몰한 시간이었다. 암 환자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 봤다. '사람은 여러 가지 병으로 죽는데 암은 그 죽을병 중의 하나'라는 글을 읽으니 위안이 되었다"고 했다.
서 교수는 MRI 검사 결과를 보러 가기 전에 의사에게 할 요청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치료가 가능하다면 살고 싶다. 둘째, 불가능하다면 책을 두세 권 마무리할 때까지만 살려달라. 셋째, 그것도 안 되면 덜 고통스럽게 가고 싶다.
그랬더니 의사는 암이 재발한 게 아니고 림프액이 새어 나왔다고 했다. 1주일에 두 번씩 뽑아내면 된다고 했다. 그는 “5년이 지나 2019년 완치 판정을 받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준비가 그때 확실히 시작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 교수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결심한 걸까. 그는 "답사로, 또 여행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다. 2018년 9월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찍은 제 사진을 보더니 손녀(13)가 '이건 영정 사진이네'라고 했다. 그래서 손녀에게 물었다. '넌 장례식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랬더니 대뜸 '육개장 먹고 울다 가는 것'라고 답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의 장례식에는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꼭 있어야 할 장례식만 두 번 갔다. 자식들 결혼할 때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다. 빚이 없다. 나중에 '세금' 걷으려고 장례식과 결혼식에 간다면 시간을 까먹는 일이다. 1967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왜 울어야 하나 궁금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내게 준 화두"라고 강조했다.
▲ 2009년 정년퇴직 후 강원도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죽음을 공부한 서길수 교수는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이라며 “몰라서 두렵지,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기는커녕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 화두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그는 "산사에 있을 때 답을 읽었다. 진리는 이미 있는데 만나기가 힘들 뿐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고 반드시 죽는다.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듯이 말이다. 두렵지만 맞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슬퍼한다고 해서 어떤 실익이 있나?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지 않다. 몰라서 두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막상 닥치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죽음인데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서 교수는 "결국 삶은 늘 선택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대로 가고 싶었다. 지금의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닌, 남은 사람을 위해 벌이는 쇼(show)다. 죽음이 뭔지 알았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수많은 목사님과 스님이 말씀하셨지만 나는 실천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 장례식에선 슬픈 척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슬프다면 그 근원을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목적이다. 내가 자식들에게 유언하면서 '다음 순서는 너희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사흘을 지키고 염도 하고 다 봤다. 그 과정에서 생사에 관심을 가졌다. 이 장례식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할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서 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죽음은 마지막이자 시작이다. 그래서 천주교나 개신교에서는 영세나 세례를 준다. 살면서 지은 모든 업이 죽는 순간 한꺼번에 몰려온다. 힘들게 죽는 사람은 힘들게 살아온 것이다. 편안하게 살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편안하게 간다. 하나님 곁으로 가든 윤회에 따라 다시 태어나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산에서 3년 수행 끝내고 ‘환속’
서길수 교수는 정년퇴임 직후인 2009년 9월12일 머리를 깎고 부인과 강원도 영월군 깊은 산속의 적막한 암자로 들어간 지 3년 만에 2012년 9월 서울 집으로 내려왔다.
퇴임 전까지 그는 중국을 답사하며 고구려 산성 130개를 발견했고 1994년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현 고구려발해학회)를 설립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논리를 개발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러다 돌연 지인 700여명에게 “3년간 ‘수학여행’을 다녀오겠다”는 e메일만 남기고 전화, 인터넷, TV, 라디오, 신문 등을 일절 끊은 채 산속에서 두문불출하면서 수행과 공부에 전념했다.
그가 산으로 들어간 것은 생사(生死)에 대한 오랜 관심 때문이었다. “인간의 생을 사계절로 보면 65세 퇴임 이후는 겨울에 접어드는 시기이다. 죽음을 준비할 때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피하지 못한 게 죽음인데, 그럼 죽고 사는 게 뭔지 확연히 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단다.
1992년부터 8년간 아침마다 2시간씩 선(禪)수행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산에서 매일 6∼8시간 정토선(淨土禪·염불선)을 수행했다. 오전 2시 반에 기상해 오후 9시에 잠들기까지 수행과 경전 번역, 집필, 공부에 몰두했다. “내 생애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본 적이 없었다”는 그는 24시간 염불을 들었는데 산책 나갈 땐 MP3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꽂고 들었다.
결국 서 교수는 “3년간 수행해보니 내 근기(根氣)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말한다. 그 대신 남은 세월은 ‘자리이타(自利利他)’, 즉 자신은 물론이고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쓰기로 했다. 그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행위라는 것. 그래서 그는 남의 똥 닦아주며 보살해도 되겠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책을 써서 (지혜와 지식을) 나누는 데 여생을 바치기로 했다.
뱀에 물렸을 때, 벌에 쏘였을 때, 그리고 치질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던 세 차례를 제외하고 온전히 산속에만 있었다는 그는 “치질수술을 안하면 좌선 수행을 못하겠더라”고 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한 달에 한 번 공과금 내러 산 밑으로 내려가는 부인이 사다 준 신문을 읽거나 스님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알았다.
산에서 그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으로 불리는 정토종의 경전 ‘무량수경(無量壽經)’ ‘관(觀)무량수경’ ‘아미타경(阿彌陀經)’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이를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독학했다. 정토선 수행 중 극락에 다녀왔다고 해서 논란을 일으킨 중국의 관정 스님(1924∼2007)에 관한 책도 쓰고 있다.
왜 ‘고구려’는 틀리고 ‘고구리’가 맞나
서길수 교수는 고구려 산성 130곳을 발견한 고구려 연구의 권위자다. 이날 조문객 100여 명 중에는 30년전 서 교수에게 ‘고구려’를 일깨워준 조선족 청년도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고구려 유적을 답사 중이었는데 이 분이 '환도산성을 안 가보고 어떻게 고구려를 봤다고 하느냐?'고 해서 깜짝 놀랐다. 올라가 보니 둘레가 7㎞였다. 압록강과 국내성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일본이 펼쳐지는데 내가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고구려는 크다. 열등의식은 없애려 애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크다는 걸 느꼈을 때 없어지는 것"라고 했다.
그가 주장하는 '고구려'는 틀리고 왜 '고구리'가 맞을까? 이에 대해 "한자로 된 고유명사를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꽤 있다. '악랑(樂浪)'을 '낙랑'으로, '계단(契丹)'을 '거란'으로. 다른 나라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도 이웃 나라인 '고구리'와 '고리'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당시 한나라에서는 외래어였다. 이 주장이 낯설지 모르지만 제가 10여 년 전에 논문을 발표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 증거로 그는 "훈민정음 창제 후 최초로 한글로 엮어낸 '용비어천가'(1447)에 '高麗=고리'로 읽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미 그때 '고려'로 잘못 읽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북공정’ 등 중국의 역사 왜곡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서 교수는 "우리 역사를 학술적으로 방어해야 한다. 동북공정을 되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몫만큼 최선을 다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적어도 2~3년 안에 작은 대응 논리라도 내놓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책을 낼 때마다 장례식을 열어 이 문제를 널리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영토 갈등이 또다시 불거진 데 대해서도 그는 “한·중·일이 영토를 ‘소유’ 개념으로 생각하면 분쟁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길수 교수는 “고구려 때는 만주가 우리 역사의 무대였지만 지금은 우리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중국도 만주는 자기들 땅이지만 고구려 역사는 한국사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영토 분쟁은 감정싸움으로 치달으면 손해가 더 크다. 역사 이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한·중·일 학자들이 공동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2. 故人도 哭도 없는…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2019.12.28 ]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연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가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고구려연구소' 앞 골목길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09년 정년퇴직 후 강원도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죽음을 공부한 그는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이라며 "몰라서 두렵지,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기는커녕 기쁘다"고 했다.
희한한 부고(訃告)를 받았다. 이메일 제목이 '살아서 하는 장례식과 출판기념회'였다. 멀쩡히 산 사람을 장사 지낸다고? 고인(故人)도 없고 통곡도 없는 초상집에 초대받은 셈이다. 모시는 글은 이랬다.
"나는 늘 마음에 죽음을 새기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할 유언을 준비하다 생각했습니다.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서 조문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게 좋겠다.' 그러려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 했습니다."
서길수(75) 전 서경대 교수는 고구려발해학회(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중국의 동북 공정에 맞서 싸운 학자였다. 2009년 정년퇴직하곤 "삶과 죽음에 대해 공부하겠다"며 머리 깎고 3년을 강원도 산사에서 보냈다. 그는 "책을 펴낼 때마다 장례식 겸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내 장례식을 몇 번 더 치를지 나도 궁금하다"고 했다. "내 죽음을 내가 보며 가게 해달라고 유언했어요. 연명 치료도 하지 말고 가능하면 집에서 세상을 떠나야지요. 숨을 거두면 알리지 말고 빨리 화장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지난 21일 오후 1시 서울 이화여대 근처 한 강연장. 서 교수가 한복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문상객을 맞았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중(喪中)인 큰며느리가 밝은 얼굴로 접수를 맡았다. 부의함은 없었다. '고구려의 본디 이름 고구리' '장수왕이 바꾼 나라 이름 고리' 등 신간 두 권을 필요한 사람만 샀다. 한 조문객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를 표하러 왔는데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살아계시네요" 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됐다. 이날 3시간 동안 누구도 울지 않았다.
장례식이 있기 열흘 전 서울 마포구 '고구리연구소'로 서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우리가 '고구리'를 '고구려'로 잘못 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야기는 뒤로 밀어놓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이라니, 긴가민가했어요.
"삶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년퇴직할 때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들어선 셈이죠. 누구는 '인생은 그때부터'라고 하지만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저는 생사(生死) 문제를 확연히 알고 가고 싶었습니다."
―부고를 접한 주변 반응은.
"130명쯤 들어 있는 단톡방에 '장례식'이라는 단어를 툭 던졌는데 조용~해요. 아무도 대꾸를 안 했습니다. 진짜 죽는 줄 알고. 하하하.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할지 막막했겠지요. 파격이 일단 성공했구나 싶었어요. 궁금하면 조문하러 올 테니까요."
―'장례식 축하드립니다'라는 댓글은 안 붙었나요.
"1주일 지나서야 '명복을 빕니다'와 '극락왕생하십시오'를 받았지요(웃음). 저는 뼛속까지 교육자라 그런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합니다. 지금은 이걸 충격으로 받아들이지만 앞으로 여러 번 하면 멈칫거리지 않고 축하할 수 있을 거예요."
―산사에 틀어박혀 3년간 죽음을 공부했다면서요.
"더 올라가면 1992년부터 '관법(觀法) 수행'을 시작했어요. 지금 박 기자와 이야기하는 나를 내가 보는 식입니다. 죽음은 전체 생애에서 마지막 부분이잖아요. 입시 공부, 취직 공부는 얼마나 열심히들 합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 깨달음을 얻고 하산했나요.
"3년 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겁니다. 내 그릇으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았지요(웃음). 불교에 회향(回向)이라는 말이 있어요.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남은 생은 정리하고 책을 써 남겨주는 일을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2014년 봄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이코.
"육종암인데 수술받으면 '다리를 절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지요. 왼쪽 허벅지에서 암 덩어리를 도려내보니 18㎝ 크기였어요. 암이라는 진단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를 관찰했습니다. 수행을 검증할 기회니까요. 현실을 인정하고 큰 업을 하나 떼어낸다 생각하니 후련했어요. 병원에서 사람들은 사실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암 자체보다는 암에 대한 걱정과 고통 때문에 죽어갑니다. 옛날에 읽은 아라비아 우화가 떠올랐지요. 한 청년이 바그다드에 가는데 동행자가 생겼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업어줬더니 그 동행자가 '나는 사실 바그다드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 페스트균인데 원래는 절반을 없앨 생각이었지만 네가 도와줬으니 3분의 1만 죽이겠다'고 했지요. 약속을 어겼을 때 불러낼 수 있는 주문까지 가르쳐주곤 먼저 가더랍니다. 그런데 청년이 바그다드에 도착해보니 절반이 죽은 거예요. 그 페스트균을 불러내 따지자 한다는 말이 '정확히 3분의 1만 죽였는데 나머지는 놀라서 죽었다'는 거예요(웃음). 사람들은 실제 고통보다 훨씬 더 키워서 고통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육종암은 어떻게 됐나요.
"수술 받고 두어 달 뒤에 문제가 생겼어요. 퉁퉁 부어오른 거예요. 의사도 당황했습니다. 암에 칼을 대면 더 번성할 수 있다는데 그거로구나 싶었지요. MRI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1주일이 죽음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골몰한 시간입니다. 암 환자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 봤어요. '사람은 여러 가지 병으로 죽는데 암은 그 죽을병의 하나'라는 글을 읽으니 위안이 되더군요."
죽음을 왜 알아야 할까. 서길수 교수는 "죽음을 아는 사람은 진지하게 살게 됩니다. 아무렇게나 살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축사를 맡은 공석구 고구려발해학회 회장은 "연락을 받고 '축사가 가능할까? 조사(弔辭)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며 웃었다.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
서 교수는 MRI 검사 결과를 보러 가기 전에 의사에게 할 요청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치료가 가능하다면 살고 싶다. 둘째, 불가능하다면 책을 두세 권 마무리할 때까지만 살려달라. 셋째, 그것도 안 되면 덜 고통스럽게 가고 싶다.
―의사가 뭐라 하던가요.
"암이 재발한 게 아니고 림프액이 새어 나왔다고 했습니다. 1주일에 두 번씩 뽑아내면 된다고요(웃음). 5년이 지나 올해 완치 판정을 받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준비가 그때 확실히 시작된 것 같아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결심한 계기라면.
"답사로 또 여행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어요. 지난해 9월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찍은 제 사진을 보더니 손녀(12)가 '이건 영정 사진이네' 그래요. 제가 물었죠. '넌 장례식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랬더니 대뜸 '육개장 먹고 울다 가는 것'이래요. 하하하."
―즉물적으로 정확히 봤네요.
"이번 장례식에서는 '슬픔이 없는 가족'이 낮밥을 대접하는데 100% 채식입니다. 저는 2008년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어요. 미래의 생명인 계란도 빼달라고 했지요. 내 죽음 때문에 다른 동물이 애꿎게 죽는 건 옳지 않으니까."
―교수님 연배는 조문하고 육개장 드실 일이 많았을 텐데요.
"가지 않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꼭 있어야 할 장례식만 두 번 갔어요. 자식들 결혼할 때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빚이 없지요. 나중에 '세금' 걷으려고 장례식과 결혼식에 간다면 시간을 까먹는 일입니다. 1967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눈물이 나오질 않았어요. 왜 울어야 하나 궁금했지요. 아버지의 죽음이 제게 준 화두입니다."
―답을 찾아냈나요.
"산사에 있을 때 답을 읽었습니다. 진리는 이미 있는데 만나기가 힘들 뿐이에요.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고 반드시 죽습니다.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듯이요. 두렵지만 맞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을 슬퍼한다고 해서 어떤 실익이 있나요?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지 않아요. 몰라서 두려운 겁니다."
―그래도 막상 닥치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죽음인데.
"결국 삶은 늘 선택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대로 가고 싶었어요. 지금의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남은 사람을 위해 벌이는 쇼(show)예요. 죽음이 뭔지 알았다면 행동으로 옮겨야죠. 수많은 목사님과 스님이 말씀하셨지만 저는 실천을 하겠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번 장례식은 호상(好喪)이군요.
"축가도 부릅니다. '내 장례식에서 축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니 난감해하더군요. 이 장례식에선 슬픈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슬프다면 그 근원을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목적이에요. 제가 자식들에게 유언하면서 '다음 순서는 너희라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사흘을 지키고 염도 하고 다 봤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사에 관심을 가졌지요. 이 장례식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할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요. 죽음은 마지막이자 시작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는 영세나 세례를 주지요. 살면서 지은 모든 업이 죽는 순간에 한꺼번에 몰려와요. 힘들게 죽는 사람은 힘들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편안하게 살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편안하게 가지요. 하나님 곁으로 가든 윤회에 따라 다시 태어나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구려 연구를 다시 붙잡은 이유
마침내 장례식 날. 조문객은 '늘 입던 옷으로 편하게'들 모였다. "산 자의 장례식은 국내에서 처음 같다"는 소개를 받고 서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앞으로 (장례식을) 몇 번 더 할지 모르지만 부의금 안 받을 테니 여러분이 계속 와줘야 합니다."
그는 고구려 산성 130곳을 발견한 고구려 연구 권위자다. 이날 조문객 100여 명 중에는 30년 전 서 교수에게 고구려를 일깨워준 조선족 청년도 있었다. "중국에서 고구려 유적을 답사 중이었는데 이분이 '환도산성을 안 가보고 어떻게 고구려를 봤다고 하느냐'고 해 깜짝 놀랐어요. 올라가 보니 둘레가 7㎞예요. 압록강과 국내성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일본이 펼쳐지는데 내가 한복판에 서 있는 겁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고구려는 크다. 열등의식은 없애려 애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크다는 걸 느꼈을 때 없어지는 것이구나."
―왜 '고구려'는 틀리고 '고구리'가 맞나요.
"한자로 된 고유명사를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악랑(樂浪)'을 '낙랑'으로, '계단(契丹)'을 '거란'으로. 다른 나라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긴 거예요.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도 이웃 나라인 '고구리'와 '고리'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당시 한나라에서는 외래어였습니다. 이 주장이 낯설지 모르지만 제가 10여 년 전에 논문을 발표해 많은 논의가 있었어요."
―대표적 증거를 꼽는다면.
"훈민정음 창제 후 최초로 한글로 엮어낸 '용비어천가'(1447)에 '高麗=고리'로 읽어야 한다고 적혀 있어요. 이미 그때 '고려'로 잘못 읽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7년 전엔 '고구려 연구는 이제 후학의 몫으로 넘기겠다'고 했는데.
"2017년 중국 시진핑 주석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는 수천 년 세월과 많은 전쟁이 얽혀 있다'며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습니다. 북한도 아니고 한반도 전체가 중국의 일부라니, 깜짝 놀라 언론사들에 보도 자료를 보냈어요. 그런데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일본을 향해선 조그만 것 가지고도 난리를 치면서, 우리 역사가 중국으로 다 넘어갈 마당에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고구려 연구로 돌아온 다른 이유도 있나요.
"통일 코리아의 이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아요. Korea가 고구리와도 관계가 깊으니까요."
―중국의 역사 왜곡,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우리 역사를 학술적으로 방어해야죠. 동북 공정을 되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몫만큼 최선을 다해 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적어도 2~3년 안에 작은 대응 논리라도 내놓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책을 낼 때마다 장례식을 열어 이 문제를 널리 알릴 겁니다."
―학술서는 시장이 죽었는데.
"모두 10권을 낼 계획인데 제작비는 제가 대요. 마지막엔 재산이 제로(0)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보통 장례식 끝나면 자식들끼리 부의금 때문에 싸운다잖아요. 티베트 사람들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만 참된 재산이라고 생각해요."
조문하러 온 출판사 사장이 판소리 심청가 중 상엿소리를 뽑았다. 고정관념을 깬 이날 장례식은 마지막 인사도 특별했다. 달 항아리처럼 둥글게 웃으며 서 교수가 말했다. "오늘 못 한 이야기는 '다음 장례식'에서 찬찬히 나눕시다." 밖으로 나오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이 미끄러웠다. 자빠지면 머리 깨질라 조심조심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