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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종교학자 길희성이 꼽은 영적휴머니스트 : 예수와 임제 선사, 에크하르트, 해월 최시형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3. 1. 14. 07:33

1. 

 

최고 종교학자 길희성이 꼽은 영적휴머니스트는

 

 

 

< 한겨레, 조현 기자, 2021-08-10 >

 

 

 

 


종교는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다. 또한 종교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살육하고, 전쟁을 일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사회와 남북의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갈등과 적개심을 가장 부추기는 것도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이들이다. 따라서 종교는 가장 고귀한 인간을 지향하지만, 평균적인 인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중세적 억압을 넘어 인류 진보가 얻어낸 ‘휴머니즘’과 이상적 종교성인 ‘영성’이 만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할까.

 


길희성(78) 서강대 명예교수가 <영적 휴머니즘>(아카넷 펴냄)이란 책에서 제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길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으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원이기도 한 그는 2011년부터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지어 영성적 고전공부를 이끌어왔다. 지난 6일 심도학사에서 만난 길 교수는 평생을 씨름해온 종교적 여정을 마치고 정자에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려 900여쪽의 이 책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길 교수는 크리스천이다. 외조부를 비롯해 집안에 목사와 장로들이 많다. 한완상 교수 등과 힘을 모아 새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보조지눌의 선사상을 연구해 불교를 가르쳤고, <보살예수>나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같은 다원주의적 저작과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책을 썼다. 부드러운 성품과 달리 독선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예언자처럼 매섭게 비판해와 보수개신교계에선 그를 반기독교인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종교적인 책을 ‘최후의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기독교와 종교적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해오다 왜 말년에 ‘영적 휴머니즘’을 들고 나왔나?
“목욕물이 더럽다고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릴 수는 없다.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는 외피고 본질은 영적 휴머니즘이다. 이제 종교적 인간보다는 영적 인간을 말할 때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

 


―‘영적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한 휴머니즘이다. 이런 영적 인간관은 불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유교 등 세계 모든 주요 종교 전통의 공통적인 핵심이다.”

 


―‘세속적 휴머니즘’으로는 부족하다고 보는 이유는?
“중세적 신본주의를 깨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쳐 자유와 인권을 중시한 게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예수를 근대적 의미의 휴머니스트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세속적 휴머니즘이 지향하는 자유가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맹목적인 자유를 위한 자유가 되는 순간 에리히 프롬의 예견대로 독재나 전체주의로 도피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된다.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힘차게 외치고 출발한 프랑스 혁명 뒤에 공포정치가 도래한 것을 보라. 도덕과 공정한 정의, 영성을 상실한 근현대 서구문명의 한계를 세속적 휴머니즘이 보여주고 있다.”

 


―‘세속적 휴머니즘’에서 ‘영적 휴머니즘’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전통사회의 부조리한 사회제도와 관습에서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켜준 계몽주의 이전이나 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해 질서를 유지하던 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휴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이성과 상식에 반해선 안 된다. 하나의 종교 전통에 고착되거나 매달리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며, 자연계를 감싸면서도 초월하는 따뜻한 인간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개신교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로서 가장 큰 고뇌는 무엇이었나?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주의적인 신앙과 정통 교리가 인간의 상식과 지성에 반하는 면이 너무 많고 크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지성에 부담을 주거나 상식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종교가 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면 안 되나’ 하는 의문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철학자든 신학자든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내가 아는 서구 사상사를 장식한 위대한 사상가 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영적 휴머니즘’이 그 고뇌에 대한 답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신앙을 유치하게 만드는, 신과 인간을 유사하게 생각하는 신인동형적 사고, 그리고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근본주의다.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 못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묻지마 신앙’에 빠지거나, 아예 종교에 담을 쌓고 세속적 삶에 자신을 맡긴다. 이 불행한 양극단의 선택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고뇌는 젊은 날 교회에서 시작됐나?
“그렇다. 영락교회 신자로서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러나 전혀 감동이 없었다. 한국 개신교 주류를 복음주의라고 하는데, 말로는 죄인 죄인 하지만, 실제로는 죄의식이라는 게 없다. 차라리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면 낫겠는데 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승리주의에 젖어 타종교를 무시하고, 미국을 할아버지쯤으로 여겨 역사의식이라는 게 없다. 기본적 이성과 상식을 무시해 세속적 휴머니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신학적 상식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상징이고 ‘아날로지’(유비)다. 그게 신학의 가장 기본이다. ‘저 친구는 곰이다’는 말은 ‘인간이 아니고 진짜 곰’이라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데 문자주의, 근본주의에 빠진 한국 개신교 목사와 신자들은 ‘진짜 곰’이라고 한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있다는 것이다.”

 

 

―이성 없는 신앙은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교회와 신학계는 이성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만, 이성 없는 신앙은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욕망과 생각을 하느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가 너무 쉽다. 중세를 대표하는 토머스 아퀴나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어 신앙과 이성을 종합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철학적 이성보다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기술혁명시대다. 또 고대 그리스 철학보다 더 서양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을 매료시키는 불교나 노장사상 등이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상대성을 초월하지 못하는 다원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토머스 아퀴나스의 사상적 한계도 분명하다.”

 


대표적인 영적 휴머니스트로 예수와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 독일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제시한 이유는?

 

예수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곧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준 참된 인간이었다. 

 

에크하르트는 내가 아는 한,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 우리 인간들 사이에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대담하게 가르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임제는 불교 냄새도 풍기지 않고, 어떤 특정한 이념과 관념조차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이 당당하게 사는 벌거벗은 참사람이었다. 

 

최시형은 경천, 경인에서 나아가 경물까지 가르쳤다. 슈바이처보다 훨씬 먼저 인간중심주의까지 넘어선 것이다. 

 

 

길을 잃은 문명의 앞길을 비춰주는 이들이 바로 이런 영적 선각자들이다.”

 

 

 

 

 

 

2. 

 

종교학 석학 길희성 교수 "영적 휴머니스트, 예수외 3명 있다"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2021.07.29 >

 
서강대 종교학과 길희성(78) 명예교수가 최근 책을 냈다. 서문에서 그는 “나의 학문 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저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다소 ‘비장’하고 무거운 심정으로 썼다”고 밝혔다. 922쪽, 두툼한 책의 제목은 『영적 휴머니즘』이다.

실제 그랬다. 어찌 보면 ‘마지막 고백’ 같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 자리를 내놓고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갔을 만큼, 그는 좋아하는 종교학을 한평생 파고들며 살았다. 그 길의 후반부에서 길 교수가 내리는 마지막 고백과 결론은 어떤 걸까. 23일 강화도의 심도학사(尋道學舍)에서 그를 교수를 만났다. 길희성 교수에게 ‘나의 삶과 종교’를 물었다.

 


젊었을 때 신앙은?
“집안이 개신교였다. 외조부는 목사님이었다. 황해도였던 외가에 교회 장로도 여럿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자랐다. 그런데 나의 마음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지 않더라.”

 

 

왜 생동감이 없었나.
“무언가 답답했다. 전통적 신학의 틀이 왠지 갑갑했다. 그때 부목사로 오신 홍동근 목사님이 물꼬를 터줬다. 그분은 카를 마르크스 이야기도 하고, 사회정의도 이야기했다. 성경 해석도 자유롭고 진보적이었다. 나는 거기서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길희성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신학을 하기 위해서 철학과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당시 홍 목사님과 주위 여러분의 조언이 그랬다. 신학을 하려면 철학을 먼저 하라고 했다. 그건 신학의 경직된 울타리 안에 갇히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 조언, 지금 돌아보면 어땠나.
“결국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내가 입학하던 시절, 철학과에는 논리실증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또 언어 분석적인 메타 윤리학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거기에는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등 삶에 대한 큰 물음이 빠져있었다. 대신 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심취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무엇을 찾았나.
“플라톤은 본질주의자다. 사물에는 본질이 있다. 책이라면 책의 본질이 있고, 대학에는 대학의 이념이 있다. 그게 본질이다. 나는 플라톤의 개념 철학, 본질 철학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나의 기독교 신앙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향점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 거다. 이건 지금까지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진리다.”

 


길 교수는 학부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미국 예일대 대학원 신학부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3년간 신학 공부를 했다. 석사 과정이었다. 당연히 박사 학위도 신학으로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심적인 변화가 생겼다. 뜻밖에도 그는 하버드대 비교종교학과에서 불교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크게 방향을 바꾸었다. 심적인 변화는 무엇이었나.
“예일대에서 공부하며 깨달았다. 서양 사람들은 데카르트나 칸트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그들의 사고가 철학적이구나. 동양 사람들은 공자와 노자를 공부하지 않아도 사고의 밑바탕에는 동양철학이 흐르는구나. 특히 와인슈타인 교수의 학부 불교사 강의를 수강하면서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를 하게 됐다. 나는 기독교가 세계 종교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하버드 대학에는 켄트웰 스미스 교수라는 세계 종교학의 거장이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이슬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슬람학에 정통했다. “그분의 세계 종교사를 보는 눈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스미스 교수의 학부 강의 조교도 했다. “그때 나는 이슬람과 유일신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됐다. 기독교 신학을 넘어서서 세계 종교를 이해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켄트웰 교수의 안목 중 가장 놀라웠던 대목은 뭔가.
그분은 세계 5대 종교를 이렇게 꼽았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마르크시즘,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 그는 마르크시즘과 세속적 휴머니즘도 하나의 종교로 봤다. 이런 견해에 나는 깜짝 놀랐다. 종교를 바라보는 나의 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건 궁극적 삶의 의미와 토대에 관한 인간의 모든 게 종교적이라는 깊은 통찰이었다.”

 

 

세속적 휴머니즘이 뭔가.
인간은 인간이란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이 존중받아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다. 종교적 차별마저 넘어서는 휴머니즘이다. 서구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비판을 받았고, 그 결과 인간의 이성과 윤리에 중심을 두는 탈 종교화한 휴머니즘이 생겨났다. 그게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정적 문제가 있다.”


어떤 문제인가.
세속적 휴머니즘에만 머물면 삶의 의미, 삶의 토대가 공허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아니라 영적 휴머니즘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영적 휴머니즘, 그 핵심은 뭔가.
“데카르트는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고, 세계는 물질과 정신으로 돼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세계를 이분법으로 쪼개고 대립적으로 봤다. 기독교를 위시한 유일신 신앙의 종교들 역시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을 극복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본다.  

 


유일신 신앙의 이분법은 어떤 건가.
“신을 초자연적 존재로만 본다. 그래서 초자연과 자연이 대립한다. 신과 인간, 성(聖)과 속(俗)이 이원적으로 대립한다. 게다가 자신들처럼 그걸 명확하게 나누지 않는 다른 종교를 범신론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서 유일신 신앙의 배타성이 나온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걸 바꾸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둘로 쪼개져 있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유일신 신앙이 살 수 있다. 그걸 나는 ‘포월적 신관(包越的 神觀)’이라 부른다. ‘포월’은 감싸면서 초월한다는 뜻이다. 만물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 자연적 초자연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의 종교 전통들에는 이런 안목을 갖고 살았던 영적 휴머니스트들이 실제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길 교수는 네 명의 영적 휴머니스트를 꼽았다. 예수와 중세의 수도자이자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867)와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98)이다. 그는 먼저 예수를 꼽았다.

예수는 말과 행동으로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대변인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나 닮았다고 하여,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예수는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자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어땠나.
“그런 예수를 알아보고 가감 없이 말했던 신학자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예수는 하느님의 외아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입양된 양자라고 말한다. 독생자는 예수님뿐이라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이런 장애를 완전히 넘어서신 분이었다.”

 

 

에크하르트는 뭐라고 했나.
예수와 우리가 모두 똑같은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했다. 에크하르트는 그사이에 한 치의 차이도 인정하지 않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유일한 신학자였다. 그는 기독교의 공고한 신학적 장벽과 교리의 장벽을 속 시원하게 돌파해 허물어 버린 수도자이자 신비주의자다.” 

 


임제 선사와 해월 최시형은 왜 영적 휴머니스트인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ㆍ다다른 곳마다 주인이 돼라, 서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을 강조한 임제 선사는 참다운 인간의 주체성을 거침없이 설했다. 또 사인여천(事人如天ㆍ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다)을 주창한 해월 최시형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이 강림했다고 말하라’고 할만큼 영적 휴머니스트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심도학사 진입로까지 배웅을 나온 길 교수가 맑은 눈으로 말했다.

영성은 인간의 본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