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 총리의 퇴임사 (2007)
토니 블레어 총리의 퇴임사 전문
“저는 제 지역구였던 이곳 세지필드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제가 정치 여정을 시작한 곳이면서 마무리 짓기 또한 적절한 곳입니다.
오늘 저는 노동당의 당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발표하는 바입니다. 이제 노동당은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할 것입니다. 6월 27일 저는 여왕님께 총리직 사임서를 제출할 것입니다.
저는 10년 이상 이 나라의 총리를 지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10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에게 있어서도 그렇지만 영국을 위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때로는 권력을 얻는 유일한 길이 그것을 내려놓는 것일 때가 있죠. 이 퇴임사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총리로서의 제 업적에 대한 평가가 있겠죠. 결국 그 결정은 국민 여러분들께서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생각하는 지난 10년 동안 변화를 이루어내려 했던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 자신의 리더십에 관해서라면, 예상 가능한 일들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난무했던 지난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처음부터 저에게 분명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저를 지도자의 자리에 세워준 노동당이 없었더라면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저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떤 무엇보다도 제 임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만큼이 제가 13년 전 노동당의 당수가 되었을 때 제게 분명했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제가 총리로서 배워야 했던 것은 ‘나라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였습니다.
제가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때때로 기대가 지나쳤다고 말합니다. 기대치를 낮추어야 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개인으로서나 총리로서나,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낙관론자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가능할 것을 다루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생에 있어서라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도전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비전이 무지개 빛 수채화라면 현실은 검은색, 흰색, 회색이 섞인 어두운 빛깔의 밑그림과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만은 인정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진정으로 제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하였습니다.
이 나라는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영국인들은 특별합니다. 세계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입니다. 이러한 영국의 총리였던 것이 영광스럽습니다. 영국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제가 잘 해냈던 시간들에 대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부족했던 시간들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립니다. 행운을 빕니다.”
북아일랜드 분쟁...아일랜드 공화국이 영국 연합왕국에서 독립할 당시 얼스터의 일부 지방은 영국에 남음으로써 비롯된 일련의 민족주의 분쟁을 말하며, 30년(1969~1997년) 동안 진행된 북아일랜드 분쟁은 3,500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켰고, 부상자를 포함한 사상자의 수는 50,000명을 훌쩍 넘는다고 사전에 적혀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벨파스트 협정을 기적같이 성사시켜 북아일랜드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한 인물이다. 그는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영국 총리의 자리에 올랐는데, 북아일랜드 분쟁은 그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400여 년 간에 걸친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의 오랜 반목과 영국의 아일랜드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그들의 증오심을 폭발시켜 무장폭력시위로 표출된 것이었다. 특히 그중에도 1972년 1월 30일 벌어진 ‘피의 일요일’은 최악의 유혈사태였는데, 북아일랜드 아일랜드계 주민들이 평등한 시민권을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중 영국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아 14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폭탄과 총을 소지한 시위대가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였다. 이날의 사건을 계기로 아일랜드계 주민들은 평화적인 저항 운동보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주도하는 과격한 무장 투쟁 노선을 지지하게 되었고, 잉글랜드 주민들은 이에 맞서 얼스터의용군을 조직하고, 양측은 무력충돌을 하면서 분쟁이 종식될 때까지 3000여 명의 희생자를 내게 된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총선에서 승리한 지 딱 한 달 뒤인 1997년 6월 2일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부터 방문하였다. 그는 연례행사로 열리던 감자 대기근 추모음악제에 참석해 150년 전 대기근 때 영국의 불충분한 지원으로 200 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숨진 것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하였다. 그는 이를 시작으로 화해를 위한 대장정을 시작하였는데, 2년 동안의 결코 쉽지 않은 복잡하고 어려운 협상을 통해 거의 30년에 걸친 유혈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협상을 하면서 가장 난항을 겪은 부분은 각종 테러범 처리 문제였다. 협상 당시 양측 모두 형을 살고 있는 테러범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처리는 서로의 입장이 극명하게 달라 합의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를 들면 각종 테러로 유명했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자신들이 독립전쟁을 수행하던 군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이 끝나면 무조건 석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영국 정부나 신교도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군인이나 경찰, 심지어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해한 테러범을 풀어준다는 것이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결국 평화를 위한 대의의 입장에서 협정 당시 재판을 받고 형을 살고 있던 모든 기결수를 석방한다고 합의가 이뤄졌다. 그 결과 기결수 428여명이 석방되었는데 그중 143명은 무기수였다. 테러범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이 살해당한 피해자 가족이나 부상을 입은 당사자는 참을 수가 없었다. “폭파범이 영웅처럼 석방되는 걸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불편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평화가 없이는 결국 살인이 계속될 것이고 그 평화는 이런 참을 수 없는 희생과 양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평화는 타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신뢰와 선의만이 어렵게 얻은 평화를 지켜갈 수 있다.” 그는 이처럼 원한을 덕으로 갚으면 그 원한은 사라지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드디어 1998년 4월 10일 부활절 성금요일에 벨파스트에서 역사적인 평화협정 조인식이 이뤄졌다. 이 협정안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을 비롯한 아일랜드 모든 가정으로 우송되었다. 5월 22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아일랜드 공화국민은 56%가 투표해서 94%가 이 협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북아일랜드인들은 81%가 투표해 71%가 찬성했다. 어느 정도 불만이 있던 양측 정파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 지지였다. 이렇게 양쪽 국민이 앞으로 어떤 형태의 유혈 사태도 원치 않는다고 확실하게 표현을 한 덕분에 현재까지도 북아일랜드에서는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토니 블레어 총리...벨파스트 협정을 기적적으로 성사시켜, 400여 년간에 걸친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의 반목과 30년 동안 진행된 지옥 같은 분쟁을 종식시키고 북아일랜드에 평화를 되찾아준 사람...“그는 도를 터득하여,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 평화롭게 풀 줄 알았던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