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한국 가요

조용필과 신중현도 ‘뽕짝’이라고? 도대체 어디까지가 트로트인가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3. 1. 27. 07:49

조용필과 신중현도 ‘뽕짝’이라고? 도대체 어디까지가 트로트인가
트로트는 과연 특정 장르의 4박자 노래일까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2023.01.27 >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2019년 이후 난데없는 트로트 열풍이 생겨난 것일까?

‘TV가 뽕짝판이 된 것이냐’ ‘이젠 지겹다’고 지탄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여전히 ‘미스터트롯2′가 시청률 20%를 훌쩍 넘고 있는데다 송혜교 주연 ‘더 글로리’를 누르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TV프로그램에 오른 걸 보면 전 세대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만 좋아해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결과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과거로 퇴행하는 사회적 현상은 아닐까?

그런데 최근 ‘미스트롯2′와 ‘미스터트롯2′에서 놀랍게도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1979)와 김완선의 ‘리듬 속의 그 춤을’(1987)이, 아 세상에, ‘트로트곡’으로 소개되는 걸 보고 솔직히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창밖의여자가 트로트였어? 리듬속의그춤을이 트로트였다고?(그러고 보니 신중현 작사 작곡의 이 노래에 어딘가 뽕짝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합니다) 그 시절 그 노래를 실시간으로 들었을 당시엔 트로트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노래들입니다.
https://youtu.be/4ExsxJg5uGY

https://youtu.be/R1DUUK8ccaM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성치 영화 ‘쿵푸 허슬’(2004)을 보다가 한 장면에서 놀랐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쿵푸 고수들이 모여 살던 아파트촌에 돌연 무더운 날 오후 3시쯤에 어울리는 중국 노래가 느긋하게 흘러나옵니다. 분명 중국어 가사인데 그 멜로디를 듣는 순간 한국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한국어 가사를 발화(發話)하며 그 노래를 따라부르게 됩니다.

“사랑해~ 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 는~ 죄~ 이라서~”

아, 그것은 저희 할머니께서 즐겨 부르시던 현인의 ‘꿈속의 사랑’(1956)이었습니다. 전후(戰後) 서민들의 곤고한 생활을 위로해 줬을 그 꿈꾸는 듯한 곡조가, 그런데 거기서 왜 나와! 오래 전 영화 ‘영웅본색’(1986) 중 주윤발이 술집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무용담을 늘어놓는 장면에서 갑자기 구창모의 ‘희나리’(1985)를 중국어로 부른 노래가 깔려 한국 관객을 의아하게 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꿈속의 사랑’도 중국으로 건너가 번안곡이 됐나?

알고보니 실제는 그 반대였습니다. 1940년대에 중국에서 유행했던 노래 ‘몽중인(夢中人)’(1942)을 작곡가 손석우가 가져와 우리말 가사를 붙인 노래가 ‘꿈속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비슷한 번안곡의 사례는 또 있습니다. 조영남의 ‘최진사댁 셋째딸’(1969)은 미국 가수 알 윌슨의 소울 충만한 노래 ‘스네이크’를 번안한 노래였습니다. 원곡을 들어보고 충격을 받은 분들도 꽤 있습니다.

https://youtu.be/bgnviO7y_Bk

https://youtu.be/ULx9k2QkL94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꿈속의 사랑’을 당연히 트로트곡으로 여기고, ‘최진사댁 셋째딸’은 트로트 중에서도 토속적인 맛이 강한 노래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트로트라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장르가 아니었나? 그런데 중국 노래와 미국 노래를 가져와 번안한 노래도 트로트라면, 과연 트로트의 정의는 무엇인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불러 많은 시청자를 감동시켰던 3년 전, 저는 이 노래의 작사·작곡자이자 원곡자인 김목경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원래 곡의 제목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였습니다. 막 환갑을 지난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노래 주인공이 60대라는 건 말도 안된다. 80대라면 모를까…”라고 털어놨습니다). 이제 한국 블루스 음악의 대가로 꼽히고 있는 김목경씨는 “새삼 저한테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다”며 좀 당혹스럽다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그건 트로트가 아니라 포크인데!”

하지만 그게 뭐 크게 문제가 된다는 얘기 같진 않았습니다. 이내 활짝 웃으며 “근데 임영웅이란 그 친구, 참 깨끗한 톤으로 매력 있게 소화하더라고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https://youtu.be/cKp4W5Iu95Q

 

그러니까 조용필이든 신중현이든 김완선이든 중국곡이든 미국곡이든 블루스든 포크든 세월이 흐른 지금은 모두 다…

‘트로트’가 된 것입니다.

이제 ‘4분의 4박자를 기본으로 한 한국 대중가요의 한 장르로서, 20세기 초 서양에서 유행한 사교댄스의 연주 리듬인 폭스-트로트에 바탕을 두고,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아, 1970년대에 강약의 박자를 넣고 독특한 꺾기 창법을 구사하는 독자적인 가요 형식으로 완성된 것’이라는 트로트의 사전적 정의는 수정돼야 할 것 같습니다(심지어 최근 나온 송가인의 ‘월하가약’은 3박자입니다). 어떻게 고쳐져야 할까요.

그것은 거칠게 말해 ‘흘러간 노래는 다 트로트’라는 것입니다.

......?

아니, 사실 이 정의도 충분치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사가 반야월(1917~2012·가수 진방남)이 남긴 이 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트로트는 흘러간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흘러온 노래다.”

이 말이 지금에 와서 보석처럼 빛나는 이유는,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어언 한 세기에 걸쳐 각각 당대에 유행해 사람들의 마음에 화인(火印)처럼 박힌 노래들을, 시대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애환(哀歡)을 함께 했던 노래들을, 그래서 이미 우리의 역사 속에 녹아들었으며 그 자체로 역사가 된 노래들을, 어느새 우리는 ‘트로트’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가요의 그런 역사성을 통 몰랐을 때는, 가요는 단지 두 가지만 존재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는 대학가요제나 조용필이나 전영록 음반에 담긴 ‘요즘 노래’,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요수첩’ LP 시리즈에 계통도 순서도 없이 담긴 ‘옛날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시대마다 세대마다 시기마다 시절마다, 저마다 이유와 사연과 곡절과 정서를 갖추고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오래도록 남은 노래들이 존재했습니다. 1920년대의 ‘희망가’(1921)가 식민지 청년의 암울하고 허무한 인생관을 노래했다면, 1930년대의 ‘목포의 눈물’(1936)은 ‘삼백년 원한 품은’이라는 가사를 삽입해 서러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항일 정신을 심었습니다. 1940년대의 ‘가거라 삼팔선’(1948)은 분단의 아픔을 노래했고, 1950년대의 ‘굳세어라 금순아’(1953)는 전쟁의 상처를 끝내 극복하려는 미래지향적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1960년대의 ‘마포종점’(1968)은 전차의 철거를 앞두고 순탄치 않게 펼쳐질 새로운 도시 생활을 예고하는 노래였으며, 1970년대의 ‘님과 함께’(1972)는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는 경제 성장의 시대에서 개인의 행복을 찾는 정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의 ‘아파트’(1982)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에서 영위하는 삶이 개막했음을 시사하는 노래였습니다.

트로트의 부흥은, 특정 가요 장르에 대한 회귀나 퇴행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정서를 대표하고 오래도록 살아남은 가요들이 역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 트로트의 새로운 정의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고 역사성을 갖췄으며 그 보편성이 지금까지도 대중의 마음 속에 살아남은 대표적인 한국 가요. 한마디로 역사가 된 노래.’

그렇다면 이제 반야월이 ‘흘러온 노래’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세월이 더 지나면 세기말 X세대의 불안과 회귀를 읊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 백 홈’(1995)나 21세기 젊은 여성의 자의식을 노래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 같은 노래도 트로트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트로트가 무엇인지 짧게 규정하는 최근의 몇 가지 말들은 이런 정의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트로트는 우리의 마음이고 눈물이다.”(영화 ‘복면달호’)

“트로트 가수는요, 어떠한 인생을 살아도 버려지는 인생이 없어요. 그게 다 노래 속에 스며들기 때문입니다.”(김용임)

“힘들어? 힘들면 힘들다 해. 아프냐? 아프면 아프다 해라. 트로트는 제게 이렇게 말해주는 음악입니다.”(영지)

저는 언젠가 수첩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습니다.

“헤어질 때 눈물을 삼키고 돌아서 촉촉한 눈가를 닦으며 술잔을 천천히 기울이면 발라드다. 

왜 헤어져야 하느냐고 소리를 크게 지르면 록이다. 

헤어지면 안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 말한다면 랩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넋이 나간 듯 팔다리를 흔드는데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하는 것처럼 느낀다면 뮤지컬이다. 

그리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다리를 붙잡고 가슴을 치면서 하소연하고 통곡했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가슴 한 귀퉁이에 그때의 그 슬픔이 여전히 사금파리처럼 박혀 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것은 트로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