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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단독 인터뷰] “철저히 혼자였던 남극보다 서울이 더 외롭다”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3. 3. 8. 09:28

[김영미 단독 인터뷰] “철저히 혼자였던 남극보다 서울이 더 외롭다”

 

 

 

< 월간산, 서현우기자, 2023.3월호 >

 


아시아 여성 최초 무지원 단독 남극점 도달 김영미 인터뷰
 
서울 인왕산에서 만난 산악인 김영미. 출국 전에 비해 10kg가량 살이 빠진 상태였다.
인왕산 능선에 올라선 산악인 김영미는 서울을 낯설어했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세상에 있다는 듯, 불안한 눈빛으로 잿빛 도시를 두리번거릴 따름이었다. 그의 남극일기에 적혀 있던 ‘남극보다 서울이 더 외롭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척이나 지쳐보였다.

 


“아직 힘드세요?”

“1월 25일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코로나에 걸렸거든요. 제가 정말 건강한 체질이라 그 흔한 감기 한 번 잘 안 걸리는데 이번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걸렸어요. 정말 남극에 다 쏟아내고 오긴 했나 봐요.”

 


가장 먼저 한 일 ‘기부’

 


지난 2월 10일 서울 인왕산에서 산악인 김영미를 만났다. 김영미는 지난 2022년 11월 26일 22시 43분(칠레 현지 시간) 스키가 달린 트윈오터 경비행기를 타고 허큘리스 인렛(79˚ 59.210 S, 079˚ 26.290W)에 내려 하룻밤을 자고, 27일 아침 운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식량과 연료 등을 중간에 보급 받지 않고 단독으로 1,186.5km를 50일 22시간 35분 만에 걸어 1월 16일 21시 18분(칠레 현지 시간)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번 완주로 김영미는 무지원 단독 남극점 완주에 성공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첫 아시아 여성이 됐다. 그런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됐다. 늘 하던 대로 대장?

 


“앞서 다른 매체와 한 인터뷰들을 쭉 봤습니다. 이번 원정으로 수식어가 많이 붙었던데요. 철의 여인, 월드스타부터 대장, 탐험가 정도가 떠오릅니다. 어떤 호칭이 가장 마음에 들던가요.”

“저는 산악인이 제일 좋아요. 산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자 근본이거든요. 산에서 쌓은 배움과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 남극도 갈 수 있었고요. 그러니 산악인 김영미라고 해주세요.”

 


“그럼 산악인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문득 ‘남극보다 서울이 더 외롭다’는 말이 또 떠올랐다. 천성이 산이란 생각과 함께 “그래서 서울이 더 외로운 건가요?”라고 묻자 웃으며 답한다.

“서울에는 원정에 대한 갈증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 말이에요. 그들 틈에서 꿈과 나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엔, 서울이란 도시는 꽤 고독하고 외롭거든요. 

물론 서울에서 사회인 김영미로 산다는 게 싫은 건 아녜요. ‘사회인 김영미’가 없던 20대 시절 히말라야를 다닐 때는 엄청 불안했어요. 원정을 나가 설벽에서 등반하면서도 ‘이번 달 월세는 어떻게 내지’ 하고 고민하고 그랬죠. 그래서 30대 초반까진 원정에서 돌아오면 허전했어요.

지금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갈 회사, 살아나갈 정상궤도의 삶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더 이상 불안에 떨진 않아요.”

사람들은 전 재산을 털어서 세계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부러워하지만, 전 재산을 털어서 원정이나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은 비난한다. ‘그 위험한 데를 왜 가냐’며. 행위가 가진 리스크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한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리스크와 가치는 저울 양쪽에 매달고 비교해야 하는, 완전히 분리된 양가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들은 보통 저울 한쪽에 이 두 가지를 몰아 놓는다. 리스크가 곧 가치다. 

게다가 이런 ‘탐험의 위험 논쟁’에서 김영미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기도 하다. 하이리스크의 수직 등반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매일 에너지를 쉬지 않고 쏟아 부어야 하는 수평의 세계로 자신의 모험세계를 옮기고 이를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호칭을 정리한 후 코로나 자가 격리가 끝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을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여러 매체 인터뷰나 후원해 준 이들에 대한 감사 인사 등 으레 했을 법한 일이 아니었다. 기부다.

“기부를 처음한 건 아니에요. 처음 기부한 게 7대륙 최고봉 완등했을 때죠. 모교 요청으로 특강한 후 받은 강연료 일부를 모교산악부에 장학기금으로 전달했어요. 그 이후로도 엄홍길휴먼재단 도전상, 박영석특별상 등 상을 받거나 강연료를 받을 때면 종종 기부하곤 했죠. 이번 원정은 유급휴가로 처리된 터라 월급이 통장에 고스란히 있기에 생활비 일부를 기부한 겁니다.

기부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저도 도움 받아서 원정을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부하면 약간 마음의 빚을 덜어내는 기분이에요. 이번에도 도전 형식은 단독이었지만, 이 단독 도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는지 일일이 말할 수 없어요.”

 


남극점 도달 후 재보니 14kg 빠져

 


말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오르막이 끝나고 범바위다. 가뜩이나 대화하며 차오를 대로 숨이 차올랐는데 서쪽에서 올라온 차디찬 골바람이 폐로 와락 쑤셔 넣어진다. 굳이 산에서 만나자고 했던 건 이렇게나마 그의 남극을 추체험해 보려는 의도였다. “남극에서 했던 운행에 비하면 어떻냐?”고 우문을 던지자 비교도 말라는 듯 일화 하나가 돌아온다.

 


“이번에 심박변이도HRV를 측정해 주는 시계를 차고 갔어요. 몸의 움직임, 수면시간과 질, 심박수 등으로 컨디션을 알려주는 척도인데 한국에서 일상생활할 땐 평균적으로 50~60 정도 나와요. 그런데 남극에선 26~28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계속 ‘빨간 불’ 경고등이 들어오더라고요. 이러다 자다가 과로사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이 말을 시작으로 줄줄이 김영미의 남극이 펼쳐졌다. 

그는 이제 문명에서 이격된 채 50일 22시간 5분의 고독을 보낸다. 그리고 원정을 시작하자마자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113kg으로 맞춘 썰매의 무게가 너무 과도했다. 그의 키와 체중에 비해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남극점을 지나 남극대륙을 횡단하려는 한 여성 탐험가의 썰매 무게가 120kg였다고 하니 무거워도 한창 무겁게 짐을 쌌다. 촬영을 위해 여분의 배터리 등 전자 장비를 챙겨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예상도 했지만 그 예상은 상상 이상의 고통까지 상정하진 못했다.

악재는 또 찾아왔다. 남극전용으로 챙긴 나침반 두 개가 모두 고장이 났다. 메인으로 쓰려던 나침반은 3일 만에 관리소홀로 깨졌고, 예비용 나침반은 꺼내고 보니 오작동을 했다. 한 시간 운행하고 GPS를 꺼내 확인하니 3km나 본래 코스에서 벗어나 있었다. 오직 눈뿐이라 지형지물을 통해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고, 화이트아웃이라 태양도 길잡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하루에 25km 내외를 꼬박 걸어야 일정이 맞는데 3일 동안 27km를 운행했다. 그나마 이 3일 동안 고장 난 나침반이 ‘얼마나’ 오차가 있는지 GPS와 대조해 찾아냈다. 방위각이 딱 20° 달랐다.

원정 초반 전체 일정의 20%를 고작 위도 1°를 올리는 데 다 써버렸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방법은 있었다. 잃어버린 3일을 되찾기 위해 시간을 갈아 넣으면 됐다. 운행 시간을 늘려 하루에 11시간씩 걸었다. 그의 운행기록을 본 남극물류 대행사 ALE는 “시작부터 너무 오래 걷는다”고 걱정했다. 그래도 갈 수밖에 없었다. 사스투르기(요철지대)에 썰매가 걸릴 때면 초보 운전자의 거친 급브레이크처럼 불쾌한 건 물론, 간신히 붙잡고 유지하던 페이스와 호흡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30일이 지나자 한계가 왔어요. 물론 예상했던 시나리오죠. 살은 빠질 대로 빠진 상태에서 해발고도 2,000m를 넘기자 눈과 바람, 추위가 엄청나게 심해졌죠.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오직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갔습니다.

원래라면 이즈음부터 4,500Kcal에서 5,000Kcal로 열량 섭취를 올려야 했어요. 500Kcal가 0.3kg니깐 20일치면 6kg이죠. 그런데 저는 이 식량을 빼고 촬영 장비를 실은 거죠.”

심박수는 늘 150과 160 전후. 갈수록 추워지고, 바람은 거세졌다. 그런데 바람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김영미는 값비싼 첨단 동계 피복을 찢고 들어와 피부에 동상을 남기기로 악명 높은 극점의 바람소리보다 “내 숨소리가 더 컸다. 매 순간 살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40일차가 될 때까지 걸으며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래도 11시간 넘게 걸었다. 이를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2시간짜리 경기를 5번하고, 나머지 한 시간을 예정 거리를 채우기 위해 더 악착같이 페이스를 올려 뛴 셈이다.

걸으면서 촬영도 해야 했다. 잠시 파일 장갑만 끼고 고프로 버튼을 누르다가 손가락 끝 뼈마디가 조각나는 통증이 등줄기 신경까지 찔렀다. 그렇게 추운 곳이었다. 고작 셔터를 누르는 동작에서 문지방에 발가락, 아니 손가락을 찧는 통증을 느껴야 했다.

고통의 시간 사이에 휴식 하나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하루도 쉬지 못했다. 이 모든 고통이 끝나고 남극점에 도달한 순간, 김영미의 체중은 14kg나 줄어 있었다. 
 

 

가장 생각났던 것? 술마시고 푹 자는 것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다. 인왕의 겨울바람이 마치 저 멀리 남극에서부터 불어온 듯 시리다. 계속 궁금증이 치솟아 몸이 들썩거렸다. 눌러 담아뒀던 질문들을 속사포처럼 던졌다.

 


“원정 중에 왜 하루도 쉬지 않은 건가요?”

 


“가장 먼저 매일 에너지를 쏟아내는 기분이 어떤 건지 궁금했어요. 물론 식량이랑 남은 거리를 계산해 보니 중간에 하루쯤 휴식해도 되는 날이 있긴 했어요. 초반에 늦어진 걸 어느 정도 만회한 시기였죠. 마침 블리자드도 거셌고요. 근데 ‘한번 이 블리자드를 뚫고 가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갔어요. 그 이후에 다시 변수가 생기면서 쉴 수 있는 여유가 없어졌어요. 그래도 계속 남은 거리를 잘 계산해서 식량이 딱 떨어지는 순간 남극점에 도달하게끔 운행 일정을 짜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어요.

 


“원정 중에 제일 생각났던 건 뭔가요?”

 


“술집이 너무 가고 싶었어요. 오후 7시 30분까지 걷고, 텐트 치고, 밥 먹고 9~10시에 자려고 막상 누우면 잠이 안 와요. 백야인데다 너무 몸이 힘드니까 바이오리듬이 망가져서 잠을 깊게 잘 수 없던 거죠. 그래서 따뜻한 겨울 코트를 입고 분위기 있는 술집에서 음악 들으면서 시원한 샴페인을 마시고 깔끔하게 취해서 아침 10시까지 푹 잠드는 상상을 여러 번 했어요. 놀라운 건 저 사실 술 안 마시거든요?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 꿈도 많이 꾸셨겠네요?”

 


“꿈은 잘 안 꾸는 편인데 기억에 남는 아주 선명한 꿈은 있어요.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고 글을 쓴 다음에 주머니에 넣어뒀는데 자려고 짐을 정리하다 보니 폰이 없어진 날이었어요. ‘아 진짜 망했다’하면서도 일단 잤는데 꿈에서 제 뒤를 따라 남극점으로 가는 한 노르웨이 탐험가가 ‘오다가 휴대폰 주웠어요~’하면서 저에게 주는 꿈을 3번이나 꿨죠.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텐트를 걷으니까 그 밑에 있더라고요. 하하”

 


“밥은 어떤 걸, 얼마나 먹은 겁니까?

 


아침, 저녁 두 끼로 매일 4,500Kcal를 연료 주입하듯 먹었어요. 도합 22만5,000Kcal, 50kg을 먹었죠. 근데 이것도 적은 거예요. 이번에 최연소 여성 단독 남극점 도달 기록을 세운 헤드빅 헤르테이커는 매일 5,700Kcal를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칼로리는 숫자일 뿐 체내에 흡수되는 양은 그보다 적고요.

메뉴는 아침은 소불고기에 알파미, 저녁은 제육에 알파미였죠. 반찬은 없고 고추장만 500g 챙겼어요. 맛있었냐고요? 그냥 연료죠. 그래서 정말 힘들 땐 먹다가 토한 적도 있어요. 그래도 안 먹을 수 없어서 물이랑 같이 억지로 넘기다 또 토하고, 토한 걸 치운 뒤엔 다시 또 남은 밥을 먹고 그랬죠. 어쨌든 걸어야 하니까.”

 


“남극에서 용변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말하자면 오픈 토일렛이죠. 대신 환경보호구역에서는 철저하게 대변 봉투를 써야 돼요. 저도 분뇨를 수거해서 도착지에서 반납했죠.”


이번 원정을 위해 특별히 보이스레코더에 자연의 소리와 응원의 메시지를 담아갔는데 어떤 소리가 가장 큰 위로가 됐나요?

 


“원래 자연의 소리가 큰 위안을 주리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지인들의 응원이 더 힘이 됐어요. 누구 한 명을 콕 짚으면 다른 사람들이 삐질 수 있으니, 어떤 내용이었냐고 하면 ‘무리하지 말고 욕심내지 마라’는 거였죠. 가까운 사람일수록 꼭 성공하라고 격려하지 않고, 건강하게 돌아오길 염려해 주더라고요. 물론 성공하라고 말한 사람 자체가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되기도 하고요.”

 


매일 똑같은 하루가 지겹진 않았나요? 또 기억에 남는 하루는?

 


“전혀요. 하루하루가 다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 있어요. 초반, 중반, 후반의 패턴이 다 달라요. 날씨도 다르고, 몸도 매일 상태가 달라지죠. 기억에 남는 하루는 달을 본 날? 원래 백야라 밝아서 안 보여야 하는데 오후 5시에 아주 흐릿하게 구름 사이로 반투명처럼 맑은 초승달이 보였었어요. 신기했죠.”

 


“일기를 보니깐 중간에 다른 탐험가와 마주친 적도 있더라고요. 일화가 있나요?”

 


“아 맞다! 핀란드 탐험가들을 만났는데 보통 인연이 아니었어요. 이름은 미코 베르마스Mikko Vermas랑 테로 티라티Tero Teelahti인데 삼극점하는 분들입니다. 근데 테로가 2009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저를 봤다는 거예요! 그때 저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 루트원정대에 있었는데 제가 당시 원정대에서 유일한 여자라 기억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노스페이스를 입고 있는 걸 알아보더니 ‘박영석 파운데이션 주니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박영석 대장이 재단 꾸려서 후배 양성하는 걸 핀란드 등반가들도 알고 있던 거죠. 외국은 그런 문화가 없어서 각자 스폰서를 구해야 하고, 예산이 부족하니 상업 등반대를 가거든요. 그래서 다들 한국 산악문화를 부러워했어요.

또 테로는 2005년 북극원정에서도 박영석 대장을 만났다고 했어요. 그때가 박 대장님의 첫 북극원정이었거든요. 다만 실패했고, 다음 원정 때 사용하려고 120리터짜리 노스페이스 휠백을 남겨두고 갔었죠. 근데 이걸 테로가 가지고 있더라고요. 박영석대장에 연락해서 ‘이 장비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가지라’고 해서 쓰고 있대요.”

 


“기연이네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남극점에 도달할 때 기분은 어땠나요?”

 

남극점 도착 감상이 없는 이유는?

 


막힘없이 이야기하던 산악인 김영미가 처음으로 주저하며 말을 가다듬는다. 인터뷰 시작 전 “고산등반가들이 ‘저산증’을 겪는 것처럼 문명에 부적응한 상태”라며 “50일 동안 대화 없이 지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마저 지친다. 아직 남극에서 돌아오지 않은 느낌”이라고 얘기했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그건 느낌이 아니라 진짜다. 50kg의 식량과 14kg의 체중을 남극에서 소모했다. 따지자면 사람 한 명분이다. 남극을 꿈꿨던 사회인 김영미를 오롯이 녹여 산악인 김영미로 새로 태어나 돌아온 셈이다. 김영미가 어렵게 말문을 연다.

남극점에 도달한 순간에 감상은 없어요. 단지 내일은 걷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정도죠. 오히려 마지막 날 아침 출발할 때 복잡 미묘한 감정이 올라와서 울컥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라 당황했다. 보통이라면 이 대목에선 환희나 성취감, 인간 승리, 희망 따위의 말들이 나온다. 그래야 시련을 이겨낸 승리자가 된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승리자로서 자신을 뽐낼 권리가 있다. 한국, 아시아 여성 최초를 기록했다. 나는 50일은커녕 단 하루도 그의 운행을 똑같이 따라갈 역량이 없다. 더욱이 살아 돌아올 자신도 없다.

 


그에게 원하는 답을 듣고자 “그럼 남극에는 무엇이 있었나요?”라고 조금 더 캐물어봤다. 한참 고민한 끝에 나온 대답은 이랬다.

 


상상했던 그대로였어요. 하얀 눈과 파란 하늘, 바람, 고독.”

 


생각해 보니 그는 인터뷰 내내 좀처럼 남극의 삶을 감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굳이 찾자면 ‘힘들다’ 정도. 그 ‘힘들다’는 표현도 객관적인 칼로리 소모와 체중 저하, 심박수로 전달했다. 그렇게 철저하게 객관화된 원정만을 전달하려 했다. 김영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실 뭔가 끝났다는 감동이나 감상은 귀국 후 생활하면서 서서히 찾아와요. 그래서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아차 싶었다. 그리고 왜 그가 감정이나 감상을 전하지 않으려 했는지 분명해졌다. 남극엔 그저 감정 없는 파란 하늘, 그리고 그 하늘과 맞닿아 있는 하얀 지평선이 있다. 감상은 그 위에 덧입혀지는 것일 뿐이기에 매순간 변한다. 그래서 그는 섣불리 남극이 어땠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또 하나 김영미가 남극점에 도착한 직후 쓴 일기에도 단서가 있다. 그는 ‘내일이면 과거에 불과하다’고 썼다. 김영미에게 남극점은 산악인으로서의 삶과 꿈 중 거쳐 가는 한 점일 뿐이다. 마지막도, 새로운 시작도 아니다. 그는 늘 걸었다. 2017년 바이칼 종단 원정 이후 지난 6년 동안은 남극점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이젠 남극점을 지나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