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역사', 결론 - 새천년을 열면서
결론 - 새 천년을 열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새 문명을 기대한다.
한국인은 수십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역사의 대장정을 이어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역사에 끝이 어디 있는가 21세기 초의 정거장에서 잠시 쉬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역사는 끝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릴레이 경주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릴레이에서 20세기라는 짧은 한 순간을 뛰면서 앞 주자(走者)로부터 전달받은 바톤을 21 세기 주자에게 넘겨주고 있을 뿐이다.
19세기까지는 어떻게 뛰어 왔는가. 우리는 20세기를 어떻게 뛰었는가. 21 세기 주자는 어떻게 뛰어야 하는가.
크게 보면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주자의 영웅상이 달랐다 태초에는 신화 속의 하느님이 영웅이었다. 그래서 절대자인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에 복종하면서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뛰었다. 고대에는 부처님이 영웅이었다. 부처님은 하늘이 아닌 인간이로되 진리를 깨친 각자(覺者)였다. 그래서 부처가 되려는 꿈을 안고 뛰었다. 그 다음에는 공자(孔子)가 영웅이었다. 공자는 각자(覺者)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보통사람보다 도덕수양을 많이 닦은 군자(君者)였다.
하느님에서, 부처를 거쳐 공자에 이르는 영웅상은 한결같이 도덕성을 대표하는 존재다. 그러나 하느님보다는 부처가 도달하기 쉽고, 부처보다는 공자가 더 보통사람과 가까웠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는 도덕성을 지향하여 살아왔으면서도, 그 영웅상의 눈높이를 단계적으로 낮추어 왔다. 그것이 바로 수직사회가 수평사회로 가는 과정이었다. 도덕성을 바탕으로 민주화를 추구하면서 살아온 셈이다.
20세기는 전혀 다른 영웅이 탄생했다. 모두가 서양 영웅이라는 것이 옛날과 다른 점이다. 아마 예수와 마르크스가 가장 큰 영웅이었을 것이다. 이들도 사랑을 전도했다. 그러나 예수는 개인사랑을 찾아주었고, 마르크스는 계급사랑을 심어주었다. 옛날의 영웅이 공동체사랑을 심어 준 것과 다르다. 공동체사랑은 ‘안정’과 ‘평화’에 기여했으나, 개인사랑과 계급사랑은 공동체간의 갈등과 투쟁을 유발하면서 ‘발전’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했다. 그래서 20세기는 미증유의 ‘발전의 시대’가 되었다 발전의 시대는 ‘도덕’이 정의라기보다는 ‘힘’이 정의였다.
부도덕한 힘의 경쟁은,원래 경쟁적 전통에서 살아온 서양보다도,안정과 평화지향의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한국사회가 더 심했다. 그래서 20세기 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발전이 빠르고 그만큼 도덕성이 무너진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20세기 한국인 자화상의 빛과 그늘이다.
20세기 한국사를 서술하면서 느끼는 것은 경제와 기술의 끊임없는 성장과 정치의 끊임 없는 타락이다. 정치는 그 시대 모든 것의 총화다. 그러므로 정치의 타락은 사회의 타락과 경제 그 자체의 타락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경제성장이나 기술의 성장도 극히 부도덕한 성장이었다는 뜻이다. 이는 인체에 비유하면, 상체와 하체가 고르게 건강하지 못하고 하체만 키우려다가 상체가 병들고 급기야는 하체까지 병들어 중병에 걸린 형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심각한 한국병에 걸려 있다 이를 어떻게 치유하느냐에 21 세기 운명이 걸려 있다 이제 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개인과 계급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모두 한몸이라는 공동체정신이 그립다. 그런 점에서 옛날 영웅이 다시 주목되어야 한다. 옛날 영웅이 만들어낸 공동체정신이 곧 홍익인간이과 홍익인간이 곧 선비정신이다.
21세기는 통일의 시대가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통일이 무엇인가 공동체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남과 북이 한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영웅이 탄생해야 할 것이다. 그 영웅은 예수도, 마르크스도 부처도, 공자도 아니다. 이 모두를 합한 것이어야 한다.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다.
새로운 영웅의 창조는 한국인의 길인 동시에 세계인이 함께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서양도 병들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서양도 가족공동체와 사회공동체와 나라공동체와 세계공동체를 사랑해야 한다.
한국인은 동양문명의 정수를 품고 살아온 민족이다. 그리고 나서 서양문명의 장단점을 뼈저리게 체험한 민족이기도 하다. 여기서 새로운 문명이 탄생할 개연성이 있고, 책임과 사명감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역사의 진행은 인간의 자기최면에 의해서 깊이 좌우된다. 새로운 문명의 창조와 더불어 우리가 걸어야 할 또 하나의 최면은 300년 주기의 중흥의 역사다. 12세기의 고려중기, 15세기의 세종시대,18세기의 영• 정조 시대가 300년 주기의 중흥을 의미한다. 21 세기는 18세기를 뒤이은 또 한 번의 주기다. 이 주기를 문화대국(文化大國)으로 도약하는 전기로 끌어안아야 한다.
새로운 문화영웅은 앞에서 말한 동양과 서양영웅을 합한 제3의 존재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웅을 만드는 길은 중흥의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걸었던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길이고, 선비정신의 길이기도 할 것이다. 옛것도 사랑하고 새것도 사랑하자. 여기서 미래의 희망을 걸자.
2014년 갑오년 제2 전면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