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자는 말
만나자는 말
< 경향신문, 임경선 소설가, 2023.04.13 >
언제부턴가 세상의 많은 인간관계들이 직접 만나지 않고도 소통하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언제 한 번 보자’고 하는 것은 사실상 만나지 말자는 뜻으로 해석된다. 구체적인 날짜를 잡아 만나기로 하면 부담스럽게 여기는 이들도 은근히 많다. 취향에 맞는 약속 장소를 정하고, 예약하고, 옷차림을 갖추고, 교통수단을 이용해, 시간 맞춰 이동해야 하며 그 와중에 누가 돈 낼지도 신경 쓴다.
약속을 정할 때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건만 당일이 가까워져서는 내가 처한 상황이나 마음상태가 달라져 딱히 용건도 없는데 굳이 만나야 될까 싶다. 그러다 약속이 깨지면 내심 기뻐하기도 한다.
대신 우리는 필요하거나 내킬 때 손가락으로 말을 건다. 문자메시지, e메일, SNS 댓글…. 그것들은 대화라기보다 ‘시간격차를 두고 이루어지는 파편화된 소통’에 가깝다.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을 각자가 하고 싶을 때 하는 합리성. 시간, 수고와 돈을 들여 만나지 않아도 소기의 목적은 대체로 달성되고 순간의 적적함은 적당히 휘발된다. 대화를 선별해서 취하니 감정노동도 피한다. 가뜩이나 내 문제만으로도 벅찬데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고민하거나 필요로 하는지 듣고 싶지도 않다. 직접 만나 자칫 상대의 감정쓰레기통 역할을 해주면서 기 빨리는 시간을 보내는 일에 비하면 얼마나 합리적이고 안전한가. 하물며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낸들 아무도 나의 슬픔과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로 꼭 만나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이런 시대에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것은 ‘순수의지’의 문제가 된다. 내 순수의지는 대개 상대에게 바라는 게 없는, 소위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은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나는 그 사람의 소속 대신 오로지 ‘개인’으로서 그 사람이 좋아야 한다. 또한 다 큰 어른들인데 노는 것은 어린아이들처럼 놀 수 있어야 만나고 싶어진다. ‘어린아이처럼 논다’는 특별한 장난감 없어도 언제 어디서든 서로만 있다면 재미있게 잘 논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말로 어른스러운 사람들만이 가능한 마음씀씀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판단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태도, 나 자신과 상대에게 진실할 수 있을 만큼 쌓아온 깊은 사유와 경험, 믿음이 무자비하게 배반당해도 상처받을 용기와 포용력을 가진 어른 말이다. 이런 맑고 정이 두터운 만남은 긴장할 필요가 없으니, 그 부드러운 충만감은 우리가 일상에서 시달리는 불안이나 조급함을 진정시키고 ‘인간다운’ 무언가를 채워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 사람과 만나는 걸 굳이 드러내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