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 _ ‘조선의 백자, 군자(君子)지향’ 전시
1. 개요
오늘 리움미술관의 ‘조선의 백자, 군자(君子)지향’전에 다녀 왔다. 5월 28일까지 무료로 전시되는 이 전시회는 조선백자의 명품 185점이 전시된 사상 최대 규모의 특별전이다. 조선백자 중 국보·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총 59점인데, 그중 절반이 넘는 31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리움미술관 자체 소장품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호림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 간송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부산박물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국립경주박물관 등의 명품들이 총출동하였고, 일본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도쿄국립박물관, 이데미츠미술관, 야마도문화관, 일본민예관, 고려미술관, 거기에다 개인소장의 비장품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이번 전시회를 보고 세가지 놀랐다고 한다. 첫 번째는 박물관을 운영해 본 입장에서 이렇게 많은 유물을 대여하기 위해 지불한 보험료가 도대체 얼마일까 상상도 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방대한 규모의 전시는 모르긴 해도 우리 생애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두 번째 놀라움은 감상자 입장에서, 모든 유물을 독립 진열장에 전시하여 사방에서 전모를 볼 수 있게 디스플레이했다. 도대체 이 전시회 디스플레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예산이 책정되었을까 하는 놀라움과 부러움이었다. 세 번째 놀라움은 이렇게 명품들을 한 자리에 놓고 보니 조선백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순백자, 코발트 무늬의 청화백자, 갈색 무늬의 철화백자, 화사한 붉은 빛 무늬의 동화(銅畫)백자, 거기에 지방 가마의 소탈한 도예품까지 한데 어우러져 차분한 가운데 은은히 풍겨오는 조선 선비문화의 ‘군자지향’을 절감케 한다.
조선백자 500년 역사는 시대마다 독특한 미적 특질을 보여준다. 도자기 아름다움의 세 가지 관점인 빛깔, 기형, 문양이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 전기 백자는 새로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왕실과 사대부의 기상이 들어 있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에서 보이듯 아이보리 백색에 기형이 당당하고 매화 문양에 기품이 있다. 한마디로 귀(貴)티가 역력하다.
조선 중기의 백자는 ‘백자청화 사군자문사각병’에서 보이듯 따뜻한 유백색에 기형은 단아하고 대나무·난초가 소담하게 그려져 있어 조선 선비의 취향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문기(文氣)가 가득하다.
조선 후기의 백자는 ‘백자청화 모란문 병’에서 보이듯 푸르름을 머금은 백색에 기형은 푸짐하고 문양은 화려하다. 한마디로 부(富)티가 넘쳐흐른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백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닌 것이 저 유명한 ‘백자 달항아리’다.
리움박물관이 밝힌 ‘조선의 백자, 군자(君子)지향’展의 기획의도는 다음과 같다.
2. 절제미의 승화, 순백의 조선백자 달항아리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근간으로 왕실의 품위와 선비의 격조가 미술품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문기(文氣)가 흐르는 품위와 격조는 조선 백자의 미적 특성이기도 하다.
조선의 관요에서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동화백자 등 다양한 종류의 백자가 제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백자 큰 항아리[백자대호(白磁大壺)]가 바로 ‘백자달항아리’이다. 17세기 후반에 나타나 18세기 중엽까지 유행한 이 백자는 보름달처럼 크고 둥글게 생겼다 해서, 1950년대에 백자달항아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달항아리를 조선 백자의 정수로 꼽는 이유는 절제와 담박함으로 빚어낸 순백의 빛깔과 둥근 조형미에 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조선 달항아리만의 특징이다. 조선은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였다. ‘예’란 유교 문화 전통에서 인간 도덕성에 근거하는 사회질서의 규범과 행동이자 유교 의례의 구성과 절차였다. 예를 실천하기 위해 선비들이 사욕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절제였습니다. 절제란 사람이 욕망이나 감정 표현 따위가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것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내적인 청결함을 중시하고 담박한 생활을 지향하였으며,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담박함이란 사람의 성품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순박한 것을 뜻한다. 백자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추구하는 절제와 청결, 담박함, 그리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3. 리움 전시에서 내가 본 조선백자 항아리
(1) 백화청화 홍치명 송죽문 호 (1489년, 동국대 박물관, 국보)
(2) 백자청화 보상화당초문 호 (16세기, 개인 소장, 보물)
(3) 백자청화 운룡문 호 (18세기, 개인소장, 보물)
(4) 백화청화 매죽문 호 (15-16세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5) 백자청화철화 삼산뇌문 산뢰 ((15세기, 개인소장, 보물)
(6) 백자청화 신선문 호 (19세기 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7) 백화철화 매죽문 호 (17세기, 개인소장, 보물)
(8) 백자 호 (15-16세기, 서울역사박물관, 보물)
(9) 백자 대호 (17세기말-18세기초, 부산박물관, 보물)
(10) 백자 달항아리 ( 18세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보물)
(11) 백자 달항아리 (18세기, 개인소장, 국보)
(12) 백자 달항아리 (18세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3) 백자청화철화 화조문 호 (18세기전반, 일본민예관 소장)
(14) 백자청화 운룡문 호 (18세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5) 백화청화 전서체자시명 호 (18세기 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6) 백자청화 도석류매문 호 (18세기 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7) 백자청화 모란당초문 (18세기, 개인 소장)
(18) 백자청화 송하호작문 호 (18세기말-19세기초, 국립경주박물관)
(19) 백자철화 진산다병명 병 (18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20) 백자철화 매죽문 병 (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21) 백자 반철채 호 (16세기, 개인소장)
(22) 백자철화 초화문 호 (17세기 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23) 백자철화 매조문 호 (17세기 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24) 백자철화 운룡문 호 (17세기, 개인 소장)
(25) 백자동화 호작문 호 (18세기, 일본문예관 소장)
(26) 백화철화 운룡문 호 (17세기, 개인소장)
(26) 백자청화 송하호작문 (18세기말-19세기초, 경주국립박물관)
(27) 백자 호 (15세기, 호림박물관)
4. 조선백자의 역사
한자로 흰 백(白)에 자기를 일컫는 자(磁)를 쓰는 백자(白磁)는 말 그대로 흰 도자기이다. 하얀 바탕흙으로 빚어 투명한 유약을 바른 뒤 약 1300℃에 달하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백색의 자기이다. 우리나라에서 백자가 처음 제작된 것은 신라 말~고려시대로 알려졌다. 소량이긴 해도 꾸준히 제작된 백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새 나라의 그릇으로 선택되었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분청사기를 주로 사용했지만, 세종·세조 연간을 거치며 나라에서 주도적으로 백자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형태·품질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감독해 제작하기 위해 왕실용 도자기 전담 제작 공장이라 할 수 있는 관요를 설치하고 왕의 백자가 생산되자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백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백자는 청자보다 기술적으로 한층 진보된 자기이다. 백자를 만들 때 핵심 재료는 하얀 바탕흙, 즉 백토(白土)이다. 관요에서는 전국 산지에서 백토를 가져다 질 좋은 것을 선별해서 사용했다. 이와 더불어 중요한 건 의외로 땔나무이다. 백자를 구워내기 위해 가마 안을 1300℃라는 고온으로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로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왕이 사용할 그릇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서는 수로를 이용해야 하여 한양과 가깝고, 강을 끼고 있어 뱃길을 이용하기 쉬우며, 우수한 백토가 나고, 숲이 울창했던 경기도 광주가 선정된 것이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20년대 광주에 있던 도자소는 뛰어난 제작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관요는 ‘사기소’ ‘사옹원 사기소’로 불리다 17세기부터 사옹원의 지점이란 의미로 ‘분원(分院)’이라고 불렸으며 이 명칭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옹원(司饔院)은 왕을 비롯한 궁중의 음식과 그에 필요한 그릇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주변 나무를 다 베어다 쓰면 다시 숲이 우거진 곳을 찾아 이동했던 분원은 18세기 중반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고 땔나무를 운반해서 쓰게 되었다.
1460년대 후반 국가 주도로 가마를 설치·운영하며 분원에서 본격적으로 왕실과 관청에서 쓰는 백자가 만들어지자, 시간을 두고 점차 각 지방에서도 분청사기 대신 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백자들은 중앙의 관요에서 사용하는 질 좋은 백토에 비하면 거친 바탕흙을 사용해 만들었다. 처음엔 광주 관요의 백자를 기본으로 삼아 만들어지다가 점차 변해 형식을 벗어나는데, 흙의 성분이나 만든 이의 솜씨에 따라 형태나 그림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백자는 그 위에 어떤 안료로 그림을 그렸느냐에 따라 순백자·상감백자·청화백자·철화백자·동화백자 등으로 분류한다. 그림 없이 순수한 흰빛의 순백자, 상감청자처럼 상감기법을 활용한 상감백자,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철(산화철) 안료를 사용해 다갈색·흑갈색으로 그린 철화백자, 진사 빛깔 산화동을 써서 붉게 그려진 동화백자 등이다. 또 유약의 성분이나 가마 안의 조건 등에 따라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기에 자기가 띤 백색을 보고 순백자·청백자·유백자·회백자로도 나누기도 한다. 푸른 기를 머금은 하얀 빛인 청백자, 우윳빛깔 유백자, 회색을 띠는 회백자 등이 유명하다.
안정적으로 발전하던 조선이 임진왜란(1592~1598)·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1637) 등 연이은 전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백자 역시 특징인 흰색을 잃기도 하고 값비싼 안료를 쓰는 청화백자를 생산할 수 없어져 철화백자가 유행하기도 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는 다시 사회적으로 도약하며 백자도 특유의 흰색을 회복하고, 제작기술이 발달하여 동을 안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청나라 영향을 받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자기도 나타나게 된다. 17세기 중후반~18세기에는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큰 항아리, 백자 대호도 출현하게 되었다. 이후 19세기에는 청나라뿐 아니라 일본 자기들도 활발하게 유입되어, 특히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일본 등 외국 자기가 왕실용으로도 사용되는 등 조선백자가 설 자리가 점차 줄어게 되었다. 이후 왕실용 그릇을 만들던 분원 역시 민영화되고, 장인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