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세계는 지금

[시진핑 탐구] 은인자중 리더십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3. 5. 2. 11:28

1.

[시진핑 탐구] 은인자중 리더십

 

모친도 “시진핑 때려잡자”…문혁이 그를 바꿨다

 

 

 

<  중앙일보, 유상철 기자 ,  2023.05.02  >

 

 


세상은 이제 중국을 중심으로 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상대할 것인가. 오늘의 중국을 보려면 ‘유일한 존엄(定于一尊)’이 된 시진핑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가 자기의 역사적 위치를 어떻게 판단하고 중국과 세계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다고 보는지 그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 한데 중국 지도자들의 속내 읽기가 어디 그리 쉽나. “장쩌민(江澤民)의 익살은 자신의 진짜 능력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로 비치고, 후진타오(胡錦濤)의 침묵은 그와 마주한 상대에게 채워야 할 빈 시간일 뿐이었다.” 영국의 중국 전문가 케리 브라운의 말이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꼭 제도와 규칙이 이끄는 나라는 아니게 됐다. 그는 “중국의 선조들은 2500년 전에 이미 ‘백성에게 이로우면 굳이 옛 법을 따를 필요가 없고 일하기에 좋다면 굳이 습속을 따를 필요가 없다(苟利於民 不必法古 苟周於事 不必循俗)’고 말했다”고 강조한다. 자연히 지도자인 시진핑 개인의 요소가 그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시진핑의 지인들 말에 따르면 그는 여러 사람과 다 잘 어울리지만, 결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섯 명이 60도 배갈 10병을 마셨는데 마지막까지 제멋대로 허튼소리를 하지 않은 건 시진핑 하나였다. 시진핑은 친구를 만날 때도 이상하게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한다. 그는 왜 이리 조신한 걸까.

 


감옥서 탈출했지만…모친이 신고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부총리가 된 1959년 가족 사진. 맨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시진핑, 누나 치챠오챠오, 아버지 시중쉰, 어머니 치신, 누나 치안안, 동생 위안핑. 누나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시진핑이 13세 되던 1966년 12월의 일이다. 시진핑은 40여 년 후 자신이 교장이 되는 중앙당교(中央黨校)와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대륙을 광풍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그해 어린 시진핑은 문혁을 가볍게 평하는 말실수를 한다. 대가는 참혹했다. 바로 ‘현행 반(反)혁명분자’로 몰려 중앙당교에 갇힌 것이다. 당시 중앙당교는 6명의 ‘주자파(走資派)’를 상대로 비판대회를 개최했다.

비판 대상에 오른 5명은 성인이었고 시진핑 혼자 미성년 아동이었다. “때려잡자 시진핑” “때려잡자 시진핑”. 시진핑을 향해 무수히 울려 퍼지는 군중의 외침 속에는 어머니 치신(齊心)의 목소리 또한 묻어 있었다. 강제 동원된 것이다. 단하의 어머니가 단상의 아들을 때려잡자고 소리쳐야 하는 현실의 고통을 아마도 겪어보지 않은 이는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비판대회가 끝난 뒤에도 지척의 모자는 자리를 같이할 수 없었다. 중앙당교에 갇혀 지내던 어느 날 밤에 비가 억수로 내렸다. 시진핑은 간수의 부주의를 틈타 집으로 도망쳤다. 깜짝 놀란 치신이 “어떻게 왔냐”고 묻자 비에 젖은 시진핑은 오들오들 떨며 “엄마 배고파”를 연발했다. 그는 엄마가 먹을 걸 해주고 옷도 따뜻한 것으로 갈아입혀 줄 거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치신은 시진핑을 등진 채 비를 무릅쓰고 상사에게 신고하러 갔다. 가족도 반혁명으로 몰려 자칫 목숨을 잃을 걸 우려한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나 천민의 나락으로

더는 의지할 곳이 없어진 시진핑은 누나 안안(安安)과 동생 위안핑(遠平)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빗속의 밤길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이런 공포스러운 숙청을 경험한 이가 이후 어떻게 가벼이 입을 열 수 있겠나. 시진핑에 대한 탐구는 이처럼 그의 성장 과정에서 양성된 개인적인 특질과 분리해 이뤄질 수 없다. 금수저로 태어나 천민(賤民)의 나락으로까지 떨어졌던 삶이 그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야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이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최근 반중(反中)이 마치 시대정신이라도 된 듯하다. 지난해 여론조사에서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는 80%에 달하고 시진핑 주석 개인에 대한 비호감도는 이보다도 더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중국은 우리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웃이다. 중국을 상대로 싫다고 외면만 하는 건 우리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다. 이젠 반중이 아니라 지중(知中)을 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일생이 이상주의 혁명이었다면 덩샤오핑의 평생은 실용주의 혁명이었다고 한다. 시진핑은? 둘 다 끌어안으려 한다는 분석이 많다. 우리로선 그런 시진핑의 중국을 등지려고만 할 게 아니라 하나라도 더 알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진핑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앞으로 중국과 겨뤄야 할 수많은 대국(對局)에서 우리가 둘 수 있는 수가 더 많아지지 않겠나. 그런 취지에서 감히 시진핑 탐구에 도전한다.

 

 

 

2.

영국 유학 가자는 전부인과 이혼…시진핑의 지독한 ‘反 서방’

 

< 중앙일보, 유상철, 2023.05.10 >

 


제1부: 시진핑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나

제2장: 시진핑 DNA 2, 반(反)서방과 전통의 수성(守城)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집권 1기 때의 일이다. 하루는 베이징의 유명 대학으로 시진핑이 시찰에 나섰다. 여러 교수와 이야기도 나눴다. 무슨 말을 했나. 한 경제학 교수가 한국 지인에게 귀띔해 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중국 경제를 케인스주의 등 뭐 이런 서방 이론이 아니라 중국 전통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발전 방향을 제시할 수는 없겠나.” 이런 주문을 중국의 유명 경제학자들에게 한 것이다. 문제 해결 방법을 서방이 아닌 중국 자신의 전통에서 찾으려는 시진핑의 사고를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인류가 겪어 보지 못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을 덮쳤을 때도 그렇다. 세계 각국이 백신 개발에 힘을 쏟고 있을 때 시진핑이 코로나 치료와 관련해 은근히 기대한 게 있었다. 중의(中醫)의 활약이다. 여기서 뜬 게 유명 한의사이자 톈진(天津)중의약대학의 명예교장인 장보리(張伯禮)다. 그는 시진핑의 뜨거운 관심 속에 우한(武漢)으로 달려가 한방(漢方)을 이용해 나름 공을 세운다. 그러자 중국은 이를 ‘코로나 치료의 중국 방안(方案)을 제시한 것’이라며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장보리는 ‘인민영웅(人民英雄)’의 칭호를 받았다.


서방과는 무언가 거리감을 느끼는 시진핑의 개인적 특질은 그의 성장 과정 및 가풍(家風)과 무관하지 않다. 시진핑은 어려서부터 중국 전통문화의 침윤(浸潤)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당 선전부장 겸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이어서 자주 중국 문화계와 예술계 유명 인사를 엿볼 수 있었다. 또 주말이나 명절엔 중난하이(中南海)에서 펼쳐지는 창극(唱劇)과 서유기(西遊記) 등 다양한 중국 전통 공연을 즐길 수도 있었다.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시중쉰은 자녀들이 기숙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담벼락에 쪼르르 세워 놓곤 ‘아빠가 어떻게 혁명에 참여하게 됐고 너희들도 자라서 반드시 혁명을 해야 하며 혁명은 어떤 것’이라는 훈화를 하고 또 했다. 서방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중국 공산당이 구망(求亡)의 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듣는 과정에서 스스로 감화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또 네 살 많은 보시라이(薄熙來)가 영국제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시진핑은 누나의 꽃신을 검정 먹물로 칠해 신었다. 아무래도 외제, 서방과는 먼 유년의 삶이었다.

 


서방에 대한 껄끄러운 기억은 시진핑의 아픈 첫 결혼 실패와도 연결된다. 그의 첫 결혼 이야기는 공식적인 문건엔 등장하지 않는다. 대략 1979년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겅뱌오(耿飇) 중앙군사위 비서장의 비서로 근무할 때 결혼해 1982년 정도에 이혼한 것으로 보인다. 첫 결혼 상대는 주영대사 커화(柯華)의 딸 커링링(柯玲玲)이다. 시중쉰과 커화 집안은 아주 잘 아는 사이다. 커화의 원래 이름은 린더창(林德常)으로 옌징(燕京)대에서 공부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공산당 팔로군(八路軍)에 입대했다.

 


당시 상사인 루딩이(陸定一, 陸昊 현 국무원발전연구중심 주임의 할아버지)가 그의 안전을 고려해 이름을 바꿀 것을 권하자 이름의 반만 바꿔도 되냐고 물었다. 루딩이가 “커이(可以, 가능하다)”라고 답하자 성인 린(林)에서 나무 목(木)자 하나를 떼어내고 옳을 가(可)자를 붙여 성을 커(柯)라고 바꿨다. 훗날 공산당 서북군정위에서 시중쉰의 부하로 일하는 등 시중쉰 집안과는 막역한 관계다. 시중쉰이 그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추천해 외교부에 들어갔고 시진핑이 커링링과 결혼할 때엔 주영대사로 나가 있었다.

 


커링링은 시진핑보다 두 살 정도 많았고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로 알려진다. 키가 크고 예뻤으며 성격은 솔직한 편이었다. 커링링은 간부 자제가 많고 소련식 교육으로 유명한 베이징 101중학을 나왔다. 베이징 시청(西城)구에 살았던 젊은 커플은 처음엔 감정이 괜찮았다고 한다. 한데 영국 유학 문제를 놓고 사이가 틀어져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했다. 커링링이 영어를 잘했고 아버지가 영국에 대사로 나가 있는 기회를 이용해 영국에서의 유학을 희망했던 것이다.

 


커링링은 시진핑과 함께 영국으로 가 2~3년 유학한 뒤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거나 아니면 귀국해 발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타협에 실패해 커링링 혼자 영국으로 떠나며 결혼은 깨졌다. 시진핑이 1982년 허베이성 정딩(正定)현의 기층(基層)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 데는 이혼의 쓰린 상처도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진핑은 홀로 된 아픔을 안고 베이징을 떠나기 전 청대의 화가이자 시인인 정판교(鄭板橋)의 시 ‘죽석(竹石)’을 빌려 자신의 의지를 다진다.

대나무의 곧은 절개를 노래한 청나라 시인 정판교의 ‘죽석(竹石)’ 시화도.  



정판교는 권력을 뜬구름같이 여기며 고고하게 살아간 여덟 명의 괴짜 예술가인 양주팔괴(揚州八怪) 중 하나로 ‘죽석’에서 

 

‘청산을 꽉 물고 놓지 않으니(咬定靑山不放松) 

깨진 바위틈에 뿌리내렸네(立根原在破岩中) 

천 번을 깎이고 만 번을 부딪쳐도 더 단단해지니(千磨萬擊還堅勁) 

그 어떤 바람 불어도 상관이 없구나(任爾東西南北風)’

 

라고 노래했다. 모진 풍파와 시련을 딛고 꿋꿋이 자라는 대나무의 굳세고 강한 기개를 상찬했다.

 


시진핑은 여기서 몇 글자를 바꿨다. ‘기층에 깊이 들어가 꽉 놓지 않으니(深入基層不放松) 군중 속에 뿌리 내렸네(立根原在群衆中) 천 번을 깎이고 만 번을 부딪쳐도 더 단단해지니(千磨萬擊還堅勁) 그 어떤 바람 불어도 상관이 없구나(任爾東西南北風).’ 그는 서방 유학 대신 대륙의 황토 고원을 택했다. 혹자는 시진핑이 문혁으로 제대로 배운 게 없다고 꼬집는다. 홍이대(紅二代) 출신인 장리판(章立凡)도 시진핑이 많이 읽은 건 무협지라는 말을 들었다며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시진핑 일대기를 쓴 양중메이(楊中美)는 시진핑이 독서는 비교적 많이 한 것 같다고 말한다. 미 하버드대에 유학 중인 시진핑의 딸 취재에 나선 것으로 유명한 일본 언론인 미네무라 겐지(峯村健司)도 중국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시진핑이 젊은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해 중국 전통사상에 관한 책은 대부분 읽었다고 했다. 특히 하방(下放)당했을 때 순자(荀子)의 전집 스무 권을 독파해 상당 부분을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시진핑의 팔일(八一)학교 때 어문 선생님이었던 천추잉(陳秋影)은 2015년 시진핑은 “두보(杜甫)와 축구를 좋아했고 어문 성적은 좋았지만, 그렇다고 시인이나 작가가 될 재목은 아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2014년 시진핑을 격분시킨 사건이 있었다. 그해 여름 상하이의 한 소학교가 어문 교재에서 ‘등관작루(登鸛雀樓)’와 ‘강설(江雪)’ 등 8편의 옛 시사(詩詞) 작품을 빼 물의를 빚은 것이다. 시진핑은 “교과서에서 고대 경전의 시가와 산문을 빼는 건 중국적인 걸 제거하는 비애(悲哀)로 난 정말 찬성하지 않는다”며 격한 감정을 토해냈다.

 


시진핑이 중국의 권력 1인자가 되고 나서 약 한 달 뒤인 2012년 12월 26일 마오쩌둥(毛澤東) 탄생 119주년 기념일 자리에서의 일이다. 시진핑은 어느 선배가 자신에게 일러준 말이라며 당 간부는 세 가지를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5000년 우수 문화를 잃어버려선 안 된다. 선배가 확립한 정치제도를 망쳐선 안 된다. 조상이 물려준 땅을 절대로 작게 해선 안 된다.” 시진핑의 마음속엔 사회주의보다 중국 전통이 더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2013년엔 중국 최고 지도자로선 21년 만에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曲阜)를 방문해 “유구한 전통문화를 가진 중화민족은 반드시 휘황찬란한 새로운 중화문화를 창조해 낼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듬해인 2014년 9월 공자 탄신 2565주년을 맞아선 중국 공산당원은 “중국의 우수한 전통문화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역사는 거대한 체와 같아서 과거의 물건을 체로 걸러내 가치가 있는 것만 남긴다고 시진핑은 보는 것이다.

 


시진핑은 특히 서방 주요 국가 지도자를 만날 때 의도적인 설정으로 중국의 전통을 강조하며 외교적 이득을 챙긴다. 2014년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방중 시 그를 중난하이의 잉타이(瀛台)로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함께 거닐며 청말 광서제(光緖帝)의 운명을 이야기했다. 시진핑은 오바마에게 중국 역사 공부를 당부하기도 했다. “중국의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면 중국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며 “중국의 치국(治國) 방침엔 전통의 유전자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국을 찾았을 때는 베이징의 고궁(故宮)으로 초청해 경극(京劇)을 함께 감상했다. 지난 4월 초 애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방중 시에도 중국의 전통문화를 함께 나누는 작전으로 마크롱을 공략했고, 꽤 큰 효과를 얻었다. 시진핑은 마크롱과의 사적인 우의 강조를 위해 그를 광둥성 광저우의 쑹위안(松園)빈관으로 초청했다.

 


쑹위안빈관은 중국 영남원림(嶺南園林)의 특색을 가장 잘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오직 마크롱만을 위해 중국의 옛 거문고로 2000여 년 전의 곡이라는 ‘유수(流水)’를 연주하게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 다소 짚이는 게 있다. 이 곡은 춘추전국시대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우정에 맥이 닿아 있다. 백아가 높은 산과 그곳에 흐르는 물(高山流水)을 생각해 거문고를 타면 그 뜻을 종자기만은 정확하게 맞혔다.


훗날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더는 자신의 연주를 알아줄 지음(知音)이 사라진 걸 슬퍼하며 거문고 줄을 끊었다고 해 백아절현(伯牙絶絃)의 성어를 낳지 않았나. 중국과 프랑스, 시진핑과 마크롱 둘만의 각별한 우정을 강조했을 것이다. 시진핑의 작전은 주효한 듯하다. 이후 마크롱은 “유럽이 미국의 추종자가 돼선 안 된다”는 등 미국에 각을 세우는 대신 중국엔 유화적인 발언을 잇따라 쏟아내 빈축을 샀다.

 


시진핑은 중국의 길(道路)은 오로지 중화 문화의 기초 위에 건설돼야 한다고 말한다. 시진핑 뼛속에 각인된 또 하나의 DNA는 바로 반(反)서방과 중국 전통의 수성(守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