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보수에서 새 진보의 실마리 찾기
진정한 보수에서 새 진보의 실마리 찾기(1)
< 경향신문,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3.04.18 >
미래 새 정치의 길을 러셀 커크 ‘보수의 정신’서 추리려는 이유는 두 가지다
보수의 진짜 속내서 거짓 보수를 제압할 근거를 찾는 게 효과적일 것이란 생각과
새로운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공통성서 온다는 자각 때문
균형과 조화는 적대를 양산하고 증폭시키는 차이가 아닌
서로 다른 것들이 갖는 같음의 발견에서 온다
“빈곤이 아니라 확신과 소속감이 대중을 이끌어 전체주의 정당을 지지하게 만든다. (중략) 하루 세 끼의 식사가 존재하든 안 하든 간에 심지어 단순히 직업이 있든 없든 간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이유는 준거의 틀이다. (중략) 개인이 직접 속한 사회가 소원하거나 목적이 없거나 적대적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차별과 배제의 희생자라고 느낀다면, 세상의 모든 음식과 직업이 있다 해도 그들을 막지 못한다.”(러셀 커크, 이재학 역, <보수의 정신>, 2018, 지식노마드, 769쪽 중에서)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인류문명과 그것을 이루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총체적 실천인 정치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은 중요하다. 부서지면 다시 세우고, 세우고 나서는 끊임없이 매만지며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안팎에서의 붕괴와 파괴의 위협에 맞설 수 있다. 또 ‘오래된 미래’를 찬찬히 살펴 영감을 얻고 새로운 방도를 찾아내 존중받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며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공동체적 질서를 벼리거나 존속시킬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현실을 바라보는 상당수 사람들의 마음은 철지난 봄꽃 모가지처럼 부러지고 무너져 땅바닥에 처박힌 것 같다.
올봄 평소 인연이 깊은 정치 활동가와 사회운동가 몇몇이 부러 시간을 잡아 학교로 찾아왔다. 지금 당장의 정세, 특히 여야를 비롯한 현실 정치세력들 간에 벌어지는 쟁투와 공방에 대해 논하자고 할까봐 부담스러웠다. 마침 50대 중반에 다가가는 데다 정치현실에 대해 판단을 중지한 채 지냈고, 당분간 그런 태도를 견지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걸음을 멈추고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격언을 내세웠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그저 지금의 정치와 (심지어 정치학하고도) ‘헤어질 결심’을 세우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작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현 정권이 등장한 이후의 정치 상황을 접하며 특히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찾아온 그들 ‘모두’ 그랬다. 정세를 논하거나 현실 정치세력에 대한 논평을 펼치거나 들으려고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들도 현실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음을 물론이고,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 당장 뭔가 해야 한다는 투지를 ‘버린’ 상태였다.
꺾인 마음만 늘어놓고자 했으면, 이 소중한 지면에서 그들 이야기를 굳이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지금 너머’의 정치에 대해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작금의 정치 현실을 넘어서서 미래의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기 위한 상상력과 그것의 유·무형적 기반을 마련해 꺾이지 않을 마음의 힘을 회복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들을 만났던 당시에는 주로 듣느라 미처 피력하지 못했으나, 미래 정치 구상의 출발을 위한 ‘작은 조각(앨버트 허시먼의 말을 빌리면, 프티 이데petit idee - 작은 생각)’을 러셀 커크(1918~1994)가 <보수의 정신>(Conservative Mind 1953)에서 들려준 ‘준거의 틀’이라는 문제에 우선 초점을 맞춰 시작해보고자 한다.
커크 ‘준거의 틀’서 새 정치 퍼즐
나는 서두에서 문장 하나를 인용했다. 미국의 저명한 사상가로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삶의 대부분을 대학 제도 밖의 ‘독립지식인’으로 살았던 러셀 커크가 쓴 <보수의 정신>의 한 대목이다. 러셀 커크는 미국의 유력 ‘보수주의 사상가’였다. 오해하면 안 되는데, 주말이면 광화문광장에 태극기를 들고나와 누군가를 ‘좌익빨갱이’라고 주장하며 궤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유의 ‘가짜’ 보수주의자(사실은 자기 삶의 준거 - 반공개발독재 시대라는 ‘시간의 고향’ - 를 잃어 상처받은 영혼과 극우세력의 반지성주의적 행태에 포획된 자)가 아니다. 러셀 커크는 근현대 문명을 본격 꽃피운 18세기 이후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200여년의 시간에 걸쳐 수행한 보수주의자들의 고뇌 어린 사색과 논의를 통찰함으로써,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 혹은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얻어가며) 가정과 지역공동체와 같은 사회의 뿌리와 전통을 파괴한 근대 정치·경제 혁명의 부조리와 병폐를 치유하고 극복할 원리를 찾고자 한다.
러셀 커크는 우리가 절실하게 존재의 지속성과 방향 감각을 갈구하지만 거부당했다면서, 그 이유를 가정의 쇠락, 옛 직능 단체의 말살, 중앙 집중화된 국가에 따른 지역정신의 후퇴, 버려진 종교적 믿음이라는 조건들에서 찾았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와 같은 전통 사회의 혁명적 파괴 - 대량산업주의 - 에 따른 가장 두드러진 결과를 ‘고독한 군중의 창조’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 군중은 진정한 공동체가 없는 개인의 거대 집단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종종 자기만이 자신의 관심사라고 확신한다. 이들은 옛날 형식의 경제적 방법론, 가정의 권위, 작은 정치 공동체에 가해진 공격 때문에 개인으로 해방되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때 얻은 자유는 공포와 다름없는 것으로 버림받은 아이의 자유에 불과하다. 러셀 커크는 이런 ‘부정적 자유’로 인해 혼란스럽고 분노에 찬 군중은 그 반동으로 그들의 고독을 위로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광신주의에, 공산주의나 파시스트에, 기성체제에 맞서는 광신적 저항에, 그리고 미망으로 가득한 전체주의 국가에 몰려간다고 말한다.
21세기의 5분의 1 지점을 경과하고 있는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정당과 의회와 같은 근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형해화와 극우 포퓰리즘 발흥의 와중에 최근 들어 맞이한 팬덤 정치의 현실이 그렇다. 사람들을 ‘초연결대중사회’라는 미명하에 홀로된 자기에 집착하고 외양(심지어 푸틴 러시아 대통령처럼 몸뚱어리)의 근사함을 미디어망을 통해 과시하며 그저 타인의 선정적 관심을 끌어 ‘돈과 영향력’을 얻는 데 몰두하게 만들고, 결국은 그런 풍조에서 기성의 정치경제적 지배세력이 이득을 얻는 데 속수무책인 현실도 떠오른다.
그의 처방은 자발적 조직 재건·공급
이런 현실에 대한 러셀 커크의 처방은 결코 새롭지 않다. 지역정부, 장인조합, 교회 등과 같이 인간과 인간을 묶어주고 공동체 감각을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던 자발적 조직들을 재건·공급하는 것이다. 바로 이 자발적 조직들이 사람들을 혼란과 공포와 분노와 광기에서 끄집어내줄 준거의 틀이다. 그런데 우리가 새로이 귀 기울일 부분은 그와 같은 처방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처방책으로 제시하는 이유이다. 인간의 가장 구석진 부분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함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가장 구석진 부분의 문제들은 자발적 조직과 같은 공(public)과 사(private) 사이의 중간자적 존재인 사회적 결합체(코먼스 commons)에서의 관계 맺음과 그 감각을 통해서 - 이해와 오해의 여부를 떠나 - 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 삶의 구석구석은 공과 사가 찌그러지고 부서진 채로 겹치고 섞여 각각의 형체를 구분하기 어려운 일들로 채워져 있고, 실제로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공과 사로 나누어 쉽게 잘라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삶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런 곳도 아니다. 뭐라 딱히 형언할 수 없기도 한 희로애락으로 가득 차 있는 생과 사의 근저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건대, 러셀 커크의 생각은 새롭지 않다. 자발적 조직과 같은 코먼스와 자치의 중요성은 물론 인간 삶의 구석에 대한 천착은 보수가 아닌 진보라고 불리는 텍스트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도 미래의 새로운 정치의 길을 그의 보수의 정신에서 추리려는 이유가 있다. 두 가지다. 하나는 보수의 진짜 속내에서 거짓 보수를 제압할 근거를 찾는 게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차별성 혹은 그중 하나의 우월성에 대한 추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통성’에서 온다는 자각 때문이다. 균형과 조화는 적대를 양산하고 증폭시키는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갖는 같음의 발견’에서 온다. 지금은 그 여정을 시작할 때다.
진정한 보수에서 새 진보의 실마리 찾기(2)
< 경향신문,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3.05.23 >
현 집권세력과 민주당에 ‘하나의 국민’ 같은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우리는 오지 않은 고도를 또다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공리주의의 건조한 핵심을 고매한 훈계의 불꽃으로 태워버릴 디즈레일리 같은 정치가를 고대한다
‘김남국 코인 사태’는 정치인도 물질주의와 사익추구의 강화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전수 조사하자는 주장에 정치권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면 그 확신은 타당한 것일 수 있다.
정치인도 물질주의와 사익추구의 강화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문장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가정을 담고 있다. 즉, 정치인은 물질주의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해갈등 조정의 힘인 권위를 얻을 수 있고, 그 기반인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어느 원시 부족의 늙은 족장에게 젊고 힘센 전사들도 복종하는 이유가 바로 신뢰에 기반한 권위, 즉 ‘진정한 리더십’ 때문이라고 하고, 그것이 ‘무소유’에서 나온다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어떤 현상을 두고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은 작금의 사태를 특정 개별 정치인의 문제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관점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김남국 코인 사태는 ‘세태’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적 공적 자리를 통해 여러 번 보고 들은 경험이 있다. 지금의 세계에서는 정치인이 부를 좇는 걸 이상하게 볼 게 아니며, 오히려 금융자산 축적과 증대에 밝아야 하고 그게 더 진보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그 주변의 전문가들을. 나는 그런 주장을 탐욕을 정당화하는 궤변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의 자산 축적과 증대가 민생 개선과 같은 공익 증진에 효과를 내는 것을 본 바도 들은 바도 없기 때문이다. 또 학력과 부동산 등의 자산을 보유하지 못한 채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서민층의 경우에는 여전히 금융 자산 축적과 증대의 기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인구(2923만명, 통계청 2023년 4월 기준) 중 거의 절반(1440만명, 한국예탁결제원 2022년 기준)과 올해 3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밝힌 바처럼 성인 인구 16% 정도(약 640만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식과 가상자산에 투자를 한다. 하지만 가상자산의 경우 싱가포르 기반 업체인 트리플에이(Triple-A)의 통계분석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투자자 82%가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32% 이상이 월 급여 10만달러 이상을 받는다. 보유 주식 수는 서울 강남 거주 50대 남자(11억4000만주), 40대 남자(8억3000만주), 경기 성남시 거주 40대 남자(3억7000만주) 순으로 많다. 즉 학력, 소득, 지역 등을 볼 때 주식 및 가상자산 투자는 기본적으로 ‘자산 보유자들의 게임’이다. 보유 자산에는 투자시장 안팎에 걸친 정보 및 인적 네트워크도 포함되어 있다. 직접 투자자 10명 중 7명이 최근 2년간 손실을 보고(한국리서치 2022년 6월 기준), 투자자의 40~50%를 차지한다는 ‘영끌 MZ세대’가 가장 많이 손해를 본 계층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도 야도 ‘고매한 상상력’ 결여
자산 증식의 기회 보유 여부와 투자 손실의 유무와 정도를 개인의 능력 혹은 운의 문제로 몰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인이라면 그리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전체 사회의 질서와 그것을 추구하고 지탱하는 가치와 원칙을 문제 삼는 실천이다. 정치가 그리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실천을 가리켜 정치라고 하는 것이다.
정치인도 투자자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개인이라 부르며, 시장에 나가 보통 사람과 경쟁한다면 정치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자신이 투자경쟁에 직접 나서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문제가 남는다. 아니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사회 전체에 걸쳐 만연하고 있는, 이제는 정치인과 공직자마저 지배하는 물질주의와 사익추구 강화 경향을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수의 특권층만 구현할 수 있는 탐욕과 그것을 개인의 문제임을 내세워 정당화하는 궤변이 다시금 새어 나온다.
작금의 상황에서 정치를 논하고 행하려면 물질주의와 사익추구 경향이 갖는 해악의 이유에 대해 살펴야 한다. 그래야 소수가 유리하고 다수가 손해를 보는데도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게임과 규칙을 제어할 필요성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난 그 해악의 이유를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이 선보인 ‘자유주의 비판론’에서 찾고자 한다. 특히 영국 보수당의 아버지로 불리며 총리를 지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관점에 기대고자 한다. 한국에서 보수는 물론, 진보임을 자처하는 자들마저 실상은 커크와 그가 불러낸 디즈레일리가 비판하는 ‘자유주의의 그물망’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와 사익추구의 경향 강화를 정당화하는 그물망에. 커크에 따르면 이 그물망에는 이름이 있는데, ‘고매한 상상력의 결여’가 바로 그것이다.
커크가 주목한 디즈레일리는 흥미롭게도 동시대 영국에서 살았던 카를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치로 내건 벤담의 공리주의에 기댄 자유주의를 ‘낡은 질서의 몸체에 붙어사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 스스로가 부인하는 귀족적 충성 같은 전통적 정치질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기득권층의 지배에 대한 수용을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자유주의는 마르크스의 평등과 같은 미래 목적의 구현이나, 디즈레일리의 사회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권리와 의무의 위계질서의 복원 같은 가치와 질서에 대한 상상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자유주의는 -자기 자신에 다름 아닌- 기득권층의 지배로 귀결될 개인주의와 물질적 성공만이 최고라는 철학적 분위기에 머물게 된다.
‘상상력의 힘’ 있는 정치 기대한다
커크는 디즈레일리가 탐욕스러운 산업주의와 사회를 파고드는 벤담주의 철학이 없애버린 것들을 인류에게 되돌려 주려 했다면서, 그 도구로 내세운 것이 ‘상상력의 힘’이었다고 말한다. 그 상상력의 힘을 발휘해 추진한 것이 바로 ‘국민공동체(하나의 국민·One nation)’다. 디즈레일리는 마르크스처럼 계급이론을 제시했으나, 계급 간의 진정한 이해는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고 선언하고 계급 간 이해는 국가의 복지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묶인다고 했다. 그의 정치적 목적은 계급 간의 조화로 가난하고 부유한 두 개의 영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각 계급에 승인되고 균형 잡힌 고유의 특권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의 모든 중요한 이해 집단은 국가의 모든 일에 자신들의 견해를 반영할 수 있다고 했다. 자유는 바로 그런 계급 간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엄존하는 계급 차별을 ‘원자화된 개인 간의 평등’을 내세워 무시하고 은폐하면서 국민공동체라는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혐오하는 자유주의와도, 질서의 근간인 계급의 철폐를 외치는 사회주의와도 다른 길을 바라봤던 것이다.
커크는 디즈레일리가 진정한 평민들, 즉 선거권이 없고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하층 계급들을 불행에서 구해 문명공동체로서의 국가공동체를 건설해냈다고 평가한다. 공리주의적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하층계급들이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사회의 지도자들은 일반 대중들과 공통의 이해를 지녔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확신시켰다는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노동계급이 땅이나 자본 등 지킬 게 없기 때문에 보수당을 찍지 않을 거라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런 주장은 세상에 고귀한 것은 땅과 자본밖에 없다는 시각을 담은 것에 불과하며, 노동자들에게는 자유, 정의, 신체와 가정의 안전, 법의 평등한 집행, 자유로운 노동도 있다고.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은 보호할 만한 가치라고.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자유를 최고 가치로 내세우면서도 노동배제라는 개발독재 시절의 전통에 기대고 있는 현 집권세력, 진보로 불리면서도 금융자산 증식에 몰두하며 물질주의의 추종과 사익추구 시비에 연이어 휘말리는 제1야당. 그들에게 하나의 국민과 같은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결국 오지 않은) 고도를 (또다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커크의 표현처럼 공리주의의 건조한 핵심을 고매하고 아름다운 훈계의 불꽃으로 태워버릴 디즈레일리 같은 정치가를 말이다. 디즈레일리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상상력에 호소할 때 인간은 가장 매혹적”임을 아는 정치가 말이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 및 실천교육센터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세계와 시민’ ‘정치의 인문학적 탐색’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노회찬정치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정당> <헬조선 3년상> 등의 저서와 ‘노동존중 정치와 노회찬의 6411정신’ ‘한국 불평등 민주주의의 정치사적 기원’ 등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