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걷기/3. 강화나들길

서해랑길 강화 100코스, 101코스, 강화나들길 3코스, 4코스 _ 2023.05.27 (토)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3. 5. 28. 15:15

 

1. 일시 : 2023. 5. 27 (토)   08:00 - 17:00   (9시간)

 

2. 걷기 거리 :  아래 지도에서 파란색으로 줄친 구간  31 km

 

【 1구간 】  대명항  온수리정류장 (정족산 220m)   10.5 km   : 서해랑길 100코스 시작

【 2구간 】   온수리정류장 곤륭버스정류장 7.5 km                 : 서해랑길 100코스 완료, 강화나들길 3코스 시작

【 3구간 】  곤륭버스정류장  가릉   4.5 km                             : 서해랑길 101코스 시작, 강화나들길 3코스 완료

【 4구간 】  가릉 → 외포리 (강화파출소, 망양돈대) 8.5 km        : 서해랑길 101코스 완료, 강화나들길 4코스 시작-완료

 

 

 

3. 일기

 

날씨 : 종일 비 (기온 최저 17도, 최고 22도)

천문 : 일출 05:17, 일몰 19:46

 

 

4.  오늘의 강화나들길 걷기 

 

 - 오늘은 김포 대명항에서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를 동서로 횡단하여 외포리 항구까지 가는 길이다. 시작은 서해랑길 100코스로 시작되나 중간에 강화나들길3코스와 서해랑길 101코스, 강화나들길 4코스가 번갈아 나오면서 복자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 강화도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냥 걸어 가면 같은 길이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강화나들길은 여느 둘레길처럼 둘레를 한 바퀴 돌거나 시점부터 종점까지 계속 이어지는 길이 아니다. 여기저기 역사적 명소나 좋은 풍광을 지닌 장소로 나들이 가는 마음으로 즐기라는 의미일게다. 서해랑길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계속 이어져서 북한을 바로 앞두고 강화에서 길이 끝난다.

 

 -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가랑비에 우산쓰고 초지대교를 걷넜는데,  전등사 가까이 와서는 빗발이 제법 굵어져 우비를 챙겨 입었다.  사실, 비가 오기로 예보된 날에 집밖으로 하이킹 나서는 것은 부담스운 일이다.  우산이나 우비를 챙겨 입은지라 행동이 거북할 뿐 아니라 신발 속도 물이 젖기 일쑤이고 경치 조망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이라면 자연 속에 고립되어 온전히 나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5. 구간별 풍경

 

 

 【 1구간 】   대명항  온수리정류장 (정족산 220m)   10.5 km   : 서해랑길 100코스 시작

 

초지대교

강화초지대교(江華草芝大橋)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2002년 8월 28일에 개통되었다. 길이 1200m, 폭 17.6m(4차로),  교각 12개 아치형 건축양식으로  하루에 3만 5000대의 교통량을 처리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및 경기도 부천시, 김포시 등 수도권 서부지역 주민들이 기존의 강화대교를 이용하는 것보다 차로 30여 분 빨리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이점이다. 강화도에서 인천까지 출퇴근하는데 더 용이해졌으며, 소요시간도 또한 1시간대로 교통이 편리해지는 장점이 있다.

- 남쪽 강화해협 입구의 모습

강화군 길상면

길상면(吉祥面)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면이다. 강화섬 남단에 위치하며, 두면이 해안선에 인접한 지역으로 어촌 3개 마을, 농촌 9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관할 일부지역이 군사보호 지역이다. 가천의과대학교가 있으며, 관광 명승지로는 전등사(전등사 경내에 보물 3점, 비지정문화재 8점), 단군의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사적 130호), 지방기념물 8호인 이규보 선생의 묘와 사적 225호인 초지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인 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 등이 있어 가히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초지대교 바로 건너 초지사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24시간 운영되는 해수온천장이 좋아 보인다.

- 사거리를 지나서 찻길 밑으로 난 농로를 따라 걷기를 시작한다.

 - 논옆 둑에 금계국과 개양귀비꽃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이 논은 오늘이 모내기하는 날이다. 멀리 파종할 모를 이앙기에 추가로 충전하고 있는 중이다.

장흥제2저수지

- 저수지를 지나면서 빗발이 굵어져 우비까지 입었다. 곧 이어 전등사가 나오는데, 전등사, 정족산, 정족산을 환상으로  걷는 것은 선택이다. 아쉽지만 오늘 같이 비가 와서 조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생략할 수밖에 없다. 

- 강화나들기 3코스 <왕실묘역 가는 길>의 시점인 온수리 공영정류장이다.

전등사

전등사(傳燈寺)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정족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정족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경내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가 있다.  고구려 시기부터 사찰이 세워져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고 중수되었다. 전등사란 이름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붙여진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광해군 때 중수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마니산 사고가 병자호란으로 훼손된데다 효종 4년(1653년) 화재로 소실되자 1660년 전등사 경내에 정족산 사고를 설치하고 실록을 보관하게 하였다. 정족산 사고는 적장산, 오대산, 태백산과 함께 조선 후기의 실록 보관소가 되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고를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고는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1726년에는 영조가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고,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를 중수하였다.

 

 

 

 

 

【 2구간 】   온수리정류장  곤륭버스정류장 7.5 km  : 서해랑길 100코스 완료, 강화나들길 3코스 시작

 

- 길은 온수리 정류장을 지나 골목길로 길이 이어지는데, 담이 없는 집을 지나간다. 마당에 활짝 핀 꽃이 가득하다.

- 성공회 온수성당

- 마늘, (하지)감자, 깨가 심어진 밭이다.

- 길상면사무소를 오른쪽에 두고 죄회전한다.

- 대명항에서 9km 밖에 안 걸어 왔는데 비가 오다보니 앞으로 갈 길이 멀게 느껴진다,

- 비는 계속 온다.

- 노인문화센터, 키즈센터, 인지건강센터  등 새로 건립된 공동체 시설이다.

- 바로 옆에는 논이다.

- 수령 250년 이상의 보호수 느티나무이다. 강화군에는 보호수가 참 많은데, 그만큼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를 잘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강화학생체육관

- 길정저수지 남단이다.  걷기 길은 저수지를 따라 곧장 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서 길정저수지 북쪽으로 간다.

- 분홍색 산딸나무가 길 옆에 있어 사진에 담아 보았다.

이규보의 묘

이규보는 고려시대 동지공거,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168년(의종 22)에 태어나 1241년(고종 28)에 사망했다. 문재에 뛰어났으나 형식적인 과거시험 글을 멸시하여 국자시에 낙방하다가 네 번째 응시에서 수석합격을 했다. 급제 후에도 관직을 받지 못하고 사회 혼란 속에서 『동명왕편』을 지었다. 무신집권자인 최충헌을 국가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서야 관직에 진출했고, 이후 최씨 정권에서 문필가로서 무인정권을 보좌하며 승승장구했다. 이규보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하고 양심적인 관직자였으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때그때 마다 떠오르는 바를 그대로 표출한 것이었다. 이규보는 본질적으로 입신출세주의자이며 보신주의주였다. 그렇게 된 근본이유는 가문을 일으키고, 고유의 문명을 크게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였다. 최이에게 바쳐진 이규보의 시들이 최이의 은의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규보는 최씨정권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일반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길은 이규보의 묘 상부를 지나 숲 속으로 이어진다.  비오는 날 숲을 거니는 즐거움이 상당하다.

연등국제선원

연등국제선원은 1997년 성철 큰스님의 제자인 故 원명스님의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성철 스님의 가르침의 뜻에 따라 한국의 선(禪)을 수행하며 연등국제선원에 오시는 내, 외국인들에게 국적과 종교 상관없이 수행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인도에서 온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주지스님과 내 외국인 스님들이 항상 거주하며 수행하고 있고, 미국, 아시아,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참가자들이 템플스테이와 다양한 정진 프로그램을 체험하고 있다. 

- 숲 길 바닥에 지난 해 낙엽이 푹신하게 쌓여 있어 걷기에 참 편안하다. 

- 수령 200년 된 까치골 소나무 보호수이다.

- 나란히 서있는 수령 350년의 느티나무 보호수이다.  소유주 유호옥의 10대조가 길정면 걸직리에 정착할 때 심었다고 한다.

- 걷다 보니 갑자기 길옆에 폐쇄된 건물이 나왔다. 무슨 교도소처럼 생긴 건물인데, 엘림기도원이라는 간판이 과거 기도원 자리였음을 표시해준다.

- 걸직리 보호수 느티나무이다. 두 나무가 나란히 있어 '부부느티나무'라고 부르는 것 같다.

- 마을을 나와 도로 길 보도를 걸어 간다. 여기는 양도면에 속한 길이다.

- 버스정류장 이름이 '해나무'이다.

- 아까 길정저수지 남단에서 출발하였는데,  이제 저수지 북쪽에 도달하였다. 이곳 역시 낚시터로도 사용되어 길정YB낚시터라는 간판이 있다.

- 드디어 서해랑길 100코스가 끝나고, 101코스가 시작되는 곤릉버스정류장 앞이다.

 

 

 

 

 

【 3구간 】   곤륭버스정류장  가릉   4.5 km  : 서해랑길 101코스 시작, 강화나들길 3코스 완료

 

 

양도면(良道面)

양도면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면이다. 해발 443m의 진강산을 중심으로 남북방향으로 넓은 농경지와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주소득원은 농업이며, 해안선 6km를 따라 해안순환도로가 건설되었다.  양도면은 1413년 조선 태종 13년 ‘위량면’과 ‘상도면’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상도면이 5개 동, 위량면이 7개 동으로 구성되었다. 1914년 읍면으로 개편할 때 상도면의 길정, 도장, 조산, 능내, 하일 5개리에, 위량면의 건평, 삼흥, 인산, 3개 리를 합쳐 면을 만들고, 면이름은 ‘양’과 ‘도’를 따서 양도면이라 칭하였다. 상도면에는 옛 진강현터가 있어 옛 일을 말하여 주며, 고려말 이래 별대총으로 효종의 애마를 기르던 진강목장은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유서가 있는 고장이다. 

 

강화 곤릉

고려 강종(재위 1211∼1213)의 부인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 곤릉은 비닐하우스 사이길로 한참 올라 가야 해서 패스한다.

- 이제 숲이 좀 깊어지고 길도 좁은 산길이다.

- 강화 석릉 부근의 이정표 - 강화석릉으로 길이 가지는 않는다.  '산이여,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라는 강화에 사는 함민복 시인의 글귀가 인상적이다.

 

산  <전문>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강화 석릉 (江華 碩陵)

고려 희종(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희종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 강화 석릉은 산 속에 덩그러니 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강화캠퍼스

1991년, 천주교 인천교구 소속 신학생 교육을 담당했던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과 수원가톨릭대학교가 정원 제한으로 신학생 수용 문제를 겪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천교구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관할 구역뿐만 아니라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위탁 형식으로 북방의 미수복지역인 천주교 평양교구를 담당할 사제를 교육시켜 통일 후의 선교를 대비하고 있다. 2008년 조형예술대학이 설치되고 2011년 신학과가 신학대학으로 승격, 2014년에는 간호대학이 신설되어 현재는 3개의 단과대학과 대학원으로 종합대학 형태를 띄고 있다.  재단은 천주교 인천교구 산하 '학교법인 인천가톨릭학원'으로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관동대학교 2개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강화캠퍼스는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특수한 목적을 가진 캠퍼스이다. 그렇기에 캠퍼스 내에서 진행되는 공개 미사나 가족들의 면회를 제외하면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된다. 그러나, 1년에 단 한번 존재하는 성소주일에는 인천교구에 소속된 모든 성당이 한데 모여 미사와 축제를 즐긴다.

 

- 도처에 조용히 지나가라는 주의 팻말이 있으나,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숲사이로 보이는 건물이 가톨릭 대학교 강화 교정이다. 

- 비가 계속 오다보니 조그만 빗물길이 생겨 흘러 내리고 있다.

강화능내리석실분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후기 장방형으로 축조된 돌방무덤. 석실분..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석실분은 고려시대의 것으로서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축조하였다. 석실의 크기는 남북 장축 방향 260㎝, 너비 196㎝의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고려시대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과거 도굴로 인하여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이를 위한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석실 내에는 유물 파편만 출토되었지만 봉분구조물과 석실, 건물지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지배계급 묘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확인되었다.

강화 가릉 (江華 嘉陵)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후기 제24대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 김씨의 능. 왕비릉. 사적.   강화 가릉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중 하나이다. 
관리 소홀로 봉분이 붕괴되고 주변 석물들이 없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1992년 사적으로 지정될 당시의 문화재명은 가릉이었는데, 2011년 강화 가릉(7월 28일 고시)으로 변경되었다.

- 강화나들길 3코스 종점 스탬프는 한참 마을로 내려와 능내리 마을회관 가기 전,  주차장 입구에 있다.

 

 

 

 

 

【 4구간 】   가릉 → 외포리 (강화파출소, 망양돈대) 8.5 km   : 서해랑길 101코스 완료, 강화나들길 4코스 시작-완료

 

 

- 마을이 있고 그 민가 바로 앞에 수령 200년의 보호수 '능내리 느티나무'가 서 있다.

- 빗발이 잠깐 옅어지니 숲속의 공간에 연녹색이 빛나고 있다.

-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진강산(441m) 허리를 둘러가는 산길이다.

- 산속에 갑자기 관사같은 건물이 나오고 길은 그 건물을 가로질러 가도록 되어 있다. 산딸나무 꽃이 환하다.

- 잠시 후에 건물 입구가 나왔는데 갈멜강화금식기도원이라고 한다. 2004년 준공되었고, 경기도 안양에 본부가 있다고 한다.

정제두묘

정제두 묘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인천시 기념물이다. 정제두(1649~1736)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파의 태두다. 그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중신의 천거로 30여차례나 요직에 임명됐으나, 거의 다 거절하고 주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묘역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62의5 길 바로 옆에 있다. 묘역은 완만한 경사지에 사성이 없이 용미만이 길게 돼 있고, 그 앞에 원형 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하계 부분에는 좌우에 민무늬로 된 상단에 띠를 2개 두른 망주석과 금관조복에 양관을 한 문인석이 있다. 신대우가 글을 짓고, 서영보가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 정제두묘를 내려오면 큰 길이 나오는데 차들이 많이 다니는 길인데도, 보도 구분이 없어 위험하게 걸어가야 하는 구간이다.

- 양지부락 노인회관 건물이다.

- 1897년 이 마을 주민이었던 정천일씨가 세운 건평교회(감리교)라고 한다.

천상병귀천공원

  천상병 시인의 대표 시 ''귀천''의 시상을 떠올리게 한 건평 포구의 하늘을 구경할 수 있는 공원으로 이곳의 바다와 노을빛을 사랑한 시인의 맑은 문학정신과 강화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오래도록 기리고 보전하기 위해 2017년에 조성되었다. 

  천상병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일본의 해안도시 효고현(兵庫縣)에서 태어나 해방과 더불어 고국으로 돌아와 경남 마산에 정착했다. 이후 천 시인은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늘 고향바다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마산까지 갈 여비가 없어 고향친구인 박재삼 시인과 더불어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를 자주 찾아와 바다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건평나루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쓴 시가 '귀천'이었다.  천 시인은 이 시를 메모지에 적어 박재삼 시인에게 건네주었다 한다. 이 시에는 당시 산기슭과 맞닿아 있던 조그만 건평나루의 풍경이 그대로 녹아있다.  천 시인은 이 시를 쓴 직후인 1967년 소위 동백림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겪고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4년여를 행려병자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하자 천 시인이 죽은 것으로 생각한 박재삼 시인이 '귀천'을 천 시인의 유작으로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함으로써 사장될 위기에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이후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오다 50년만에 귀천 탄생지인 건평항에 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천 시인을 기리게 된 것이다.

 

- 동화 속 어린 왕자 앉아 있는 포토 존

-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가 한상억(1915년 양도면 도장리生)과 작곡가 최영섭(1929년 화도면 사기리)의 노래비이다.  1961년 최영섭은 KBS(당시 중앙방송)로부터 금강산을 주제로 한 노래의 작곡을 청탁받고 한상억 시인에게 작시를 부탁하여 「그리운 금강산」이라는 시에 곡을 붙였다. 

 - 외포리 정포항 가는 길은 '해가 지는 마을길'(강화나들길 4코스)이라는 명칭처럼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나, 오늘은 흑백의 수묵화 풍경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빗발이 흩날리는 바닷가 길에는 인생을 소풍에 비유한 천상병 시인이 웃고 있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https://youtu.be/mXn149hKEYo

- 건너편 석모도가 구름에 가리워져 아스라이 보인다.

- 썰물이 되어 강화섬에서 바다로 빗물이 빠져 나가고 있다.

외포리 전경

강화군 내가면에 있는 외포리는 조선시대에는 '정포(井浦)'라고 불리었다. 동네 초입에 우물이 있어 우물 정(井)자, 포구 포(浦)자를 쓰서 '정포(井浦)'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정포보 관할 아래 석각돈대, 삼암돈대, 건평돈대, 그리고 망양돈대 등 4개의 돈대가 있었다. 석각과 삼암 그리고 건평돈대가 정포(외포리)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면 망양돈대는 정포에 있는 돈대였다.  망양돈대가 있는 외포리는 삼별초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1270년 음력 6월 1일 고려가 몽골과 화친을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할 때 삼별초는 몽골에 머리를 숙이는 삶을 거부하고 이곳을 출발하여 진도로 떠났다.

- 경인북부수협 수산물산지거점유통센터이다.

- 대명항에도 함상공원이 있더니 여기에도 만들려고 준비하는 듯하다.

- 오늘의 걷기 종점인 강화파출소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해안서로 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