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9코스, 10코스 _ 2023.06.11 (일)
1. 일시 : 2023. 6. 11 (일) 09:50 - 13:10 / 14:30 - 17:50 (6시간 40분)
2. 오늘 걷기 거리 : 교동도 파란색 줄친 구간 30km
【 1구간 】 강화나들길 9코스 교동도 다을새길 (대룡시장 → 월선포) 16.0 km
【 2구간 】 강화나들길 10코스 머르메 가는 길 (대룡시장 - 마르메 - 대룡시장) 17.3 km
3. 일기
- 날씨 : 맑음 (기온 최저 19도, 최고 27도)
- 천문 : 일출 05:11, 일몰 19:55
4. 강화나들길 걷기 : 교동도
- 오늘은 한때 지역 역사의 중심지였던 강화 교동도 남쪽 지역을 한 바퀴 돌았다. 조선 시대 수군 본부가 있었고,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제는 간척도 많이 되어 그 옛날 섬의 모습이 상전벽해로 변했지만, 북한의 지척이라는 단점을 딛고 반전을 꾀해 대룡시장과 화개산을 가꿔나가는 지역민들의 노력이 방문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정재율 시인은 '화가의 일'이라는 시에서 "열차를 타고 내릴 때마다 자신이 이 풍경을 마지막으로 관찰하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오늘도 화가는 유령처럼 이곳저곳을 거닐다 집으로 돌아간다" 노래하였는데, 북녘 땅 바로 앞에서 조용히 잊혀져 갈 수도 있는 섬이 스러져 가는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한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선한 목격자로 관찰하려고 방문하고 있는 듯하다.
- 오늘 걷기는 쉽기 않은 여정이었다. 아침에 교동도가는 버스 07:30분 출발은 서울에서 불가능한 시간이고 다음이 09:00이어 걷기 시점에서의 출발 시간이 10:00이 될 수 밖에 없었다. (1시간 늦게 출발) 돌아오는 버스 역시 18:30 또는 20:10으로 간격이 커서, 결국 더운 날씨 속에서 버스 시간에 맞춰 걷다보니 그 압박감에 피곤함이 배가된 듯하다.
- 강화나들길 9코스를 대룡시장에서 시작하여 화개산을 올라가는데 트랭글과 현재의 강화나들길이 조금씩 달라서 복잡하더니, 화개사 지나서 잠시 착각하여 대룡시장으로 원점회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할 수 없이 대룡시장부터 월선포까지 가는 길이나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였다. 월선포에서 건너뛴 구간은 숙제로 남겨 놓고 버스를 기다려 대룡시장으로 다시 와서 강화나들길 10코스를 시작하였다. 오늘 교동도 두 개의 순환 코스는 전체적으로 그냥 평이한 농사짓는 바닷가의 모습이고 위치가 멀다보니 전원주택은 많이 없었다.
<교동도(喬桐島) >
* 喬 높을 교, 桐 오동나무 동
(1) 개요
- 교동도(喬桐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본 섬이다.
- 북위 38도 근처에 있으며 강화도의 서북쪽이자 인천 본토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강을 건너 황해도 연백군과 휴전선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민간인 출입통제선 위에 있으므로 출입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 교동면에는 대룡(大龍)·읍내(邑內)·상룡(上龍)·봉소(鳳韶)·고구(古龜)·동산(東山)·삼선(三仙)·인사(仁士)·지석(芝石)·무학(無鶴)·난정(蘭井)·서한(西漢)·양갑(兩甲) 등 13개 법정리가 있다. 면소재지는 대룡리이다.
-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높이 0∼10m의 지역이 섬의 3분의 2를 이루고 있으며, 마식령산맥 서단에 해당한다. 가장 높은 산은 화개산(華蓋山, 260m)으로 이 섬의 주산을 이루며, 봉황산(75m)·율두산(89m)·고양이산(35m)·수정산(75m) 등 모두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이다.
- 연백에 면한 동북해안은 제방을 쌓아 고구(古龜)의 관개용 저수지의 완성으로 경지확장 및 경지정리를 하였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며, 연안의 저지(低地)는 이질(泥質)인 갯벌로 되어 있어서 어항의 발달은 불리하고, 간만의 차도 커서 선박의 출입도 그리 편리하지 못하다. 섬인 까닭에 한서의 차는 내륙에 비하여 작으나 언제나 해풍이 비교적 강하게 불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으로 한기를 더욱더 조장한다.
- 내륙에 비하면 겨울이 빠르고 여름이 늦어 환절기에는 해상의 기류가 고르지 않아 때때로 소나기·회오리바람을 몰아오며, 때로는 서리나 우박이 내리는 등 날씨가 고르지 못하다. 연평균기온은 11.2℃, 연강수량은 1,390㎜이다.
- 상고시대에 이 섬은 개화산(화개산)·율두산·수정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에는 언제나 조수가 흘렀고, 그것이 그 뒤 하나의 섬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개화산 중턱에서 볼 수 있는 화석이 된 조개껍질이나 현 해안선에서 내륙에 위치한 패총의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남쪽에 있는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화(陸化)되어 인마가 내왕할 수 있었다가, 1578년(선조 14)경 다시 바다로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인마가 내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후빙기 이후 범세계적인 해면변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하천의 발달도 드물고, 작은 계류가 있을 뿐이다.
(2) 역사
- 교동도(喬桐島)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戴雲島)이다. ‘고림’ 또는 ‘달을신’이라고도 불렀으나,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을 두어 ‘고목근현’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1895년 조선 고종32년에는 읍을 폐하고 강화와 합군하였다가 다음해 7월에 다시 읍으로 하고 군수를 두었다.
- 물길이 험해서 탈출은 어려운데, 한양과 가깝고 감시는 쉬워서 왕족들의 유배지로도 각광받았던 곳이다. 연산군이 여기 유배되어 사망했고, 광해군도 제주도로 이배되기 전 여기서 잠시 지냈고, 그 외에도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화완옹주,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 등이 여기에 유배되었다.
- 조선시대에는 수군 수영인 경기수영의 본영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말~조선 초 대문호였던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이 매력을 느껴 독서를 하고 시를 쓰며 수양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 간척 : 본래 교동도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삼국,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주변의 강화도나 석모도처럼 간척을 통해 여러 섬과 합치고 본섬의 4~5배 정도로 커졌다. 강화도를 보면 간척 전의 지형과 간척 후의 지형을 비교하는 지도가 있다.
(3) 교통수단
-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2014년 7월 1일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강화도와 육지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단, 민간인 출입 통제선 안에 있는 지역인만큼 입도 시에는 신분증이 필요하며 교동대교 앞에서 해병대원이 건넨 출입증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 대중교통으로는 강화도와 교동도를 오가는 강화 18번 버스가 있고, 교동도 내를 돌아다니는 마을버스가 있다.
(4) 관광
-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과 민간인 통제구역이라는 점 때문에 외부와 오랜 시간 단절되었다. 교동도에 가보면 1960~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며, 특히 대룡시장이나 교동 방앗간 같은 곳을 가면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2023.5.13 화개정원이 개관되었는데, 화개산 일대 관광자원화 사업으로 연산군 유배지를 포함한 화개산 일대에 화개정원과 화개산 전망대를 조성한 것이다.
. 화개산 전망대 : 화개산 전망대 4,973㎡, 스카이워크형 전망대 (폭58.5m × 너비67m × 높이32m)
. 화개정원 : 110,000㎡, 5색 테마정원(물의 정원, 역사‧문화의 정원, 추억의 정원, 평화의 정원, 치유의 정원)
. 공영주차장 : 31,940㎡, 주차면수 519면(버스15), 화장실 2개소 등
5. 구간별 풍경
【 1구간 】 강화나들길 9코스 교동도 다을새길 (대룡시장 → 월선포) (대룡시장 → 월선포) 13.0 km
- 지하철에서 버스(3000번 버스)로 환승하는 걸포북변역 1번 출구 앞의 모습이다.
- 바로 옆의 상가인데 아침에 문을 열지 않는다.
- 강화터미널에서 18번 버스로 갈아탔는데, 교동대교를 건너가고 있다. 해병이 버스 아닌 차들을 검문하고 있다.
- 다리 위에서 버스 창 너머로 바라본 북한의 모습이다.
- 대룡시장 앞에서 버스를 내려 길을 시작하였다.
대룡시장
1950년 6.25 전쟁 때 황해도에서 교동도로 월남하였던 실향민들이 휴전 이후 북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황해도를 추억하는 마음으로 황해도 연백군에 있다는 연안시장을 본따서 만든 재래시장이다. 현재는 인구 감소와 실향민 1세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그 자손들이 시장을 지켜가고 있다. 1박 2일, 드라마 전설의 마녀(시장 내 거북당 빵집), 장미빛 연인들, 선을 넘는 녀석들(시장 내 뚱이 호떡집) 등 여러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의 촬영지이다.
- 버스타고 지나온 길을 다시 걸어서 간다.
- 교동 초등학교 후문 부근이다.
- 화개정원 가는 길이다. 버스가 큰 길에서 안으로 들어가서 정차한다.
화개정원
2022년 화개산 기슭을 휴식시설로 개발하여 각종 꽃과 정원, 농촌 체험시설을 구비하고 있다. 화개산 정상 전망대까지 모노레일을 유료로 운영하는데 사람들이 많다.
- 강화나들길은 화개정원을 왼쪽으로 비켜서 담장을 따라 걷는다.
화개산 (華蓋山)
교동면 고구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 고도는 259m. 이색은 이곳을 전국 8대 명산 중 하나로 꼽았으며, 현재는 화개산 주변에 교동도의 주요 관광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산 정상에서는 황해도의 연백평야, 예성강 하구, 송악산도 볼 수 있다. 화개산이라는 명칭은 ‘산정의 형태가 솥뚜껑을 덮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화개산이라고 한다.
- 약수터가 있다.
- 화개산성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자세히 보아야 한다.
- 삼국시대의 일화가 있는 효자묘자리터라고 한다.
- 화개산 청동기 암각화이다.
- 화개산 정상이다. 대룡시장에서 1시간 걸렸다.
- 화개산 정상목은 북을 바라보고 있는데, 남쪽으로 향하여 찍은 사진에 방향 표시를 해본다. 왼쪽 석모도와 중앙에서 오른쪽 멀리 주문도와 불음도가 보인다.
- 지난 현충일에 갔던 석모도 상주산이 가까이 보인다.
- 화개산 정상부에 있는 모노레일이다.
- 정상부 휴게시설의 모습이다. 강화군의 군조인 ‘저어새’의 눈과 부리를 형상화하였고 손에 닿을 것 같이 가깝지만 갈 수 없는 북녘을 향한 ‘飛上’도 의미하는 디자인이라고 한다.
- 정상부근에서 북으로 조망하면 고구저수지가 바로 앞에 보인다. 멀리 북한 땅도 보인다. 고구저수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243-1에 위치해 있으며, 1976년 완공된 88.5ha(약 260.000평)으로 지금은 사계절 낚시터로 낚시인들에게 유명한 곳이다.
- 강화 화개산 봉수대 자리이다.
- 강화나들길은 왼쪽(남쪽)으로 가도록 되어 있다.
- 숲으로 들어가면 시원해진다.
- 숲을 지나 하산하면 화개사라는 절이 나온다.
- 화개사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색이 공부하던 곳이라고 한다. 절 입구에 수령 290년 높이 14미터의 보호수 소나무가 멋있게 서있다. 스님이 잔디밭을 청소하고 있다.
- 화개사에 다시 밑으로 이어지는 길을 간다.
- 이 부근부터 강화나들길을 잘못든 것 같다. 리본을 보지 않고 딴 생각하고 가다가 교동면사무소 방향으로 무심코 직행하였다.
- 마을이 나왔는데 리본 표식 챙길 생각도 못하였다.
- 멋있는 카페 건물도 지나간다. 오른쪽 위가 순례자의 교회라고 한다.
- 강화초등학교 정문이 나오고서야 원점으로 돌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2시간 걸려 다시 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하였다. 이런 일은 나의 둘레길 걷기 역사상 처음이었는데, 바로 포기하고(포기가 참 빠름) 그냥 반대방향으로 길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다.
- 도로를 따라 가기 시작하였다.
- 곧바로 마을 안 논길로 강화나들길이 이어진다.
- 금방 내려온 화개산을 바라 본다.
- 남산포이다. 남산포는 고려시대에는 벽란도로 가는 중국 사신들이 드나들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인조가 수군영통영을 설치하면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된 곳이다.
- 바닷가 안쪽 수로옆 농로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 멀리 강화도 별립산이 보인다. 산 정상의 군부대 안테나가 특징적이다.
- 교동읍성은 인조 7년(1629)에 남양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이곳으로 옮기며 쌓은 석성이다. 인조 11년(1633)에는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 경기ㆍ충청ㆍ황해도 등의 수군을 관할하는 수군 최고사령부)을 이곳에 설치하고 경기수사(京畿水使)에게 3도 통어사를 겸하게 했다. 그만큼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교동도는 한강과 서해를 잇는 역할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교동읍성은 영조 29년(1753)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女墻 성가퀴,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게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통어사 이교복이 남문을 중건하고 문루와 성벽을 수리했는데 공사를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고종 27년(1890) 동문과 북문을 고쳐 세웠다고 한다. 성의 형태와 구조는 1750년대 초 전국의 군현을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집인 ‘해동지도’를 보면, 남문ㆍ북문ㆍ동문 위에 모두 누각이 올려져있고 이중 성벽 역할을 하는 옹성(甕城,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이 설치돼있다. 성벽 위에는 여장도 둘러진 견고한 성이었다. 부내에 5채의 건물이 보인다. 성의 둘레는 430미터 정도여서 둘러보기 좋은데, 길이 나있지 않아 다 둘러볼 수 없어 아쉽다. 성벽을 따라 산책길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문루 높이는 6미터로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했다. 홍예만 남아있던 남문은 2017년 12월에 유량루(庾亮樓)를 복원해 문루를 올렸다. 문 뒤쪽 홍예의 안쪽에 ‘南樓(남루)’가, 뒤 홍예에는 삼도수군통어영을 의미하는 ‘三道通門(삼도통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오랜 역사를 가진 우물인 것 같은데 설명이 없어 조사해보니 조선 태종 때 황룡이 출현했다고 해서 황룡우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18년(태종 18)에 허리 굵기가 기둥과 같은 황색대룡(黃色大龍)이 수군 군영 앞 이 우물 안에 가득 차게 보였다고 한다. 교동 수군첨절제사인 윤하가 조정에 보고해 기록됐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강화유리로 덮어놓았다.
- 남문을 통과해 오른쪽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가면 아전청으로 추정되는 곳에 개인주택이 들어섰다. 초석과 기타 석조물들을 울타리로 사용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집 옆으로 밭으로 사용하는 공터가 있고 그 뒤축대 위 밭두렁에 누각 건물에 많이 쓰는 장주초석 2개가 보인다. 안해루가 있던 곳이다. 장주초석은 본래 4개가 남아있었는데, 나머지 2개는 교동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옮겨져 뜬금없는 자리에 덩그러니 서있다. 문화재 가치를 잘 몰랐던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쓰려고 옮기고 돌 표면도 깎아 크기도 작아졌다고 한다.
- 안해루 터 뒤에 돌계단이 있는데 여름에는 잡목과 풀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고 올라가기도 힘들다. 그 위에 동헌과 객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식 주택 폐가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가고 있다.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다던 남산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 교동도에는 예부터 왜구들이 눌러 살다시피 할 정도로 침입이 잦았다. 그래서 읍성을 쌓고 읍성 안에 주요 기관들이 들어앉았다.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내아ㆍ외아 같은 관청 건물과 안해루ㆍ상문루 같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이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민가가 들어서거나 텃밭으로 일궈졌다.
동진포
조선시대 남산포구 삼도수군통어영지는 해군기지항구였고, 동진포는 일반인들 배 타는 항구였다.
교동읍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교동도에 영이 설치되어 읍성이 축조된뒤 가장 번화했던 포구가 바로 동진포다. 서울과 해주를 잇는 주요 관문이였던 동진포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에게는 바다 날씨를 살피기위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기상이 좋으면 바로 배를 띄워 중국으로 향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동진원이라고 부르는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길을 떠났다. 동진포를 떠나 서해로 나아가는 이들을 배웅하던 동진송객은 그 모습이 얼마나 장관이였는지, 이를 교동팔경중 하나로 기록하고있다."
- 석모도 상주산이 바로 앞이다. 물길이 바뀌기 전에 육료 왕래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이 가까운 거리이다.
- 다시 해안 방조제길을 가다보니 지뢰가 많이 발견되는지 안내판과 둑을 깍아서 맨흙이 드러나도록 정리가 되어 있다.
- 다시 방조제 안 농로로 길이 이어진다.
- 드디어 강화나들길 9코스 시점이자 종점인 월선포구에 도착하였다. 월선포구에 배는 없다.
- 멀리 교동도 진입로인 교동대교가 보인다.
- 월선포구는 교동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교동과 강화도를 오가는 연락선이 정박하던 곳이다. 행락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스탬프함이 있는 자리도 차와 텐트가 자리 잡고 있어 스템프 찍기 위해 좀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 여기서 9코스를 종료하기로 하고 버스를 1시간 정도 기다려 대룡시장으로 향한다. 1시간 걸린 길을 10분만에 버스가 데려다 준다.
【 2구간 】 강화나들길 10코스 머르메 가는 길 (대룡시장 - 마르메 - 대룡시장) 17.3 km
- 다시 대룡시장 앞에서 강화나들길 10코스 '머르메 가는 길'을 시작한다.
- 6.25때 활주로로 만들어진 곳이 이제는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직선거리가 3km 정도 된다.
- 시계반대방향으로 길을 가기로 하여 농로로 길을 접어든다.
- 평야지대가 넓다보니 농로도 직선도로이다. 끝이 잘 안보인다.
- 농로 끝이 난정저수지이다. 교동에 저수지가 두 개 있는데 그 중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난정저수지
섬 서쪽 끝에 위치한 난정저수지는 바닷가에 위치해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난정저수지는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2006년 완공한 인공 저수지인데 산책로와 포토존 등을 갖춰 관광 명소로도 주목받고 있다. 저수지 주변에는 마을 주민들이 가꾼 해바라기 정원이 있다. 남북 주민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해바라기의 노란색 물결에 담아 바다 건너 북녘땅까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 해바라기가 만발하는 8~9월에 풍경이 절정을 이루며 곳곳에 포토존이 설치돼 사진 찍기에도 좋다. 봄에는 청보리밭으로 변신해 또 다른 절경을 선사한다. 난정저수지에서는 낚시도 가능하다. 낚시터는 유료로 운영되며 붕어 낚시와 루어 낚시를 허용하며 릴 낚시는 전면 금지한다. 원래 저수지 부근이 난초마을이어서 마을이름을 따서 난정저수지라 명명한 것 같다.
- 저수지 부근에 공원을 조성해놓았다. 가을에는 해바라기가 장관이라고 한다.
- 길은 수정산(100m)으로 향한다.
- 조선시대 한증막 시설이라 하는데 신기하다.
- 산 정상 표시도 없다. 나무 틈으로 남서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 산을 내려와 작은 길을 건너니 인삼밭이 나온다.
- 다시 해변길이 시작된다.
- 죽산포라고 하는데 한가하다. 옛날에 이 동구에 배가 많이 정박하여 배의 돛대가 마치 대나무 숲과 같다하여 죽산동 또는 죽산포라 하였다.
- 왼쪽 '머르메'는 교동 동산리의 일부 자연부락으로 가장 큰 마을을 형성하여 두산동이라 하였으며, 우리말로 '머르뫼'로 부르던 것이 와전되어 현재까지도 '머르메'로 불리고 있다.
- 양갑리 활주로 도로로 가기 위해서 야산을 넘어야 하는데, 집들이 새로 들어 서다 보니 건너가는 길이 참 복잡하고 잘 안보인다.
- 산을 건너 와서 양갑리로 들어선다.
- 양갑복지회관이다.
- 드디어 활주로도로 끝부분에 섰다. 이 도로의 반대편 끝이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대룡시장이다.
- 버스를 타야하는 곳이다. 버스가 18:40분에 오는데, 부지런히 오다보니 다행히도 17:50분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