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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侯論(유후론) - 蘇軾(소식)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3. 6. 13. 11:02

留侯論(유후론) - 蘇軾(소식)  

 

 

留侯論(유후론) - 蘇軾(소식)

 


<유후(留侯) 장량(張良)에 대하여 논하다>

 
유후론(留侯論)은 북송(北宋)의 문학가인 소식(蘇軾)이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근거하여 유후 장량에 대하여 평론한 산문으로 〈진론(進論)〉 50편 중의 하나이다.
  
장량(張良)의 자(字)는 자방(子房)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秦始皇)을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하비(下邳)에 은신하고 있을 때 황석공(黃石公)으로부터 <태공병법서(太公兵法書)>를 물려받았다.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항우(項羽)와 유방이 만난 '홍문의 회(會)'에서는 유방의 위기를 구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책사(策士)로서 한나라의 서울을 진(秦)나라의 고지(故地)인 관중(關中)으로 정하고자 한 유경(劉敬)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소하(蕭何)와 함께 책략에 뛰어나 한나라 창업에 힘썼다. 그 공으로 유후(留侯)에 책봉되었다. 한신(韓信), 소하(蕭何)와 더불어 한초삼걸(漢初三傑)로 일컬어진다.

 
 
留侯論(유후론)

蘇軾(소식)

 
 
古之所謂豪傑之士者(고지소위호걸지사자),必有過人之節(필유과인지절)。

人情有所不能忍者(인정유소불능인자),匹夫見辱(필부견욕),

拔劍而起(발검이기),挺身而鬥(정신이투),此不足為勇也(차부족위용야)。

天下有大勇者(천하유대용자),卒然臨之而不驚(졸연림지이불경),

無故加之而不怒(무고가지이불노),此其所挾持者甚大(차기소협지자심대),

而其志甚遠也(이기지심원야)。

   
옛날에 이른바 호걸스러운 선비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절조가 있었다.
사람의 감정으로는 참지 못하는 일이 있을 때 평범한 사람은 모욕을 당하면
검을 뽑아 들고 일어나 몸을 솟구쳐 싸우는데 이는 용기라 할 수 없다.
천하에 크게 용맹한 자는 갑자기 어떤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고
까닭 없이 해를 당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포부가 심히 크고
그의 뜻이 매우 원대한 것이다.

◯ 節(절) : 절조(節操). 절개와 지조.
◯ 匹夫(필부) : 평범한 사람.
◯ 見辱(견욕) : 모욕을 당하다.
◯ 卒然(졸연) : 돌연. 갑자기.
◯ 挾持(협지) : 포부(抱負)

 
 
夫子房受書於圯上之老人也(부자방수서어이상지노인야),其事甚怪(기사심괴)。

然亦安知其非秦之世(연역안지기비진지세),有隱君子者出而試之(유은군자자출이시지)。

觀其所以微見其意者(관기소이미현기의자),皆聖賢相與警戒之義(개성현상여경계지의);

而世不察(이세불찰),以為鬼物(이위귀물),亦已過矣(역이과의)。

且其意不在書(차기의부재서)。

   
자방(子房)이 다리 위의 노인에게서 책을 받았는데 그 일은 매우 괴이하다.
그러나 또한 진(秦)나라 시대 때의 은자(隱者)가 나타나서 자방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노인이 자신의 뜻을 조금 나타낸 것을 살펴보면 모두 성현이 서로 함께 경계시키려는 뜻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노인을 귀신이라고 하니 또한 터무니없는 일이다.
또 노인의 뜻은 책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 子房(자방) : 장량. 자(字)는 자방(子房)이다.
◯ 受書(수서) : 병서를 받다. <태공병법서(太公兵法書)>를 말한다.
◯ 圯上(이상) : 다리 위. 圯(이)는 흙다리.
◯ 老人(노인) : 황석공(黄石公). 노인과 장량이 다리 위에서 만난 이야기는 사기 유후세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史記(사기) 세가(世家) 권55.留侯世家(유후세가)>
◯ 微(미) : 약간. 어렴풋하다.
◯ 見(현) : 現과 같다. 나타내다.

   
當韓之亡(당한지망),秦之方盛也(진지방성야),以刀鋸鼎鑊待天下之士(이도거정확대천하지사)。

其平居無事夷滅者(기평거무사이멸자),不可勝數(불가승수)。

雖有賁(수유분)、育(육),無所獲施(무소획시)。

夫持法太急者(부지법태급자),其鋒不可犯(기봉불가범),而其未可乘(이기미가승)。

子房不忍忿忿之心(자방불인분분지심),以匹夫之力(이필부지력),

而逞於一擊之間(이령어일격지간);

當此之時(당차지시),子房之不死者(자방지불사자),其間不能容髮(기간불능용발),葢亦危矣(개역위의)。

 
한(韓)나라가 망하고 진(秦)나라가 막 흥성할 때 칼과 톱, 솥과 가마솥으로 천하의 선비를 대했다.
평소에도 죄 없이 멸족을 당한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과 같은 용사가 있더라도 능력을 발휘할 도리가 없었다.
법을 너무 급하게 집행하는 군주는 그 예봉(銳鋒)을 거스를 수 없고 그 기세를 탈 수 없는 법이다.
자방(子房)은 분하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해 보통사람의 힘으로 일격을 가하는 사이에서 분풀이를 하고자 하였다.
이때 자방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나 그 사이가 털끝 하나도 용납할 틈이 없었으므로 진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 刀鋸鼎鑊(도거정확) : 모두 사람을 처형하는데 쓰인 형구. 刀鋸(도거)는 칼과 톱으로 사람을 찔러 죽였으며, 鼎鑊(정확)은 솥과 가마솥으로 사람을 삶아 죽였음을 뜻한다.
◯ 夷滅(이멸) : 멸족하다.
◯ 賁(분) : 맹분(孟賁). 역사(力士). 맨손으로 살아 있는 소의 뿔을 뽑았다고 하는데 오획(烏獲)과 함께 무왕(武王)을 따라 낙양(洛陽)에 갔다.
◯ 育(육) : 하육(夏育). 위(衛)나라 사람으로 1천 균(鈞)을 들 수 있고 소꼬리를 뽑을 수 있었다고 한다.
◯ 無所獲施(무소획시) : 능력을 발휘할 도리가 없다.
◯ 子房不忍忿忿之心(자압불인분분지심) : 장량(張良)은 한(韓)나라가 진 시황제(秦 始皇帝)에게 멸망되자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복수하고자 하였다.
◯ 而其未可乘(이기미가승) : 형세가 진(秦)나라에 유리하지만 그 기회를 틈타지 못하다.
◯ 而逞於一擊之間(이령어일격지간) : 장량은 남은 가산을 다 써서 역사(力士)들을 구하고 120근의 철추를 만들어 동쪽으로 유람 중인 시황제(始皇帝)를 박량사(博浪沙)에서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史記(사기) 세가(世家) 권55.留侯世家(유후세가)>

 
千金之子(천금지자),不死於盜賊(불사어도적),何者(하자)?

其身可愛(기신가애),而盜賊之不足以死也(이도적지부족이사야)。

子房以葢世之才(자방이개세지재),不為伊尹(불이이윤)、太公之謀(태공지모),

而特出於荊軻(이특출어형가)、聶政之計(섭정지계),以僥倖於不死(이요행어불사),此圯上老人所為深惜者也(차이상노인소위심석자야)。

是故倨傲鮮腆而深折之(시고거오선전이심절지)。

彼其能有所忍也(피기능유소인야),然後可以就大事(연후가이취대사)。

故曰(고왈):「孺子可教也(유자가교야)。」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은 도적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그들의 생명은 귀중하여 도적들은 그들을 죽일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자방은 세상을 덮을 만한 훌륭한 재주로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의 계책을 쓰지 않고,
단지 협객인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의 계책을 내면서 요행으로 죽지 않기를 바랐으니, 이것을 다리 위의 노인이 아주 애석하게 여긴 것이다.
이 때문에 노인은 거만하고 무례하게 대해 자방의 용기를 심하게 꺾었다.
노인은 자방이 능히 참을 줄 안 뒤에야 대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말하기를 “젊은이 가르칠 만 하다.”라고 한 것이다.

◯ 伊尹太公之謀(이윤태공지모) : 이윤(伊尹)은 상(商)나라를 개국한 탕(湯)임금의 재상이고, 태공(太公)은 주(周)나라를 개국한 무왕(武王)의 군사(軍師)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난 뒤에 비로소 천하를 도모하였다.
◯ 特(특) : 단지.
◯ 荊軻聶政之計(형가섭정지계) :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은 모두 전국시대의 자객들로, 이들의 계책이란 목숨을 도외시하고 위험한 행동으로 일을 이루려는 계책을 이른다. <史記列傳(사기열전) 권86 刺客列傳(자객열전)>
◯ 鮮腆(선전) : 무례하다.

 
楚莊王伐鄭(초장왕벌정),鄭伯肉袒牽羊以迎(정백육단견양이영);

莊王曰(장왕왈):

「其主能下人(기주능하인),必能信用其民矣(필능신용기민의)。」

遂舍之(수사지)。

勾踐之困於會稽而歸(구천지곤어회계이귀),臣妾於吳者(신첩어오자),

三年而不倦(삼년이불권)。

且夫有報人之志(차부유보인지지),而不能下人者(이불능하인자),

是匹夫之剛也(시필부지강야)。
 
초 장왕(楚 莊王)이 정(鄭)나라를 정벌하자, 정백(鄭伯)이 윗통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 맞이하였다.
장왕(莊王)이 말하기를,
“그 군주가 자신을 낮출 수 있으니 반드시 그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정백을 놓아주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돌아가 오(吳)나라에 신첩(臣妾) 노릇하기를 3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남에게 보복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에게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평범한 사람의 강함일 뿐이다.

◯ 楚莊王伐鄭(초장왕벌정) : 장왕 17년(기원전 597년) 봄에 초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여 석 달 만에 함락시켰다. 황문(皇門)으로 들어가니 정백(鄭伯)이 웃통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나와 초 장왕을 맞이했다. <史記(사기) 세가(世家) 권40.楚世家(초세가)>
◯ 鄭伯(정백) : 정 양공(鄭襄公). 춘추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견(堅)이다.
◯ 肉袒牽羊以迎(육단견양이영) : 윗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 간 것은 항복하고서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 臣妾(신첩) : 자신은 신하가 되고, 아내는 첩(妾)이 된다는 뜻이나, 상대방에게 복종함을 이른다.
◯ 報人(보인) : 남에게 원수를 갚다.


夫老人者(부노인자),以為子房才有餘(이위자방재유여),

而憂其度量之不足(이우기도량지부족),故深折其少年剛銳之氣(고심절기소년강예지기),

使之忍小忿而就大謀(사지인소분이취대모)。何則(하즉)?

非有平生之素(비유평생지색),卒然相遇於草野之間(졸연상우어초야지간),

而命以僕妾之役(이명이복첩지역),油然而不怪者(유연이불괴자),

此固秦皇之所不能驚(차고진황지소불능경),而項籍之所不能怒也(이항적지소불능노야)。

노인은 자방이 재주는 충분하다고 여겼으나 도량이 부족함을 걱정한 까닭에 장량의 젊은이로서의 강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심하게 꺾어서
그로 하여금 작은 분노를 참아 큰 계책을 성취하게 한 것이다. 어째서인가?
평소 서로 만난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들판의 사이에서 서로 만나
종처럼 일을 시키는데도 유연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진 시황(秦 始皇)이라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고, 항적(項籍)도 성내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非有生平之素(비유생평지소) : 평소 서로 만난 일이 없다. 일면식도 없다.
◯ 仆妾之役(복첩지역) : 종이나 하는 일을 시키다. 노인이 신발을 주워오게 한 일을 말한다. 仆妾(복첩)은 남자 종과 여자 종.
◯ 油然(유연) : 생각이나 감정이 저절로 일어나는 모양.
◯ 所不能(소불능) : 할 수 없는 일.

  
觀夫高祖之所以勝(관부고조지소이승),項籍之所以敗者(항적지소이패자),

在能忍與不能忍之間而已矣(재능인여불능인지간이이의)。

項籍唯不能忍(항적유불능인),是以百戰百勝(시이백전백승),而輕用其鋒(이경용기봉);

高祖忍之(고조인지),養其全鋒(양기전봉),以待其弊(이대기폐),此子房教之也(차자방교지야)。

當淮陰破齊而欲自王(당회음파제이욕자왕),高祖發怒(고조발노),見於辭色(현어사색)。

由此觀之(유차관지),猶有剛強不忍之氣(유유강강불인지기),非子房其誰全之(비자방기수전지)?
 
고조(高祖)가 승리한 이유와 항적(項籍)이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참을 수 있느냐 참을 수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항적은 단지 참지 못하여 백전백승하였으나 경솔히 자신의 병력을 소모하였고
고조는 참을 수 있어 온전한 전력을 키워 상대방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렸으니, 이는 자방이 가르쳐준 것이다.
회음후(淮陰侯)가 제(齊)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을 때 고조가 성을 내어 말이나 안색에 나타났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고조는 아직도 강하고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있었던 것이니, 자방이 아니면 누가 고조를 온전히 보존하게 해주었겠는가?

◯ 輕用其鋒(경용기봉) : 경솔하게 자신의 군대를 소모시키다.
◯ 當淮陰破齊而欲自王(당회음파제이욕자왕) : 한왕 4년(기원전 203년)에 한신(韓信)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려고 하자 한왕이 대노했다. 장량이 한신을 대우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한왕을 설득하여 한신을 제왕(齊王)으로 세웠다. [史記列傳(사기열전)] 권92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
  
 
太史公疑子房以為魁梧奇偉(태사공의자방이위괴오기위),

而其狀貌乃如婦人女子(이기상모내여부인녀자),不稱其志氣(불칭기지기)。

嗚呼(명호)!此其所以為子房歟(차기소이위자방여)!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자방이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기이하고 위대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그 형상과 모양이 도리어 부인과 여자 같아, 그의 지기(志氣)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의심하였다.
아! 이것이 바로 자방(子房)이 자방답게 된 이유일 것이다!

◯ 太史公疑子房(태사공의자방) : 태사공은 유후세가에서 “나는 유후가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기이하고 위대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그의 초상화를 보니 용모가 부인이나 예쁜 여인 같았다.”라고 하였다.   [史記(사기) 세가(世家)] 권55.留侯世家(유후세가)
◯ 소식(蘇軾, 1037년~1101년) :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원문출처>

留侯論/作者:蘇軾

古文觀止/古文辭類纂

 
 
  古之所謂豪傑之士者,必有過人之節。人情有所不能忍者,匹夫見辱,拔劍而起,挺身而鬥,此不足為勇也。天下有大勇者,卒然臨之而不驚,無故加之而不怒,此其所挾持者甚大,而其志甚遠也。夫子房受書於圯上之老人也,其事甚怪。然亦安知其非秦之世,有隱君子者出而試之。觀其所以微見其意者,皆聖賢相與警戒之義;而世不察,以為鬼物,亦已過矣。且其意不在書。
 
옛날에 이른바 호걸스러운 선비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절조가 있었다. 사람의 감정으로는 참지 못하는 일이 있을 때 평범한 사람은 모욕을 당하면 검을 뽑아 들고 일어나 몸을 솟구쳐 싸우는데 이는 용기라 할 수 없다. 천하에 크게 용맹한 자는 갑자기 어떤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고 까닭 없이 해를 당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포부가 심히 크고 그의 뜻이 매우 원대한 것이다. 자방(子房)이 다리 위의 노인에게서 책을 받았는데 그 일은 매우 괴이하다. 그러나 또한 진(秦)나라 시대 때의 은자(隱者)가 나타나서 자방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노인이 자신의 뜻을 조금 나타낸 것을 살펴보면 모두 성현이 서로 함께 경계시키려는 뜻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노인을 귀신이라고 하니 또한 터무니없는 일이다. 또 노인의 뜻은 책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當韓之亡,秦之方盛也,以刀鋸鼎鑊待天下之士。其平居無事夷滅者,不可勝數。雖有賁、育,無所獲施。夫持法太急者,其鋒不可犯,而其末可乘。子房不忍忿忿之心,以匹夫之力,而逞於一擊之間;當此之時,子房之不死者,其間不能容髮,葢亦危矣。千金之子,不死於盜賊,何者?其身可愛,而盜賊之不足以死也。子房以葢世之才,不為伊尹、太公之謀,而特出於荊軻、聶政之計,以僥倖於不死,此圯上老人所為深惜者也。是故倨傲鮮腆而深折之。彼其能有所忍也,然後可以就大事。故曰:「孺子可教也。」
 
한(韓)나라가 망하고 진(秦)나라가 막 흥성할 때 칼과 톱, 솥과 가마솥으로 천하의 선비를 대했다. 평소에도 죄 없이 멸족을 당한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과 같은 용사가 있더라도 능력을 발휘할 도리가 없었다. 법을 너무 급하게 집행하는 군주는 그 예봉(銳鋒)을 거스를 수 없고 그 기세를 탈 수 없는 법이다. 자방(子房)은 분하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해 보통사람의 힘으로 일격을 가하는 사이에서 분풀이를 하고자 하였다. 이때 자방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나 그 사이가 털끝 하나도 용납할 틈이 없었으므로 진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은 도적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그들의 생명은 귀중하여 도적들은 그들을 죽일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자방은 세상을 덮을 만한 훌륭한 재주로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의 계책을 쓰지 않고, 단지 협객인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의 계책을 내면서 요행으로 죽지 않기를 바랐으니, 이것을 다리 위의 노인이 아주 애석하게 여긴 것이다. 이 때문에 노인은 거만하고 무례하게 대해 자방의 용기를 심하게 꺾었다. 노인은 자방이 능히 참을 줄 안 뒤에야 대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말하기를 “젊은이 가르칠 만 하다.”라고 한 것이다.
 
  楚莊王伐鄭,鄭伯肉袒牽羊以迎;莊王曰:「其主能下人,必能信用其民矣。」遂舍之。勾踐之困於會稽而歸,臣妾於吳者,三年而不倦。且夫有報人之志,而不能下人者,是匹夫之剛也。夫老人者,以為子房才有餘,而憂其度量之不足,故深折其少年剛銳之氣,使之忍小忿而就大謀。何則?非有平生之素,卒然相遇於草野之間,而命以僕妾之役,油然而不怪者,此固秦皇之所不能驚,而項籍之所不能怒也。

초 장왕(楚 莊王)이 정(鄭)나라를 정벌하자, 정백(鄭伯)이 윗통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 맞이하였다. 장왕(莊王)이 말하기를, “그 군주가 자신을 낮출 수 있으니 반드시 그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정백을 놓아주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돌아가 오(吳)나라에 신첩(臣妾) 노릇하기를 3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남에게 보복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에게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평범한 사람의 강함일 뿐이다. 노인은 자방이 재주는 충분하다고 여겼으나 도량이 부족함을 걱정한 까닭에 장량의 젊은이로서의 강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심하게 꺾어서 그로 하여금 작은 분노를 참아 큰 계책을 성취하게 한 것이다. 어째서인가? 평소 서로 만난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들판의 사이에서 서로 만나 종처럼 일을 시키는데도 유연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진 시황(秦 始皇)이라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고, 항적(項籍)도 성내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觀夫高祖之所以勝,項籍之所以敗者,在能忍與不能忍之間而已矣。項籍唯不能忍,是以百戰百勝,而輕用其鋒;高祖忍之,養其全鋒,以待其弊,此子房教之也。當淮陰破齊而欲自王,高祖發怒,見於辭色。由此觀之,猶有剛強不忍之氣,非子房其誰全之?
 
고조(高祖)가 승리한 이유와 항적(項籍)이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참을 수 있느냐 참을 수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항적은 단지 참지 못하여 백전백승하였으나 경솔히 자신의 병력을 소모하였고 고조는 참을 수 있어 온전한 전력을 키워 상대방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렸으니, 이는 자방이 가르쳐준 것이다. 회음후(淮陰侯)가 제(齊)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을 때 고조가 성을 내어 말이나 안색에 나타났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고조는 아직도 강하고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있었던 것이니, 자방이 아니면 누가 고조를 온전히 보존하게 해주었겠는가?

  太史公疑子房以為魁梧奇偉,而其狀貌乃如婦人女子,不稱其志氣。嗚呼!此其所以為子房歟!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자방이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기이하고 위대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그 형상과 모양이 도리어 부인과 여자 같아, 그의 지기(志氣)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의심하였다. 아! 이것이 바로 자방(子房)이 자방답게 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