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시인(詩人) 이야기

심훈(沈熏, 1901년 10월 23일 ~ 1936년 9월 16일)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3. 8. 13. 09:52

1.  심훈

 


沈熏 (본명 심대섭 沈大燮)


출생 : 1901년 10월 23일 (대한제국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사망 : 1936년 9월 16일(34세)
직업 : 독립운동가,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 배우, 영화 감독, 각본가
학력 :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세인트 존스 대학교 철학과 중퇴
          중화민국 저장성 항저우 저장 대학교 극문학과 중퇴
경력 :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부장
종교 : 유교 → 개신교(감리회)
활동기간 : 1924년 ~ 1936년
장르 :  소설, 시, 영화 각본

심훈(沈熏, 1901년 10월 23일 ~ 1936년 9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시인, 언론인, 배우, 영화 감독, 각본가로 본명은 심대섭(沈大燮)이다. 경기도 과천군에서 3남 1녀 중 삼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아명으로 삼보(三保)나 삼준(三俊)을 사용하였다. 친일 성격을 띠었던 가족들과는 달리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로 인해 감옥에 투옥되고 학교선 퇴학 처분이 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잠시 체류하기도 했으며,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를 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서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할 때에는 장편 소설 《상록수》를 집필해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장티푸스에 사망하였다.

생애


1901년 경기도 과천군(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심훈의 집안은 '친일적 시류에 순응하는 전통적인 양반 가문 출신의 중산지주 계급'으로, 심훈의 두 형은 친일파였고, 심훈의 첫번째 부인은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청풍군 이해승(淸豐君 李海昇)의 누이 이해영(李海映)이었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던 심훈은 4학년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3월 5일 남대문 학생시위에서 구속되어 8개월형을 받아 투옥되었고, 학교에서도 퇴학 처분을 받으면서 집안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대학
이듬해 1920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세인트 존스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21년 결국 중퇴한 뒤, 중국 항저우로 가서 저장 대학교 극문학과로 재입학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듬해 1922년에 중퇴하고, 극문회를 조직하였다. 중국에 망명하는 동안 베이징에서 신채호와 이회영 등과 교우하며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부르짖었다.

1924년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은 《동아일보》에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1926년에는 《탈회》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언론 운동단체 철필구락부가 언론옹호발표회를 계기로 일제로부터 해산 처분을 받고 (철필 구락부 사건), 심훈 역시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했다. 같은해 순종이 서거하자 지난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독립 운동이 발발할 것이라 예감하고 《시대일보》에 '통곡 속에서'라는 이름의 시를 게재하였다. 심훈 선생의 예견대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하고, 식민지 현실을 다루는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집필,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상영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에서 '동방', '불사조' 등의 소설을 연재하다가 일제의 게재 중지 조치로 연재를 중단하게 된다. 이 당시 심훈의 대표작이기도 한 《그날이 오면》은 3·1운동 기념일에 발표된 시로, 원래는 시집으로 발간될 예정이었지만 일제의 검열로 인해 출판이 거절당하기도 했다.

1935년 《동아일보》가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하고, 창간 15주년을 맞아 농촌과 어촌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 소설을 공모하였다. 심훈은 충남 당진에 머물며 장조카 심재영(沈載英)의 야학 운동과 공동경작회 활동을 소재로 삼아 장편 《상록수》를 공모하였고 바로 당선되었다. 당선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해 농촌 학생들의 교육을 도우기도 했다. 심훈은 《상록수》를 영화화하고자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단행본 출간을 목표로 집필에 몰두하던 중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심훈 작가가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과 하는 뜻은 최은희, 허장강 배우 등이 출연한 영화로 신상옥 감독이 만들었다.

사회주의 문학활동 참여


1922년 고향인 조선에 돌아온 후에 후에 카프로 통합하는 염군사에서 활동했고, 1925년에 카프에 가입하였다.
사후
1949년에 시집 《그 날이 오면》, 1952년에 《심훈집》 7권과 1996년에 《심훈 전집》 3권을 출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는 일본 제국의 검열로 중단돼 미완성 작품으로 남음
2005년 7월 경기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기로 결정
심훈가의 장손인 심천보 씨가 심훈 선생 관련 유품 등 가문유물 414점을 당진시에 2013년 7월 16일 기증. 당진시에서는 2014년 3월, 심훈기념관을 준공하였다. 


1977년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첫 시작된심훈상록문화제는 심훈 선생을 기리는 복합문화예술 행사로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사)심훈상록문화제 집행위원회'가 현재 충남 당진시의 후원을 받아 그 정신을 이어지고 있다.


심훈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1997년 심훈문학상 제정을 시작으로 당진의 ‘(사)심훈선생기념사업회’와 ‘계간 아시아’가 공동주관하며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다. 2015년에는 심훈문학대상을 제정하여 기성 작가를 대상으로 문학 업적과 발전 공로를 치하하는 등 각계 각층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2.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11〉 심훈
“상록수 정신이 한국 근대화 이끌어”


< 월간조선,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015년 11월호 >

 

 
주로 밤에만 글을 썼는데 당시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남포등 아래에서 집필했다. 斗酒不辭여서 기자시절, 안 가 본 술집이 없을 정도였고 취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월급이 항상 부족했고 항상 가난에 쪼들렸다고 한다.

⊙ 장편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은 장조카 심재영
⊙ 경성방송국 아나운서 시절, 일본 천황과 관련한 구절을 고의로 삭제
⊙ ‌심훈의 큰형(友燮)은 春園의 《무정》에 나오는 ‘기자 신우선’의 실제 모델
⊙ 둘째형(明燮)은 감리교 목사로 6·25 당시 납북당해

 
  심훈(沈熏·본명 大燮·1901~1936)은 짧은 생애 동안 시와 소설, 산문, 영화평을 쓴 문필가이자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였으며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쓰고 각색·연출한 무성영화 〈먼동이 틀 때〉(1927년)를 제작한 영화감독이었다. 또 1926년 이경손 감독의 흑백영화 〈장한몽〉에서 여주인공 심순애를 못 잊는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로 출연하기도 한 전방위 예술인이었다.
 
  그는 한국 농촌계몽운동의 시작을 알린 장편소설 《상록수》를 탈고한 후 영화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장질부사(장티부스)로 사망했다. 고열의 감기증세를 앓다가 인삼을 달여 먹은 것이 장질부사로 변해 경성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했으나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숨을 거뒀다.
 
  두 형(심우섭, 심명섭)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한 후 경기도 용인의 선영에 안장됐다가 충남 당진군 ‘필경사(筆耕舍·충청남도 지정기념물 107호)’ 옆으로 이장했다.
 
  ‘밭 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글을 쓰겠다’는 뜻의 필경사는 심훈이 장조카 심재영(沈載英·1912~1995·심훈의 큰형인 심우섭의 장남)이 살던 충남 당진시 송악면 부곡리에 내려가 손수 지은 집이다. 심재영은 《상록수》에 등장하는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심훈이 이름 붙인 필경사에서 장편 《상록수》를 55일 만에 탈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작품은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문예작품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뽑혀 9월 10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 연재됐다. 그러고 보니, 《상록수》가 쓰인 지 올해로 꼭 80년이 된다.
 
  기자는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후손을 만나고 작품배경이 되는 현장을 둘러보았다. 당진 부곡리는 동쪽으로 아산만이 있고, 서쪽으로는 송악산이 보이는 곳이다. 심훈 선생이 살던 시절엔 필경사 앞으로 쪽빛 바다가 넘실댔겠지만 지금은 바다를 메워 건립한 국가산업단지(부곡공단)가 시야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곡리(《상록수》 배경으로 등장하는 ‘한곡리’ 마을의 비참한 농촌이 바로 당진 부곡리다)가 80년 만에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청송심씨 안효공파의 26세손이자 심훈의 장조카 심재영의 아들 천보(天輔·76)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40여 년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4년 전 귀향했다. 심훈의 유품 등 414점을 당진시에 기증, 필경사 인근에 심훈기념관이 세워졌다. 심천보씨의 말이다.
 
  “1930년 5월, 열아홉 되던 아버지(심재영)께서 당진 부곡리에 정착해 야학과 공동경작회(共同耕作會)로 농촌운동을 이끄셨어요. 또 서울에서 가난에 지치고, 항일작가로서 길이 막힌 심훈 선생을 당진으로 오게 하셔서 삶을 재정비하게 도와드렸습니다.
 
  서울 태생(노량진)인 심훈은 1932년 충남 당진으로 내려와 소설 《영원의 미소》와 《황공의 최후》 《상록수》 등을 썼다. 심훈에게 당진은 문학 산실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선친이 부곡리에 처음 왔을 때 방에 종이로 도배한 집이 5~6호밖에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배하지 않은 집이 대여섯 집에 불과할 정도로 생활수준이 나아졌다고 합니다. 농촌계몽운동에의 헌신을 담은 《상록수》가 일제 강점기 전국 곳곳의 수많은 젊은이에게 내 나라, 내 고장을 지키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길을 일깨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충남 당진과 《상록수》, 그리고 조카 심재영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는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심훈이 신문기자 시절(1928~1931) 문자보급운동의 전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농림학교 학생 박동혁과 여자신학교 학생 채영신은 ‘○○일보사 주최 학생계몽운동 귀환 보고회’ 석상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여기서 ○○일보가 바로 《조선일보》다.
 
  두 사람은 연인의 감정과 동지적 결속을 느끼며 학교를 자퇴하고 박동혁은 한곡리로, 채영신은 청석골로 내려가 야학과 조합을 설립해 일제 강점기 농촌현실을 고발하고 고리대금업자와 일제의 간섭 등 부조리와 맞선다. 작품 말미에 박동혁은 일경에 수감돼 있는 동안 채영신은 과로로 쓰러져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끝까지 싸워 달라’는 그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며 한곡리로 돌아왔을 때 박동혁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농우회관 낙성식 때 심은 상록수였다.
 
  —《상록수》에서 박동혁의 모델이라는 심재영 선생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지는 1912년생인데 서울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당진에 내려온 뒤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었어요. 경성공립농업학교(서울시립대 전신)를 나왔는데 농업학교에 진학하신 이유도 심훈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1923년경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 선생이 우리집(서울 노량진) 행랑채에서 살던 조준기(趙俊基)라는 친구 분과 대화하시는 걸 우연히 듣게 됐는데, 말씀 속에 ‘농업학교를 나와서 농업과 농촌을 위해 일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아버지는 오래도록 그 말씀이 마음에 남아 경농(경성농업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농촌계몽운동의 뜻을 세워 당진에 내려와 야학당을 세우셨죠. 아버지는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좇지 않고 바보처럼 살아서 후세에 빛을 남겼다고 생각해요.”
 
  1930년 심재영이 경농을 나와 충남 당진에 정착하자 이듬해 심재영의 조부모인 심상정·해평윤씨 부부가 내려왔고 한 해 뒤에 심훈 내외 역시 당진을 찾았다.
 
  “아버지 말씀이 심훈 선생과 어린 시절, 한집에 오래 살았고 아버지를 무척 귀여워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빈털터리셨던 심훈 선생은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서울에서 실직하고 어렵게 사셨어요. 아버지가 ‘시골로 내려오시라’고 권하니 세간도 없이 갓난아이와 부인만 데리고 당장 오셨다고 합니다.”
 
  당진에 정착한 심훈은 조카 심재영의 집에서 소설 《영혼의 미소》(1933년 7월부터 34년 1월까지)와 《직녀성》(1934년 3월부터 35년 2월까지)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고 《상록수》도 완성했다. 또 심훈의 3남(재건·재광·재호) 중 둘째와 셋째가 당진에서 태어났다.
 
  —심훈과 심재영 두 분 사이는 어땠나요.
 
  계속된 심천보씨의 증언이다.
 
  “11살 차이였는데 어린 시절 한집에서 나서 자랐으니 가까운 사이였겠죠. 심훈 선생은 조카들을 사랑했는데 아버지의 동생(沈載雄)이 일찍 돌아가시자 시 〈비오는 밤〉과 〈웅의 무덤에서〉를 쓰셨어요. 그만큼 조카를 사랑했던 겁니다.”
 
 
  두주불사에 항상 가난에 쪼들려
 

  심훈은 심재영이 이끄는 부곡리 ‘공동경작회’ 회원과 가까이 지내면서 피폐한 농촌현실을 직접 경험했다. 그래서 조카를 주인공으로 해 쓴 소설이 《상록수》였다.
 
  “심훈 선생이 《상록수》를 쓸 당시 소설 제목을 두고 고민을 했는데 하루는 아버지 심재영에게 ‘상록수, 상청수, 해당화, 여명 중에서 어느 제목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상록수의 어감이 좋고 농촌은 녹색이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는데 심훈 선생도 같은 생각이었대요.”
 
  —당시 농촌현실은 어땠나요. 공동경작회는 무슨 일을 했죠.
 
  “아버지가 부곡리에 처음 왔을 때, 지주 겸 자작농이 전체 1할 정도였고 자작 겸 소작농이 2할, 나머지 7할이 순 소작농이었다고 합니다. 또 문맹이 8할, 소학교 취학률이 3할, 가옥은 거의 초가였고 1년 농사를 지어 그해 1년 동안 식량을 마련할 수 있는 자급농가는 겨우 2할 정도였다고 해요. 아버지는 당시 상황을 ‘한마디로 비참 그것이었다’고 표현하셨지요.
 
  아버지는 부곡리 청년 12명과 함께 공동경작회를 만들었는데 소작답을 약간 얻고 간석지(干潟地)도 개간했어요. 회원 모두 함께 일하고 함께 봉사하는 조직이었지요. 매년 수입을 저축해 3년 후에는 자작답이 2400평, 소작답이 2400평이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 말기, 마을 청년들이 강제 징용으로 떠나게 되고 양곡 공출로 식량 사정이 악화돼 운영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일제의 압력으로 결국 10년 만에 해산하고 말았다.
 
  —《상록수》의 기본 골격인 박동혁과 채영신의 러브스토리는 어떻게 해서 나왔나요.
 
  소설 속 ‘박동혁’의 실제 모델이 심재영이라면, ‘채영신’의 실제 인물이 최용신이다. 최용신(1909~1935)은 YWCA의 농촌 파견교사로 임명되어 1931년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현재의 안산시 본오동)에서 농촌 아이들을 가르치며 문맹퇴치운동을 펼치다 사망한 인물이다. 과로사로 26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사실이 알려지자 1000여 명의 조문객이 찾아와 함께 슬퍼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심훈 선생은 《상록수》의 여자주인공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해요. 하루는 신문기사에 난 최용신의 안타까운 사연을 읽고서 아버지를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재영아, 됐다! 찾았다!’고요. 실제로 최용신이 살던 마을도 2~3번 찾아가고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구상한 겁니다. 소설 속 박동혁과 채영신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동지였지만 실제 인물인 심재영과 최용신은 전혀 모르는 사이입니다.”
 
  심훈 문중에 따르면, 생전 심훈은 항상 두꺼운 수첩과 만년필을 들고 다니며 글 쓰는 데 소재가 될 만한 것은 모두 기록했다고 전한다. 주로 밤에만 글을 썼는데 당시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남포등 아래에서 집필했다. 두주불사(斗酒不辭)여서 기자시절, 안 가 본 술집이 없을 정도였고 취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월급이 항상 부족했고 항상 가난에 쪼들렸다고 한다.
 
  심천보씨의 말이다.
 
  “심훈 선생은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입학했다가 3·1 만세사건의 학생 주동자로 몰려 학교에서 퇴학, 옥고를 치렀어요. 그때 어머니(해평윤씨)에게 쓴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 글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 나이에 죽음과 삶의 길을 헤아리는 지혜의 글을 쓴다는 게 놀랍습니다. 출옥 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해 연극단체를 조직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했는데 월급도 나오기 전에 술을 마셔 버려 생활고를 겪었다고 합니다. 큰형 심우섭이 근무하던 경성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입사했는데 자꾸 저항을 해서… 오갈 데가 없으니 당진으로 내려온 것이죠.”
 
  —저항을 했다는 말씀은….
 
  “일본에 저항했다는 것이죠. 큰형 심우섭이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나 해라’고 취직시켜 줘도 자꾸 사상관계로….”
 
  《조선일보》 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1930년대〉에 따르면,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근무할 때 일본 천황과 관련된 구절을 고의로 빼먹어 방송국을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영화감독 沈熏 : 〈먼동이 틀 때〉는 조선 名畵 5위

 
  시인이자 소설가, 신문기자였던 심훈은 영화배우로도 출연한 적이 있고 무성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해 주목을 받았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활(日活) 촬영소의 무라타미노루(村田實) 감독 밑에서 6개월 동안 영화수업을 받았다. 당시 일본영화 〈춘희〉에 단역으로 출연, 한국인 최초로 일본영화에 출연했다는 기록도 있다.
 
  심훈은 귀국 후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서울대 박정희 연구교수에 따르면 ‘조선영화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숏(shot) 안에서 카메라를 이동해 촬영하는 팬(pan·좌우돌림) 기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학예부 안석주는 ‘우리가 모든 조선영화를 불살라 버린다면 이 영화를 남겨 놓는 데 과히 부끄럽지 않다’(《조선일보》 1929년 1월27일자)고 평가했을 정도다.
 
  《조선일보》 제1회 영화제(1938년)에서 실시한 ‘조선 명화(名畵)의 추천투표’ 결과, 무성영화 부문에서 2810표를 얻어 5위를 차지했다. 1위는 〈아리랑 전편(前篇)〉(4947표)이었다.
 
  3000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먼동이 틀 때〉는 5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1926년 개봉한 나운규의 〈아리랑〉이 1200원의 제작비로 15만명의 관객을 모은 것과 비교하면 흥행 면에서 사실상 실패했다. 이후 심훈은 영화감독을 접고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심훈家의 엇갈린 운명
 

  —심훈 선생은 가족 중에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나요.
 
  “제게 증조모가 되는, 선생의 어머니인 해평윤씨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증조모는 지혜롭고 차분한 분이었어요. 반면 증조부는 대머리에다 다혈질이었어요.
 
  증조모는 제가 열일곱 때 돌아가셨는데 어린 시절 저와 한방에서 지냈죠. 맛난 것이 생기면 장롱 속에 숨겨 뒀다가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꺼내 주시곤 했는데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젊은 시절, 당신께서 아들 3형제를 낳아 꽃방석에 앉을 거라 생각하셨다고요. 왜냐면 우섭·명섭·대섭(심훈) 아들 3형제 모두 똑똑하고 잘났으니까요. 그런데 셋째가 옥살이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가장 먼저 세상을 뜨고, 둘째는 납북당해 소식을 모르고… 아들 셋 모두가 구설수에 올랐으니까요. 증조모께서는 ‘내가 무슨 얼굴로 밖에 나다닐 수 있냐’며 평생을 두문불출하셨습니다.”
 
  심훈의 어머니 해평윤씨는 지혜롭고 인자한 여성이었다. 서울 은로보통학교 교장과 신북면장을 지낸 남편 심상정(沈相珽)이 중풍으로 쓰러지자 얼굴 한 번 구김이 없이 묵묵히 병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 윤현구는 조선 말 3대 문장가로 꼽히는 윤희구(尹喜求·1867~1927)의 막내로 시·문·화(詩文畵)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문중에 따르면, 윤씨 어머니는 덕망이 있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목소리가 낭랑해 시조를 읊으면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였고 친척들의 모임에 윤씨의 시조 읊기가 반드시 들어 있었다.

1935년 8월 13일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문예작품 현상공모에 심훈의 《상록수》가 당선작에 선정되었다.


  심훈의 큰형이자 심재영의 아버지인 심우섭(沈友燮·1890~1948)은 경성 휘문의숙 1회 졸업생으로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총무과, 문서과 등 다양한 부서에서 일했고 경성방송국 한국어방송 과장,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이사, 동민회(同民會) 이사도 역임했다. 동민회는 1924년 4월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사상이나 사회주의 이념을 비판하고 내선융화 등을 선전하기 위해 조직된 친일단체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한 심우섭은 당시 한국인 가운데 가장 많이 조선총독과 만났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문재(文才)도 있어, 1914년부터 1919년까지 《매일신보》에 신소설 《형제》 《산중화(山中花)》 《주(酒)》 등을 연재해 심훈보다 먼저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심천보씨는 조부 심우섭을 이렇게 평가했다.
 
  “심우섭 할아버지는 최남선, 이광수, 진학문, 이상협 같은 분들과 친한 사이였고 춘원 이광수의 소설 《무정》 속 ‘신문기자 신우선’의 실제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한국방송70년사》(1997)를 보면, 마흔다섯 무렵인 1935년 경성방송국 3대 제2방송과장으로 계실 때 아나운서에게 우리말의 정확한 발음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아나운서는 전문학교나 대학 출신이 대부분이었지만 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우지 못해 발음의 잘잘못을 가리지 못했다고 해요. 예를 들어 고기압을 일본말같이 ‘고오기압’이라고 길게 읽고 ‘고기압’이라고 짧게 읽을 줄 몰랐다는 겁니다.”
 
  둘째 심원섭(沈元燮)은 일찍 남편과 사별해 홀로 살았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조카 심재영이 있는 충남 당진에서 평생을 살다가 말년에 서울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셋째 심명섭(沈明燮·1898~?)은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졸업한 뒤 감리교 목사가 됐다. 1937년 《기독신문사》 이사를 지냈고 38년부터 41년까지 경성 중앙교회 담임목사, 42년에는 감리신학교 부교장이 됐다.
 
  심명섭은 해방 후 기독교교육협회 부총무를 맡아 활동하다 6·25 때 납북돼 생사를 알 수 없다. 또 심명섭이 낳은 2남2녀의 자녀도 지금까지 소식이 끊어진 상태다. 당시 두 아들(재철, 재천)은 서울대생이었고 두 사위 중 한 명은 서울대 교수였다고 한다. 문중에 따르면, 심명섭의 자녀들과 사위들이 북한에 생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심훈이 충남 당진에 내려와 ‘필경사’를 짓기 전까지 장조카 심재영의 사랑채에 머물렀다.   문중 관계자의 말이다.
 
  “심훈 선생과 심재영 선생은 애국적 인물이자 이른바 ‘상록수 정신’을 이 땅에 퍼지게 한 지사입니다. 2000년 8월 15일 김대중 정부는 심훈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어요.
 
  반면 심훈의 형인 심우섭과 심명섭은 당대 뛰어난 인물이자 선각자들이었지만 친일이라는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또한 일부 심훈가의 후손들 중 북한에 사는 분도 있어요.
 
  집안 내에 자랑스러움과 비극, 아픔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식민지와 해방, 전쟁과 분단을 겪은 우리 민족의 고단한 현실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심훈 4남매의 관계는 어땠을까. 심천보씨가 말을 받았다.
 
  “막내(심훈)는 재주가 있었지만 큰형님(심우섭)을 굉장히 어려워했다고 합니다. 심우섭은 성격이 불같은 데다 장손이어서 동생들이 꼼짝도 못했다고 해요. 원섭·명섭 남매는 여성이고 목사여서 성격이 차분했다고 합니다.”
 
  심훈가에 따르면, 심훈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엄숙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다정다감하고 장난기가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심훈이 《조선일보》 학예부 동료인 안석주와 함께 길을 걷다가 일본 순경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순경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신사 두 사람이 걷고 있어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한참 가다가 또 그러고, 또 그러고 했으나 어찌나 동작이 날쌘지 끝내 잡지 못했다.
 
 
  두 번의 결혼과 후손들 
 
  심훈은 두 번 결혼했다. 순종의 가까운 친척이자 한일병탄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 왕족으로 대우받아 후작(侯爵)이 된 이해승(李海昇)의 여동생과 1917년 결혼했다. 처음엔 아내의 이름이 없어 심훈이 직접 해영(海暎)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고 신문물을 배우게 하려고 아내를 진명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이해영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별거하고 끝내 헤어졌다. 그리고 1930년 열아홉의 무희(舞姬)인 안정옥(安貞玉)과 혼인한다. 심훈과 안정옥은 나이 차가 11살이나 됐다. 심훈가 관계자의 말이다.
 
  “심훈과 이해영이 6~ 7년 가까이 살았다고 하는데 아기를 낳지 못해 별거하다 끝내 이혼을 하셨어요. 서울 명륜동에 살았는데 이혼 후에도 친척들이 명절에 인사드리러 찾아뵙곤 했어요. 호적에는 정리가 됐다지만 이전처럼 집안 할머니로 모셨어요. 6·25 때는 당진으로 피란을 왔습니다. 이해영 할머니는 조카 둘을 친자식처럼 키웠는데 모두 자수성가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서울대병원 신장내과 교수가 되었어요.”
 
  심훈의 둘째 아내 안정옥은 무용가 최승희가 후계자로 삼으려 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고 근화여학교(덕성여대 전신)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다고 한다. 안정옥은 아들 셋을 낳았다. 장남 재건(在健)은 1932년, 차남 재광(在光)은 1934년, 삼남 재호(在昊)는 1936년에 태어났다.
 
  장남 재건은 서울 휘문고를 다니다 6·25 때 행방불명이 됐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봤다는 이가 있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심훈가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북으로 갔다. 북한 체제에 저항해 나중 어려운 삶을 살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차남 재광은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해양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삼남 재호는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미국으로 이주했다.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충남 당진은 심훈과 상록수의 고장으로 기세를 올리고 있다. 1977년부터 지금까지 ‘심훈상록문화제’를 열고 있고 작년 9월 ‘심훈기념관’을 개관했다. 또한 심훈의 문학정신을 연구하기 위해 지난 9월 ‘심훈문학연구소(소장 최원식)’가 문을 열었다. 심천보씨가 심훈문학연구소 이사장을 맡았다. 그의 말이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와 중앙대 방현석 교수가 중심이 돼 박사급 연구자들이 심포지엄을 열고, 학술지 발간, 심훈 연구자들에게 경제적 지원도 할 생각이 있어요. 심훈문학 연구의 국제화를 실현하기 위해 연구자 교류네트워크와 창의적 미래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심훈문학교실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심훈과 심재영 선생 같은 선각자는 세상에 없지만 그분의 상록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인간 상록수’들이 한국농촌운동의 모델이 되어 조국 근대화를 이뤄 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