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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작가 길승수

모꽃 _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24. 1. 25. 13:17

《고려거란전쟁》 작가 길승수

 


< Topclass, 선수현 기자 , 2024년 02월호 >

 




길승수
서울대학교 역사학과를 중퇴하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다. 역사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후 고려 역사를 깊이 파고들면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다룬 ‘고려거란전쟁’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JTBC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 대본 작가로 참여했으며 KBS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의 원작자다. 


1009년 고려. 총사령관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이 즉위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이듬해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와 거란의 물러설 수 없는 싸움, 2차 고려거란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거란은 전쟁이 끝나고 고려에 친조(황제를 알현함)를 요구하지만 현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018년 거란은 10만 병력으로 또다시 침공을 단행했다. 지속적인 거란의 침공으로 사정이 매우 어려웠지만 고려는 사력을 다해 막아냈다. 고려사 기록에 “거란군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획득한 말, 낙타, 갑옷, 병장기가 다 셀 수 없는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고 나온다. 거란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고려가 어떤 각오로 전쟁에 임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흥미로운 소재이나 다루기 쉽지 않았다. 남아 있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길승수 작가가 ‘고려거란전쟁’을 소재로 집필을 시작한 건 그야말로 도전이었다. 고려 역사를 다룬 국내 사료뿐 아니라 고려를 둘러싼 거란과 송나라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중국 자료까지 파헤쳤다. 옛 한자를 하나씩 해석하고 은유적 표현을 꾸역꾸역 번역해가며 몰두했다. 결국 누구도 건들 수 없던 1000년 전 역사는 집요한 연구와 상상력이 더해져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났다. 그가 쓴 이야기는 KBS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으로 재탄생해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드라마는 2023년 ‘KBS 연기대상’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강감찬을 연기한 배우 최수종은 16년 만에 대상을 수상했으며 김동준(현종), 지승현(양규), 이원종(강조) 등은 각각 최우수상, 우수상, 조연상을 거머쥐었다. 드라마가 방영된 지 중반도 넘지 않은 시점이었다. 흡인력 있는 전개와 역대급 전쟁신을 기반으로 정통 사극의 저력을 보여준 결과다.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 역사의 재미를 원작자 길승수 작가를 만나 들어봤다. 


993년 거란의 침공을 고려거란전쟁 1차로 규정하죠. 고려 서희가 적장 소손녕을 상대로 외교 담판을 지은 걸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야기를 1차가 아닌 2차 침공 전후부터 다룬 이유가 있나요?


“고려 역사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10쪽 내외일 거예요. 흥미로운 소재인데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이유죠. 아무도 안 쓴 이야기를 제가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차와 2차 전쟁 사이에 시차가 꽤 있는 데다 2차 전쟁이 10년간 이어지기 때문에 2차부터 본격적으로 다뤄보기로 했습니다. 1차에서 부각되지 않던 인물들이 2차부터 등장해 쭉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자료가 많지 않아 집필 과정이 쉽지 않았나 보군요.


“2009년부터 무작정 쓰기 시작했어요. 1년이면 완성할 줄 알았는데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쓰다 보니 무협지에 가깝더군요. 안 되겠다 싶어 고려사를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고려 역사부터 거란, 송나라까지 뒤져 공부했어요. 거란 복식을 다룬 중국 사극도 참고했고요. 기본기를 다지니 3년이 흘렀어요. 그 과정이 어려워도 재미는 있었습니다. 이제 소설로 넘어갈 차례인데, 그동안 쓴 건 역사책에 가까웠어요. 사실 바탕에 사람의 마음을 담자 점차 소설의 틀이 갖춰졌죠.”

그동안 고려 역사의 인물은 잘 알려지지 않았죠. 특히 고려 성군으로 평가받는 현종을 깊이 들여다본 콘텐츠는 드물었습니다.


“현종은 조선의 세종대왕보다 높이 살 수 있는 인물입니다. 세종대왕 때는 전쟁이 없었지만 현종은 모든 국력을 동원해 거란을 막았잖아요. 기록에 현종의 성격이 잘 드러나진 않지만 관용의 정치를 표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몽진(임금의 피란) 중에 왕을 시해하려던 자조차 만회할 기회를 줘요. 기본적으로 자질이 있는 데다 궁에 들어가기 전 절에서 생활하며 관용과 살생 지양에 대한 생각이 심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현종은 부인이 열세 명으로 왕건 다음으로 많아요. 몽진길에 공주 절도사 김은부가 현종을 따뜻하게 대접하는데, 김은부는 딸이 셋 있었어요. 모두 현종과 결혼해 원성왕후·원혜왕후·원평왕후가 되죠. 그동안 족내혼(친족끼리의 혼례) 탓인지 왕가에 자손이 많지 않았는데 현종은 김은부 딸들에게서 많은 자녀를 얻습니다. 자녀는 훗날 덕종·정종·문종이 되고, 이 계보가 고려 후기 공민왕 때까지 이어집니다.”

현종의 업적으로 평가할 만한 사실이 있다면요?


“인재를 등용할 줄 알았죠. 대표적으로 강감찬은 현종이 발탁한 인물이에요. 거란의 1차 침공 당시 총사령관 명칭이 ‘군사’였는데 이후 ‘도통’으로 바뀝니다. 드라마 초반에 등장한 ‘강조’(이원종)가 도통이었죠. 그런데 도통이더라도 ‘서북면 도통’이라고 해서 권력을 ‘서북면’으로 한정합니다. 왕권에 비견되는 막대한 권력이기 때문에 지역 제한을 둔 것이죠. 현종은 그런 지역 제한이 없는 ‘상원수’라는 관직을 도통 대신 신설해 강감찬을 임명합니다. 강감찬을 대단히 신뢰했다는 의미예요. 또 현종은 지방제도를 정비했습니다. 지방 관리 대부분이 호족으로 제도 정비에 반발이 심했을 텐데도 추진해요. 결과적으로 ‘5도양계’라는 지방행정조직을 설치해 사법·행정력이 인근 지역으로 미치게 했어요. 지방관이 파견된 곳은 주현, 행정력이 미치는 곳은 속현으로, 전국을 장악할 틀을 다진 거죠.”

현종의 발탁 전 강감찬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죠. 고려사에 “형체가 작고 못생겼으며 옷은 때가 묻고 해어져서 볼품이 없다. 하지만 조정에 서서 큰일을 만나면 큰 계책을 결정해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 됐다”고 적혀 있는 사실도 흥미롭더군요.


“강감찬은 서른여섯 살에 장원급제를 하는데 당시 이름은 ‘강은천’이었어요. 2~3년에 한 번 치르는 과거시험에서 열 명 내외가 발탁되는데 강감찬은 서른여섯에 시험에 통과했다가 환갑이 지난 1009년 역사에 다시 등장합니다. 웬만한 관리는 합격 후 ‘재추(재상·중추원)’에 들어가는데 장원급제자가 ‘예보시랑’에 머문 건 지금으로 치면 행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수십 년간 사무관을 지낸 셈이에요. 추측컨대 성격대로 바른 소리를 했다가 지방 관리를 전전했거나 적당한 아부를 못 했을 가능성이 커요. 외모도 오죽 못생겼으면 ‘키가 작고 머리가 크다’ ‘비루하다’라고 표현돼 있겠습니까.” 

그런 강감찬을 등용한 걸 보면 현종의 안목이 꽤 탁월했나 봅니다.


“1010년 거란군이 개경까지 밀고 들어왔을 때 모든 신하들이 항복을 권하지만 강감찬은 몽진을 주장합니다. 현종도 내심 누군가 그런 말을 해주길 바랐는데 강감찬이 한 거죠. 결국 현종은 나주로 향합니다. 할머니가 신라계여서 경상도, 특히 합천 지역과 인연이 깊은데도 왜 나주로 향한 걸까요? 당시 나주에서 군량미를 바다로 수송했는데 나주에서 버티면서 끝까지 가보려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 현종과 강감찬의 관계가 드라마에서는 정치적 사제 관계로 묘사되는데 저는 친구에 가까웠다고 봅니다. 파격적인 생각과 행동이 잘 맞는 ‘브로맨스’랄까요. 현종이 몽진에서 돌아온 후 강감찬은 승진가도를 달립니다. 또 예순이 넘어 군사 경험을 쌓기 시작하는데 키가 작고 왜소하다 보니 활쏘기보다 지략에 집중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드라마를 통해 ‘양규’를 재발견했습니다. 양규를 연기한 배우 지승현도 출연 전에는 양규를 잘 몰랐다고 하는데 많은 이들이 그랬을 것 같아요. 


“양규는 교과서에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활약했다’고 한 줄로만 등장합니다. 무술도 잘하고 엄청난 지략가로 말이 안 되는 ‘사기캐’예요. 조선에 이순신이 있다면 고려에는 양규가 있다고 할 수 있죠. 1000~1700명 병력으로 거란군 6000명이 지키는 보급기지 곽주를 탈환하고 소수 정예병으로 포로 3만 명을 구출한 뒤 고슴도치처럼 화살에 맞아 전사합니다. 양규는 적당히 싸우다 거란군을 돌려보내면 다시 쳐들어올 거라 생각해 끝까지 싸웠어요. 거란은 양규에게 입은 피해를 회복하는 데 3년이 걸렸어요. 양규는 그걸 노린 거죠.”

당시 거란의 위세는 어느 정도였나요?


“거란은 유목민족답게 거대한 나라를 건설합니다. 동쪽으로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남쪽으로는 지금의 북경 지역, 서쪽으로는 몽골 지역을 점령하죠. 동서 교역로를 장악한 것입니다. 거란의 황위는 태조·태종·세종·목종으로 이어지는데, 세종과 목종이 암살을 당하며 거란의 내부 사정이 매우 어지러워졌어요. 그때를 틈타 동쪽에서는 발해 부흥 세력이 거란을 압박하고, 남쪽에서는 송나라가 도전해옵니다. 서쪽에서는 조복 부족(지금의 몽골)이 반란을 일으켜 거란이 위축되는 형세였죠. 그때 경종(거란의 5대 황제)이 즉위하는데 경종은 병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후인 ‘소작’이 경종을 대신해 거란을 통치해요. 소작은 ‘소태후’ 혹은 ‘승천황태후’라고 불리는데요. 승천황태후의 등장으로 거란은 다시 팽창합니다. 경종 다음 야율융서가 거란의 6대 황제인 성종이 되는데요. 승천황태후는 아들인 야율융서를 대신해 국정을 계속 운영합니다. 송나라가 몇 차례 거란을 밀어내려 하지만 수십만 병력이 전사하죠. 야율융서는 어머니 그늘에 가려 있다가 1009년 승천황태후가 사망하고서야 서른아홉 살에 실질적인 황제가 됩니다. 고려와 2차 전쟁을 일으킨 시기죠. 당시 말은 탱크 같은 존재인데요, 거란은 기마에 익숙하니 전투력이 막강했습니다. 천고마비라는 말 있죠? 가을이 되면 말이 살찐다는 뜻인데, 곧 유목민이 쳐들어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강이 얼어 말을 달릴 수 있으니까요. 거란 입장에서 겨울에 전쟁을 끝내야 하는 이유였죠.”

고려는 검차를 무기로 거란에 맞서는데 검차가 고려 승리에 주요한 역할을 하더군요.


“유목민을 막기 위해 수레로 만든 진법을 사용합니다. 검차 앞에는 창을 설치하고 말이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로 만들었어요. 또 괴물 형상을 그려놓아 말이 가까이 와서 보면 놀라도록 했어요. 사람이 방패로 막을 경우 350~700kg의 말이 달려왔을 때 금세 뚫릴 걸 대비한 거죠. 고려는 검차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성곽처럼 방어를 한 거예요.”

드라마 후반부에는 강감찬의 활약이 더 돋보이겠죠. 어떤 점에 주목하면 재밌을까요?


“1018년 거란이 또다시 10만 대군을 이끌고 옵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대항해요. 이때 거란이 흥화진을 포위하는데요. 강감찬은 흥화진 동쪽의 강을 소가죽과 밧줄을 엮어 막아둔 채 기다렸다가 매복한 기병으로 거란군을 공격합니다. 산악 지형이라 발목 정도 물에 잠겼을 텐데 겨울인 걸 감안하면 거란에 엄청난 피해를 가했을 거예요. 물로 성곽을 공격한 전술은 있어도 성곽을 포위한 군을 물로 공격한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드뭅니다. 거란 소배압은 퇴각할 만도 한데 본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합니다. 이를 강감찬이 추격하죠.” 

고려·거란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귀주대첩은 어떤 양상으로 흘러갑니까? 그동안 파격적인 발상과 소신을 굽히지 않던 강감찬의 성격이 전장에도 묻어날 것 같은데요.


“기동력이 좋은 거란에 비해 고려군은 느리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보통은 성을 끼고 기다리는 전략을 택하죠. 하지만 강감찬은 ‘우리도 빠르다’라며 산악으로 달리는 거란군을 해안을 따라 평행으로 추격합니다. 거란군이 가는 산악은 지형이 안 좋고 고려군은 그만큼 훈련이 돼 있어 가능한 방법이었어요. 소배압 입장에서는 개경까지 가면 고려가 뚫릴 것 같은데 고려군은 생각보다 탄탄했습니다. 생각보다 개경의 방어가 굳건하자 소배압은 회군을 합니다. 여기서도 강감찬은 추격을 멈추지 않아요. 거란군이 귀주에 이르자 동쪽 들판에서 맞서 싸웁니다. 귀주대첩이죠.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남쪽에서 비바람이 몰아쳐 거란군이 있는 북쪽으로 불기 시작합니다. 고려군은 기세를 몰아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어 10~30만 대군의 거란을 거의 몰살합니다. 강감찬 이후 이렇게 큰 전투는 없을 거예요.”

고려 역사를 깊게 탐독하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도 있었나요? 책에서는 ‘귀주대첩’을 ‘구주대첩’으로 쓰던데요.


“귀주대첩이 벌어진 귀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예요. 귀주도 구주로 발음했고요. 다만 전쟁 명칭으로는 귀주대첩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역을 발음할 때는 ‘구주’, 전투 명칭을 말할 때는 ‘귀주대첩’이 된 것이죠. 그 이유는 파악할 수 없어요. 추측해보면 근대에 ‘구’로 발음하기로 약속하고는 ‘귀’로 발음한 걸 수도 있고, 쉬운 한자로 바꾸면서 구를 귀와 헷갈린 것일 수도 있어요. 저는 지역명인 구주를 먼저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역명과 통일해서 ‘구주대첩’을 사용했습니다. 또 993년 거란의 침공을 1차로 여기죠. 거란의 2차 침공을 1010년, 3차 침공을 1018년이라고 하며 귀주대첩을 3차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거란은 1010~1017년에도 꾸준히 쳐들어옵니다. 엄밀히 말해 귀주대첩은 거란의 6차 침공이에요. 거란은 1023년 야율해령의 7차 침공까지 감행하죠. 분류 기준을 어떻게 둬도 귀주대첩은 3차가 될 수 없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고려 역사를 치열하게 파고든 흔적이 역력해요. 역사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군을 제대하고 서울대 역사학과에 입학했어요. 점수에 맞춰 진학한 탓에 공부가 재미없고 나이가 있어 잘 어울리지도 못해 결국 중퇴했습니다. 사법고시를 준비했는데 1차를 붙으니 더 이상 하기 싫더라고요. 진지한 고민 없이 도피하듯 대학생활과 시험 준비를 하다 보니 동기 부여가 잘 안됐습니다. 그러다 밥벌이는 해야 하니 학원에서 초등학생 수학을 가르쳤어요. 하루는 지각한 아이한테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는데 그 아이가 그러더군요. ‘선생님이 성실하게 살았다면 이 자리에 있었겠냐’고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 싶었죠. 지금까지 하기 싫으면 쉽게 관두며 살았는데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30대 중반에 역사 소설을 써보기로 했어요.”

2009년 집필을 시작하고 첫 책이 나온 2018년까지 9년이나 걸렸는데요.


“아까 말씀드렸듯 중간에 3년간 역사 공부를 하고 집필을 이어갔어요. 원고는 2015년에 완성했는데 정작 책을 내기까지가 힘들었어요. 출판사 열 군데에서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1000쪽이 넘는 역사 소설이라 잘 보지도 않더군요. 우울증이 왔어요. 글을 쓸 때는 자신 있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그나마 인터넷에 웹소설을 올리고 팬이 생겨 버틸 수 있었죠. 한 파워 블로거는 《삼국지》보다 재밌다고 평가해줬어요. 내가 틀리지 않았나 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언젠가 알아줄 거라 믿으며 계속 글을 썼습니다. 2018년 자비로 《고려거란전기: 겨울에 내리는 단비》를 출판했는데 출판물은 반응이 없어도 영상 종사자는 볼 것 같았어요. 실제로 얼마 안 가 JTBC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 대본작가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KBS와 판권계약을 하며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으로 이어졌고요. 작년에는 초판을 좀 더 쉽게 수정해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을 출간했고 올해 《고려거란전쟁: 구주대첩》도 나올 예정입니다.”

고려거란전쟁을 시리즈로 이어가는군요. 그 시대 역사가 현대에 주는 시사점이 있을까요?


좋은 정치가 나라를 지킨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고려가 거란을 막음으로써 주변국으로부터 엄청난 대우를 받았는데요. 송나라는 고려 사신을 극진히 대접했고, 거란 멸망 후 등장한 금나라(여진)도 고려를 건드리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고려와 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프다는 거죠. 고려는 현종 이후 약 200년을 평온하게 보내요. 반면 조선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를 생각해보세요. 왕으로서 역량이 부족한 선조, 인조로 인해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습니까. 전쟁 후 외교적으로 명과 청에도 당당하지 못했죠. 우리 역사에도 현종, 강감찬, 양규처럼 좋은 왕과 관리가 있었다는 걸 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길승수 작가와의 인터뷰는 서울 관악구 낙성대 강감찬전시관에서 진행됐다. 주변에 공원이 조성돼 있어 시민들은 역사 속 바탕에서 일상을 즐겼다. 낙성대(落星垈)는 강감찬이 태어난 집터가 위치한 곳으로 ‘별이 떨어진 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강감찬이 태어난 날 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입신양명을 꿈꾸며 장원급제까지 한 역사 속 인물은 큰 별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스스로를 갈고닦은 그는 결국 60대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70대에 노구를 이끌고 전장을 달렸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깨어 있었던 강감찬이 없었다면 지금의 낙성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길승수 작가가 밟아온 시간도 강감찬과 닮아 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역사를 탐독하고 다져온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잘 몰랐던 고려거란전쟁을 알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