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 별세

 

 

<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2023.10.14.  >

 


단색화 거장 박서보(92) 화백이 14일 오전 별세했다. 지난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화가는 당시 페이스북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고 쓰고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해왔다. 지난 6월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매일매일 내 몸이 약해지고 있는 걸 체감한다. 무릎이 꺾이고 손이 떨려 연필 선이 달달거리는 심장 초음파 선 같을 때가 있다”고 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과도 같은 화가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태어나 1950년대 전위적인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고, 1970년대 초부터 ‘묘법’이라 불리는 무채색 단색화 작업을 해왔다. “스님이 온종일 목탁을 두드려서 참선의 경지에 들어가듯”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반복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 작업이다. 10여 년 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해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장르이자 세계 현대미술의 주류가 된 단색화에서 박서보 화백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청년 박서보는 1950년대 중반, 정부 주도 국전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 “홍대 다닐 때, 김환기 선생 권유로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는데, 극소수 작품 빼고는 전부 한 사람이 그린 것같이 보이더라. 분기탱천한 20대라 한탄을 했다. 일제강점기 지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세대로서 어떻게 그림이 저렇게 저항 정신이 없을 수 있냐고.” 1956년 서울 명동 동방문화회관에서 4인전을 열고, 반(反)국전 선언문을 전시장 문 앞에 붙였다. 화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언 후에야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작업의 방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며 “큰소리치고 나면 책임을 지려고 더 세차게 노력하는 법”이라고 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단색화 초기를 상징하는 ‘연필 묘법’ 연작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왔다. “노자, 장자를 읽고 또 읽었어요. 나는 서양 이론에 의한 화가였지,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요. 옛 선비들이 할 일 없어서 사군자를 친 게 아니에요. 정쟁으로 피폐해진 자아를 다스리기 위해 글씨를 쓰고 난을 친 겁니다.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맑게 걸러져요. 그런 세계관으로 나를 비워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다가갔는데, 어떻게 표현할지 방법이 없어 고민이 깊었어요.”

다섯 살 난 둘째 아들이 형의 국어 공책을 펼쳐 놓고 글씨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종이가 구겨지고 제 맘대로 쓸 수 없으니 짜증 내면서 연필로 죽죽 그어버리는 걸 보고, 아, 저거구나, 저 체념의 몸짓을 흉내 내 보고 싶어 만든 작품”이 최초의 연필 묘법인 ‘Ecriture No. 6-67′이다. 그는 “친구인 화가 이우환이 우리 집에 와서 우연히 이 작품을 보고 너무 좋다고 해서, 그의 주선으로 1973년 도쿄 무라마쓰 화랑에서 첫선을 보이게 됐다”며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된 작품”이라고 꼽았다. 그의 그림 중 최고가 작품도 연필 묘법이다. 1976년 작 ‘묘법 No. 37-75-76′이 2018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00만달러(약 25억원)에 팔렸다.

생전 일기장 50여 권을 남겼다. 1972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일기다. 그는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흔적이 담긴 보물”이라고 꼽았다.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의 기억이란 왜곡되기 쉽고, 나이 들어 가면서 기억력에만 의존할 수 없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며 “그날 겪은 사실의 기록일 뿐이어서 건조하지만,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의 기록이니 의미가 깊을 것”이라고 했다.

미술계는 “최근 프리즈 아트페어 현장에도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을 정도로 의욕적으로 활동을 해왔는데 안타깝다” “미술계 거목이었던 화백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를 표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

"새 작업에 눈빛 반짝이던 스승"…故 박서보 빈소에 추모 행렬

 

< 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2023-10-14 >

 


제자부터 해외 큐레이터까지 잇단 조문…윤 대통령 조화 보내
"한국 미술사 순수한 욕심쟁이"…"추상미술 정착시키고자 노력"

 


(서울=연합뉴스)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이 14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박 화백은 올해 2월 SNS를 통해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린 바 있다. 

이들이 기억하는 박 화백은 우리나라 미술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선배였다.

빈소에서 만난 고인의 제자 최명연 전 홍익대 교수는 "1962년 대학교 2학년 때 파리에서 막 돌아온 박 선생님을 만났다"며 "콧수염을 기르고 '당꼬바지'(밑단이 홀쭉한 형태의 바지)를 입은 채 나타나 '10년 안에 여기서 작가가 나오면 장을 지지겠다'고 하시며 학생들을 고무시킨 것이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이미지가 강할지 몰라도 기억력도 탁월하고 상당히 섬세하셨던 분"이라고 덧붙였다.

이열 홍익대 교수는 "6·25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가 힘든 상황에서도 추상미술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며 "혼자만의 작업 세계를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 차원의 움직임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김용대 전 이화여대 교수는 "(박 화백은) 예술에 있어서는 한국 미술사에 1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순수한 욕심쟁이"라며 "우리 미학의 근원적인 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이강소 작가도 "미니멀한 국제적인 조류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형식을 도출해낸 작가"라며 "후배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치셨다"고 기억했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다.

박 화백의 제자였던 김영순 전 부산시립미술관장은 "누구보다 이타적이었던 작가였다"며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후배, 제자들을 동참시키려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아직 우리 미술계에 제대로 된 갤러리가 없을 때 화가이자 기획자, 해외 미술 교류의 교량 역할까지 적극적으로 하셨다"고 강조했다.

김 전 관장은 지난해 12월 마지막으로 고인을 만났을 때 새 작업을 시작한다며 눈빛을 반짝이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해외 큐레이터들도 이날 빈소를 찾았다.

프랭크 보엠 독일 스튜디오 보엠의 큐레이터는 "4∼5년 전 독일에서 큰 전시가 열렸을 때 박 화백을 처음 만났다"며 "그는 떠났지만 그의 놀라운 작품들은 계속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근조화환도 빈소 곳곳에 배치됐다.

윤석열 대통령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했다. 유재석, 김희선, 오은영 등 문화계 인사들의 조화도 눈에 띄었다.

박 화백의 추모식은 16일 진행된다. 발인은 17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 성남시 분당 메모리얼 파크다.

정상화, 바보스러움으로 도달한 경지

 

 

< 중앙일보, 이은주 기자,  2023.07.11 >

 

요즘 아무리 사진 기술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미술 작품을 책으로 접하는 것과 전시장에서 실물을 직접 보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사진 작품도 그렇고, 그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국내 단색화가 정상화(91) 화백의 그림은 여기서 한술 더 뜹니다. 직접 보는 경우라 하더라도, 작품과의 거리에 따라 ‘반전(反轉)’의 묘미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며 처음 보았을 땐 단 하나의 색으로 그린 것으로 보였다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의 그림은 전혀 예기치 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캔버스 표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격자무늬, 작은 네모꼴 하나하나를 가르는 밭고랑 같은 선들이 꿈틀거립니다.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하고, 또 ‘아이고, 이 지독한 사람(화가)!’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하는 그림입니다.

정상화, 무제, 1987, 한지에 콜라주, 94x65㎝. [사진 갤러리현대]

 

정 화백은 이우환·박서보 등과 더불어 한국 단색조 추상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데요, 그는 ‘들어내고 메우기’라는 특유의 기법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먼저 캔버스에 붓으로 고령토를 바르고, 표면이 마른 뒤에 캔버스를 상하좌우로 접고, 고령토를 일부 들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아크릴 물감으로 메우는 방법으로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한 번만 하는 게 아닙니다. 바르고, 말리고, 접고, 뜯어내고, 메우고, 다시 뜯어내고, 또 메우고···. 얼핏 단색 그림으로 보이지만, 색상과 질감의 미묘한 차이를 품은 디테일의 세계. 이게 그 지독한 반복 노동의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을 때 그는 이를 가리켜 “평면에 나만의 방법으로 공간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화면에 요철이 생기며 평면이 입체적 공간으로 확장해간다. 이 공간성이 내겐 매우 중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차이에 매달려 작업을 지속해온 화가는 어느새 아흔 살이 넘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자기만 가지고 있는 게 나온다. 

근데 그것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지 남이 아는 게 아니다.” “끝없이 행위를 반복하는 그 바보스러움이 결국에 말을 해준다.” 

 

한 달 전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 개인전 ‘무한한 숨결’ 개막을 앞두고 만났을 때 그가 들려준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남들은 몰라도 내가 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우직한 그에겐 남들 눈에 평평한 캔버스도 평생 실험하고 도전하며 파고들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오는 16일 막 내리는 ‘무한의 숨결’과 더불어 그 옆 현대화랑 기획전 ‘조선백자 제기의 미와 현대미술의 만남’에서 백자와 어우러진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작가의 지독한 바보스러움이 도달한 경지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zDWjluCJ5G4

 

 

 

광주는 왜 박서보를 버렸나
군부독재에 침묵했다고
기습 시위한 집단에 떠밀려
‘박서보賞’ 폐지한 비엔날레
광주는 저항서 화해로 가는데
80년대 매몰돼 예술을 정치화
그들은 예술가도 뭣도 아니다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07.04.  >

 


‘코 없는 코끼리’는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작품이다. 초등생은 물론 중장년 관객까지 흰색 분홍색 연두색으로 칠해진 대형 코끼리 조형물을 만져보고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는다.

코끼리에게 코가 없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들고 작가 엄정순은 시각장애 어린이들과 함께 살아 있는 코끼리를 만져보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들어본 뒤 그 형상을 점토로 만들게 했다. 한 아이는 코끼리에게 먹이를 주다 손이 코끼리 코로 빨려 들어간 바람에 코끼리가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튀는 소동을 겪었다. 그 아이는 코끼리를 진공청소기의 호스 모양으로 빚었다.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견에 사로잡히는 건 아닌지 반문한 이 작품은 광주비엔날레가 올해 처음 제정한 ‘박서보 예술상’을 수상했다. 폐암 3기로 투병 중인 91세 단색화 거장 박서보는 무명이나 다름없던 작가에게 상금 10만달러를 전달하며 “첫 수상자가 한국인 여성이라 기쁘다”고 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가 제정한 제1회 박서보 예술상 수상작인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의 일부. 시각장애인 아이가 진공청소기의 호스 모양으로 빚은 코끼리를 대형화한 것이다. /광주=김윤덕 기자 

 


그러나 이 흐뭇한 광경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제정 첫 회 만에 박서보 예술상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미술계 일부 그룹과 시민 단체들은 개막식에 기습적으로 나타나 “광주 정신 먹칠하는 박서보 상을 폐지하라”고 외쳤다. 군부독재 시절 침묵했다는 이유다. 일부 비평가도 가세했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며 도발적인 작업을 통해 예술 담론의 틀을 제시해야 할 광주비엔날레가 박서보의 작품 한 점 가격에 비엔날레의 권위를 팔았다고 비판했다. 비엔날레 측은 “원로 작가를 어디까지 망신 줄지 걱정돼 폐지를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소동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관람객들로부터 역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쉽고 재미있고 따뜻해서다. 붉은 머리띠 두르고 종주먹 내두르는 걸개그림 아니면 도통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기 힘든 영상물, 난해한 설치물들이 즐비해 관람 자체가 고문이었던 과거 비엔날레와는 달랐다.

살벌한 정치 구호가 빠진 자리엔 위트와 촌철, 성찰이 들어찼다. 흙 향기 물씬한 숲속에 물의 정령들이 나와 상처투성이 된 심신을 치유해줄 것 같은 아프리카 작가의 ‘영혼 강림’을 비롯해, 식민 지배와 강제 이주의 아픈 역사를 어린아이가 그린 듯 맑고 담백한 색채로 승화한 캐나다 이누이트 원주민들의 그림까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의 삶과 철학,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을 보며 관객은 모처럼 예술이 주는 치유를 경험했다.

예술 감독을 맡은 이숙경 테이트모던 수석 큐레이터의 공이 컸다. 그는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뉴스를 보는 듯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상에서 정치적 요구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만 할 수 있는, 예술의 힘으로 풀 수 있는 것도 많다”고 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타이틀도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다. 노자 도덕경 ‘유약어수(柔弱於水)’에서 차용한 이 문구는 5·18민주항쟁 43주년을 맞아 ‘저항’에서 ‘화해’ ‘용서’로 진화해가는 광주 정신을 보여주는 듯했다. 말레이시아 작가 팡록 술랍이 5·18 시민군에게 건네는 주먹밥을 장미꽃으로 바꿔 그린 ‘광주, 꽃피우다’ 앞에서 많은 이들이 뭉클해하며 멈춰 선 이유다.

그 틀에서 보면 박서보 예술상 폐지는 치졸했다. 80년대에 매몰돼 미래를 열지 못하는 자폐적 집단의 선동이자 아집이었다. 박서보도 한때 전위예술,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였다. ‘국전’에 반대했고, 반정부적 작품이라고 전시장에서 철거 당한 이력도 있다. 그러나 민중미술이 지배하던 80년대 한국 화단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현대미술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맹주이기도 했다. 이우환 윤형근과 함께 단색화를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게 한 일등공신이다. 거장이 되기까지 영욕의 세월이 없는 작가 있을까. 작품 값이 수십억대면 예술이 자본의 시녀로 전락한 건가. 그들의 낡은 논리대로라면 김환기 백남준 등 그 어떤 작가도 미술상을 만들 수 없다.

시위 소식을 접한 박서보는 페이스북에 썼다. ‘어떤 이견도 없는 것보다 훨씬 좋은 현상이다. 역사는 반동하며 발전한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치열함이 없다. 사실관계도 맞지 않고 사유의 흔적도 읽을 수 없다.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엄정순 작가가 10년 넘게 천착해온 ‘코 없는 코끼리’ 프로젝트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를 비튼 것이다. 작가는 “시각은 여러 감각 중 하나일 뿐, 예술은 촉각 후각 청각 등 오감과 생각이 다 함께 만들어내는 거란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자기가 눈으로 본 것만 진실이라 우기고, 그와 다른 의견을 내면적으로 상정해 단죄하려는 이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그들은 예술가도 뭣도 아니다.

[다시 보다:한국근현대미술전]   이성자 ‘어제와 내일’

< 조선일보, 신용석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이성자 화가의 장남, 2023.06.14.  >

 

 

 

이성자, '어제와 내일'(1962). 캔버스에 유채, 145×114cm,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소장.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초반 어머니는 파리로 떠났다. “프랑스에 가서 성공해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어 돌아오겠다”며 우리 곁을 떠난 어머니가 어린 나이에 섭섭하게만 느껴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어린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 없이 지내던 나날은 허황하기만 했다. 

 

1957년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어머님 편지를 처음 받았다. “파리에서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편지를 아우들과 함께 밤새워 읽었다. 

 

어머니 이성자(1918~2009) 화가가 파리의 유명한 전시회에 ‘눈 덮인 거리’를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고 라라뱅시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게 됐다는 희소식을 듣게 된 건 고등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965년 우리 삼형제가 모두 대학생이 됐을 때 어머님이 일시 귀국했다. 파리의 유명한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이 끝난 후 금의환향이었다. 세 아들을 14년 만에 다시 만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공항에서 아우 용학(파리 건축대 교수)과 용극(유로통상 회장), 그리고 외삼촌 이상국(서울대 의대 교수)과 이한필(가수 위키리)이 어머니와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프랑스에서 화가가 되어 귀국한 어머님은 유화 45점과 목판화 40여 점을 가지고 오셨다. 당신은 전시회를 소망했으나, 당시 서울에는 100호짜리 대형 유화들을 포함해 80여 점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화랑이 없었다. 서울대 졸업반으로 대학신문 편집장을 맡고 있던 나는 대학본부에 간청해 의과대학 캠퍼스에 있던 교수회관을 대관, 어머님의 귀국 전시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전시회 준비에 음양으로 도움을 주셨던 김병기, 김세중, 이경성, 이대원, 최순우, 천승복 선생님들은 어머니 작품을 보면서 “고구려 벽화가 연상된다” “승화된 한국의 색동무늬 같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우들과 삼촌들이 함께 모여서 작명 경쟁도 벌였다. 눈부신 색채와 아름다운 비단무늬가 연상되는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아는 어머니’ ‘연꽃 핀 궁전’ ‘어제와 내일’ ‘새벽 무지개’ ‘오작교’ 같은 시적인 제목을 붙였다. 어머니도 “멋진 제목”이라며 좋아하셨다. 서울고등학교 시절 가깝게 모시던 조병화 선생님께 ‘오작교’ 작품에 헌시를 부탁드려 대학신문에 게재한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파리로 떠나신 지 72년 만에 소마미술관에 ‘어제와 내일’이 전시됐다. 섬세한 붓질로 캔버스의 모든 면을 채운 작품이다. 어머니는 작가 노트에 “붓질 하나하나가 자식들의 안위에 대한 염원, 자신을 다잡는 주문”이라고 썼다고 한다. 

 

우리 삼형제가 그리울 때마다 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땅을 일구듯 캔버스를 채워나갔을 거다. 이제는 하늘로 떠난 어머니 작품 앞에 서서 보니,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겠다”며 프랑스로 떠났던 어머니 말씀이 새삼 진심으로 다가온다.  

‘기도하는 손’의 뒤러

 

 

< 중앙일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2023.05.25  >

 


인간의 삶에 어디 양지만 있으랴. 서럽게 살던 젊은 시절에는 소망의 기도를 많이 하고, 먹고 살 만할 때는 감사의 기도를 많이 하고, 인생의 황혼에 서서는 참회의 기도를 많이 한다. 그 가운데에도 인생에는 소망의 기도를 드릴 날이 그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그런 소망마저도 없는 사람이 많다.

믿음 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성화(聖畵) ‘기도하는 손’은 큰 감동을 준다. 그 가운데 헝가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신성로마제국)에 이민 가서 활동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기도하는 손’(Betende Hande)이 특히 유명하다.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바라보는 사도들의 손을 그린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림의 모티프에 대해 여러 일화가 있다.


뒤러에게는 평생 고락을 함께한 친구 프란츠 나이슈타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해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나이슈타인이 먼저 돈을 벌어 뒤러의 학비를 대고, 뒤러의 공부가 끝나면 뒤러가 번 돈으로 나이슈타인이 그림 공부를 하기로 약속했다.

친구가 보내준 학비로 공부한 뒤러는 천재성을 인정받아 황실 화가가 될 정도로 성공했다. 뒤러가 빚을 갚으러 찾아갔을 때 나이슈타인은 목수(일설엔 식당 종업원)로 일하면서 뒤러의 성공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이미 오랜 잡일로 손이 굳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미안하고 슬픈 마음에 뒤러가 그 친구의 손을 그린 것이 바로 ‘기도하는 손’이다. 화구도 없이 푸른 잉크로 그린 단색 데생이다. 지금도 오스트리아 빈의 알베르티나 박물관에 보관돼 500년 동안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동양의 관포지교(管鮑之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습니까.

1.

폐암 3기에 붓든 92세 박서보 "아직 그려야 할 게 남았습니다"

 

 

< 중앙일보, 권혁재 기자, 2023.05.18  >

 


최근 문화계에서 박서보 화가가 ‘뜨거운 감자’였다.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의 폐지 논란이 이유였다.
논란 끝에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상을 폐지하기까지 이르렀다.


박서보 화가의 심경이 어떨까 하여 그의 SNS를 살폈다.
"광주비엔날레가 ‘박서보 예술상’ 문제로 어수선하다.
지난해 2월 공표됐기 때문에 의견수렴의 기간이 충분히 있었다.
반대 의견이 많았다면 다른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다. (중략)
광주비엔날레 재단 측과 박서보 예술상을 폐지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쉬움이 밴 그의 심경과 아울러 지난 2월의 건강 고백에 눈이 머물렀다.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내 나이 아흔둘,
당장 죽어도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을 텐데
선물처럼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한다.
작업에 전념하며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중략)
사는 것은 충분했는데,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이 남았다.
그 시간만큼 알뜰하게 살아보련다."

박서보 화가는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며 심경을 그의 SNS에 밝혔다. 

그는 당신의 건강상태를 알리며 더는 안부를 묻지 말라며 당부했다.
당신에게는 그 시간도 아깝다는 게 이유였다.

올 3월, 제주 JW메리어트 호텔에서 ‘박서보 미술관 기공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당신의 건강에 대한 심경을 한 번 더 밝혔다.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암을 친구로 모시자, 함께 살자고 생각했다.
새로운 작업을 위해 방사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이 말끝에 2021년 그가 아흔이던 해 기자에게 들려줬던 말이 떠올랐다.
“죽음을 준비하는 게 즐겁다. 떠날 것은 뻔한데 아등바등할 이유가 있겠나.
죽음도 삶이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삶이다.”

묘비명의 의미를 박서보 화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변화는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 나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사고의 확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잘못 변화해도 추락한다.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변화는 오히려 작가의 생명을 단축한다. 그걸 경계하라는 뜻이다”고 했다.

죽음도 삶’이라는 노 화백은 묘비에 쓸 당신의 좌우명을 써놓았다고 했다.
바로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해도 추락한다’였다.
평생 그리고 또 그리며, 바꾸고 또 바꾸어 온 당신 삶의 이야기였다.

 

 

 

2.

광주비엔날레재단, 독재정권 부역 논란 ‘박서보 예술상’ 폐지

 

< 한겨레,  노형석 기자, 2023-05-10  >


광주비엔날레재단 공식 발표
한겨레 단독 보도로 폐지 방침 알려져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이 공식 폐지된다. 박서보 예술상은 국내 최대 규모 격년제 국제미술제인 광주비엔날레가 국내 제도권 추상화단의 대가 박서보(91) 화가의 후원을 받아 올해 14회 행사부터 신설했다가 미술인들의 반발 속에 폐지 압박을 받아왔다.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는 10일 보도자료를 내어 이날 열린 186차 이사회에서 상을 폐지하기로 공식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재단 쪽이 지난달 초 첫회 시상을 끝으로 박서보 예술상 간판을 내리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한겨레>가 단독보도(5월3일치 22면)한지 일주일만이다. 재단 쪽은 또 박 작가가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한 비영리 법인으로, 상의 운영재원 100만달러를 댔던 기지재단 쪽과 협의해 1회 시상금 10만달러를 뺀 나머지 후원금 90만달러를 돌려주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비엔날레 쪽은 작가 쪽과의 후원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수순을 밟게 됐다.


박서보 예술상은 지난해 2월 비엔날레 재단이 기지재단과 100만 달러 후원 협약을 맺고 제정했다. 지난 3월 이사회에서 예술상 규칙을 만든데 이어 지난달 6일 열린 14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에서 첫회 수상자로 엄정순 작가를 발표하고 상과 상금 10만달러(1억3천만원)를 수여하는 시상식도 진행했다.


그러나 광주 등 지역미술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1970~1980년대 독재정권에 부역하고 광주항쟁 등에 침묵하면서 출세와 영달을 이루어 제도권 미술 권력으로 군림했던 박 작가 후원금을 받고 그의 이름을 쓰는 상은 광주정신에 걸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예술인 모임을 꾸려 폐지 운동을 벌여왔다. 지난달 6일 시상식장에서 지역 미술인들이 기습적인 항의 펼침막 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앞에서 날마다 1인 시위가 지속되면서 상에 대한 지역 여론이 악화한 것이 폐지 결정을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재단 쪽은 보도자료에서 “최근 제기된 박서보 예술상 폐지 의견과 관련하여 그동안 상의 운영 방향에 대해 미술계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들었고, 기지재단 쪽과도 협의를 지속해왔다”면서 “상이 폐지됨에 따라 향후 각계의 의견을 들어 시상 제도를 발전적으로 강구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재단 쪽은 조만간 자문위원회를 열어 다른 시상제 신설 여부를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백자의 주인공들, 그들은 왜 이름도 없이 사라졌나

 

 

 

<  중앙일보,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2023.04.28  >

 



“현대미술가 작품 같네.”

요즘 화제인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기획전에서 ‘철화·동화백자’ 섹션을 둘러볼 때 들려온 소리다. 실제로 ‘백자철화 어문병’에 그려진 발 달린(!) 물고기는 독일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 같다. “고된 시기에도 예술적 끼와 유머가 있었구나”라는 감탄이 나온다. 17세기 철화·동화백자는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연이어 겪은 후 청화 안료를 구하기 힘들어졌을 때 나타난 것이다.

 

현대미술 뺨치는 창의적 작품
빼어난 작가들 익명 속에 묻혀

상공업 경시한 주자학의 폐해
예술을 국부로 연결하지 못해

일본엔 이름 남긴 조선 도공들
일본 근대화의 밑거름 되기도

 

 


리움미술관 백자전 ‘군자지향’ 화제

전시를 기획한 리움미술관 이준광 책임연구원은 “군자는 곤궁 속에서도 굳세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조선백자는 힘든 시기의 지방 백자부터 풍요로운 시기의 왕실 백자까지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의 모습을 투영했다는 견해다.


전시에선 백자의 다채로움이 빛난다. 전위미술을 연상시킬 만큼 창의적 작품도 많다. 조선백자의 전위성을 일찍이 발견한 사람은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였는데, 이번에 달항아리 못지않게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법한 청화철화백자도 한 점 나왔다. 김환기의 1950년대 말~60년대 초 그림에 등장하는, 추상화된 산(山) 모습을 꽤 닮은 문양이 있다.

그러나 전시에는 유교적 백자의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이토록 매력적인 백자를 만든 도공들의 이름을 전시장에서 볼 수 없다. 이 연구원에게 물어보니 그가 연구했던 조선 자기 중에 제작자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한데 우리는 몇몇 조선 도공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삼평과 박평의, 그리고 요즘 재조명되고 있는 여성 도공 백파선(본명은 아니며 ‘백 살 할머니 신선’이라는 뜻의 존경이 담긴 호칭이다) 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킴으로써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인 아리타 도자기를 빚은 이삼평과 백파선은 각각 ‘도자기의 시조’ ‘도업의 어머니’로 불리며 신사와 절에서 기려지고 있다. 특히 백파선이 없었다면 조선에 여성 도공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도기(陶器)는 세계 여러 곳에서 만들었지만,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자기(瓷器), 더욱이 백자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중국은 백자를 아랍과 유럽에 명품으로 수출했다. 청화백자 자체가 푸른색을 좋아하는 아랍인의 취향에 맞춰 수출용으로 개발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의존하던 조선은 백자를 서역에 수출해 국부를 쌓을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주자학 근본주의를 따르면서, 상공업의 발달을 경계했다. 조선 도공들은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을 지니고도 익명의 존재로 머물렀다.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후 광해군 때 일본에 파견된 이경직은 포로로 잡혀간 조선 도공들을 데려오려 했으나 그중 상당수가 이미 일본이 자리를 잡았기에 귀환을 거부했다고 『부상록』에 썼다. 조선 도공들을 확보한 일본은 이들 덕분에 중국을 위협하는 자기 수출국으로 변모했고, 그 수출 대금으로 근대화의 밑거름을 마련했다.

그 여파는 오스트리아 여행작가 헤세-바르텍(1854~1918)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그가 구한말 한양을 방문했을 때 조선과 일본의 문화 격차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조선, 1894년 여름』에서 조선의 공예품 수준은 일본은 물론 동남아와 비교해도 조악한 것이 많다고 적었다. 또 조선인은 외국인에게 물건을 팔아 돈을 벌려는 의지도 없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을 비하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한때 이웃 나라 국민보다 훨씬 앞섰다고 적시했다. “12세기에 벌써 서적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 이는 유럽의 인쇄술 발명보다 100년이나 앞선다!”라고 썼다. 그는 조선 도자기 역사도 제법 알고 있었다. “조선의 도자기와 채색 백자는 이미 15세기에 유명했고, 17세기 말까지도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구입했다. 일본이 조선을 끔찍하게 파괴한 전쟁이 끝났을 때, 사쓰마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나베시마는 조선의 도공들을 자신의 고향인 규슈 섬으로 끌고 갔는데, 오늘날 사쓰마 도자기가 최고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도공들 덕분이다.”

이어지는 그의 일침은 뼈아프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새로 습득한 기반 위에서 무언가를 더 만들어 마침내 많은 영역에서 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 유명해진 반면, 조선인들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고, 관리들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무능력한 정부 탓에 그나마 존재하던 산업은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도 그는 조선인은 “훌륭한 본성” 때문에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루어낼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백범 김구의 비판 들려오는 듯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1947)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조선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으면서도 수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도공을 대우해 이름을 남겨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 유교와 결부된 조선백자를 볼 때 그 예술성에 감탄하면서도 그 그림자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개요

 

   오늘 리움미술관의 ‘조선의 백자, 군자(君子)지향’전에 다녀 왔다.  5월 28일까지 무료로 전시되는 이 전시회는 조선백자의 명품 185점이 전시된 사상 최대 규모의 특별전이다.  조선백자 중 국보·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총 59점인데, 그중 절반이 넘는 31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리움미술관 자체 소장품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호림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 간송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부산박물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국립경주박물관 등의 명품들이 총출동하였고, 일본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도쿄국립박물관, 이데미츠미술관, 야마도문화관, 일본민예관, 고려미술관, 거기에다 개인소장의 비장품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이번 전시회를 보고 세가지 놀랐다고 한다.  첫 번째는 박물관을 운영해 본 입장에서 이렇게 많은 유물을 대여하기 위해 지불한 보험료가 도대체 얼마일까 상상도 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방대한 규모의 전시는 모르긴 해도 우리 생애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두 번째 놀라움은 감상자 입장에서, 모든 유물을 독립 진열장에 전시하여 사방에서 전모를 볼 수 있게 디스플레이했다. 도대체 이 전시회 디스플레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예산이 책정되었을까 하는 놀라움과 부러움이었다. 세 번째 놀라움은 이렇게 명품들을 한 자리에 놓고 보니 조선백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순백자, 코발트 무늬의 청화백자, 갈색 무늬의 철화백자, 화사한 붉은 빛 무늬의 동화(銅畫)백자, 거기에 지방 가마의 소탈한 도예품까지 한데 어우러져 차분한 가운데 은은히 풍겨오는 조선 선비문화의 ‘군자지향’을 절감케 한다.

조선백자 500년 역사는 시대마다 독특한 미적 특질을 보여준다. 도자기 아름다움의 세 가지 관점인 빛깔, 기형, 문양이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 전기 백자는 새로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왕실과 사대부의 기상이 들어 있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에서 보이듯 아이보리 백색에 기형이 당당하고 매화 문양에 기품이 있다. 한마디로 귀(貴)티가 역력하다.

조선 중기의 백자는 ‘백자청화 사군자문사각병’에서 보이듯 따뜻한 유백색에 기형은 단아하고 대나무·난초가 소담하게 그려져 있어 조선 선비의 취향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문기(文氣)가 가득하다.

조선 후기의 백자는 ‘백자청화 모란문 병’에서 보이듯 푸르름을 머금은 백색에 기형은 푸짐하고 문양은 화려하다. 한마디로 부(富)티가 넘쳐흐른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백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닌 것이 저 유명한 ‘백자 달항아리’다.

 

   리움박물관이 밝힌 ‘조선의 백자, 군자(君子)지향’展의 기획의도는 다음과 같다.

 

 

 

2.  절제미의 승화, 순백의 조선백자 달항아리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근간으로 왕실의 품위와 선비의 격조가 미술품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문기(文氣)가 흐르는 품위와 격조는 조선 백자의 미적 특성이기도 하다. 


   조선의 관요에서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동화백자 등 다양한 종류의 백자가 제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백자 큰 항아리[백자대호(白磁大壺)]가 바로 ‘백자달항아리’이다. 17세기 후반에 나타나 18세기 중엽까지 유행한 이 백자는 보름달처럼 크고 둥글게 생겼다 해서, 1950년대에 백자달항아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달항아리를 조선 백자의 정수로 꼽는 이유는 절제와 담박함으로 빚어낸 순백의 빛깔과 둥근 조형미에 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조선 달항아리만의 특징이다. 조선은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였다. ‘예’란 유교 문화 전통에서 인간 도덕성에 근거하는 사회질서의 규범과 행동이자 유교 의례의 구성과 절차였다.  예를 실천하기 위해 선비들이 사욕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절제였습니다. 절제란 사람이 욕망이나 감정 표현 따위가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것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내적인 청결함을 중시하고 담박한 생활을 지향하였으며,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담박함이란 사람의 성품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순박한 것을 뜻한다. 백자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추구하는 절제와 청결, 담박함, 그리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https://youtu.be/F8a-0FVk-AA

 

 

 

3.  리움 전시에서 내가 본 조선백자 항아리 

 

(1) 백화청화 홍치명 송죽문 호 (1489년, 동국대 박물관, 국보)

(2) 백자청화 보상화당초문 호 (16세기, 개인 소장, 보물)

(3) 백자청화 운룡문 호 (18세기, 개인소장, 보물)

(4) 백화청화 매죽문 호 (15-16세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5) 백자청화철화 삼산뇌문 산뢰 ((15세기, 개인소장, 보물)

(6) 백자청화 신선문 호 (19세기 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7) 백화철화 매죽문 호 (17세기, 개인소장, 보물)

(8)  백자 호 (15-16세기, 서울역사박물관, 보물)

(9) 백자 대호 (17세기말-18세기초, 부산박물관, 보물)

(10) 백자 달항아리 ( 18세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보물)

(11) 백자 달항아리 (18세기, 개인소장, 국보)

(12) 백자 달항아리 (18세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3) 백자청화철화 화조문 호 (18세기전반, 일본민예관 소장)

(14) 백자청화 운룡문 호 (18세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5) 백화청화 전서체자시명 호 (18세기 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6) 백자청화 도석류매문 호 (18세기 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7) 백자청화 모란당초문 (18세기, 개인 소장)

(18) 백자청화 송하호작문 호 (18세기말-19세기초, 국립경주박물관)

(19) 백자철화 진산다병명 병 (18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20) 백자철화 매죽문 병 (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21) 백자 반철채 호 (16세기, 개인소장)

(22) 백자철화 초화문 호 (17세기 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23) 백자철화 매조문 호 (17세기 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24) 백자철화 운룡문 호 (17세기, 개인 소장)

(25) 백자동화 호작문 호 (18세기, 일본문예관 소장)

(26) 백화철화 운룡문 호 (17세기, 개인소장)

(26) 백자청화 송하호작문 (18세기말-19세기초, 경주국립박물관)

(27) 백자 호 (15세기, 호림박물관)

 

 

4.  조선백자의 역사 

 

   한자로 흰 백(白)에 자기를 일컫는 자(磁)를 쓰는 백자(白磁)는 말 그대로 흰 도자기이다. 하얀 바탕흙으로 빚어 투명한 유약을 바른 뒤 약 1300℃에 달하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백색의 자기이다. 우리나라에서 백자가 처음 제작된 것은 신라 말~고려시대로 알려졌다. 소량이긴 해도 꾸준히 제작된 백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새 나라의 그릇으로 선택되었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분청사기를 주로 사용했지만, 세종·세조 연간을 거치며 나라에서 주도적으로 백자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형태·품질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감독해 제작하기 위해 왕실용 도자기 전담 제작 공장이라 할 수 있는 관요를 설치하고 왕의 백자가 생산되자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백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백자는 청자보다 기술적으로 한층 진보된 자기이다. 백자를 만들 때 핵심 재료는 하얀 바탕흙, 즉 백토(白土)이다. 관요에서는 전국 산지에서 백토를 가져다 질 좋은 것을 선별해서 사용했다. 이와 더불어 중요한 건 의외로 땔나무이다. 백자를 구워내기 위해 가마 안을 1300℃라는 고온으로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로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왕이 사용할 그릇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서는 수로를 이용해야 하여 한양과 가깝고, 강을 끼고 있어 뱃길을 이용하기 쉬우며, 우수한 백토가 나고, 숲이 울창했던 경기도 광주가 선정된 것이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20년대 광주에 있던 도자소는 뛰어난 제작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관요는 ‘사기소’ ‘사옹원 사기소’로 불리다 17세기부터 사옹원의 지점이란 의미로 ‘분원(分院)’이라고 불렸으며 이 명칭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옹원(司饔院)은 왕을 비롯한 궁중의 음식과 그에 필요한 그릇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주변 나무를 다 베어다 쓰면 다시 숲이 우거진 곳을 찾아 이동했던 분원은 18세기 중반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고 땔나무를 운반해서 쓰게 되었다.
   1460년대 후반 국가 주도로 가마를 설치·운영하며 분원에서 본격적으로 왕실과 관청에서 쓰는 백자가 만들어지자, 시간을 두고 점차 각 지방에서도 분청사기 대신 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백자들은 중앙의 관요에서 사용하는 질 좋은 백토에 비하면 거친 바탕흙을 사용해 만들었다. 처음엔 광주 관요의 백자를 기본으로 삼아 만들어지다가 점차 변해 형식을 벗어나는데, 흙의 성분이나 만든 이의 솜씨에 따라 형태나 그림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백자는 그 위에 어떤 안료로 그림을 그렸느냐에 따라 순백자·상감백자·청화백자·철화백자·동화백자 등으로 분류한다. 그림 없이 순수한 흰빛의 순백자, 상감청자처럼 상감기법을 활용한 상감백자,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철(산화철) 안료를 사용해 다갈색·흑갈색으로 그린 철화백자, 진사 빛깔 산화동을 써서 붉게 그려진 동화백자 등이다. 또 유약의 성분이나 가마 안의 조건 등에 따라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기에 자기가 띤 백색을 보고 순백자·청백자·유백자·회백자로도 나누기도 한다. 푸른 기를 머금은 하얀 빛인 청백자, 우윳빛깔 유백자, 회색을 띠는 회백자 등이 유명하다.


   안정적으로 발전하던 조선이 임진왜란(1592~1598)·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1637) 등 연이은 전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백자 역시 특징인 흰색을 잃기도 하고 값비싼 안료를 쓰는 청화백자를 생산할 수 없어져 철화백자가 유행하기도 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는 다시 사회적으로 도약하며 백자도 특유의 흰색을 회복하고, 제작기술이 발달하여 동을 안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청나라 영향을 받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자기도 나타나게 된다. 17세기 중후반~18세기에는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큰 항아리, 백자 대호도 출현하게 되었다. 이후 19세기에는 청나라뿐 아니라 일본 자기들도 활발하게 유입되어,  특히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일본 등 외국 자기가 왕실용으로도 사용되는 등 조선백자가 설 자리가 점차 줄어게 되었다. 이후 왕실용 그릇을 만들던 분원 역시 민영화되고, 장인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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