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첫 아프리카 추장이 된 한상기 박사의 삶과 사랑

 

 

 

< 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2023-06-29 >

 


신간 '작물보다 귀한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


"저는 제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이 바로 이 선택의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인 슈바이처'라 불리는 한상기(90) 박사가 언급한 선택한 순간은 1971년이었다. 당시 그는 서울대 교수였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식물유전육종학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영국행 비행기 대신 나이지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개인의 영달보단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인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제가 배워 익힌 식물유전육종학이 긴요히 쓰일 수 있는 곳이 그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죠."

한 박사는 최근 출간된 자서전 '작물보다 귀한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지식의날개)에서 아프리카로 떠난 이유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책은 한국인 최초로 아프리카 추장이 된 한 박사의 삶과 사랑, 작물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나이지리아에 있는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에서 23년간 근무하며 카사바, 얌 등의 품종 개량에 매진했다. 새로운 카사바 품종을 구하고자 브라질에 다녀오는 등 고생하며 연구를 진행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내병다수성 카사바'를 만들어냈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강한 품종이었다.

한 박사는 내병다수성 카사바를 트럭에 싣고 다니며 농가 보급에 앞장섰다. 현지 주민들은 그가 개량한 카사바를 먹었다. 병충해에 강했기에 안정적으로 재배할 수도 있었다. 주식으로서 손색이 없었던 셈이다. 현지 주민들은 점점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세계은행은 식량문제를 해결한 그를 두고 '아프리카 조용한 혁명의 기수'라고 칭했다. 1982년에는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나이지리아 이키레 마을 추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추장으로서 '세리키 아그베'(농민의 왕)라는 칭호를 얻었다.

오랜 세월 연구에 매진한 그도 이제 구순에 이르렀다. 타지에서 함께 고생했던 아내는 2013년부터 치매를 앓다가 2020년 먼저 떠났다. 은퇴한 그는 이제 책을 쓰며 그가 삶에서 건져 올린 지혜를 전하려 한다. 저자는 언제까지 풍요가 계속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면서 작물과 종자에 대한 연구, 농학에 대한 연구를 이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고독한 놀거리 마스터 고독하고 우아하게, 제대로 노는 방법의 교과서
이종구 지음 | 모던스튜디오 | 2022년 02월 28일 출간


1. 책소개
 

현대인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고독하면서도 우아하게, 제대로 노는 법.  소확행, 시크릿, 끌어당기는 힘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 아닌 ‘재미’라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당신은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행복이란 결과가 아닌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재미를 통해 얻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재미를 경험하게 만들어주는 다양한 놀거리들에 관한 깊은 인사이트를 얻게 될 것이다.


최근 들어 노는 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그 배경은 과거에 비해 근로 시간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단 대중들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물질적 풍요만을 쫓던 것에서 삶의 퀄리티 자체를 추구하는 것으로 옮겨갔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요즘 현대인들은 무조건 돈을 많이 모으기 보단, 돈을 어떻게 쓸지, 뭘 하면서 어떻게 놀고 즐길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껏 인생을 제대로 즐기며 사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배워 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놀거리, 그 중에서도 과거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난 현대인들에게 특화된, 혼자서 즐길 거리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평소 음악, 미술, 문학, 영화, 패션, 여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쌓은 남다른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사회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작가가 본인이 직접 경험한 놀거리들을 다룬 이 책은, 단순히 우리에게 놀거리들의 정보들을 제공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것들을 어떤 태도와 방법으로 즐길 수 있는지 그 노하우를 알려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행복이란 결과가 아닌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재미를 통해 얻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재미를 제공해주는 놀거리가 우리 인생에서 차지하는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2. 저자 : 이종구작가 

  U.C. Berkeley, Mass Communication 졸업
  Kosney at home 창업자, 대표이사
  TMON, Vice President
  SK 네트웍스 상무
  GS 리테일 이사



3. 목차


CHAPTER 1. 고독한 놀거리를 탐구해야 하는 이유


01 재미는 위대한 것이다
삶은 과연 즐거운 곳인가?
행복을 인질로 한 종교의 협박
행복의 저주
가상현실과 게임이론
행복 vs 재미
결과가 아닌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재미
깨달음이 무의미한 이유
재미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재미와 책임
잘 노는 사람이 성공한다


02 우리를 제대로 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외로움
고독의 실체
고독을 이기고 즐기는 방법


03 잘 놀기 위한 공부
잘 놀기 위해 갖춰야 하는 능력
잘 노는 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놀거리를 벤치마킹 하다
취향을 판단하는 것이 금지된 사회
나의 고독한 놀거리 여정

CHAPTER 2. 고독한 놀거리의 본격적인 탐구


01 예술감상
예술작품을 보다 재미있게 감상하는 방법
음악감상의 목적
음악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
좋은 음악을 판단하는 기준이란?
나의 인생에 마법을 건 음악들
클래식 음악감상의 목적
입문자들을 위한 클래식 음악 감상 요령
음악이 변화시키는 삶의 모습
음악감상의 신세계, Spotify와 놀기
영화 감상
미술작품 감상
문학작품 감상
예술의 객관적 판단은 가능한 것인가?


02 혼자 떠나는 여행
혼자 떠나는 여행의 재미
음악과 함께하는 여행
목적을 가지고 떠나는 여행
자연의 숭고미를 체험하는 여행
혼자 떠나는 여행, 숙소 정하기
Lonely Planet 과 Google Earth를 이용한 가상 여행


03 ‘몸’과 놀기
호흡이 놀거리가 될 수 있는 이유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재미, 명상
물의 파동이 주는 상쾌함, 목욕 그리고 낮술
조인 골프의 재미


04 일상 안에서 놀기
매니지먼트의 재미, 정비와 청소
쇼핑의 역할
집에서 혼밥 즐기기
혼자서 할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럽고도 고상한 놀거리, 차
차를 제대로 즐기는 법
재미로 하는 공부


05 일상 밖에서 놀기
책의 파동이 주는 즐거움, 서점
고요한 적막함을 즐기러 가는 곳, 대형 미술관
혼자 하는 산책
공연을 더 재미있게 감상하는 방법
밀착 다큐멘터리, 이단 종교 체험


06 신이 되어 보는 즐거움, 창작
그림 잘 그리는 방법
언어가 감상을 창조하는 즐거움, 글쓰기
요리가 즐거움이 되는 방법


07 덕업일치
온라인 쇼핑몰 창업에서 얻는 즐거움
일과 함께 하는 여행, 무역박람회 방문


08 그 외 고독한 놀거리 리스트
점을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이유
나의 인생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 보는 즐거움, 시놉시스
당근마켓 즐기기
그 외의 놀거리들

 


4. 책 속으로


혼자서 즐기는 놀거리는 여럿이 함께 즐기는 놀거리와 비교했을 때 그 즐거움을 체득하는 원리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혼자 놀기에 적 합한 놀거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종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필 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그런 놀거리들을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가지 고 즐겨야 하는지, 즉 제대로 놀기 위해 필요한 테크닉을 배워야 합니다. 같은 음악감상이라도 늘상 듣던 음악을 배경음악처럼 아무 생각 없이 듣는 것과, 음악감상에 대한 구체적인 미학적 목적을 가지고 그런 음악들을 의지적으로 찾아 듣는 것과는 즐거움의 종류와 깊이가 다릅니다. 청소나 프롤로그 8 고독한 놀거리 마스터 공부처럼 평소에 마지못해 억지로 했던 것들, 하기 싫어했던 일들도 그것을 즐기는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어느 순간 즐거운 놀거리로 변하기도 하지요.----p. 7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소확행’ 개념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대해 기대를 품는 것을 멈추게 한다는 점입니다.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확행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르치지요. 그러다 보니 우리는 괜히 미래에 대한 장미빛 꿈을 꾸다가 스트레스라는 내상을 받을 걱정에 인생을 점점 방어적으로, 소극적으로 살게 됩니다. 또한, 소확행은 물질적인 행복의 조건을 현실적으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숨기 좋은 도피처로서 악용될 수 있습니다. 마치 명품 브랜드를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유니클로나 H&M 같은, 남들에게 나의 경제적 수준을 평가 당하지 않는 브랜드에 열광하는 심리와도 유사하지요. 이런 태도는 자칫 우리로 하여금 삶의 수준을 높이고 경제적 성취를 얻고자 열심히 일하는 행위를 어느 순간 멈춰 버리고, 소확행이란 회색지대 속으로 도피해서 현실에 안주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p.21-22


버트 바카락(Burt Bacharach)의 음악은 고상하고 여유 넘 치는 로맨틱한 인생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들으면 내 안에 숨겨진 예술성을 세상에 마음껏 표출하고 싶은 모티베 이션이 생겨나며, 조지 해리슨의 음악을 들으면 불교적 명상에 빠져 삶을 관조적으로 보는 태도가 생깁니다. 레드 제플린의 음악은 성적욕망을 자극하고, 마빈 게이나 러브, 키스 자렛(Keith Jarrett)의 음악은 용서의 힘을 줍니다. 월터 원더리(Walter Wanderley)의 이국적이며 감미로운 음악은 내 안에 마법 같은 긍정의 에너지를 무한히 채워 주어 세상은 온통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멋진 곳이라는 판타지를 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아티스트의 파동과 나의 파동이 중첩되면서 나의 인격이 아티스트의 인격으로 잠시 빙의를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 다. 칸트는 이 빙의 과정 속에 작용하는 기능을 ‘상상력’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서 몸은 현실에 있지만 정신은 상상력을 통해 그 아티스트의 정신으로 빙의 될 때, 그 아티스트의 태도와 관점으로 현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음악을 많이 듣다 보면 각각의 음악들이 본인에게 어떤 서로 다른 빙의 효과를 제공하는지 알게 되고, 그 경험치가 일정 수준 이상 쌓이게 되면 본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 때 그 때 상황에 도움이 되는 음악을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기술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치유가 필요할 땐 치유의 효과가 있는 음악을 듣고, 활력이 필요하거나 모티베이션이 필요하면 그런 감정을 고취시켜 주는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p. 78-79

이처럼 영화가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는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때 그때 받고 싶은 정서적 영향의 내용에 따라서 본인에게 필요한 영화를 고를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그 순간 특별히 빙의하고 싶은 인격이 있으면 그런 인격을 가진 등장인물이 나오는 영화를 찾아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감 정을 바꿀 수도 있고, 새로운 취향을 얻게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인생의 새로운 가치관을 얻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영성계에서는 ‘기운을 조정한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영화를 적극적으로 감상할 때 느끼는 묘미입니다. ----p. 122

우리가 호흡을 할 때, 편안하고 이완된 상태에서 길게 호흡을 해야 몸이 원하는 산소를 스트레스 없이 편하게 들이 마실 수 있습니다. 몸이 굳은 상태에서 짧은 호흡을 자주 하게 되면 호흡과정에서 발생하는 활성화산 소의 양이 많아지고, 활성화산소는 잘 아시다시피 혈관의 염증을 유발하게 됩니다. 염증은 각종 장기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고, 몸의 면역력을 떨어트려 결국 모든 병의 원인이 되지요. 그래서 단전 호흡이란 호흡을 할 때 목이나 가슴 근육만 쓰는 것이 아니라, 단전 부위의 근육까지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횡격막을 더 많이 잡아당길 수 있게 만들고, 그 결과 폐의 여유 공간이 확보되어 한번 호흡에 더 많은 양의 산소를 들이 마시게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단전 호흡은 몸을 이완시켜 호흡을 편안하고 길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신체적 이완 훈련을 뜻하는 것이지요. ----p.181


이런 꿈은 남들처럼 평범한 모습, 늘 살던 대로 습관적으로 사는 모습에서 벗어나 인생을 한번 나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바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인생에서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뭐가 정말 나다운 것인지를 잘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변에서 롤모델을 찾게 되고,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면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에 앞서 그 사람의 헤어스타일, 옷 입는 스타일 같은 하드웨어적인 면에 눈이 먼저 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 헤어스 타일을 따라 하고 그런 옷을 따라 입으면서 평범했던 삶에 변화를 꿈꾸지요. 즉 옷을 쇼핑하는 행위도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단순히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생필품을 사는 ‘일거리’가 되기도 하고, 한편 내가 꿈꾸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한 의미 있는 ‘놀 거리’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p.209-210

 

 

5. 주요 내용 

 

(1) 인생은 재미를 위해 사는 것이다

 

 - 행복을 인질로 한 전통 종교의 협박이 쇠퇴하고 SNS와 미디어가 현대 종교로 등장하였다. 절대 행복에서 상대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고뇌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업의 세계와 메타 버스 개념 세계에서 인간의 영혼은 가상세계를 끊임없이 살아가고 있고 그 속에서 행복보다는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

 - 행복이란 고통이나 걱정 불안을 체감하지 않는 순간 경험하는 심신이 평온하고 안정된 일시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인간은 스트레스를 피해 사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인생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 하지만 재미는 행복과 다릅니다.  재미는 의지를 필요로 하고 재미를 얻기 위해서 인간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재미는 절대적인 잣대로 평가되거나 남과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재미는 오로지 본인만이 체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획일적으로 정의할 수 없고  더우기 남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재미는 인생이란 게임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게이머가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게이머의 수준, 성향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스트레스 넘치는 시나리오를 치열하게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재미일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순탄하고 평화로운 나나리 계속되는 것이 재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득도를 한 사람은 남은 인생이 행복할까요?

 

 - 득도를 하면 인생을 예전처럼 희노애락의 노예가 된 상태로 살진 않겠지만 대신 과거에 느꼈던 재미는 더 이상 경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영겁의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없애야 할 카르마란 내가 사는 동안 다른 인경의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생각이나 행위를 했을 때 생기는 일종의 우주적 에너지인데, 내가 남에게 가한 에너지를 반드시 나도 겪게 된다는 우주적인 현상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게임을 몰입감있고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카르마라고 생각한다면 카르마는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즐겨야 할 대상입니다. 재미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책임감을 수반한 재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3) 잘 놀기 위한 공부

 

 ㅇ 잘 놀기 위해 갖추어야 할 능력

   - 김각 / 이성 능력

   - 음미력 / 상상력

   - 표현력

   - 과시력

   - 벤치마킹력, 모방력

 

 ㅇ 음악

   - 나의 인생에 마법을 건 음악들

   - 클래식 음악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베를리오즈, 비제, 브람스, 보로딘, 부루크너, 쇼팽, 드뷔시, 드보르작, 그리그, 헨델, 하이든,

      리스트, 말러, 멘데스존, 무소르그스키, 프로코피에프, 라흐마니노프, 라벨, 림스키코르사코프, 로시니, 생상스,

      스크리아빈, 슈베르트, 슈만, 쇼스타코비치, 요한 스트라우스, 스트라빈스키, 차이코프스키, 베르디, 바그너

   - 음악감상의 신세계 - spotify 놀기

   

 ㅇ 영화 감상

   

 ㅇ 미술 작품 감상

 

 ㅇ 문학작품 감상

 

 ㅇ 혼자 떠나는 여행

 

 ㅇ '몸'과 놀기

   - 호흡법

   - 태극권, 기천문

   - 물의 파동이 주는 상쾌함, 목욕, 그리고 낮술

 

 ㅇ 일상 안에서 놀기

   - 청소

   - 쇼핑

   - 혼밥

   - 다도

   - 공부

 

 ㅇ 일상 밖에서 놀기

   - 서점

   - 대형미술관

   - 산책

   - 공연 감상

   

 ㅇ 신이 되어보는 즐거움, 창작

   - 그림

   - 글쓰기

   - 요리

   

 ㅇ 덕업 일치

 

 

6. 나의 평가

 

 - 행복에 대한 정의 자체가 전통적인 관점과는 다르다. 쾌락주의 철학의 관점인가?

 - 인간이 나약하고 인생은 항상 괴로운 곳이라는 생각하였는데, 우리가 부모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의 기회를 받은

   이상  살아 있는 동안 긍정적으로 즐거움을 찾아 보는 것도 좋겠다.

 - 다른 사람들과 즐거움을 같이 나누고 어떤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같이 나누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생각은 

   논외로 되어 있다.

 - 이 책 자체는 혼자서 즐기려는 데 초점을 맞춘 이기적인 책이라는 점을 알고 읽는 게 좋겠다.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자존감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도 좋다는 인생관의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서평]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_ 손흥민 첫 에세이
손흥민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20년 08월 21일 출간 

  

 

 

1. 출판사 서평

 


전 세계가 주목하는 월드클래스, 아이돌을 능가하는 슈퍼스타…
그래도 손흥민의 생각은 변함없이 ‘늘 축구, 축구 생각뿐’
꿈을 이룬 행복한 축구선수의 내밀한 목소리를 담은 자전적 에세이

 


‘손흥민’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특별한 이름이다. 단순히 골을 많이 넣고 축구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차범근, 박지성에 이어 한국을 대표할 만한 스타 축구선수이고,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무엇보다 손흥민은 한국인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DNA를 지녔다. 양보가 습관이 된 한국 선수들과 달리 골에 대한 욕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거침이 없다. 어떤 문화권의 선수와도 쉽게 친해지고 라커룸의 분위기를 끌어 올리며, 큰 경기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맹활약을 펼치곤 한다.


그런 손흥민의 ‘특별함’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우선 축구선수 출신인 아버지 손웅정 씨의 헌신적인 지도와 노력을 들 수 있겠다. 손웅정 씨는 아들을 최고의 선수로 길러내기 위해 기존의 한국 유소년 축구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손흥민을 가르쳤다. 아버지에게서 철저하게 기본기를 익힌 손흥민은 독일 함부르크로 스카우트되어 선진 축구를 접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 축구 자체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 손흥민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완성한 또 다른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 근원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손흥민의 특별함은 우리를 열광시키며 진심으로 그를 응원하게 한다. 그에게서는 최근의 한국인들이 잃어버린 열정의 냄새가 난다. 취업의 문턱은 갈수록 높아지고 한 성인의 몫을 제대로 해내기가 너무나 어려워진 현실에서 청년들은 더더욱 자유롭게 꿈을 꾸기가 어렵다. 그러나 손흥민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님을 몸소 증명한다. 눈부신 활약을 하고도 끝내 경기에 패배한 후 손흥민이 흘리는 눈물에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한계에 부딪쳤던 한 청년의 뜨거운 노력과 열정을 느끼고는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그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진행형 레전드 손흥민,
축구 외적으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그의 진심
스물일곱 한 청년의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그토록 빛나는 손흥민의 사적인 생활은 그 동안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축구장 바깥에서 받는 주목을 즐기지 않는 그의 성향 탓이다. 그런 그가 마침내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들을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에서는 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서 탑플레이어가 되기까지의 알려지지 못했던 성장 스토리가 담겨 있다. 특히 끊임없는 투쟁과 도전 끝에 꿈을 이룬 한 청년이 파란만장했던 여정 가운데 자신이 직접 느꼈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숨은 뒷이야기들을 스스로 돌아본다는 점에서 그 본인에게도 그리고 우리 독자들에게도 매우 뜻 깊은 에세이가 될 것이다.


또한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에서는 아직 만 26세에 불과하기에 현재진행형의 레전드인 그가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축구를 해왔던 과거, 빛나는 영광을 맛보고 있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역사를 펼쳐 나갈지 꿈꾸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무엇이든 발로 차던 유년기에 형의 손가락을 부러뜨렸던 일화, 자유롭지만 혹독한 아버지의 훈련을 버텨내고 끝내 함부르크 스카우트의 눈에 들며 포착했던 기회, 어린 나이에 프로 및 A매치 데뷔골을 넣고 들떴던 마음이 체중 관리 실패와 부진으로 이어지며 깨닫게 되었던 교훈, 꿈의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서 경기에 뛰지 못하고 불안해하던 시간들과 마침내 이를 이겨내고 팀 최고의 에이스가 되었던 성장의 과정들… 무엇보다 축구선수이기 이전에 젊은 청년이자 부모의 아들, 그리고 축구밖에 모르는 바보 손흥민이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하는 것이 팬의 입장에서는 반가울 수밖에 없다.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은 축구선수의 일대기를 담은 일반적인 자서전보다, 손흥민이 삶의 순간마다 느꼈던 솔직한 생각과 느낌들을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덕분에 축구에 많은 관심이 없는 독자들이라 할지라도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을 더욱 편안하고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동안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던 손흥민의 사적인 생활들, 훈련장 및 라커룸의 분위기, 주변 인물들과의 에피소드들이 다채롭게 소개되는 만큼, 손흥민과 기존 축구 팬덤에도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2.  책 속에서

 



(1) 이 책을 쓰게 된 이유 - Epilogue

 


"2019년의 손흥민은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이에요. 프리미어리그의 인기 팀에서 뛰는 프로 축구선수죠. UEFA 챔피언스리그, FIFA 월드컵, AFC 아시안컵 등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에서 뛰어 봤어요. 더 큰 꿈을 꿔도 될 만큼 젊죠. 남들이 보기에 이런 제 모습이 화려해 보일지 몰라요.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겉모습입니다. 힘들었던 과거와 뒤에서 이루어지는 노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죠. 지금까지 어려웠던 날이 훨씬 많았어요. 좌절하며 눈물을 흘린 순간도 많았고요. 사실 지금도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살고 있어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죠. 제가 과분한 TV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이렇게 책을 내기로 한 이유이기도 해요.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필요했던 저의 뒷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어릴 적 우리 가족은 가난했어요. 또래 아이들에게는 일상적이었을 게임이나 여행, 놀거리들을 저는 별로 해본 기억이 없어요. 축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며 소형 중고차를 한 대 구해 오셨어요. 120만 원을 주셨다고 하더군요. 비가 오면 창문 틈으로 빗물이 줄줄 샜어요. 그래도 자가용이 생겼다며 우리 가족은 좋아했죠."

"세상은 정말 차갑더라고요. 주위에서 아버지가 ‘똥차’를 몰고 다닌다며 손가락질을 했대요. 아버지께는 그게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어요. 지금 아버지의 자동차는 허세가 아니라 과거의 멸시를 잊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독일 연수 시절 저도 참 힘들게 지냈어요. 한국 식당에 갈 돈이 없어 허기를 꾹꾹 참았어요. 아버지가 독일까지 날아오셔도 딱히 풍족하게 생활하진 못했어요. 저는 아직 자식을 키워 본 적이 없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자식에게 해줄 게 별로 없는 부모의 심정은 정말 말도 못하게 괴로웠을 겁니다. 제 인생에서 공짜로 얻은 건 하나도 없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혹독하게 훈련했어요. 다른 아이들이 신나게 놀 때 저는 매일 리프팅으로 볼을 떨어트리지 않고 운동장을 세 바퀴씩 돌았죠. 프로 첫 시즌을 끝내고 매일 슈팅을 1천 개씩 때렸고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비는 시간에는 최대한 휴식을 취해요. 드리블, 슈팅, 컨디션 유지, 부상 방지 등은 전부 죽어라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믿어요. ‘와, 정말 슈팅이 대단하군요’라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이렇게 슛을 때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는 생각도 들어요. 독일어와 영어도 마찬가지예요. 창피함을 무릅쓰고 현지 아이들에게 계속 물어보며 공부했어요.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익히고 동료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따라 해보고 그랬어요. 그런 과정이 없었으면 다른 나라의 언어를 빠른 시간 내로 습득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예요."

"어제 값을 치른 대가를 오늘 받고, 내일 받을 대가를 위해서 오늘 먼저 값을 치릅니다. 후불은 없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가 왜 하늘 위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내려오지 않고 계속 날고 있으니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런 노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에요. 지금 저도 자제하고 훈련하면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어요.

 

저는 축구를 좋아해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요즘 말로 ‘축빠’, ‘덕후’라고 하면 딱 맞아요. 축구가 재미있어서 시작했고, 지금도 더 잘하고 싶어서 계속 노력해요. ‘축빠’의 심리가 뭔지 아세요? 세상 모든 사람이 축구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렇게 재미있는 축구를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즐겼으면 좋겠어요. 독일의 분데스리가,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처럼 대한민국에서 K리그가 일상으로 자리 잡는 날을 상상하곤 해요. 다들 주말에 K리그를 보러 가서 응원하고, 월요일에 모여 K리그를 이야기하는 광경이죠. 물론 지금도 국가대표팀을 사랑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꾸지람을 들을 때도 많지만 최선을 다하는 대표팀 선수들을 응원해 주시는 국민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잘 알아요. 그런 사랑과 관심, 응원이 매 주말마다 동네에서 벌어지는 축구 현장으로 퍼지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작은 TV 화면이 아니라 뻥 뚫린 경기장에서 신나게 축구를 즐기면서 웃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꿔요. 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 책을 읽고 축구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팬이 한 분이라도 더 생기면 저는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 주실 거죠? 미리 감사드려요!”

 

- 런던에서, 손흥민 올림 

 


(2) 축구하기 위한 자기 관리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런 시즌을 보낼 수 있었을까? 우선 평소 자기 관리의 선물인 것 같다. 10개월에 달하는 시즌은 온전히 축구의 몫이다. 훈련에서 돌아오면 그때부터 내일 훈련의 준비를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지낸다. 그라운드 안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밖에서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줄인다. 이는 몸과 마음 모두 해당한다. 얼마 전 내가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결혼은 은퇴 후”라고 말한 것이 큰 화제가 된 걸로 안다. 물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처럼 가정을 꾸리면서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는 선수도 많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의 차이를 부정하기 어렵다. 천재성을 타고나지 못한 나는 24시간을 통째로 축구에 들이부어야 지금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 축구를 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축구만 해야 한다. 런던에도 유혹은 얼마든지 있다. 프리미어리그 선수는 본인만 원하면 얼마든지 화려한 삶을 만끽할 수 있다. 젊고 돈 많고 평소 시간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망각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경기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 재미없는 삶이다. 정말 따분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감수한다. 그렇게 해서 매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다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될 수 있다면, ‘올해의 골’을 넣을 수 있다면, 팬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축구 24시간’의 생활을 받아들이고 싶다. UEF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뛸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수도승으로 살아갈 수 있다.”

 

(3) 현재 진행형인 손흥민 선수의 축구에 대한 '사랑'  

우울함 속에서 나를 지켜 준 것은 축구였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아한다. 쉴 때도 나는 축구 영상을 찾아본다. 내 경기 영상도 자주 본다. 상황마다 다른 판단을 했을 때를 상상해 본다. 다른 팀이나 선수의 영상을 보면서 잘한 부분과 못한 부분을 찾아내며 공부한다. 훈련과 경기를 위해서 그라운드 안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어제 경기에서 져도, 파파라치 컷으로 곤욕을 치러도, 다른 엉뚱한 일들이 끊이지 않아도 일단 축구화를 신고 잔디 위에서 축구공을 차는 순간 머릿속에 있던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도 축구,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축구다. 축구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컴퓨터를 리부팅하면 속도가 빨라지는 그런 느낌이다.”
 

 

(** 축구에 대한 열정 비교 -- 어느 서울대 의대생의 합격 수기 
"독서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를 한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내가 제일 공부를 잘하는데, 내가 제일 열심히 한다." - 서울대 의예과 수석 합격자의 글 중)
 

(4) 유년 시절 아버지의 헌신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그동안 기울였던 지극정성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엘리트 코스에서 축구를 배운 기간이 1년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 나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도공이 단 한 개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 수많은 도자기를 빚고 깨기를 반복해야 한단다. 아버지는 나라는 도자기를 빚기 위해서 아무런 대가 없이 7년 세월을 보냈다. 내가 여기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엄청난 불효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너희는 훈련만 한다. 그 외의 준비나 뒤처리는 전부 내가 한다’는 주의였다. 축구 훈련을 하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맨땅에 떨어진 돌을 치워야 하고 축구공과 콘도 매일 들고 날라야 한다. 나는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축구공을 잔뜩 채운 냉장고 종이 박스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나는 훈련만 하는 대신, 훈련을 위해서 100%를 쏟아야 했다.”


아버지는 정말 무서운 지도자였다. 그때도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너무 엄하게 가르치다 보니 며칠 만에 그만두는 학생이 많았다. 가르치는 내용도 허구한 날 볼리프팅이었으니 아이들은 금방 싫증을 냈다. 손씨 집안의 형제에게는 그만둘 권한이 없었다. 싫증이나 게으름도 사치였다. 조금만 느슨해졌다 싶으면 곧바로 불벼락이 떨어졌다. 어린 아들이라고 해도 실수하거나 집중하지 않으면 정말 무섭게 혼냈다. 훈련하면서 칭찬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 많이 혼났다. 독자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그 ‘많이’가 아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리고 무섭게 혼났다. 그런 훈련을 나는 축구부에 들어가 합숙 생활을 시작했던 중학교 3학년 이전까지 매일 반복했다. 그렇다. 7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아버지의 하드트레이닝 탓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았다. 한 번은 운동장에서 형과 내가 또 심하게 혼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동네 할머니가 경찰에 신고하시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할머니는 “자기 자식이면 절대 그렇게 못 해! 당신 의붓애비지?”라며 믿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경찰서로 향하는 할머니를 쫓아가 겨우 만류했다. 이런 식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우리 형제의 하드트레이닝도 쭉 이어졌고.”
 

(5)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독일로 날아오신 아버지의 헌신


내가 힘든 티를 낼 때마다 아버지는 “성공은 선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인생을 투자해야 10년, 20년 후에 결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속내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결국, 고민 끝에 아버지는 한국의 일을 정리하고 독일로 넘어오시기로 했다. 있는 돈, 없는 돈을 전부 끌어다 숙소 근처에서 제일 싼 호텔을 거처로 삼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지내는 클럽하우스 숙소를 직접 보더니 기겁하셨다. 결벽증에 가까운 아버지의 청결 기준에 내가 지내던 방은 거의 쓰레기통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장 청소부터 하셨다.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내 숨은 먼지를 털어내고 물걸레로 방안 구석구석을 일일이 닦았다. 지금도 아버지는 런던 집을 매일 두 시간씩 청소한다. TV 드라마에서 가끔 나오는 그런 대청소를 매일 하신다. 창틀 먼지까지 닦으신다. 진공청소기를 잡는 아버지의 손 부위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들고 온 밥솥으로 직접 흰쌀밥을 지어 막내아들에게 먹이셨다. 함께 잔뜩 싸 오신 김치와 김만으로도 너무 맛있었다. 남들에게는 보잘것없는 밥상일지 몰라도 내게는 진수성찬이었다. 숙소 규정 때문에 밥솥을 사용한 뒤에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춰 둬야 했다. 내가 훈련을 나간 뒤에 아버지는 혼자 내 방에 남아서 밥솥을 옷장 안에 꼭꼭 숨기는 등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셨다.”


“훈련도 직접 참관하셨다.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서 꿈쩍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훈련하는 아들을 지켜봤다. 팀 훈련이 끝나고 숙소로 함께 돌아온 아버지는 “이제 근력을 키워야 한다”라면서 작은 체력단련실에서 아들을 챙기셨다. 게으름이나 꾀병을 위한 틈은 없었다. 아버지는 말만 하고 뒷짐 지는 타입의 지도자가 아니다. 모든 근력 운동을 나와 똑같이 하셨다. 심지어 나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 때도 있었다.”


나를 위해서 한국에서 날아온 아버지가 눈앞에서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내가 게을러질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클럽하우스 체력단련실의 귀신 부자가 되어 갔다. 독일 친구들은 한국인 부자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께 감사할 뿐이었다. 그때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혼자 버티기에는 함부르크 유소년 생활이 너무 외롭고 배고프고 힘들었다.
 

(6) 아버지의 정신 교육 

 


<  2010년 10월 30일, 손흥민 선수가 분데스리가 데뷔 첫 골을 기록했을 때의 이야기 >
 
나의 분데스리가 데뷔골은 팀의 2-3 패배로 빛이 바랬다. 허망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열아홉 살인 내가 그 유명한 분데스리가에서 골을 넣었다. 유소년 계약 1년 만에 말이다. 경기 후 선수단은 곧바로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클럽하우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 아버지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 기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가 반겨 주기를 바란다. 그런 성격을 잘 아시는 아버지는 그때도 지금도 내가 귀가할 때까지 주무시지 않는다. 울컥하는 마음에 아버지와 포옹했다. 

 

아버지의 반응은 고요했다. 작은 목소리로 “수고했다. 어서 쉬어라. 다음 경기 준비해야지”라고만 하실 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치를 보며 짐을 풀었다. 아버지는 내가 쓰던 노트북을 집어 들고는 “오늘 이건 내가 가져가마”라고 조용히 말했다. 프로 데뷔골에 대한 인터넷 반응을 구경하면서 웃으며 잠들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흥민아. 축구선수한테 제일 무서운 게 교만이야. 한 골 넣었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 지금 네가 할 일은 다음 경기 준비야. 내일 보자”라면서 방을 나가셨다. 갑자기 방이 휑하게 느껴졌다. 분데스리가 데뷔골의 감흥을 즐길 방법이 전혀 없었다. 최근에야 아버지는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싸구려 호텔 방으로 돌아가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하셨단다. “하느님, 흥민이가 오늘 하루만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해주세요”라는 기도. 아들의 프로 데뷔골에 대한 기쁨보다 어린 내가 자만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 것이다.”

 


< 2011년 아시안컵에 처음으로 다녀오고 난 뒤 밥을 많이 먹어서 체중이 불어난 이야기 >
 


“불어난 체중이 숫자로 표시되자 스스로 큰 충격을 받았다. 주위에 있는 모든 분이 ‘체중 게이트’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소식을 접한 아버지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평소 “조금 좋다고 꼴값 떨고 교만해지고 나대면 안 된다. 반대로 조금 상황이 힘들다고 소심하게 있을 것도 아니다. 항상 자기 선을 지켜야 한다”라고 그렇게 강조했던 부분이 내 안에서 아시안컵에 다녀온 딱 한 달 만에 와장창 무너졌기 때문이다.”


“몸은 무겁고 경기도 풀리지 않는 상태로 2010-11 시즌이 막을 내렸다. 개인 기록은 시즌 15경기(선발 8회) 3골이었다. 만족할 만한 기록은 아니어도, 프로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고 국가대표팀에 뽑혀 아시안컵에도 다녀왔다. 타지에서 2년 넘게 버틴 고생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도 그리웠고 집밥도 실컷 먹고 싶었다. 아시안컵에서 친해진 형들과 만나서 놀고도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시즌이 끝나갈 즈음 아버지가 “나는 자존심 상해서 못 돌아간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직후 무너진 밸런스와 (SNS의 재미를 알아 버린?) 나의 달라진 태도가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귀국하자마자 춘천으로 갔다. 대표팀에서 알게 된 선후배, 친구들에게는 일단 나중에 보자고 메시지를 남겼다. 아버지의 훈련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죽었다. 아침 8시에 밥을 먹고 체력 단련장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근력 운동을 했다. 그리고는 뒷산의 높다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웨이트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축구공 20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위치를 옮겨 가면서 슛을 때리기 시작했다. 매일 1천 개씩. 그렇다. 1천 개다. 같은 골문을 향해서 오른발 500번, 왼발 500번 슛을 때렸다. 내가 슛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의 슈팅은 2011년 여름 지옥훈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성미 급한 초여름 햇살이 내 정수리를 열정적으로 찔러 댔다.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어지러웠다. 눈앞이 흐려졌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초콜릿과 바나나를 입안에 욱여넣어 떨어진 당을 채웠다.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훈련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자마자 쓰러져 자기 바빴다. 스마트폰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SNS는 끊긴 지 오래였다. 대표팀 형들의 각종 경조사도 모두 스킵했다. 혹시나 사람들이 내가 건방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누워서 그런 걱정을 하다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일어나면 지옥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5주를 보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여름 프리시즌 훈련 일정에 맞춰 독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이 있었던 탓에 나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5주 훈련은 지옥 같았지만, 그 과정을 버틴 몸은 천국의 날개 달린 천사처럼 가벼웠다. 살면서 이런 컨디션은 처음이었다.”


"춘천의 지옥훈련은 내게 최상의 컨디션을 선물했다. 체중이 줄고 근력을 키웠으니 그라운드에서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훈련과 연습 경기에서 내 페이스를 따라올 상대가 없었다. 프리시즌에 뛰었던 6경기에서 나는 15골을 몰아쳤다. 최강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도 두 골을 넣었다. 

 

코칭스태프를 비롯해 구단 식구들 모두 이런 나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시간이 흐른 뒤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첫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구단에서는 나를 거의 포기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손흥민은 이제 끝났다. 저렇게 불어난 체중에 휴가까지 다녀오면 절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진단했다. ‘반짝 유망주’로 끝날 것이라는 자체 판단이었다. 에이전트인 티스는 이런 분위기에 관해서 우리 가족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단에서는 나의 격변이 큰 화제였다. 아버지의 지옥훈련 내용을 살짝 알려주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구단에서는 “아버지가 너를 살렸다”라고 말했다.”


과거 손흥민 선수의 기사를 볼 때마다 아버님의 사진을 보며 놀랐던 적이 있다. 사실 그때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사진만 봐도 정말 '무섭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그의 첫인상처럼 손웅정 씨는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손흥민 선수는 나태해지고 싶어도 나태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관련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정말 대단한 부자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7) 손흥민의 현재 런던 생활 


 
시즌 중 나의 일과는 간단하다. 7시 30분에 일어난다. 잠이 많아서 매번 아버지가 깨워 주신다.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한다. 과일, 꿀, 홍삼, 우유 반 컵으로 시장기만 없애고 직접 차를 몰아 훈련장으로 출근한다. 훈련은 보통 오전 10시나 10시 반부터 시작하지만 나는 항상 9시까지 훈련장에 도착한다. 훈련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체중을 재고 체력 단련실에서 가볍게 몸을 푼다.”


프리시즌이 시작되는 7월부터 시즌이 끝나는 이듬해 5월까지 대략 10개월 조금 넘게 나는 매일 이 생활 패턴을 유지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렇게 10개월을 살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정말 어렵다. 못 믿겠다면 한 번 시도해보셔도 좋다. 10개월 내내 저녁 10시 전에 잠자기. 10개월 내내 정크푸드 먹지 않기. 10개월 내내 자유 시간에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쉬기. 10개월 내내 스트레스를 빨리 털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오늘 만족하지 않고 내일 더 잘하고 싶다. 오늘 훈련보다 내일 훈련에서 더 잘하고 싶다. 다가오는 경기에서 이길 수 있게 팀을 돕고 싶다. 훈련이든 경기든 나는 최고가 되고 싶다. 그래야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뛰는 기회를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뛸 수 있는 현역 시간도 아주 짧다.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8) 프로 선수로 우뚝 서기까지 역정(歷程)



“기나긴 시즌을 보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한 경기, 한 골, 한 순간을 콕 집어 정리하기가 어렵다. “힘들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제일 많이 들었다. 나는 기계가 아니라서 당연히 힘들다. 경기를 위해서 대륙과 대륙을 왕복하다 보면 피로가 쌓인다. 그래도 행복하다. 경기에 계속 출전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할 뿐이다. 축구선수는 뛰고 싶어도 못 뛸 때가 정말 많다. 다치거나 징계를 받을 수도 있고, 단순히 경쟁에서 밀려 기회를 얻지 못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프로 생활을 하면서 선발 명단에 내 이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깨달았다. 올 시즌 내내 계속 뛸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지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몸을 온전히 유지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뛴 게 어디냐고? 아니다. 그건 위로가 될 수 없다. 세상에 결승전 출전에 만족하는 축구선수는 없다. 나는 결승전에서 이기고 싶었다. 내 꿈은 우승이었다. 찬란한 빅이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면서 세상을 품고 싶었다. 갑자기 모든 희망이 누군가에 의해 거절당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는데…”


“셋째, 아버지의 교육 신조도 한몫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내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은 “나가 놀아”뿐이었다. 아버지는 지금도 “자유라는 연료를 태워야 창의력이 빚어진다”라고 말씀하신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관찰하면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재미있어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는 이론이다. 내가 프로 축구선수가 된 걸 보면 그 교육관이 꽤 신빙성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2002 한일 월드컵이 열리기 1년 전인 2001년,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나 혼자 중대 결심을 했다. 축구를 진지하게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놀아 본 것 중에서 축구만큼 재미있는 게 없었다. 학교에 가도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공을 갖고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알다시피 쉬는 시간은 축구를 충분히 즐기기에 너무 짧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매번 다음 수업에 늦어서 혼이 났다. 점심시간에도 밖에서 공을 찼고,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서도 축구를 했다. 할 때마다 내가 제일 잘했다. 친구들을 쉽게 제쳤고 달리기도 내가 제일 빨랐다. 항상 이기는 게임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을까.”


“자식의 고집과 부모의 걱정이 부딪히면 언제나 자식이 승리한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내게 너무나 값진 경험이었다. 나도 잘 안다. 그런데 알아도 너무 아프다.”


매일 똑같은 볼리프팅과 8자 드리블 프로그램만 반복하니까 당연히 따분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능숙해졌다고 생각해도 아버지는 계속 두 아들에게 똑같은 메뉴만 시켰다. 이런 반복 훈련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그래도 축구가 너무 재미있었다. 둘째,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감히 지루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셋째, ‘필요하니까 하는 거겠지’라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이론은 간단했다. 하나가 되어야 둘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양쪽 발로 볼을 마음대로 다룰 줄 알아야 패스도 하고 크로스도 올리고 슛도 때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 다음에 움직임을 익히고 전술을 배우는 순서였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정한 기준에 다다르기 전까지 두 아들을 절대 다음 단계로 보내지 않았다.


어릴 적 축구의 기억이 별로 없다. 기억력 쇠퇴는 아니니까 오해 없길 바란다. 기억에 남는 축구가 없는 이유는 내가 엘리트 축구부에서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축구를 배웠기 때문이다. 일반 학업으로 따지면 홈스쿨링인 셈이다. 매일 똑같은 기본기 훈련만 반복했으니까 기억에 남는 장면이 다양할 리가 없다. 볼을 떨어트리지 않고 운동장을 세 바퀴 도는 훈련을 매일 반복했다. 아버지는 기본기를 중시했고, 성적(경기 결과)으로 유소년을 평가하는 지도방식을 정말 싫어하셨다.”


덕분에 나는 아버지와 훈련하는 동안 경기에 직접 출전하는 일이 드물었다. 또래 축구부 아이들에게 축구가 경기 출전이었다면, 내게 축구는 양발로 볼을 리프팅하고 머리 위에 볼을 세워 균형을 잡는 것이었다. 형과 함께 볼을 떨어뜨리지 않고 한쪽 발로만 리프팅을 해서 운동장을 누가 빨리 도는지를 겨루곤 했다. 떨어뜨리면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니 한눈팔 틈이 없었다. 그게 우리의 축구였다.”


“드디어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참가자도 많았고 이벤트성 대회였던 탓에 각자 슈팅할 기회가 두 번인가 세 번밖에 되지 않았다. 초등부가 먼저 시작했다. 아버지가 알려주신 대로 나는 있는 힘껏 슛을 때렸다. 현장 스태프들이 다들 ‘오~’하며 놀라는 눈치였다. 속성 과외 덕분인지 내가 생각해도 평소보다 슛이 강하게 날아갔다. 정확히 속도가 얼마로 측정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슛이 제일 빨랐다. 당당히 초등부 1등을 차지했다. 중학생 형들까지 합쳐도 내 기록이 두 번째로 빨랐다.”


“아버지는 자기 시간을 쪼개면서 작은아들의 뒤치다꺼리를 기꺼이 해주셨다. 전학 절차가 더디자 육민관중학교 축구부 감독을 찾아가 한바탕 벌이기도 하셨다. 복잡한 축구의 길을 계속 고집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헌신 덕분이었다. 집안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데도 아버지는 형과 내게는 꼭 좋은 유니폼과 축구화를 마련해 주셨다. 당신은 구멍 난 양말을 신어도 두 아들에게는 항상 새 양말을 신게 했다.”


“축구 명문에 모인 선수들인 만큼 모두 실력이 뛰어났다. 그렇게 뛰어난 친구들과 경쟁하는 것만큼 재미있고 동기부여가 되는 일은 없다.”


꼬마 시절부터 꿈이 둘 있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 그리고 유럽에서 뛰어 보고 싶다는 꿈. 거짓말 같겠지만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유럽에서 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는데 꿈은 일단 크게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세뇌(?)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두툼한 종이 뭉치를 “꼼꼼하게 읽으라”며 건네주셨다. 뭔가 봤더니 해외 유학 프로그램 선배들이 연수 기간에 유럽 현지에서 작성했던 축구 일기였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아버지였지만 그런 자료는 기막히게 구해서 아들에게 가져다주셨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딱 하나, 부러웠다. 정말 부러웠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스스로 유럽 진출 기회를 만들기는 불가능했기에 협회의 해외 유학 프로그램은 내게 유일한 통로였다.”


“쉽게 들릴지 모르지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사춘기 소년이 혼자 버티기란 정말 어렵다.”


“어릴 때부터 양발을 쓸 줄 알아야 한다며 어린 아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가르쳤던 아버지의 고집 덕분에 나는 왼발을 편하게 사용한다. 지금도 왼발 슛에 더 자신이 있을 정도다.”


“막내아들이 헤헤거리는 동안 아버지가 움직였다. 첫 번째 작업은 독일어 과외였다. 아버지는 ‘독어를 한 마디라도 알고 가는 게 낫다’면서 당장 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춘천은 생각보다 작은 도시다. 독일어 과외 선생님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수소문한 끝에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분을 모실 수 있었다. 아버지는 급한 성격을 뽐내기라도 하듯 수업량을 하루 4시간으로 잡았다.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죽어라 파는 가풍이 재차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과외비가 우리 집 형편에 비해서 턱없이 비쌌다. 부모님께 감사하고 또 죄송할 따름이다.”


“학적 처리를 두고 약간의 갈등을 빚었다. 주위에서는 1년 연수 후의 일을 얘기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축구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 조언에도 일리가 있었다. 제도권에서 한 번 밀리면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아버지는 완강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면 처음부터 가지도 않는다면서 배수의 진을 쳤다. 엘리트 축구계와 그리 말랑말랑한 사이가 아니었던 아버지는 선수의 신분을 놓고 어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줄다리기를 극도로 싫어하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장기영 대표는 첫 만남에서 나보다 아버지의 험상궂은 얼굴에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정말 무서워 보여서 움찔하고 있었는데 그 양반이 갑자기 자기한테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90도 인사를 해서 너무 당황했단다. 어떤 느낌인지 내가 아주 잘 안다!”


“아버지는 유학 준비를 하면서 했던 말을 재차 강조하셨다. “민아. 너는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걸 명심해. 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유럽에 진짜 갔다고 만족하면 안 돼. 유럽 진출, 프리미어리그라는 꿈이 있잖니. 지금 너는 지금까지 꿈꾸던 곳의 옆 동네까지만 일단 간 거야. 거기서 행복하게 최선을 다하면 정말 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그동안 기울였던 지극정성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엘리트 코스에서 축구를 배운 기간이 1년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 나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도공이 단 한 개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 수많은 도자기를 빚고 깨기를 반복해야 한단다. 아버지는 나라는 도자기를 빚기 위해서 아무런 대가 없이 7년 세월을 보냈다. 내가 여기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엄청난 불효일 수밖에 없다.”


“구단은 우리 셋을 각기 다른 연령대 팀에 넣었다. 종필이는 16세 팀, 나는 17세 팀, 민혁이 형은 19세 팀으로 찢어졌다. 우리끼리 몰려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였다.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구단에서는 학교를 일주일에 사흘만 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가겠다고 우겼다. 어렵게 잡은 기회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수업 내용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훈련과 경기 때문에 힘들기도 했다. 그래도 억지로 참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꾸역꾸역 들었다.”


“동료들의 독일어를 빨리 알아듣고 싶어서 선택한 방법은 ‘다짜고짜 들이대기’였다. 클럽하우스에 들어갈 때마다 큰 목소리로 “구텐 모르겐!”이라고 외쳤다. 처음엔 당연히 창피했다. 그다음에 돌아오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한국이나 독일이나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학교 수업에서 새로 배운 표현을 그날 훈련 중에 무조건 써먹었다. ‘예를 들어’라는 말을 배웠다고 치면 17세 팀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갑자기 “예를 들어!”라고 말했다. 독일 아이들은 뜬금없는 들이대기에 “너 그 말 어디서 배웠어?”라며 재미있어했다. 덕분에 한마디라도 더 말을 섞을 수 있었다. 내가 잘못 말하면 고쳐 주기도 했다. 그렇게 독일 친구들과 직접 주고받은 단어나 문장은 신기하게 저절로 외워졌다.”


“마음이 조급했다. 감독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보다 우리가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뛰는 팀이 지는 꼴을 못 본다. 눈물이 많은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울음이 터졌다. 슬퍼서 운다기보다 그냥 눈물이 나온다. 국가대표님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던 메이저 대회에서 눈물을 보인 이유도 결국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정말 이기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이 버릇은 커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2017-18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유벤투스에 패한 뒤에도 너무 분해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경기일수록 더 그렇다.”


“본격적으로 U-17 팀에서 팀 훈련을 시작했다. ‘다짜고짜 들이대기’ 독어 대화 시도가 통했는지 팀 아이들은 경기장 밖에서 내게 잘해 줬다. 문제는 경기장 안이었다. 누가 봐도 쉽게 알 정도로 아이들은 내게 패스를 주지 않았다. 인종 차별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텃세였을 것이다. 연습 경기 중에도 나는 패스를 받지 못해 혼자 뛰다가 끝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가서 볼을 빼앗아 오기로 결심했다. 안 주면 내가 직접 챙길 수밖에 없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상대가 볼을 잡을 때마다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남들 눈에는 이런 모습이 ‘투지 넘치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경기에서 득점도 조금씩 쌓여 가다 보니까 독일 친구들도 천천히 내게 마음과 패스를 열어 줬다. 내가 좋은 위치로 파고들 때마다 패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블랙번은 구체적인 계약 방법까지 제안했다. 프로 계약(영국은 만 16세부터 프로 계약을 맺을 수 있다)을 한 뒤에 독일 구단에서 일정 기간 임대로 지내고 돌아오는 방법이었다. 무적 신분이란 불안감에 휩싸였던 나는 그것만으로도 반가웠지만 장기영 대표가 만류했다. 임대 중에 블랙번 안에서 변화가 생기면 쉽게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나를 뽑았던 지도자가 그때까지 블랙번에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유럽에는 그런 식으로 낯선 타지에서 버려지는 유망주가 정말 많다.”


이제 함부르크 쪽에서 ‘비자만 가져오면 무조건 계약’이라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계약서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티스와 장기영 대표에 따르면 함부르크는 비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우리 쪽에서 요구한 각종 조건(시즌 중 한국 왕복 비행기 비용 처리 등)을 전부 합의했었다고 한다. 나의 서명으로 함부르크 최초의 한국인 공식 유소년 선수가 탄생했다. 비자 심사대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던 시간, 베트남 할머니 직원의 자비, 그리고 유소년 계약 체결이 모두 같은 날에 벌어졌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정말 서러웠다. 유럽에서 뛴다는 판타지의 실사판은 늘 배고픈 일상이었다.”


“내가 힘든 티를 낼 때마다 아버지는 “성공은 선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인생을 투자해야 10년, 20년 후에 결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속내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결국 고민 끝에 아버지는 한국의 일을 정리하고 독일로 넘어오시기로 했다. 있는 돈, 없는 돈을 전부 끌어다 숙소 근처에서 제일 싼 호텔을 거처로 삼으셨다.”


“갑자기 판 니스텔로이가 먼저 다가와 “지(Ji, 박지성 선수의 애칭)랑 아는 사이냐?”라고 물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함께 뛰었던 덕분에 판 니스텔로이는 한국인 선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박지성 선배를 너무 잘 알지만 저쪽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알 리가 없지. 박지성 선배나 판 니스텔로이나 내게는 그냥 TV에서나 볼 수 있는 ‘우주대스타’였다. 말 걸어 준 것만도 감사한데 판 니스텔로이는 “너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어. 자신감 있게 열심히 해봐”라고 조언했다. 이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실화냐?’


“촬영장으로 나가기 직전에 화장실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마침 판 니스텔로이가 들어왔다. 내 어깨를 꽉 잡으면서 “괜찮아. 우리는 널 기다릴 거야”라고 말했다. 참았던 눈물이 펑하고 터지고 말았다. 겨우 참았는데, 정말 무슨 대단한 격려를 해 준 것도 아닌데, 판 니스텔로이의 그 한 마디가 내 속상한 마음을 제대로 찔렀다. 열아홉 살짜리 한국인 신입생이 엉엉 울자 선수들과 스태프가 모두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줬다. 한국에 있던 나를 데려가 준 곳, 유소년 계약을 맺어준 곳, 1군 승격 기회를 준 곳, 제일 어린 나의 슬픔을 봄날 햇볕처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는 곳. 함부르크는 그런 곳이었다.”


”호황이면 좋고 불황이면 더 좋다.” 나를 둘러싼 상황이 어두워질 때마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다. 글로벌 기업 도요타 자동차의 조 후지오 회장의 어록이다. 원래 뜻은 조금 달라도 나는 이 말을 곤경에 굴복하지 말고 더욱 노력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꿈같은 1군 데뷔가 눈앞에 왔지만 생각보다 덤덤했다. 빨리 경기를 뒤집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경기 중 슈팅도 날리고 공격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애를 썼지만 2-5로 패하며 결국 컵대회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유럽 프로 데뷔전이었다는 만족감은 딱히 없었다. 졌다는 게 분할 뿐이었다.”


골인. 마인 에르스테스 토어(Mein erstes tor, 나의 첫 골). 함부르크 역대 최연소 득점 신기록. 노력에 대한 보상. 가족에게 바치는 선물. 2010년 10월 30일이었다.”


나의 분데스리가 데뷔골은 팀의 2-3 패배로 빛이 바랬다. 허망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열아홉 살인 내가 그 유명한 분데스리가에서 골을 넣었다. 유소년 계약 1년 만에 말이다. 경기 후 선수단은 곧바로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클럽하우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 아버지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 기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가 반겨 주기를 바란다. 그런 성격을 잘 아시는 아버지는 그때도 지금도 내가 귀가할 때까지 주무시지 않는다. 울컥하는 마음에 아버지와 포옹했다. 아버지의 반응은 고요했다. 작은 목소리로 “수고했다. 어서 쉬어라. 다음 경기 준비해야지”라고만 하실 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치를 보며 짐을 풀었다. 아버지는 내가 쓰던 노트북을 집어 들고는 “오늘 이건 내가 가져가마”라고 조용히 말했다. 프로 데뷔골에 대한 인터넷 반응을 구경하면서 웃으며 잠들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흥민아. 축구선수한테 제일 무서운 게 교만이야. 한 골 넣었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 지금 네가 할 일은 다음 경기 준비야. 내일 보자”라면서 방을 나가셨다. 갑자기 방이 휑하게 느껴졌다. 분데스리가 데뷔골의 감흥을 즐길 방법이 전혀 없었다. 최근에야 아버지는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싸구려 호텔 방으로 돌아가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하셨단다. “하느님, 흥민이가 오늘 하루만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 아들의 프로 데뷔골에 대한 기쁨보다 어린 내가 자만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 것이다.”


에이전트인 티스도 마찬가지였다. 쾰른전 현장에 있던 티스는 경기가 끝나자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제외한 모든 언론 인터뷰를 금지시켰다. 어린 나를 들뜨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반응은 구경도 못 한 채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 유소년 신분이었던 나는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1군 선수가 되고, 분데스리가에서 골을 넣고, 함부르크 팬들을 열광시킬 때도 나와 아버지는 별 볼 일 없는 살림 속에서 어렵게 지냈다. 가족과 함께 지낼 집도 없었고 아버지는 자동차가 없어서 매일 호텔과 클럽하우스, 훈련장 사이를 몇 시간씩 걸어 다녔다. 유소년 때와 다르게 1군 훈련장에는 가족도 출입할 수가 없었다. 훈련이 시작되면 갈 곳이 없어진 아버지는 혼자 밖에서 몇 시간씩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셨다. 비를 피할 곳도 없었다. 훈련을 마친 나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냥 버티셨다.”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해트트릭 욕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이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때문에 경기가 끝나고 정말 분통이 터졌다.”


내가 골을 넣을수록 아버지는 더 노심초사했다. 들뜨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이카로스가 너무 높이 날지 말라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망각한 채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태양의 열기에 날개를 붙였던 밀랍이 녹아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팀 동료인 판 니스텔로이도 대화 소재로 등장했다. 함부르크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판 니스텔로이는 내게 “지(Ji, 박지성 선배의 애칭)는 A매치 일정으로 2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가느라 지칠 텐데 영국으로 돌아온 다음 날도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라면서 웃었던 적이 있다.”


“코칭스태프가 승부차기 순서를 알렸다. 내가 네 번째 키커였다. 긴장 속에서 시작된 승부차기는 허망하게 우리의 3 연속 실축으로 끝나고 말했다. 나는 승부차기에 나설 기회도 없이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이길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경기에서 졌을 때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한일전이 시작되고 경기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패배를 단 1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본에 결승행 티켓을 넘겨줘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는데도 결승에 오르지 못해서, 나를 응원해 준 가족에게 미안해서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한국 축구의 영웅들과 함께했던 첫 메이저 대회는 그렇게 끝났다.”


“만 하루도 되지 않아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내가 너무 들떠 있다고 했다. 아시안컵에 출전하면서 스타 선배들과 얼굴을 익혔다고 해서, 국내 팬들의 반응이 뜨겁다고 해서, 함부르크 안에서 상황이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교만해지면 안 된다고 꾸중을 들었다. 건방 떨지 말고 새로 시작하라는 충고는 회초리보다 더 따끔했다. 스스로 느낀 바가 없지 않아 새겨듣기로 마음먹었다.”


불어난 체중이 숫자로 표시되자 스스로 큰 충격을 받았다. 주위에 있는 모든 분이 ‘체중 게이트’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소식을 접한 아버지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평소 “조금 좋다고 꼴값 떨고 교만해지고 나대면 안 된다. 반대로 조금 상황이 힘들다고 소심하게 있을 것도 아니다. 항상 자기 선을 지켜야 한다”라고 그렇게 강조했던 부분이 내 안에서 아시안컵에 다녀온 딱 한 달 만에 와장창 무너졌기 때문이다.”


“몸은 무겁고 경기도 풀리지 않는 상태로 2010-11 시즌이 막을 내렸다. 개인 기록은 시즌 15경기(선발 8회) 3골이었다. 만족할 만한 기록은 아니어도, 프로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고 국가대표팀에 뽑혀 아시안컵에도 다녀왔다. 타지에서 2년 넘게 버틴 고생을 생각하면 나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도 그리웠고 집밥도 실컷 먹고 싶었다. 아시안컵에서 친해진 형들과 만나서 놀고도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시즌이 끝나갈 즈음 아버지가 “나는 자존심 상해서 못 돌아간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직후 무너진 밸런스와 (SNS의 재미를 알아 버린?) 나의 달라진 태도가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귀국하자마자 춘천으로 갔다. 대표팀에서 알게 된 선후배, 친구들에게는 일단 나중에 보자고 메시지를 남겼다. 아버지의 훈련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을 테니까.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죽었다. 아침 8시에 밥을 먹고 체력 단련장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근력 운동을 했다. 그리고는 뒷산의 높다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웨이트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축구공 20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위치를 옮겨 가면서 슛을 때리기 시작했다. 매일 1천 개씩. 그렇다. 1천 개다. 같은 골문을 향해서 오른발 500번, 왼발 500번 슛을 때렸다. 내가 슛 능력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의 슈팅은 2011년 여름 지옥훈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성미 급한 초여름 햇살이 내 정수리를 열정적으로 찔러 댔다.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어지러웠다. 눈앞이 흐려졌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초콜릿과 바나나를 입안에 욱여넣어 떨어진 당을 채웠다.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훈련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자마자 쓰러져 자기 바빴다. 스마트폰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SNS는 끊긴 지 오래였다. 대표팀 형들의 각종 경조사도 모두 스킵했다. 혹시나 사람들이 내가 건방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누워서 그런 걱정을 하다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일어나면 지옥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5주를 보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여름 프리시즌 훈련 일정에 맞춰 독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이 있었던 탓에 나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5주 훈련은 지옥 같았지만 그 과정을 버틴 몸은 천국의 날개 달린 천사처럼 가벼웠다. 살면서 이런 컨디션은 처음이었다. 함부르크 국제공항에 내리자 익숙한 독일의 공기 내음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분데스리가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확실했다. 힘든 기억밖에 없어도 익숙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롤러코스터에는 변치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올라가면 금방 떨어진다. 반대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늘로 솟구치고. 우리 인생도 롤러코스터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좋은 일만 있는 삶은 없다. 그 대신에 무슨 일이든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춘천의 지옥훈련은 내게 최상의 컨디션을 선물했다. 체중이 줄고 근력을 키웠으니 그라운드에서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훈련과 연습 경기에서 내 페이스를 따라올 상대가 없었다. 프리시즌에 뛰었던 6경기에서 나는 15골을 몰아쳤다. 최강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도 두 골을 넣었다. 코칭스태프를 비롯해 구단 식구들 모두 이런 나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시간이 흐른 뒤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첫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구단에서는 나를 거의 포기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손흥민은 이제 끝났다. 저렇게 불어난 체중에 휴가까지 다녀오면 절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진단했다. ‘반짝 유망주’로 끝날 것이라는 자체 판단이었다. 에이전트인 티스는 이런 분위기에 관해서 우리 가족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단에서는 나의 격변이 큰 화제였다. 아버지의 지옥훈련 내용을 살짝 알려주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구단에서는 “아버지가 너를 살렸다”라고 말했다. 나는 ‘반짝 유망주’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끝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평소대로 생활하려는 아버지의 모습도 안쓰러웠다. 아버지는 항상 “대들보가 휘면 기둥이 휜다”라고 말씀하신다. 지금도 아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며 수도승처럼 생활하신다. 그런 아버지의 수심 가득한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기 힘들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아버지는 “좌절하지 말고 24시간 준비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프로의 자세”라며 강한 정신력을 주문하셨다. 그러나 프로답게 멘탈을 유지해야 한다고 매번 다짐해도 막상 경기에 출전하지 못해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진 채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31라운드 하노버전에서 드디어 내가 선발 출전 기회를 얻었다. 마지막 선발(지난해 12월 4일)로부터 세어 보니 무려 132일 만이었다. 나도 팀도 물러날 곳이 없었다. 마침 한국을 다녀온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아빠, 감이 너무 좋아. 골 넣을 것 같아”라고 얘기했다. 겨우 선발 기회를 얻은 백업 주제에 그런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세상 어디에나 편견이 있다. 유럽에 온 한국인 선수는 ‘축구 못하는 동네에서 온 녀석’이라는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 유럽 기준으로 동양 선수들은 의사 표현이 소극적인 편이어서 만만하게 보기도 한다. 인종 차별과는 약간 다르다. 유럽의 ‘축구 부심’이 샛길로 빠졌다고 해야 할까. 나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그런 편견과 싸워야 했다. 팀 동료들은 내게 패스를 주지 않았다. 말도 잘 걸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가서 볼을 빼앗아 와야 했고, 내가 먼저 다가가 독일어로 말을 걸어야 했다. 

 

마음의 담을 무너트리려면 경기장 안에서는 실력을 입증해야 하고, 밖에서는 ‘내가 너희 문화를 배우려고 노력 중이다’라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가끔 세게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소위 ‘썩은 사과’와 맞닥뜨릴 때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썩은 사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 내가 행동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분명히 알려야 한다.”


“이후 한 골씩 주고받아 2-1이 된 후반 14분 내가 하프라인 근처에서 패스를 받았다. 앞뒤 재지 않고 드넓게 펼쳐진 공간을 향해 돌진했다. 커트인, 한 명, 두 명, 왼발 슛, 골인. 기뻤다. 1년 전 춘천 뙤약볕 아래서 현기증이 나도록 반복했던 딱 그 지점이었다. 골을 넣은 나는 곧바로 핑크 감독님에게 가서 안겼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보은 사례 아니겠는가! 도르트문트전 3-2 승리야말로 우리 시즌의 진짜 시작이었다.”


사실 나는 경기에 매번 뛸 수 있는 함부르크에서 행복했다. 언제 어디서든 나의 최우선 기준은 출전 여부다. 축구 선수는 뛸 때가 제일 행복하다. 아무리 빅클럽이라고 해도 벤치에만 앉아있으면 의미가 없다. 내게 처음 기회를 준 곳도 함부르크다. 지금처럼 매 경기 뛸 수 있으면 그걸로 대만족이었다. 이곳에서 더 잘하고 싶었다.”


“함부르크에서 주전으로 꾸준히 활약하자 유럽 각지에서 많은 오퍼가 왔다. 내가 그렇게도 꿈꿨던 프리미어리그 구단들도 구체적인 관심을 나타내며 접근했다. 마음 같아선 덥석 물고 싶었다. 다행히 티스와 장기영 대표는 나보다 훨씬 냉철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서 각자의 의견을 모았다. 결론을 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째, 뛸 수 있는 팀이어야 한다. 둘째, UEFA 챔피언스리그처럼 큰 대회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연봉은 상관없었다. 돈은 항상 나의 목표가 아니라 내가 잘해서 따라오는 보너스라고 생각했다. 만약 함부르크가 다음 시즌 유럽 대회 출전권을 따면 남아도 상관없었다. 함부르크와의 재계약 협상, 타 구단의 제안 검토 등을 에이전트에게 맡기고 나의 안테나는 그라운드에 고정했다.”


독일에 와서 신기했던 것이 있다. 어딜 가나 이곳 사람들이 차범근 감독님을 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차 감독님이 레버쿠젠에서 마지막으로 출전했을 때가 1988-89 시즌이었다. 좋은 음악도 1년만 흐르면 잊히는 판에 30년이 지나서까지 기억되는 축구선수라니 놀라울 뿐이다.”


“언론에서 나를 감독님과 비교할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1970년대, 80년대의 축구 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내가 100골 넘게 넣을 수 있었을까? 감독님의 천금 동점골이 있었던 1987-88 시즌 UEFA컵 우승이 지금까지 레버쿠젠의 유일한 유럽 타이틀이다.”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아버지는 “겸손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성공 안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도 빠지지 않았다.”


유럽으로 가는 기회를 잡았을 때, 함부르크에서 처음 프로 계약을 맺었을 때, 국가대표팀에 처음 선발되었을 때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메시지가 바로 겸손이었다. 항상 상대방을 높이고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말씀도 나는 지금까지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레버쿠젠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아니라 나의 축구였다. 간단한 결론이다. 무거워진 통장은 그냥 겉모습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를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행복하게 즐기는 삶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골이란 지독하게 들어가지 않다가도 한 번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쉽게 들어가곤 한다.”


“유럽 대회에 출전하는 팀의 선수라면 출전, 회복, 휴식으로 구성되는 나만의 시즌 사이클을 갖고 있어야 한다.”


“가족 외에 내게 힘을 주는 존재가 있다. 팬이다. 내가 제일 소름 돋을 때가 언제인지 고백하면, 주말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 한국에 있는 팬들이 월요일에 출근하면서 너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내 골 동영상을 보면서 좋아하고, 학교나 직장에서 친구, 동료들과 함께 내 골을 이야기한단다. 처음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취라고 생각한다. 나도 2002년 4강 신화를 보면서 너무 행복했다. 지성이 형이 뛰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보면서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경험을 선물하고 있다니.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다. 항상 팬들에게 감사하면서 지낸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 역시 무뚝뚝한 아버지의 가르침이 만들어 준 마음가짐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팬들이 좋아해 주는 것도 현역으로 뛸 때 잠깐이다. 은퇴하면 아무도 너를 찾지 않을 거다. 관심 가져 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인이든 기념 촬영이든 최대한 열심히 해 드려야 한다”라고 항상 말씀하신다.”


“레버쿠젠 시절의 일이다. 주중 저녁에 치른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끝나고 귀가하려는데 경기장 밖에 족히 백 명이 넘어 보이는 팬들이 보였다. 차를 타고 나가면서 보니까 전부 나를 기다린 한국 팬들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나 한 명을 보기 위해 낯선 곳에서 기다린 분들이라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팬 서비스에 관한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어린이와 몸이 불편하신 팬의 요청은 백 퍼센트 받아 드린다. 한국의 어느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비공개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현장에 갔는데 어느 순간 우리 일행의 차가 아예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팬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걱정될 정도로 삽시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꼼짝없이 차 안에 갇힌 상태로 고민하던 차에 아버지가 갑자기 차문을 열고 현장 스태프를 불렀다. “저기 저 아이랑 저분이 들고 있는 것 좀 가져다주세요.” 무슨 일인지 봤더니 휠체어를 탄 팬과 어린이가 인파 탓에 뒤쪽으로 밀려 있었다. 현장 스태프가 인파를 뚫고 그 팬들이 들고 있던 종이와 축구공을 받아왔다. 아버지는 “지금 밖에 나가진 못해도 이건 꼭 해드려야 할 것 같다. 빨리 사인해라”라면서 공을 내게 주셨다. 또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토트넘 경기를 끝내고 관중석에서 ‘셔츠 좀 갖다 주세요’라고 한글로 쓴 피켓을 들고 응원하는 외국인 꼬마를 본 적이 있다. 말해 뭐 하겠는가. 당첨이다.”


브라질로 가는 나의 키워드는 자신감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나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프로선수가 되었고, 골을 넣었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되었다. 기본 문법부터 시작한 독일어는 이제 공식 기자회견에 나설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번 변화는 운이 좋아서 얻어걸린 게 아니다. 모두 피와 땀과 노력과 맞바꾼 결과물이었다.”


“우리를 꺾은 알제리와 벨기에 선수들이 경기 후 자국 팬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브라질까지 찾아와 우리를 응원해 준, 우리의 승리를 기대해 준, 늦은 시간까지 한국에서 우리를 응원해 준 국민들께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평소 내 입에서 나오는 ‘국가대표의 책임감’이라는 말은 순도 100% 진심이다. 나는 태극마크가 자랑스럽고 조국을 대표해서 뛰는 일을 인생 최고의 영광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스스로 태극마크를 반납할 생각이 없다. 국가대표는 내가 먼저 고사할 수 있는 팀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게 있어서 국가대표팀은 절대선이다. 소속팀과 마찬가지로 대표님 경기에서 나오는 나의 골과 우리의 승리로 한국 축구 팬 모두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보다 기쁜 일은 없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국가 대 국가로 맞붙은 대결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국민 모두를 실망시켰을 때 내 마음은 갈가리 찢어진다. 브라질 월드컵은 내게 그런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와 알제리, 벨기에의 선수들을 차례로 상대하면서 내가 목격했던 그들의 눈빛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나도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라운드 위에서 만난 상대 선수들의 눈빛은 그야말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의 눈빛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라운드에서 그렇게 투지에 불타는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투철한 정신력이 한국 축구의 전통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듣는다. 월드컵에 가서 싸워 보니 그곳에 모인 32개국 모든 선수가 전쟁터에 나서는 마음가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훈련 시간이 부족한 각국 대표팀들이 출전하는 월드컵에서 그토록 멋진 플레이와 명승부가 속출하는 이유를 말이다. 브라질에서 우리는 처절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우울함 속에서 나를 지켜 준 것은 축구였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아한다. 쉴 때도 나는 축구 영상을 찾아본다. 내 경기 영상도 자주 본다. 상황마다 다른 판단을 했을 때를 상상해 본다. 다른 팀이나 선수의 영상을 보면서 잘한 부분과 못한 부분을 찾아내며 공부한다. 훈련과 경기를 위해서 그라운드 안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어제 경기에서 져도, 파파라치 컷으로 곤욕을 치러도, 다른 엉뚱한 일들이 끊이지 않아도 일단 축구화를 신고 잔디 위에서 축구공을 차는 순간 머릿속에 있던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내가 제일 자랄 수 있는 것도 축구,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축구다. 축구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컴퓨터를 리부팅하면 속도가 빨라지는 그런 느낌이다.”


“‘오늘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 한다’라는 아버지의 신념도 나를 지켜 준 원동력이었다. 어제의 일을 계속 끌어안거나 내일을 걱정하는 토에 오늘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내일이 되어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독일 유소년 시절부터 그렇게 자기 암시를 해왔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오늘 나의 축구는 행복하고 즐거워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경기 시작 전에 나는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로 나가서 홈 팬들과 첫인사를 나눴다. 3만 6천 관중의 열렬한 환영이 눈과 귀, 피부로 생생하게 와 닿아 소름이 돋았다. 고등학교 1학년 나이로 집을 떠났던 2008년 8월로부터 정확히 7년 후, 내가 프리미어리그 그라운드에서 잉글랜드 팬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고 있었다.”


첫 훈련을 위해 토트넘의 훈련장으로 갔다.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 시설과 규모는 정말 엄청났다. 천연 잔디 구장만 15개 면, 인조 잔디 1.5개 면, 그리고 실내 풋살 구장이 설치되어 있다. 프로 구단의 훈련장이 국가대표팀이 사용하는 파주 트레이닝센터보다 거의 세 배 가까이 크다니 믿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지난 시즌 포체티노 감독님은 나의 에이전트와 아버지까지 런던으로 초청했었다. 아버지는 “시즌 중에 자꾸 이런 일로 내가 움직이면 흥민이 마음이 들뜰 수 있다”라고 고사했기 때문에 에이전트 두 분만 런던에서 포체티노 감독님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감독님은 직접 준비한 내 플레이 영상을 보여 주면서 “바로 이런 플레이가 지금 내 축구에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득점보다도 상대 수비를 허물거나 오프 더 볼(off-the-ball, 볼이 없는 상태) 움직임을 담은 장면들이었다고 한다. 단순히 ‘골 잘 넣는 선수’가 아니라 ‘딱 맞는 스타일의 선수’라는 감독님의 진심이 티스와 장기영 대표에게 뚜렷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프리미어리그 경기의 출전 명단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팀당 18명이다. 11명이 선발 출전하고, 벤치에 앉은 7명 중에서 3명만 교체로 들어갈 수 있다. 나머지 4명은 1초도 뛰지 못한다. 뛴 시간이 짧거나 아예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그라운드에 남아서 보충 훈련을 해야 한다. 컨디션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보충 훈련이 너무 괴롭다. 훈련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처량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토트넘 이적 첫 시즌에 내가 그 보충 훈련을 아주 많이 해봐서 잘 안다.”


“영어 적응도 순조로웠다. 아무래도 독일어에 능통하다는 점이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동료들의 빠른 영국식 억양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모르는 말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물어봤다. 영어를 빨리 배우려는 나의 노력은 동료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줬다.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는 자세에서 존중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게 상책이다. 구단에서 요구하는 영어 테스트가 있었는데 나는 시즌 전반기에 이미 통과했다. 구단에서는 외국인 중 최단 시간 합격이라며 나의 영어 습득 속도를 반겼다.”


부상자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통증이 아니다. 주전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영국의 어느 스포츠 전공 교수가 발표한 논문을 본 적이 있다. 부상으로 결장한 프로 선수들과 대면 인터뷰를 통해서 심리를 연구한 내용이었다. 설문 내용 중에서 가장 많은 대답이 ‘분노’였다. 본인의 부상으로 기회를 얻은 동료가 못하기를 바란다는 대답도 꽤 많았다고 한다. 5년 전 함부르크 1군으로 승격하자마자 발가락이 부러졌을 때 나도 기회를 잃을까 봐 펑펑 울었다. 내가 없는 동안 내 포지션에서 뛰는 동료의 플레이를 바라보는 마음은 정말 복잡하다. 동료와 팀이 잘해 주길 바라는 소망과 나의 공백이 컸으면 하는 이기심이 마구 뒤섞인다. 밥그릇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 감사하며 즐겨야 한다. 나의 행복 철학이다. 그라운드에 서서 축구공과 함께 있는 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어제를 떨치지 못하거나 내일을 걱정하는 삶은 오늘의 행복을 방해한다. 영국에서 나는 ‘스마일 보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동료들도 “어떻게 너는 매일 아침 웃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거냐?”라면서 신기해한다. 간단하다. 웃어서 행복한 거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라고 다짐한다.”


“몸값은 숫자일 뿐 내 자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가슴앓이 끝에 감독님을 찾아갔다. 축구선수가 되어 내가 먼저 보스를 찾아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즌 내내 내 안에 쌓인 응어리가 너무 커져서 화병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선발로 출전하지 못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될지를 물었다. 무엇보다 팀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가 궁금했다.”


“케인이 빠진 채로 나선 미들즈브러전에서 나는 전반전에만 두 골을 몰아쳤다. 두 번째 골은 사실 너무 잘 맞아서 나도 깜빡 놀랐다. 페널티박스 안 왼쪽에서 빼앗긴 볼을 다시 가져온 뒤에 오른발로 감아 찬 슛이었다. 슛을 때릴 때 골대를 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린 가상의 골대를 향해 찼는데 정확히 반대편에 꽂혔다계속 강조하지만 ‘손흥민 존’은 재능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다. 2011년 여름의 지옥 훈련을 시작으로, 시즌 중에도 일정 기간 이상 선발로 출전하지 못할 때마다 아버지와 나는 따로 슈팅 훈련을 가졌다. 함부르크 두 번째 시즌에는 6개월 동안 매일 슈팅 훈련을 하기도 했다. 미들즈브러전의 두 번째 골이 그 결실이다.”


“프리미어리그는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다. 전 세계에서 볼을 가장 잘 찬다는 선수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이런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했다.”


나는 항상 내 기록을 챙긴다. 지난 시즌보다 잘하는 것이 기본 목표이기 때문이다.


나는 축구 영상을 자주 본다. 집에서 쉴 때도 대부분 게임을 하든가 축구 영상을 보든가 둘 중 하나다. 일을 도와주러 런던에 오는 나의 크루들한테 핀잔을 들을 때가 많다. “야, 내가 너 일 도와주려고 런던까지 왔는데 넌 축구만 보냐?”라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스마트폰으로 축구를 보고 있던 것이다. 김유신의 말도 아니고 참 곤란한다. 이런 증상을 보통 중독이라고 하던데. 그래, ‘덕후’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내가 축구를 보는 이유는 두 가지. 

 

우선 재미있다. 토트넘의 리그 라이벌이나 외국 빅클럽들의 경기를 챙겨 본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국가대표팀 동료들의 경기는 하이라이트로 챙긴다. K리그도 판세나 주요 이슈 정도는 알고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축구 콘텐츠를 혼자 보면서 낄낄거리기도 한다. 평범한 ‘축빠’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겠다. 

 

두 번째 이유는 좀 진지하다. 공부하기 위해서 본다. 나는 축구 영상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운다. 호날두, 메시, 네이마르, 포그바 등의 플레이를 보면서 배운다. 결정적 참고서는 내 플레이 영상이다. 사실 팬들이 편집해서 올린 골 모음 영상도 몇 번씩 돌려 본다.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도 있고, ‘저기서 다르게 해 볼 수도 있겠다’라면서 이미지 트레이닝도 한다.”


“영상으로나 혹은 관중석에서 축구를 보면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경기 안에서는 모든 게 너무 빠르게 돌아간다. 0.0001초의 차이로 성패가 갈리기 때문에 이것저것 고민하거나 잴 여유가 없다. 그걸 영상으로 보면 피치 위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옵션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게 정말 큰 공부가 된다. 실제로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생길 때 써먹어 보는 힌트도 많다. 인터뷰에서 내가 “더 공부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내가 잘했던 장면도 영상으로 보면 더 잘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 21골을 넣었던 2016-17 시즌 헐시티와의 최종전을 마친 날 나는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더 잘할 수 있었던 여지, 수많은 틈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다.”


“터덜터덜 라커룸으로 걸어가는데 이란의 케이로즈 감독이 나를 반겼다. 아시아 무대에서 만날 때마다 케이로즈 감독은 항상 내게 “너는 좋은 선수다. 행운을 빈다”라고 칭찬해 줬다. 이날 케이로즈 감독은 내 유니폼을 부탁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도자로부터 직접 이런 부탁을 받자니 놀랍고 영광이었다. 경기 결과와 잔디 탓에 날이 잔뜩 섰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올 초부터 방송사 티비엔(tvN)의 다큐멘터리(2019.05.25 방영 - 손세이셔널)를 찍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다큐멘터리는 한두 시간에 뚝딱 끝나는 촬영이 아니다. 사흘에 한 경기씩 치르는 일정이 시작되면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아예 없다. 그래도 큰 맘먹고 이번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했다.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일상으로 시작해서 프리미어리그에서 경쟁하기 위해 내가 기울이는 노력을 담고 싶었다. 제일 큰 바람은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축구 자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걸 보면서 아이들이 축구 배우고 싶어 했으면 좋겠고, 축구에 관심이 없던 분들의 옆구리도 쿡쿡 찌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시다시피 지금 한국 축구의 분위기는 따뜻해졌다. ‘있을 때 더 잘해야 한다’는 성용이 형의 말을 기억한다. 더 많은 사람이 축구를 좋아하면 좋겠다. 영국처럼 한국에서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평소 관심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주말이 되면 온 가족이 축구 유니폼을 맞춰 입고 함께 경기장으로 가는 광경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축구 문화가 피어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다큐멘터리라는, 내게는 너무 거창한 일을 하기로 했다.”


가끔은 친구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나도 사람이라서 힘들거나 괴로울 때가 생긴다. 성격상 나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힘들다고 말하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는 사람도 힘들게 한다. 나는 주위를 힘들게 하거나 폐 끼치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특히 부모님 앞에서는 어두운 마음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나 하나만 보고 유럽에 ‘갇혀’ 사시는 두 분 앞에서 투덜거리는 짓이야말로 최악의 불효라고 생각한다. 내 안에 쌓인 ‘힘들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곧 친구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의 불평을 많이 들어준 친구는 바로 친형이다. 우리 형은 말을 정말 재미있게 한다. 내가 아무리 징징거려도 재미있게 받아쳐서 동생의 마음을 금방 풀어준다.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함께 버틴 형은 내 인생에서 없어선 안 될 친구이자 믿을 구석이다.”


“가끔 은퇴 후의 생활을 상상해 본다. 진로 고민이 아니라 아주 소소하게 해보고 싶은 일들이 있다. 제일 해보고 싶은 일은 한국에서 유럽 축구 중계와 ‘치맥’ 즐기기. 저녁에 알람을 맞춰 놓고 일찍 자는 거다. 챔피언스리그 경기 시간에 맞춰 일어나서 스마트폰 앱으로 ‘치맥’을 주문한다. TV를 켜고 소파에 기대서 맛있는 치킨과 함께 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축구를 본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실컷 보는 게 내 꿈이다. 은퇴했으니까 훈련이나 경기를 준비할 필요도 없고 까마득한 후배들이 뛰는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시청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야~ 옛날에 내가 뛸 때랑 많이 달라졌네~’ 하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그 친구는 축구를 좋아하려나…”


“아시아 최종 예산부터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의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대표팀은 버티고 또 버텼다. 처절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힘들었다. 독일전을 앞두고 (장)현수 형은 팀에 해가 된다면서 경기에서 빼 달라고 감독님에게 부탁까지 했다. 일생일대의 월드컵 경기 출전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축구선수의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난 여름 한국에서 시작한 나의 여정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한국, 영국, 미국, 영국을 거쳐 인도네시아로 이어졌다. 내 이동 거리를 정리한 언론 기사를 보고서야 나도 ‘아, 많이도 돌아다녔구나’라고 실감했다. 힘들었을까? 당연히 힘들다. 10시간 비행하는 구간을 한 번이라도 타 보신 분이라면 장거리 이동이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아실 것이다. 하지만 이를 경기력 저하의 핑곗거리로 삼고 싶지는 않다. 장거리 이동은 유럽에서 뛰는 타 대륙 선수에게 일상다반사다. 리오넬 메시, 네이마르, 루이스 수아레스, 알렉시스 산체스 등 남미의 스타플레이어들도 나처럼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어야 한다. 남미 스타들이 피곤하다며 투덜거렸다는 소리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고백할 게 있다. 아시안게임에서 귀국한 날 금메달 동지들이 다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다. 각자 소속팀으로 흩어지기 전에 한 번 더 뭉치기 위한 자리였다. 파울루 벤투 신임 감독님의 첫 A대표팀 소집 멤버들은 바로 다음 날 파주 트레이닝센터로 입소할 예정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 함께 금메달을 따낸 이야기들은 길게 길게 이어졌다. 다들 시즌 중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축배가 빠질 수 없었다. 서울의 이모 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에 대표팀에 합류했다.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불같이 화를 내셨다. “국가대표팀 새 감독님을 뵈러 가기 전날 술을 마시는 게 제정신이냐? 네가 이따위로 할 거면 이제 각자 갈 길 찾아 떠나는 게 낫겠다. 아빠는 북극이든 어디든 알아서 먹고살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적은 없었다. 살면서 제일 크게 혼난 날이 아니었나 싶다. 대표팀 신임 감독님에게 대한 예의도 중요했겠지만, 아마 금메달을 땄다고 들뜨지 말라는 메시지가 더 컸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항상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내 머릿속을 환기하신다. 우쭐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고, 반대로 너무 풀이 죽지도 말아야 한다. 스마트폰에 대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서 벤투호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맨유전을 끝내자마자 나는 경기장에서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해 두바이행 비행기를 탔다. 대표팀 동료들이 싸우고 있는 아시안컵 현장으로 가야 했다. 벤투 감독님은 나를 주장으로 선택했다. 사실 처음에는 머뭇거렸다. 선배 주장들의 희생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 혼자 잘 뛰면 그만인 상황이 아니었다. 주장은 팀 내 모든 선수를 챙겨야 한다. 큰 스트레스였다. 표정이 조금이라도 어두운 친구가 있으면 주장이 나서서 사정을 들어줘야 한다. 고민하는 내게 두리 선배가 연락을 했다. “지금 여기서 네가 못 한다고 하면 누군가 주장 완장을 차야 하잖아. 그 친구가 받게 될 부담을 생각해 봐. 성용이가 못 한대. 흥민이도 못 한대. 그렇게 주장 완장을 받게 될 거란 말이야. 솔직히 지금 너 아니면 그런 부담감을 견딜 친구가 별로 없어.” 맞는 말이다. 지성이 형도, 성용이 형도 ‘나는 힘드니까 주장 같은 거 안 한다’라면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나도 대표팀에서 이기심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설상가상 주장이라는 책임감이 족쇄처럼 따라다녔다. 슈팅 타이밍에도 무의식적으로 주위에 있는 동료를 찾느라 기회를 날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내가 더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패스를 선택했다. 플레이의 폭이 점점 좁아졌다. 토트넘에서는 얼마든지 골문을 노릴 자유가 있지만, 주장 완장을 차고 뛰는 대표팀 경기는 달랐다. 내가 직접 해결하기보다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강박에 나도 모르게 시달렸다. 주장 완장을 차면 찰수록 지성이 형과 성용이 형이 얼마나 대단한 리더였는지를 절감했다.”





음식에서 삶을 짓다
윤현희 지음 | 행복우물 | 2020년 10월 01일 출간




음식이란 사업을 통하여 인생을 배운 이야기!

저자는 이어령 선생 밑에서 국문학을 배웠다. 그래서 대기업체의 홍보실에서도 오랫 동안 근무하였고, 당시 여성에게는 변변한 직장조차 없던 시절에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아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야말로 ‘운명’처럼 ‘음식’이라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문학적 상상력과 만남 음식, 그 사업은 어땠을까? 상당 기간 동안 저자는 전통음식 분야에서 신데렐라와도 같이 승승장구하였다. 육포, 떡, 한과, 이바지 음식 등, 저자의 음식 사업은 손을 대는 족족 최고의 브랜드로 성장하였고, 급기야는 이곳저곳 매스컴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사업은 명동, 압구정동, 분당 등, 최고의 요지에 자리 잡은 백화점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매년 추석 때나 설과 같은 명절에는 밀려드는 주문량을 소화해내기 위하여 그야말로 손이 백 개라도 모자랄 지경에까지도 이르렀지만, 사업이 잘되는 것과 수익이 많이 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 책은 그렇게 20년을 영위해 오던 ‘음식 사업이야기’이다. 사업체를 꾸려가면서 겪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자그마한 지구를 옮겨놓은 것만 같다. 도전과 좌절, 성공과 실패, 믿음과 배신, 선의와 악의......

저자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인생으로 비유하여 4개의 장으로 구분하여 풀어낸다. 이 책은 사라진 3막1장, 사라진 3막2장, 사라진 3막3장, 사라진 3막4장,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되었다. 거기에 이어령 선생께서 사랑하는 제자를 위하여 추천사를 보태주셨다. 추천사만 읽어보아도 선생이 이 제자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스승과 제자 간의 끈끈한 정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을 간접체험 하여보고 싶은 여성들이나 과거를 회상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딱 들어맞는 책이다.

저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다음의 짧은 문장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삶은 우리에게 갖가지 시련을 주지만 그 시련을 의미 있게 하는 것도 삶이다.“
 

프롤로그: 인생에서 3막이란

사라진 3막 1장
1. 미약한, 너무나도 미약한 시작
2. 육포로 3막의 첫 장을 열다
3. 엇갈린 존재이유
4. 완성된 첫 육포를 만나고
5. ‘영업’ 시험대에 오르다
6. 궁중한과에 입문하다
7. 양갱이 과편을 만나다
8. 벼랑 끝에 서다
9. 개성약과 - 그래도 해는 또다시
10, 맛있고, 작고, 고급스럽게
11. 교감을 나누며 가까워지는 음식들
12. 음식의 시작, 장보기
13. 궁중한과의 트리오, 삼색란
14. 아이엠에프의 나락에서 건져 올린 조란
15. 음식의 최종 목표는 맛
16.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찾아온 기회
17. 호사다마
18. 막무가내의 전쟁 같은 상황

사라진 3막 2장
1. 혼례음식으로 입성
2. 시동 걸린 폐백 이바지
4. 콩 튀듯 팥 튀듯 시즌 태풍
5. 이천만 원에 팔린 영혼
6. 잘못된 만남
7. 창조적 상상력의 빛을 음식에
8. 오색 쌀강정 · 인삼정과 · 도라지정과
9. 경계해야 할 대상 1호는?
10. 아니 땐 굴뚝에서 대형 화재가?
11. 양갱의 변신은 무죄
12. 밀레니엄과 함께 온 손님
13. 발렌타인 데이와 꽃양갱
14. 시집가는 날: 1,000명분 식사와 혼례
15. 총칼 안 든 6. 25
16. 비둘기처럼 선하게, 뱀처럼 지혜롭게
17. 새로운 떡 세상에서 송편을 만나다
18. 땀 흘린 만큼 돌려주는 것
19. 육포쌈 만들기
20. 활화산과 휴화산이 만나면?
21. 시기와 질투의 〈여인천하〉 - 드라마의 서막
22. 결행의 날
23. 자연은 자연이고, 송편은 송편이다
24. 자연과 함께 온 목화송편
25. 어느 일본인과 문학적 상상력

사라진 3막3장
1. 또 하나의 물줄기 앞에서 - 양수리 가는 길
2. 새 집에 미래를 들어앉히고
3. 육포쌈 오리기
4. 루비콘 강을 건너
5. 떡케이크
6. 카네이션이 송편으로 피어나기까지
7.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8. 산딸나무를 품은 송편
9. 승부를 건 구절판
10. 향긋 촉촉한 편강 만들기
11. 달달함 속에서 해가 뜨고 지고 - 일 년을 두고 담그는 정과
12. 가래떡과 절편
13. 순수의 시대에 씌워진 화관
14. 치열한 전투, 패하는 전선
15. 탄환을 장전하는 기간
16. 산이 오지 않으면 내가 산을 향해 가리라
17. 인간에겐 두 가지 비극이
18. 솜씨도 재주도 아롱이다롱이

사라진 3막4장
1. 나만의 메멘토 모리 - 능소화
2. 작전상 후퇴
3. 맨땅에 엎어져도 흙이라도 한줌 - 내게 흡족한 육포를 만나기까지
4. ‘파산’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가요?
5. 이 산도 역시……
6. 밀물과 썰물 사이(감춰둔 뗏목 하나)
7. 불붙은 ‘꽃산자’
8. 장렬하게 타오른 마지막 불꽃

에필로그: 능소화에 부쳐

책 속으로

나는 남편과의 헤어짐을 23년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쉼표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 그는 어떻게든 처자식을 자신의 존재이유로 삼으려 했고, 나는 더 이상 그의 존재이유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편의 그런 오해를 만류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오해일지언정 이제부터 혼자 살아야 할 그에게 버티는 힘이 돼준다면, 내가 더 이상 곁에 머물지 않기로 한 이상 마지막 희망의 싹까지 잘라버릴 순 없었다. 이혼 말을 꺼내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잠시 헤어져 있자는 말로 회유했다. “일 년만, 일 년만이라도 그동안 쓰지 못한 글 마음껏 써 봐.” --- ‘엇갈린 존재이유’ 중에서

어느 날 한 부인이 찾아왔다. 딸의 혼사가 있어서 왔다는데 인사를 나누고 보니 어느 기업체,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공영기업의 사장 부인이었다. (.......) 예식 끝나고 구내식당에서 하는 점심식사를 우리가 맡아달라고 했다. 점심식사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몇 명분이나……?” 부인은 차 한 모금을 삼키며 대수롭잖은 듯 말했다. “양가 합쳐서 천 명이요.” 맙소사, 천명 분을! --- ‘시집가는 날’ 중에서

“일본어를 가르치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시게 됐습니까?”
어쩔 수 없이 내 이력을 간단하게나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원래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는데 어쩌다보니 대학원을 일문과로 가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일본어를 가르치게 되었고, 또 어쩌다보니 음식 일을 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 말끝에 일본의 국민가수라는 미조라 히바리의 노래 중 ‘인생의 강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다보니 나 여기까지 왔노라’라는 구절이 떠올라 “나가레니 마카세테(강물이 흐르는 대로)” 하자, 에구치 씨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루호도를 연발했다. --- ‘어느 일본인과 문학적 상상력’ 중에서

다음날 은행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집문서’라는 것과 인감도장을 확실하게 챙겨왔다. 상담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시절의 은행이란 금고에 잠들어있는 돈을 빌려주지 못해 안달할 때였으니 아파트라는 확실한 담보가 있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 ‘새 집에 미래를 들어앉히고’ 중에서

참말이지 원도 한도 없을 만큼 온갖 모양의 송편을 빚고, 산자에 수를 놓고, 떡 케이크를 쪘다. 그리고 우리 팀은 대통령상을 따냈다. ……그뿐이었다. 나는 그 상을 받았다 해서 감격에 겨울만큼 기쁘지도 않았고, 상장이나 대회사진을 공개적으로 내걸 만큼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팸플릿 한쪽에 조그맣게 상장 사진을 올렸을 뿐이다. 내 이력에 그 상이 추가되었다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울은 지방과 달라서 누구도 그 상에 눈 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 ‘이산도 역시’ 중에서

그렇다. 나는 백화점 매장과 우리 브랜드의 직영점까지, 원하던 만큼의 판매처를 갖게 되었다. 직원도 든든한 떡기사를 비롯해 그 어느 때보다 우수한 인원들이 포진해있다. 그러는 나는 또 어떤가. 쉬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고수들의 솜씨를 익히고, ‘떡한과 지도자’ 자격증도 손에 넣었다. 착실히 실력을 연마하며 그에 걸맞은 실적도 쌓은 것이다. 그러니 탄환은 목표물을 열 번이라도 쓰러트릴 만큼 충분히 장전된 셈이다. --- ‘인간에겐 두 가지 비극이’ 중에서

내 물음에 세무서 직원은 파산신고 절차와 그 후의 사태에 대해 알려주었다. 친절하고 세세하기가 보험안내를 하는 설계사 같았다. 그는 마치 보험에 들면 안락한 노후가 보장되듯, 파산신고를 하면 내 남은 생애가 더 이상 적자 구덩이에서 헤맬 일은 없을 거라는 투였다. --- ‘파산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가요?’ 중에서


아마도 이런 감상은 내가 종심을 생각할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일지 몰라도 종심이란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 해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而從心所慾不踰矩)’는 뜻으로 공자가 나이 70을 맞아 자신의 소회를 말한 것이지요. 나도 어느덧 그 나이에 이르다보니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나 봐요. 나는 이따금 죽음을 떠올리며 살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종착점으로서의 죽음이지,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이젠 종착점이 아닌, 거기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마지막 한 송이까지 최선을 다해 꽃피우는 능소화를 보면서. 


  이제는 누가 ‘사과에 씨앗이 들어 있듯,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해요. 살다보면 삶의 끝에 죽음이 있을 뿐이지, 우리가 죽음에 이르려고 기를 쓰고 사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어려서는 그걸 모르고 삶의 끝에 버티고 있는 죽음이 못 견디게 신경 쓰여, 스스로 번뇌를 만들며 지레 좌절하고 절망했지요. 하지만 살다 보니, 죽음은 삶의 이정표일 뿐 과정도 목적지도 아니라는 걸 깨우치게 되더라고요.


  또 ‘인간은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해도 얼이 빠지거나 그러지 않아요. 우연히 세상에 던져졌다 해도 그것이 지구처럼 살기 좋은 행성, 그것도 사시사철이 뚜렷한 한반도에 던져 졌으니 우연치고는 복받은 우연이 아닐까 생각해요. 오히려 그런 우연에 감사하죠. 이 고마운 우연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남은 삶을 간추려야겠다고 새삼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2020년 입추에
                                                    윤현희

"스스로의 물러감을 자연스럽게 여기듯이 나의 염치없음을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이 책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먼저 내 스스로에게 양해를 해주고 싶다.

이제 우리에게 괴로워하며 진지하게 정색하고 아프게 따지며 힘들여 셈할 일들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허망함을 허망함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을 나는 요즘 훈련하고 있는데 이 글이 그런 연습의 하나이기를 바란다.
세상은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뜰 것이고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리라.
그럴 세상 모습을 내다보면서 '조용한 걸음으로 운명을 밟아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가난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면서
언젠가 책으로 이어진 생애를 돌아보는 내 책의 끝에 썼던 말을 다시 옮겨 적고 싶다.
'세상이여, 반갑다. 사람들이여, 고맙다.'"
(김병익, '조용한 걸음으로' 9쪽)


(문학과지성, 2013)

 

 

 

 

 

한 사람의 인생에 담긴 한 나라의 역사 그리고 사람들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고집과 자부, 그 영원의 가치에 대한 탐독!


책에 관한 모든 경험 ― 출판인․저술가․독서가로 책과 함께 살아가기

 

문학평론가이면서 출판인, 저술가이면서 독서가로 출판 기획에서 교정 실무까지 ‘책’과 ‘글’에 있어 명실상부 ‘전인(全人)’이라 일컬을 수 있는 김병익의 산문집 『조용한 걸음으로』(문학과지성사, 2013)가 출간되었다. 오랫동안 세상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찬찬히 써온 글들을 묶어낸 이 책은 문학과 세상에 대한 에세이들, 동료 문인들에게 보내는 축사와 추모사, 근래 읽은 책들에서 연유한 소감으로 크게 세 개의 부로 갈무리돼 있다. 젊은이들이 품은 절망이 자산이 되고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글로 문을 열고, 이제 벤치에 앉아 쉬며 인생의 허망함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안식을 취하겠다는 글로 책을 닫는 가운데 1부 ‘돌아보며, 바라보며’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반기고 변화된 분위기들의 낯섦을 차분하게 짚어가는 가운데 염려와 희망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4․19 당시 교정에서 품은 생각과 유신 당시의 편집인 시절에 대한 회상, 새 시대의 전망을 제시하기 등 저자가 살아낸 다양한 모습과 역할 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훈훈하다. 2부 ‘도저한 정신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아련하고 그리운 박경리․박완서․김수영․오규원․황순원․이청준 선생 등 이 시대 도저한 정신들과의 만남과 그 정신을 잇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들을 알려준다. 더불어 한국의 문단을 지키고 키운 동료 문인들의 축일에 보낸 축사들도 함께 모았다. 3부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다’는 저자가 읽은 책들과 관련한 글들로 책을 만드는 사람, 쓰는 사람, 엮는 사람 등 책과 함께 살아온 저자의 다양하고 예리한 시각이 책에 대한 편안한 소감 가운데서 묻어난다. 저자는 대단하지 않은 글들로 책을 내는 게 실례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소한 이야기들로 풀어낸 가벼운 글 속에는 우리 시대의 역사와 문화사 그리고 그 시대를 지켜낸 사람과 책 이야기가 한 마음으로는 다 받아안기 어려울 만큼 크고 깊게 자리하고 있다.

나의 염치없음을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이 책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먼저 내 스스로에게 양해를 해주고 싶다. 이제 우리에게 괴로워하며 진지하게 정색하고 아프게 따지며 힘들여 셈할 일들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허망함을 허망함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을 나는 요즘 훈련하고 있는데 이 글이 그런 연습의 하나이기를 바란다. 세상은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뜰 것이고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리라. 그럴 세상 모습을 내다보면서‘조용한 걸음으로’운명을 밟아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가난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면서, 언젠가 책으로 이어진 생애를 돌아보는 내 책의 끝에 썼던 말을 다시 옮겨 적고 싶다: “세상이여, 반갑다. 사람들이여, 고맙다.” _「책머리에」에서

 
책으로 이어진 생애 ― 아름다운 만년의 양식, 다시 책을 들고

 

이 책의 내용 중 특히 3부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다’는 2011년에서 2012년 사이 <웹진문지>에 15개월 남짓 3주를 주기로 하여 연재한 칼럼들로 그즈음의 저자의 독서 이력과 함께 가장 최근의 글들을 선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년의 저자가 보이는 최근의 모습에는 우리 문화사 전체를 꿰는 성찰이 담겨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제목 짓기 같은 소소한 어려움과 문체를 만들어가는 심도한 문제, 책을 구성하고 꾸미는 편집자의 어려움과 고뇌 그리고 지식 사회학과 서간 문화의 중요성과 우리가 그것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글 사이사이에서 쉼 없이 떠올리게 한다. 광복과 6․25, 4․19와 5․18 등의 굵직한 시대사는 물론 현재의 자본 경도, 속도 사회에 이르기까지 크고 무거운 경험의 시간 동안 그 엄포한 시절과 사건을 긍정하고 그러안는 일은 또 얼마나 큰 부침과 가슴 쓰림을 경험해야 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어떤 인생이 잘 살아왔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은 책과의 인연으로 전 생애를 살아온 한 노년의 삶이 그 남은 시간마저도 아름다우리라 믿어지는 건 왜일까. 다시 한 번 ‘책’의 소중함을 느낀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01월 18일 출간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가 기록한 마지막 흔적

우리의 선택이 보여주는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서울대 암 병원 18년차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가 만난 암 환자와 그 곁의 사람들, 의사로서의 솔직한 속내를 담은 에세이.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남은 시간을 채운다. 누군가는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담담하게 삶을 정리하고, 누군가는 시시각각 찾아오는 죽음을 미루기 위해 고집을 부리기도 하며, 어떤 이는 암을 이겨내고 다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 곁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사후 뇌 기증 의사를 존중하는 아들, 의식 없는 어머니를 끝까지 떠나보내지 못하는 남매, 폭력적이었던 아버지를 외면하는 딸, 연인이 암 환자인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선택한 남자 등 환자 곁의 사람들 모두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저자는 환자들과 가족들이 그려가는 마지막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곱씹어보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렇게 얻은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잊지 않기 위해 저자가 틈틈이 남겨온 기록이다. 책의 1, 2부는 저자가 만나온 환자들의 이야기로 환자와 가족들이 예정된 죽음과 남은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3, 4부는 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서의 고민과 생각들을 엿볼 수 있다. 책 속의 사람들의 모습에는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삶과 죽음에 태도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작가의 말

서울대학교 암 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항암치료를 통해 암 환자의 남은 삶이 의미 있게 연장되도록 암 환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내과에서 전공의 과정을 거친 뒤,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에서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현재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임상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미국임상암학회, 미국암학회, 유럽종양내과학회, 대한항암요법연구회, 대한종양내과학회 등 여러 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3회 보령의사수필문학상 대상을 받았으며 《에세이문학》을 통해 수필가로도 등단한 바 있다. 저서로는 《진료실에서 못다 한 항암치료 이야기》 《천국의 하모니카》 《항암치료란 무엇인가》 《암 나는 나 너는 너》 《암 환자의 슬기로운 병원 생활》이 있다.

목차

이야기를 시작하며

1부. 예정된 죽음 앞에서
너무 열심히 산 자의 분노 / 내 돈 2억 갚아라 / 특별하고 위대한 마지막 / 혈연이라는 굴레 / 사후 뇌 기증 / 저는 항암치료 안 받을래요 / 10년은 더 살아야 / 대화가 필요해 / 믿을 수 없는 죽음 / 임종의 지연

2부. 그럼에도 산다는 것은
인생 리셋 / 기적 / 학교에서 잘렸어요 / 잔인한 생 / 아이의 신발 / 오늘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합니다 / 요구트르 아저씨 / 말기 암 환자의 결혼 /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다

3부. 의사라는 업
별과 별 사이: 600대 1의 관계 /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들 / 파비우스 막시무스 / 너무 늦게 이야기해주는 것 아닌가요 / 3월의 신부 / 윤리적인 인간 / 이기심과 이타심

4부. 생사의 경계에서
각자도생, 아는 사람을 찾아라 /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 연명의료 결정법에 대하여 / 울 수 있는 권리 /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 마지막 뒷모습

이야기를 마치며



책 속으로

· 사람들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환자가 의사를 먹여 살리는 셈이고, 때로는 환자가 의사를 치료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만나온 환자들의 선택이, 그들이 꾸려가는 시간이,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내게는 반면교사가 되기도 했고 정면교사가 되기도 했다. 내가 만난 환자들은 삶과 죽음으로 살아 있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생의 숙제를 푸는 것 같았다. 그들이야말로 나의 선생님이었다. - 6쪽

· 장애물이 있으면 어떻게든 치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삶.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며 존재 이유를 찾는, 앞만 보며 이 악물고 달려온 삶. 그에게 삶은 열심히 싸워야만 하는 투쟁의 장이 아니었을까? (…) 나중에 호스피스 실을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12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온하게 떠났을지, 가족들의 외면 속에서 쓸쓸히 떠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켜봐왔던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후자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죽은 뒤에 혹시라도 그를 다시 만난다면 꼭 묻고 싶어졌다.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살았습니까?” - 24쪽

· 내가 목격한 수많은 혈연관계도 참담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럴 때면 생각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첫 문장은 옳다고. 누군가에게 가족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때때로 누군가에게는 짐이자 삶을 옥죄는 족쇄에 지나지 않았다. - 39쪽

· 어쨌든 의사조차도 낯선 사후 뇌 기증을 팔순의 환자가 미리 신청해두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굉장히 놀라웠다. 아마도 그는 장기 기증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을 것이고 암 환자의 장기 기증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방법을 찾아본 끝에 이 사후 뇌 기증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선택 하나만으로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얼마나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거쳤고 준비를 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50쪽

· 암에 걸리는 것은 허허벌판을 지나다 예고 없이 쏟아붓는 지독한 폭우를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우산도 없고 피할 곳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스란히 쏟아지는 비를 맞는 것뿐이다. (…) 어차피 맞을 비라면 맞으면서 걸어가는 것이 낫다. 물론 걷다가 돌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가시덤불에 긁힐 수도 있다. 그러나 비를 피할 만한 장소를 마주칠지도 모른다. 혹은 비를 가려줄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갑자기 내린 비와 그 길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내공이라는 게 생긴다. - 56쪽

· 어차피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라면 임종이 지연될 때 대답할 수 없는 환자에게 묻고 싶어진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알아내서 그 바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평탄하지 않았을 삶과 지난한 투병 끝에 떠나는 길만큼은 가능한 한 가볍게 떠날 수 있기를, 의사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바라게 되는 것이다. - 84쪽

· 암 투병은 환자도 가족도 모두 지치는 일이다.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이어져가다 보면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랑도 남루해지기 쉽고 희망도 쉽게 잃는다. 어쩔 수 없이 긴 투병의 모든 끝이 상처만 가득한 폐허로 남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니 희망 없는 속에서도 그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암 덩어리가 줄어든 것만큼이나 기적이었다. - 106쪽

·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일은 부모로서 결코 담담해질 수 없는 일이다. 암 병원에서도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암 환자라고 하면 나이 든 중년, 노년의 환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 암은 나이를 가려 덮쳐오지는 않는다. 당연히 어리고 젊은 암 환자들이 많고, 그중에서는 완치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결국 그 부모도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고스란히 안아야 한다. - 121쪽

· 환자와 의사를 떠나 서로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가능한 일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너의 상황을 짐작해보건대 너는 아마도 이럴 것이라고 짐작한다’는 선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고, 완벽히 같은 상황과 처지에서의 똑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 163쪽

· 나도 때로는 파비우스와 같은 전략을 택한다. 암세포가 싸움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런 때에 종종 최대한 시간을 끌며 버틴다. 종양의 크기가 어떻든 간에 장기의 기본적인 기능이 유지되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 환자가 좀 더 오래 숨 쉴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아프지 않도록 만든다. 정면승부를 피하고 버텨보는 식이다. (…) 이 같은 전략의 목적은 암이 자라는 것의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환자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기에 이 작전도 언젠가는 무의미해질 테지만 적어도 독한 항암치료로 힘든 상황은 피할 수 있고 나름대로 삶의 질도 유지할 수 있는데다가 버티면서 시간을 벌 수도 있다. 그렇게 벌어들인 시간으로 환자가 다른 유용한 일을 하도록 독려할 수 있다. - 176쪽

· 마지막까지 항암치료를 이어가는 데는 또 다른 요인이 뒤섞이기도 한다. 항암치료 중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자와 보호자를 설득하는 것은 시간도 에너지도 많이 드는 일이지만 병원 수익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항암치료도 하고 CT 검사도 하고 여러 의료 행위를 하면 병원에 수익이 발생하지만 나쁜 소식을 전하고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면 병원에는 0원의 수익이 발생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암 환자들이 사망 2주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 것은 여러 요인들이 얽힌 결과다. - 183쪽

· 누군가를 돌볼 때에는 어느 정도는 이기적이어야 이타적이 될 수 있다.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볼 수 있고 스스로 평온함을 찾을 수 있는 이기심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보호자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나 자신을 보살펴야 하는 스스로의 보호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먼저 돌볼 사람은 나뿐이다.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을 때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생긴다. 이타적이기만 하려다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서 다른 사람도 돌보지 못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 210, 211쪽

· 모두들 보호자와 가족들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호자가 오면 주치의는 나가서 보호자와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것이다. 가족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면 쇼피알 연극은 끝나고 주치의는 사망을 선언할 수 있다. 환자의 저승 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고 험난했다. 가족들과 의료진은 환자에게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고 환자는 너무 힘들게 저승길로 떠났다. 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꾸 되묻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고. - 232쪽

· 나는 가족들의 동의를 받아 환자의 산소 공급과 승압제 주입을 중단했고 그는 사망했다. 2018년 2월 이전이었다면 나는 살인자가 됐을 것이고, 2018년 2월 이후라면 합법적으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의료진이 된다. 행위는 같으나 불법과 합법의 경계는 애매하고 인간의 판단은 인위적이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애매할수록 현장은 혼란스럽다. 법의 모호성은 권력을 낳고 법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법을 논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진정 환자를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법을 따지려는 이들은 현장에 발들이지 않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법이라는 이름으로 심판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현장에서는 늘 일어난다. - 240쪽

· 더 슬픈 것은 이 같은 시스템이 우리를 길들인다는 점이다. 비정상이 오래되면 무엇이 정상인지 알기 어렵다. 시스템은 더욱 공고 해지고 이 시스템 속에 있다 보면 환자나 보호자도, 의사도 컨베이어벨트처럼 3분에 한 명씩 진료실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주어진 짧은 시간이 끝나면 울고 있는 환자를 보호자가 끌고 나가고, 밖에서 울음소리는 새어 들어오고, 그 옆에서 오래 기다린 대기자들은 화를 내는 이상한 현실을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는 슬퍼하거나 울 수 있는 권리가 없는 걸까? 이 공장식 박리다매 진료에서 마음껏 울 수 있는 권리를 논한다는 게 과욕인 걸까? 이 시스템의 변화는 불가능한 걸까? 복잡한 시스템 속 작은 톱니바퀴는 오늘도 여지없이 돌아가면서도 좀처럼 물음표를 지우지 못한다. - 245쪽

· 내가 목격한 마지막 뒷모습은 때로는 정리되지 않은 돈이었고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시끄럽고 혼란스럽게 뒤얽혀 고인에 대한 슬픔을 넘어 분노로, 지리멸렬함으로 끝나고는 했다. 고인이 정리하지 못한 관계들이 남아 있는 이들을 괴롭게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지켜보면 무엇이든 간에 정리되지 않고 남은 것들은 대개 아름답게 기억되지 못할 것들이었고, 남은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고인의 뒷모습으로 남았다. - 258, 259쪽


출판사 서평

서울대병원 18년차 종양내과 의사가 기록한 암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

“남은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2019년 기준 암 사망자 수는 7만 8863명으로 2018년에 비해 1만 명 가까이 증가했고, 한국인이 사망하는 장소로 병원은 1996년 25.2퍼센트에 비해 2019년 77.1퍼센트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연명의료를 하지 않거나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건수는 2017년 대비 2019년 2만 건 이상이 늘었다. (시사인 ‘죽음의 미래’ 참조) 이 같은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암 환자들의 죽음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곳도 바로 병원이라는 이야기이고,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서울대병원 18년차 종양내과 의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2016년 대한민국에서 사망한 28만 명 중 21만 명이 병원에서 사망했고, 말기 암 환자는 90퍼센트가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한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종양내과 의사로서 수많은 암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선택과 그들이 보내는 시간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사이자 한 인간으로서 깨닫게 된 삶의 의미와, 옳고 그름의 도덕적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을 통해 자신이 배우고 느낀 바를, 그리고 환자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 일종의 비망록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만나온 환자들의 선택이, 그들이 꾸려가는 시간이,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내게는 반면교사가 되기도 했고 정면교사가 되기도 했다. 내가 만난 환자 들은 삶과 죽음으로 살아 있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생의 숙제를 푸는 것 같았다. 그들이야말로 나의 선생님이었다. (…) 돌아가신 분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금의 우리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죽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에게는 기억되는 죽음이라는 것, 나아가 누군가의 죽음이 어떤 이에게는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6-8쪽)

죽음 앞에 선 환자와 가족의 선택,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게 하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 언급되는 환자들은 모두 암 환자이지만 암 진단을 받은 이후에 저마다의 선택을 하고 각자 다른 모습으로 종착역을 향해 간다. 누군가는 돈 때문에 끊어진 혈육의 정을 회복하기보다 빌려준 돈 “2억 갚아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죽음 직전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10년만 더 살기만을 바라기도 한다. 칠순의 한 노인 환자는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해보며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또 다른 노인 환자는 의사도 모르게 ‘사후 뇌 기증’을 신청해놓고 떠난다. 모두가 “앞으로 남은 날이 ○○ 정도 됩니다”라고 기대여명에 대해 듣지만 그 남은 시간을 채워가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환자들이 남은 삶과 예정된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묻는다. 이에 대해 저자는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를 다 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빈칸으로 남겨두기에는 아쉬운 일이다”(62-63쪽)라고 적는다.

또한 환자가 종착역으로 가는 여정에는 환자만 있는 게 아니다. 그의 가족이 함께다. 원발부위불명암을 앓는 남편이 완치되기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던 아내가 있고, 폭력을 행사했던 아버지를 끝내 외면하지 못해 혈연을 저주하면서도 마지막을 책임졌던 딸이 있다. 각자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이혼한 부모를 돌보느라 병원과 일터를 전전하는 아들도 있으며, 암과 치매를 앓는 88세의 아버지를 모셔야 하는 예순에 가까운 딸도 있다. 저자가 지켜본 환자의 가족들은 환자만큼이나 저마다의 선택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환자와 그 가족의 모습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식이고, 반려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이야기는 가볍게 지나가지 않는다. 그들의 선택은 어떻게 내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가, 그들의 마지막을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게 만들며 또 다른 의미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환자의 남은 삶과 죽음을 함께 고민하는 의사의 일

암 환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병원이고, 이곳에는 그 마지막까지 환자, 가족과 함께 최선을 다하는 의사가 있다. 한 사람의 생사와 남은 날을 지켜보고 치료해야 하는 의사의 고민은 깊다. “선생님에게는 제가 600명 중 한 명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선생님 한 분뿐이거든요”라고 말하는 환자 앞에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생각하고, 완치되었으나 암 환자라는 이유로 취업에 불이익을 받는 젊은 암 환자들을 보며 사회의 역할을 되묻고, 항암치료를 거부하다 항암치료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치료를 요구하는 환자들을 안타까워한다. 팔순 노모에 대해 연명의료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사남매로 인해 온몸이 붓고 의식을 잃은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순간에도 심폐소생술을 멈출 수 없는 현장에서 환자와 가족, 의료진 모두 최선을 다했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를 되묻는다. 환자도 병원도 싫어하는 완화 의료에 대해서도 그것이 환자의 남은 삶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는 신념을 고백하기도 하며, 어쩔 수 없이 ‘시속 10명’으로 환자를 만나야만 하는, 한국의 공장식 박리다매 진료에 대해 씁쓸함을 털어놓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들려주는 몇 가지 사연들은 ‘연명의료 결정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환자가 살아는 있으나 죽음보다도 못한 상태일 때, 존엄과는 멀어지고 있는 경우에 보호자와 의료진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환자를 떠나보내야 할지,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이승에 붙들어 놓을 것인지.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이야기 속에서 환자의 아들은 아버지가 편히 돌아가실 수 있게 임종방에 모셨지만 아버지는 점차 사람의 외형을 잃어가고 악취를 풍기면서도 돌아가시지 않는다. 그 곁을 지키던 아들은 차라리 보내드리는 게 낫겠다며 오열하고 담당 의사인 저자는 산소호흡기를 떼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법으로는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그 순간 의사도 보호자도 그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고,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 선택의 무게를 토로한다.

종양내과 의사로서 저자는 환자의 남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존엄한 죽음을 위해 많은 선택을 하고, 그 과정에서 깊이 고민한다. 우리 대부분은 독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며, 사람이기에 병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마주한 환자와 보호자의 자리에 언젠가 우리가 앉게 될 수 있고, 그의 고민과 선택을 우리도 함께 해야만 할 수도 있다. 저자가 의사로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순히 ‘의사’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유다.

김범석 교수는 이 책에서 “뜻하지 않게 자신이 떠나갈 때를 알게 된 사람들과 여전히 떠날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나는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고, 언젠가는 찾아올 ‘나의 죽음’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는 암 환자와 가족, 의사인 저자의 선택과 그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죽음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또한 거기에서 나아가 언젠가 나와 내 가족에게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종착역으로 향해 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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