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 떨어져서 봐야 … 나 자신과도 거리 둘 때 행복"

 

 

 

< 매일경제, 허연 기자 ,  2023-08-14  >

 


'이제서야 이해되는 불교' 출간한 마음간호사 원영스님
불교방송 최고 인기 진행자
"힘 얻었다는 반응에 보람"
무상함 마주하는 게 불교
"불교에서 고(苦)의 반대말은
즐거움 아닌 평온한 상태"

 

 

 


23세에 출가한 뒤 여러 대학과 사찰 등지에서 강의하면서 '마음 간호사'라는 별명을 얻은 원영스님.  


"우리는 흔히 '고(苦)'의 반대말을 '락(樂)'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고'의 반대는 평안이라고 가르칩니다. 평온한 상태가 곧 즐거움인 거죠."

최근 '이제서야 이해되는 불교'(불광출판사)를 펴낸 서울 성북구 청룡암 주지 원영 스님(50)은 가장 유명한 불교 안내자다. 스님은 10년 동안 BBS 불교방송 라디오 '좋은 아침 원영입니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원영 스님의 불교대백과' 등을 통해 불교를 친숙하고 수월하게 전달하는 데 힘써 왔다. 두 프로그램은 불교방송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다.

"불교 입문자들을 위한 방송을 하다 보니 교재를 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책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어디 연재했던 글이 아니라 20일 만에 쓴 책이에요. 시력이 더 나빠지기 전에 쓰고 싶어서 하루 10시간씩 매달렸죠."

원영스님은 '무상(無常)'을 직시하는 것이 불교 공부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현실은 무상합니다. 그 무상한 현실을 모른 척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그것이 불교입니다."

스님은 서른 살 무렵. 1년여 만에 여러 가족이 연이어 죽는 슬픔을 겪으며 무상함을 체득했다고 말한다.

"작은오빠가 갑자기 죽고, 그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연이어 큰오빠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이미 출가한 상태여서 불교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도 감당이 안 되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 내가 머리로만 공부를 했구나. 가족의 시신을 염하는 걸 보면서, 백골이 타들어 가는 걸 보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어요. 거리를 두게 된 거죠."

 

"우리는 흔히 '고(苦)'의 반대말을 '락(樂)'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고'의 반대는 평안이라고 가르칩니다. 평온한 상태가 곧 즐거움인 거죠."


"현실은 무상無常합니다. 그 무상한 현실을 모른 척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그것이 불교입니다."

 

"매사를 떨어져서 보는 거죠. 어떤 사건이나 슬픔을 바라볼 때 거리를 두는 거예요. 나 자신을 바라볼 때도 거리를 둬요. 떨어져서 보면 무상한 이치를 느낄 수 있어요. 거리를 두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밀려드는 거예요. 거리를 두지 않으면 전체를 볼 수 없고 특정 단면만 보게 됩니다."

대중과 호흡하며 인기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스님에게는 감동적인 사연도 많다. "청취자 한 분이 장애가 있는 자녀를 차에 태우고 가면서 매일 방송을 들었는데 죽고 싶을 때마다 힘이 됐다는 사연을 보내왔어요. 사연을 듣고 '제가 매일 아침 그 차에 타고 있었군요'라고 했더니 울음을 터뜨리셨어요. 제 방송을 듣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보람 있어요."

 

스님은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라는 구절을 좋아한다. 스님이 신도들과 대화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바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마음의 거름망을 성글게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거름망을 촘촘하게 하면 쓸데없이 많은 것이 걸립니다. 

사람들 표정도 걸리고 눈빛도 걸리고 하죠. 

그러면 행복할 수 없어요."

스님은 젊은 시절 몸이 아파서 요양차 절에 갔다가 출가하게 됐다. 23세에 출가해 운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하나조노(花園)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계종 불학연구소 상임 연구원과 교육위원 등을 역임하고, 여러 대학과 사찰 등지에서 강의하고 '청년출가학교' 등에서 지도법사로 소임하면서 '마음 간호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스님은 불교의 미래를 밝게 본다. "현대사회는 불교에 더 호의적일 겁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에 비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교리는 MZ세대가 추구하는 것과도 맞습니다. 결국 불교는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는 법을 가르치니까요. 불교가 세상의 변화를 못 따라간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좀 못 따라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기복신앙이면 어때요. 결국 다 불교의 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인데요."

스님은 "너무 예민해서 힘들다"는 기자의 말에 "살면서 놀라지 않는 습관을 좀 가지라"는 말을 남기며 인터뷰 자리를 떴다. 청룡암 밖에는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1.  막행막식(莫行莫食)에 대하여 
 

막행막식(莫行莫食)은 행하고 먹는데 거리낌이 없는 것이라 하며,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이 아무런 장애가 없이 거리낌(碍) 없는(無) 행동(行)하는 것을 가르키는 무애행(無碍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대자유인이 되어 일체의 장애와 걸림이 없어 행하는 대로 도에 합일한다고 주장한다.

수행이 익으면 모든 고정관념들이 풀려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삶의 기반이라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허상으로 드러나면서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될 수도 있고, 고정관념에 억압되어 있던 에너지들이 풀려나 마구 분출할 수도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무기력한 허무주의자 또는 광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이라는 뇌관이 없으면 아무리 강력한 에너지가 있어도 불발탄이 된다. '생각'이 정말로 다 깨졌다면 허무함도 없고 날뛰는 에너지를 어찌할 의도도 없어 그저 안도하고 태평할 뿐이다. 허무하다거나 막살아보자는 것도 여전히 '생각'에 빠진 것임을 놓치면 안 된다.

막행막식에 빠진 사람들은 '생각'의 억압해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생각의 억압에서 해방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최후에는 뒷덜미를 몰래 물고 있는 '생각'이 항상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깨달은 사람도 탐진치의 습이 남아 있다는 것은 '생각'의 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면 언어와 '생각'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기존의 기억(깨닫기 전에 사용하던 관념과 감정과 자동반응들)들을 꺼내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습에 반응이 되지만 '생각'의 오류인 것을 날카롭게 알아채고 벗어나는 것이다.  

 


2.  “자기성찰-이타심 없는 무애행은 막행막식” 

< 법보신문   2007.08.27 >
 
계율, 선(禪)의 걸림돌인가  
무애행, 파계 정당화의 명분?

매년 안거 때만 되면 여전히 수천 명의 수행자들이 선방을 찾아 용맹정진을 하는 등 선(禪)은 한국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방법이라는 특유의 매력과 마음의 평화와 건강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선은 이제 수행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다.

“선지상주의가 파계만연 불러”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선이 강조될수록 오히려 계율은 경시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깨치면 그 뿐’이라는 ‘깨달음 지상주의’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계율은 점점 수행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됐고, 더 이상 계율은 수행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 아니라 선택사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이렇다보니 파계불감증이 교단 전반에 걸쳐 팽배해졌고 청빈한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할 한국불교 승가에서 지계는 더 이상 미덕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자신들의 ‘막행막식(莫行莫食)’을 마치 경허, 만공, 춘성 스님 등 큰 스님들이 했던 무애행(無碍行)과 연관시켜 파계를 합리화시키고 있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와 관련 송광율원 교수사 도일 스님은 “근현대에 이르러 한국불교에서 파계가 만연하게 된 것은 선지상주의 또는 깨달음 지상주의에 근본원인이 있다”며 “특히 깨닫지도 못한 수행자들이 도를 깨우친 큰스님 흉내를 내면서 자신들의 막행막식을 마치 무애행으로 여기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무애행과 막행막식은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를 갖고 있을까.

이와 관련 명상상담연구원장 인경 스님은 “무애행은 수행자가 그 행위를 함에 있어 스스로의 마음에 걸림이 없고, 또 그 행위의 목적이 남을 위한 이타심에 출발한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한 것”이라며 “이런 두 가지 전제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애행이 아니라 단순한 파계행위로 밖에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스님에 따르면 무애행은 천만경계에도 장애를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행동한다는 것으로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무애행은 철저한 수행과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옛 선사들도 이런 점을 강조하면서 자칫 큰 스님의 무애행을 쉽게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후학들에게 강조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 간화선의 중흥조로 칭송 받는 경허 스님의 제자였던 한암 스님은 은사의 행장을 정리한 『선사경허화상행장』에서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움은 옳거니와 화상의 행리(行履)만을 보고 화상을 평론함은 옳지 못함이로다. 그 행리만을 본받아 무애한 자와 또한 그 유위 상견에만 집착해 능히 마음 근원에 훤히 사무치지 못한 자를 경책하노라”라고 밝혔다. 즉 한암 스님은 경허 스님의 법화나 마음 그리고 안목을 배우는 것은 가당하나, 법을 간택하는 눈을 갖추지 못하고 단지 그의 행적의 걸림 없는 겉모습만을 따르고 믿는 것은 경허 스님의 본래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무애행, 깨달은 자만 가능

결국 무애행은 깨달은 자만이 행할 수 있는 부처의 행위와 같다. 때문에 무애행은 파계가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지계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최근 들어 일부 스님들이 계율을 무시하고 ‘걸림 없는 행’을 내세우며 스스로의 그릇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수행자로서의 기본적인 윤리마저 거부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동화사 강주 지운 스님은 “선의 궁극적인 목표가 올바른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 계정혜 삼학 가운데 으뜸인 계행이 밑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며 “이런 점들은 과거 수많은 선사들의 선어록에도 언급됐던 내용으로 선수행을 하면 계율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논리”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이어 “근본적으로 무애행이라는 것은 아주 미세한 것에도 걸림이 없다는 것으로 팔만 사천의 작은 행, 즉 어떤 작은 계율에도 걸림이 없다는 것”이라며 “어설프게 무애행을 내세우면서 파계를 일삼는다면 우리 승단은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3.  승려의 '막행막식' 경허 스님 탓일까 

 

 

<연합뉴스,  장하나 기자,  2013.03.07. >
 

폐간위기 모면 '불교평론' 봄호에 '경허 논의 검토' 기고문

(서울=연합뉴스) 장하나 기자 = "선(善)은 부처를 능가했고, 악은 호랑이를 능가했으니, 그분이 바로 경허선사이시다. 열반하셨으니 어디로 가셨는가? 술에 취해 꽃처럼 붉은 얼굴로 누워계시네."

현대 한국 불교의 대선사인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은 '경허법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읊다'라는 시에서 스승인 경허(鏡虛·1849∼1912) 스님을 이같이 표현했다.

한암(漢岩·1876∼1951) 스님 역시 '경허화상행장'에서 스승의 법과 법화(法化), 행리(行履·행위)를 열거한 뒤 "선도 끝까지 이르렀고 악도 끝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작년 열반 100주년을 맞은 경허 스님은 이처럼 근대 한국 선(禪)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한편 문둥병에 걸린 여인과 동침하거나 음주식육(飮酒食肉)을 하는 등의 초계율적 삶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경허 스님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한국 불교계의 지성의 장 역할을 해 온 계간지 '불교평론'이 작년 경허 스님의 주색(酒色)을 다룬 윤창화 민족사 대표의 특별기고문 때문에 사실상 폐간 위기에 처했던 것도 이 같은 논쟁과 맞닿아 있다.

윤 대표는 작년 가을호에 실린 기고문에서 "경허의 행위(주색)는 승가적으로는 물론이고, 사회규범이나 도덕적으로도 적지 않은 문제를 갖고 있다"면서 "최근 한국불교가 주색과 도박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도 경허의 영향이 적지 않다고 할 것" 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수덕사 등은 윤 대표의 글이 경허 스님의 선사상과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을 왜곡·폄하했다며 항의했고, 발행처인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폐간을 결정했다.

이후 이어진 불교계 안팎과 학계의 반발로 폐간 위기를 모면한 불교평론이 최근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의 '경허 논의에 관한 비판적 검토' 특별기고문을 담은 봄호를 냈다.

김 교수는 기고문에서 윤 대표의 글에 대해 "경허의 행위를 주색으로 단정하고 나아가 근현대 승려의 막행막식(幕行幕食)의 연원을 경허라고 단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경허집'과 '범어사 계명암 수선사 방함 청규' 등에 비춰볼 때 경허 스님이 음주식육 등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만큼 그의 행적과 발언의 불일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승려의 파계와 막행막식에 대한 경허 스님의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 원인을 승가의 세속화 흐름과 일본 불교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경허 스님이 만년인 1906년 갑자기 삼수갑산으로 종적을 감춘 것에 대해서도 윤 대표는 '도피성 은둔'으로 해석한 반면 김 교수는 "당시 불교계 동향, 일제 침투라는 시대상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경허에 대한 이해는 주로 신비적인 소문, 소설, 평전 등에 의지하고 있다"면서 "그 결과 경허의 위상에 맞는 연구가 부진했고 경허에 대한 학술적인 논문이 20여편 정도에 불과하다"고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불교평론은 속간된 봄호에서 불교 계율 성립의 배경과 한·중·일 계율 전통 등을 다룬 '불교와 계율' 등을 특집으로 마련했다.

홍사성 편집인은 7일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불교평론이 복간돼 다행"이라며 "앞으로도 좋은 논고를 개발하는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유마힐 거사의 작은 방

 

 

 

< 중앙일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2023.07.06  >

 

 



경기도 광릉 봉선사(奉先寺)의 큰 스님인 월운(月雲) 조실(祖室)께서 최근 입적하셨다. 『팔만대장경』 번역을 끝내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던 그분 앞에 꿇어앉아 천주교 신자인 내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배우던 40년 전의 인연이 생각났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처연하다.

큰 절 중에서도 참선하고(禪院), 불법을 가르치고(講院), 계율을 가르치는(律院) 시설을 갖추면 총림(叢林)이라 부른다. 국내엔 해인사·송광사·통도사·수덕사·백양사·동화사·쌍계사·범어사 이렇게 여덟 곳이 있다. 그곳의 가장 높은 어른을 방장(方丈)이라 부른다.

불교사에서 방장 칭호를 처음 들은 분은 부처님의 제자인 유마힐(維摩詰) 거사인데, 그는 평신도였지 스님이 아니었다. 불가에서는 『화엄경(華嚴經)』처럼 부처님의 말씀만을 ‘경’(經)이라 부르고, 제자들이 지은 것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처럼 ‘론’(論)이라 부른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이 아닌 글 중에 경이라 높여 부르는 것은 딱 두 권인데, 유마힐의 『유마경(維摩經)』과 육조(六祖) 혜능(惠能)의 『법보단경(法寶壇經)』이다.

유마힐 거사는 불제자보다 뛰어나 당대부터 지금까지 교파를 초월해 존경받는다. 그의 말씀에 따르면 평생해야 할 일은 베풀고(布施), 참으며, 정진하고, 수행하고, 지혜를 배우는 여섯 가지, 즉 육바라밀(六波羅密)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색·파계·분노·나태·번뇌·무지의 여섯 가지, 즉 육폐(六蔽)다.

유마힐 거사가 세상을 떠날 때 살던 방이 사방(四方) 여섯 자(尺, 6척=1.8m)였다. 한 모서리의 길이가 사람 키와 같은 한 길(丈)이어서 그때부터 고승의 청빈함을 뜻하는 용어로 방장(方丈)이라 했다. 그 좁은 방에서 임종했으니 청빈함을 짐작할 수 있다. 종교를 가릴 것 없이 요즘 대형 교당과 호화로운 성직자의 삶을 보노라면 유마힐 거사의 믿음을 입에 담기도 부끄럽다.

영혼과 혼령, 제사에 담긴 유학자의 고민

 

 

< 다산연구소 풀어쓰는 실학이야기 50회, 백 민 정(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

 

 


  18세기 이후 조선 사람을 고민하게 만든 대표적인 서양의 철학적 개념은 ‘천주(Deus)’와 ‘영혼(Anima)’이었다. 특히 인간의 지성적 혼을 의미하는 서구 중세철학의 ‘아니마 후마나(anima humana)’ 개념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다.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서양 신부들은 신의 형상을 모사해서 만들어진 인간의 영혼, 제각기 고유하며 죽은 후에도 육체와 분리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인간의 혼을 번역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심했다. 1584년 선교사 미켈레 루기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 1543-1607)가 제안한 ‘아니마’의 첫 번역어는 혼령(魂靈)이었다. 뒤이어 중국에 입성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는 유명한 작품 『천주실의』에서 영혼(靈魂)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혼령이든 영혼이든 한자어 혼(魂)은 음양 두 기(氣)의 작용으로 이해되는 귀신을 의미했다. 신유학자들은 펼쳐지며 확장되는 신령한 기운을 신(神)이라고 했고 수축하고 모여드는 기운을 귀(鬼)라고 했다. 요컨대 유학자들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 혼과 백(魄)을 모두 음양의 작용으로 펼쳐지는 귀신의 모습이라고 여겼다.

  한자어 혼 개념이 음양의 기운을 가리켰기 때문에 철저히 비물질적이며 사멸하지 않는 인간 영혼의 번역어가 될 수 없다고 우려한 후배 선교사들은 한때 ‘아니마’를 소리나는 대로 읽은 한자어 ‘아니마(亞尼瑪)’를 영혼의 번역어로 사용했다. 1624년에 출간된 프란시스코 삼비아시(Francesco Sambiasi, 畢方濟, 1582-1649)의 『영언여작』이 이런 방법을 선호했다. 그러나 인간 영혼의 음역에 만족하지 않았던 신부들은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낸다. 줄리오 알레니(Julio Aleni, 艾儒略, 1582∼1649)는 자신의 서학서(西學書)에서 영혼 개념을 비롯하여 영성(靈性), 성령(性靈), 영신(靈神), 영명(靈明), 신명(神明), 신령(神靈) 등 다양한 후보군을 ‘아미나 후마나’의 번역어로 제시한다. 얼마 전 한국에서 번역된 선교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의 작품 『주제군징』, 이곳에서 아담 샬은 영혼의 번역어로 신체(神體), 즉 신령한 본바탕을 선택했다. 이와 유사하게 니콜라스 롱고바르디(Nicholas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도 신체(神體) 그리고 영체(靈體:영묘한 본바탕), 영명지체(靈明之體)를 영혼의 번역어로 제시한다. 영원하고 비물질적인 ‘아니마’를 알리기 위한 번역어 ‘영혼’ 개념의 계보사라고 할 만하다.

  『중용장구』에서 주희는 귀신(鬼神)을 천지의 공용(功用), 즉 천지 음양 기운의 작용이자 기(氣)에 기반한 조화의 자취라고 풀었다. 신유학자들은 인간과 만물을 형성하는 음양의 기는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며 한 개체가 소멸하면 그를 이루던 기도 함께 사라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조상과 나[후손]의 기운이 같기 때문에 내가 정성으로 공경을 다 하면 조상의 혼령이 돌아와 감응하는 이치가 있다고 말한다. 가령 조상이 사망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의 혼백이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때라면 내가 제사 지낼 때 조상의 혼이 후손인 나의 정성에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전 사망했다면 그 조상 혼령의 기가 남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주희는 조상과 후손이 감응하는 이치[理]는 존재하지만, 이미 흩어진 조상의 기(氣)는 다시 모이지 않는다고 봄으로써 조상 혼의 영원성뿐만 아니라 개체성, 고유성도 부정했다.(『朱子語類』권3, 19조목).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는 유학자의 혼 관념이 심각한 문제를 가졌다고 지목했다. 리치는 귀신과 조상의 혼이 기(氣)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귀신에게는 제사를 지내지만 기에게 제사를 지내는 법은 없었다고 지적하면서 조상의 혼과 귀신은 결코 음양의 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리치는 유학자들이 오랜 제사의례 전통을 가졌음에도 사후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은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비판한다. 끝내 망자의 혼이 모두 사라져서 후손의 제사를 받을 수 없다면 당신들의 제사의례라는 것은 공허한 유희에 불과하다고 본 리치의 지적은 조선 후기 유학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었다. 19세기 영남 유학자, 이상정(李象靖:1711~1781)과 그의 제자 남한조(南漢朝:1744~1809), 조술도(趙述道:1729~1803), 정종로(鄭宗魯:1738~1816), 류건휴(柳健休:1768~1834) 등도 서학서가 던진 질문에 봉착해서 귀신과 혼령을 고민했고 제사의 의미를 다시 숙고했다.

  특히 남한조는 서양 천주학에서 말한 인간 영혼의 불멸에 대한 관점을 ‘영신불멸설(靈神不滅說)’이라 부르며 비판했다. 아니마의 번역어로 영신(靈神)을 사용한 것은 줄리오 알레니의 저작인데 조선에서는 경기 남인들, 이익(李瀷:1681~1763)과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글에서 이 용어가 자주 보인다. 특히 안정복은 『천학문답』에서 영혼과 영신 개념을 수시로 언급했다. 남한조는 안정복의 글을 비평하면서, 영신[혹은 영혼]은 생명과 지각 작용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이고, 생명의 혈기가 사라지고 기의 영명하고 신령한 지각 작용이 사라지면 영신도 소멸한다고 말했다(『損齋先生文集』권12, 「安順庵天學或問辨疑」). 그는 인격성을 띠고 의지 작용을 하는 혼은 그것이 어떤 부류의 혼이든 결국 신령한 기의 운명과 생사를 같이 한다고 보았다. 영남 유학자들이 생각한 영신에는 인간의 개별 혼뿐만 아니라 천주도 포함되었는데, 그것은 천주가 주재하고 심판하며 상벌을 주관하는 인격성을 띠었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에게 이런 의미의 인격성은 지각 운영을 겪는 유한한 존재의 특성일 뿐 공경과 존모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서학서의 영혼, 영신 개념을 비평하면서 유학자들 스스로 자신의 신념을 되돌아본 점이다. 위의 글에서 남한조는 “사람이 죽어서 기가 흩어지면 사라지지 않는 신(神)이 없는데 다시 조상의 신령이 돌아와서 흠향한다고 하니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과연 어떤 부류의 신인가?”라고 자문한다. “우리가 말하는 신(神)은 이치[理]에 근거하여 날마다 새롭게 생성되는 것을 말하니 그것은 우리가 부르면 모이고 흠향하게 하면 이른다. (...) 무릇 지각 작용과 영신(靈神)이 불멸한다는 관점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알아야, 비로소 제사에서 신(神)이 이르는 것은 사람의 정성으로 부를 때만 신령이 감응해서 도래하는 이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安順庵天學或問辨疑」]

  남한조를 비롯한 영남 유학자들은 모든 기는 생생불식(生生不息)하며 항상 새롭게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이치[理]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유학자에게 신기(神氣), 즉 조상의 혼령과 나의 신기가 서로 감응하게 하는 이치는 영원하고 보편적이지만 신기 자체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신기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다시 소멸한다. 마찬가지로 오래전 생겨난 조상의 혼도 결국 소멸한다. 남한조를 비롯하여 19세기 영남 유학자들은 이런 이치를 자각하는 것은 제사 지내는 자의 마음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제례에 임하는 자가 공경과 정성으로 부르면 이치에 따라서 제사의 대상이 이곳에 이른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부르면 혼이 모이고 흠향하도록 초대하면 이곳에 이른다고 남한조가 말한 것도 이런 의미다.

  그렇다고 이것이 귀신의 현상을 모두 내 마음의 주관에 함몰시킨 발상은 아니다. 유학자에게 이치[理]와 기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이치가 있으면 기도 이곳에 함께 있다. 대신 그들은 개별적인 조상의 혼이 아닌 ‘공공지기(公共之氣)’를 말한다. 혈기로 이어진 조상 혼은 소멸해도 조상과 후손을 낳는 천지일기(天地一氣)의 흐름은 끊이지 않는데, 그것은 이치가 새로운 기를 끝없이 생성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치의 보편성에 따라 새롭게 생성되는 기를 ‘공공지물(公共之物)’이라고 불렀다. 천지와 산천, 성현들은 비록 내 조상은 아니지만 내 마음이 주체가 되어 그들을 총괄하기 때문에 나와 제사의 대상이 서로 관련 있게 되고, 그래서 내 정성으로 신혼(神魂)을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조상이든 성현이든 내가 제사를 지내서 제사의 대상과 감통하는 것은, 결국 이치[理]가 그들을 공경하고 섬길 만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 점에서 마음의 이치가 합당해야 내가 만나는 신(神)도 존재할 수 있다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영남 유학자들은 서학서에서 강조한 인격적 영신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이 믿어온 귀신과 조상 혼의 의미를 반성적으로 숙고했다. 

 

같은 집안의 후손이 같은 기로 상응하는 조상의 혼령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본 의례의 협소한 의미를 벗어나 제사의 공적 가치, 보편적 원리를 탐색하려는 노력이 그들의 사유에서 엿보인다. 

 

조선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된 수많은 서양 책들은 유학자들의 지적 자의식을 동요시키고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누군가는 서학서에 깊이 경도되었고 한편으로 누군가는 이단을 논파하기 위한 척사론, 벽이단론을 작성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또 다른 길에 있지 않았을까? 서양 책은 조선 지식인들이 스스로 믿어온 다양한 신념을 반성하도록 자극했다. 그리고 좀 더 세련된 감각으로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과 가치를 재해석하도록 촉구했다. 이치의 보편성, 이치에 기반한 음양 귀신의 공공성은 유학자들의 사유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을까? 이것이 요즘 내가 고민하는 한 가지 철학적 물음이다.

"'천황도 범부다' 저항...日창가학회(SGI) , 이순신·유관순 알렸다"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 2023.06.03  >

 

 


1930년대 군국주의의 광풍이 일본 열도를 지배했다. 당시 일본인에게 ‘천황(일왕)은 신(神)’이었다. 일본의 전통 신앙인 신도(神道)는 원래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민속 신앙의 개념이었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 이후에 일본 군부가 일왕을 신격화했다. 일왕을 중심에 두고 ‘국가신도(國家神道)’의 개념을 도입해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그게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뼈대였다.

당시 일본에는 약 1500개의 종교 단체가 있었다. 기독교와 천주교도 이미 들어온 상태였다. 그렇지만 군국주의에 강렬하게 저항하고, 그로 인해 대표자가 목숨까지 잃은 종교는 창가학회였다.

창가학회는 초토화 직전까지 갔다. 창립자인 마키구치쓰네사부로(1871~1944) 초대 회장은 신사 참배 거부와 천황 모독 등의 이유로 결국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체포됐다.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씌워진 죄목도 이 두 가지였다.

“천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검찰의 취조 심문에 마키구치 회장은 대담하게도 “천황도 범부다!”라고 일갈했다. 취조하던 검사가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똑같았다. “ 천황도 범부다”라는 마키구치 회장의 외침은 검찰의 기소장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결국 그는 수감됐다. 감옥에서도 바깥에서 음식을 들여오는 사식(私食)을 일절 거부하며 1년 4개월간 투쟁했다. 밥은 찻잔에 조금 담겨서 나왔다. 겨울철 다다미 감방은 냉장고나 마찬가지였다. 방바닥에 손을 대면 살이 달라붙을 정도였다. 마키구치 회장은 결국 영양실조에 걸렸고, 굶어 죽다시피 옥사했다.

그런 창가학회가 올해 창립 93주년을 맞았다. 1일 서울 구로구 한국SGI 본부에서 김인수(64) 이사장을 만났다. 한국의 SGI회원 수는 150만 명이다. 그에게 창가학회의 지향점을 물었다.

 


왜 명칭이 ‘창가학회’인가.  


창가(創價)는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옥사한 마키구치 초대 회장이 원래 교육자(초등학교 교장)였다.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끝없이 던졌다. 그러다가 마키구치 회장은 니치렌(日蓮) 대성인을 통해 불법(佛法)을 알게 됐다. 그리고 ‘가치를 창조하는 교육’이란 답을 얻었다. 불법의 이치야말로 가치 창조 교육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펼칠 창가교육학회(현 창가학회)를 창립했다.”  


니치렌 선사는 1200년대 인물이다. 그는 대승불교 경전인 법화경을 중시했다. ‘법화경’의 전체 명칭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다. 그걸 일본어로 발음하면 ‘묘호렌게쿄’가 된다. “나의 몸과 마음을 법화경의 가르침, 즉 우주와 생명을 관철하는 근원의 법에 귀의한다”는 뜻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다. 그래서 창가학회 회원들은 기원할 때 “남묘호렌게쿄”를 되풀이해서 봉창한다.

‘남묘호렌게쿄’라는 발음 때문에 엉뚱한 오해와 편견도 있었다. 왜 한국어로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르지 않나.  


“지구촌에는 192개국에 1200만 명의 창가학회 회원이 있다. 세계 기독교에서 기도를 마칠 때 히브리어로 ‘아멘!’이라고 하지 않나. 같은 맥락이다. 창가학회는 미국ㆍ유럽ㆍ남미에 있는 회원도 ‘남묘호렌게쿄’를 봉창한다. 이건 부처가 깨달은 법의 이름이다. 고유명사로 봐달라. ”


기도할 때 왜 “남묘호렌게쿄”를 반복해서 부르나.


“모든 사람 안에는 불성이 있다(萬人成佛). 부처의 생명력, 부처의 지혜, 부처의 자비가 있다. ‘남묘호렌게쿄’를 외다 보면 우리의 내면이 저절로 고요해진다. 이어서 부처의 강인한 생명력, 깊은 지혜, 너그러운 자비가 내 안에서 용출한다.”


불성(佛性)이라는 자기 내면의 우물로 던지는 일종의 두레박인가.


그렇게 보면 된다. 처음에는 대개 ‘나의 행복’만을 위해서 두레박을 던진다. 좀 더 지나면 타인의 행복까지 기원하며 두레박을 던지는 나를 보게 된다. 그렇게 내가 더 확장되고, 더 커지고, 더 깊어진다. 그렇게 부처를 닮아가게 된다.”

창가학회의 ‘창가’는 가치창조를 뜻한다고 했다. 어떤 가치인가.


생명의 가치와 평화의 가치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일왕은 교육칙어(일종의 국민교육헌장)를 학교에서 외우도록 강제했다. ‘모든 사람은 천황의 황민’이라고 선포했고,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교육 지침이 떨어졌다. 그건 창가학회가 추구하는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위배한 것이었다. 마키구치 회장은 이 교육칙어를 부정했다. 개인의 행복이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 불행으로 바뀌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군부가 지배하는 살벌한 시기였다. 교육칙어를 부정한 건 목숨을 건 저항이었다.”

 


옥사한 마키구치 초대 회장의 뒤를 이은 도다 조세이(1900~58) 2대 회장도 군국주의에 저항했다. 일본 군부는 종교 단체에서도 신사(神社)의 부적을 모시라고 강요했다. 마키구치 회장과 수제자 도다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도다도 2년간 투옥됐다. 수감될 때 85㎏였던 몸무게가 출옥할 때는 50㎏였다. 그는 감옥에서 하루 1만 번 ‘남묘호렌게쿄’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처는 생명이다! 생명의 표출이다. (부처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 속에 있다”고 일갈하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럼 창가학회의 가장 핵심적인 지향은 뭔가.  


인간혁명이다. 불교는 결국 인간혁명의 철학과 실천으로 이어진다. 내가 부처인 줄 모르고 있을 때도, 내 안에는 불성(佛性)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가 있다. 그래서 가능하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신을 깨고, 이웃의 행복까지 바라는 나로 확장될 수 있다. 그렇게 나를 바꾸면 가정과 사회가 바뀌지 않겠나. 국가와 세계가 바뀌지 않겠나.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바로 이것이다. 창가학회가 펼치고 있는 평화ㆍ문화ㆍ교육 분야의 모든 운동은 궁극적으로 먼저 자신의 인간혁명으로 변혁을 지향한다.”

 


국제SGI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 “한국은 문화 대은의 나라”

창가학회 3대 회장은 이케다 다이사쿠(95)다. 그는 일본 우익으로부터 종종 공격을 받는다.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초지일관 반대하는 입장에다, 이웃 나라 한국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이케다 회장은 평소에 “한국은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문화대은(文化大恩)의 나라’”라고 강조한다. 또 수천 명의 일본 고교생ㆍ대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의 잔 다르크로 불리는 여학생 유관순”을 소개하고, “한민족 독립운동의 아버지 안창호는 일본의 비열한 침략과 끝까지 싸운 위대한 투사로서 몇 번이나 감옥에 투옥됐다”고 강연한 적도 있다.

또 일본 소카대학교의 졸업식 연설에서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라고 물은 뒤 아무도 답을 못하자 “한국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이라며 충무공의 삶을 졸업생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창가학회는 일본에서 종합일간지인 세이쿄 신문을 발행한다. 발행 부수가 무려 550만 부다. ‘역사의 거인’ 이란 지면 고정 코너에서 유관순 열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케다 회장은 “타인의 불행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는 안 된다”며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하우스보이를 목사로 키워준 ‘부모 같은 미군’… 그의 마지막 함께한 성조기
김장환 목사


서울 상수동 극동방송 사옥에서 진행된 김장환 목사와 본지와의 인터뷰.

 

 

< 조선일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05.30. >

 



올해는 대한민국 수립 75주년이다. 이 기간 신생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보물(寶物)을 발굴한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도 개인의 기억과 현대사의 한 장면이 깃들어 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연극배우 손숙, 영화인 신영균, 만화가 이현세, 시인 신달자에 이어 김장환 목사의 ‘보물’ 이야기를 들어본다.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89) 목사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영광과 겹쳐있다. 경기 화성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김 목사가 한 미군 상사의 무조건적 헌신으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된 사연, 세계적 부흥사였던 빌리 그래함(1918~2018) 목사의 전도 대회 설교 통역을 맡아 세계적 목회자로 주목받고 훗날 세계침례교연맹(BWA) 총회장까지 된 사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역사와 닮은꼴이다.

최근 서울 상수동 극동방송 사옥에서 만난 김 목사는 삼각형으로 접힌 성조기를 가슴에 품고 나타났다. 2013년 칼 파워스(1928~2013) 상사의 장례식 때 관을 감쌌던 성조기였다.

“(별세) 소식을 듣자마자 큰애(김요셉 목사)를 데리고 날아갔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장례와 하관식까지 다 치러드렸지요. 파워스는 참전 용사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와서 장례를 치렀는데 하관한 후에 관에 씌웠던 성조기를 삼각형으로 접더니 ‘이건 당신이 받으라’며 제게 줬어요. 파워스는 장가를 안 갔고, 가족들도 다 돌아가셨거든요.” 파워스에겐 김장환이 상주(喪主)이고 유족 대표였다.

“유 원트 투 고 아메리카(You want to go America)?” 1951년 초 경북 경산의 미군 부대. 허드렛일을 거드는 ‘하우스 보이’ 김장환을 눈여겨보던 칼 파워스 상사가 물었다. “그 정도는 내가 알아들었지. 그렇지만 그냥 하는 인사인 줄 알고 ‘오케이’ 했지.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진짜인 거라. 그땐 겁이 나가지고 ‘안 간다’ 그랬어요.”

파워스는 진지했다. 소년의 어머니를 찾아가 허락도 받았다. 뱃삯은 물론 학비, 기숙사비에 모든 서류까지 초스피드로 유학 준비를 한 덕분에 그해 11월 김장환은 미국행 화물선을 탔다. 그리고 명문 기숙사 고교와 신학대, 대학원까지 8년 동안 파워스의 도움으로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될 수 있었다.

파워스는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전한 것도 사립대에 진학할 학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김장환 소년 뒷바라지에 헌신하느라 자신의 꿈은 포기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교사로 지냈다. “자기도 가난했지만 그는 여기저기서 모금해 내 학비를 지원했어요. 그런 경우는 주변에서도 못 봤어요. 그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어요.” 파워스는 김장환이 전국 고교 웅변 대회에서 받아온 최고상인 ‘아이젠하워상(賞)’ 트로피와 부상(副賞) TV를 평생 가보(家寶)이자 자랑거리로 여겼다.

목사가 된 김장환은 파워스를 두 차례 한국으로 초청해 처음 만났던 경산 사과밭 등을 답사했다. 파워스는 김 목사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고 1979년 이스라엘 요단강에서 김 목사의 집례로 침례를 받았다. 김 목사는 2010년 파워스의 ‘P’와 자신의 ‘K’를 딴 ‘극동PK장학재단’을 설립해 국내외 대학·대학원생 1470여 명에게 장학금 38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물이었다.

 


#100만 인파 모인 50년 전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


“그때 여의도 5·16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 믿으러 온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가난과 북한의 위협에서 탈피하고픈 마음으로 모인 사람이 많았어요. 세계 최강 미국에서도 제일 유명한 목사가 온다니 ‘한번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도 많았고요. 결과적으로는 기독교 신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가 됐지만요. 하나님의 축복이었지요.”

극동방송 사옥 곳곳엔 대형 사진이 걸려있다.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목사 전도 대회’ 모습이다. 한국 개신교계는 1907년 평양대부흥과 함께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를 대부흥의 변곡점으로 본다.

‘북한의 위협’은 과장이 아니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무렵 닉슨 행정부는 1971년 주한 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한 데 이어 추가 철수도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함 목사 초청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캐딜락 2대를 의전용으로 그래함 목사에게 내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북한은 뜨거운 열기 속에 전도 대회가 진행되자 “미국 무당 불러다 굿판, 푸닥거리했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에서 열정적으로 설교를 통역한 김장환 목사는 "첫날 저녁 날씨가 쌀쌀해서 빌리 그래함 목사는 코트를 걸쳤는데, 나는 설교에 코트를 걸칠 수 없어서 그냥 양복만 입고 통역했다"고 말했다. 


교통·통신도 원활하지 않던 때였지만 소문은 방방곡곡으로 퍼졌고 ‘구경 열기’는 뜨거웠다. 첫날부터 50만명이 몰려 아현동부터 서울대교(현 마포대교)까지 인파로 채워지면서 ‘기적’은 예고됐다. 매일 10만명씩 참가자가 늘어 마지막 6월 3일 예배에는 117만명이 5·16 광장을 가득 메웠다. 지방에서 8시간씩 기차 타고 올라와 광장 귀퉁이에서 술을 마시며 설교를 듣다가 마지막에 “예수 믿을 사람?”이란 물음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는 사람도 많다.

개신교 신자를 어림잡아 400만으로 계산하던 시절, 닷새 간의 전도 대회에 연인원 320만명이 모였다. 개신교 신자는 이 전도 대회 이후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해 1980년대를 거치며 1000만 신자 시대를 열었다. 전도 대회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 못지않게 유명해진 사람이 통역을 맡은 김장환 목사이다. 그래함 목사의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열정적 제스처와 함께 한국어로 옮긴 김 목사의 통역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다. 2000년 김 목사가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침례교연맹 총회장이 되는 첫걸음은 이때 시작됐다.

한국 개신교계로서도 처음 치러보는 100만명 집회는 ‘모험’이었지만 광복 이후 교단이 나뉘고 분열하던 한국 개신교계가 전도 대회를 계기로 하나로 단합했다.

개신교계는 오는 6월 3일 서울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 50주년 기념 대회’를 개최한다. 김 목사는 “기념 대회를 통해 한국 교회가 다시 단합하고 부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의 극동방송 청취자가 보내온 편지

김 목사의 ‘현재 진행형 보물’은 북한의 청취자들이 보내오는 편지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우리는 누가 듣는지도 모르고 그저 방송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북한에서 우리 방송을 듣고 신앙을 갖는 사람까지 나온다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김 목사는 현직 극동방송 이사장이다. 1973년 아세아방송을 시작으로 1977년 극동방송까지 맡아 공산권 선교 방송을 쉼 없이 이어가고 있다. 제주와 서울 극동방송에 설치된 송출 장비는 북한, 중국, 러시아와 일본, 유럽 일부 국가에서도 청취할 수 있다. 1990년대 한중 수교 이후로는 중국 동포와 북한 청취자들의 감사 편지가 줄을 잇고 있다. 서울과 제주 극동방송 역사관엔 청취자 편지 수백 통이 전시돼 있다.

김 목사의 가슴을 울린 특별한 편지는 “성경과 찬송가를 천천히 한 글자씩 읽어달라”는 사연. 성경과 찬송가 책이 없는 북한에서 청취자들이 심야에 숨죽여 방송을 들으며 성경 구절을 받아 적어 자신들만의 ‘필사 성경’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성경과 찬송가집을 만들어 방송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고맙다고 사연을 보내와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지요.” 손수건에 실로 ‘생명줄 던저(던져) 구원 줍소서(주옵소서)’라고 수놓은 글귀, 송신 장비 교체를 위해 ‘헌금’을 중국 화폐로 모아서 보내온 편지도 있다. 김장환 목사는 “남북 통일이 되면 바로 북한 10개 도시에 안테나 세우고 복음 방송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죄 짓고 천당 가겠단 심보"…불쑥 치솟는 화, 법륜 스님 해법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  2023.05.29 >

 

 


“괴로움은 마음의 작용이다. 육체의 작용은 통증이다. 마음공부를 하는 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25일 서울 강남구 선릉로 성암아트홀에서 더중앙플러스 구독자 200명을 대상으로 ‘인사이트 세미나-백성호 기자의 고수를 만나다’가 열렸다.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는 중앙일보의 프리미엄 디지털 구독 서비스다.

지난해 12월 ‘103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강연 ‘백 년을 살아보니-삶에서 정말 중한 것들’에 이어 이번에는 법륜 스님을 초청해 “삶이 너무 버거워요. 스님, 어떡할까요?”란 주제로 대담과 즉문즉설을 가졌다. 객석에서는 수시로 웃음이 터졌고, 청중의 질문과 스님의 해법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많았다.

1부 ‘법륜 스님에게 마음을 묻다’는 마음을 주제로 사회자(백성호 종교전문기자)의 즉문에 법륜 스님이 즉답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마음공부는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스님은 “괴로움은 마음의 병이다. 

첫째 내가 괴롭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이게 병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둘째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셋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게 치료다. 

넷째는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이게 마음공부의 근본 원리다. 

세상만사도 마찬가지다. 갈등이 있으면 그걸 알아차리고, 원인을 알고, 그 원인을 제거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법륜 스님은 “혼자 살아 외로워서 괴로운 사람이나 결혼해서 갈등으로 괴로운 사람이나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괴로운 사람이나 괴로움은 다 똑같다”며 누구나 괴로울 수 있다고 했다. “괴로움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혹은 전생에서 온 것도 아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운 걸 직시하면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 원인을 놓아버리면 괴로움 없는 상태가 된다. 누구나 괴로울 수 있지만, 누구나 안 괴로울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청중을 쭉 둘러보던 법륜 스님은 “괴로움을 가지고 살지, 괴로움 없이 살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선택이다”고 말했다.

또 마음공부를 할 때는 자신의 실질적인 삶에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공부 따로 생활 따로’라는 말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건 생각으로 하는 공부를 하니까, 삶의 괴로움이 없어지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뭘 괴로워하느냐를 가지고 공부하면 생활과 마음공부가 따로 갈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사회자가 법륜 스님 저서에 있는 한 구절을 낭독했다.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허우적대지 말고, 물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주워오라. 어차피 장가간 김에, 어차피 자식 낳은 김에, 어차피 부도난 김에, 어차피 암에 걸린 김에, 어차피 늙은 김에 괴로워하지 말고 깨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라.” 법륜 스님은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그걸 알아차리면 단박에 깨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법륜 스님은 괴로움과 깨달음을 꿈에 비유했다. 

꿈에 강도를 만나서 쫓기면 두렵다. 그런데 누가 도와주면 고맙다. 강도를 피했다고 안도한다. 이게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위로다. 

그런데 눈을 딱 뜨면 어떤가. 그냥 꿈이다. 

원래 강도도 없고, 고마울 일도 없다. 

괴로움과 깨달음은 이런 거다.

 


2부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에서는 독자와 청중이 건네는 삶의 다양한 문제들이 펼쳐졌다. 법륜 스님은 하나씩 짚어가며 이치가 담긴 해법을 풀어냈다. 스님이 건네는 유머와 청중의 폭소, 이어지는 크고 작은 깨달음으로 강연장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법륜 스님은 “이미 튀어나온 화는 방법이 없다. 화를 낸 것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 죄지어놓고 모두 천당 가겠다는 건 나쁜 심보다”라며 “다만 화를 낸 뒤에라도 알아차리면 도움이 된다. 바로 사과할 수도 있다. 그럼 다음부터는 화가 탁 올라올 때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럼 멈출 수가 있다. 쉽게 가라앉을 수가 있다. 만약 또 화를 내버렸다면 빨리 사과하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이외에도 힘겨운 가정사와 아이 교육 문제, 우연ㆍ필연ㆍ카르마(업 혹은 습관) 등 삶의 다양한 물음들이 쏟아졌다. “법륜 스님께서는 출가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 것 같나요?”라는 질문도 나왔다. 법륜 스님은 “청소년 때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무엇이든 탐구하고 연구하는 걸 좋아했다. 어릴 적 저는 옮고 그름의 잣대가 강했다. 이런 성질 때문에 아마 명대로 못 살았을 확률도 높다”며 “불교 공부를 하면서 서로 다른 걸 이해하고 포용성이 생겼다. 이런 걸 많이 봐주는 힘이 생겼다”고 대답했다.

베트남ㆍ태국ㆍ라오스ㆍ튀르키예ㆍ시리아 등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를 두 달간 돌면서 난민촌과 재해 구호지역에서 인도주의 활동을 벌이다 막 귀국한 법륜 스님은 이날 여독도 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청중의 절박한 즉문에 일일이 마음을 담아 지혜의 즉설을 꺼냈다.

연등 빛나지 않는 사자암 향봉스님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자유롭다”

 
 
< 한겨레, 조현 기자, 2023-05-24  >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었던 우리. 그러나 어느새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입니다. 경쟁과 적자생존 속에서 빈부격차, 정치 이념 갈등과 남녀노소로 갈리며 개인과 개인의 소통도 막혀갑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니 더 기쁜 삶-일상 고수에게 듣다’를 10차례에 걸쳐 진행해 더불어 사는 삶이 주는 맛을 나눕니다. 일곱번째는 전북 익산 금마면 미륵산 사자암 향봉스님(71)입니다.


전북 익산 금마면 미륵산 해발 380m 깍아지른 절벽 제비집같은 사자암에 향봉 스님이 있다. 그는 무리동물인 사자보다는 홀로 살아가는 산중호걸 호랑이에 가깝다. 이 고지에서 구름을 벗삼이 공양주도 없이 홀로, 손수 밥하고 빨래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사자암 가는 계단을 오르기 전 ‘바른 불교 바른 신앙’란 바위글씨가 먼저 맞는다. 아니나 다를까.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전국 대부분 사찰에서 찬란히 빛나는 연등이 이곳엔 하나도 걸려있지 않다. 도심 포교당이 아닌 산사라면 불자들이 부처님 오신 날 보시한 연등비로 한 해 살림을 꾸려가게 마련인데, 독특하다.

연등값 하나 받지 않은 향봉 스님이 이번에 낸 책 이름이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불광출판사)이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사격으로 보나, 절 살림살이로 보나 화려한 것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데, ‘화려한 점심’이라니. 때마침 암자를 찾은 서너 불자들이 마련한 밥상이 차려졌다. 수십년 전 보리고개 때 선보이곤 했던 개떡과 김치와 맑은 죽 한 그릇이 놓여있다. 저 산 아래로 펼쳐진, 찬란했던 백제의 왕궁터와 한반도 모양의 호수를 바라보며 먹는 그 맛을 어느 고급 레스토랑이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보통의 절들은 불자들이 스님을 뵈면 엎드려 3배를 하고, 식사 때도 스님 탁자와 재가자 탁자가 마치 반상 구분처럼 엄연히 나뉘는데, 절도 받지 않고 한 상에 둘러앉아 같은 밥상을 마주한다. 더구나 신자들이 스님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니 회갑연이나 고희연을 받아본 적도 없고, 일반 사찰에서 사찰 경제의 밑바탕이 되어주는 천도재도 지내지 않는다. 대학입시 합격기도 한 번 한 적 없고, 신자들에게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 한 번 낸 적도 없다.

이번에 불교출판사에서 낸 책 인세도 받지 않기로 했다 하니 이 정도면 사자암이야말로 세간의 자본주의가 넘어오지 못한 금단의 소도인 것만 같다. 불자들이 바치는 시줏물 가운데는 불심과 구도심이 담긴 무주상보시물도 없지 않지만, 시주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절에 와서 스님에게서 대접 받으려는 불자도 적지 않다. 그 시주금에 목이 매여 모든 대중들을 평등하게 맞이하기 어려운 것을 이미 30대 때 체득한 그다.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자유롭다.”

향봉 스님이 애초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그는 불교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이미 30대에 조계종 총무원의 ‘넘버2’인 총부부장을 지낸 실세였고, 내장사 같은 천년고찰의 주지까지 지냈다. 또 1970년대에 60만권이 팔린 <사랑하며 용서하며>란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30대 후반 갑자기 철이 들어” 모든 것을 버리고 인도로 떠났다. 그는 무려 15년간 인도, 네팔, 티베트, 중국을 떠돌았다. 그야말로 거지처럼 순례하다 티베트에선 고산병에 걸려 사지를 넘나들었다.

그가 죽음 목전에서 쓴 시가 ‘내 죽거든’이다.

내 죽거든
 이웃들에게 친구들에게 알리지 말길,
 관이니 상여니 만들지 말길,
 그저 입은 옷 그대로 둘 둘 말아서
 타오르는 불더미 속에 던져 버릴 것,
 한 줌 재도 챙기지 말고 버려 버릴 것,
 
 내 죽거든
 49재다 100재다 제발 없기를,
 쓰잘 데 없는 일로 힘겨워 말길,
 제삿날이니 생일이니 잊어버릴 것,
 죽은 자를 위한 그 무엇도 챙기지 말 것,
 죽은 자의 사진 한 장도 걸어두지 말 것,
 
 내죽어
 따스한 봄바람으로 돌아오리니
 피고 지는 들꽃무리 속에 돌아오리니
 아침에는 햇살처럼 저녁에는 달빛처럼
 더러는 눈송이 되어 더러는 빗방울 되어.

그는 순례에서 마음이 환해지며 오랜 의문들이 해소되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돌아와 사자암에 머문 그는 30대 때 이미 쟁취했던 것들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의 안목이 일신한 것을 본 도법 스님이 2009~2010년 고우 스님, 무비 스님, 혜국 스님 등과 야단법석 자리를 마련했고 그의 걸림없는 선문답이 전국 선방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뒤 맞짱을 뜨기 위해 찾아온 선객들의 도전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 선문답 없이 앉아만 있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깨달을 수 없다는 그이니 대거리를 마다할 리 없다.

“간절함이 사무치지 않으면 결코 깨달을 수 없다.”

그는 검객같은 선기를 내보이면서도, 소아마비 소녀가 아버지를 시켜 불전함에 500원짜리 동전 몇 개와 함께 남긴 쪽지를 보고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한다. 
 
그토록 간절한 사람들의 마음이 사자암으로 향할 만큼 사자암은 대반석들이 둘러싸고 있어 영험있는 기도도량이라고 자랑할 법하다.  

그러나 향봉 스님은 부처와 보살을 내세워 중생을 미혹케하는 그 욕심에마저 필살기를 날린다. 
 
관음도량에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면 관음일 수 없고 
 문수도량에만 문수보살이 나타나면 문수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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