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팔지 마라

 

 

< 경향신문, 김택근 시인·작가, 2023.05.20  >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천재들이 스승으로 모셨던 스님이 있었다. 석전 박한영 스님(1870~1948)이다. 근대화의 문을 열어젖혔던 최남선·이광수·정인보·홍명희·변영만 등이 박한영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었다.”(최남선) “문장을 지을 때나 선리(禪理)를 펼칠 때에도 걸리거나 막히는 바가 전혀 없었다.”(정인보)
 
문인들도 박한영의 샘에서 물을 길어다 자신의 글밭을 적셨다. 김동리·이병기·조지훈·서정주·신석정·김달진 등이 박한영의 가르침을 받았다. “내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다”(서정주), “스승의 교훈을 나는 좌우명으로 삼아 살고 있고, 또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가슴에 지니리라”(신석정). 또 독립운동가 이동녕·오세창·권동진·이상재 등과도 교유했다.

박한영은 동서의 종교사상에도 막힘이 없어 서학의 무분별한 유입에 사상적 응전을 했다. 근대 인문학의 개척자이자 교육의 선구자였다. 또 한시 600수를 남긴 시승(詩僧)이었고, 시상이 그윽하고 담백해서 묵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박한영은 시대의 큰 그릇이었다. 그 안에는 지식뿐만 아니라 천하의 인재들도 담았다. 훗날 훼절한 제자들도 있었지만 스승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었다. 자신을 지킨 자도, 회유에 넘어간 자도, 이름을 팔아 영화를 산 자도 박한영만은 깎아내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스님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스스로 명예를 탐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천재들이 박한영을 스승으로 모셨을까. 천재 중의 천재라서 그랬을까. 아닐 것이다.

“함께 금강산에 들었을 때 스님(박한영)은 베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등에 짐을 지고 있었다. 이에 산승들이 얕보고 공경하지 않았다. 그중 누군가 ‘이분은 교정(종정)이시다’라 말했고, 또 다른 이는 ‘불교전문학교 교장이시다’라며 스님을 알아봤다. 이에 절 대중이 비로소 나와 영접하고 사과했다. 호기심 많은 사람이 이러한 광경을 신문에 소개하여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하기야 스님 스스로가 교정인 것을 모르며 또한 교장인 것도 모르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알 것인가.”(정인보 <석전상인소전>)

정인보는 박한영 스스로가 나라의 최고 승려임을, 불교전문학교 교장임을 모른다고 했다. 박한영은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고, 체득한 지식에 매몰되지 않았다. 높이 올랐음에도 그 높이를 잊고 살았다.

노자는 “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하다(大智若愚)”고 했다.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어내고,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해야 한다(爲道日損 爲學日益).” 당대의 천재들은 박한영의 덜어내는 삶에 놀라워하며 길을 물었을 것이다. 지식이 아닌 지혜에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엄혹한 시기에도 스스로를 다스렸던 스님들을 떠올려본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름마저 지웠던 그들이 불교를 불교로 지켜왔다. 박한영처럼 가장 높이 깨쳤어도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가장 낮음이 가장 높음이니 곧 부처의 자리이다. 부처께서는 기적을 보여달라 조르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적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한 몸을 여럿으로 나누거나 벽을 뚫고 지나거나 물 위를 걷는 것 등이 첫째요, 

남의 마음을 관찰하여 알아차리는 것이 둘째다. 

하지만 이런 기적은 누구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고, 사람들의 논란만 부추긴다. 

내가 제자들에게 권하는 것은 세 번째니 그것은 스스로 정진해서 깨달음을 얻는 기적이다.”


요즘 특별한 스님들이 많다. 목소리가 우렁차고 이름이 번쩍거린다. 그들의 사자후가 일주문 밖에서도 들린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부처를 팔아 권력과 영달을 얻고 있음이다. 자신을 높일수록 불교계 안팎에는 먼지가 일어난다. 머리에 빛이 난다, 신통력을 지녔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들은 모두 하찮다. 그저 자신에게 감탄하고 자신을 숭배하고 있음이다. 자신을 부처보다 높이고 부처를 내세워 세상을 구하겠다 외치면 그것이 곧 매불(賣佛) 아닌가.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고 있다. 연등이 없어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특별함과 잘남을 멸(滅)하는, 그래서 부처가 오신 뜻을 새기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부처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알려주려고 오신 것이다.

법륜 스님 즉문즉설 "손가락만? 손바닥 봐라…그럼 알게 된다"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2023.05.12  >

 



정토회 지도법사인 법륜 스님(70)은 ‘즉문즉설’로 유명하다. 사람들이 겪는 삶의 온갖 고뇌를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답을 한다. 많은 사람이 그 답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유가 있다. 스님의 답 속에 불교의 이치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26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것도 ‘이치’였다.

 

나와 세상, 그리고 우주가 숨을 쉬고 작동하는 원리. 그걸 깨우칠 때 불교의 수도자는  “아하!”하고 탄성을 지른다. 그리고 깨달음의 노래를 읊는다. 그게 ‘오도송(悟道頌)이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은 삶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수시로 해법을 제공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아하!”하고 나름의 오도송을 부른다.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27일)을 앞두고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그 뒤에 흐르는 이치의 강을 짚어본다. 마침 오는 25일 서울 강남의 성암아트홀에서 열리는 ‘The JoongAng Plus(프리미엄 디지털 구독서비스)-인사이트 세미나’의 강연자로 법륜 스님을 초청했다. The JoongAng Plus 구독자를 대상으로 200명을 초청한다. 법륜 스님의 즉문과즉설에는 과연 어떤 강이 흐를까.

 


#번뇌가 보리다

불교에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이 있다.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만드는 삶의 번뇌와 깨달음의 지혜가 둘이 아니란 뜻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괴로움은 괴로움이고, 깨달음은 깨달음이지. 어떻게 그 둘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법륜 스님은 이렇게 답한다. “공성(空性)은 모든 존재의 특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상은 텅 비어 실체가 없다.” 이 말은 최첨단 현대과학인 양자물리학의 궁극적 화두와 통한다. “세상은 입자인가, 아니면 파동인가.” 이 말을 우리의 삶에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나를 괴롭히는 번뇌는 덩어리가 있는 입자인가, 아니면 그저 조건에 따라 작용하고 사라지는 파동 같은 존재인가.”

법륜 스님은 꿈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칼 든 강도가 나를 쫓아오는 악몽을 꿀 때, 꿈속에서는 분명히 강도가 있다.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다가 더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구해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서 강도로부터 벗어날 길을 열어준다. 그때 두려움(苦)에서 벗어나 안도(樂)하게 된다. 꿈에서는 분명 고(苦)가 있었고, 그 고를 벗어나서 낙(樂)을 얻었다.”

그러다가 잠을 깨고 눈을 뜨면 알게 된다고 했다. 그 모두가 꿈이었음을 말이다. “강도는 본래 없었고, 강도가 없으니 두려움도 없고, 도망갈 일도, 도움을 요청할 일도, 나를 구해줄 사람도, 내가 보호받을 일 또한 없다. 꿈에서 깨어나야만 그것이 꿈인 줄 안다.”

법륜 스님의 메시지는 삶이 꿈같으니, 그저 허무하고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꿈의 정체를 알고, 꿈의 정체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꿈이 꿈인 줄 알고서 꿈을 꾸는 사람은 꿈에 매일 수가 없다. 오히려 그 꿈은 자유의 무대, 자유의 바다가 된다.

법륜 스님은 우리의 삶도 그렇게 꾸려보자고 말한다. 그래서 즉문즉설을 통해 “번뇌가 곧 보리”임을 대화의 방식으로 풀어간다. 어려운 불교 용어나 종교적 이론이 아니라 피부에 착착 감기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통해서 하나씩 일깨운다. 지지고 볶는 삶의 온갖 괴로움, 그 정체를 뚫고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아보자고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번뇌가 본래 보리인 까닭이다. 우리가 걸려서 넘어지는 그물이 실은 바람처럼 통과할 수 있는 그물이기 때문이다. 스님의 즉문즉설은 그걸 일깨운다.

 


#손가락을 볼 때 손바닥도 보라

우리는 흔히 말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한다.” 우리는 삼라만상을 단독자들의 집합으로 여긴다. A, B, C, D의 개체가 따로 떨어져 있어서 무한 경쟁을 펼친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자연 생태계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세계다.

법륜 스님은 달리 말한다. 우리의 삶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하고, 내가 행복하려면 네가 불행해야 하고, 내가 너를 딛고 일어서야 성공하는 삶이라고들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경쟁하고 투쟁해서 승리하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그물처럼 연관돼 있다.”

그 그물에서 보면 이렇다고 했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고,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하다.” 여길 보라며 법륜 스님은 손바닥을 펼쳤다. “여기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있다. 손가락만 보면 다섯이 각각 별개다. 그런데 손바닥을 보면 달라진다. 다섯 손가락이 모두 연결돼 있다. 그들은 결코 각각의 단독자가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법륜 스님은 역설한다. “우리 역시 별개의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모두 연관된 하나의 존재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삶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막연히 두려워한다.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으면 나의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그렇게 겁을 먹는다. 그런 이들에게 법륜 스님은 말한다. “‘나’를 고집하지 않으면 오히려 인연 따라 나투게(모습을 드러냄) 된다.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꼭 필요한 누군가로 말이다. 이 이치를 깨달으면 우리의 삶이 훨씬 자유로워진다.”

사이비 종교단체로부터 벗어나는 길

 

 

< 경향신문,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학장),  2023.05.02 >

 


인간은 이유가 필요한 동물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현상에 대해 이해하기를 갈망한다

과학은 이런 인간에게 존재의 이유와 현상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과학은 이유가 필요한 동물을 위한 일종의 최종 대본이다
거짓으로 점철된 사이비 종교단체로부터 벗어날 힘도 과학에 있다

 

 

 


“자기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는 줄 알아요?” “무려 500명!”

10년 전 즈음, 저명한 종교학자에게 들은 이 숫자를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이 자칭 예수들이 만든 이상한 왕국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는 우리가 피해자나 그 가족이 아닌 이상 그동안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실체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사이비 종교에 대한 일반인의 경각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다수의 사람들은 이 엽기적 왕국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의아해한다. 누가 봐도 변태적인 이 상황을 왜 피해자들은 처음에 거부하지 못했을까? 요즘 용어로 가스라이팅으로 보면 될까? 그러나 가스라이팅은 기본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개인적 심리 작용에만 초점을 맞춘 해석이기 때문에, 사이비 ‘집단’에 빠지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 문제는 기본적으로 집단적이다.

특정 집단에 휘둘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인간의 심리는 심리학의 오래된 연구 주제이다. 가령 왼편에 직선 하나가 그려져 있고, 오른편에는 그 직선과 똑같은 길이의 직선(B), 그보다는 훨씬 짧은 직선(A), 훨씬 긴 직선(C)이 있다고 해보자. 왼편의 직선과 같은 길이의 직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B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시지각 기능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런 판단에 이견이나 의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망막에 맺히는 상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같은 공간에 있는 일곱 명 중에서 당신을 제외한 여섯 명이 정답이 A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자, 이제 당신 차례. 뭐라고 답하겠는가? ‘얘들이 눈이 삐었나? 이게 A라고?’ 생각하며 정답은 B라고 당당히 말할까, 아니면 주저하며 약간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A같아요’라고 답할까?

이미 70여년 전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는 사람들이 타인들의 판단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 알아보기 위해 위와 같은 실험을 실제로 수행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앞선 질문을 받은 응답자 중 약 76%가 여러 번의 실험에서 적어도 한 번은 A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실과 상관없이 다른 이들이 우기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결정을 바꾸는 행위를 심리학자들은 ‘동조’라고 부른다. 애시의 실험을 시작으로 인간의 동조 심리에 대한 후속 연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는 “미국인의 대다수가 하루에 여섯 끼를 먹고 네댓 시간만 잔다”라든지, “남자 아이의 기대수명은 25년이다”와 같이 명백한 거짓 명제들에 휘둘리는 사례도 여럿 보고되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피해자의 생존 신호 외면 말아야

애시의 실험이 정말 충격적이었던 것은 선분의 길이와 같이 주관이 개입되기 힘든 인지작용에 대해서도 타인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물며 주관과 의견이 개입될 수 있는 불확실한 명제들의 수용에 있어서 타인은 거대한 확성기나 다름없다. 실험 후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참가자들이 A가 오답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정답이 아닌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남들의 대답에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대체 왜 이런 식의 동조 현상이 발생할까?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동조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집단의 주류로부터 배척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작이다. 다른 구성원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의견을 숨기는 게 생존에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 유의 동조는 배척당하는 고통이 창피함이나 비굴함보다 큰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동조도 영원하지는 않다. 만일 나와 타인들 간 판단의 간극이 너무 크고 지속되어, 회의감이 밀려오고 비굴함이 자존감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단계에 다다르면 타인과의 깊은 매듭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자존감이 너무 떨어지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온갖 고통과 다가올 악몽을 무릅쓰고 다큐멘터리 화면에 나와 당당히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용기는 바로 이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우리가 사이비 종교의 피해자가 아니라고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다. 동조 실험이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듯이, 우리는 누구나 명백한 거짓에도 동조할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리고 그 동조로 인해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는 피해자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더 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에 비굴함을 넘어 (죽기보다 싫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생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그들도 번듯하고 상식적이며 아름다운 공동체에 소속되어 안정감을 느끼며 멋지게 쓸모있는 인생을 살고자 그 공동체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이었다. 흑화된 악한들에게 운 나쁘게 포섭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동조의 또 다른 이유는 집단 내 다수의 의사결정이 자신의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직관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다수가 주장하는 바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다수가 가진 지식의 가치를 자신의 것보다 더 높게 평가했을 때 타인에게서 더 유용한 지식을 배울 개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성향은 수렵 채집기에는 잘 통하지만 오늘처럼 불확실성이 높은 복잡다단한 사회에서는 오류를 만들어내기 쉽다. 우리는 늘 나도 틀릴 수 있지만 다수의 일치된 견해도 크게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틀린 줄 알았다”라는 표현이 <나는 신이다>의 여러 편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터뷰 내용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비판적 사고 배양이 ‘구원의 길’

그렇다면 이러한 정보적 측면의 동조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시 애시 실험으로 돌아가보자. 만약 모두가 오답인 A라고 답하지 않고 서너 명이 또 다른 C라는 오답을 말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흥미롭게도 답변자가 정답을 맞힐 확률이 상승한다. 이것은 주변에서 자신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타자들이 얼마나 많은가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어떤 다양한(또는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즉 오픈 마인드(비판적 사고)를 배양해야 사이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이유가 필요한 동물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현상에 대해 이해하기를 갈망한다. 때때로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내기도 한다. 그저 우연일 수밖에 없는 룰렛 게임에서 돈을 잃거나 딸 때조차도 우리는, 똥 꿈을 꾸어서 돈을 딸 것이 확실하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댄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도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종교라는 내러티브를 창조해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신화와 종교라는 거대 내러티브를 넘어 또 하나의 특별한 내러티브를 발명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이다. 입증된 사실들에 근거해 설계된 내러티브! 과학은 이유가 필요한 동물인 인간에게 존재의 이유와 현상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교적 정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과학은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생명의 진화, 인간의 발전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탐구하며,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과학은 이유가 필요한 동물을 위한 최종 대본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으로 점철된 사이비 종교단체로부터 벗어날 힘도 과학에 있다.

미륵은 오지 않는다

 

 

< 경향신문, 한민 문화심리학자, 2023.04.08 03:00  >




한국인들은 천년 이상 메시아를 기다려왔다. 대표적 메시아 신앙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00여년 남짓이지만 메시아 신앙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바로 미륵이다. 한국에 미륵의 흔적은 차고도 넘친다. 미륵의 이름을 딴 절에서부터 이름난 절의 미륵전에는 미륵불이 모셔져 있고, 이름 모를 산기슭과 길가에 늘어선 돌부처 또한 미륵이다.


바닷가에 흔한 마을 이름인 매향리(埋香里)는 향을 묻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갯벌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은 미륵신앙의 중요한 의식으로 미륵이 오실 먼 훗날 묻었던 향나무를 파내어 향을 사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몇몇 방송에서 매향리를 매화향 가득한 동네로 소개하던데 적어도 바닷가 매향리들은 오랜 옛날 향을 묻었던 곳이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 유행한 불교의 전통으로 미륵부처가 이 세상으로 와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는 믿음이다. 삼국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미륵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 미륵은 메시아, 즉 구세주다.

미륵(彌勒)은 인도어 마이트레야(Maitreya)에서 유래했다. 마이트레야는 미트라(Mitra)에서 파생된 말인데, 미트라는 인도의 힌두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빛의 신(태양신)’으로 섬기던 신의 이름이다. 태양은 매일 지고 매일 떠오른다. 밤이 되면 어둠에 힘을 잃지만 아침이 되면 되살아나는 것이다. 태양의 이러한 속성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과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구원할 ‘구세주’라는 상징으로 연결된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빨리 전파된 이유도, 최근 방영된 <나는 신이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구세주를 자처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인들은 1500년 동안이나 구세주를 기다려 온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미륵신앙은 신앙의 영역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미륵의 구원은 종교의 영역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고난의 세상을 바꿔줄 이를 원했다.

미륵신앙이 뿌리를 내린 후로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면 자신이 미륵이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와 조선 숙종 때의 여환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치와 종교의 영역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대에 미륵은 곧 세상의 주인, 왕을 의미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래된 욕망의 흔적은 현대에 와서도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대통령이 바뀌면 나라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거라 믿는 듯하다. 한 사람의 정치인에게 자신들의 욕망을 모두 투사하고 그가 당선된 뒤에도 현실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으면 “그놈이 그놈”이라며 이내 그 일을 해 줄 다른 이를 찾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조시대의 왕도 그런 권력은 없었다. ‘싹 다 갈아엎기’를 반복했던 현대사 때문일까.

아니, 현대사의 한복판에서도 한국인들은 미륵을 찾고 있다. ‘싹 다 갈아엎기’의 원조이자 그 결과로 한국의 성장을 이루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직도 어딘가에서 ‘반인반신(半人半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실은 지금이 갯벌에 향나무를 묻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지금은 1500년 전이 아니다. 민초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던 시대와 지금을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이끌고 나가는 주체는 자신이며 사회와 국가는 그러한 개인들의 의지와 합의로 구성되고 운영되며 또 그래야 한다.

미륵은 오지 않는다. 아니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점은 누구도 알 수 없으며 그것이 누구인지도 아무도 모른다. 알면 또 어떡할 것인가. 종말이 다가온다며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신의 전 재산을 천국에 예금 의탁하듯이 갖다 바칠 것인가. 자신이 구세주라고 믿는 이에게 몸도 마음도 의사결정도 의탁한 채로 이용당하다가 버려질 것인가. 아니면 구세주의 일등공신으로서 당신이 바꿀 세상의 이권을 내게 달라 청탁이라도 할 것인가.

 


미륵신앙은 옛날부터 현실의 간난고초를 잊게 해 주었던 우리의 믿음이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할 일이 구세주를 기다리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어렵고 혼란스럽지 않은 때가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 혼란에는 내가 기다리는 미륵이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는 오래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부활의 찬가

 

 

 

<  LA중앙일보,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 2023.04.08  >

 

 

5년 만의 한국 나들이다. 역시 봄은 한국이 최고다. 산기슭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만발하고 개천가엔 노란 개나리가 한창이다. 절로 기지개가 켜진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동토의 바위틈에서 진달래꽃이 눈에 뜨이면, 우리는 불원간 온 산야에 진달래꽃이 만발하는 봄이 찾아옴을 알 수 있다.                                    
 
4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부활절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부활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올 부활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꿈과 희망을 잃는 순간 삶을 잃는다 했다. 인간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성장하지 않으면 노화된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인간 수명이 120세로 나와 있다. 현대 의학자들의 견해 또한 그와 엇비슷하다. 그래서일까?  요즘 많은 이들이 ‘인생  백년 4계절’ 이야기를 많이 한다. 25세까지가 봄, 50세까지가 여름, 75세까지가 가을, 100세까지가 겨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내 인생의 계절은 지금 어느쯤일까?  
 
각자의 계절을 알고 싶다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다. 

 

길을 걷다 들꽃이 눈에 들어오고,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슴 설렌다면 당신은 인생의 봄을 맞이하고 있다는 증거다. 

 

혹시 걷잡을 수 없는 꿈과 열정으로 잠을 못 이룬다면, 당신의 계절은 신록이 무성한 여름이다. 

 

굶주린 사람의 눈물어린 눈망울 앞에 연민의 정으로 걸음을 멈춘다면, 당신은 풍성한 과일을 맺는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길을 되돌아보며 모든 삶이 은혜였음을 깨닫고 감사한다면, 그건 분명 인생의 계절 겨울 아니겠는가.
 

그런데 노년에도 꿈과 열정으로 자신의 삶을 성장시키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그런 분들 가운데 한 분이다. 103세인 그는 요즘도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한다. 그분은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은 꿈과 열정으로 살고 있다. 사회 부조리에 분노하고, 지구 생태계를 걱정하고, 국민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정과 정직을 말씀하신다. 아직도 단정한 몸가짐에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 확신과 신념에 찬 의연한 모습은 바로 꿈과 열정이 인간의 뇌세포를 젊게 만들어 준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4월의 부활절을 앞두고 오랫동안 소식 없이 지내온 의과대학 동창분이 카톡으로 글을 보내왔다. 대학 때 약간 한량(?)처럼 지내다 일 년 유급하여 같은 해에 졸업한 선배뻘 동창이다. 한데, 몇 년 전 만났던 그는 동창 중 가장 멋지고 젊은 모습의 새 사람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의 시 같기도 하고, 신앙고백도 같은 우정의 글이다. “사랑하는 벗이여! 너는 아는가? 눈보라 치던 겨울을 이기고/ 새하얀 눈이 녹아 흐르는 실개천에서/ 개울가에 눈뜬 갯버들에서/ 새하얀 눈 속에 부끄러운 듯 숨어 보이는 홍매화의 꽃망울에서/ 담낭이 개나리마다 노란 꽃순에서 머리 위 가슴저리도록 맑고 푸른 하늘을 이고/ 향긋하게 불어오는 봄바람 맞으며/ 정다운 나의 친구야, 너는 아는가? 우리들 심령에 찾아드는 4월의 “예수 부활”의 기쁜소식 가슴에 안고 /우리 한번, ‘새사람’되어 /신바람나게 부활의 찬가 불러보자
 
친구의 변화된 모습 안에서, 부활이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삶을 사는 새사람(에페소서 4:24)”으로의 탈바꿈으로 선명하게 다가온다. 마치 나방이에서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그 황홀한 신비처럼 부활절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가슴 설레는 꿈이며 희망 아니겠는가.


나는 종이다

 

 

< 경향신문,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2023.04.07  >

 


넷플릭스 다큐 시리즈 <나는 신이다>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신이 배반한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신이 사람들을 배반했다는 것이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데, 다 보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통’ 교회에 가면 목회자는 자신을 ‘만유의 주(Lord of all)’인 신의 뜻을 대신 전파하는 ‘종(servant)’이라고 낮춘다. 신도들은 주의 종 말씀에 의지해서 신이 약속한 구원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곳 ‘이단’ 교회는 다르다. 목회자가 자신을 주되신 신이라고 선언하고, 자신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사람들은 이 약속을 믿고 눈앞에 살아 있는 주를 섬기고 있다. 한국 사회에 자칭 ‘만유의 주’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종’이 이렇게나 많다니! <나는 종이다>로 제목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부제는 ‘주가 배반한 사람들.’

더 놀라운 것은 자칭 구세주의 모습. 서슴지 않고 막말과 쌍욕을 내뱉는다. 교리는 또 어떤가? 나를 구세주로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 수준이 이런데도 모두 ‘아멘’으로 화답한다. 가족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고, 헌금하고, 헌신한다. 어쩜 저럴 수 있지? 눈살을 찌푸리다가 막말과 쌍욕을 입에 달고 사는 정통 교회의 주의 종도 떠올랐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일제강점기 이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여덟 글자로 단순 교리를 전파한다. 자신이 구세주라고 말만 안 할 뿐, 사실상 구세주 역할을 하며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헌금을 바치라고 한다. 현금이 없으면 빚을 내서 바쳐라. 다들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쯤 되면 뭐가 이단이고 뭐가 정통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구세주 믿으면 천국. 불신자는 지옥, 아멘.” 주술화된 교리로 신도를 꼬드기고 협박한다. 구세주를 자처하든 구세주 대행자 노릇을 하든, 모두 주술사다. 초일상적 힘을 조작해 현실 세계에서 통하는 실제 목적을 얻으려고 한다. 초일상적 힘은 신과 접속한 신비한 체험에서 나온다. 실제 목적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무병장수하는 것. 현세에서는 이를 얻을 수 없으니 내세에서 영생불멸하면서 누리자! 이게 주술사가 약속하는 구원의 실제 내용이다. 나의 초일상적 힘을 믿고 따르면 구원받을 수 있다. 이 말에 넘어가 구세주를 믿으면 구원받기는커녕 종이 된다.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구원 종교의 초월성에 주목했다. 구원 종교는 부당한 현실을 초월하는 예언을 한다. 베버는 예수의 가르침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누구나 사랑하라는 말씀은 매우 추상성이 높은 성스러운 가치다. 이를 실천하면 할수록 당연히 좁은 혈족윤리에 갇힌 현실과 불화하고 충돌할 수밖에 없다. 혼자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하다. 교회는 구체적인 타자와 사랑에 빠져 있는 현실과 충돌하며 보편적인 타자를 사랑할 수 있도록 초월 윤리를 가르치고 실천한다.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베버는 이러한 보편적 형제애 윤리가 혈족, 인종, 신분,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장애 등 온갖 불평등을 주조하는 사회적 범주를 깨치고 민주주의 사회를 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준다. 보편적 형제애 윤리를 실천하면서 인류는 줄기차게 작은 자를 존엄한 인간으로 만들어 왔다. 예수가 참으로 인류의 구세주인 이유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작은 자가 너무나 많다. 길을 잃어 영혼이 갈급하다. 이런 작은 자에게 예수를 실천하면 그와 나 모두 종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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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어떻게 범죄가 되는가

 

 

< 한겨레,  한승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전공 교수, 2023-04-03  >




종교와 관련된 범죄나 스캔들은 탐사저널리즘의 이상적인 소재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종교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낯설고 기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폐쇄적인 집단, 그 내부에서 자행되는 학대나 폭력 같은 자극적인 소재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일으킨 열풍은 이례적이다. 이 새로운 매체는 고도의 전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중파 방송 심의규정에서 자유로우며, 대상 교단들의 법적 대응이나 물리적인 반발을 돌파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그러나 자극적인 개별 사례에 집중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종교는 어떻게 반사회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가? 그리고 왜 그런 종교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의심하는 대신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며 도리어 외부 사회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가?


우선 몇가지 오용되는 개념들을 정리해보자. 다큐멘터리에서 다루어진 기독교복음선교회(JMS), 아가동산, 만민중앙교회 등은 흔히 ‘이단’, ‘사이비’ 등으로 불린다. 이들 단어는 <논어>나 <맹자> 같은 유교 경전에도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런 고전적 표현을 활용한 근대 번역어다. 이 맥락에서 이단(heresy)이란 특정한 종교 전통에서 정통 교리를 따르지 않는 분파를 가리킨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다원적인 종교 환경에서 이 말은 교단 내부에서는 사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공적인 용어로서는 부적절하다.


한편 사이비종교란 식민지 시기 법률용어인 유사종교(類似宗敎)의 통속적 변형이다. 그것은 공인된 종교가 아닌, “종교 비슷하지만 아닌” 단체들을 멸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이고 건전한” 종교를 제도적으로 규정하는 체제라면 모를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은 개념이다. 해당 종교인들이 법적 처벌이나 사회적 비난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종교가 아닌 것을 종교인 척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종교를 이용해 나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사회적 차별의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전통적인 주류 교단 대신 수상하고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종교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냐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신자들의 결핍이나 교단의 세뇌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설명이 많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교육 수준이나 사회경제적 지위가 비교적 높은 신자들의 존재나, 그들이 상당 부분 자발적으로 ‘세뇌’를 받아들이는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종교경험이라는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종교운동은 이론이나 관행에 호소하기보다는 강렬하고 신비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험의 특징은 개체적 자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신성이나 우주, 공동체 성원들과 강렬한 일체감을 느끼는 데 있다. 이것은 심오한 진리에 대한 직관이나, 무조건적인 사랑의 감정이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의 감소 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일상적인 감각이나 상식, 언어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에 세속화, 합리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종교가 지속되는 근거가 된다.


물론 그런 체험에 대한 수요는 기존 종교들에서도 충족될 수 있다. 그러나 기성 종교 제도의 전통적인 교리와 의례에 진부함을 느끼다가, 낯선 집단에서 강렬한 신비체험과 친근한 공동체를 처음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종교경험은 언어로 표현되기 어려운 속성 때문에 어떤 믿음과 실천의 체계와도 연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교는 극단적인 선행도, 극단적인 악행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약 신성함에 대한 감각이 카리스마적인 개인에 대한 숭배와 연결된다면 인간은 그 사람에게서 신을 보게 된다. 강제 노역이나 성적인 착취까지도 초월성에 대한 헌신과 구분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종교를 이용하는 범죄자들은 그런 상징조작의 달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을 이단으로 지정하거나 신자들을 색출하는 일은 선의의 피해자를 줄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진리에 대한 사악한 세력의 박해로 허위 표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를 이용한 착취나 폭력은 기성 종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지도자의 카리스마나 신앙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빈약한 조건에서 흔한 현상이다. 

 

해로운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다. 비판받지 않는 종교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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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종교… 자식은 무슨 죈가

 

 

 

< 조선일보, 김동현 기자,  2023.04.04.  >

 



일본 문학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의 2009년 대표작 ‘1Q84′에는 이단 종교를 믿는 부모에 의해 상처를 받았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포교 활동에 동반되는 등 피해를 겪고, 성인이 되어서도 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지난달 29일 일본에선 ‘종교 2세’들과 이들을 후원하는 변호사가 정부에 자녀에 대한 신앙 강제 등 이른바 ‘종교 학대’를 금지하는 법 정비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종교 2세란 모태 신앙처럼 종교 신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뜻한다. 일본에선 주로 이단이나 신흥 종교 신자의 2세를 가리킨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종교 2세들은 “종교 학대의 피해자 대부분은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리고 인생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는다”며 “지금이라도 사회가 나서 피해를 방지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종교 2세 아이들의 피난 장소와 상담 지원 체제 등을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 종교 2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지난해 7월 해상자위대 출신 남성에 의해 피격당하면서부터다. 살인범은 자신의 어머니가 신흥 종교에 깊이 빠짐으로 인해 가족의 해체와 경제적 피해 등을 겪었다며, 아베 전 총리가 해당 종교와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을 보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일본에선 그간 신흥 종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종교의 자유’란 헌법 원칙 아래 묻혀 왔다. 하지만 아베 전 총리 피격 사건으로 종교 2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류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넷플릭스 8부작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이 공개되면서 한국에서도 일부 이단 종교들의 행각과 2세들이 입은 피해가 환기되기 시작했다. 서울 유명 빵집 사장이자 인플루언서 A씨는 소셜미디어에서 “나는 JMS(해당 다큐에서 이단교회로 지목된 단체)에서 태어난 2세”라고 고백, 어린 시절 모든 미디어 및 이성과의 만남이 단절되고, 월 30만원으로 네 가족이 살아야만 했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일본 못지않게 한국에서도 JMS 등 단체의 만행을 고발한 다큐 출연진과 뒤늦게나마 피해 사실을 고백한 A씨처럼 아픔을 겪은 ‘종교 2세’들이 피해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이미 겪은 아픔은 누구도 완전하게 위로할 수 없다. A씨는 JMS에 빠졌던 부모에 대해 “누구보다 착하게 사신 분들이었다”면서도, “착한 것과 진실을 보는 눈을 갖는 건 다른 일”이라고 말했다. 그릇된 신념에 빠진 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혹은 적어도 자녀가 입을 ‘2차 피해’를 방지할 대책의 필요성은 한국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종교의 자유 뒤에 가려진 아이들의 고통을 묵인하는 건 옳은 일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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