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는 우리역사 
출판사 : 경세원발행 : 2017년 10월 28일

 

 

1. 두 번째 개정판을 내면서


1997년에 발행된 《다시찾는 우리역사》가 2004년에 전면적인 개정판이 나오고 또다시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도합 51쇄가 간행되었고, 외국어본으로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본이 간행되어 국내와 해외에서 대표적인 한국통사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렇게 독자들의 사랑과 관심이 커진다는 것은 필자로서는 더없는 광영이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무겁다. 51쇄까지 간행하는 과정에서도 매판마다 부분적인 수정과 보완이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 지난 10년간 국사학계의 새로운 연구업적이 늘어나고, 국내외 상황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대중문화,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 중심국가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으나 대외관계는 10년 전과 다르다. 이웃 중국이 G2에서 G1을 향해 급성장하고 있으며, 일본은 시대착오적인 100년 전의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 정치와 경제가 낙후된 북한이 핵에 매달려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통일을 주도하면서 동아시아 평화를 지켜야 할 우리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나라도 적이 될 수 없으나, 현실은 어떤 나라도 진실한 친구가 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할수록 국력을 더 키우면서 이웃과 평화공존의 가치를 공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균형외교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역사의식은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지만, 현실의 과제를 외면하기 어렵다. 객관적 진실을 찾으면서 그 진실이 현재와 미래를 밝게 풀어가는데 도움이 되는 접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객관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역사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한국사를 바라보는 역사의식은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시각이 다르지만, 객관성과 미래지향적인 측면에서 모두 한계가 있다. 보수와 진보는 다같이 균형감각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서구적 가치에 기울어져 있다. 이보다 더 높은 평화의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찾아서 한국인이 수천 년간 살아왔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그 가치는 바로 선비정신이고, 선비정신의 핵심은 공동체사상이다. 우주와 사람이 하나의 생명공동체이고, 사람과 사람이 홍익인간으로 또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그 공동체 속에 자유도 있고, 민주도 있고, 평화도 있고, 계급도 녹아 있다. 다만, 그 가치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진화하고 발전해 왔으며, 미래에는 더욱 다듬어져서 세계인이 공유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역사의 큰 흐름은 동서양이 만나 새로운 문명의 가치를 창조할 때라고 본다. 여기에서 서양문명이 창조한 개체존중의 가치와 동양문명이 창조한 공동체존중의 가치가 높은 차원에서 융합된다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한층 더 따뜻해지고, 국제적 갈등은 한층 더 완화될지도 모른다.

한국사는 한국이라는 좁은 공간의 역사가 아니다. 영토를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사는 매우 왜소하지만, 문화가치로 본다면 한국사는 크나큰 세계사와 맞닿아 있다. 세계화 시대에 한국사를 국제적 시야에서 보아야 한다는 논의가 무성하지만, 국제적 시야라는 것을 단순히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한국사는 수천 년간 군사강대국 역사의 종속적 존재로만 그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이 지켜온 문화가치와 주체성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 한 번도 경제나 군사강국으로 세계사를 주도한 일이 없다. 주변 강대국의압박과 영향을 크게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세계 문화강국의 하나로 살아왔다. 

 

한국인의 조상인 ‘아사달족’의 문화가 중국문화의 뿌리가 되었고, 아사달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 고대문명을 꽃피웠다. 공자가 고조선을 ‘군자국’이라 칭하면서 건너오고 싶다고 했고, 그 뒤에도’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불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문화를 다시 수용하여 문화를 살찌웠지만, ‘군자국’과 ‘동방예의지국’의 이미지만은 한국이 더높았다. 그래서 동아시아문명의 중심에 한국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를 만든 것도 한국이고, 교육과 관련되는 금속활자와 인쇄술에서 세계 최첨단을 걸어온 것도 한국이며, 교육입국으로 나라를 키워온 것도 한국이다. 검소하고 겸손한 왕실문화를 바탕으로 백성을 끌어안고 철인정치哲人政治를 꽃피운 것도 한국이다. 물론, 기나긴 역사의 행로에 어두운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한국사의 본질이었다면 어떻게 500년이나 1,000년의 사직을 이어갈 수 있었겠는가?

문화의 힘은 경제나 군사력보다도 큰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나 석가나 공자는 맨손으로 세계를 지배한 것이다. 한국에는 이런 인물은 없었지만, 이들의 가르침을 누가 모범적으로 실천했느냐를 따진다면 한국인은 아마도 우등생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한국사의 진실한 모습이고, 바로 그것이 세계사 속에서 바라보는 한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한국인이 ‘군자국’과 ‘동방예의지국’의 모범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아니 그 모습을 너무나 많이 잃었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 역사를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역사의 거울로 우리 몸에 묻은 때를 벗겨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이런 시각에서 집필되었지만, 이번 개정판을 통하여 그 모습을 좀 더 새롭게 다듬었다. 그에 따라 새로운 사실이 많이 추가되었지만, 그것이 두 번째 개정판을 내는 근본적인 목표는 아니다. 독자들은 이 책에 담고자 하는 필자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려 주시고 읽어 주기를 당부한다. 책의 부족한 부분을 깨우쳐 주신다면 더 없는 바람이다.

2014년 1월 관악산 호산재에서
한영우 씀

 

 

2. 개정판을 내면서  (2004년 전면개정판 서문)

 

 

《다시찾는 우리역사》초판이 1997년 봄에 발간되어 벌써 6년 여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세기가 바뀌고,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가 등장했으며,미국에서도 클린턴 정부가 끝나고 조지 부시 정부가 등장했다. 길지 않은 세월임에도 국내외 정세가 크게 바뀐 것이다


정보통신산업의 발달로 문화계의 변화도 급한 물살을 타고 있다. 1 년의 변화가 과거 100 년의 변화보다 클지도 모른다. 이런 시기에 시대에 뒤지지 않는 역사를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대사를 신속하게 보완해야 하고, 역사서술방식이나 책의 편집도 새로운 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학계와 각종 언론매체로부터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 결과 지난 6년간 중판을 거듭하면서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것은 필자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한국사교재로 이용하는 사례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외국어 번역본의 필요성이 점차로 커지고 있다. 일본어판이 동경대학 요시 다 교수에 의해 출간되었으며,러시아어판이 모스크바대학 박미하일 교수에 의해 진행 되고 있다. 영어판은 연세대학교 함재봉 교수에 의해 머지 않아 간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성원이 클수록 필자의 어깨도 상대적으로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판을 거듭할 때마다 부분적인 수정을 수십 차례 거듭해 왔다. 컴퓨터의 이점을 최대로 활용한 셈이다. 하지만 일취월장하는 학계의 연구성과에 비추어 보거나 애독자들의 기대를 고려할 때 이러한 부분적인 수정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 전면적인 개정판을 내 게 된 것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도 역사해석의 큰 골격이 바뀐 것은 없다. 그러나 설명이 크게 보완되었 다 우선 총설이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본문 중에서 가장 변화가 많은 것은 고대사와 고려사 부분으로 내용을 한층 자세하게 보완했다. 특히 고대 한일관계사에 새로운 연구성과를 많이 수용했다. 조선시대 이후의 역사도 새로운 학설을 반영하려고 노력했고, 특히 대한제국의 근대국가로서의 위상을 한층 분명하게 부각시키고, 현대사에서는 ‘국민의 정부’에서 '참여정부’에 이르는 과정을 새로 넣었다. 최근에 발행된 참고문헌도 물론 추가되었다.


이 책의 주요 특징의 하나인 도판fi弼도 새로운 것으로 많이 바꾸었다. 전체적으로 근현 대사 서술과 문화사의 비중이 높은 것이 이 책의 특징으로 평가되어 왔는데,그 특징을 이번 개 정판에서도 최대로 살리려고 노력한 셈이다.


돌이켜 보면, 초판을 내고 나서 필자는 회갑을 맞이했고, 이번 개정판은 정년과 시기가 필자는 앞으로도 체력과 시간이 허용하는 한 이 책을 계속적으로 보완해 갈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배전의 성원과 애정어린 질책을 기대한다.


2003년 2월
봉천동 호산재에서 저자 한영우 씀

 

 

3. 책을 펴내면서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반성할 때 성장한다.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반성할 줄을 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발전하는 시대에는 반드시 옛것을 숭상하면서 현재를 고쳐나갔다. 서양의 근대가 그리스•로마 문명을 고전古典으로 부활시키면서 열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 다. 중국인은 하 •은•주 삼대의 문명을 고전으로 내세우고 혁신을 거듭해 갔으며, 우리나라는 중국의 삼대를 숭상하면서 동시에 고조선이나 그밖의 고대국가를 이상시대로 그리면서 왕조를 세웠다. 옛날을 사랑하면서 현재를 극복해 가는 자세가 서로 다름이 없다. 이를 서양사람들은 ‘르네상스’라고 불렀고, 동양인은 온고지신 혹은 법고창신이라고 했다.


지금 20세기가 저물어가고 있다 세기가 바뀔 뿐 아니라 천년대가 바뀌는 역사의 대전환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이렇듯 중대한 시기에 우리는 지금 얼마나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현재를 얼마나 반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미 미래의 세계가 우리에게 반드시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조짐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발족이 경제적으로 무한경쟁의 시대를 열어 놓았다. 이미 그것은 20세기와는 다른 모습의 경제전쟁을 예고하는 것이다. 지난날 패권주의 시대의 아름답지 못한 추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라서 강자의 길을 가야 하는 가. 아니면 약자와 강자가 함께 사는 공생공영의 길로 가야 하는가. 일방적으로 힘을 키우느냐, 아니면 도덕을 바탕으로 힘을 키우느냐. 지금 그 기로에 서 있고,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힘의 길을 간다면,아마도 그 길의 끝은 평화의 파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힘은 절대 필요한 것이지만,힘을 과도하게 믿는 사람은 오히려 힘 때문에 파멸할 수 도 있다 그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우리가 선택할 길은 공생공영의 인도적 사회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사실, 지난 20 세기는 공생공영을 고민하기보다는 외형적 힘을 키우는 데 주력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세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남북분단의 대결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힘을 키워 왔다. 그 결과 지금 세계 12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했고, 일인당 1 만 달러의 국민소득을 누리는 부국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을 키우기 위해 인권이니,도덕이니,문화니,복지니 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어놓았다.


민주주의가 문민정치라는 것을 알면서도,문민정치를 해 본 일이 없다. 그 결과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었고, 도덕과 기강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혼돈의 경제대국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끊임없는 사건 사고로 이어지고, 잘 나가던 경제마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경제도 사람이 하는 것이라면, 사람이 일류가 되지 않으면서 경제만 일류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열어가야 할 사회가 진정 문민시대라면,진정한 문민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민의 모델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서양도 문민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델을 우리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역사에서 문민전통을 애써 외면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민문화가 절정에 다다랐던 조선왕조를 문약에 빠져서 망했다고 흔히 말해 왔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해석이 힘을 숭상하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유교입국의 조선왕조가 고도의 문민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519년의 장수를 누렸다는 사실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강포한 도적은 탓하지 않고 도적맞은 선량한 주인만을 탓하는 것과 다름없다. 패권주의시대에 패권을 쥐고 흔들었던 일본과 독일도 불과 반세기 만에 연합국에 망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는 패권을 거부했던 조선왕조만을 원망하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물론 지난날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고, 생존을 위한 힘의 축적이 절실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선택이 반드시 미래에도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열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비단 조선왕조뿐만 아니라, 수천 년의 민족사를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는 21 세기를 맞이 하기 전에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다. 힘을 중심에 놓고 보면,아마도 만주를 끌어안았던 고구려가 얼핏 빛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의 원인이 지나치게 힘을 숭상하고 전쟁을 선호한 데 있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볼 때,우리역사는 새롭게 쓰여져야 할 대목이 너무나 많다.


나는 20세기를 60년간 살아왔다. 유년기에 태평양전쟁을 경험했고, 소년기에 6-25 전쟁을 만났으며,청장년기를 최루탄 가스 속에서 살아왔다 크건 작건 간에 모두가 전쟁이다. 이것은 우리 국민 다수의 경험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역사를 공부하면서 나의 삶의 체험과 역사의 과거 사이를 무수히 오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역사는 무엇인가 왜 우리역사와 문화는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리역사와 문화의 약점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인가.


우리역사와 대화를 하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숨겨진 보석’을 우리 자신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모르는데 남이 알아 주기를 바랄 수 있는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남모르는 행복을 누리고 살아왔다. 더욱이 최근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면서 나의 행복감은 절정에 달했다. ‘잃어버린 역사’와 ‘숨겨진 보석’을 되찾는다면 우리의 생존능력은 몇 배로 커질 것이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역사에서 자신감을 찾고, 그 자신감을 가지고 21세기를 연다면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세계화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밖으로만 관심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균형감각을 갖춘 지식은 지피나 지기의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손자의 가르침도 있지 아니한가. 모든 지식은 자기 역사에 뿌리를 두고 남을 이해할 때 주체성과 실효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편협한 국수주의와 주체성 없는 세계주의는 모두가 위험하다.

 

내가 우리나라 통사를 쓰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소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아마 이 책은 그러한 정서에서 쓰였다는 것을 독자들은 금방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역사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나는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 책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 책의 앞머리에 실은 ‘총설'은 나의 그러한 시각이 정리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특히 조선왕조의 문민전통을 새롭게 보는 시각에 따라 전반적으로 시대구분 방식이 통념과는 달라졌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이 책을 쓰면서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은 전문가를 위한 통사가 아니라,일반국민을 위한 통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의 고ㅈ을 찾고 전통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부쩍 늘고 있으나, 평이하고 친절한 역사책이 별로 없다. 권위 있는 학자들이 이러한 작업을 피해 온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한자를 병기하여 중학생 이상이면 읽을 수 있도록 하였고, 많은 지도와 도판을 넣어 시각적 효과를 높이고자 하였다. 특히 문화재와 관련된 지도와 그림을 되도록 많이 넣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도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가능한 한 수용하여,대학생이나 그 이상의 전문가들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각주를 최대로 활용한 것도 이 책의 특색이다. 본문에 넣기는 곤란하지만, 좀 더 깊은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에서이다. 그리고 최근 국민의 관심이 문화와 생활 그리고 지방사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고려하여 이 방면의 서술에 적지 않은 비중을 두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이후의 서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역사는 가까운 시대일수록 중요하다는 원칙을 존중하기 위함이다. 해방 이후의 현대사도 1996년 말까지 다루었다 다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나 현존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엄밀한 평가를 유보하고 사건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데 치중하였다. 특히 북한의 역사는 정보 부족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엄연한 민족사의 일부로서 가능한 한 편견 없이 쓰려고 노력하였다. 남한과 북한은 외형상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 깊은 인과관계 속에서 전개되어 왔음을 유념하였다.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새로운 시각과 형식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집필과 편집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 집필에 착수한 것은 14년 전이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시간을 다른 일에 빼앗겨 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더욱이 새로운 자료와 연구성과가 속속 등장하고, 주변환경이 바뀜에 따라 개고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미흡한 점이 많은 대로 우선 세상에 내놓 기로 하였다. 이 책이 독자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할지는 모르겠으나 개성이 살아 있는 통사, 국민에게 다가서는 통사, 시대의 고민을 담아 보려는 통사로 이해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한다.


그동안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동료 교수와 후학들이 격려를 보내고 도움을 주었다. 특히 서울대 송기호 교수는 발해관계 서술에 자료와 조언을 주었으며, 배우성 박사는 편집에 따르는 갖가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원고의 교정은 강석화(규장각 학예사, 박사), 고경석(강사),김문식 (규장각 학예사,박사),나희라(많사》,도면회(강사),박재우(강사), 박태균(강사),신병주(규장각 조교),연갑수(이하 강사), 윤경진, 윤선태, 윤해동, 최연식, 등 여러분이 분담해서 맡아 주었다. 그러나 이 책의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또한 이 책을 아담하게 꾸며준 것은 경세원의 김영준 사장님 및 편집부 고현석 부장님, 편집부원 여러분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이 자리를 빌어 평소 필자를 격려해 주고 도와 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뜻을 전한다


1997년 1월 

신림동 서재에서 

저자 씀

누구나 ‘자유’를 말하지만, 누구의 ‘자유’가 우선인가
“노예 해방” vs “남부 자치권 보장” 1860년 당시 美대통령 후보였던 링컨과 브레켄리지의 ‘자유’ 대립

< 조선일보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철학 전문위원,  2022.12.03  >

 

 



자유주의

에드먼드 포셋 지음 |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828쪽 | 4만5000원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주의자일까? 지난 5월 10일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외쳤던 걸 보면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윤석열은 자유주의자다”라는 문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적 역량이 부족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자유주의(liberalism)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언어적, 개념적 혼란 때문이다.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보자. 지난 대선을 앞두고 “표현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던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그는 민주당 당대표가 된 후 지난 23일 윤석열 정부를 향해 “언론을 탄압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헌정 질서 파괴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재명은 자유주의자일까? 자유주의자라면 어떤 자유주의자일까?

영국의 시사·경제 잡지 이코노미스트에서 30년 넘게 활약한 정치 전문 기자 에드먼드 포셋의 이 책에 따르면,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자유주의는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이 자유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비자유주의자들 역시 자유를 옹호한다고 이야기한다.

미국 워싱턴 D.C.의 링컨 동상. 저자는“링컨에게‘리버티(liberty)’란 노예 해방이었지만 그와 대선에서 겨룬 남부 후보 존 브레켄리지에겐 주(州) 자치권을 뜻했다”고 말한다. 


1860년, 남북전쟁을 앞두고 있던 미국. 혼란 속에 치러진 대선에 나온 네 명의 후보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리버티(liberty)’와 ‘프리덤(freedom)’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같은 단어를 제각각의 용법으로 쓰고 있었다는 것.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리버티’란 노예 해방을 뜻했지만, 남부의 후보 존 브레켄리지에게 ‘리버티’란 각 주가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할 수 있게 하는 권리를 뜻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유’를 둘러싼 견해 차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허버트 후버는 ‘질서 잡힌 리버티’를,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네 가지 프리덤’을, 마틴 루서 킹은 인종차별에서 ‘마침내 자유로운’ 국가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유’라는 단어나 개념에 집착하는 식으로는 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보다는 역사 속에서 활약한 수많은 자유주의자 정치인, 사상가, 문인, 언론인들의 생각과 행동, 판단과 실수 등을 구체적으로 짚어보는 편이 효과적이다. 마치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보통법을 알기 위해서는 법의 조문이 아니라 판례를 읽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자들의 생각과 판단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 책에 ‘어느 사상의 일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포셋은 자유주의를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치적 ‘관행’으로 이해한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으로 인해 정치 질서가 뒤집혔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는 구체제 질서를 뿌리째 흔들기 시작했다. 자유주의는 그런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처음에는 전제군주의 자의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에 맞섰지만, 나중에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로 분출되는 대중의 진보적 요구마저 포용하는 유연성을 과시하며, 21세기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통사적인 관점으로 조망해보면 자유주의’들’이 지닌 공통점이 드러난다. 

첫째, 사회 내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둘째, 권력을 불신하며 삼권분립 등 견제 장치를 마련하고자 한다. 

셋째,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지향을 놓지 않는다. 

넷째, 참정권과 같은 모든 이들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존중한다.

스스로를 ‘자유주의 좌파’라 소개하는 포셋은 특히 넷째 요소를 강조한다. 모든 이를 향한 시민적 존중 덕분에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관행으로 진화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목표와 이상이 (...)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서구 사회 네 곳인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에 잘 정착해 있는, 자유주의가 남긴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정치 관행이다. 그러니 자유주의자라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포셋은 주장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역사 교과서에서 빼야 한다고 논쟁하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원제 Liberalism: The Life of an Idea.

일본의 굴레 (Japan and the Shackles of the Past)

     -   헤이안시대에서아베정권까지, 타인의눈으로안에서통찰해낸일본의빛과그늘  


태가트 머피R 지음 | 윤영수 , 박경환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02월 15일 출간

 

 

 


 1. 소개

 


일본이라는 복잡한 나라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통찰력
“지난 20년간 외국인 저자가 일본에 대해 쓴 가장 중요한 책!”

 


오늘날 일본만큼 우리 국민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2019년의 “노 재팬” 이후 어느 정도 격앙된 감정은 가라앉았다 해도 그 어느 때보다 일본에 대한 비호감도가 올라가 있는 지금이다. 당분간 이 분위기는 나아지리란 보장이 없다. 최악이었던 아베 내각이 물러났다지만 그 연장선에서 스가 내각이 들어서 있고,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우익 분위기, 과거사 부정, 국제무대에서의 한국에 대한 공격, 은근한 무시 등이 적대적 감정의 순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전혀 전향적이지 않다. 일본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흥미 위주의 문화적 접근 외에 자신 있게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양국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진지하게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피상적·적대적으로 상대방을 손가락질하는 상태에 멈춰 있다. 그런 상황에서 출판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그 적대감정을 부추겨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곪아 있는 상태를 외면한 채 문화적·실용적 교류에만 충실할 것인가.  이번에 출간된 『일본의 굴레』에는 이도저도 못 하는 답답한 상황을 풀어보고자 하는 복잡한 심리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여기 태가트 머피라는 미국인이 쓴 『일본의 굴레』라는 두툼한 인문서가 있다. 부제가 독특하다.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이란 말은 이 책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이 책의 저자는 국제정치경제 전문가인 미국인으로 열다섯 살에 처음 일본 땅에 발을 내디딘 이후로 40년 이상 일본에서 생활해온 일본통이다. 그는 서양인으로서 일본의 낯설고 이질적이며 표면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모습에 흠뻑 빠졌다가 이내 거리두기를 하면서 내부자이자 동시에 외부자로서 이 사회의 모순적인 측면들을 하나둘씩 파악해간다. 

 

그가 보기에 일본 사람들은 이상했다. 굴욕적일 만큼 친절한 서비스에, 뭔가 불평할 만한 일이 생겨도 침묵으로 일관할 때가 많았고, 권력에 도전하는 일은 좀체 하지 않는 체념적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였다. 다른 한편 그들의 섹스 산업은 서양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꽃을 피웠다. 또 일본인들은 작은 일에서 쾌락을 찾는다. 일본인들의 가장 독특한 면모는 모순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신이 일본을 좋아하면 할수록 그들의 삶에는 어떤 비극적 요소가 덧입혀져 있음을 깨닫는다. 일본 근대사의 대부분은 비극인데, 이 비극은 내외부적 요인이 결합해 일어났다기보단 일본인들 내부의 ‘무언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이 책을 통해 통찰해낸다.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이 책에는 태가트 씨가 평생 일본에서 살며 일본에 대해 보고 배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나라와 교토의 설립부터 시작해서, 전국시대의 혼란, 에도 시대 사회의 얼개, 쇄국 정책과 메이지 유신, 제2차 세계대전의 광기, 전후의 경제 기적과 샐러리맨 문화, 1980년대 버블의 형성과 붕괴, 최근의 아베 정권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경제와 정치와 문화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일본 사회에 대한 저자의 전방위적인 통찰을 보여줍니다.”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며 오래 생활하고 있는 역자들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이보다 좋은 책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책을 번역했다. 역사의 긴 흐름 위에서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를 하나로 꿰어서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고 종합적인 교양과 통찰력을 제시한 책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저자소개

 


저자 : 태가트 머피R


쓰쿠바대학 도쿄캠퍼스에서 국제 비즈니스 MBA 프로그램의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임했고, 퇴직 후에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 일본에 관해 저술한 책들로 여러 상을 받았고 『뉴리퍼블릭』 『내셔널인터레스트』 『뉴레프트리뷰』 등에 기고하고 있다. 교수가 되기 전에는 투자 은행가, 브루킹스 연구소 객원 연구원이었던 경력이 있고, 『아시아태평양 저널: 일본 포커스』의 코디네이터이기도 하다.  
(역자 : 윤영수, 박경환)

 

 


목차
추천 서문
들어가는 말
서문

1부 굴레의 기원

1장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천황 제도 | 후지와라 가문과 헤이안쿄의 설립 | 헤이안 시대의 유산 | 여성에 의해 쓰인 문학 |『 마쿠라노소시』와『 겐지 이야기』| 헤이안 질서의 붕괴와 봉건주의의 등장 | 쇼군 | 몽골의 침략, 가마쿠라의 멸망, 아시카가 막부 | 일본의 ‘봉건주의’ | 봉건시대의 문화와 종교 | 유럽인의 도래 | 일본의 재통일

2장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의 탄생
도쿠가와 시대의 쇄국 | 질서와 안정에 대한 도쿠가와 막부의 집착 | 경제와 사회의 변화 | 대중문화 | 47명의 로닌 이야기 | 페리 제독의 ‘흑선’과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 | 1868년의 ‘혁명’? | 막부의 종말

3장 메이지 유신에서 미군정기까지
이와사키 야타로와 근대 일본 산업 조직의 탄생 | 자본의 축적과 입헌 정부라는 겉모습 | 1895년의 청일전쟁 | 1904~1905년의 러일전쟁 | 메이지 시절에 뿌리내린 근대 일본의 비극 |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메이지의 유산 |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정치적 통제를 뛰어넘은 관료주의 | 전쟁의 재앙 | 루거우차오 사건과 노몬한 전투 | 진주만, 항복, 전쟁의 유산

4장 경제 기적
전후 10년간의 이례적인 상황 | 고도성장의 정치적·문화적 기반

5장 고도성장의 제도적 기틀
일본의 기업들 | 산업협회들과 경쟁의 통제 | 고용 관행 | 교육 제도 | 금융 시스템 | 관료 제도 | ‘현실의 관리’

6장 성장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
성장의 대가 | 야구와 샐러리맨 문화의 등장 | 고도성장기 일본의 여성 | 마쓰다 세이코 | 고도성장의 제도와 글로벌 경제 프레임워크

2부 오늘의 일본을 구속하고 있는 어제의 굴레

7장 경제와 금융
대차대조표 불황 | 일본의 차이 | 공황의 회피: 일본 금융기관의 구제 | 잘못된 전제, 그리고 활짝 열린 재정 적자의 문 | 아시아 금융 위기의 단초 | 일본 정부의 재정 지출

8장 비즈니스
서비스 분야 | 바뀌어가는 고용 관행 | 세계화의 어려움 | 글로벌 브랜드와 해외 직접 투자 | 매몰 비용의 포기 | 한국으로부터의 도전 | 일본 비즈니스의 미래와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

9장 사회문화적 변화
세계로 뻗어나간 일본 문화 | 갸루 | 오바타리안, 소다이고미, 황혼 이혼 | 초식남 | 일본의 남성성 | 변화하는 일본 남성 집단 | 계급의 부활 | 일본 지도층의 쇠퇴

10장 정치
1955년 체제 | 다나카 가쿠에이 | ‘닉슨 쇼크’와 다나카의 총리 시절 | 록히드 스캔들 | 야미쇼군 다나카 | 측근들: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 | 오자와 이치로 | 정치 질서의 수호자들 | 1994년의 선거제도 개혁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야스쿠니 신사와 고이즈미 정권의 외교관계 | 고이즈미 이후의 자민당

11장 일본과 세계
‘신일본통’ | 오키나와와 후텐마 해병 기지 | 하토야마 정권의 붕괴 | ‘영향력의 대리인’ | 3·11과 간 나오토 정권의 운명 | 노다 정권의 자멸 | 센카쿠열도와 일본의 영토 분쟁 | 아베 신조의 귀환 | 경제 회복? | TPP, 특정비밀보호법, 아베 정권의 우선순위 | 중국과의 관계 정립 | 지속 가능할 수 없는 미일 ‘동맹’ | 다시 아시아의 일원으로 | 아베의 과욕과 미래

부록 1: 메이지의 지도자들
부록 2: 전후 일본의 유력한 정치가·관료

 


3. 출판사 서평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생각을 역사 및 문화와 결합

 


옥스퍼드대학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을 때 태가트 머피 교수는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생각을 역사 및 문화와 결합시켜 다른 종류의 글쓰기를 통해서는 불가능한 작업을 해보리라” 결심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지금의 세계 금융시장의 틀을 형성하는 데 일본의 여신(與信) 창조가 수행해온 중심적인 역할 같은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슈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서는 일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저자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일본 경험의 총합을 다루지 않고서는 일본 현실의 그 어느 측면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달리 말해, 일본 은행의 통화 정책, 일본 기업의 인사 관행, 도쿄의 기묘한 스트리트 패션, 일본 정치의 끊임없는 의자 뺏기 놀이, 수 세기에 걸친 일본의 쇄국, 이런 문제들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저자는 “내가 열다섯 살 때 낡고 북적이는 하네다 공항에 내려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회색의 약동하는 도시의 풍경을 봤을 때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주제들을 정리하고, 내 평생의 사유에 질서를 부여할 기회를 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라고 밝힌다.


『일본의 굴레』는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를 모두 다루고 있다. 책 서문에서 말했듯이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 갖고 있는 머피 교수의 생각을 역사 및 문화에 대한 그의 생각과 결합시킨 것이다. 외부자적인 시각과 내부자적인 이해를 겸비한 저자가 제공하는 다면적인 일본 사회 분석은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통찰을 제공한다.

 


< 책임감으로 가득한 나라, 무책임의 극치를 달리는 나라 > 


일본인 대부분은 본인들의 책임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서양에서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잘해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일본에서는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도(그리고 모두 그렇다는 사실을 안다) 잘해내야 한다. 일본에서 마주치는 예의 바름과 서비스의 수준은 아주 하찮거나 사실은 지저분한 일에서조차 다른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높아서, 가끔 이 세상이 나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환상에 빠져들게 할 정도다. 조금만 무언가를 하면 ‘오쓰카레사마데시타!お疲れ樣でした!’(과장된 감사의 톤으로 당신의 커다란 희생에 대해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라는 외침이 되돌아온다. 누군가에게 차 한 잔과 디저트를 대접하면 진수성찬을 대접했다는 감사를 받는다(고치소사마데시타御馳走さまでした). 반대로, 성대한 식사 자리에 초대받아 갔는데 너무 차린 게 없어서 부끄럽다는 인사를 받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형식이다. 하지만 이것이 형식이고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형식에 자발적인 감정이 가득한 것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모두가 그런 기대에 부응해 행동하고 있고 그게 또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가장 공허하고 형식적인 행위들이 오히려 의미를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런 형식성은 대인관계에도 적용된다. 상대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당신의 노력에 걸맞은 금전적인 보상을 할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는 까다롭고 형편없는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지루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절친한 벗이나 열정적인 동료를 대하듯 한다. 하지만 타인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최고의 동료를 가진 것처럼, 누가 됐든 지금 상대하는 고객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양 행동하다보면, 애정이나 존경 그리고 주어진 일을 최대한으로 잘해내려는 의지 같은 감정을 실제로 내면화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주변은 내가 깊이 아끼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고, 또 그들이 나를 아껴주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한번 약속한 일은 꼭 할 것이라고, 그것도 잘해낼 것이라고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사회에는 어마어마한 장점이 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한편,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모순을 애써 부정하려는 이러한 태도에는   치명적인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점은 흔히 간과된다. 그런 태도가 일본을 매력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드는 원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일본 근대사의 비극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대중을 착취하기 좋은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숙함이라 여기고, 어쩌면 가치 없는 목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마음가짐을 대중이 내면화하는 것만의 얘기가 아니다. 일본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런 유동적 가치관의 영향이 사회 지도층 레벨로 가면, 권력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과 그 동기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이중적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

 

 


< 일본인들의 피해자 의식과 체념의 사고 습관 >

 


일본은 더 이상 자국과 이웃 나라들을 불바다로 만들 만큼 위협이 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딱히 원인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이유로 이런저런 일이 발생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의식, 그 안에서 개인은 자기 본분을 다하며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식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 일본인들이 이런 의식을 부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피해자 의식(히가이샤 이시키被害者意識)이다.


피해자 의식이 현실 세계에서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은 여러 가지로, 다음과 같은 예들이 있다. 가령 일본은 무시무시한 재정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한때 전 국민의 경제적 안정을 거의 달성토록 했던 사회적 규약을 내다 버렸다. 또 세금과 물가를 올려서 가계의 구매력을 망가뜨리고, 국민연금이 지켜야 할 약속을 파기하기도 했다. 과거 기업들이 직원들 삶의 질을 보장하던 세계는 안정과 미래라고는 없는 저소득 계약직의 세계로 대체되었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자산을 망가뜨리고 직원들을 해고하는 월가의 은행가들처럼 자신들이 한 일을 생각하며 기분 좋아 낄낄거리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들도 선택의 여지 없이 희생의 대열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생을 통해 본인들이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는 경우에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백만의 일본 국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고는 “시카타가 나이 仕方がない (할 수 없군)”라고 한마디 하고는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이 있다는 사실(강한 노조, 노동자를 대변하는 건강한 정당, 확실한 사회 안전망, 일본 산업의 부활을 위해 가계의 실질소득을 늘려서 내수를 진작시키는 각종 정책)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고려한다고 해도 성숙하지 못한 포퓰리즘으로 비난받는다. 어찌어찌해서 그런 대안에 시동을 건다 해도, ‘일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받고는,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묵살하도록 발전되어온 시스템에 의해 폄하될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를 거쳐 근현대로 올라오며 이런 시스템의 일부를 살펴보고 있다. 특히 마지막 두 장은 최근 수십 년간 일본을 딜레마로부터 구해낼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세력이, 미국의 직접적인 공모와 개입으로 인해 붕괴되었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국민에게 사람답고 안전한 삶을 제공하는 데 존재 목적이 있는 기업, 은행, 정부, 군대, 경찰과 같은 조직이, 그 조직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는 사람들, 가상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전 국민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시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오염되고 장악되어왔는지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사람들은 조직을 그런 식으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해나가면서도, 실제의 동기는 스스로에게 감추는 묘한 심리 상태를 필요로 하는데 조지 오웰은 이런 관념적 곡예에 ‘이중 사고(doublethink)라는 유명한 이름을 붙였다. 일본의 권력자들은 모순에 대한 관용이 비단 허락되었을 뿐 아니라 필수적이었던 정치적·문화적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 일본 정치 구조의 기원: 메이지 이후 100년이라는 굴레 >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에도 시대가 막부의 강력한 권위를 기반으로 수백 년간 평화를 유지해서 상상 이상의 눈부신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뤘다는 부분은 되새겨볼 만하다. 

 

부의 축적은 맨 아래 계층인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나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신분제도가 집요하리만큼 철저하게 유지되면서 생겨난 거대한 모순의 에너지는 오늘날까지도 일본 사회의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려던 불과 한 세대의 압축적인 노력이 어떻게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바꿔놓았고 어떻게 여전히 일본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굴레로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분석은 뛰어나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천황제도와 의회제도라는 두 가지 ‘허구’를 앞에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뒤에서 유신의 주역들이 과두정치를 펼쳤다는 지적, 그들이 나이가 들어 죽으면서 남긴 커다란 권력의 공백으로 인해 최종 책임이 없는 관료에게 휘둘리는 현재 일본 정치의 구조가 탄생했으며, 일본의 조직에서 근본적인 개혁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최종 책임의 소재가 없는 문화 때문이라는 분석도 통찰력 있다.


저자는 또한 국제정치경제학 연구자답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야기에도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저자는 분명 기존 미일 관계의 수호를 위해 행동하는 미국의 ‘신일본통’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일본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칼을 들이대는 것은 물론, 현재 일본의 문제들에 원죄를 갖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한다. 

 

일본의 과거사 청산이 그토록 어려운 것에는, 미군정이 전후 처리과정에서 일본인들이 스스로 과오를 돌아볼 기회를 원천봉쇄해버린 데 큰 책임이 있다는 지적은 미국인이라면 아프게 들어야 할 내용이다. 

 

1990년대부터 미일 관계의 뜨거운 감자가 돼버린 오키나와의 후텐마 해군 기지 문제도 미국 내 관료 조직 간의 경쟁과 이기주의로 인해 불필요하게 장기화되고 복잡해졌다는 지적 또한 그렇다.


환율 정책이나 버블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히 깊이 들어가 일본 경제가 그려온 극적인 궤적이 머릿속에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일본이 패전 이후 미국에 국방과 외교를 맡긴 대신 미국을 지렛대 삼아 경제를 일으키고, 나중에는 거꾸로 미국이 일본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달러 중심의 세계 경제를 유지한다는 얘기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게 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수많은 면모가 전후 일본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모델이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니 비슷할 수밖에 없다 해도, 주어만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문장이 가득하다. 그렇게 일본을 따라가던 한국은 20세기 말을 분기로 점점 궤적을 달리하고 있지만, 일본이 고민하고 있는 만성적 저성장이나 언론의 독립성, 사법 개혁, 저출산 고령화 사회 등이 우리에게도 숙제인 까닭은 그래서이지 않을까 한다.

 

 

 

 

4. 책 내용

 

(1) 이중적 통치체제

 

 - 전 시대의 일본 역사 기간 동안 통치의 실직적인 주체와 표면적인 주체가 지속적으로 분리되어 존속해왔다.

 

   <전근대 : 막부 - 천황  > 

 

    - 8세기말 ~ 12세기말   후지와라 카마쿠라 막부 (헤이안시대)

    - 1392년                        아시카가막부 (무로마치막부)

 

    - 1603년                        도쿠가와막부

                    * 에도 시대에 막부의 강력한 권위를 기반으로 수백 년간 평화를 유지해서 상상 이상의 눈부신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뤘다.   

                    * 부의 축적은 맨 아래 계층인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나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신분제도가 집요하리만큼

                       철저하게 유지되면서 생겨난 거대한 모순의 에너지는 계속된다.

 

  < 근대 : 천황제 -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추밀원 -  삿초파벌) >

   - 1868년 메이지유신 

   - 제2차세계대전

   . 전쟁까지 일본의 지배체제의 연속성이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 메이지 지도자 사후, 국가의사결정 체제의 미흡으로 위협과 암살의 정치 횡행

   . 결국 국가주의와 인종 혐오를 극적으로 유도 : 이들의 종교적인 열정과 순수함은 세속과 타협하는 집권층과 대비됨

   . 1906년 설립된 관동군은 1920년대에 이르러 어떤 감시도 없이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형식적으로 천황 보고 체제)

 

 <종전 후 : 천황제도 - 의회 - 관료제도 >

  - 독일과는 대조적으로 종전후 일본은 통치의 정통성이 어디서 오는지의 문제에 대해 명실상부한 민주적 통치제도를

    완비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 미국의 중국 외교 및 반공 정책 요구에 굴복하여 의존적인 국내 정치 실행, 관료의 막강한 권한 행사, 세습 의원 등

 

 * 메이지 유신이 천황제도와 의회제도라는 두 가지 ‘허구’를 앞에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뒤에서 유신의 주역들이 과두

   정치를 펼쳤다는 지적, 그들이 나이가 들어 죽으면서 남긴 커다란 권력의 공백으로 인해 최종 책임이 없는 관료에게

   휘둘리는 현재 일본 정치의 구조가 탄생했으며, 일본의 조직에서 근본적인 개혁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최종

   책임의 소재가 없는 문화 때문이라는 분석도 통찰력 있다.

 

 - 따라서 문제가 생겨 실패할 경우 명시적으로 책임지는 주체가 없는 것이 일본 정치의 특성이었다. 

 

 

(2) 책속에서

 

먼저 일본의 이상한 정치체제에 관한 저자의 의견을 들어보자. 일본은 사실상 자민당 정권이 60년 이상 장기집권하고 있는 나라다. 선거라는 형식은 있지만 자민당 정권은 계속 집권한다. 이 이상한 정치체제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전후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부흥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군대에 보급하기 위해 무기를 제외한 모든 물자를 끝도 없이 일본에 발주하고 달러로 대금을 지급했다. 일본인들은 이 전쟁 특수를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9월 미국 등과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을 맺어 법적인 독립을 얻었다. 이 조약에는 명시되지 않은 두 가지 조건이 있었으니, 하나는 일본이 미국의 정책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을 것, 또 하나는 일본에서 좌익이 권력에 다가서지 못하도록 확실히 보장할 것이었다.(196~197쪽) 자민당이 1955년 각 세력을 규합해 창당하면서 ‘1955년 체제’라는 전후의 정치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이 체제는 좌파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길을 실질적으로 원천봉쇄했다.(205쪽)

더 과거로 가보자. 오늘 일본 정치의 뼈대는 메이지 유신에서 비롯되었다. 1868년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막부를 전복시키는 과정에서 일본의 여러 핵심적인 통치 제도를 없애버렸다. 이들은 번 제도를 폐지했고, 번 사이의 경계선을 폐지하고 새로운 경계선을 지정했으며, 번의 수도들이 지역에서 끼치던 막대한 영향력을 박탈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다이묘의 재산을 몰수하고, 신분 구분을 폐지했으며, 사무라이들의 연봉을 일시불로 정산함으로써 사무라이의 국가에 대한 청구권을 없애버렸다. 이들은 또 서양의 제도들을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른 속도로 들여왔다. 의무교육, 징병제, 주식회사, 유한책임 은행, 의회, 법원, 귀금속 담보 통화, 최신 과학기술에다 심지어는 서양식 옷과 사교댄스까지 모든 분야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혁명처럼 보이는 이 조치들은 아쉽게도 불완전한 혁명 또는 개혁이었다. 메이지 유신은 사실상 반혁명에 가깝다. 그것은 지배 계층 내부에서 벌어진, 나라의 운명을 건 절박한 권력 투쟁 정도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권력투쟁은 향후 한 세기 반에 걸쳐 몇 차례 더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지배층 내부의 한 세력이 다른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했다. 즉, 지배층이 국가 운영 능력 자체를 상실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116쪽) 

그래서 지금도 자민당 총리가 정치 스캔들에 휩싸이거나 지지도가 폭락하면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통해 새로운 자민당 총리로 교체한다. 총리는 바뀌나 자민당 집권은 계속 이어진다.

메이지 유신을 통한 새 집권 세력은 한 세대 만에 일본을 서구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이기기까지 하는 강대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동시에 천황이 직접 통치한다는 환상을 이용해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두 집권층이 통치하는 정부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반세기 후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재난을 불러오게 된다.(124쪽) 지금도 일본의 정치는 옛 비극의 연장선을 부드럽고 약하게 정련해서 운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일본의 정치는 일본을 안정시키는 역할과 동시에 일본의 발목을 꽉 붙잡는 족쇄가 되는 셈이다.

저자는 일본 산업의 특징 중 하나로 산업협회를 들고 있다. 일본에서 기업 간의 모든 경쟁은 통제되었다. 일본 기업은 체면과 고용 안정성에 집착했고 그래서 경쟁에서 지더라도 철수는 물론이고 시장 점유율의 감소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럴 때 산업협회가 나서서 경쟁에서 낙오한 회사들도 고용안정과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었다. 산업협회는 가격과 공급망에 관한 비공식적인 합의를 조율하고 감시하는 데 있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일본이 이렇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필수 요소인 ‘창조적 파괴’의 가능성을 억제했기 때문에 소비자 가전제품 등에서 1990년 이후 애플이나 삼성과 같은 해외의 발 빠른 경쟁자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220쪽)

전후 일본 경제의 도약에서 관료제도도 무척 중요하다. 일본 경제 부처들은 주요 기업들은 물론이고 정부 조직 바깥에 있는 경단련이나 경제 동우회와 같은 단체들과의 협력을 통해 일을 한다. 일본의 관료 엘리트 집단은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해 특정 산업을 목표로 삼은 뒤 거기서 가장 뛰어난 기업을 골라내 해외 시장을 공략할 수 있도록 자원을 몰아주었다. 그런 산업은 일본이 반드시 갖춰야 할 전방산업인 철강이나 기계 공구 산업, 초기 설비 투자가 많이 들어 진입 장벽이 높은 토목용 장비, 복합 소비자 가전이거나 두 조건을 모두 갖춘 반도체와 같은 산업이었다. 섬유, 조선, 철강, 라디오, 컬러 TV, 토목 장비, 영화, 기계 공구, 카메라, 시계, 팩스 기계, 프린터, 복사기 등에서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일본은 1968년 경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문제는 일본이 다른 선진국들과 동등한 위치에 오른 뒤 이 시스템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산업에 진출해야 할지가 더 이상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일본식 모델을 따라하게 된다. 일본의 경제 성장 방식을 가장 비슷하게 따라한 나라는 아마도 한국일 것이다.(232~235쪽)

저자는 일본을 이해할 때 ‘현실의 관리’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의 관리’란 여러 제도와 관행이 합쳐져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고도성장기에는 회사 직원은 근태 보고 서류에는 8시간으로 처리하지만 하루 근무 시간이 12시간쯤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의 통상 교섭 담당자들은 줄곧 일본의 낮은 관세율을 가리키며 일본 시장이 활짝 열려 있음을 강조하지만, 회사들은 수입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만약 그 사실을 ‘잊어버렸으면’ 관련 산업의 협회들이 상기시켜주곤한다.

얼핏 보면 일본의 의회에서는 입법 토론을 거쳐 공적인 정책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토론에서 한쪽의 정치인이 하는 질문도, 다른 한쪽이 읽는 대답도 모두 관료들이 미리 작성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관이 의회의 심의회에 빠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소니와 교세라 같은 이단아들의 사례는 이들 규칙에서 벗어나는 예외일 뿐이었다. 이들은 해외 시장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서야 일본의 경제 기득권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이러한 예외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어갔다. 애플, 시스코,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구글, 페이스북처럼 IT혁명의 조류를 타고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일본 기업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236~239쪽)

그렇지만 일본의 소재 부품 기업들의 경쟁력은 죽지 않았다. 예컨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정밀화학 분야에서 일본 기업들의 전 세계 점유율을 합하면 70퍼센트가 넘고 탄소섬유는 65퍼센트가 넘는다. 애플의 아이폰을 뜯어보면 일본 기업의 이름이 들어간 부품은 많지 않다. 아이폰은 미국에서 설계하고 디자인해서 중국에서 생산되고 한국과 대만의 부품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이 중의 30퍼센트가 넘는 부가가치는 일본 기업이 창출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부품들을 만드는 핵심 소재를 일본 기업이 만들고, 이런 부품들을 생산하는 공장의 설비를 일본 기업이 공급하기 때문이다.(328~330쪽) 미국이 우주로 발사하는 로켓과 보잉사의 비행기도 비슷한 사정이다. 일본 기업이 없다면 로켓과 보잉 비행기는 만들어지지 못한다고 말들 한다.
 
그렇지만 일본 비즈니스 세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경영자들은 세계화의 어려움, 실패(매몰 비용을 포기하는 것)에 대처하는 적절한 경제적 정치적 메커니즘의 부재가 일본의 비즈니스와 경제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아마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지금 해외에서 수많은 유명 일본 기업이 시장지배력과 명성을 잃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일본은 꽉 막힌 관료주의와 기업 내의 허례의식으로 인해 의사결정 속도가 여전히 거북이처럼 느리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을 일본의 경영자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이론적으로는 네마와시(가령 회의 준비를 위한 회의를 하기 위한 회의)나 품의(1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에게 결재를 받아 기록을 남기는 것)절차를 대폭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할 때에는 그들 자신이 자라온 그 시스템 안에 갇히고 만다.(358쪽)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가난한 친척처럼 멸시하던 한국에게 뒤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한국의 기업들이 일본의 비즈니스를 크게 위협하는 세력으로 떠오른 이유로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한국에는 국제화된 엘리트가 더 많다. 해외에서의 거주 경험과 영어 구사 능력은 한국의 엘리트 계급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에 가깝다. 둘째 한국의 경제 정치 기관들은 훨씬 더 명확한 권력 구조와 뚜렷한 책임 소재를 갖고 있어서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셋째 한국은 북한의 위협 등으로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나라라는 점이다. 한국은 시간을 낭비하거나 추상적인 고민을 하거나 우유부단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360~361쪽)


다시 한번 일본 체제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일본에서 정치권력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누가 대개혁을 추진해나가야 하는 것일까?

일본에서 정치권력의 실질적인 원천이 무엇인지 모호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사실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있고 일본의 근본적인 제도 개혁은 가로막히고 있다. 집권 계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전복시킬 수 있겠는가.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사쓰마-조슈 동맹은 진정한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들 세력은 죽으면서 권력의 커다란 공백을 남겼고, 사실상 자신들이 이룬 모든 것이 파괴되도록 스스로 허용한 셈이 되었다. 일본이 전혀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 또한 공개적인 정치 절차가 없었던 데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정책의 대부분은 그 입안의 구심점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설사 정책을 끌고 가는 일관된 동력이 있다고 해도 이는 정부의 공식 기관이 주도해가는 것이 아니다. 해외로부터의 압력과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한 국내 각종 이익집단의 요구에 좌우된다. 일본이 필요로 했던 정치 시스템은 권력에 도전하는 잠재 세력들을 필요에 따라 흡수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는 정치였다. 막강한 정부 부처들 사이에서 또는 그 부처들과 다른 세력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야 하는 정치였다. 그리고 해외 국가들에게, 일본이 그들에게 친숙한 정당과 선거와 총리와 법원과 같은 제도를 통해 운영되는 나라라고 안심시켜줄 수 있는 정치였다. 이런 정치 시스템이 지금껏 유지되는 ‘1955년 체제’인 것이다.(423~425쪽)

책에 다나카 수상이 1960년대 말 일본의 무역 흑자를 관리하는 방식이 나온다. 다나카는 뛰어난 정치력과 협상력을 지녔다. 다나카가 통상산업성 장관일 때 일본은 대미 수출이 너무 늘어나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규제를 하고, 그 대신 미국은 관세를 내려주는 식으로 서로 체면을 세워주며 한 발씩 양보했다. 그리고 엔화의 가치가 급격히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쓸데없는 공공사업에 의도적으로 돈을 낭비했다고 한다.(442~443쪽)

저자는 일본의 ‘관료’를 비판한다. 이건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한국도 비슷한 사정이다. 일본의 정치권은 스스로를 정치 ‘위에 군림한다’고 믿는 관료들을 정치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 고도로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전문적이고 풍부한 지식을 갖춘 관료들 없이 나라를 다스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점점 관료들이 오만해지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간섭하는’ 모든 유의 시도를 경멸하게 되면서 결국 사회 전체의 발목을 잡는다.(527쪽)

저자는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을 살피면서 일본은 중국에서 통일된 독립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번은 이쪽 군벌, 또 한 번은 저쪽 군벌을 지원하는 식의 전략을 폈으나 결국은 국민당 군과의 처절한 장기 전쟁으로 빠져들어 갔다고 지적한다. 1944년 일본이 벌였던 이치고 작전으로 국민당 군은 패배하고, 통일 중국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장제스의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 인한 권력의 빈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공산당으로, 일본의 무분별함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통일된 레닌주의 강대국의 등장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현대에 들어와서 중국과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발적으로 미국의 말에 따르는 형태로 천천히 바뀌어왔다. 일본은 중국과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저자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중국과 어떤 식으로든 합의를 이루어 공존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드는 것이다.

저자는 길게 내다보면 이것이 더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왜냐? 저자는 미국은 근본적으로 일본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엘리트 지도층은 일본을 미국의 군사적 자산, 미국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미국의 꿈이란 무엇인가? 미국이 역사적으로 북미 대륙에서 아무런 잠재적 위협도 없고 아무런 잠재적 도전도 받지 않던 상황을 어떻게든 전 세계로 확대하고 싶은 것이다. 망상에 빠진 미국의 군사 전략가들은 이런 상태를 ‘전방위 지배’라고 부른다.(578~579쪽)

미국은 어쩌다 이런 망상에 빠지게 되었을까?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 전쟁을 벌이고 중국을 포위한다는 무모한 발상도 이런 망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점에서 외국에서 미국 군사력을 철수한다는 트럼프의 구상은 일면 옳기도 하다. 트럼프는 외국에서 미국 군사력을 유지하는 돈으로 미국의 중하층을 비롯한 국민에게 투자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중하층이 트럼프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동력이 생긴 것이다.

저자 역시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유지하는 데 드는 진짜 비용은 미국의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이 과도하게 치러야 하는 희생에 있다고 말한다.(582쪽) 달러 중심의 세계 통화질서와 미 제국의 자금 조달이라는 메커니즘은 달러 가치에 장기적인 상승 압력을 가하게 되고, 미국 내의 제조 시설과 서비스 업종을 아시아의 파트너 국가로 꾸준히 이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현재 미국의 월가와 실리콘 밸리가 빅테크 기업의 설계와 개발을 결정하지만 그 제품을 실제로 생산하고 조립하는 작업은 대부분 해외에서 하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나는 불평등이 정치적 갈등과 계급적 갈등의 직접적 원인이고, 그것이 미 제국 시스템의 원활한 운영을 위협한다.

 

미국 국민은 미 제국주의 엘리트층이 주장하는 전쟁들–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동중국해 어디건 상관없다–에 점점 더 회의적이 되어간다. 중국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저자는 어느 날 미일동맹은 무너지고 일본은 외롭게 홀로 남겨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583쪽)

저자는 긴 논의를 마치고 일본을 위한 충고를 한다. 역사의 추가 다시 동아시아로 기울고 있으며 일본이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할 수도 있는데 걸림돌이 있다. 바로 일본의 과거사 문제다. 일본의 옹호자들은 다른 나라들도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질렀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본이 어떤 사과의 말과 행동을 해도 주변국들은 절대 만족하지 않고 과거사를 채찍 삼아 일본을 계속 때리러들 것이라고도 얘기한다

저자는 이 또한 맞는 말이지만 핵심은 일본이 1930년대와 40년대에 일어났던 침략전쟁과 같은 과거사를 직면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이나 중국을 위해서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일본을 위해서다.

 

일본의 과거에 대한 답은 일본인들 스스로가 구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본이, 일본의 독립성을 파괴하며 해외에서 일본이라는 단어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광기의 대명사로 만든 사람들의 손에 장악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말이다.(586쪽) 

다산 등 실학자들 천주교로 이끈 서양윤리서 칠극

 

2021-06-21 한겨레신문 조현 기자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읽었던 스페인예수회신부의 서양윤리교양서 칠극을 번역해 펴낸 한양대 정민 교수

 

 
조선시대 빼어난 유학자들이 어떻게 나라에서 금기시했던 서학(천주학)에 마음이 기울었을까. 실학자와 서학의 만남을 탐구해온 정민(60)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그런 질문의 끝에서 <칠극>(김영사 펴냄)이란 고서를 번역해냈다. 

 

<칠극>은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데 판토하(1571~1618·방적아)가 쓴 ‘마음 수양서’다.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한 탐구 정신으로 실학자와 문장가들의 흔적을 누비고 고서를 뒤져 70여권의 저서를 써낸 정 교수를 지난 11일 서울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스페인 선교사 데 판토하 쓴 ‘마음 수양서’
유교 사단칠정에 빗댄 ‘7가지 죄’ 극복법
마테오 리치 후계자…선교전략용 저술
“중국인들 천주교 거부감에 완충장치로”
조선 들여와 사도세자도 읽어 ‘서학 붐’
“소외된 남인들 ‘변혁의 희망’ 탈출구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이것이 천주교다’라고 문답식으로 알려주는 가톨릭교리서라면, <칠극>은 서양인들의 윤리서다. ‘너희들(중국)한테는 희로애락애오욕이란 칠정을 끊는 인의예지라는 사단이 있잖니. 서양에도 교만·질투·탐욕·분노·식탐·음란·나태, 이 7가지 죄를 다스리는 겸손·사랑·관용·인내·절제·정결·근면이란 처방이 있어. 유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지?’라고 종교색을 빼고 들려준 게 <칠극>이다. 이게 중국인들에게 이단신앙(천주교)을 받아들이는 완충장치가 됐다. 서구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토착화하는 데 이정표가 된 책이다.”


<칠극>은 서구문화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도를 높이고 거부감을 없애 천주교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기 위한 선교적 전략에 따라 발간된 책이란 얘기다. <칠극>의 저자 판토하는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 마테오 리치보다 15살 후배로, 중국에는 28년 늦게 왔다. 그는 예수회의 선배인 마테오 리치의 조수로 중국 선교를 시작해 <천주실의>의 후속편을 쓴, 마테오 리치의 후계자 격이다. 그런데 중국 지식인 사회에 천주교를 접목시키기 위해 마테오 리치보다 더 노련한 방법을 썼고, 문장은 오히려 판토하의 글이 뛰어나다는 것이 정 교수의 평이다.


“예수회는 현지 토착문화와 사상을 존중하는 선교 전략을 펴기 위해 초기에 ‘보유론’적 시각을 견지했다. 즉 그리스도교가 유교를 보완해준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성경>이 아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알렉산더, 세네카 등 그리스와 로마 철학자들이나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 베르나르도 등 서양 중세 교부 철학자 등의 숱한 잠언과 일화를 소개하고, 중간중간 중국 경전에서 예시를 끌어와 독서의 친밀도를 높이고, <성경>을 곁들여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는 방법을 썼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칠극>을 보고 ‘아, 이건 서양인들의 극기복례를 말하는 책이다’라고 받아들였다.”

 


<칠극>은 조선으로 건너와 사도세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읽혔고, 실학자들 사이에서 서학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유몽인의 <어유야담>에는 허균이 <칠극>을 처음으로 조선에 들여왔다는 주장이 실려 있고, 사도세자가 읽은 책 목록에도 <칠극>이 포함돼 있다. 

 

남인의 큰스승인 성호 이익은 ‘<칠극>에는 우리 유가에서 미처 펴지 못한 것이 있어, 예로 돌아가는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된다’면서 ‘다만 천주와 귀신에 대한 주장을 섞은 것은 해괴하니, 모래와 자갈을 체질하고 고명한 논리만 가려 뽑는다면 바로 유가의 부류일 뿐이다’라고 평했다. 이를 두고 실학자들은 이익의 진의가 앞줄에 있다는 파와 뒷줄에 있다는 파로 갈려 싸웠다.


“안정복은 이익의 말이 ‘서학을 경계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익의 직계 제자들이 천주학 쪽으로 돌아선 것을 보면 이익의 뜻은 당시 분위기상 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앞줄에 방점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이벽·이가환·정약용의 글에서 <칠극>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정 교수는 “당시 남인 실학자들이 <칠극> 등 서학 책을 읽은 것은, 노론의 전제가 70~80년간 이어지면서 변혁의 희망을 가질 수 없던 남인들이 우리 사회를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통로를 찾는 과정의 하나였다”고 봤다. ‘청나라 수도에 가면 서점이 30~40곳 늘어서 <앵무새 사육법> 같은 실용서까지 진열돼 있고, 서양문물이 들어와 발전해 가는데, 조선에서는 여전히 ‘무찌르자 오랑캐’만 노래하고, ‘사단칠정론’만을 두고 싸우고 있으니, 서양의 앞선 문물로 나라를 발전시켜보고 싶은 열망이 서학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산에 이어 연암 박지원에 꽂혀 지난해 말 <연암독본>(1·2권)을 펴내기도 한 정 교수는 “연암의 <허생전> <양반전> 등을, 매점매석해 떼돈을 벌었다는 식으로만 읽는다면 한심한 수준”이라면서 “북벌을 할 때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배워 변화를 꾀해야 할 ‘북학’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기 위해 시대적 허구와 위선을 통렬하게 깨부순 ‘우상파괴’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기아와 기적의 기원

    (차명수 지음, 해남)

이 책은 정통 국사학계에 던진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지적 도발이다. 서문부터 노골적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주장이 있다면 (우익, 좌익 같은 딱지를 붙이려 하기보다) 신뢰할 수 있는 통계와 현실감 있는 모델을 들고 나와 반박하면 된다.’ 감성적 민족주의 같은 것은 내버리고 오직 ‘팩트’로만 승부하자는 거다.

우선 인구변동과 산업현황 등을 담은 다양한 통계를 인용해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의 경제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18∼19세기 내내 양반과 평민을 막론하고 생활수준이 악화된 조선 말기와 비교하며 ‘후기 조선사회는 오늘날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적었다. 여기에는 국사학계에서 성군으로 떠받드는 영·정조 시대가 포함된다.

저자는 붕당정치 붕괴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적 리더십이 땅에 떨어지고 소유권 보호와 계약 이행 등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유지되지 못한 데서 경제 피폐의 원인을 찾고 있다. 반면 조선총독부가 식민 지배를 위해 구축한 제도나 자유주의 경제정책은 1960, 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의 고도성장 원인을 자본 축적이나 높은 교육수준에서 찾는 기존 시도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기술 발전이나 인적·물적 자본 축적이 빠르게 일어난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고도성장의 비밀은 산업혁명과 인구변천을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시킨 역사의 우연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역사의 우연에 식민지 시대가 포함된다.

 

 

 

 

 

 

(서평 : 김두억 명지대 교수, 나라경제 2015년 1월호)

 

영·정조 시기 농업생산성,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률 얼마나 될까?
근대성장이론을 통해 본 한국 경제의 300년 역사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많은 좌파 경제학자들 은 자신의 전공을 경제사라고 에둘러 표현하곤 했다. 이러한 변장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경제사 연구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가 되면 한국에도 근대경제학이 상당히 확산되지만, 대부분 경제사 연구자들은 근대경제 학을 ‘비역사적’이라고 치부하고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 로 전통적인 주제에 천착했다.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크게 변화한다. 마르크스주의나 역사주의적 관점에서는 전혀 연구되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하지만 경제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현상들을 탐구한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 다. 학자들은 조선시대 양반 지주 가문의 장부 등을 분석해 농업생산성, 지대(地代) 등을 추계함으로써 18, 19세
기 농업생산성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이것은 18세기 영·정조 시기에 농업생산성이 증대되고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움트고 있었다는 기존 인식을 정면으로 뒤집는 결과였다.


조선시대 쌀값, 양반들의 평균수명 통해 장기 경제동향 파악 

 

같은 시기에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은 식민지기 우리 나라의 GDP를 추계하는 작업을 몇 년에 걸쳐 수행했다. 1980년대 말 일본 학자들이 내놓은 추계와 비교할 때 정확도 면에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추계는 식민지 조선 경제에 대해 기존 관점과는 매우 다른 여러 가지 양상들을 보여줬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식민지 조선의 경제 성장률이 대공황 등으로 전 세계 경제가 극심한 침체를 보이고 있던 당시 기준에서 보자면 매우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행려사 망자(行旅死亡者)들의 신장 추이 또는 공장의 노동생산성 변화를 측정한 결과 등으로부터도 확인이 됐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 각 도별 쌀값 동향을 파악한 뒤, 이들 간의 가격수렴 정도를 추정한다거나 족보나 개인 기록 등을 이용해서 조선시 대 양반들의 평균수명, 출산율을 측정하는 작 업, 또 조선 후기 산림이 황폐화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연구 등 우리나라 경제의 장기 동향을 파악하는 데 기초가 되는 다양한 장기시계열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꾸준히 이뤄졌다. 이러한 연구성과들 중 일부는 저명한 국제 학술지에 게재되기도 해 세계경제사 연구에도 기여했다.

 

최근 발간된 차명수 교수의 「기아와 기적의 기원: 한국경제사, 1700-2010」(해남출판사, 2014)는 지난 20 년간 진행된 우리나라 경제사학계의 ‘계량경제사 혁명 (cliometric revolution)’을 종합한 책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한국 경제 통사(通史)들이 역사학적 기반 혹은 마르크스주의 같은 역사주의적 논리 체계를 근거로 쓰였던 것에 비해 이 책은 경제학에 기반 해서 종합을 시도했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으나, 소득·노동·자본·저축 등 이 책의 각 장들은 거시경제학 또는 경제성장론의 기본 얼개에 해당하는 부분 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이 다루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기존 통사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저자는 근대경제성장 이론을 활용해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 간의 관계를 풀어간다. 

 

한국 경제 장기적 변화를 경제학 관점에서 개괄한 통사(通史)


경제학을 기반으로 한 종합이라는 이 책의 시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한국 경제의 장기발전 연구에 존재하는 암묵적 단절의 극복이다. 19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은 경제학에 기반해서 연구가 진행되는 데 비해 해방 전후까지는 역사주의적 틀에 기반해서 연구가 이뤄졌다. 이러한 이분법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방식으로 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둘째는 보편성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근대성장이론에 기초해 경제의 장기변동을 이해하는 문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리 학계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우리는 다르다’ 또는 ‘한국사는 특수하다’라는 입장 을 취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대응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역사는 특수하다. 하지만 많은 특수한 개별 국가들의 역사들 간에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야말로 보편성을 지향하는 노력이며, 보편성을 확인해야 특수성도 진정 의미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본 연구는 최근의 세계사 연구들 그리고 경제학의 보편적 논리에 기초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세계사 속에 위치지을 수 있는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해주는 귀한 작업이다. 


이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먼저, 필자가 보기에 이 책에 포함된 많은 내용들은 해당 내용과 관련된 일정 수준의 강의를 듣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상당 부분은 사실상 학술 논문에서나 적절할 법한 논의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책 전반에 걸쳐 회귀분석표를 그대로 제시한 것은 권위주의적이라고 느껴지기조차 한다. 이러한 부분들을 보면 저자가 상정하는 독자들은 저자의 언명과는 달리 교양을 지닌 일반 독자가 아니라 대학의 한국경제사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이 아닐까 싶다. 즉 외형과는 달리 내용 면에서는 일반교양서보다는 대학 강의교재에 가까워 보인다는 생각이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좋은 연구가 제대로 된 큰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반면 훌륭한 연구는 큰 그림, 즉 우리 나라 역사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에 대한 일반적 양상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많이 배출될 수 있다. 통사와 개별 연구 간의 이러한 관계를 고려할 때, 그동안 한국 경제의 장기적 변화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개괄하는 통사가 나오지 못한 것은 경제사 연구의 걸림돌이자 연구 부족의 결과 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족한 기초연구나마 엮 어서 최선의 큰 그림을 그리는 선구적 업적이 나온다면, 이 큰 그림이 제시하는 주요 문제를 탐구하는 좋은 연구가 따르고, 이것을 바탕으로 역사의 본질을 보다 잘 드러내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선순환이 이뤄져 학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차명수 교수는 이러한 선순환을 창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부족하나마 기존 연구들을 근거로 큰 그림을 그리는 것, 즉 한국 경제가 지난 3세기 동안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종합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향후 한국경제사 연구의 발전과 확산에 크게 기여할 것을 그리고 많은 독자들의 관심이 있기를 기대한다

조상의 눈 아래에서 한국의 친족, 신분 그리고 지역성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 김우영, 목옥표 옮김 | 너머북스 | 20181114일 출간)

 

 

 

 

1. 책소개 : 세계적인 석학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의 50년 한국사 연구를 집대성한 역작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난 50년 동안의 열정을 다한 한국사 공부를 집대성한 신작조상의 눈 아래에서를 내놓았다. 이 책은 신라시대 초기에 생겨나 가장 대표적인 사회 단위로 뿌리내린 한국 고유의 출계집단(씨족 또는 족, 겨레라 불리는)에 초점을 두고, 신라 초기(4~5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한국 출계집단의 역사를 다룬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이 친족 이데올로기는 출생과 출계를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를 창출했고, 엘리트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내구력을 부여했다. 중국에서 차용한 과거제와 신유학은 위계질서를 허무는 데 실패했다. 엘리트의 월권에 제약을 가하기는커녕 괄목할 만한 방식으로 엘리트의 지배를 강화했던 것이다. 도이힐러 교수는 신유학의 변혁능력을 강조한 기존 한국사의 관점은 이 토착적인 친족 이데올로기의 지속성을 간과했다고 한다. 엘리트에게 유교식 사회의 윤곽을 제시한 신유학은 종종 후기 조선사회의 경직성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엘리트 제도를 존속시킨 것은 신유학이 아니라 내구성 있는 친족 이데올로기였다.

   저자는 경상도의 안동과 전라도의 남원을 선택하여 그들이 만들고 다진 촘촘하게 짜인 사회구성을 들여다본다. 예컨대 내앞의 의성 김씨, 유곡의 안동 권씨, 주천의 진성 이씨, 둔덕의 전주 이씨, 안터의 순흥 안씨 같은 집단과 행동했던 개인들에 대한 내러티브에 지성사,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를 엮어 넣는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경제적·지적 문제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저자의 관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자는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신흥사대부 조선 건국론에 대해 신흥사대부의 출현은 애초에 없었다며 고려의 세족(世族)이 조선의 사족(士族)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라는 점, 고려 말의 권문(權門)과 세족은 엄연히 다른 집단이기 때문에 권문세족이란 용어는 폐기하자는 점, 당쟁은 정치적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엘리트층의 신분과 신분 유지에 직결된 사회적 현상이었다면서 붕당의 끈질긴 생명력은 친족 집단과의 관련성이 기인한다는 점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고 왕조의 경계를 뛰어넘은 친족 이데올로기의 검토에서 얻어지는 저자의 통찰이,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나아가 그 유구한 역사의 성격과 작동방식을 다시 평가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사 연구의 획기적인 이정표라 할 만하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1960년대에 한국에서 조사 및 연구를 수행한 최초의 서양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해외 한국학을 선도하는 학자로, 중요한 저서 몇 편을 쓴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로운 상을 다수 수상했다. 저자는 역사와 사회인류학의 방법론을 결합하여 한국의 역동적인 역사와 사회를 관통해온 메커니즘을 재평가하는 참신한 틀을 만들어냈다.

 

 

2. 저자소개 : 마르티나 도이힐러

 

   193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라이덴대 동아시아학과를 졸업했고,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명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대 규장각에서 연구하였고, 1972년 옥스퍼드대 인류학과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1975년부터 1988년까지 취리히대 교수를, 1988년부터 2000년까지 런던대의 아시아·아프리카 대학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런던대 명예교수이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으로 1993년 위암 장지연상을, 2001년에는 용재학술상을 수상하였다. 영국학술원 회원이며 20081회 한국국제교류재단상과 2009년 미국동양학회 아시아연구공로상을 수상하였다. 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The Opening of Korea, 1875~1885, Culture and the State in Late Chos? Korea(공 편저) 등의 저서와 다수의 한국사 관련 논문이 있다.

 

   한국사회 엘리트층은 동질성과 연속성을 견지했나, 아니면 왕조가 바뀔 때마다 스스로를 새롭게 재구성해야 했나?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지배권에 대한 주장을 정당화했나?

  어떤 식으로 자신들과 타 집단 사이의 경계를 긋고 유지했나?

  문화와 권력의 밀접한 관계는 엘리트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했나? 국가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어떠했나?

 

이상이 역사학자들이 지금까지 거의 다루지 않은 친족의 연구를 통해 이 책에서 답하고자 하는 문제의 일부이다.

 

 

 

3. 목차

 

머리말

 

서론: 친족, 신분, 지역성

 

1| 한국사회의 토대

서언

 

1장 신라와 고려의 토착적 출계집단

신라의 토착적 출계집단 고려 초 건국 엘리트층의 형성 과거제도: 중앙집권화의 도구 고려 전기의 저명한 출계집단들 고려 전기 귀족층의 성격 고려 후기의 엘리트 출계집단: 불확실한 시대에 살아남기 고려 후기 엘리트의 면면

 

2장 정체성의 위기: 새 왕조의 모험

실패한 개혁 노력: 변화의 적 권문: 고려 후기의 악당 신유학자: 국가 부흥의 이론적 선도자 조선 초기의 출계집단 세족 엘리트층에게 다시 힘을 실어준 새로운 관료적 질서 권력경쟁: 귀족의 과두정치 대 왕의 독재

 

3장 신유학의 도전

신유학에 대한 양면적 접근 과거제 개혁과 경연 도학 이상주의의 발전 사림의 부상 한국 도통의 구성

 

 

2| 지방의 재구성

서언

 

4장 지방의 재점령: 재지 엘리트 출계집단의 형성

지역적 배경 초기 엘리트의 형성: 안동과 남원의 토착 출계집단 이주와 초창기의 선구적 정착자들 공동체의 강화를 통한 지역의 안정화

 

5장 조선 중기 재지 엘리트 세력의 공고화: 사회적 차원

안동의 재지 엘리트 남원의 재지 엘리트 적절한 혼인망의 구축 엘리트와 서자

 

6장 조선 중기 재지 엘리트 세력의 공고화: 경제적 차원

경제적 기반의 확립 노비: 도처에 편재한 사족 엘리트의 수족공동체적 노력을 통한 안동의 지역적 발전 시대별 경제적 전략: 유산의 관리 안동과 남원의 토지와 노비: 비교

 

3| 유학: 학문과 실천

서언

 

7장 유학자로서의 사족 엘리트

안동의 초창기 사림 전라도의 초창기 유학 안동의 관학과 사학 퇴계의 제자가 된 사족의 자손 학문과 과거: 유생들의 딜레마 처사: 초야의 유학자 경상도 남부의 처사: 남명 조식 안동 최초의 서원 설립 퇴계의 지적 유산 전승을 둘러싼 갈등

 

8장 의례적 실천과 재지 종족의 초기 형성

관습적인 상례와 제례 주희의 의례 개념에 대한 한국적 이해 종법의 초기 신봉자들 오래된 종교적 관행과의 경합 개혁된 의례: 엘리트 문화의 발현 묘제집단의 개혁 조상묘의 재발견과 묘지의 재배열 정체성과 초기의 족보 기록 방식 의례의 혁신과 사회적 변화

 

9장 공동체의 계층화와 지역사회의 지도력

공동체적 관계의 실천: 동계 엘리트 신분의 각인: 향안 안동의 향안 지배의 규범: 향규 유향소 유향소 대 국가 공동체의 방위: 임진왜란 안동의 전후 복구 전후의 개조: 새로운 향안과 향규 도덕의 회복: 향약의 개정 남원의 전쟁피해 17세기의 문턱에 선 재지 사족

 

4| 분열과 결속

서언

 

10장 중앙과 지방: 이해의 상충

중앙과 지방 사이의 점증하는 격차 안동의 사례 남원의 사례 지방에서의 정치적 대결 안동의 사례 남원의 사례 국가의 향촌 침투

 

11장 종족제도의 성숙: 정체성과 지역성

승중자의 입지 강화 조상을 모시는 삶 특이한 의례적 관행 유교적 원리에 도전한 서자 부계제의 안전장치: 친족 결사체로서의 문중 성숙한 재지 종족조직 지방화와 동성마을의 발달 정체성과 출계의 역사 정체성의 상실과 회복: 드문 이야기 존경의 표지: 친족의 통합요인

 

12장 학문과 정치: 정통성을 둘러싼 경쟁

퇴계 사후의 지적 재편 사족의 보루: 안동의 서원들 붕당의 이해에 매몰된 유교의 도 붕당의 갈등과 딜레마 전라도의 사례 영남 내부의 불화와 세력경쟁 안동과 1728년 이인좌의 난 영조 치하의 영남: 깨어진 화해의 희망 노론 침투 압력하의 영남 남인 18세기 후반의 영남

 

5|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서언

 

13장 안정 속의 변화: 사족 신분의 유지

신분 유지를 위한 농업책 농촌공동체 생활의 에토스 선비의 경제적 형편분쟁의 대상이 된 위토와 묘소 엘리트의 우위를 과시하기 위한 모임 조상에게 바치는 기념물: 사우 건립과 문집 편찬 신분의 배타성: 족보의 차원 사족의 계층분화와 경쟁

 

14장 사족 우위의 종말?

안팎으로부터의 도전 구세력 대 신세력: 당파적 동기로 인한 갈등 압력집단으로 부상한 서얼 사족의 보루에 침투한 서자 전국적인 서자운동 안동과 남원에서 재부상한 향리 통제 불능의 하급자들전통적 사회신분제의 종말

 

결론

 

 

 

4. 책 속으로

 

   ‘은 주로 강력한으로 번역 되지만, ‘상황을 저울질하거나 사태의 긴박성을 판단한다는 뜻도 지니고 있으므로, ‘기회주의적이라는 의미를 띨 수도 있다. 이 해석이 옳다면, 권문은 강력한 가문보다는 기회주의적 가문을 나타낸다. 물론 권문이라는 용어에는 권력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권문은 과거제의 틀 밖에서 왕의 은총을 입어 권세를 잡은 다음 협잡과 뇌물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평민을 괴롭힌 사람들, 요컨대 부도덕한 행위로 전통적인 사회정치적·경제적 질서를 위협한 사람들을 지칭했다.

  통상적인 역사서는 대개 권문과 세족을 하나의 단어, 즉 권문세족으로 뭉뚱그려 오랫동안 권세를 누리면서 타락한 고려 후기의 기성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지만, 최근에 박용운은 그 두 용어가 당대의 문헌에서 합성어로 쓰인 적이 없고, 사실은 상이하게 구성된 두 집단, 기회주의적 가문’(권문)과 지체 높은 세습 엘리트층(세족)에 별도로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바 있다. 이 통찰은 고려 후기의 권력구도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2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세족과 권문 사이의 경계선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두 용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1300년대 초반에 두 집단의 권력관계가 사상 최초로 역전되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_ 본문 77~78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종종 군신관계에 비유되었다. 이는 상호의존성을 암시함으로써 지배와 종속의 가혹한 현실을 은폐하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노비의 본분이고, 그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주인의 권한이다.” 그럼에도 주인이 노비의 신체, 노동, 재산, 자손까지 완벽하게 통제했다는 사실은 그 관계의 극심한 불평등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긴장과 적대감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유학자의 인도적 양심에 위배되는 상황에 날마다 직면했던 일부 엘리트 노비주는 엄격함과 인자함을 적절히 안배하여 노비들을 다루는 방침을 마련했다.

   노비의 관리는 당대의 수많은 가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예컨대 본인이 노비주였던 이퇴계는 아들 준에게 권위만 내세우지 말고 자애심을 갖고 노비를 다루라고 충고했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노비들이 원한을 품지 않게 하라고, 무지한 여자노비를 관대한 마음으로대하라고 배웠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규율에 따르게 하라고 준에게 타일렀다. 하지만 비협조적이고 방자한노비들이 가문을 망칠 수도 있다고 우려하면서, 소심하거나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들의 불복종을 부추기지 말라고 훈계했다. 그는 노비란 천성적으로 완고하고 태만하므로 엄격하게 감독하지 않으면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는 적기를 놓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게으른 노비 한 명을 골라 매질하면 다른 노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또 아프다는 핑계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아가 노비들이 수령의 관아에 자주 출입하고 소문을 퍼뜨리고 서로 싸움질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분명히 퇴계는 노비들을 단호하면서도 관대하게 통제하고자 했다. _ 본문 256~257

 

 

5. 출판사 서평 :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인터뷰

 

도이힐러: 이 책은 출계집단(, descent group)에 대한 논의이다. 나는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핵심을 파고들고자 했고, 엘리트 사회의 기본단위는 출계집단이라고 판단했다. 출계집단은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본인들의 혈통을 추적하는 친척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매우 명확하게 정의되는 집단이다. 이 출계집단은 5세기 무렵에 나타났는데, 초기 출계집단 시스템, 다시 말해서 전통 한국사회의 기본 특징은 그것이 여러 신분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 출계집단은 정치권력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런 지적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집단의 존재감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의 결론은 사회적인 것이 한 개인의 정치 참여 수준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분류한 것은 정치체제(political system)가 아니라 사회체제(social system)였고, 따라서 사회체제, 곧 개인의 사회적 신분이 그가 정치체제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할 수 있는가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출계집단들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다투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귀족가문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거주하면 엘리트층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의 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이 귀족들이 지방으로 이주했고, 이 무렵에 그들은 이나 같은 중국식 성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 가운데 예컨대 동해안의 강릉으로 이주한 김씨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강릉 김씨와 같은 성과 본관의 결합은 엘리트층의 이름표 구실을 했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흥미로운 주제는 이 출계집단은 워낙 중요한 존재였기에 온갖 역사적 변화를 겪어내고 심지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질문: 그 집단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도이힐러: 조상숭배, 즉 제사이다.

 

질문: 사회체제가 사회와 가문에서 한 사람의 지위를 결정했던 것인가?

 

도이힐러: 그렇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각자의 신분에 따라 조상을 모시는 사당 앞에 도열하는 순서도 달라졌다.

 

질문: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계층구성에 대해 설명해 달라.

 

도이힐러: 정확한 통계수치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엘리트 집단은 인구의 1012%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들과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있었다. 다른 두 집단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양인으로, 대부분 논밭을 가는 농민들이었다. 나머지는 거대한 노비 집단이었다. 조선 초, 15세기 초엽에 노비는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노비들은 특히 엘리트의 경제생활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엘리트는 그들을 위해 무보수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들의 무리 없이는 엘리트로 존재할 수도, 엘리트 노릇을 할 수도 없었다. 노비 신분은 세습되었으므로, 노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날 때부터 노비였고 평생 노비로 살아야 했다.

 

질문: 그런데 노비제를 비롯한 신분제는 19세기에 한국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나?

 

도이힐러: 아니다.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한국의 근대화가 더디게 진행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매우 엄격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질문: 그렇다면 이런 구제도는 지금은 영향력을 상실했는가?

 

도이힐러: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자식의 결혼을 앞둔 부모는 결혼상대가 유서 깊은 엘리트 가문의 후손인지에 대해 대단히 신경을 쓴다. 물론 노비 집안 출신을 자녀의 배우자로 맞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분의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질문: 그러면 옛 신분제는 정치적으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도이힐러: 아니다. 사회적으로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적 기능도 수행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지역구 의원들은 사회적 기반이 견고하기 때문에 국회에 입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뿌리 없이는 당선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신분의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아무런 배경이 없는 자가 국회의원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른바 엘리트가 사회적 엘리트에서 경제적 엘리트로 바뀌고 있지만, 상당히 부유한 경제적 엘리트도 오래된 사회적 엘리트와 관계를 맺고자 애쓴다. 후자는 아무리 빈곤해졌다 하더라도 유서 깊은 가계(家系)를 자랑하기에, 경제 엘리트는 그 후광을 입으려고, 나아가 그들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려고 하는 것이다. 17세기와 18세기에 편찬 붐을 일으켰던 족보는 개인의 출신을 보여주는 보증서로, 누군가의 이름이 그것에 등재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엘리트층의 일원임을 증명해준다.

 

질문: 책 세 권을 내셨는데, 만약에 네 번째 저서를 쓰신다면 그 책의 주제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도이힐러: 네 번째 책을 쓸 여력은 없을 듯하지만, 나는 이미 일종의 소규모 연구에 착수했다.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한국사회가 출계집단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개인은 이 출계집단의 일부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출계집단에 기초한 사회가 어떻게 개인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근대화된 민주사회로 전환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식민지 시대나 현대에 한국인이 겪은 변화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아무도 개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이 인터뷰는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가 스위스 취리히대 명예박사 학위수여를 기념하여, 2018년 같은 대학 민족학 박물관에서 처음 상영관 <한국을 향한 열정> 4부작 필름 중 네 번째인 Passion for Korea-Under the Ancestors’ Eyes(2015) (Producer Rolf Probala. Z?rich 2017)의 인터뷰 내용을 간추려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사회적인 것은 언제나 정치적인 것에 우선했다

 

   한국사회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분의 위계와 신분의 배타성을 찬미하면서 운명의 붉은 실처럼 신라 초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관통했다. 귀족, 세족, 사족, 양반 등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엘리트층은 스스로를 출계집단(, descent group)에 의거하여 정의했는데, 이 집단은 양계적으로, 다시 말해 부계와 모계 모두를 통해 출생과 출계의 기원을 찾았다. 성취적 속성보다는 귀속적 속성을 자랑스러워하는 엘리트는 출계집단 모델에 뿌리를 둔 사회적 기준을 이용하여 국가와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조상의 후광이 엘리트의 사회정치적 토대였으므로 실력에 기반을 둔 중국의 엘리트층과는 달리 신분에 대한 법적 정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도이힐러 교수는 사회적으로 통제되고 합법화된 위계와 지배의 패턴은 신라의 골품제에서 발단한 이후 전통시대 한국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제도들의 성격과 작동방식을 규정했다고 간주한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정치의 세계를 규정했으며 왕조 교체를 뛰어넘은 동인이었고, 나아가 한국 사회가 그토록 오랫동안 연속성이 보장된 까닭이기도 했다. 때문에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토착적인 출계집단의 출현과 발달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신라 초기(4~5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한국의 출계집단의 역사를 추적하는 한편 공간적으로는 경상도의 안동과 전라도의 남원을 가로지른다. 두 곳이 지리, 인구, 경제의 측면에서 대조적일 뿐 아니라, 공적인 역사자료는 물론 고문서, 문집, 족보, 읍지 등 풍부한 역사 기록을 보존하고 있으며 주요하게는 한국에서 가장 저명한 몇몇 재지 출계집단의 기원과 발달을 연구하는 데 안성맞춤인 곳이기 때문이다. 안동의 의성 김씨, 안동 권씨, 광산 김씨, 진성 이씨, 풍산 유씨, 고성 이씨, 남원의 전주 이씨, 삭녕 최씨, 광주 이씨, 순흥 안씨 들이 그 예이다. 연구의 초점은 출계집단이지만, 여러 대에 걸쳐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린 것은 각 출계집단을 대표하여 행동한 개인들이었다. 저자는 안동과 남원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다져나간 그 주역들의 공적인 삶을 들추어내는 가운데 사회적인 것이 한국인의 삶 구석구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조명한다.

 

 

6.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된다. 1한국사회의 토대에 포함된 세 장은 유교 도입 이전의 한국사회에 대한 새롭고 폭넓은 관점을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이 관점은 나중에 조선왕조에서 이룩되는 사회적·지적·정치적 발전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다. 첫 두 장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출현한 토착적 출계집단의 기원과 초창기의 발달을 추적하고, 중국식 과거제도가 맹아기의 정치제도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탐구한다. 세 번째 장은 고려에서 조선 초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루어진 신유학의 도입을 당대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이라는 넓은 맥락 속에서 논의한다. 2~5부는 조선시대 엘리트층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본다. 2지방의 재구성은 엘리트 출계집단이 지방화를 체험한 두 군데의 주요 지역인 안동과 남원을 소개한다. 3유학:학문과 실천의 주제는 지방에 정착한 엘리트들이 젊은 시절에 유학을 공부하던 방법과, 이런 학습을 통해 새롭게 이해하게 된 유교의 예법을 자신들의 친족집단에 적용하던 방식이다. 3부는 지방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연고지에 대한 강력한 지배권을 어떻게 주장하고 확대했으며,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1620년대와 1630년대의 만주족의 침략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된다. 4분리와 결속17세기에 접어들어 점차 벌어진 중앙과 지방의 간극과, 그것이 엘리트의 사고와 행동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다. 또한 그로 인한 학문적 분열과 붕당을 해명하고, 종족의 제도적 성숙을 조명한다. 5변화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는 마지막으로 18세기의 급변하는 사회경제적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재지 엘리트층의 전략, 그리고 사회적 경계의 타파를 시도하던 경합세력의 등장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살펴본다. 각 부는 당대의 특수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조건들을 개관하는 간략한 서언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개별 장들의 내용을 한국사라는 더 큰 틀 속에 놓고 바라보기 위함이다.

 

 

과거제와 신유학은 한국사회의 위계질서를 허무는 데 실패했다

 

   중국식 과거제도의 도입(958)과 신유학의 도입(14세기 후반)은 한국사회와 출계집단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이었다. 경쟁에 기초한 인재 등용인 과거제의 도입은 귀속적 자격과 정치적 성취의 관계에 대한 엘리트층의 생각을 바꿔놓았고, 신유학에 의한 부계출계율의 보급 및 확대는 토착적 출계집단의 구조를 혁신했다. 그러나 이 책이 밝히는 것처럼 종국적으로 과거제와 신유학이 위계질서를 허무는 데는 실패했다.

   실력을 중시하는 중국식 과거제는 정치 참여가 생득권이었던 한국의 전통에 반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사조(四祖)를 입증할 수 있는 자에게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출계가 우선이고 실력은 그 다음으로, 한국의 과거제는 중국의 모델과 확연하게 달랐다. 조정은 여전히 귀족들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처럼 정치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을 보완하는 것쯤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국가'는 사회 안에 포섭된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왕의 권한에 영향을 미쳤다. 귀족적 관료제는 왕의 지배력을 약화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한국의 역사에서는 왕의 독재가 애당초 불가능했다.

   도이힐러 교수는 고려-조선 왕조 교체의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평가하려면 여말선초의 과도기에 대한 통념, 사회정치적 균열을 틈타 '새로운' 세력이 '구체제 옹호세력'을 대체했다고 가정하는 이른바 '신진사대부' 설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고려의 세족이 조선의 사족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므로 친족 이데올로기의 연속성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권력은 여전히 신분에 내재되어 있었고 누대에 걸쳐 한정된 범위의 동일 출계집단들 내에서 순환되었다. 그 결과 고도로 사유화된 정치가 생겨나 왕권에 제약을 가했다.

 

   한편 신유학은 부계 출계 모델을 도입함으로써 한국사회 고유의 양계와 중국식 부계 사이의 갈등을 야기했다. 하지만 부계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엘리트의 지위는 계속해서 양계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엘리트들은 신분의 양계적 귀속이라는 가장 중요한 전통을 지켜내면서도 유교식 부계제라는 이데올로기적이고 구조적인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선 후기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유서 깊은 지배권을 계속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붕당의 토대는 친족이었고, 붕당의 끈질긴 생명력 또한 출계집단과의 관련성에 기인했다

 

   도이힐러 교수의 유명한 전작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1992)이 고려-조선 교체기의 엘리트 사회가 고유의 양계제에서 유교적 부계제로 이행하는 역사적 과정이 주제였다면, 신작 조상의 눈 아래에서의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16세기 중반 이후 출계집단 구조의 획기적인 변화였던 '종족제도'의 출현이다. 그녀는 한국사회에서 종족의 출현이란 지방화된 엘리트가 심혈을 기울여 구상한 '차별화 전략'으로, 국가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는 동시에 향촌에서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고 정의한다.

 

   15~16세기 초반 한국사회에는 사회 엘리트들의 지방의 각처로 대거 이주하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원인은 다양했다. 녹봉체계의 붕괴로 토지자산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이른바 사화와 같은 끔찍한 사건들을 피하기 위한 은신처의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고래로부터 이어온 처가거주혼에 따라 지방에 눌러 앉은 엘리트들은 신유학을 공부하여 지역 공동체를 촘촘하게 짜인 사회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자신의 터전인 농촌공동체를 수호하라는 요구에 직면했을 때 지방화된 엘리트들은 축적된 부와 사회적 연결망을 동원하여 외적에 맞서 싸웠고, 이들이 전쟁의 패자가 아닌 승자로 부상한 것은 이후 국가에 맞서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150여년이 지난 시점에 종족이 지방에서 처음 생겨나 자리를 잡게 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교식 부계제가 농촌이라는 환경에서 엘리트를 조직하는 매력적인 모델이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한국의 종족제도는 지적·의례적·경제적·정치적 요인들이 결합된 결과로 그 요인들이 촘촘하게 얽히고설켜 하나의 요인에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를 무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한다.

 

   신유학의 역할을 살펴보자. 첫 번째 유교화가 여말선초 '치국'의 실학이었다면 두 번째 유교화는 사화를 거치며 사림이 주도권을 행사한 '수신'에 기초한 도학의 정치화였다. 도이힐러 교수는 한국에서 국가 정학이라 불릴 만한 것이 출현할 수 없었던 주된 이유로 16~17세기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종하는 양대 신유학파 사이에서 벌어진 경쟁과 갈등 때문으로 본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올바른' 학문임을 주장하던 두 학파 사이에 투쟁은 오직 승자와 패자만을 낳았으며, 그 균열은 중앙과 지방의 격차를 벌려놓았다. 끝없이 지속된 당파적 논쟁 속에 지방화된 엘리트들은 그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저자는 붕당의 토대는 친족에 기초하였으며 붕당의 끈질긴 생명력 또한 출계집단과의 관련성에 기인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편다. 당쟁은 정치적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엘리트의 신분과 신분의 유지에 직결된 사회적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서인이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앙에서 주도권을 잡음에 따라 퇴계의 후계자인 남인은 정계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다. 17세기 이후 과거 급제나 관직 제수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 경상도와 전라도의 재지 엘리트들의 급선무는 자신들의 신분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교식 종족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들의 상황에 대처했다.

 

종족은 과거 급제 없이도 재지 사족의 신분을 유지해준 대안이었다

 

   종족이란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일정한 수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긴밀하게 조직된 부계집단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뒤따랐다. 장자의 지위가 상속에서는 물론 제사의 주제자로 격상됨에 따라 남동생들의 의례적·경제적 입지가 축소되었는데, 이는 평등한 형제관계를 강조하던 고래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형제들 사이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좀 더 폭넓게 구성되는 조직인 '문중'이 만들어졌다. 문중은 평등한 형제관계의 이상을 되살린다는 취지에서 출계집단의 모든 성인 남계친을 포함시키는 사회단위로 - 장자가 제사를 지냈다면 - 이들은 시조나 현조를 기리는 묘제를 봉행했다. 이처럼 한국의 부계제가 문중에 의해 균형이 맞추어지지 않았다면, 엄격하게 조직된 중국식 부계제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라 저자는 해석한다. 이 또한 한국의 사회적 전통이 중국식 모델을 변용시킨 예이다. 종족은 재지 엘리트가 중앙으로부터의 소외, 국가의 지방에 대한 통제와 압력이 가중되는 17세기 상황에서 과거 급제 없이도 사회적 우위를 인정받는 대안이자 사회정치적 도구였으며 재지 엘리트의 신분을 정당화하고 유지시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또한 붕당과의 결연을 통해 정치적 성격을 띠며 국가와 사회 사이에서 꾸준히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었다.

 

   도이힐러 교수는 서울에서 벼슬을 하던 소수 엘리트 출계집단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반면, 재지 엘리트의 출계집단의 손에 토지가 집중된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라 기술한다. 또한 중앙과 지방의 분리에서 지역 차별은 결코 서북 지방에 국한되었던 현상이 아니라 영남(남인)과 전라(남인과 서인) 또한 소외당했다 한다. 한국사회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교화된 국가로 일컬어지지만, 토착적 친족 이데올로기의 힘과 내구성은 중국식 과거제와 부계화 같은 외래의 영향을 무력화하거나 변용시켰다. 출계집단 모델은 외국의 영향에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고, 그 자체의 필요에 따라 패턴을 수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역동적 모델이었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자, 전통적인 신분제가 붕괴되었다

 

   한국식으로 해석된 유교는 사회적 차별을 완화시키기보다는 강화시켰다. 향리와 서얼은 엘리트층에 가깝다는 이유로 주변화되었고, 특히 평민과 노비를 소외시켰다. 향리가 조선 초기에 정권을 장악한 엘리트층이 자신들의 지배력을 중앙에서 지방으로 확대하려 할 때 '문제'가 된 집단이었다면, 서얼 문제는 고려시대에서 선례를 찾을 수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이었다. 고유의 양계에 부계라는 독특한 조합이 서자 문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재지 양반층이 책의 주연이라면 향리와 서얼은 조선 후기 양반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독립적으로 제각기 도전장을 내밀기 시작했던 조연들이다. 일부 양인과 노비는 자신의 생활여건을 개선하여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사족의 체면은 손상시켰다. 조선후기 재지 엘리트들은 갈수록 다양한 대항세력에 시달리며 운신했다. 실제로 지방이라는 무대는 '향전鄕戰'이라는 신조어가 시사하듯이 유동적이었고 때로는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지 사족은 자신들의 물질적, 상징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자신들의 신분상 우위를 방어하고 유지하려 했다.

 

   무엇이 이 불평등한 사회를 그토록 오랫동안 하나로 묶어왔을까? 사족은 단순한 억압과 착취로 대부분이 문맹인 인구를 통제했을까? 아니면 사족이 전파한 사회계약의 도덕률이 수직적으로 분배된 권한과 수평적으로 작동되던 공동체성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신분집단들 사이의 관계를 중재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지배 엘리트들이 그런 가치와 관행을 보급한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하급자들을 어려움에 처하게 했던 현실을 감추기 위함이었을까? 그토록 오랫동안 양반 엘리트에게 특권을 부여했던 사회신분제는 조선 후기에 비엘리트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신분상승'을 꾀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개혁될 수 없었을까?

 

   역설적이게도 직함을 팔아서 그런 추세를 부추긴, 다시 말해서 그것을 산 자들에게 군역을 면제시켜줌으로써 적어도 사회적 입신의 환상을 심어준 것은 바로 정부였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구성된 ''''의 제도는 엘리트층이 변화하는 사회적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을 막았고, 비엘리트층이 부나 직함을 앞세워 양반 계층에 침투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런 까닭에 저자는 엘리트층의 몰락이 갑작스럽게 찾아왔을 것이라 한다. '제도'로 법제화된 적은 없었지만, 신분제는 한 사회집단이 사회의 나머지 집단들을 지배하는 것은 급변하는 근대세계에 설 자리를 찾고 있던 국가에서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고 간주됨에 따라 1894년에 돌연 철폐되었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자, 전통적인 신분제도가 붕괴된 것이다.

 

   실제로 사회적인 것은 근대세계에서 그 규범적 힘을 상실했지만 감정적인 신비감을 간직하고 있었고, 한국사회의 양반화라고 적절하게 명명된 현상을 낳았다. ‘역사적인 실체로서의양반은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다는 비난에 자주 휩싸이지만, 양반의 신분을 내세우는 것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개인의, 나아가 지역과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할 때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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