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는 공물(公物)이다

 

 

맹자는 천하 만물과 오래된 것은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중국인의 사고방식은『삼국지연의』의 바람을 타고 번져 갔다. 그리하여 ‘무릇 천하의 대세는 나누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반드시 나누어지는 법이다.’ 라는 개념을 정립한다.  『삼국지연의』의 시작과 끝은 바로 이러한 순환론적 역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국지』는 경영학에서부터 처세술, 리더십, 외교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의 파생상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금도 쉬지 않고 새로운 문화를 이끌어 내고 있 다. 『삼국지』가 이토록 오랫동안 인기가 있는 이유는 난세를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행동지침이 이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위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소설은 유비와 제갈량을 주인공으로 하는 촉한정통론에 근거해 다시 쓰여졌다. 촉한정통론은 위정자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창출과 이를 통한 권력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충성. 믿음, 의리, 덕망 등은 민중을 지배하는 데 유용할 뿐더러, 중국대륙을 차지한 민족에 대항하는 한족의 대응논리로도 딱 맞았기 때문이다. 즉 촉한정통론은 한족의 기질과 역사적 소망, 그리고 대륙 통일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숙독하면 중국인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중국경제는 개혁개방주의를 추진한 이후 급속히 성장했다. 그리고 엄청난 경제력으로 세계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바야흐로 7~8세기에 구가했던 실크로드의 전성기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앞과 뒤에 『삼국지연의』가 있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인간의 쟁투는 그 자체로 역사다. 하지만 역사는 무뚝뚝하여 소망이나 가정이 필요없고, 소망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소망하는’ 역사란 인간의 사고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천하의 모든 민족에게 골고루 기회를 준다. 천하는 개인이나 한 민족의 것이 아닌 공물(公物)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영원히 차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나, 천하를 다 가진 뒤에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인간의 천성이 개인일 경우에는 공자의 편이지만, 집단일 경우에는 순자의 편을 들기 때문일까?


흥망성쇠의 변주도 결국은 자연을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욕심과 사고도 자연 속에 있는 것이니 천하가 공물이되 그 주인 역시 자연인 것이다.

손씨 정권의 탄생, 발전, 그리고 필망(必亡)

 

 

오나라를 세운 손권은 손견의 둘째아들이다. 손견은 17세 때 부친과 같이 지금의 항주에 갔다가 해적을 무찌르며 이름을 날렸다. 특히 동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자신의 앞길을 막고 발목을 잡으면 상대가 누구든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돌적인 용맹이 화근이 되어 37세의 나이에 피살되었다. 그 뒤에 맏아들 손책이 손견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손책의 나이 18세였다. 손책은 부친과 마찬가지로 용맹하고 영민했다. 서초패왕인 항우에 비견되어 소패왕이라 고 불렸으며, 주위에 인재가 넘쳤다. 오나라의 충신인 주유와 장소, 태사자도 손책의 신하였다. 진수가 손책을 평하길, "기상과 절개가 호방하고 실천력이 뛰어났으며, 용맹과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지략은 천하에 으뜸이었다. 걸출한 인물들을 수하로 거두었으며 언제나 천하통일을 꿈꾸었다. (동오가) 강동을 다스리게 된 기반은 모두 손책이 다졌다.”고 했다.


그러나 손책 또한 26세로 요절했다. 용맹이 넘쳐 교만했기 때문이다. 손책은 후임자로 동생 손권을 지명했다. 이때 손권은 19세였다. 손책이 손권을 지명한 것은 ‘수성(守成)의 목적이었다.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은 손책 자신이 이뤄냈고 이제 는 국익을 위한 정치적 재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손권이 제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장소의 결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소는 죽을 때까지 충심으로 손권을 보좌하였다.


손권은 젊은 시절 정치를 잘했다. 인내심이 강하고 충언에 귀를 기울이며 견실하게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말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71세까지 장수하며 장악한 권력은 유아독존적 성격으로 굳어져 교만하고 시기하며 인재를 함부로 해치기까지 했다. 또한 후계자 문제로 국정을 어지럽히는 등 실정으로 일관했다.


손권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초기에는 맏아들인 손등을 후계자로 삼아 후계 구도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손등이 병으로 일찍 죽었다. 둘째 아들도 없는지라 셋째 아들 손화(孫和)를 태자로 세웠다. 손권은 넷째 아들인 손패도

총애하였는데, 그 총애함이 손화와 다름이 없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격한 시대에 태자와 왕자의 서열이 애매하니 태자는 항상 불안하고 왕자는 총애의 힘을 믿고 욕심을 부리기 마련이다. 신하들도 양분되어 권력쟁탈을 위한 암투가 심해지니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결국 손권은 태자인 손화를 유폐하고 이에 반대하던 신하들을 주살했다. 그와 함께 손패와 그를 따르던 간신배들도 주살했다. 그리고 8세의 어린 막내아들인 손량을 태자로 세웠다. 8년간의 후계자 문제로 당사자는 물론 유능한 신하들도 낙엽처럼 사라졌으니 이제 국가의 존망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손량도 얼마 못 가 퇴위하고 여섯째 아들인 손휴가 즉위했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264년 손휴가 병사하고 폐세자 손화의 아들인 손호가 즉위했지만 그는 지독한 폭군이 되었다. 후계자 문제가 발단이 된 오나라 필망(必亡)의 과정은 비단 오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봉건사회의 보편적인 역사다. 또한 후계자 책봉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일부 귀족층의 전유물에서 국민 모두에게로 이전되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제갈량,『삼국지연의』 최고의 주인공

 

 

『삼국지연의』는 일명 “제갈량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전편에 묘사된 제갈량의 다재다능함이 사실을 넘어 신기에 가깝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나관중이 촉한정통론의 입장에서 쓴『삼국지연의는 유비와 제갈량을 최고의 인물로 형상화했다. 특히 유비의 참모 제갈량은 등장부터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도록 했다. 이후 모든 전투와 계략은 신출귀몰한 제갈량에 의해서 진행된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했을 때 독자들은 소설이 끝났다고 느낀다. 지혜의 화신으로 과장된 제갈량의 마력에 독자들이 푹 빠졌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현실감각이 뛰어난 재상이었다. 진수도 이를 인정해서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를 깨달은 뛰어난 인재였던 그는 관중이나 소하와 비교할 만하다.’고 했다. 그러나 ‘매년 대군을 움직이고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임기응변이 그의 장점은 될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고 평했다. 유비가 이를 잘 알았던 것일까? 천하삼분계략의 필수과제인 익주를 공략할 때도 제갈량 대신 법정과 방통이 참여했다. 유비가 삼고초려하고 ‘수어지교 라며 제갈량을 떠받든 것과 비교하면 왠지 어색하다.


청나라 왕부지는 “유비의 공명에 대한 믿음은 관우에 대한 믿음보다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유비는 적벽대전 이후 형주를 차지했을 때나, 익주를 차지하고 나서도 제갈량에게 세금과 군비 조달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고조 유방의 승상이었던 소하의 일을 맡긴 것이었다. 소하는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유비 역시 제갈량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유비°| 생각을 정확히 읽고 충실히 보필했다.


송나라 학자 유문표는 이런 상황을 정확히 간파했다.


"제갈량은 시무에는 뛰어났지만 대의에는 밝지 못했다. 또한 유비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한 황실에 충성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다.”


제갈량은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견주면서 유비를 모셨다. 이는 그가 유비를 난세의 패자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지, 한 황실을 부흥시키겠다는 뜻은 아니다. 유비가 내세우는 대의 역시 유비 자신의 정권창출을 위한 계략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 또한 제갈량의 이러한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유비는 제갈량과 16년간을 동고동락했다. 하지만 이때는 수어지교의 관계가 아니었다. 진정한 수어지교는 유비가 임종을 앞두고 제갈량에게 유언을 하면서부터다. 유비는 자신의 사후에 촉한의 운영을 제갈량에게 맡겼고 제갈량은 이를 간파하여 익주파와 동주파를 제치고 국정을 이끌었다. 16년간 쌓아온 눈빛과 손짓으로 두 사람은 영원한 수어지교된 것이다.

 

익주파의 선택,‘촉한의 멸망’

 

이미 살펴보았듯이 촉한의 권력은 형주파와 동주파에 집중되었다. 토박이와 다름없는 익주파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고 경제를 회복시키는 궂은 일만 해야 할 뿐 권력에서는 찬밥신세였다. 그들에게는 국가가 있었지만 이익보다는 손해가 많았다. 익주파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결국 그들은 촉한의 멸망을 원했다. 천하통일이 곧 자신들의 불만족스런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천하를 통일할 것인가?


한나라 말기에 한나라를 대신할 사람은 '당도고(當途高)' 라는 참언이 돌았다. “우두 커니 서 있는 키 큰 사람” 이 한나라를 이을 사람이라는 말인데 그 속에 숨은 뜻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익주파의 대표격인 초주가 스승으로 모시던 대학자 두경에게 이 말의 뜻을 물었다. 두경은 거침없이 위(魏)라고 했다. 어째서 위인가?


고대 천자와 제후의 궁문 밖과 양쪽 도로에는 한 쌍의 높고 큰 건축물이 있었다. 이를 일러 ‘궐(闕)' 이라 하는데, 위(魏) 또는 위궐(魏闕)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관부나 관원을 조(曺)라고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당도고’ 는 조조의 위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한 초주는 촉한의 멸망과 위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골몰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지어냈다.


“선주의 휘는 비(備)인데,이는 ‘완결하다’ 라는 뜻이다. 후주의 이름은 선(禪)인데, 그 글자는 ‘주다’라는 뜻이다.”


촉나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262년, 궁궐에서 커다란 나무가 부러졌다. 초주는 부러진 나무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많고 커져 이제 약속한 날이 되었다. 다른 이에게 넘겨줄 때가 되었으니 어찌  또 다시 오르겠는가.”


진수의 해석을 살펴보자.


"조(曺)는 백성이 많음을 의미하고 위(魏)는 크다는 뜻이다. 많고 크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게 된다. 완전하게 준비하여 다른 이에게 건넨다면,어찌 다시 제위에 오를 수 있겠는가.”


진수의 해석은 초주의 말과 일치한다. 진수가 위에 이어 탄생한 진(晉)나라의 신하였기에 이렇게 말한 것일까? 그것만이 아니다. 진수는 초주의 행동에 대해 말하길, “후주의 일가족이 무사태평하고 촉한의 백성들이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초주의 계책 때문이었다.”고 했다. 매국노로 낙인 찍힌 초주를 이렇게까지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진수에게 초주는 지울 수 없는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강유의 북벌이 남긴 것

 

 

 “강유는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고 부지런히 힘쓰며 사려가 깊으니, 그의 재능은 이소, 마량보다도 뛰어납니다. 그는 양주에서 제일가는 인물입니다.”


제갈량이 자신의 후임으로 인정하며 굳게 믿은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정신을 이어받아 아홉 번의 북벌에 나선다. 이를 일컬어 ‘구벌중원(九伐中原)’ 이라 한다.  제갈량을 신묘한 인물로 묘사한 나관중은 강유 또한 제갈량의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온 2차 북벌과 4차 북벌은 묘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 것으로 묘사된 6차와 7차 북벌은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허구다.  삼국지연의가 전반에 걸쳐 그러하듯이 나관중은 취사 선택과 허구를 적절히 가미하여 제갈량의 후계자 강유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제갈량 사후에도 계속된 강유의 승산 없는 북벌은 익주파에게 전쟁을 반대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반대론자는 초주였다.


"지금은 진나라 말기가 아니라 전국시대 초기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한 고조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고,주문왕 정도밖에 될 수 없다. 만약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않고 무력에만 의지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괴멸하고 말 것이다. 그때는 신선도 우리를 구하지 못한다.”


백성들 또한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 지출과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촉나라의 가구 수는 28만 호, 인구는 약 94만 명이었다. 군대는 10만 2,000명에 관리가 4만 명이었다. 두 집에 한 명꼴로 종군하였고, 7가구 가 1명의 관리를 책임져야 했다. 그야말로 백성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피폐한 생활은 아무리 국가보존을 위한 전쟁이라 하여도 백성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고 오히려 원망만 높아질 뿐이었다. 오나라의 사신으로 축나라를 다녀간 설후의 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가 가서 보니 촉은 이제 끝난 것 같습니다. 조당에는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자가 없고,논밭에는 피폐한 백성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습니까? 제갈량이 다시 살아온다고 해도 위기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중시하는 것은 배불리 먹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지의 여부다. 국가는 이를 전제로 존재한다. 정치가는 권력을 중시하고 이를 누리기 위해 애쓰며 이 때문에 정권을 필요로 한다. 백성은 권력에 약하지만 정권을 바꿀 수 있다. 정권과 권력은 백성의 희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과도 같은 백성의 뜻을 읽지 못하면 백성은 새로운 정권과 새로운 권력을 찾는다. 정권과 권력을 소유하지 않되 이를 바꾸는 힘이 곧 백성이며, 이것이 바로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제갈량의 북벌, “공격이 최선의 수비다”

 

 

"제가 듣건대 조조의 사위 하후무는 젊었으되 겁이 많고 지략도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병 5,000명과 군량 5,000석을 주신다면,곧장 포중으로 나가 진령산맥의 동쪽을 돌고 자오곡으로 직행하여 북쪽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면 열흘도 안 되어 장안에 이를 테니, 하후무가 이를 알게 되면 반드시 배를 타고 도망칠 것입니다. 장안성에는 어사와 경조태수만 있을 테니 횡문에 있는 군량 비축 창고와 도망치는 백성들이 버린 곡물로도 군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위가 병력을 모으려면 족히 20일은 걸릴 테니, 공께서 사곡을 뚫고 나오면 반드시 그 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함양의 서쪽지역을 단숨에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제갈량이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첫 번째 북벌을 단행할 때, 위연은 이런 전략을 제안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모든 상황을 빈틈없이 고려해 준비한 계책이 아니다.” 라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제갈량이 일출기산(一出 祈山)의 정벌에서 벌인 용병술에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즉 지모가 넘치고 경륜과 도략에 통달했지만 너무 신중해서 매우 소극적인 전술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진수도 제갈량을 평가하길, "군대를 지휘하는 데는 능숙했지만 기묘 한 전략은 부족했고, 백성을 다스리는 능력이 전장에서 계략을 구사하는 것보다 나았다.” 고 했다.

 

제갈량의 신격화에 앞장서던 나관중도 사마의의 입을 빌려 “제갈량은 항상 신중한 사람이니 억지로 일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구나. 만약 내가 계략을 짰다면 자오곡을 통해 북진하여 속히 장안을 점령했을 것이다. 그가 이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지략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겠지만." 이라고 하며 위연의 계략에 손을 들어 주었다.

 

제갈량은 위나라에 대한 북벌을 모두 5번 단행했다. 그중에 두 번이 지금의 보계시인 진천으로 진격했고 나머지는 감숙성 동남부 방면이었다. 그는 경제력을 해결하기 위해 남정을 완료했다. 이제 강대한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국방력 증강이 필수였다. 이를 위해 제갈량은 진한 이래 가장 중요한 병사공급지인 감숙성 동남부의 양주를 공략했다. 촉한 건국 시 높은 자리를 차지한 마초와 마대도 양주지역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제갈량이 발탁한 천수 출신 강유도 양주인사 들과 교분이 있었다.

 

제갈량이 이처럼 양주를 중시한 것은 국가 백년대계를 책임진 자로서의 고뇌가 반영된 것이다. 즉 양주를 점령하여 이곳의 인력을 병사로 확보하고, 아울러 뛰어난 군마(軍馬)를 공급받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양주 동남부의 곡창지대를 통해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전쟁은 정치의 계속이다.” 라고 했다. 제갈량의 북벌은 단순히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이러한 촉한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통해 방비를 튼튼히 한 후, 때를 보아 중원을 탈환하는 장기적인 국가전략이었다. 제갈량이 말 한 ‘모든 걸 두루 살펴 갖춘 계책’ 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제갈량은 탁월한 정치가이자 지략가이다.

제갈량이 마속을 처형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

 

 

"승상은 저를 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모셨습니다. 이제 저는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죽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바라옵건데 승상께서는 순임금이 곤을 죽이고 우를 대신 등용한 때를 생각하소서. 그러면 죽어서 구천을 헤매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철저히 준비하고 시작한 북벌은 마속이 가정을 잃음으로써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모종강도 마속의 실가정(失街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가정전투에서 패배한 공명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애써 차지한 남안, 안정, 천수는 포기하게 된다. 이에 기곡의 군사들도 모두 철수해야 했고, 서성의 군량 또한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하후무를 사로잡고, 최량과 양롱의 목을 베고, 상규와 기현을 점령하고, 왕랑을 꾸짖고 조진 역시 격파한 게 모두 무의미하게 되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마속의 실수는 제갈량이 북벌에서 거둔 혁혁한 전과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법치주의 원칙을 내세운 제갈량은 마속을 어떤 식으로든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완(將街}은 마속의 처벌에 반대했다. 전쟁 중에 장군을 처형하는 것은 적에게 이로움만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진의 역사학자 습착치는 약소국이자 인재 또한 부족한 촉나라에서 마속과 같은 인걸을 처단한 것이 위나라를 이길 수 없었던 원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속을 처형해야만 했던 제갈량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가정을 수비함에 있어 마속보다 뛰어난 장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반대를 무릅쓰고 마속을 기용했다. 그리고 마속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가정을 잃었다. 이는 유비 사후. 촉나라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제갈량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또한 이때까지 제갈량에게 밀려 기회를 엿보던 반대파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기도했다.


제갈량 역시 마속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공평무사한 법 집행을 중시한 제갈량이 마속의 죄를 가볍게 묻는다면 촉나라를 세우는 데 참가한 익주그룹이나 인재 배치에 반대했던 자들로부터 비판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군주를 대행 하는 승상 제갈량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오로지 법치(法治)’의 실행이었다. 공평무사(公平無私), 공명정대(公明正大)만이 정치세력 간의 알력을 잠재울 수 있고, 민심을 수습하며 나아가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처형하여 촉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도 제갈량 생전에만 유지되었으니 제갈량의 고뇌가 얼마나 심하였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충신이 아니로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저에게 역적을 무찌르고 한나라를 부훙시키는 책임을 맡겨 주옵소서. 그렇지만 성과가 없으면 저의 죄를 다스려 선제의 영령에게 고하옵소서. 폐하도 스스로 살피시어 정도를 자문하시고 순리에 맞는 말만 받아들이시되 선제의 유조를 기억하소서. 저는 폐하의 은혜를 받들게 되어 복받치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원정에 오르게 되어 표를 올리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출사표(出師表)는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후주 유선에게 올린 글로서, 충신의 진실한 마음이 넘쳐흐르는 고금의 걸작이다. 227년과 228년에 각각 작성했는데, 이를 구분하여 전후 출사표라고 부른다. 흔히 말하는 출사표는 전출사표를 말한다. 출사표는 진수의 『삼국지「촉서」'제갈량전' 과 양 나라 소명태자가 편찬한 『문선』 등에 실려 있다. 제갈량은 유선에게 나아가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리며 출사표를 올렸다.


제갈량의 출사표에는 군주에 대한 변함없는 단심(丹心)이 표현되어 있다. 그 것은 유비의 삼고초려에 대한 보은이자 신의였고, 제갈량 스스로가 사심을 버리고 후주 유선을 보좌하겠다는 맹세였다.


송대 학자 조여시(趙與時)는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나서 눈물을 흘리지 있는 자는 충신이 아니다.” 라고 했다. 심중에서 솟구치는 절절한 진심이 읽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천하의 명문장인 까닭이다.


제갈량의 출사표는 임금이 해야 할 일과 나라를 다스리는 길에 대해 논한 만고(萬古)의 명문이다. 제갈량이 오늘날 탁월한 정치가로 존경받는 것도 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출사표처럼 너무도 충정어린 신하의 진언은 오히려 군주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


‘자신이 덕이 낮다고 아무 때나 스스로를 낮추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이유를 붙여 변명하면 안 된다. 선악에 대한 상벌을 정확히 해야 한다.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 그때그때 처벌이 다르면 안 된다.’ 는 말들은 마치 아버지가 아이를 훈계하는 것 같아 듣기좋은 말은 아니다. 그리고 매번 ‘선제’ 유비의 유지를 이어받아 충성을 다한다고 한 말도 후주 유선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았으리라.


제갈량은 유비의 탁고에 충실하여 위기에 봉착한 국가대사를 꼼꼼히 챙긴 것이었지만, 유선은 이미 20세를 넘긴 청년 황제였다. 그러므로 역적을 토벌하러 가는 제갈량의 의리는 이해할지라도 제갈량이 유선을 어린 임금으로 생각하며 이것저것 아비같이 챙기며 보위하려는 충성은 귀찮은 잔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제갈량의 생각이 어떠하였건 간에 유선은 제갈량이 죽자 승상제도를 폐지한다. 유선으로서는 출사표에 눌렸던 승상 대행체제를 없애고 본격적인 친정체제(親政體制)를 구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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