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나무에게

 

                        카프카

 


그대여, 나는 안다
그대가 묵묵히 한곳에 머물러 있어도
쉬지 않고 먼 길을 걸어왔음을
고단한 계절을 건너 와서
산들거리는 바람에 이마의 땀을 씻고
이제 발등 아래서 쉴 수 있는
그대도 어엿한 그늘을 갖게 되었다
산도 제 모습을 갖추고
둥지 틀고 나뭇가지를 나는 새들이며
습윤한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맑고 깨끗한 물소리는
종일토록 등줄기를 타고 오르며
저녁이 와도 별빛 머물다가
이파리마다 이슬을 내려놓으니
한창으로 푸름을 지켜 낸 청명은
아침이 오면 햇살 기다려
깃을 펴고 마중 길에 든다
나무여, 푸른 6월의 나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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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간 꽃병

 

          쉴리 프뤼돔  (프랑스, 1839-1907)


이 마편초 꽃이 시든 꽃병은
부채가 닿아 금이 간 것.
살짝 스쳤을 뿐이겠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니
하지만 가벼운 상처는

하루하루 수정을 좀먹어 들어
보이지는 않으나 어김없는 발걸음으로
차근차근 그 둘레를 돌아갔다.

맑은 물은 방울방울 새어 나오고
꽃들의 향기는 말라 들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손대지 말라, 금이 갔으니.


곱다고 쓰다듬는 손도 때론 이런 것
남의 마음을 스쳐 상처를 준다.
그러면 마음은 절로 금이 가
사랑의 꽃은 말라죽는다.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온전하나
마음은 작고도 깊은 상처에

혼자 흐느껴 운다.
금이 갔으니 손대지 말라.

 

 

 

 

 

* **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 철학자.
 
쉴리 프뤼돔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기술자가 되기 위해 과학 기술 전문 학교에 입학했지만 눈병을 앓는 바람에 중퇴한다. 그 후 공장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860년 법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는 1865년 자신의 첫 시집 《구절과 시 (Stances et Poèmes)》를 발표했고 1881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된다. 그는 1901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며 1907년 9월 6일 샤트네말라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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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는 사람을 곤궁하게 만든다

 

 

< 경향신문,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2023.05.03   >

 

 


“시능궁인(詩能窮人)”이라는 말이 있다. 시가 시인을 곤궁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송나라 때 구양수는 이를 부정하고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 즉 곤궁해진 뒤에 시를 잘 짓게 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인이 영달을 누리는 경우가 별로 없고 부귀를 누리다 보면 좋은 시가 나오기 어려워지는 실제의 경험들은 이 두 말의 차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결국 시와 곤궁함은 무엇이 원인이랄 것도 없이 맞물려 있는 셈이다.

인문학 역시 사람을 곤궁하게 만든다. 드물긴 하지만 이른바 ‘역사 덕후’도 있고 여전히 철학이나 문학에 매력을 느끼는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사회 전반의 시선은 차갑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인문학‘도’ 필요하다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할 뿐 아니라 멋있는 말로 포장하여 강조하기까지 하면서도, 자신의 자녀나 지인이 인문학을 지망하는 것은 우려스러워한다. 첨단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영달을 누리며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문인 장유는 “시능궁인”에 대해 반론을 펼쳤다. 공자는 합당한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죽었으니 곤궁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공자를 소왕(素王)이라고 부르며 만세의 사표로 삼아왔다. 어느 왕도 공자처럼 세대를 넘어 진정한 영달을 누린 이는 없다. 아무리 대단한 부귀를 누린 사람이라도 다 죽으면 썩고 잊히는데 곤궁하게 산 시인들은 지금까지 기억되며 그 향기를 끼치고 있으니, 시야말로 사람을 영달하게 만드는 셈이라는 논리다.

그러니 장유의 말처럼 먼 훗날 나의 이름이 기억되리라는 소망만으로 인문학의 가시밭길을 감내하라고 권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공자의 언행을 보며 자신을 성찰하고 깨달음을 얻어온 것은 누구나 당연시하던 통념을 근본부터 흔들며 새로운 발상과 질문을 통해 가려졌던 것들을 드러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깊이 있는 인문학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의지와 실력이 있는 이들이 곤궁함을 걱정하지 않고 그 길에 몰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사회와 국가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는 현세의 영달을 꿈꾸는 분야들에 비해 매우 적은 비용으로도 충분한 일이다.

何處難忘酒(하처난망주)

 

                             白居易(백거이)

 

 

基一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長安喜氣新 (장안희기신)     장안에서 신바람 새롭던 날
初等高第日 (초등고제일)     첫 번에 과거에 우등 급제하여
乍作好官人 (사작호관인)     졸지에 좋은 관직을 얻었나니
省壁明長榜 (성벽명장방)     중서성 벽에는 합격 방문 붙었고
朝衣穩稱身 (조의온칭신)     조복은 편안히 몸에 꼭 맞았네
爭奈帝城春 (쟁내제성춘)     서울의 봄을 어찌할거나

 

 

基二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天涯話舊情 (천애화구정)     아득히 헤어졌던 벗을 만나 정담을 나눌 때
靑雲俱不達 (청운구부달)     청운의 꿈을 둘 다 이루지 못하고
白髮遞相驚 (백발체상경)     백발이 갈아드니 서로가 놀라는구나.
二十年前別 (이십년전별)     이십 년 전에 헤어져서는
三千里外行 (삼천리외항)     삼천 리 밖을 떠돌았다네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何以敍平生 (하이서평생)     무슨 수로 평생의 마음을 풀어보나 

 

 

基三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朱門羨少年 (주문선소년)     부귀하나 젊음이 부러울 때
春分花發後 (춘분화발후)     춘분날 온갖 꽃이 활짝 피어난 뒤
寒食月明前 (한식월명전)     한식날 달이 밝기 전에
小院回羅綺 (소원회라기)     정원에는 비단옷 여인이 배회하고
深房理管弦 (심방리관현)     깊은 방 안에서는 악기를 조율하네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爭過艶陽天 (쟁과염양천)     화창한 봄날은 다투듯 지나가리

 

 

基四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霜庭老病翁 (상정노병옹)     서리 내린 뜰에 늙고 병든 사람
闇聲啼蟋蟀 (암성제실솔)     어렴풋한 소리로 귀뚜라미 우는데
乾葉落梧桐 (건섭낙오동)     마른 잎은 오동나무에서 떨어지는구나
鬢爲愁先白 (빈위수선백)     귀밑털은 수심에 먼저 희어지고
眼因醉暫紅 (안인취잠홍)     얼굴은 취하여 잠시 붉어지는데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何計奈秋風 (하계나추풍)     무슨 수로 가을바람을 어찌해보나

 

 

基五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軍功第一高 (군공제일고)     전쟁에서 이룬 공이 제일 높을 때
還鄕隨露布 (환향수노포)     고향에 돌아감에 승전보가 따르고
半路授旌旄 (반노수정모)     거리는 반이나 깃발로 덮여있네
玉柱剝蔥手 (옥주박총수)     거문고 발에 고운 손 다 벗겨지고
金章爛椹袍 (금장란심포)     금장은 두루마기 위에 눈부시구나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何以騁雄豪 (하이빙웅호)     무엇으로 영웅호걸의 회포를 풀까

 

 

基六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靑門送別多 (청문송별다)     청문에서는 송별이 잦을 때라네
斂襟收涕淚 (렴금수체누)     옷깃 여미고 눈물 훔치니
簇馬聽笙歌 (족마청생가)     말들도 생황소리에 귀 기울이네
煙樹灞陵岸 (연수파능안)     파릉 언덕 나무는 안개에 싸이고
風塵長樂坡 (풍진장낙파)     장락궁 비탈에는 흙먼지 이네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爭奈去留何 (쟁나거류하)     떠나고 머무르는 마음 어찌하리오

 

 

基七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逐臣歸故園 (축신귀고원)     쫓겨 귀양갔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
赦書逢驛騎 (사서봉역기)     사면조서 가져온 역마를 맞이하니
賀客出都門 (하객출도문)     축하하는 손님이 도성 문을 나오네
反面瘴煙色 (반면장연색)     얼굴 반은 거무스름 병색이 짙고
滿衫鄕淚痕 (만삼향루흔)     옷에는 가득 고향 그린 눈물 자국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何物可招魂 (하물가초혼)     무엇으로 떠나는 혼을 불러오랴

 

 

 

 

 

 

‘어떤 자리서 술을 잊지 못할까(何處難忘酒)’ 백거이(白居易·772∼846)

<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 수] ,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2020-10-30 >


술이 좋아 마시면서도 애써 술 마실 명분을 찾아내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기왕 마시는 술이지만 명분이 그럴싸하면 마음의 부담도 덜고 혹여 있을지 모를 주변의 눈총도 피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하물며 서로 아득히 멀리 이별했다 20년 만에 만난 친구와 옛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누군들 시인의 이 권주가에 공감하지 않으랴. ‘어떤 자리서 술을 잊지 못할까’는 7수로 이루어진 연작시. 옛 친구와 회포를 푸는 경우 외에 시인은 어떤 때 술 생각이 간절할 것이라고 상정했을까. 장원 급제하여 관복을 입고 장안을 누빌 때, 전공(戰功)을 세운 영웅이 군사를 이끌고 금의환향의 행차에 나설 때, 병든 노인이 서리 내린 뜰에서 외로이 소슬한 가을바람을 느낄 때, 조정에서 쫓겨난 신하가 도성을 떠나 눈물로 낙향의 길에 오늘 때 등 다양한 경우를 내세우고 있다.

이백, 두보에 못지않은 시명(詩名)을 떨쳤던 백거이, 취음(醉吟) 선생이라는 호(號)에 걸맞게 음주시(飮酒詩)에 관한 한 오히려 두 사람을 능가할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다만 이백의 음주시가 호탕한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면 두보의 그것에는 불우한 삶 속에서 악전고투했던 침울한 분위기가 투영되어 있고 백거이의 음주시에는 달관과 유유자적의 정취가 물씬 배어난다.



한 잔 술이 필요한 순간
   
 

술 생각 잊기 어려운 순간이 언제인가
남쪽 하늘에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지
잠시뿐이었구나 멀어진 저 꿈은
허무하구나 내 한평생이
울적하여 흉금을 터놓기도 고달프고
침통하여 자주 무릎을 끌어안고 한숨 쉬네
이때 술 한 잔이 없다면
흰머리가 그대로 생겨버릴 것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蠻天風雨辰          만천풍우진
浮休萬里夢          부휴만리몽
寂寞百年身          적막백년신
鬱鬱披襟倦          울울피금권
沈沈抱膝頻          침침포슬빈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華髮坐來新          화발좌신래
 

이행(李荇, 1478~1534), 『용재집(容齋集)』 6권, 「해도록(海島錄)」

   
< 해설  : 김준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


   이 시의 제목은 ‘何處難忘酒(하처난망주)’로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원조이다. 백거이는 술이 꼭 필요한 인생의 일곱 가지 순간을 포착하여 7수의 시를 지었는데, “술 생각 잊기 어려운 순간이 언제인가[何處難忘酒]”로 시작하여 마지막에 “이때 술 한 잔이 없다면[此時無一盞]~”으로 맺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시대 문인들이 더러 이 시의 제목과 체제를 본떠 시를 지었다. 그중에서 이행의 시를 소개해 본다. ‘용재(容齋)’라는 호로 잘 알려진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한시 대가로 손꼽히는 분이다. 소개한 시는 거제도 유배 살이 때 지은 시를 모은 「해도록(海島錄)」에 실려 있다.

 
   이행은 어째서 유배를 떠났던가. 1495년(연산군1)에 과거 합격하여 관로에 들어선 후, 1504년에는 사간원 헌납을 거쳐 홍문관 응교가 된다. 이 해 논란이 된 사건이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숭하자는 논의이다. 윤씨는 성종 때 여러 사건으로 인해 폐서인(廢庶人)되었는데, 연산군은 등극 후 왕후로 추숭하려고 했고 모친의 원통함과 관련된 이들을 탄압했다.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사건이다. 당시 이행은 왕에게 간언하는 홍문관 관원으로서 윤씨의 추숭에 반대하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유배에 오르게 된다.

 
   그 유배길은 어떠했던가. 갑자년(1504년) 4월 장형(杖刑)을 맞고 충주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벗인 박은(朴誾)이 참수를 당하자 박은과 친하다는 이유로 또 장형을 받고 노역에 충원되었다. 9월에는 거의 죽을 때까지 모진 고문을 받았고, 12월에는 다행히 사형을 면하였지만, 또 장형을 맞고 함안군의 관노로 배속되었다. 1505년 가을에는 익명서(匿名書)로 인해 또 옥사가 일어나 고문을 받으며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인 1506년 거제도로 이배(移配), 그해 2월에 거제에 도착해 위리안치되었다. 거제에 도달했을 때가 그의 나이 29세였다. 젊은 나이지만 누차 장을 맞고 고문을 당하며 배소를 옮겨 다녔으니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엘리트가 거친다는 홍문관 관원에서 한순간 죄인으로 전락하여 남쪽 끝으로 쫓겨난 처지, 장형과 고문을 또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기약 없는 유배지에서의 막연함. 이 모든 것이 그를 괴롭게 했을 것이다. 어느 날 비바람과 함께 절망과 좌절이 엄습하자 그는 한 잔 술로 이를 이겨내려 하였다. 그에게 음주란 곧 절망적 상황에서 삶을 부지하려는 생의 노력이었다. 그렇기에 이 시의 ‘何處難忘酒’를 “도저히 술이 없으면 안 되는 순간”이라 번역해도 무방하리라.


   이후에 이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해 가을 서울로 압송하여 죽을 때까지 곤장을 치라는 명이 내려와 상경하는 도중 기적적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사면되었다. 이후 다시 조정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지내며 우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1531년(중종27)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다가 그의 일당에게 도리어 탄핵을 받아 1532년 평안도 함종으로 유배 갔다가 2년 뒤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마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 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 너희의 가슴을 간직 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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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중열운(次仲說韻)」 中  第3首

 

                     이행(李荇) (1478-1534)

 



佳節昏昏尙掩關     좋은 계절은 저물어가 오히려 문을 닫아걸고,
不堪孤坐背南山     어찌 고독히 앉아 남산을 등지고 있나?
閑愁剛被詩情惱     한가한 근심에 억지로 詩情으로 하여 고뇌케 하니,
病眼微分日影寒     병든 눈에 세미하게 나눠진 햇빛 시리네.
止酒更當嚴舊律     술을 금지했지만 마땅히 옛 禁酒의 규율 고치나,
對花難復作春顔     꽃을 대하며 다시 봄의 얼굴 짓기 어렵구나.
百年生死誰知己     백년의 생사에 누가 知己인가?
回首西風淚獨潸     머리 돌리니 가을바람 불어 홀로 눈물 흩뿌리네.

 

 

〚작자〛 이행(李荇, 1478, 성종 9~1534, 중종 29) 박은(朴誾)과 함께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라고 불렸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叟)·청학도인(靑鶴道人). 조선전기 우찬성,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저서로는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고,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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