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은 깨진다는 공식, 뉴진스 만든 민희진

 

 

 

< 조선일보 topclass, 유슬기 기자, 2023년 09월호 >

 


1979년생. K팝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개념을 만든 사람, SM엔터테인먼트의 평사원으로 입사해 등기임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이후 방시혁의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해 하이브 신사옥 디자인을 총괄하고, ‘어도어’라는 레이블을 만들어 대표가 됐다. 20년간 K팝 업계에 몸담았던 통찰과 철학을 녹여 걸그룹 뉴진스를 만들었다. 


‘히트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공식을 깨고 싶었다.
성공을 위해 모두가 비슷한 스타일을 지향하는 게 업계 종사자로서 안타까웠고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 싶었다.

 


2022년 7월 22일 데뷔한 5인조 걸그룹 뉴진스는 유행을 타는 듯 타지 않으면서 늘 곁에 머무는 ‘New jeans’를 뜻한다. 때로 이 단어는 ‘New genes’로도 읽히는데 그저 패션(jeans)이 아니라 새로운 유전자(genes)를 가졌다는 뜻이다.

민희진 프로듀서가 이들에게서 발견하고 키우고자 했던 유전자는 직관적이다. 이들은 모두 살굿빛 피부에 긴 생머리를 찰랑인다. 온몸을 조이는 무대의상이 아니라 티셔츠나 스웨터, 품 넓은 바지를 입고 무대를 누빈다. 다른 어떤 장식이나 무대장치 없이, 그저 소녀들의 생명력만으로 무대는 꽉 차다 못해 넘치는 기분이 든다. 

애초 민희진 프로듀서는 SM 시절부터 소녀시대와 샤이니, F(X)에 불어넣은 어떤 세계관이나 이미지로 각인됐으나 그가 처음 단독으로 기획한 걸그룹은 그 모든 굴레를 벗어던졌다. 다른 도구가 필요 없고, 그저 이들로 충분하다는 선언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되도록 솔직하게 


민희진 프로듀서는 실제로 인터뷰에서 “‘가능한 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설정보다는 대상의 본래 모습이 투영된 자연스러운 흐름과 복선을 좋아한다. 자연스러운 열린 전개를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뉴진스 멤버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도 ‘자연스럽게’와 ‘솔직하게’다. 한때는 세계관을 만들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관을 거부한다. 이는 민희진 프로듀서가 강조하는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간다”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아티스트 개개인이 ‘아이돌’이라는 단어로 몰개성화되는 걸 꺼려하고, 아티스트 개인 안에 있는 고유의 사연과 개성이 드러나길 바란다. 그러려면 ‘진짜’여야 하고 그러니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가야 한다는 것.

여기서 과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그에게 캐스팅되는 이들은 트레이닝이나 시스템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고유의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가 하이브에서 독자적인 ‘어도어’라는 레이블을 설립한 이유다. 기존 사업의 정형화된 루틴을 벗어나고 싶어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싶어서다. 방시혁 의장은 하이브 신사옥의 모든 디렉터를 민희진 프로듀서에게 맡길 정도로 신뢰했고,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존중했다. 

2019년 9월 오디션을 진행하고 2020년 초부터 2년간 연습생 시절을 거친 뉴진스는 애매한 신비주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 ‘밀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민희진 프로듀서는 멤버들의 이미지도 풍성하게 제공하고, 타이틀곡은 무려 세 곡을 공개했으며, 멤버별로 뮤직비디오를 따로 찍기도 했다. 즐거움에서 최선이 나온다고 믿기에 2년의 연습생 생활은 최대한 ‘즐겁게’ 만들려 했다. 이들이 준비 과정을 즐거워하고, 무대를 즐길 수 있다면 그 에너지가 그대로 퍼포먼스로 이어지리라 믿었다. 음악과 퍼포먼스, 매니지먼트까지 진두지휘한 민희진 프로듀서는 2004년생부터 2008년생까지 이어지는 멤버들의 부모 세대와 자신이 비슷한 또래인 걸 알고 이들에게 ‘엄마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로 한다. 녹음실에서 디렉션을 줄 때도 그는 호통을 치거나 예민하게 굴기보다 “잘하고 있어” “지금 좋은데?” “그대로 가보자”라는 말을 주로 했다. 멤버들이 곡의 느낌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도록 가이드 보컬을 쓰지 않았으며, 누군가를 모방하거나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소리를 내도록 이끌었다.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공식이 흥행을 만든다 


뉴진스의 음악도 그렇다. 지금 잘되는 K팝 음악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 공식을 따르고 싶지 않아 레이블을 설립한 면도 있다. 민희진 프로듀서는 “‘히트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공식을 깨고 싶었다. 성공을 위해 모두가 비슷한 스타일을 지향하는 게 업계 종사자로서 안타까웠고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 싶었다”고 했다. 

연습생 생활을 하면 자연히 학창 시절이 없어진다는 선입견도 깨고 싶었다. 어도어를 하나의 학교처럼 생각하고, 멤버들이 연습생 시절을 빼앗긴 시간이 아닌 배우는 시간으로 기억하길 바랐다. 그런 의미로 문학, 작문을 넣어 곡의 가사를 써보는 시간도 가졌다. 앨범에 대한 전체 콘셉트와 곡의 방향을 설명하면 거기에 대한 경험을 나누고 글을 써보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뉴진스는 2022년 7월 22일 자정 신곡 ‘어텐션’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며 기습 데뷔했다. 프로모션이나 티저 같은 관행은 따르지 않았다. 

이후 8월 18일 데뷔 3주 만에 〈엠카운트다운〉 1위에 오르고,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에 2주 연속 두 곡을 올렸다. 이들은 2022년 연말 아시아아티스트어워즈(AAA, Asia Artist Awards)에서 신인상과 대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2023년 발매한 2집은 5주 연속 멜론 음원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뿐 아니다. 영국 오피셜 싱글차트에 5주 연속 진입했고,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차트 ‘빌보드200’에서는 정상을 밟은 뒤 2주 연속 톱10에 올랐다. 

한편 지난 8월 3일 뉴진스는 K팝 걸그룹 최초로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 페스티벌 ‘롤라팔루자 시카고’ 무대에 올랐다. 45분간 무려 열두 곡의 노래를 라이브로 불렀는데 더욱 장관이었던 건 관객들이 떼창으로 이 노래를 함께했다는 것. 민희진 프로듀서 역시 감격스러웠는지 이 장면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뉴진스의 발표 곡은 이미 누적 스트리밍 20억 회를 돌파했다. K팝 아티스트 최단 기간이라 영국 ‘기네스 월드 레코드’에도 등재됐다. 뉴진스의 노래는 ‘하이텐션’은 아니다. 오히려 편안한 미드텐션이다. 기존에 쓰지 않은 장르인 저지클럽의 비트와 왁킹, 개러지, 펑크, 힙합 등을 가미했다. 이 새로운 노래를 하이틴 소녀들이 부른다. 더구나 ‘ETA’ 뮤직 비디오에는 양조위가 출연하는데, 이는 민희진 프로듀서의 제안으로 성사됐고, 그는 노개런티로 출연했다는 후문이다. 양조위의 등장은 3040세대의 향수를 깨우고, 이 모든 영상을 아이폰으로 찍었다는 사실은 10대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실제로 많은 10대들이 뉴진스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안드로이드폰을 아이폰으로 바꿨다는 기사도 등장했다. 민희진 프로듀서의 취향과 감성이 다시 한 번 대중의 과녁을 명중했다는 이야기다. 

2004년생 민지와 하니, 2005년생 다니엘과 2006년생 해린, 2008년생 혜인은 언제 어디에서 노래를 불러도 자신만의 목소리로 보컬을 완성해내고, 이들은 무대에 올라 다섯이 모인 것만으로도 늘 신나고 흥겹다. 이제 막 열아홉이 되었거나 아직 열다섯인 이 소녀들은 민희진이라는 지붕 아래에서 자유롭고 활기차다. 민희진 프로듀서가 이들을 육아하듯 키울 때 심어주려 했던 심성이 바로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었기 때문이다.

김창완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

 

 

< 한겨레,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2023-05-28 >

어렸을 적 ‘산울림’의 음악은 예쁜 물감들로 만들어진 ‘동화의 성'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빨노초파 원색의 음표들로 둘러싸인 그 성안에 들어가면 예쁜 투명 색유리를 통과한 음악 빛깔이 보이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때 받은 빛깔은 ‘개구쟁이’처럼 크라잉넛의 음악 어딘가에 묻어있으리라. 초중고 동창 녀석들인 크라잉넛은 산울림이 깔아놓은 주단을 밟고 미친 듯이 떼굴떼굴 구르며 28년 동안 달려왔다. 그렇게 산울림의 음악과 함께 성장해 온 크라잉넛이 실제로 김창완 형님과 술잔을 비워가며 밤을 채워가는 사이가 되었다니 아직도 신기할 뿐이다.


얼마 전 김창완 형님의 개인전 ‘붓으로 보다’ 전시에 다녀왔다. 김창완 형님은 라디오 디제이를 하면서 매일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직접 쓰시고, 음악과 연기뿐 아니라 그림도 그리고, 자전거도 사계절 거의 매일 타시고 그 와중에 풍류도 빼놓지 않는다. 도대체 김창완의 시간은 어떻게 흐른단 말인가? 혹시 ‘시간 축지법' 같은 것을 사용하시는 게 아닐까?


비가 슴슴하게 내리던 평양냉면 같은 날씨였다. 갤러리도 오래된 양옥을 개조해 만든 곳으로, 편안한 고향집 같은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도 마주치고 명절날 철딱서니 없이 떡국 얻어먹으러 온 막내처럼 많은 분께서 반겨주셨다.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화려하진 않지만 어렸을 적 예쁜 물감으로 만든 동화의 성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입구 쪽 벽에는 <푸른 눈물> 작품이 지쳤던 내 마음 대신 울어주고 있었다. 행복한 푸른 눈물이었다. 푸른 장미잎이 새벽 호수에 조용히 떨어지듯 평온해졌다. 건너편 벽에는 와인 코르크 뚜껑을 오브제로 만든 <내 술친구>라는 작품이 눈이 풀린 개구쟁이 표정을 지으며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한경록이 아니냐고 많이들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동안 김창완 형님은 꽃만 100여 점 그리셨다는데, 전시에 가지고 온 작품만 30점 정도라고 하셨다. <파란꽃>이란 작품에서는 떨어지고 있는 파란 꽃잎을 통해 그림 안에 시간을 담아내셨다고 한다. 그림 속에 시간을 담으니 꽃잎은 시간(詩間·시 사이)을 낙화하고 있었던 것일까?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의 신비롭고 오묘한 의미에 관심 없는 철모르는 아이처럼 살고 싶은데, 시계 초침 소리가 복싱장에서 샌드백 텅텅 치듯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확실히 살아있다. 우리도 시간도. 불현듯 불안감이 불청객처럼 매너 없이 찾아올 때, 김창완 형님의 ‘시간'이라는 노래가 위안을 준다.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중략)/ 후회할 때 시간은 거꾸로 가는 거야/ 잊지 마라 시간이 거꾸로 간다 해도/ 그렇게 후회해도 사랑했던 순간이/ 영원한 보석이라는 것을”(‘시간’ 김창완)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니 우리 모두는 그 존재만으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그 누가 뭐라 비난해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그 누구와 비교할 필요도 없다. 화려하게 반짝이며 빛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아련한 상처는 시간이라는 파도가 부드럽게 감싸줄 것이다. 지나고 나면 산울림의 ‘청춘’처럼 처연하고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될지 모른다. 시간이란 두렵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형님께서 술이라도 한잔 사 주실 때면 술잔 위에 넘실거리는 하얀 막걸리를 화선지 삼아 시를 써주시기도 하고 지혜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도 한다. “다시 순수로 돌아가야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는 순수한 즐거움 때문이었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리고 “예술은 구차하면 안 된다”라고도 하셨다. 예술과 관객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감정은 전달된다. 덧칠하고 설명할수록 상상력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놀이는 오래가지만 장난은 금방 사라진다. 항상 진심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형님은 비싼 캔버스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꼭 비싼 재료가 아니더라도 진심은 전해진다고 하셨다. 항상 소박하시다. 조용한 골목길에 위치한 집 같은 갤러리의 투명 테이프로 고정된 와이어에 걸린 조금은 삐뚤어진 그림들이었지만 그 역시 아름다운 인생 같고 생명력이 느껴졌다. 날씨가 흐려서 꽃들은 더욱 선명했고 웃음과 향기는 은은하게 퍼져있었다. ‘붓으로 보다’ 전시는 따뜻하고 소박하지만 그 향기는 묵직한 기억으로 남는다.


누군가 형님께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냐고 물어봐서, 아무 생각 없이 연기한다고, 자신이 연기를 하는 줄도 모르는 상태로 연기한다고 답했다 하셨다. 슬픈 노래도 슬픔에서 빠져나와서 노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김창완 형님의 시간은 때로는 음악, 연기, 그림 그 자체로 몰입되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자유로이 흐르는 것이 아닐까?

슬픔을 달래는 슬픈 노래들

 

 

< 조선일보, 장유정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대중음악사학자,  2023.02.23  >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타히티섬은 높은 자살률로 종종 거론된다. 자살률이 높은 것은 슬픔을 느끼는데 이를 표현할 단어가 없다 보니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비감, 비애, 비참, 비탄, 애수 등 슬픔을 표현할 다양한 단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서는 달라도 우리의 종착지가 죽음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슬픔으로 가는 길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언젠가 우리 모두 헤어질 운명이라는 걸 떠올리면 모든 인연은 슬픈 인연이다.

대부분의 대중가요가 사랑과 슬픔의 노래인지라 ‘슬픔의 노래’는 차고 넘친다. ‘사(死)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은 ‘정사(情死)’로 삶을 마감하면서 광복 이전 ‘슬픔의 가수’로 불렸다.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 선우일선도 윤심덕을 잇는 슬픔의 가수로 지목되었다. 이난영을 잇는 ‘엘레지(elegy)의 가수’로 이미자도 언급되는데, 그들의 창법과 음색에서 느껴지는 슬픔의 정서 때문일 것이다. 밝은 동요마저 슬프게 들리게 하는 백지영도 슬픈 노래에 일가견이 있는 가수다.

슬플 때 우리는 아예 슬픔에 침잠하거나 역으로 기쁜 일로 슬픔을 희석시키곤 한다.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들으며 눈물 콧물 빼는 것이 ‘눈물로 눈물 닦기’라면, 오히려 기분 좋고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은 ‘웃음으로 눈물 닦기’다. 슬픔을 소재로 한 노래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이현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신해철), ‘슬픈 바다’(조정현), ‘슬픈 그림 같은 사랑’(이상우), ‘슬픈 선물’(김장훈) 등 대중가요 속 슬픔은 대체로 연인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이다.

슬픈 노래의 백미는 역시 나미의 ‘슬픈 인연’(1985년)이 아닐까 싶다. 피아노 반주에 박건호의 아름다운 가사가 나미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애절하게 어우러져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려지곤 한다. 밴드 ‘015B’의 장호일은 대학생 때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에 매료되어 운전을 멈추고 노래를 끝까지 듣고서 언젠가 그 노래를 다시 부르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1994년에 객원 보컬 김돈규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다짐은 현실이 되었다.

 

https://youtu.be/4h4ZLDvpwOQ


슬픔의 시대다.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으로 현재까지 4만7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오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오늘 뉴스는 없습니다”로 시작하는 박세현의 ‘행복’이란 시처럼, 사건 사고 뉴스가 없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아닐까 싶다. 이미 닥친 슬픔은 공감과 애도와 연대를 통해 조금이나마 사그라질 수 있으니, 지금 이 순간 슬픈 모든 이에게 위로의 마음을 건넨다.

조용필과 신중현도 ‘뽕짝’이라고? 도대체 어디까지가 트로트인가
트로트는 과연 특정 장르의 4박자 노래일까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2023.01.27 >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2019년 이후 난데없는 트로트 열풍이 생겨난 것일까?

‘TV가 뽕짝판이 된 것이냐’ ‘이젠 지겹다’고 지탄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여전히 ‘미스터트롯2′가 시청률 20%를 훌쩍 넘고 있는데다 송혜교 주연 ‘더 글로리’를 누르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TV프로그램에 오른 걸 보면 전 세대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만 좋아해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결과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과거로 퇴행하는 사회적 현상은 아닐까?

그런데 최근 ‘미스트롯2′와 ‘미스터트롯2′에서 놀랍게도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1979)와 김완선의 ‘리듬 속의 그 춤을’(1987)이, 아 세상에, ‘트로트곡’으로 소개되는 걸 보고 솔직히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창밖의여자가 트로트였어? 리듬속의그춤을이 트로트였다고?(그러고 보니 신중현 작사 작곡의 이 노래에 어딘가 뽕짝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합니다) 그 시절 그 노래를 실시간으로 들었을 당시엔 트로트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노래들입니다.
https://youtu.be/4ExsxJg5uGY

https://youtu.be/R1DUUK8ccaM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성치 영화 ‘쿵푸 허슬’(2004)을 보다가 한 장면에서 놀랐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쿵푸 고수들이 모여 살던 아파트촌에 돌연 무더운 날 오후 3시쯤에 어울리는 중국 노래가 느긋하게 흘러나옵니다. 분명 중국어 가사인데 그 멜로디를 듣는 순간 한국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한국어 가사를 발화(發話)하며 그 노래를 따라부르게 됩니다.

“사랑해~ 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 는~ 죄~ 이라서~”

아, 그것은 저희 할머니께서 즐겨 부르시던 현인의 ‘꿈속의 사랑’(1956)이었습니다. 전후(戰後) 서민들의 곤고한 생활을 위로해 줬을 그 꿈꾸는 듯한 곡조가, 그런데 거기서 왜 나와! 오래 전 영화 ‘영웅본색’(1986) 중 주윤발이 술집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무용담을 늘어놓는 장면에서 갑자기 구창모의 ‘희나리’(1985)를 중국어로 부른 노래가 깔려 한국 관객을 의아하게 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꿈속의 사랑’도 중국으로 건너가 번안곡이 됐나?

알고보니 실제는 그 반대였습니다. 1940년대에 중국에서 유행했던 노래 ‘몽중인(夢中人)’(1942)을 작곡가 손석우가 가져와 우리말 가사를 붙인 노래가 ‘꿈속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비슷한 번안곡의 사례는 또 있습니다. 조영남의 ‘최진사댁 셋째딸’(1969)은 미국 가수 알 윌슨의 소울 충만한 노래 ‘스네이크’를 번안한 노래였습니다. 원곡을 들어보고 충격을 받은 분들도 꽤 있습니다.

https://youtu.be/bgnviO7y_Bk

https://youtu.be/ULx9k2QkL94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꿈속의 사랑’을 당연히 트로트곡으로 여기고, ‘최진사댁 셋째딸’은 트로트 중에서도 토속적인 맛이 강한 노래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트로트라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장르가 아니었나? 그런데 중국 노래와 미국 노래를 가져와 번안한 노래도 트로트라면, 과연 트로트의 정의는 무엇인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불러 많은 시청자를 감동시켰던 3년 전, 저는 이 노래의 작사·작곡자이자 원곡자인 김목경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원래 곡의 제목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였습니다. 막 환갑을 지난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노래 주인공이 60대라는 건 말도 안된다. 80대라면 모를까…”라고 털어놨습니다). 이제 한국 블루스 음악의 대가로 꼽히고 있는 김목경씨는 “새삼 저한테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다”며 좀 당혹스럽다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그건 트로트가 아니라 포크인데!”

하지만 그게 뭐 크게 문제가 된다는 얘기 같진 않았습니다. 이내 활짝 웃으며 “근데 임영웅이란 그 친구, 참 깨끗한 톤으로 매력 있게 소화하더라고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https://youtu.be/cKp4W5Iu95Q

 

그러니까 조용필이든 신중현이든 김완선이든 중국곡이든 미국곡이든 블루스든 포크든 세월이 흐른 지금은 모두 다…

‘트로트’가 된 것입니다.

이제 ‘4분의 4박자를 기본으로 한 한국 대중가요의 한 장르로서, 20세기 초 서양에서 유행한 사교댄스의 연주 리듬인 폭스-트로트에 바탕을 두고,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아, 1970년대에 강약의 박자를 넣고 독특한 꺾기 창법을 구사하는 독자적인 가요 형식으로 완성된 것’이라는 트로트의 사전적 정의는 수정돼야 할 것 같습니다(심지어 최근 나온 송가인의 ‘월하가약’은 3박자입니다). 어떻게 고쳐져야 할까요.

그것은 거칠게 말해 ‘흘러간 노래는 다 트로트’라는 것입니다.

......?

아니, 사실 이 정의도 충분치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사가 반야월(1917~2012·가수 진방남)이 남긴 이 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트로트는 흘러간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흘러온 노래다.”

이 말이 지금에 와서 보석처럼 빛나는 이유는,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어언 한 세기에 걸쳐 각각 당대에 유행해 사람들의 마음에 화인(火印)처럼 박힌 노래들을, 시대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애환(哀歡)을 함께 했던 노래들을, 그래서 이미 우리의 역사 속에 녹아들었으며 그 자체로 역사가 된 노래들을, 어느새 우리는 ‘트로트’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가요의 그런 역사성을 통 몰랐을 때는, 가요는 단지 두 가지만 존재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는 대학가요제나 조용필이나 전영록 음반에 담긴 ‘요즘 노래’,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요수첩’ LP 시리즈에 계통도 순서도 없이 담긴 ‘옛날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시대마다 세대마다 시기마다 시절마다, 저마다 이유와 사연과 곡절과 정서를 갖추고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오래도록 남은 노래들이 존재했습니다. 1920년대의 ‘희망가’(1921)가 식민지 청년의 암울하고 허무한 인생관을 노래했다면, 1930년대의 ‘목포의 눈물’(1936)은 ‘삼백년 원한 품은’이라는 가사를 삽입해 서러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항일 정신을 심었습니다. 1940년대의 ‘가거라 삼팔선’(1948)은 분단의 아픔을 노래했고, 1950년대의 ‘굳세어라 금순아’(1953)는 전쟁의 상처를 끝내 극복하려는 미래지향적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1960년대의 ‘마포종점’(1968)은 전차의 철거를 앞두고 순탄치 않게 펼쳐질 새로운 도시 생활을 예고하는 노래였으며, 1970년대의 ‘님과 함께’(1972)는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는 경제 성장의 시대에서 개인의 행복을 찾는 정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의 ‘아파트’(1982)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에서 영위하는 삶이 개막했음을 시사하는 노래였습니다.

트로트의 부흥은, 특정 가요 장르에 대한 회귀나 퇴행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정서를 대표하고 오래도록 살아남은 가요들이 역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 트로트의 새로운 정의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고 역사성을 갖췄으며 그 보편성이 지금까지도 대중의 마음 속에 살아남은 대표적인 한국 가요. 한마디로 역사가 된 노래.’

그렇다면 이제 반야월이 ‘흘러온 노래’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세월이 더 지나면 세기말 X세대의 불안과 회귀를 읊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 백 홈’(1995)나 21세기 젊은 여성의 자의식을 노래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 같은 노래도 트로트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트로트가 무엇인지 짧게 규정하는 최근의 몇 가지 말들은 이런 정의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트로트는 우리의 마음이고 눈물이다.”(영화 ‘복면달호’)

“트로트 가수는요, 어떠한 인생을 살아도 버려지는 인생이 없어요. 그게 다 노래 속에 스며들기 때문입니다.”(김용임)

“힘들어? 힘들면 힘들다 해. 아프냐? 아프면 아프다 해라. 트로트는 제게 이렇게 말해주는 음악입니다.”(영지)

저는 언젠가 수첩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습니다.

“헤어질 때 눈물을 삼키고 돌아서 촉촉한 눈가를 닦으며 술잔을 천천히 기울이면 발라드다. 

왜 헤어져야 하느냐고 소리를 크게 지르면 록이다. 

헤어지면 안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 말한다면 랩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넋이 나간 듯 팔다리를 흔드는데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하는 것처럼 느낀다면 뮤지컬이다. 

그리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다리를 붙잡고 가슴을 치면서 하소연하고 통곡했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가슴 한 귀퉁이에 그때의 그 슬픔이 여전히 사금파리처럼 박혀 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것은 트로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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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한 내 삶인데

 

                   (조용필 노래, 18집 2003년 발표)

                   (임보경 작사/ 오석준 작곡)

 


작은 창에 기댄 노을이 남기고 간 짙은 고독이
벌써 내 곁에 다가와 더없이 외로워져
보이는 건 어둠이 깔린 작은 하늘뿐이지만
내게 열려 있는 것 같아 다시 날 꿈꾸게 해


손 내밀면 닿을 듯한 추억이 그림자 되어
지친 내 마음 위로해주고 다시 나를 살아가게 해
계절 따라 피어나는 꽃으로 세월을 느끼고
다시 고독이 찾아와도 그 또한 내 삶인데

 

손 내밀면 닿을 듯한 추억이 그림자 되어
지친 내 마음 위로해주고 다시 나를 살아가게 해

라라라~~~~~~~~~
더는 사랑이 없다해도 남겨진 내 삶인데
가야할 내 길인데 그것이 내 삶인데

 

 

https://youtu.be/fCVBjFIZFuQ

https://youtu.be/FR17h3MDLtE

 

https://youtu.be/5PBujfDn6hk

 

https://youtu.be/EupR6C5zHPA

 

https://youtu.be/xR-lUlruoDU

 

Whisky on the Rock

 

                 노래 김연지(씨야)  (2022.04.20)   * 원곡 최성수(2002)

 

 

그날은 생일이었어 지나고 보니
나이를 먹는다는것 나쁜 것만은 아니야
세월의 멋은 흉내낼 수 없잖아
멋있게 늙는 건 더욱 더 어려워
비오는 그날 저녁 Cafe에 있었다
겨울 초입의 스웨터 창가에 검은 도둑고양이
감당 못하는 서늘한 밤의 고독
그렇게 세월은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도
즐겁다는 것도
모두다 욕심일 뿐
다만 혼자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 하는 얘기
얼음에 채워진 꿈들이
서서히 녹아 가고 있네
혀끝을 감도는 whisky on the rock


모르는 여인의 눈길 마주친 시선의 이끌림
젖어 있는 눈웃음에 흐트러진 옷사이로
눈이 쫓았다 내 맘 나도 모르게
차가운 얼음으로 식혀야 했다


아름다운 것도
즐겁다는 것도
모두다 욕심일 뿐
다만 혼자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 하는 얘기
얼음에 채워진 꿈들이
서서히 녹아 가고 있네
혀끝을 감도는 whisky on the rock


아름다운 것도
즐겁다는 것도
모두다 욕심일 뿐
다만 혼자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 하는 얘기
얼음에 채워진 꿈들이
서서히 녹아 가고 있네
혀끝을 감도는 whisky on the rock 

 

https://youtu.be/7h3ndp05JN0

 

https://youtu.be/lkt16yeo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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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얼굴 (1964)

 

                        작사 현암

                         작곡 이봉조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거리마다 물결이

거리마다 발길이

휩쓸고 지나간

허황한 거리엔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https://youtu.be/MV6t1bYq67U?list=RDMV6t1bYq67U

 

https://youtu.be/WIrcs0BbrNM

https://youtu.be/eYkq1JIrsG4

https://youtu.be/LOhMOYpVDQc

 

https://youtu.be/qRVcwexos7w

 

https://youtu.be/BU3wCx_Md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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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날

 

                           서정주 시

                           송창식 작곡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https://youtu.be/PZ0mhbZ6Q6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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