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은 깨진다는 공식, 뉴진스 만든 민희진
< 조선일보 topclass, 유슬기 기자, 2023년 09월호 >
1979년생. K팝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개념을 만든 사람, SM엔터테인먼트의 평사원으로 입사해 등기임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이후 방시혁의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해 하이브 신사옥 디자인을 총괄하고, ‘어도어’라는 레이블을 만들어 대표가 됐다. 20년간 K팝 업계에 몸담았던 통찰과 철학을 녹여 걸그룹 뉴진스를 만들었다.
‘히트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공식을 깨고 싶었다.
성공을 위해 모두가 비슷한 스타일을 지향하는 게 업계 종사자로서 안타까웠고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 싶었다.
2022년 7월 22일 데뷔한 5인조 걸그룹 뉴진스는 유행을 타는 듯 타지 않으면서 늘 곁에 머무는 ‘New jeans’를 뜻한다. 때로 이 단어는 ‘New genes’로도 읽히는데 그저 패션(jeans)이 아니라 새로운 유전자(genes)를 가졌다는 뜻이다.
민희진 프로듀서가 이들에게서 발견하고 키우고자 했던 유전자는 직관적이다. 이들은 모두 살굿빛 피부에 긴 생머리를 찰랑인다. 온몸을 조이는 무대의상이 아니라 티셔츠나 스웨터, 품 넓은 바지를 입고 무대를 누빈다. 다른 어떤 장식이나 무대장치 없이, 그저 소녀들의 생명력만으로 무대는 꽉 차다 못해 넘치는 기분이 든다.
애초 민희진 프로듀서는 SM 시절부터 소녀시대와 샤이니, F(X)에 불어넣은 어떤 세계관이나 이미지로 각인됐으나 그가 처음 단독으로 기획한 걸그룹은 그 모든 굴레를 벗어던졌다. 다른 도구가 필요 없고, 그저 이들로 충분하다는 선언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되도록 솔직하게
민희진 프로듀서는 실제로 인터뷰에서 “‘가능한 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설정보다는 대상의 본래 모습이 투영된 자연스러운 흐름과 복선을 좋아한다. 자연스러운 열린 전개를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뉴진스 멤버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도 ‘자연스럽게’와 ‘솔직하게’다. 한때는 세계관을 만들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관을 거부한다. 이는 민희진 프로듀서가 강조하는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간다”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아티스트 개개인이 ‘아이돌’이라는 단어로 몰개성화되는 걸 꺼려하고, 아티스트 개인 안에 있는 고유의 사연과 개성이 드러나길 바란다. 그러려면 ‘진짜’여야 하고 그러니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가야 한다는 것.
여기서 과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그에게 캐스팅되는 이들은 트레이닝이나 시스템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고유의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가 하이브에서 독자적인 ‘어도어’라는 레이블을 설립한 이유다. 기존 사업의 정형화된 루틴을 벗어나고 싶어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싶어서다. 방시혁 의장은 하이브 신사옥의 모든 디렉터를 민희진 프로듀서에게 맡길 정도로 신뢰했고,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존중했다.
2019년 9월 오디션을 진행하고 2020년 초부터 2년간 연습생 시절을 거친 뉴진스는 애매한 신비주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 ‘밀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민희진 프로듀서는 멤버들의 이미지도 풍성하게 제공하고, 타이틀곡은 무려 세 곡을 공개했으며, 멤버별로 뮤직비디오를 따로 찍기도 했다. 즐거움에서 최선이 나온다고 믿기에 2년의 연습생 생활은 최대한 ‘즐겁게’ 만들려 했다. 이들이 준비 과정을 즐거워하고, 무대를 즐길 수 있다면 그 에너지가 그대로 퍼포먼스로 이어지리라 믿었다. 음악과 퍼포먼스, 매니지먼트까지 진두지휘한 민희진 프로듀서는 2004년생부터 2008년생까지 이어지는 멤버들의 부모 세대와 자신이 비슷한 또래인 걸 알고 이들에게 ‘엄마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로 한다. 녹음실에서 디렉션을 줄 때도 그는 호통을 치거나 예민하게 굴기보다 “잘하고 있어” “지금 좋은데?” “그대로 가보자”라는 말을 주로 했다. 멤버들이 곡의 느낌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도록 가이드 보컬을 쓰지 않았으며, 누군가를 모방하거나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소리를 내도록 이끌었다.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공식이 흥행을 만든다
뉴진스의 음악도 그렇다. 지금 잘되는 K팝 음악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 공식을 따르고 싶지 않아 레이블을 설립한 면도 있다. 민희진 프로듀서는 “‘히트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공식을 깨고 싶었다. 성공을 위해 모두가 비슷한 스타일을 지향하는 게 업계 종사자로서 안타까웠고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 싶었다”고 했다.
연습생 생활을 하면 자연히 학창 시절이 없어진다는 선입견도 깨고 싶었다. 어도어를 하나의 학교처럼 생각하고, 멤버들이 연습생 시절을 빼앗긴 시간이 아닌 배우는 시간으로 기억하길 바랐다. 그런 의미로 문학, 작문을 넣어 곡의 가사를 써보는 시간도 가졌다. 앨범에 대한 전체 콘셉트와 곡의 방향을 설명하면 거기에 대한 경험을 나누고 글을 써보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뉴진스는 2022년 7월 22일 자정 신곡 ‘어텐션’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며 기습 데뷔했다. 프로모션이나 티저 같은 관행은 따르지 않았다.
이후 8월 18일 데뷔 3주 만에 〈엠카운트다운〉 1위에 오르고,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에 2주 연속 두 곡을 올렸다. 이들은 2022년 연말 아시아아티스트어워즈(AAA, Asia Artist Awards)에서 신인상과 대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2023년 발매한 2집은 5주 연속 멜론 음원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뿐 아니다. 영국 오피셜 싱글차트에 5주 연속 진입했고,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차트 ‘빌보드200’에서는 정상을 밟은 뒤 2주 연속 톱10에 올랐다.
한편 지난 8월 3일 뉴진스는 K팝 걸그룹 최초로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 페스티벌 ‘롤라팔루자 시카고’ 무대에 올랐다. 45분간 무려 열두 곡의 노래를 라이브로 불렀는데 더욱 장관이었던 건 관객들이 떼창으로 이 노래를 함께했다는 것. 민희진 프로듀서 역시 감격스러웠는지 이 장면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뉴진스의 발표 곡은 이미 누적 스트리밍 20억 회를 돌파했다. K팝 아티스트 최단 기간이라 영국 ‘기네스 월드 레코드’에도 등재됐다. 뉴진스의 노래는 ‘하이텐션’은 아니다. 오히려 편안한 미드텐션이다. 기존에 쓰지 않은 장르인 저지클럽의 비트와 왁킹, 개러지, 펑크, 힙합 등을 가미했다. 이 새로운 노래를 하이틴 소녀들이 부른다. 더구나 ‘ETA’ 뮤직 비디오에는 양조위가 출연하는데, 이는 민희진 프로듀서의 제안으로 성사됐고, 그는 노개런티로 출연했다는 후문이다. 양조위의 등장은 3040세대의 향수를 깨우고, 이 모든 영상을 아이폰으로 찍었다는 사실은 10대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실제로 많은 10대들이 뉴진스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안드로이드폰을 아이폰으로 바꿨다는 기사도 등장했다. 민희진 프로듀서의 취향과 감성이 다시 한 번 대중의 과녁을 명중했다는 이야기다.
2004년생 민지와 하니, 2005년생 다니엘과 2006년생 해린, 2008년생 혜인은 언제 어디에서 노래를 불러도 자신만의 목소리로 보컬을 완성해내고, 이들은 무대에 올라 다섯이 모인 것만으로도 늘 신나고 흥겹다. 이제 막 열아홉이 되었거나 아직 열다섯인 이 소녀들은 민희진이라는 지붕 아래에서 자유롭고 활기차다. 민희진 프로듀서가 이들을 육아하듯 키울 때 심어주려 했던 심성이 바로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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