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수령의 신단수, 발왕산 주목의 위로

 

 

< 조선일보,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2023.07.10 >

 

수령&nbsp;1800년의&nbsp;아버지&nbsp;왕주
고뇌의 주목

 

 


20세기 초반부터 한국의 민족종교에서 특별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바로 ‘후천개벽설’이다. 후천(後天)은 선천(先天)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대략 5만년의 사이클을 두고 선천과 후천이 교대한다는 주장이다. 인류 문명사를 몇천 년 단위가 아닌 5만년 단위로 나누어 생각하는 스케일이다 보니 잘 믿어지지 않았다. 전반전 5만년이 끝나고 후반전 5만년이 시작되면 어떤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

그 골자를 추리자면 ‘상놈이 양반 된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가로 성장한다, 그리고 ‘수조남천(水潮南天) 수석북지(水汐北地)’가 발생한다’ 등이다. 여기서 ‘수조남천’은 물이 남쪽 하늘로 몰려들고, ‘수석북지’는 북쪽의 물이 빠진다로 해석된다. 탄허 스님은 이 대목을 갖고 일본 열도가 물에 가라앉는다고 예언해 1970년대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에 대서특필되곤 하였다. 말하자면 북극의 빙하 물이 녹아서 남쪽 하늘로 흘러가는 도중에 일본이 직격탄을 맞고 침몰한다는 것이다. 탄허 스님이 이 예언을 하던 1970년대에는 너무나 황당하게 들렸지만 지금은 각도가 약간 달라졌다. ‘그럴 수도 있겠다’로 약간 바뀌었다. 특히 지구온난화를 눈앞에서 피부로 겪다 보니 전지구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지구온난화 시대에 주목받는 용평

후천개벽의 골자는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지구온난화일지 모른다. 여름에 섭씨 40도로 올라가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추위보다 더위가 문제인 세상, 40도 여름을 어떻게 견디나?

후천개벽의 온난화 시대에 필자가 주목한 곳이 바로 강원도 용평이다. 해발 700~800m의 대관령 고개. 여기는 아랫동네보다 평균 5~6도는 시원하다. 삼복 더위에도 30도를 잘 넘어가지 않았던 동네가 용평이다. 여름 더위를 어떻게 견디느냐가 관건인 시대에 돌입하면서 용평이 지닌 가치는 특별해졌다.

그 용평에 일찍부터 스키장이 세워졌다. ‘어떻게 여기에다 스키장을 세울 생각을 하였나?’ 쌍용그룹의 김석원 회장이 헬기를 타고 강원도 일대를 둘러보았는데, 가장 늦게까지 눈이 남아 있는 곳이 용평(龍坪)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택했다는 것이다.

현재는 이 용평리조트가 통일교 것이 되었다. 통일교는 어떻게 이 시원한 데를 소유하게 되었을까? 땅 보는 데는 참 귀신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고 문선명 총재가 여기를 찍었다고 한다. 문선명 총재는 지명에 용(龍) 자 들어가는 곳을 좋아하였다. 용산(龍山)도 그렇다. 용산에 철도고등학교가 있다가 이전하니까 그 터가 비었다. 입찰이 붙었는데 문선명은 “반드시 그 땅을 사라”는 오더를 내렸다. “왜 사야 합니까?” “용산에는 용의 뿔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국방부 자리이고 하나는 철도고등학교 자리이다. 말하자면 녹용 자리인 셈이다. 그러니 여기를 사야 한다.” 당시 롯데그룹하고 경합이 붙었지만 교주의 엄명에 의하여 300여억원인가를 주고 통일교가 샀다고 들었다. 여기에다 세계일보를 짓고 십몇 년 운영하다가 용산이 초고층 주상복합 타운으로 재개발되면서 다시 팔게 되었다. 3000억원 이상을 받았다고 들었다. 비용 제하고도 1000억원 정도가 현찰로 남았다. “이 돈을 어떻게 할까요?” “그 돈으로 용평을 사거라.” 돈이 용산에서 용평으로 이동한 셈이다.

당시 용평스키장을 팔고자 했던 쌍용은 매입자에게 ‘무조건 1000억원은 현찰로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다른 재벌도 용평을 사고자 했지만 그 자리에서 현찰 1000억원을 줄 수 있는 곳은 통일교뿐이었다. 문선명이 용평을 매입하라고 강력하게 오더를 내리기도 했다. 좋은 땅은 돈을 아끼는 게 아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놓친다. 1970년대 초반 여의도를 비행장으로 쓰다가 민간에 불하할 때도 입찰이 붙었다. 당시 문선명은 “여의도는 서울의 옴파로스(배꼽)이다. 아주 중요한 자리이다”라고 판단하였다. 현재 그 땅에 통일교 관련 빌딩이 서 있다. 교주는 영발과 예지력이 없으면 못한다. 문 총재는 ‘땅의 미래’를 바라다보는 데는 당대 최고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문선명의 신통력으로 찍은 곳이 발왕산(發王山)이요 용평(龍坪)이다. 발왕산도 왕기를 내뿜는다는 뜻을 담은 이름 아닌가. 이름도 특이하다. 나는 계룡산, 월출산, 지리산에서 주로 놀다 보니 그동안 발왕산을 가보지 못했다. 발왕산에서 볼 만한 것은 주목(朱木)이었다. 전국의 소나무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어온 80대의 고송(古松) 선생이 발왕산 주목은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필자를 데리고 갔다.

발왕산에는 천년 가까운 수령의 명품 주목이 수십 그루 있었다. 이처럼 오래된 주목이 도벌꾼을 피해 이제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은 발왕산이 얼마나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오지였나를 짐작하게 한다.

전국 2000여 그루의 명품 소나무를 거의 답사해본 고송 선생에 의하면 ‘소나무보다 한 급 위의 나무가 주목’이다. 한국 최고급의 나무가 야생 상태에서 보존된 곳이 발왕산이다. 나는 주목이 나무의 왕처럼 느껴졌다. 주목은 오래 사는 나무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다. 도합 2000년은 산다는 말이다. 그만큼 단단한 나무이다.

 

신령한 붉은색 나무, 주목

추운 데서 사니까 단단할지 모른다. 춥고 배고픈 데서 단련된 나무라 할 수 있다. 사람도 춥고 배고픈 단련을 받으면 영적인 성장이 되고 단단해진다. 주목의 최대 특징은 나무 색깔이 붉다는 점이다. 붉을 주(朱)는 동양에서 대단히 신성시하던 색깔이다. 붉은색은 양기를 상징한다. 사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색이다. 귀신을 몰아내면 그 집이나 건물에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 귀신을 쫓아주는 나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신령한 나무로 받들었던 나무이다.

그리고 오래 사는 나무이다. 일본 사람들은 주목으로 만든 문패를 최고로 친다. 붉은색 주목 문패는 염라대왕이 찾아오기를 꺼리는 상징이라고 한다. 체포영장을 발부받고 그 사람을 잡으러 갔다가 문 앞에서 붉은색 주목에 쓰인 이름을 보면 쉽게 체포를 못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주목 신앙은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여겨진다.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신단수(神檀樹)는 주목이 아닌가 싶다. 주목은 고산지대에서 잘 자란다. 해발 1500m가량의 발왕산, 그리고 강원도 오지였던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이유다. 

현재 발왕산에는 명품 주목을 감상할 수 있도록 숲속에다 데크길을 조성해놓았다. 안갯속에서 수령 1800년 된 아버지 왕주목을 보는 순간 그 어떤 신령함이 밀려왔다. 과연 단군시대의 신단수가 이러했겠구나! 둘레 4.5m의 어머니 왕주목도 역시 수령이 2000년 가까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오래된 나무를 어디서 보겠는가! 발왕산의 주목 숲을 데크길 따라 산책한다는 것은 단군시대의 신단수 숲을 산책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긴팔 옷을 걸쳐야 할 만큼 서늘한 발왕산에서 2000년 나이의 주목을 본다는 것은 내 인생의 짧음을 위로받는 기운을 얻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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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왕산 모나파크] 여덟 왕이 다스리는 주목 왕국에 주목하라! - 월간산

속에서 천불이 나기를 1,000번, 썩어 문드러지기를 1,000번, 토해내기를 1,000번, 그렇게 1,000년을 살았다. 발왕산(1,458m) 정상 부근에서 만난 천년주목은 속이 비어 있었다. 고산의 악조건을 견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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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이팝나무꽃 필 무렵

 

 

< 한겨레,  정남구 기자 , 2023-05-07 >

 

 



조선어학회가 우리말을 조사·연구하던 1930년대 쌀밥을 ‘이밥’이라 했다. 전라남도에서는 ‘니팝’이라 했다. 니팝나무는 꽃송이가 사발에 퍼담은 쌀밥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배고픈 사람의 눈이 아니라도 그 꽃잎은 눈부시게 하얀 쌀 같아 보인다. 니팝나무는 발음하기 좋게 곧 이팝나무로 이름이 바뀌어 사전에 실렸다. 수백년 살아남은 고목이 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들은 순천, 광양, 고창, 진안 등 전라도와 김해, 양산, 포항 등 경상도에 다 있다. 쌀 생산이 많은 곡창지대에 자생지가 많았던 게 우연 같지가 않다.


꽃 모양이 마치 좁쌀(껍질 벗긴 조)로 지은 밥처럼 보인다는 조팝나무는 4월부터 꽃을 피운다. 이팝나무꽃은 그보다 조금 늦게 핀다. 1980년 5월18~27일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려 피 흘려 싸우던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게 바로 이팝나무다. 그 인연을 살려 1994년 5·18묘지를 새로 조성할 때 묘지로 가는 길 양편에 3㎞에 걸쳐 이팝나무 가로수 길을 조성했다. 그 길에서 보면 하얀 꽃에 덮인 이팝나무는 마치 소복을 입은 것 같아 보인다.


‘5월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그 꽃은 오늘날 가로수로 전국에서 인기가 아주 높다. 산림청 집계를 보면, 2021년 현재 우리나라 가로수는 왕벚나무(112만그루), 은행나무(104만그루), 이팝나무(72만그루) 차례로 많다. 서울시에도 2011년 8874그루이던 이팝나무 가로수가 2019년 1만7639그루로 늘어났다. 전체 가로수의 5.8%로, 은행나무,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 느티나무, 벚나무에 이어 다섯번째로 많다. 2011년에는 회화나무, 메타세쿼이아가 이팝나무보다 더 많았는데 제쳤다. 은행나무, 회화나무, 메타세쿼이아가 줄어든 자리를 이팝나무로 다 채웠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 심고 있다.


그런데 기후변화는 이팝나무의 개화 시기도 점점 앞당기고 있다. 서울에선 이제 4월 하순이면 이팝나무꽃이 활짝 핀다. 그렇다고 ‘5월 꽃’의 이미지가 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이팝나무는 꽃이 20일 넘게 간다. 

 

4월27일 광주를 찾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광주항쟁을 ‘북한 간첩이 선동한 폭동’이라고 했다. 그런 넋 나간 소리에 밀리지 않도록, 피로써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낸 이들을 기억해야 할 ‘이팝나무꽃 필 무렵’이다.

제주 밀감과 왕벚나무의 아버지 에밀 타케 신부 다시 오다

 

 

< 조선일보 황은순 차장, 2017.01.20 >

 

 


2014년 8월 14일 저녁, 대구대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정홍규 신부(대구가톨릭대 사회경제대학원장)는 지인인 김규씨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구한말 선교사로 오셨던 에밀 타케 신부를 아십니까? 타케 신부가 제주도에서 대구로 가져와 심은 왕벚나무가 있다는 것은 아십니까? 타케 신부가 식물학자로, 사제로 우리나라를 위해 하신 일이 많은데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고 여기에 무덤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으니….”

정홍규 신부는 에밀 타케의 존재를 그때까지 전혀 몰랐다. 김씨는 선친인 김달호 전 경북대 교수가 생전에 타케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했다. 타케 신부와 이웃에 살면서 가족처럼 지냈던 선친은 타케 신부의 삶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늘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김씨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던 정 신부는 다음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김씨에게 들은 대로 대구 남산동에 있는 성직자 묘지를 찾았다. 그곳에는 과연 에밀 타케(Emile Taquet) 신부의 묘가 있었다.

‘본적 佛國
1873. 10. 30~1952. 1. 27
사제 嚴 에밀 다겟’.

비석에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안경을 쓴 벽안의 신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묻혀 있던 에밀 타케(세례명 에밀리오) 신부의 이름이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순간이었다. 정 신부는 그때부터 타케 신부의 흔적을 좇기 시작했다. 타케 신부가 1920년대 대구에 심었던 것으로 보이는 두 그루의 왕벚나무도 찾았다. 그로부터 2년 반, 대구대교구와 서귀포성당을 중심으로 타케 신부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그를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에밀 타케, 한국명 엄택기 신부 사후(死後) 65년. 과거완료형인 그를 현재로 불러내 기려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타케 신부는 1911년 일본에서 온주밀감 14그루를 제주도에 들여와 밀감산업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서귀포시 서홍동 204번지 ‘면형의 집’ 앞에는 그중 살아남은 한 그루가 아직도 열매를 맺고 있다. 그는 제주에서 자생하고 있는 왕벚나무(천연기념물 제156호)를 발견하고 유럽 식물학계에 알렸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일 왕벚전쟁의 결정적 열쇠를 제공한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왕벚나무는 일본의 나무가 됐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일본은 왕벚나무가 한국산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구, 마산, 나주 등 그가 부임한 곳마다 왕벚나무를 심은 것을 보면 타케 신부가 얼마나 왕벚나무를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한국식물분류학계에 남긴 흔적은 뚜렷하다. 7040여종의 식물을 채집해 유럽에 보낸 표본 중 250여종이 신종으로 분류됐다. 그중 타케 신부의 이름을 기념해 학명에 ‘타케’가 들어간 식물만 섬잔대(Adenophora taquetii H. Lv)를 비롯해 20종에 달한다.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되는 구상나무를 한라산에서 처음 발견한 것도 타케 신부이다.

타케 신부의 존재를 알고 있던 식물학계에서는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에밀 타케냐’는 시선도 있다. 그동안 식물학계에서 그의 이름은 종종 등장했다. 특히 왕벚나무 원산지를 둘러싼 한·일 논쟁에서는 빠지지 않은 키워드였다. 그러나 천주교 차원에서 타케 신부는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었다. 최근에야 식물학자 에밀 타케와 사제 에밀 타케의 퍼즐 조각이 맞춰진 것이다. 그 조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격동의 한국 근대사가 있고, 한국 천주교사(史)가 있다. 낯선 땅을 헤매며 식물을 채집하던 식물학자가 있고, 유럽식 교육을 도입해 성직자를 길러내기 위해 애쓰던 교육자가 있다. 타케 신부는 이 땅에서 식물학자로, 교육자로 살았다. 무엇보다 이 땅을 사랑하고 가난한 신자들을 품어준 따뜻한 사제였다.


사제, 에밀 타케

1873년 프랑스 노드주에서 태어난 타케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24세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다음해인 1898년 1월 부임지인 한국 땅을 밟은 후 죽을 때까지 한국을 떠난 적이 없다. 그에게 한국은 제2의 조국이었다. 아시아 선교를 내걸고 만들어진 파리외방전교회는 죽을 때까지 선교지를 떠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선교사가 될 수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658년에 세워진 후 아시아에 4500명, 한국에 360여명의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는 부산, 진주, 마산, 목포, 나주 등 남쪽 지방을 두루 다니며 선교를 맡았다. 그의 행적이 가장 뚜렷한 곳은 1902년 파견돼 13년을 머물렀던 제주와 말년을 보낸 대구이다. 그는 1922년 대구가톨릭대 전신인 성유스티노 신학교 교수로 부임해 제3대 교장을 거쳐 심장마비로 눈을 감기까지 대구에서 30년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식물학 분류 자료 등을 비롯해 마지막 행적에 대한 기록은 1964년 대구대교구청 화재로 소실돼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나마 그가 제주에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1880~1933년 체류)에게 보낸 18통 등 프랑스어 편지들을 통해 그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저는 권총에 총알을 재고 불한당들이 베르모렐 신부에게 한 것처럼 저를 공격해 올 경우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주교님 편지가 진주에서 마산까지 300리를 가는 데 22일이나 걸렸습니다.’(1899년 7월 28일, 진주)

‘허술한 집 여기저기에 비가 새고 있습니다. 바닥은 땅과 같은 높이여서 위아래로 습기가 차 있습니다. 문 앞에 있는 지붕은 제 어깨까지 내려옵니다. 방안에서는 여기저기 벽 틈을 통해 바람이 들어옵니다. 더구나 그곳을 뱀과 다른 벌레들이 지나다닙니다. 집은 논에서 10m 정도 되는 곳에 있으므로 마을 사람들의 절반이 말라리아 열병 때문에 제게 키니네를 달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교님을 한 번 더 괴롭힐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자면 저는 제가 좀 더 적절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주교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습니다만 저는 1898년 이래 여섯 번째 집에 살고 있으며 이제 일곱 번째 집을 찾고 있으니 제 돈 주머니는 적자일 뿐입니다.’(1902년 6월 27일, 제주)

그가 제주도 서귀포에 파견될 당시는 천주교와 제주도민이 충돌한 신축교안(이재수의 난·1901)으로 선교의 기반이 붕괴된 후였다. 천주교에 대한 여론은 최악이었다. 그는 지역민들 속으로 들어가 밀착형 선교를 펼쳤다. 그는 제주에 온 지 1년 만에 30여명밖에 남지 않은 신자를 130여명으로 늘렸다.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는 특히 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저는 돈이 없이 죽어도 괜찮지만 하느님의 대리자로 빚을 지거나 파산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라며 주교를 압박하기도 하고, 집을 짓느라 빚을 많이 져서 주교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영세를 받은 어린이들에게 작은 두루마기를 사줄 것이며, 작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야겠다, 교리 공부에 열의가 없는 아이들도 좀 더 격려해야겠다는 소소한 내용도 등장한다.


식물학자 에밀 타케와 왕벚나무

타케 신부는 어떻게 선교사 이전에 식물채집가로 이름을 남기게 됐을까. 사제 중에는 유독 식물학자가 많다. ‘유전학의 아버지’ 그레고르 멘델도 사제였다. 그는 식물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식물채집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06년 이후이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식물학자 포리 신부와의 만남이 계기였다. 제주를 찾은 포리 신부는 그를 데리고 한라산을 누비며 식물채집에 나섰다. 포리 신부를 통해 제주의 자연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포리 신부가 일본으로 떠난 후에도 홀로 한라산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도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하루 8시간 이상씩 풀들을 돌보느라 심심할 틈이 없다.’

‘식물분류가 일인데 포리 신부의 식물도감 덕분에 잘 해나가고 있다.’

‘이대로 풀들을 거두면 1년 동안 1000 내지 2000종류의 풀 또는 잎사귀만이라도 갖게 되리라 기대한다.’

그의 채집 활동은 여러 경로를 거쳐 유럽 각국에 전달됐다. 채집된 표본의 일부는 미국 하버드대 표본관에 목본식물 일부, 영국 왕립식물원 에든버러 표본관에 2500점, 파리 자연사박물관 표본관에 375점, 도쿄대 표본관에 161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의 채집 활동은 20여년간 계속된다. 그가 보낸 새로운 식물 표본들에 유럽 학계는 환호했다. 조선은 그야말로 ‘신종 식물의 낙원’이었다. 1908년 4월 15일, 그는 제주도 한라산 북측 관음산 뒷산에서 자생하고 있는 벚나무(표본번호 4638호)를 발견했다.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왕벚나무 전문가인 정은주 강원대 교수가 주간조선과의 전화통화에서 설명한 한·일 왕벚나무 논쟁의 전말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왕벚나무는 일본에서 먼저 발견됐다. 1901년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새로운 벚나무가 발표됐다. 일본 학계는 해당 벚나무의 자생지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1912년 타케가 발견한 왕벚나무 표본을 받은 독일 베를린대 쾨네 박사는 두 나무가 똑같은 왕벚나무이고, 그 자생지는 제주도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두 왕벚나무의 유전자가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며 자생지가 없는 이유는 다른 두 벚나무를 접목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김찬수 박사도 목소리를 높인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왕벚나무가 한국산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본 학자도 있고 기록도 있지만 광복 이후 말이 바뀌었다. 현재는 단 한 명도 없다. 일본의 왕벚나무가 제주도에서 가져갔다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왕벚나무 논쟁은 결론이 나기 어렵다.”

일본은 일찍부터 사쿠라 외교를 펼쳐왔다. 미국 워싱턴에서는 매년 벚꽃축제가 열린다. 1912년 일본은 미·일 우정의 표시로 6000여그루의 벚꽃을 기증했다. 그때 워싱턴 포트맥 강변에 심어진 벚꽃 중에는 제주도 왕벚나무도 포함돼 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1943년 이승만의 미국 망명 시절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 내 반일 감정이 팽배했다. 벚꽃을 베야 한다는 주장도 심심찮았다. 그때 ‘왕벚나무는 한국산’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승만이 나섰다. 국회와 언론을 상대로 “일본이 한국의 왕벚나무까지 침탈해가 자신들 것이라고 우기고 외교에까지 이용하고 있다” “‘Japanese Cherry tree’가 아닌 ‘Korean Cherry tree’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워싱턴 아메리칸대에 왕벚나무 네 그루를 심었다.

2011년 이 대학의 루이스 굿맨 국제관계대학장은 이런 역사를 알게 되자 그곳에 한국 정원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이 뉴스는 미국 국립수목원 벚나무 연구자로 가 있던 정은주 교수에게도 전해졌다. 정 교수는 DNA 분석을 통해 이승만의 벚나무가 제주산 왕벚나무라는 것을 확인하고 제주도에 있는 김찬수 박사에게도 표본을 보내 확인했다. 현재 1만3000여㎡ 규모의 한국 정원에는 한국 토종수목들과 제주도 돌하르방 등이 있다. 이승만의 왕벚나무도 네 그루 중 세 그루가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다.

정 교수의 설명이다. “타케 신부가 우리나라 식물학에 남긴 업적은 엄청나다. 식물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면서 어려운 식물 분류를 한 것을 보면 남다른 눈을 가졌다.”

 


제주 밀감의 아버지

타케 신부는 2011년 일본에 있는 포리 신부에게 왕벚나무를 보내고 답례로 온주밀감 14그루를 받는다. 기존에도 재래종 감귤 재배는 했지만 임금님 진상용이었다. 그때까지 잘해야 본전인 감귤농사는 농민들로부터 기피 대상이었다. 타케 신부는 온주밀감이 제주도에서도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서귀포 홍리에 있는 농민에게 분양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본 일본인이 1912년 서귀포 서홍동에 처음으로 ‘제주과원’이라는 밀감 과수원을 시작했다. 제주도 밀감산업의 시작이었다. 이후 밀감나무는 제주도민의 생명줄이었다. 밀감 농사로 대학까지 보낸다고 해서 ‘대학나무’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귤이라고 먹는 것이 바로 온주밀감이다.

타케신부기념사업추진위원회 오충윤 회장은 타케의 밀감나무는 제주도에는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왜 밀감나무였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908년 포리 신부가 왔을 때 밀감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타케 신부의 행적을 보면 사람들이 먹고사는 걱정을 많이 했다.”

타케의 편지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오늘 6주 만에 처음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보리 수확은 좋지 않았고 비가 적어 기장이 자라기는 어려울 것이니 또 2년째 흉년이 될 것 같습니다. 곡식을 조금도 살 수 없습니다. 올해도 수많은 궁핍한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1902년 7월 20일)

타케 신부가 식물 채집에 몰두했던 것도 경제적인 이유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성당 건립과 선교 활동에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당시 식물 표본은 꽤 돈이 됐다고 한다. “교통편도 없고 제대로 된 길도 없던 시절이다. 걸어서 항구에서 묘목을 받아 얼마나 힘들게 옮겨왔겠나. 한라산을 누비며 또 얼마나 고생했겠나. 그 모습을 상상하면 안타깝고 너무 늦어 미안하다.” 오충윤 회장의 말이다.

타케 신부 알리기는 이제 시작이다. 지난해 대구와 제주도에서 기념사업 추진위가 발족했다. 타케 신부의 왕벚나무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고 화폭을 통해서도 타케 신부가 살아났다. 지난 1월 22일까지 대구 범어동성당 드망즈 갤러리에서는 정미연 작가가 타케 신부의 일대기를 내걸었다. 정 작가는 “받은 자료는 희미한 사진 두 장과 편지 몇 통이 전부였다. 그분의 삶 속으로 들어가 따라가다 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고 말했다.

대구에서는 정홍규 신부가 앞장서고 있다. 정 신부는 먼저 대구신학교 내에 타케 신부의 작은 박물관을 만들고, 오는 4월에는 왕벚나무 사진촬영대회를 계획 중이다. 프랑스에 있는 타케 신부의 고향에 왕벚나무도 심고 싶다고 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타케 신부를 주인공으로 한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도 고민 중이다. 일본은 초·중등학교 교과서에 사쿠라 노래가 있는데 우리도 왕벚나무 노래를 만들자는 것이 정 신부의 생각이다.

제주를 맡고 있는 오충윤 회장은 오는 4월 대구에서 열렸던 정미연 작가의 전시를 제주도에 유치하고 타케 신부의 두상을 제작하고 있다고 했다. 오는 11월에는 한논성당순례길을 ‘타케 신부의 거리’로 선포할 예정이다. 또 ‘면형의 집’ 1만㎡(3000여평)에 타케가 발견한 식물들을 모두 모아 타케의 식물정원 조성도 추진한다. 장기 계획으로는 기념관 건립이 목표다. 이를 위해 재일동포 좌옥화씨는 1억여만원을 쾌척했다.

120년 전 가난한 조선 땅을 밟은 젊은 사제는 이 땅에 자신의 모든 것을 묻었다. 대구대교구를 비롯해 그의 부임지에 심은 왕벚나무는 올해도 눈부시게 화사한 봄을 피워낼 것이다. 우리는 그를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남긴 선물은 여전히 우리 옆에 있다. 그 선물에 대한 보답은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도시 야생화’에 미친 외과의사 최정규 시흥 강남병원장
“보도블록 틈새에 핀 생명력 대견하지 않나요?”

 

 

< 조선일보 최혜원 기자   2010.07.09 >

 


최정규(51) 경기 시흥 강남병원장은 출퇴근시간이 여느 직장인보다 좀 바쁘다. 야생화 때문이다. 그는 보도블록·낡은 건물 계단·도로 옆 경사로 따위에 무심히 피어 있는 ‘도시 야생화’에 시선이 머물 때면 꼭 걸음을 멈추고 휴대용 디지털 카메라를 꺼낸다. 며칠 전에도 집 앞 길가 콘크리트 틈새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노란색 꽃을 피운 개쑥갓을 한참 웅크리고 앉아 바라봤다.

그가 처음 야생화에 관심 갖기 시작한 건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1995년이었다. “버스에서 우연히 라디오 뉴스를 들었어요. 국내 유일의 종묘전문회사 한농이 적대적 M&A로 대기업(동부그룹)에 넘어가게 됐다는 내용이었죠. 가뜩이나 열악한 국내 종묘산업이 위기에 처했다는 얘길 듣고 꽤나 충격을 받았어요. 한창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유행할 때였거든요. 그후부터 우리 작물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제대 후 병원에 취직한 지 얼마 안됐을 때 그는 출근길에 야생화 한 송이를 발견했다. 많이 보던 꽃인데 이름조차 모르는 자신이 창피했다. 당장 식물도감을 한 권 샀다. 개망초였다. 예쁜 한글이름과 달리 1950년대에 국내에 들어온 귀화식물이었다. 며칠 후 마주친 달맞이꽃 역시 100년 전 멕시코서 유입된 외국 종(種)이었다. ‘진짜 우리 꽃은 뭘까?’ 답답한 맘에 자료를 뒤져가며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토종 꽃이었던 백합·라일락이 외국에 넘어간 후 역수출된 사실도 알게 됐다. 아쉬운 대로 집과 회사, 동네를 중심으로 야생화 발굴에 나섰다. 1998년부턴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12년간 찍은 사진은 2000장을 넘어섰다. 짬이 날 때마다 야사모(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wildplant.kr) 같은 동호회 사이트를 방문해 야생화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야생화에 빠진 후 그에겐 사람들에게 야생화 별명 붙여주는 취미가 생겼다. “유난히 붉고 도톰한 입술을 가진 여직원에겐 ‘며느리밥풀꽃’이란 별명을 지어줬어요. 빨간 꽃잎이 흰 꽃술 두 개를 품은 생김새가 입술모양과 닮아서요. 한번은 말수가 적어 친해지기 어려웠던 직원이 병원 게시판에 올린 제 글에 댓글을 달았는데 굉장히 신중하고 생각이 깊더라고요. 그래서 작지만 기품 있는 꽃 ‘물매화풀’을 별명으로 선물했죠.”

그는 내로라하는 화상치료 전문의다. 화상치료는 비인기 전공인 외과 중에서도 대표적 ‘3D’ 분야다. 엄청난 공력을 요구하는 데다 결과를 확신할 수 없고 큰돈도 못 벌기 때문이다.

시흥 강남병원은 2008년 10월 최 원장을 비롯한 의사 넷이 공동개원했다. 병원은 365일 무휴(無休)다. 원장들은 교대로 24시간 당직근무를 선다. 최 원장의 연간 수술횟수는 300건 내외. 평일 기준 거의 매일 메스를 드는 셈이다.

그는 조만간 이제껏 모은 야생화 사진에 가벼운 글을 더해 포토 에세이 형태의 책을 낼 계획이다. 그가 소개하는 ‘도시 야생화 감상요령’ 한 토막. “민들레 아시죠? 다른 야생화에 비해 좀 까다로운 꽃이에요. 그래서 민들레 주변 5미터만 뒤지면 야생화 10종은 너끈히 찾을 수 있답니다. 작고 볼품없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보다 훨씬 강한 그네들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월드컵 기간 동안 마음을 졸였다. “거리응원 때문에 곳곳에 만개한 야생화들이 죄다 꺾일까 봐 마음이 무거웠어요. 야생화는 6월이 절정인데…. 반줌도 안 되는 먼지흙에 뿌리 내리고 꽃을 피우려고 그 작은 생명이 얼마나 애를 썼겠어요. 한번쯤은 이 도시에 우리 말고 그들도 살고 있다는 걸 떠올려줬으면 좋겠어요.”

“古木은 꽃을 피우지만… 사람은 나이 들어도 ‘좋은 어른’ 되기 어려워”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일본 사쿠라인 왕벚나무, 한라산에서 野生 자생지 발견
일본은 아직 발견 못 해… 韓日 간 기원 두고 논쟁“

”암꽃·수꽃 따로 있는 개나리, 요즘에는 줄기 잘라 심어
아버지와 똑같은 복제품들 무수히 많이 만들어진 것”


<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2017.04.10 >


왜 이맘때면 꽃들은 일제히 피어나 소리 없는 외침으로 우리를 불러 세우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탄성을 터뜨리게 하는가, 이런 봄날의 감상(感想)으로 이유미(55) 국립수목원장을 만났다. 그녀가 1995년 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는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다.

"지금 피어나는 꽃들은 작년에 이미 준비된 겁니다. 나무는 가지에 꽃눈을 달고 한겨울을 견뎌냅니다. 꽃눈에는 꽃의 모든 형태가 압축돼 있습니다. 봄이 오면 이 꽃눈의 예정된 꽃들이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이유미 국립수목원장은“무궁화는 영어로‘로즈 오브 샤론’이지만 장미과가 아니라 아욱과”라고 말했다.

 



"벚나무 종류는 올벚나무, 개벚나무, 털벚나무 등 10여 종이 됩니다. 벚꽃 축제에 심어진 종은 대부분 왕벚나무입니다. 일시에 온 도시를 덮을 만큼 그렇게 화사하고 풍성한 봄꽃나무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종이라고 논란이 돼 왔습니다. 창경궁에 심어진 왕벚나무는 다 베어냈지요. 진해 군항제의 왕벚나무도 한때 그런 위기를 맞았습니다."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 한라산이라는 조사 연구가 나와 일단락된 걸로 압니다.

"일본에서는 아직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한 오래된 조경농장에서 재배돼 온 왕벚나무가 1901년 학계에 보고된 것이지요. 이 왕벚나무를 증식 보급해왔고,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도 많이 옮겨 심었지요. 하지만 그 뒤 일본 학자에 의해 한라산에서 야생 왕벚나무 자생지가 처음 발견됐습니다. 이때부터 왕벚나무의 한·일(韓日) 기원을 두고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최근에는 유전자분석까지 하고 있습니다."

―유전자분석을 한다는 것은?

"일본에서 보급된 왕벚나무와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왕벚나무 간 형태적 특성과 핏줄 연관성을 살피는 겁니다. 같은 종(種)이라는 연구가 다수입니다. 하지만 유전적으로는 약간의 차이점도 있습니다. 일본 왕벚나무는 계속 인위적으로 육종·증식돼 왔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밀한 계통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벚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백목련은 전등(電燈)처럼 피지요. 관찰해보면 그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하는 것이 많더군요.

"햇볕 때문입니다. 봄 햇살이 잘 내리쬐는 남쪽 방향의 꽃눈이 더욱 빨리 자라 벌어지게 되면서 북쪽을 향해 굽은 겁니다. 옛사람들은 이 백목련을 '북향화'라고 부르기도 하고, 임금님이 계신 북쪽을 바라보는 충정의 꽃이라고도 했습니다."

―매화는 벚꽃보다 일찍 화사하게 피는데, 봄꽃나무로 분류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한반도 중부에서 보면 매화는 봄에 핍니다. 벚꽃보다 먼저 봄소식을 알리지요. 하지만 기온이 영하로 안 내려가는 남도의 섬이나, 설중매(雪中梅) 같은 품종은 겨울에도 꽃이 핍니다. 이 때문에 매화는 봄꽃이고 겨울꽃이 되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맘때면 산에 진달래가 지천이었습니다. 진달래가 봄꽃을 대표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숲이 좋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소나무 아래에 어우러진 진달래가 전형적인 우리 숲의 모습이었지요. 이제는 참나무를 비롯해 훨씬 다양한 풀과 나무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겁니다."

―숲 생태계가 좋아져 진달래가 사라진다는 뜻입니까?

"예전에 나무 땔감을 구하고 낙엽까지 모두 긁어가면서 국내산 토양은 산성화됐습니다. 이런 땅에서 잘 자랄 수 있는 나무들은 극히 제한적이었지요. 산성에 강한 진달래가 경쟁자 없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소나무 숲에서 내뿜는 방어 물질이나 햇볕에 대한 적응력이 높으니까요. 하지만 숲이 우거지고 그늘이 생겨나면서 진달래에게는 불리한 환경이 된 겁니다."

―요즘 개나리꽃은 열매를 안 맺는다는 말이 있더군요. 열매를 안 맺는 꽃이 있을 수 있나요?

"개나리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습니다. 수꽃의 경우 수술은 발달해 있지만 암술이 아주 작아 거의 제 기능을 못 합니다. 결국 암꽃·수꽃끼리 결합해야 하는데, 우리 주변에는 대부분 수꽃입니다. 요즘 개나리들은 대부분 줄기를 잘라 심은 겁니다. 아버지와 똑같은 복제품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진 거죠. 열매를 맺을 기회가 적고 구태여 맺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꽃 자체를 안 피우는 식물도 있습니까?

"고등식물 중에는 고사리·고비 같은 양치식물이 꽃 없이 포자로 번식합니다."

―버섯도 그런 종류이지요?

"버섯을 식물로 잘못 알고 있는 이가 많은데, 버섯은 미생물로 분류됩니다. 버섯의 균사체는 생태계 안에서 식물을 분해하는 역할을 하지요."

―서울대 농대 산림자원과에 입학해 식물 분류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박사과정에 올라가니 지도교수님이 '꽃 박사를 하는 게 어때?'라고 권했습니다. 제가 학과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으니까요. 꽃 박사라는 게 식물 분류였지요. 한 식물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분화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계통을 연구하는 학문이지요. 식물도감과 현장 답사를 통해 식물 식별을 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같은 식물인데 여러 이름이 혼용되는 경우도 있지요?

"권위 있는 식물도감 3권에 실린 식물명을 비교해본 적 있는데 모두 일치한 경우는 불과 49%였습니다. '음나무'와 '엄나무'도 그런 경우입니다. 플라타너스는 우리말 이름이 '버즘나무'인데, 나무껍질이 피부에 버즘이 핀 것처럼 얼룩얼룩하다고 해서 붙여진 거죠. 북한에서는 열매의 특징을 따서 '방울나무'라고 부릅니다."


―'복주머니난'과 '개불알꽃'은 어느 쪽으로 이름을 통일할지 논쟁이 붙었지요?

"식물도감에도 저마다 다르고 학자들끼리도 팽팽하게 맞붙었습니다. 최근에 국가표준식물목록위원회에서 '복주머니난'을 추천명으로 하기로 결정 내렸습니다."

―예쁜 꽃에 '며느리밑씻개'처럼 저속한 이름이 종종 있지요?

"부르기 거북한 이름, 학술적인 체계와 맞지 않은 이름, 맞춤법에 어긋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는 것은 혼란을 줍니다. 논란이 아주 많은 이름인 경우에만 심의합니다."

―저는 꽃 이름을 듣고도 돌아서면 헷갈립니다.

"다 유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살펴보면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또 꽃이나 열매와 같은 생식기관의 구조가 같은 식물의 집안을 먼저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저 꽃은 무슨 집안인데 어떻게 다르다는 식으로요. 가령 붓꽃은 꽃봉오리가 먹을 찍은 붓 모양이어서 붓꽃입니다. 붓꽃 집안에는 많은 종류가 있어 혼동되지만, 꽃잎이 노란색이면 금붓꽃, 노란 무늬가 있으면 노란무늬붓꽃이 되지요."

―집안이라면?

"가령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등은 생식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종(種)입니다.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게 소나무속(屬)이지요. 소나무속, 전나무속, 가문비나무속 등이 모이면 소나뭇과(科)라는 좀 더 큰 집안 단위가 됩니다. 이런 분류 기준은 꽃이나 열매 같은 생식기관의 구조에 좌우됩니다. 완두콩은 풀이고 덩굴이지만, 키가 큰 나무인 아카시나무와 같은 콩과입니다. 열매를 보면 콩꼬투리가 닮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칡, 자귀나무, 회화나무도 모두 콩과이지요."

―봄에 피는 꽃나무 중에는 산수유와 생강나무의 구분이 쉽지 않지요.

"산수유꽃은 1㎝ 길이의 일정한 꽃자루 위에 노란 공처럼 달렸고, 생강나무 꽃은 자루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생강나무는 주로 산에서 자랍니다. 서로 꽃은 비슷해도 전혀 다른 집안입니다."

―이번 대선을 '장미 대선'으로 부르면, 마치 꽃에 정치 물을 들이는 것 같기도 하군요.

"장미는 5월의 대표적인 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장미들은 야생의 꽃이 아니라 다양한 색과 모습, 향기로 개량된 원예종입니다. 야생에서 자라는 찔레, 해당화, 인가목 등이 장미속 식물입니다. 이런 식물로 장미를 육종할 수 있는 거죠. 어떤 분들은 '벚꽃과 장미는 그렇게 사랑하면서 무궁화는 너무 홀대한다'고들 말합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사립문 양쪽에 무궁화를 심곤 했지요. 무궁화도 장미과(科)인데, 벌레가 많이 끼거나 금세 시들어 장미꽃만큼 화려한 것 같지 않습니다.

"무궁화의 영어명이 '로즈 오브 샤론(rose of sharon)'이라 장미과로 오인하는데, 무궁화는 아욱과입니다. 장미과는 많은 수술과 암술이 꽃받침통 위에 모여 달리지만, 무궁화는 쭉 뻗은 암술대에 수술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장미를 키우는 정성의 10분의 1만 들여도 우아하고 기품 있게 키울 수 있다고 봅니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무궁화를 비하했다는 것이지요. 재작년 광복 70년을 맞이해 국립수목원은 '우리 식물주권 바로잡기' 사업을 했습니다."

―'식물주권'이라는 게 있습니까?

"조어입니다만… 소나무의 영어 이름은 '재패니스 레드 파인(Japanese red pine)'입니다. '코리안 레드 파인'이 되지 못한 것은 일본을 통해 처음 소개됐기 때문이지요.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섬초롱꽃이 '다케시마 초롱꽃'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어 이름을 바로잡으려는 작업입니다."

―요즘 와서 '자생종' '외래종' 하면서 식물의 핏줄 순수성을 따지는 것은 바람직한가요? 명백히 '우리 식물'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과거 어느 시점에는 바깥에서 들어왔을 수 있습니다.

"너무 따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알 것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생식물은 4천종이 되는데 과거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들판의 이름 없는 풀 정도로 여겼지요. '나고야 의정서(생물자원 활용의 이익 공유 협약)'가 채택되면서 이런 자생종은 국가 자원이 됩니다. 식용·약용은 물론이고 관상용도 귀중한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있지요. 세계 조경 시장에서 많이 유통되는 '미스킴 라일락'은 북한산 백운대에 들고 나간 털개회나무에서 육종한 것입니다."

―이맘때 꽃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상념이 듭니까?

“제가 오십 중반이 되니까… 사람은 나이 들어도 좋은 어른이 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각박하고 고집스러워지죠. 하지만 오래된 고목(古木)에서는 봄이면 아주 여린 새순과 아름다운 꽃이 나와요.”

뉴욕의 잘 나가는 화가 부부는 왜 설악에 빠졌나

 

 

< 월간 산, 신준범 2022.07.08 >

 

 


화제인물 <설악산 일기> 펴낸 김근희·이담 부부 화가
10년간 식물 327점 화폭에…설악산에 매료되 그린 그림과 글을 책으로


2011년 6월 중청대피소 부근에서 본 공룡능선 방면. 이담 화가가 왁스페인트로 작업했다.  

2011년 6월 중청대피소 부근에서 본 공룡능선 방면. 이담 화가가 왁스페인트로 작업했다. <설악산 일기>의 표지 그림이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책에 설악산이 담겨 있었다. 그 흔한 공룡능선 사진 한 장 없이, 모험담에 가까운 산행 이야기 없이,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려는 어조를 완벽히 배제한 채, 봉쇄 수도원 수도승 같은 목소리로 설악산의 가장 작은 것들을 책에 실었다.

김근희·이담 부부(62세 동갑)는 낮은 어조로 차분히 설악산에서 보낸 10년을 그림과 글로 실었다. 설악산에서 만난 식물 327점을 화폭에 그려 그중 200점을 엄선해 책에 담았다. 각각의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일기 형태로 실었다. 설악산 식물 에세이인 것.

식물학자가 아닌 순수미술 화가의 시선, 등산 입문자의 시선, 기후위기에 공감하는 50대 부부의 시선으로 설악산에 다가간다. 처음에 비선대를 오가던 부부는, 수렴동계곡을 오르고, 십이선녀탕계곡을 오르고, 귀때기청봉을 오를 정도로 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과정을 정갈한 그림과 간단명료하면서도 섬세한 글로 표현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는 산 생각이 절로 든다. 산이 강한 자석으로 끌어당기는 것같이 마음은 벌써 산에 들어가 있다. 우리는 설악산과 사랑에 빠졌나보다. 자꾸 생각나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고, 바라보면 더 좋고, 가까이 가고 싶고, 그 안에 있으면 편안하다.

오늘은 집을 나서며 천불동 깊은 곳까지 걸어가 보자고 마음먹었다. 비선대 길을 올라가며 표찰 달린 나무들을 유심히 본다. 서어나무, 피나무, 다래나무, 산뽕나무, 박쥐나무…. 오늘 만난 박쥐나무에는 꽃도 피어 있다. 박쥐 같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꽃 모양이 독특하다. 계란 흰자와 노른자 지단을 붙여서 말아놓은 듯 돌돌 말린 흰색 꽃잎 사이로 노란색 꽃술이 달랑거린다.’ -<설악산 일기> 중에서.

글은 일기 쓰는 습관이 있는 부인 김근희 화가가 적었다.

“뭉클하는 감정이 생길 때, 짧게라도 기록해 놓으면 그 감동을 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더군요. 힘든 감정이라도 나중에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객관성도 생기고요. 처음부터 책을 만들려고 일기를 쓴 건 아녜요. 산에서 만난 풀, 나무, 벌레들이 내게 말을 건네는 듯했거든요. 숲속 곳곳에서 나 좀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어요. 많은 식물 중에 하필 눈을 마주친 식물은 보통 인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거대한 산의 생명력 덕분에 생긴 인연이자 교감이라 생각해서, 그 감동을 꾸준히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다 보니 10년이 흘러 있었어요.”

아내 김근희씨는 붓으로 키 작은 식물을 그리고, 남편 이담씨는 키 큰 나무와 풍경을 주로 그렸다. 이담씨는 특이하게도 왁스페인트로 작품을 만든다. 고체로 된 페인트를 인두와 다리미 열로 녹여, 철필이나 날카로운 쇠붙이로 색감을 표현했다. 녹인 페인트가 굳어지기 전에 그려야 하는 무척 까다로운 작업인 것.

옛날 그리스 로마시대에서 이집트 시대까지 거슬러 통용되던 방식인데, 지금은 이런 방식으로 그리는 화가는 이담 화백이 유일하다. 미국에 왁스페인트 화가가 몇 명 있으나 종이가 아닌 나무에 그려낸다. 이담 화가가 종이에 철필로 칠하는 걸 감안하면, 거친 질감이지만 무척 세심함을 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담 화가는 설악산에서 나무의 껍질을 화폭에 많이 담았는데, 왁스페인트 특유의 거친 질감과 나무의 느낌이 오묘할 정도로 잘 맞아떨어져, 실제로 나무가 벽 한켠에 서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부부는 미국에서 알려진 저명한 화가다. 동기동창인 두 사람은 서울대학교 미대 서양화과와 뉴욕 스쿨오브 비주얼 아트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에서 창작 그림책을 여러 권 냈으며, <야구가 우리를 살렸다Baseball Saaved Us>와 <영웅들Heroes>, <자유를 향한 여정Passage to Freedom> 등은 미국의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자녀들을 키우고 출가시킨 부부가 한국으로 돌아와 설악산에 정착한 건 우연이었다.

뉴욕에서 음악교사가 된 딸 이은씨가 한국 전통음악에 반해, 풍물을 배우겠다고 한국에 2년간 머물게 되면서 딸과 함께 우연히 속초에 거처를 마련한 것. 곧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 여겼으나 미국에서 등산이라곤 해본 적 없던 부부는 설악산에 깊이 매료되었다.


설악산의 식물과 나무를 관찰하고 그리는 작업은 2010년에 시작되어 2020년까지 이어졌다. 이들의 산행은 정상을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식물을 만나고 풍경을 만나는 여정이었기에 일반 등산객에 비해 속도가 무척 느렸다. 해가 지기 직전까지 식물을 카메라에 담다가 산을 내려오곤 했다.

사진 찍은 식물은 곧장 그려내지 않고, 일단 공부를 한다. 이름을 알아내고, 어떤 식물인지 조사하는 것. 그래서 “인터넷 검색은 물론 식물도감, 야생화도감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사진을 찍었다 해도 “도감을 통해 식물의 구조를 이해해야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김근희 화가의 지론이다. 또 실물 크기로만 그림을 그리는데, 40년 넘게 수채화와 유화 작업을 해온 김근희 화가는 “내가 본 감동을 가장 순수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담 화가도 마찬가지다. 왁스 소재는 녹인 후 하루 이틀 안에 그려야 하기에, 먼저 찍어온 나무에 대해 공부를 하고 화면을 구상한다. 그는 “공부해서 알고 나면 더 친해지고, 그림도 더 잘나온다”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끝없는 나와의 대화이자 나무와의 대화”라고 말한다.

왁스페인트 기법과 나무의 거친 질감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설악산에서 만난 사스래나무. 그림 이담 (출처 : 월간산)


부부는 현재 충남 당진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설악산에서 10년 동안 자연공부 실컷 하고 하산했다”고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접근이 편리해지면서 설악산 주변이 관광지화한 영향도 있다.


당진 ‘느린산 갤러리’에서 2막 시작

지인의 추천으로 당진으로 이사한 부부는 집 앞에 ‘느린산 갤러리’라는 작업실 겸 전시공간을 만드는 중이다. 인터뷰를 위해 당진의 자택을 찾았을 때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이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기후 위기와 쓰레기가 분리될 수 없다”며 “쓰레기를 최소화하려 노력한다”는 철학이 담긴 집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물려준 오래된 가구는 기본이고, 모든 가구는 이담 화가가 직접 만들었는데, 주변의 버려진 장롱이나 재활용품을 목공예 솜씨로 맞춤 제작했다. 아내 김근희씨는 자투리 천과 커튼 등을 바느질하고 염색해 직접 부부의 옷을 만든다. 덕분에 “옷을 사 입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손재주가 뛰어난 화가 부부는 뚝딱뚝딱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는데, 청바지는 배낭이 되고, 쌀포대는 가방으로 변했다.

김근희 화가는 “옷이든 가구든 만들어 써보면 기성제품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한다. 쓰레기를 최소로 하는 삶을 추구하는 두 사람은 “화가로 살지 않았다면 더 많은 돈을 벌었겠지만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사는 것에 만족한다”며 “적게 벌기 위해 적게 쓴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배달 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은 끊은 지 오래다. 대부분 집에서 조리해 먹으며, 남은 음식도 퇴비로 활용해 음식 쓰레기가 거의 없었다. 술도 직접 담가서 먹고, 육식을 자제해 생선과 해산물 위주로만 가끔 먹고, 머리 감을 땐 샴푸를 사용하지 않고 물로만 씻는다. 그렇게까지 철저히 친환경을 실천하는 이유를 물었다.


“설악산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아파와요. 점점 가물어가는 계곡, 무분별한 쓰레기로 망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만난 자연의 모습도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어 안타까워요. 설악산뿐만 아니라 모든 산이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결국은 자연에도 한계가 오겠죠. 미래 세대가 살 만한 세상이 될지 황폐화가 될지는 향후 10년 안에 결정될 거예요. 조금이라도 우리가 노력하면 기후 위기에도 희망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저부터 실천하는 거예요.”

요즘 쏟아지는 책을 보면, 간혹 ‘종이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기 과시와 허세, 뻔한 내용으로 가득 채워 대단한 책인 것처럼 포장한다. 반면 이들의 책에는 산에서 마주친 애틋했던 순간들이 200편 그림과 글로 산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설악산이 이담·김근희 화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우리가 만난 가장 큰 스승이었어요. 공존을 일깨워 준 거대한 생명의 집합체인 거지요.” 

‘무등’(無等)을 꿈꾸며 무돌길을 걷다

 

 

< 정후식 실장, 광주일보  2022년 08월 02일(화)  >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루소) 유인원에서 갈라져 나온 인간이 네 발 보행을 포기하고 두 발 걷기를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직립 보행과 두 손의 자유가 도구 사용과 언어·인지 능력 향상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니체의 통찰 역시 과장이 아니다.


길을 걷는 것이 때로 영감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걷기를 체화하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걷기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을 이어 준다. 대자연을 거닐다 보면 지친 몸과 마음이 절로 치유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무는 산소를 배출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데 사람은 정반대이니 들숨과 날숨의 절묘한 조화다. 그 숨결에 집중하여 걷다 보면 아득하게 잊고 있던, 우리 모두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을에서 마을로…호남 문화 소통길

 


걷기의 가치에 새삼 눈뜨게 된 것은 3년째 계속되는 코로나19 사태를 관통하면서다. 팬데믹(대유행)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우울감과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는 데 걷기 만한 게 없었다. 감염병에 대항할 면역력을 키우는 것은 덤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모델로 지난 2007년 제주에 올레길이 탄생한 이후 국내 곳곳에 걷기 좋은 길이 조성됐다. 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로 구성된 ‘코리아 둘레길’은 길이가 4500㎞에 달한다. 광주에도 무등산 자락을 따라 한 바퀴 빙 도는 무돌길(60㎞)과 옛사람들이 도심에서 무등산 정상에 오르던 길을 복원한 무등산 옛길(23.2㎞), 도심 외곽을 연결한 빛고을 산들길(81.5㎞) 등이 잇따라 조성됐다. 그중에서도 무돌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올레길 못지않은 반산반야(半山半野)의 명품 길이다.

 


무돌길은 단순히 무등산 둘레를 따라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이 봇짐을 메고, 지게를 지고, 자손들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을 복원해 연결한 것이다. 30여 개 마을과 마을, 계곡과 숲정이를 이어 주는 생활문화 소통의 길이다.

 


무돌길이 처음 열린 것은 지난 2010년. 증심계곡과 원효계곡 쪽으로 집중되던 탐방객들을 분산시키고, 정상만을 향한 수직적 등산이 아니라 수평적 탐방을 즐길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자연공원을 확대해 보자는 게 그 취지였다. 무등산 보호 운동에 헌신해 온 김인주 (사)무등산무돌길협의회 상임의장과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1910년대 제작된 지도를 토대로 길을 개척했다. 무돌길이라는 이름은 백제시대 쓰였던 무등산의 맨 처음 명칭 ‘무돌뫼’에서 따온 것이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광주 북구 각화마을에서 출발해 담양과 화순, 광주 동구를 거쳐 광주역까지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길들을 연결할 수 있었다. 의병운동과 동학농민운동, 학생독립운동의 자양분이 되었던 무등 정신과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애초 길이는 51.8㎞로 정했다. 여기에 2017년에는 광주역에서 전남대를 관통하는 ‘민주의 길’과 북구 ‘천지인길’을 거쳐 각화마을까지 8㎞를 추가해 무등산 자락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 볼 수 있는 환상(環狀)형 길이 완성됐다.

 


무돌길은 크게 16개 구간으로 나뉘며 남녀노소 누구나 사부자기 걸을 수 있다. 1길은 각화마을부터 시작하지만 경사도와 접근성을 고려하면 광주역(15길)에서 푸른길 공원과 대추여울(광주천)을 따라 역순으로 도는 것이 수월하다. 무돌길은 호남정맥을 기준으로 광주 북구·담양 쪽의 영산강 수계와 화순 쪽 섬진강 수계로 구분되는데, 북구·담양 쪽에서 오르는 길의 경사가 약간 더 가파르기 때문이다. 표고 차는 해발 200~400m가량.

 


그곳에는 인문의 향기와 역사의 숨결이 그윽하다. 무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인 원효계곡 줄기를 따라 자리한 소쇄원·식영정·환벽당은 면앙정 송순을 비롯해 사촌 김윤재, 석천 임억령, 소쇄옹 양산보 등 호남 유림들이 교류하며 시를 짓던 시가문학과 계산풍류(溪山風流)의 산실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자취도 산재해 있다. 충효동 도요지와 복조리 마을, 동네 어귀마다 자리한 정자와 샘터에는 전통문화와 공동체 의식이 살아 숨 쉰다.

 


무돌길은 또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섰던 호남 의병의 활동 무대이다.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와 김태원 장군 전적비, 의병들이 넘어 다녔던 백남정재 등에 그들의 충혼의백이 서려 있다. 시대정신과 대의를 지키려는 자기희생의 저항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5·18민주화운동으로 타올랐다. 그 주 무대 역시 무돌길을 따라 이어진다. 무돌길을 ‘지구촌 민주화운동의 성지 순례길’로 조성하자는 취지로 지난 6월 전국에서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전국 무돌길완주대회’가 열린 배경이다.

 


차별과 배제 없는 조화의 세계로

 


무돌길 걷기의 백미는 무등산 조망이다. 산자락을 따라 동서남북 한 바퀴를 도는 내내 변화무쌍하게 형상을 달리하며 길잡이이자 푯대가 되어 준다. 부드러운 육산(肉山) 곳곳에 파격으로 얹혀 있는 주상절리, 서석·입석·광석대와 너널들은 신비감을 더한다.

무등(無等)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등급이나 차별이 없음이요, 다른 하나는 그 이상 더할 수 없는 정도를 가리킨다. 평등을 넘어선 무등의 세계, 비할 데 없는 경지다. 정상 삼봉에 천왕·지왕·인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가 하나이고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인간 존중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돌길을 걷는 것은 차등과 배제에서 벗어나 다양성과 조화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폭염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지만 낼모레면 입추다. 걷기 좋은 사색의 계절이다. 무돌길은 혼자 걸어도 좋지만, 무돌길협의회가 봄가을에 주최하는 무돌길대학에 참여하면 길벗들과 함께 해설을 들으며 완주할 수 있다. 무돌길의 ‘국가 숲길’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 주변 지자체들도 생태 환경과 안내 표지판, 탐방로 정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위하여

 

<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중앙일보 2022.08.18  >



나는 왜 산책을 하는가

                            

나는 산책 중독자다. 나는 많이, 아주 많이 걷는다. 나에게 산책은 다리 근육을 사용해서 이족 보행을 일정 시간 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나에게 산책은 예식이다. 산책에 걸맞은 옷을 입고, 신중하게 그날 날씨를 살피고, 가장 쾌적한 산책로를 선택한다. 그리고 집을 나가, 꽃그늘과 이웃집 개와 과묵한 이웃과 버려진 마네킹을 지나 한참을 걷다가 돌아온다.

나에게 산책은 구원이다. 산책은 쇠퇴해가는 나의 심장과 폐를 활성화한다. 산책은 나의 허리를 뱃살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안구를 노트북과 휴대폰 스크린으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마음을 스트레스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심신을 쇠락으로부터 구원한다. 동물원의 사자가 우리 안을 빙빙 도는 것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워서라는데, 산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존재’의 휴가인 산책은 심신 구원
목적에 희생되지 않는 삶을 위해
최선 다해야 목적없이 살 수 있어
허무 다스리며 산책하는 삶 살고파

 



나에게 산책은 생업이다. 얼핏 보면, 빈 시간을 죽이려고 산책 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나는 산책을 통해 일상의 필연적 피로를 씻는다. 그뿐이랴. 산책 중에 떠오르는 망상은 메모가 되고, 메모는 글이 되고, 글은 책이 된다. 그렇다고 글감을 얻기 위해 산책하는 것은 아니다. 글감은 산책 중에 그저 발생한다. 산책하면 단지 기분이 좋다.

나에게 산책은 네트워킹이다. 술자리와 골프와 동창회와 조기축구회를 즐기지 않는 중년에게 산책은 거의 유일한 정기 네트워킹이다. 걸으면서 나보다 앞선 산책자들과 뒤에 올 산책자들을 생각하며 상상의 네트워크를 맺는다. 나는 특히 산책을 즐기다가 죽은 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를 생각한다. 1956년 12월 25일, 발저는 홀로 산책하다가 눈 위에 쓰러져 죽었다.

로베르트 발저는 산책을 이렇게 찬양한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최고로 아름답고, 좋고, 간단하다. 신발만 제대로 갖춰 신은 상황이라면 말이다.”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차가 없다. 신발은 있다.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골라 신고, 평지를 산책한다. 오르막길은 하나의 과제처럼 여겨지므로 되도록 피한다. 모든 것에 눈이 내려앉은 날 산책은 얼마나 황홀하던가. 발저는 그러한 황홀함 속에서 죽었다.

산책할 시간에 차라리 회식을 하고, 골프를 치고, 출마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홀로 산책하면 외롭지 않냐고? 산책은 세상과 멀어지는 일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산책은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하기 위한 거의 모든 것이다. 발저는 말한다. “활기를 찾고, 살아 있는 세상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이 없으면 나는 한 마디도 쓸 수가 없고, 아주 작은 시도, 운문이든 산문이든 창작할 수 없습니다. 산책을 못 하면, 나는 죽은 것이고, 무척 사랑하는 내 직업도 사라집니다. 산책하는 일과 글로 남길 만한 것을 수집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 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뭐 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목적을 가지고 걷는 것은 산책이 아니다. 그것은 출장이다. 나는 업무 수행을 위한 출장을 즐기지 않는다. 나는 정해진 과업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난 아닌데? 나는 그냥 태어났다. 여건이 되면 민족중흥에 이바지할 수도 있겠지만, 민족중흥에 방해나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난 산책하러 태어났다. 산책을 마치면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위도식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일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이런저런 성취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일을 하러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 별거 아닌, 혹은 별거일 수도 있는 성취를 이루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성취는 내가 산책하는 도중에 발생한다.

산책하러 나갈 때 누가 뭘 시키는 것을 싫어한다. 산책하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줘. 곡괭이 하나만 사다 줘. 손도끼 하나만 사다 줘. 텍사스 전기톱 하나만 사다 줘. 어차피 나가는 김인데. 나는 이런 요구가 싫다. 물론 그런 물건들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목적이 부여되면 산책은 더 이상 산책이 아니라 출장이다. 애써 내 산책의 소중함에 대해 설명하기도 귀찮다. 그냥 텍사스 전기톱을 사다 준 뒤, 나만의 신성한 산책을 위해 재차 나가는 거다. 신성한 산책을 하는 중이라고 해서 걷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길가의 상점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한다. 그것은 미리 계획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발길을 옮기다가 관심이 생겨서 하는 일일 뿐이다.

인생에 정해진 목적은 없어도 단기적 목표는 있다. 산책에도 목적은 없어도 동선과 좌표는 있다. 내가 가장 즐겨 가는 곳 중 하나는 인근의 독립서점이다. 자, 나온 김에 오늘도 독립서점 쪽으로 걸어가 볼까. 그렇다고 해서 특정 책을 구입하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어떤 책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는, 그냥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한다. 독립서점에는 그냥 간다. 그냥 가서 과묵하고 유식한 점장이 큐레이팅한 서가를 돌아보다 보면 종종 책을 사게 된다. 그곳에는 재밌는 책이 많으니까.

목적 없는 삶을 바란다고 하면, 누워서 “꿀 빨겠다”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오해다.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 아니던가. 소극적으로 쉬면 안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 목적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야 목적 없이 살 수 있다.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나는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행복하고 싶어! 많이들 이렇게 노래하지만, 나는 행복조차도 “추구”하고 싶지 않다. 추구해서 간신히 행복을 얻으면, 어쩐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가는 대신에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 억지로 가려고 하면 더 안 오는 일. ‘잠이 안 와요’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우리가 잠에게 가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억지로 잠들려고 할수록 잠이 달아나지 않던가. 행복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자네에게 가지 않을 테니, 자네가 오도록 하게. 행복이여, 자네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도록 하게, 셔터가 무심코 눌려 찍힌 멋진 사진처럼.

목적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다. 내가 너무 지나친 궁핍에 내몰린다면, 생존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내가 너무 타인의 인정에 목마르다면, 타인의 인정을 얻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내가 시험에 9수를 한다면, 시험 합격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재산은 필요하지만, 재산축적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자유로운 삶은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군중이나 실력자들 밑에서 노예 노릇을 하지 않고서는, 재산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잘사는 것은 다르다. 나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기기를 바라며, 건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하기를 바라며,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이 있다. 혹자는 살아남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척하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이니까.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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