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i Rousseau
FRENCH PAINTER

Born: May 21, 1844 - Laval, France
Died: September 2, 1910 - Paris, France
Movements and Styles: Post-Impressionism, Primitivism in Art
앙리 루소ㅡ서툴렀으므로 자기 자신이 된 화가
온 세상을 미친듯이 돌아다니면서 자신만의 화풍에 도달했던 사람
< 이서영 칼럼니스트, Break News 2018/07/10 >
꿈을 꾸는 사람은 아름답다. 꿈을 꾸는 사람은 젊다. 꿈을 꾸는 사람은 행복하다. 꿈을 꾸는 사람은 쉬이 좌절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사람은 늘 걷고 있다. 꿈을 꾸는 사람은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사실을 안다. 꿈을 꾸는 사람은 어느 순간 현실로 그것을 드러낸다. 꿈을 꾸는 사람은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실패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꿈을 꾸는 사람은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희망의 아이콘이다. 여기 늘 꿈꾸었던 늦깎이 화가가 있다. 당대에는 화가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을 그가 도달한 지점은 꿈을 현실로 뒤바꾼 또 하나의 세상. 현실은 늘 차원dimension과 차원dimension이 교차하는 고도의 상징이다.
앙리 루소의 그림은 평면적이고 낯설다. 야성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그의 그림은 밀림이지만 들떠 있지 않다. 온갖 벌레들이나 새 소리, 동물들이 대화하는 웅성웅성한 번잡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소리없는 영화처럼 그의 그림 속 세상은 고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몽상을 통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은 아닐까?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세상을 화폭에 옮겨 놓은 화가, 앙리 루소.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
앙리 루소는 21세기에는 위대한 화가로 불리지만 그가 살던 당시, 그는 서투름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일요화가로서 앙리 루소는 바로 그 약점 덕분에 자신만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아카데믹한 수업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사람들. 고갱, 고흐, 그리고 루소.
고갱도 일요화가로 출발했다. 25살에 결혼하고 1년 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모으는 지인의 집에 갔다가 그림에 반해 26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10년이 지나 직업을 잃었을 때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전업작가를 선언했던 사람. 그리고는 온 세상을 미친듯이 돌아다니면서 자신만의 화풍에 도달했던 사람.
고흐는 자기 안에 갇혀 살았던, 열정이 과부하되어 스스로를 태워버린 화가. 37세의 짧은 나이에 지구별을 떠나는 순간까지 10년 쯤 그림에 미쳐 살았던 사람.
고흐와 고갱은 선대의 작품들과 선배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모사하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탐색했다. 그리고 여기 루소가 있다.
그는 인상파 화가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당대 어떤 부류의 영향도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가 불뚝 길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마치 도시의 뙤약볕 내리쬐는 거리를 걷다가 환상인 듯 강렬한 색채의 밀림 한 조각을 만나는 낯섦이랄까. 그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만큼 구도, 원근법, 배치, 색채 등에서 자유로웠다. 기성 화단에서 보았을 때는 매우 서투르게 보이겠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그는 기성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사람인 것이다.
그는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열대 지방이나 밀림에 다녀온 적도 없는 사람이 누구보다 풍성한 자연을 재창조해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만의 세상에서 혼자만 살아도 행복했을 사람.
1889년, 그가 45세에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루소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할 풍경을 만나게 된다. 세네갈과 통킹 및 타히티의 풍경을 보게 된 것이다. 20대에 만난 멕시코를 다녀온 군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과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만난 야생의 풍경들. 그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한다. 그의 보폭이 느껴진다.
나중에 그의 그림은 '소박파naive art'로 분류된다. 소박파는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제 시스템으로 오랜 기간 동안 연마해야 한 분야의 명인이 될 수 있었던 시대를 거쳐 당시에는 차츰 산업혁명의 진행으로 기계가 장인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화가나 시인의 자질을 갖춘 이들이 직업 외에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을 '일요 예술가' 혹은 '일요 화가'라고 부른다.
루소의 그림들은 이제 세계에 흩어져 있다. 파리, 스위스, 필라델피아, 워싱턴,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바젤,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등.
까다롭기로 유명한 루브르 미술관에도, 그리고 오르세 미술관에도 그의 그림이 걸려 있다.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화가. 당대에는 무시당하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앙리 루소의 그림들을 감상하기 위하여 이제 사람들은 일부러 그의 그림들을 찾아 나선다.

▲ 앙리 루소
그의 작품 몇 편 감상하는 시간.

[굶주린 사자가 영양을 덮쳐 게걸스럽게 물어뜯는다. 표범이 자기 차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맹금류는 울음을 내뱉는 가련한 짐승의 살 한 점을 뜯어 갔다! 해가 지고 있다!], 1905년 작품, 61세.
밀림이다. 해가 지고 있다. 사자가 영양을 덮치고 있다. 게걸스럽게 물어뜯는 것 같지는 않다. 사자가 영양을 물어뜯는 동작에 역동과 긴장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입체적이지 않고 매우 평면적이다. 표범이 풀숲에서 기다리고 있다. 올빼미 한 마리의 입은 살점을 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 제목 덕분에 유추한 것이다. 태양이 밀림 너머로 지고 있는 순간이다. 그는 작품의 제목이라면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아마추어답지 않은가? 그가 나이브naive파에 속하는 이유 중 하나일 제목이다.
[놀람!] 혹은 [열대 폭풍 속의 호랑이], 1897년 전시, 53세.
호랑이 한 마리가 밀림 덤불 속에서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폭풍 속에서 천둥이나 벼락에 깜짝 놀라기라도 한 것일까? 그를 둘러싼 풀이나 나뭇잎들이 옆으로 조금씩 비껴 누워 있는 것을 보니 바람이 불고 있는 중인 듯하다. 그의 밀림은 파리 식물원에서 그가 관찰한 결과물과 상상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동물들 또한 그가 밀림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관계로 박제된 야생동물을 관찰해서 작품에 사용했다.
그는 늘 '자연밖에 다른 스승이 없다'고 생각했고 "이국의 낯선 식물들을 보면 꿈을 꾸는 듯 행복해진다"고 말했던 화가였다.
루소는 1844년에 지구별에 도착, 1910년에 지구별을 떠난다. 66년의 지구별 여행자. 그는 41세인 1885년에서야 비로소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8년, 그가 44세에 아내 클레망스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49세인 1893년에 퇴직한 이후 전업화가를 선언한다. 그는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대가들의 그림을 부지런히 모사했고 실력과는 상관없이 성실하게 살롱전과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누구나 상관없이 전시할 수 있는 독립화가들의 공간이었다. 그는 1886년, 42세부터 죽을 때까지 두 해를 제외하고는 앙데팡당전에 작품 출품을 계속했다. 가끔은 전시된 그의 작품 앞에서 사람들이 서서 한참을 웃다가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루소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앙데팡당전은 참가비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전시였는데 1893년에는 젊은 작가들이 그와 함께 전시할 수 없다고 심사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하고 63세의 살롱전 전시에는 장식미술품을 전시하는 하급 전시장으로 밀려나는 수모도 감당해야 했다.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 이렇게도 험난하다니! 그는 자신을 사실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앙리 루소 하면 떠오르는 작품들 중 최초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작품은 [전쟁]인데 이 작품은 그가 50세에 그린 작품으로 지금은 파리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한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 [루 차르]의 삽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앙데팡당전에 이 작품을 출품하면서 그는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는 사방에 절망과 눈물과 페허를 남기고 무섭게 질주한다." 앙데팡당 그룹의 화가들에게도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던 루소에게 아방가르드 화가들은 "이전에 보았던 어떤 그림과도 다른 새로운 양식의 작품"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에게는 힘.

[잠자는 집시 여인], 1897년, 53세.
이 작품은 관람객들과 비평가들의 조롱을 받았던 작품인데 지금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울창한 밀림을 환상적으로 구현해 냈다는 그가 이국적인 밀림을 주제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59세 때.
흑인 여인이 고요한 달빛을 받으며 사막에서 잠들어 있다. 물항아리가 놓여 있다. 여인의 오른손은 하얀 지팡이를 잠든 와중에도 꼭 쥐고 있다. 잠들었다는 것은 평화. 잠든 와중에도 지팡이를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은 긴장감의 표현. 줄무늬 옷을 입었다. 머리카락도 줄무늬 옷과 나란히 배치되고 그녀가 바닥에 깔고 누운 담요도 같은 색깔, 같은 줄무늬이다.
그녀는 꿈 속에서 만돌린을 연주하고 있는 걸까? 만돌린과 흑인 여인. 그녀가 집시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사막의 한 밤에 사자가 나타났다. 사자는 그녀를 발견하고 냄새를 맡아 본다. 위험과 긴장은 느껴지지 않는다. 낯선 사막. 고즈넉한 밤. 흰 달빛. 사자 한 마리. 잠든 여인. 맨발의 그녀. 사자의 눈동자는 샛노랗다. 검푸른 하늘. 단순화된 형태. 상상의 공간. 과감한 구도(사실은 아카데믹한 관습의 눈을 가진 감상자에게는 엉터리로 보였을 구도. 이것이 바로 관점의 차이다). 이국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 그의 이러한 시도는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피카소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대단한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게 된다. 루소는 이 작품에 상당한 애착과 자신감을 보였다고 한다. "누가 뭐라 하건 상관없다. 나는 이 그림이 맘에 들어. 뿌듯해."
아프리카 원시 미술과 세잔을 연구하고 있던 피카소. 자신의 미술 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찾고 있던 피카소에게 루소의 이 그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한다. 피카소는 다른 화가들이 루소를 조롱할 때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던 화가이다. 원근법의 개념도 없고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누구나 그릴 수 있을 것 같지만 누구나 그릴 수 없는 그림. 피카소는 이런 말을 남긴다. "반 고흐 이후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독학을 한 소박파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는 더 이상 전통 안에 살지 않고 자신만의 표현 방법을 창조해야 한다."
1907년, 아프리카 원시미술과 세잔과 루소의 영향이었을까, [아비뇽의 처녀들]로 세상을 놀라게 한 피카소는 다음해, 63세의 루소를 위한 파티를 연다. 그는 '존경하는 루소를 위하여'라는 플래카드도 만들었다. 이젤과 판자로 탁자도 만들었다. 브라크, 마리 로랑생 등 새로운 미술에 대한 실험에 긍정적이었던 이들이 루소를 축하해 주었다. 이때 루소는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루소는 작곡으로 상을 받기도 했는데 아내 [클레망스에게 바치는 왈츠]는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위한 왈츠 서곡이라고 한다. 그는 연극 음악도 작곡했는데 특히 [러시아 고아의 복수]는 한 출판사가 출판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아폴리네르는 루소를 위하여 시도 썼다.
"불행이 그대의 자손을 따라다녔다. 그대는 자녀들과 아내를 잃고, 그림과 재혼했구나. 그대의 정신적 자녀들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대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모였다.
그대를 칭송하기 위해 피카소가 따라주는 이 술을, 자, 모두 마시자.
이제 건배! 루소를 위하여!"
루소는 사람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누가 뭐라 하든 내가 하는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 나만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들이 내게 뭐라 하든 그것은 사실 지나가는 바람일 경우가 더 많다. 관심과 배려로 해주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의 관점으로 나를 보지 말고 나의 삶은 나의 관점으로 봐 주시길... 루소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는 결코 주눅들지 않았다.
한 번은 사람들이 루소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사람이라고 칭찬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말을 진심을 담은 말로 믿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조롱하고 비웃는 표현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부끄럽고 화가 나서 비참한 기분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했을까?
한때는 채소 가게 여인이 건네주는 수프 한 접시로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그림도 잘 팔리지 않았지만 루소는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거나 이웃들에게 그림을 가르침으로써 돈을 벌어 생활하는 순간에 도착한다.
'소박파naive art'라고 불리는 루소. 프랑스 북서부 지방 라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배관공이었다. 5살 때 아버지가 파산해서 그는 가난한 삶을 살았고 자주 이사했다. 20세 때 지원병으로 군대에 입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24세에 가장이 된다. 27세에 파리시의 세리가 된다. 이 직업은 세관원이 아니다. 세리란 세금을 걷으러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루소는 자기 입으로 자신이 '세관원'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거짓말. 그는 밀림을 환상적으로 재현해냈다. 하지만 밀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는 파리를 떠난 적이 없다. 그는 19세에 일하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돈 10프랑과 우표들을 훔쳐 한 달 동안 감옥에 있었다. 그는 군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자신이 가지도 않은 멕시코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거짓말. 아마도 그 거짓말은 군대에 있는 동안 멕시코 원정을 다녀온 군인들의 추억담을 열심히 듣고 그 인상이 그의 평생을 좌우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간절히 바라면 간혹 기억은 왜곡된 상태로 저장될 수도 있으니까. 멕시코라는 열대우림을 경험한 군인들의 이야기는 그에게 울창한 밀림을 상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의 기억에 각인되어 그는 어느날부터인가 열대우림을 경험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63세에 사기 공모로 징역 3년의 집행 유예를 받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루소는 참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도 잘 하고 작곡도 잘 하는 등 음악에 재능이 있었지만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돈도 많이 벌고 이름도 날릴 거라고 생각했다.
25세의 루소는 재봉사였던 클레망스와 결혼한다. 클레망스는 18살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9명의 자녀가 태어나지만 딸 줄리아만 남고 모두 죽었다. 병에 걸린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주 60시간씩 일하며 일요일에는 그림을 그렸던 화가, 루소.
41세가 되어서야 작업실을 마련하고 기뻐했던 화가. 말년에도 "재미 있는 루소 씨는 생강빵으로 만든 우스운 장난감 인형 같은 유치한 그림에 대한 시도를 멈추지 않을 거'라는 비평을 들었지만 그의 그림 편력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의 그림은 파리 시민들의 일상을 담는 것에서부터 출발, 열대 밀림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긴다. 밀림이라는 장소는 그만큼 신선한 소재였다. 환상과 현실이 미묘하게 섞여 있는 공간 표현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파리의 식물 정원이라고 불리는 역사박물관은 동물 박제와 광물과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 동물 사육장, 온실 들이 있다. 루소의 공부방. 40세 때부터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모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루소의 공부방. 그리고 기억들, 상상의 세계와 그가 본 것들의 조합. 그는 말했다.
"온실 속으로 들어가면 나는 딴사람이 된다. 마치 꿈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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