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사람들은 봄을 알아채지 못한다
英 화가 호크니 작품 ‘봄의 도착’… 문자로 형용할 수 없는 생동감 구현
코로나로 모든 것이 봉쇄되고 취소된 시기 봄을 맞은 벅찬 감흥 느껴져
소리 내지 않고 오는 봄… 끈기 있게 지켜보는 사람에게 그 도착이 보인다

 

< 조선일보,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2023.04.18.  >

 

 

 


봄은 도착한다.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오는 것처럼 봄의 도착은 눈에 보인다. 도착 시점은 지역은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내게 올해 봄은 지난 3월 22일 도착했다. 흔들리는 이를 치과에서 뺀 날이었다. 간호사가 약솜을 끼워주며 두 시간 동안 물고 있으라고 했다.

병원에서 나와 목련이 활짝 핀 것을 봤다. 슬며시 꽃잎이 열린 게 아니고 운동회 박처럼 펑 터져 있었다. 벚꽃도 몽우리를 열고 있었다. 맨날 보던 나무들이었고 전날, 아니 치과에 갈 때만 해도 보지 못한 꽃이었다. 잇몸을 마취하고 이를 뽑느라 누워있는 사이 꽃들이 봄맞이 대책 회의를 연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솜뭉치가 입안에서 굴렀다. 멈추지 않은 피에서 찝찔하고 비린 봄의 맛이 났다.

그다음 날 신문에서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봄의 도착(The Arrival of Spring)’을 봤다. 풀밭 위에 시골집이 한 채 있고 나무 두 그루가 앞에 선 장면이다. 하나는 만개한 벚나무이고 다른 나무는 노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집 뒤로 늘어선 나무들은 이제 막 연두색을 띠며 비어져 나온 잎들과 제법 짙은 초록의 잎들이 뒤섞여 작은 숲을 이뤘다. 풀밭을 무성하게 채운 잎들은 한낮 태양빛을 받아 제각각 반짝이고 있다.

아이패드로 그린 이 그림은 호크니가 2020년 4월 23일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그린 것으로 ‘No. 241′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그는 2011년과 2013년에도 ‘봄의 도착’이란 이름의 연작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번 시리즈는 프랑스로 거처를 옮긴 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봉쇄된 시기에 그린 것들이어서 그 생동감이 더하다. ‘봄의 도착’ 시리즈 116점이 세계 순회 전시 중인 듯한데 아직 우리나라엔 오지 않았다.

/일러스트=이철원

 


올해 86세인 호크니는 수영장 그림으로 이름난 사람이고 그림 값이 비싸기로 더 유명하지만(그의 대표작 ‘예술가의 초상’은 1000억원이 넘는다) 나는 얼핏 초등학생이 그린 듯한 이 소박한 그림에 갑자기 매료됐다. 바람 한 점 없는 초봄 한낮의 자연 풍경이 사진보다 생생했다.

거무튀튀한 나뭇가지에서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내미는, 노랑도 아니고 연두도 아니고 초록은 더더욱 아닌 그 이파리를 나는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몰랐다. 호크니의 그림은 문자로 불가능한 그 형용을 그림으로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봄의 햇볕과 그늘과 공기가 만들어 내는 어떤 질감이어서, 애초 무슨 색이란 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호크니의 책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가 작년 출간된 것을 알게 됐다.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호크니와 주고받은 이메일과 화상 통화를 정리했다. 이 책에 ‘봄의 도착’ 연작이 여럿 실려 있다. 책의 원제는 ‘봄은 취소할 수 없다(Spring Cannot Be Cancelled)’이다. 모든 것이 취소되던 시기에 작가가 봄을 맞은 벅찬 감흥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으며 봄이 눈에 띄게 도착하는 이유를 알았다.

봄은 요란하게 오지만 소리를 내지 않는다. 끈기 있게 지켜보는 사람에게만 그 떠들썩한 도착이 보인다. 사람들이 벚꽃 놀이를 갈 때쯤이면 봄이 이미 도착해 있는 상태다. 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목격하려면 반드시 혼자 화단을 찾아야 한다. 봄은 우리가 매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매일 얼굴이 조금씩 바뀌어 도착 시점을 가늠하게 해준다.

찾아오는 사람 없고 외출도 자유롭지 않던 코로나의 봄에 호크니는 자연 속에 갇혀 오랫동안 아주 세밀하게 봄을 관찰했다. 그는 봄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주의 깊게 살펴”봤으며 “무엇이 나오고 있는지, 무엇이 가장 먼저 나오고 다음으로는 어떤 것이 나오는지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며” 봤다. 그는 “때때로 사람들은 봄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했다.

호크니는 말했다. “나는 정물화를 그릴 때마다 아주 흥분되고 내가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천 가지나 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내가 대상에 대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생각할수록 나는 더 많이 알게 됩니다.” 그는 정물화를 그릴 때 흑백 사진을 찍은 뒤 그 사진을 토대로 그렸다. 컬러 사진이 자신의 눈으로 본 색과 질감을 나타내 주지 못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의 그림 속 일렁이는 빛과 물결은 그런 관찰의 결과다.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간 올해는 봄의 도착이 새삼 기쁘다. 틈날 때마다 봄이 머무르고 또 가는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봐야겠다. 호크니처럼 어떤 풍경에서 천 가지나 되는 걸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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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 기억’과 ‘기억된 기억’ 

 

 

< 동아일보,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3-02-20 >

 


컬렉션의 세계

 


기억은 선택 기준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기억하는 자의 정체성과도 같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넘버 2’(왼쪽 사진)와 주재환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주재환은 정적인 누드의 전통을 비튼 뒤샹의 이 작품에 최민의 시 ‘폭포’와 오줌을 누는 이미지를 덧입혔다. 뒤샹, 최민, 주재환 작가 모두 예술을 통해 기성 질서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모든 것은 결국 흩어져 사라진다. 따라서 컬렉션은 흩어져 버리는 경향에 대한 저항이다. 모든 것을 모아둘 수는 없다. 따라서 컬렉션은 일부만 모으는 선택이다. 무엇을 모아두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선택은 필연적으로 선택 기준을 동반한다. 따라서 컬렉션은 가치의 위계를 정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가치는 바로 컬렉터의 정체성이다.

 


인생의 기억도 자기 인생에 대한 모든 사실의 집적이 아니다. 기억은 자신이 경험한 것, 그중에서도 자신이 수집한 과거의 경험이다. 흩어져 버리고 마는 삶의 속성에 대한 저항이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 것인가. 

 

기억은 필연적으로 선택 기준을 동반한다. 자신이 수호하는 가치에 따라 기억을 선택한다. 그 가치야말로 바로 기억하는 자의 정체성이다.

 


인간은 대개 유용하고 행복했던 경험을 수집하기 원한다. 새로 외운 외국어 단어를 거듭 암기한다. 어머니가 남겨 준 조리법을 외운다. 행복했던 순간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남겨 놓는다. 모든 기억이 다 행복하거나 유용한 것만은 아니다. 기억은 기억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기억된 결과이기도 하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마음에 틈입한 경험들은, 조용히 마음의 저변에 침전해 있다가, 특정한 계기를 만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기억한 기억이 아니라 기억된 기억은 예상치 못한 계기를 만나 산소 보급을 위해 올라오는 잠수부처럼 의식의 수면 위로 솟구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최민 컬렉션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반세기 전 옛 기억 파편 하나가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나는 잠시 귀국해서 친구들과 함께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완성되었고, 이제 더 이상 한국에 머물 명분이 없어질 무렵, 동아일보에서 신춘문예 사상 최초로 영화 평론 부문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응모해 보아야 당선되겠냐. 주변의 회의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응모했고, 당선되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영화 평론 부문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최민 선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었다.

 


최민 선생이 초대 영상원장직을 맡고 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근처에서 만났는데, 당시 그의 눈에는 내가 상금이나 받고 그냥 미국으로 돌아가 버릴 청년처럼 보였는지 모른다. 기왕 당선되었으니 어떻게든 글을 계속 쓰라고 내게 거듭 당부했다. 물론 나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래야 학위 과정도 끝낼 수 있었고, 직장을 구할 수도 있었으니까. 따라서 한국의 개봉작을 보고 영화평을 써야 하는 일도 할 수 없었고, 생애 최초의 잡지 인터뷰 제안에도 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반세기가 지나, 당시 신춘문예를 주관했던 동아일보의 지면에 이미지를 다룬 글을 기고하고 있으니, 최민 선생의 당부에 부응한 셈이 되었다.

 


최민 선생은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이기도 했고, 미술평론가이기도 했고, 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번역한 사람이기도 했고,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했다. 최민 컬렉션 중 이러한 다면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주재환의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라는 작품이다. 작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호민과 재환’전 이래, 어쩌면 주재환은 민중미술가라기보다는 만화가 주호민의 아버지로 더 유명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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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심리학 

 -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러 미술관에 간다 | 미술관에서 찾은 예술가의 삶과 심리

 

윤현희 지음 | 믹스커피 | 2019년 04월 08일 출간

 

 

 

1. 저자소개 :  윤현희  아동심리학자


미국 텍사스 A&M대학교에서 아동 임상신경심리(학교심리학)을 전공했고, 한국의 집단주의적 문화와 미국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청소년의 공감 능력 발달에 미치는 상이한 영향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케이티 교육청과 싸이프레스 교육청에서 수련을 받고 근무했으며, 론스타 칼리지에서 심리학을 가르쳤다. 현재 휴스턴에 거주하고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치료기관 온타리오 주정부 아동정신건강센터(Children’s Mental Health Ontario)와 워터루가톨릭 가정심리센터에서 수련을 받았다.

 

부산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을 전공하는 동안 삼성의료원과 부산대학교 심리학과 공동연구 프로젝트인 한국 아동 인성 검사(KPI-C) 개발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석사학위 취득 후 정신보건 임상심리사 2급을 취득해 부산 메리놀병원 신경정신과, 창원병원 신경정신과, 창원 성가신경정신과의원, 부산 아동심리센터에서 근무했다. 다수의 대학에서 발달심리학과 임상심리학을 강의했다.

심리치료의 영역이 치료실을 벗어나 글쓰기, 그림 그리기, 정원 가꾸기 등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풍경 속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실천하고 있다. 아카데미즘을 바탕으로 한 소수를 위한 글쓰기보다는 대중적 글쓰기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최근에는 심리학과 시각예술의 접점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일에 특히 관심이 많다. 시간이 허락될 땐, 라이스대학교의 글래스콕 스쿨과 휴스턴 현대예술박물관의 아트 스쿨을 오가며 그림을 배운다. 브런치에서 ‘치유를 위한 심리학’ 매거진을 연재해 브런치북 프로젝트 은상을 수상한 바 있다. 

 

 

2.  목차


지은이의 말 _ 심리학과 미술의 만남, 과거 화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쁨

1장. 나이브 아트와 긍정심리학
천진한 에너지와 동심의 세계 :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자기 치유적 삶과 창작물 : 헤르만 헤세
주말 화가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 앙리 루소
숲속의 세렌디피티, 클림트의 풍경화 : 구스타프 클림트

2장.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아들러 심리학
17세기의 아방가르드, 조망의 확장 : 디에고 벨라스케스
현재성의 미학 : 에두아르 마네
발레리나가 있는 풍경 : 에드가 드가
세상을 바꾼 세잔의 사과 : 폴 세잔

3장. 추상의 세계와 게슈탈트 심리학
어린아이의 눈으로 : 파블로 피카소
색채를 통한 감정의 치유 : 바실리 칸딘스키
우주의 진실에 다가가다 : 피에트 몬드리안
균형에 도달하는 길 : 파울 클레

4장. 화가 내면의 상처와 표현주의
내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질 수 있을까? : 빈센트 반 고흐
상처와의 처절한 대면 : 에드바르트 뭉크
벌거벗은 영혼, 인체의 정신분석적 탐구 : 에곤 실레
골목길의 미학 : 모리스 위트릴로

5장. 여성 화가의 정체성: 전문성과 여성성 사이에서
제비꽃 장식을 한 여인 : 베르트 모리조
미국적인 독립성, 페미니즘의 향기 : 메리 카사트
내 삶의 주인공은 나 : 수잔 발라동
상처는 나의 힘 : 루이스 부르주아지은이의 말
심리학과 미술의 만남,
과거 화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쁨

 

3. 지은이의 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나는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공부하고 일하며 정신없이 달려오던 행보를 멈추고 슬픔에 잠겼다. 아버지가 떠나신 빈자리를 맴돌던 허망하고 아픈 마음을 위로한 것은 시간이 박제되어 전시된 미술관이었다.

 

한 세기도 더 지난 반 고흐 그림 앞에 섰을 때, 그리고 반세기 전의 마크 로스코 그림 앞에 섰을 때, 과거의 그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진 사람들이 그림을 통해 내게 위로를 건넸다. 사람들의 호흡이 끊어지고, 쇠잔하고 무력해진 육체가 멸하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육체에 깃들었던 정신이 남긴 성과물은 온전히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육체가 살아 있을 때 반짝이던 정신이 만들어낸 창작물은 그럴 것 같지 않은 시간에, 그럴 것 같지 않은 공간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하며 조용히 말을 건넨다.


내 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작가의 감정과 생각에 공감하는 순간, 미술관은 치유의 장으로 변했다. 내가 미술관에 가는 이유다. 예술을 통해 우리의 정신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 잠시 세 들었다 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을 알지 못했다면 살면서 많이 쓸쓸했을지도 모르겠다. 수백,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내게 말을 전하는 그림 앞에서 아 버지의 영혼이 편히 쉬시기를 기도했다.


심리학을 오래 공부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일들이 심리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걸러지고, 몸소 경험하는 일들 역시 심리학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생겼다. 미술관에 가기를 즐겼고, 그곳에서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 심리학의 체계와 시각 예술의 체계가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빅뱅’을 경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빅뱅의 경험은 회화라는 새로운 별로 나를 인도했고,나는 나침반을 들고 그 세계를 탐험해나갔다.


이 책은 심리학과 미술이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한 사적인 지도이며, 동시에 심리학과 미술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마음과 내 마음이 공명하기를 바라는 소망의 기록이다. 화가가 그림에 풀어놓은 생각과 감정에 공감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그러한 생각과 감정의 스펙트럼을 형성한 화가들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그림 너머에 있는 그들의 삶을 생각해보는 일이 잦아졌다. 이 책에 미술관에서 느낀 화가와 나의 인생에 관한 소회를 담았다. 몸에 밴 심리학적 글쓰기 방식은 은연중에 화가들에 관한 심리평가 보고서와 유사한 결과를 낳았다.


문자가 생기기 이전에 인류의 원초적인 역사를 기록해왔던 것은 그림이라는 형태의 ‘시각언어’였다. 회화의 역사는 인간의 감정과 아름다움을 향수하려는 노력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인식체계가 발전해온 과정이기도 하다. 종(種)으로서의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유아는 말과 글보다는 그림을 통해 표현하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시각 언어의 장구한 역사에 비하면 20세기에 탄생한 심리학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화가들의 인생과 역사가 더욱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여행할 것이다. 외부의 물질문명을 향해 있던 인간의 시선이 내면으로 향했고,그 움직임이 조형으로 드러나던 시기다. 이러한 인식에 촉매로 작용했던 것은 정신의 내적 층위를 탐색하는 정신분석학으로 대표되는 심리학의 태동이었다. 인류사의 가장 흥미진진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절을 여행하는 시간은 행복했다.
표현이 거칠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심리학과 미술 용어가 생소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심리학 및 미술 관련 용어와 인물 해설을 책 뒷부분에 따로 마련해두었다.


혼자서만 그리고 있던 심리학과 미술관의 지도를 발견해 세상에 나오게 해준 김효주 팀장님께 감사드리며,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보내주신 그 성의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곁에서 조언해주신 세계적인 구조공학자 임성준 님, 가족들, 그리고 간간이 써오던 글을 따뜻한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책이 나오기를 기다려주신 지인들과 독자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9년 3월 윤현희

 

 

4. 추천사


김은숙(임상심리학자)


저자는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들이 캔버스에 펼쳐놓은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내면을 돌아보고, 성장하게 된 체험을 소개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어디로 향해 가는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삶의 무게와 일상의 분주함에 내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때 저자가 안내하는 대로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억눌렸던 내면의 에너지와 잃어버렸던 순수함을 되찾게 될 것이다. 

 


조지현(정신과 전문의)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접근 방향은 매우 다양하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뇌 과학이라는 다소 광범위한 이름하에 과학적 접근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책은 심리학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행동과 말에 대해 인간의 다양한 표현방식을 관찰하고 있다. 미술과 관련된 기존의 심리 서적들은 단순히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림 속에 숨은 심리학적 코드를 파헤치는 작업이었다. 반면 저자는 화가들의 인생을 소개하고 그들이 그림에 담은 감정을 독자들에게도 전달함으로써 지친 우리 모두의 삶을 다독거려주고 있다. 

 


5. 책 속으로

 


칼 융은 예술 창작의 과정이 이러한 성장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칼 융 학파의 이론은 일생을 통한 인간의 내면 성장 과정을 강조하며, 이 과정에서 성장을 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예술적 표현 방법들을 응용한다. 말하자면 헤르만 헤세의 일기와 작품들은 칼 융의 이론을 중심으로 한 분석치료의 성공적인 사례가 되는 셈이다. 1950년대 미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역시 그의 작품 초기에는 칼 융의 정신분석 이론을 적용했고, 자신의 무의식 저변에 대한 강한 탐구가 드러난다. 헤세는 그의 편지에서 드로잉과 회화가 갖는 성장을 유도하는 치료 효과를 잘 설명하고 있다. _36쪽

새로운 회화의 방향을 모색하던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17세기 전위 양식에서 모티프를 얻는다. 원근법의 전통을 완전히 벗어나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하고 빛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고전적인 매끄러운 붓터치와 대조되는 거친 붓터치를 시도했다. 그는 결코 보헤미안이 아니었고 자신을 인상파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화풍은 클로드 모네와 에드가 드가를 비롯한 알프레드 시슬레, 카미유 피사로 등 인상주의 화가들, 보들레르와 에밀 졸라 같은 비판적인 문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반면 주류사회의 비평가들과 대중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이런 비난에 마네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_96쪽

바실리 칸딘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나치의 부상으로 인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오데사(우크라이나의 항구 도시),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3개의 국적을 가졌고 세 명의 여인과 삶을 함께했던 칸딘스키에게 예술의 근원이자 영감의 토대는 고향인 러시아의 문화와 정서였다. 현대 미술에서 추상화라는 장르를 개척한 그였지만, 초기 작품들은 사실을 보이는 대로 재현한 구상화를 즐겨 그렸다. 그래서 러시아 전래동화와 민요 등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표현한 작품들이 많다. 후기의 작품들에서는 러시아적 모티프가 추상화된 형태로 사용된다. _156쪽

질병으로 되풀이되는 가족의 죽음을 겪으며 형성된 불안과 공포를 여과 없이 표현한 그의 그림 한 귀퉁이에 드리운 것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의 고통받던 영혼이 남긴 성실한 기록으로서의 그림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의 그림에 충격을 받는 이유는 의식의 심층에 도사린 부정적인 감정과 이처럼 처절하게 투쟁을 벌인 기록을 흔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홀린 듯 공감하는 이유는 그가 표현한 주제인 불안과 공포, 절망, 질투라는 원초아의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의식에도 내재해 있기 때문이리라. 뭉크의 그림은 현실에 구속받지 않는 원초적 사고의 일차 과정(primary process)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_220쪽

내세울 친부가 없었던 모리스는, 수잔과 오랜 우정을 유지했던 스페인의 화가이자 비평가였던 미구엘 위트릴로가 친권에 서명하고 양육비를 부담하기 전까지는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미구엘 위트릴로는 수잔의 사랑을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모리스를 기꺼이 호적에 올리고 그에게 위트릴로라는 자신의 성을 붙였다. 공식적인 성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 대한 자부심과 강한 애착을 보였던 그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자기 이름을 모리스 발라동으로 썼다.
그가 10세 무렵에 수잔 발라동은 에릭 사티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6개월간 동거한다. 그는 어머니를 뺏어간 에릭 사티를 저주하기도 했지만 어린 아들과 어머니의 젊은 연인은 수잔 발라동의 애정을 갈망한다는 공통분모를 두고 서로를 이해하고 금세 애착을 형성한다. 하지만 에릭 사티도 어머니와 결별 이후 떠나버리자 모리스 위트릴로는 술에 취해 10대를 보내고, 이후 심각한 알코올 금단 증상을 앓으며 자살 소동을 벌이기에 이른다. _262쪽

어른들의 통제가 곤란한 대담한 성격의 말괄량이였던 발라동은 12세 때부터 생계의 현장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한다. 충동적이고 규율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던 성격으로 인해 세탁부, 미싱사, 웨이트리스 등의 직업을 전전하던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은 당시에 유행했던 서커스의 공중 곡예였고, 14세의 그녀는 서커스단에 입단한다. 그러나 이듬해 그녀는 말에서 낙상하는 사고로 인해 그토록 좋아하던 서커스단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40년이 지난 후에 수잔 발라동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서커스를 그만두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_306~307쪽 닫기

 

6. 출판사 서평


화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림이 더 잘 보인다!

에드가 드가는 왜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그리지 않았을까? 뭉크는 왜 절규하는 그림을 그렸을까? 에곤 실레 작품에는 왜 누드가 많을까?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화가들의 그림을 보다 보면 궁금한 점이 하나둘 생기곤 한다. 그림은 위안을 주거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삶의 도구다. 따라서 그리는 사람의 삶의 태도나 가치관, 심리 상태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미술작품을 통해 화가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그림을 감상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대가들의 그림을 통해 긍정심리학, 아들러 심리학, 게슈탈트 심리학 등 다양한 심리학 개념을 떠올린다. 그리고 화가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상처를 들여다본다. 그 과정에서 저자 스스로도 위안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돌아보게 한다. 이 책을 읽고 바쁜 일상에 지친 이들이 힘을 얻고 살아나갈 희망을 얻기를 바란다.


미술과 심리 공부를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책!

이 책은 크게 5가지 주제로 나누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와 관련된 저자의 생각과 심리학 개념을 설명한다. 

 

1장에서는 아웃사이더 아트라고도 불리는 나이브 아트와 긍정심리학을 연계해 설명한다. 제도권 내에서 그림을 배우지 않았으나 심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스스로 우뚝 선 화가들의 소박한 그림과 그들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긍정심리학을 이해할 수 있다. 

 

2장에서는 시대가 규정한 가치에서 벗어나 외부의 비평에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해나간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인생을 따라가본다. 그들의 그림을 보면, 인간은 역동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며 고유한 세계관으로 현상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아들러 심리학을 떠올리게 한다.


3장에서는 추상의 세계와 게슈탈트 심리학의 관계를 살펴본다. 20세기에는 회화가 일방적인 소통에서 작가와 감상자 간의 긴밀한 상호 소통으로 옮겨왔다. 본질과 비본질을 변별해 핵심만 그림에 담고자 하는 것은 게슈탈트 이론과 맞닿아 있다. 

 

4장에서는 화가가 가진 상처와 표현주의에 대해 알아본다. 표현주의 화가들은 내면의 열망과 상처를 과장된 색과 단순화된 구도를 통해 표현했다. 이런 작품들은 임상심리학과 정신의학적 주제들을 내포하고 있어 꼼꼼히 살펴볼 만하다. 

 

5장에서는 전문성과 여성성 사이에서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노력했던 여성 화가들의 삶을 돌아본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전통적 가치를 거부하고 전문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한 여인들의 용기 있는 행보는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대 여성들에게도 많은 공감과 울림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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