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온다』
<김현철 저, 쌤앤파커스, 2023>
I. 책 소개
미중 패권경쟁의 최전선이 된 한일 경제전쟁, 한국은 추락할 것인가, 추월할 것인가?
다극 체제와 디리스킹의 시대, 일본이 새로운 대외 팽창을 시작했다. 다시 아시아의 패권국이 되고자 판을 흔드는 일본과, 추격에서 추월로 일본을 넘어서려는 한국, 두 나라 경제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한미일 3국의 협력은 과연 한국 경제에 득일까, 실일까?
미중 패권경쟁의 대리전이 된 한일 경제전쟁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저술한 책이라고 한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큰 흐름을 보여주고 지금의 미국과 중국, 일본의 진짜 속마음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으나, 과연 저자가 문재인 정부 청와대 경제팀에 재직하면서 얼마나 포부를 실현하였는지는 의문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한국 경제 특급 처방이 과연 타당성이 있고 실제 정책에 반영되었고 앞으로 반영될 지는 다시 과제로 남아 있다. 미국, 일본, 중국의 속마음을 알아차리더라도 결국 내 힘으로 극복해야 하는데, 그가 속했던 문재인 정부의 지난 성과를 생각하면 그의 처방전도 효과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에서 중요한 내용은 그가 일본에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오랫동안 연구를 수행한 것을 토대로 2차대전 이후 일본 경제와 정치가 걸어가고 있는 현실을 생생하게 잘 요약하고 있어, 일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II. 현대 일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1. 도입
일본은 1968년에 서독을 추월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 후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었던 미국마저 급속도로 따라잡고 있었다. 특히 오일쇼크 이후 미국 경제가 주춤하는 사이에 일본은 에너지 절약형 제품과 경소단박 제품들을 출시하며 세계 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0년대 후반에는 1 인당 국민소득이 미국보다 높아지기도 했다. 그렇게 경제가 급성장하고 국민소득이 증대되니 일본에서는 인프라 투자와 건설 붐이 일어났다. 그러자 부동산 같은 자산의 가격도 덩달아 높아졌다. 일례로 1980년대 말에는 도쿄 도심의 왕궁 하나를 팔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전 세계 주식시장 시가총액 순으로 20위까지 꼽았을 때, 일본 기업이 무려 14개였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일본 기업들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20위 기업 중에 일본 기업은 한 곳도 없다. 30년 사이에 썰물 빠지듯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자리를 미국과 유럽, 중국 기업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한국의 삼성전자도 진입해 있지만 일본 기업은 전멸이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것 일까?
2. 버블이 꺼진 자리에 불황 블랙홀이 열리다
지난 30년의 일본 경제를 되돌아보면 한마디로 '정체의 30년'이었다. 1990년대까지 급속하게 성장하던 일본 경제가 1991년의 버블 붕괴를 기점으로 장기침체기에 진입한 것이다. 이 기간의 평균 성장률은 0.7%대에 불과했다. 이러한 저성장을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30년'으로 부르기도 한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20년, 30년으로 길어진 것이다. 히토츠바시대 명예교수인 노구치 유키오 교수는 '쇠퇴의 30년'이라고 평가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만큼 일본 경제가 상대적으로 뒤처졌다는 것을 지적한 말이다,
일본 경제는 4번의 커다란 경제적 쇼크 때문에 장기침체에 빠졌다. 첫 번째 쇼크는 1985년의 '플라자 합의'였다. 플라자 합의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들이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 모여서 달러화 약세와 엔화 강세를 유도하기로 한 합의를 말한다. 달러 강세로 무역수지 적자에 허덕이던 미국이 달러화 약세를 유도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무역흑자를 내고 있던 일본을 압박해 엔화 강세를 유도했다. 이 합의에 의해 당시 1달러당 240엔대였던 엔화가 1주일 만에 8.3% 내려가며 엔화 강세로 전환되더니, 2년에 걸쳐 120엔대로 급격히 절상되었다.
이러한 엔화 강세는 일본의 수출 기업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환율변동으로 말미암아 미국 시장의 판매가격이 급등한 것이다. 쉽게 말해 미국에서 100달러에 팔던 일본 제품 가격이 갑자기 200달러로 올랐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본 제품을 미국에 수출하지 말라는 조치와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당시 일본 기업은 대미 수출에 큰 타격을 받았고, 일본 경제도 급속하게 엔화발 불황에 빠져들었다.
수출이 큰 타격을 받자 일본 정부는 내수를 진작시켜 불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기준 금리를 낮추는 등 시중에 돈을 푸는 조치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 기업들의 대미 수출이 시차를 두고 회복되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뼈를 깎는 원가절감 노력 등을 통해 환율 충격을 흡수해 나간 것이다. 그러자 수출 기업들이 벌어들인 외화와 일본 정부가 푼돈까지 합쳐져 일본 내에 돈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린 돈이 주식과 부동산에 몰렸고, 자산 버블이 급속하게 생겨난 것이다.
전후 고도성장기에 꾸준히 상승하던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급격히 상승했다. 닛케이 주식이 4배 이상 올랐고, 6대 도시의 땅값 역시 3배 이상 올랐다. 이러한 자산 가격의 가파른 상승과 지나친 과열을 정부가 막아야 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것을 막지 못했다(거의 모든 버블은 꺼지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러다 거의 폭발 직전까지 급등한 1990년경에 일본 정부는 그제야 긴축 조치를 시작한다. 은행의 부동산 대출을 금지하고 기 준 금리를 올리는 등의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너무 급작스럽고 강력하다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1990년에는 주식이, 1991년에는 부동산 가격이 급격하게 추락했던 것이다. 한때 4만 엔 가까이 갔던 닛케이 평균 주가는 1만 엔 이하로 떨어졌고, 1991년에 300까지 간부동산 가격이 2005년에 100까지 하락했다. 이러한 자산의 급락은 버블기에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한 수많은 개인과 기업에 타격을 주었고, 그 영향으로 일본 경제 전체가 크게 휘청이게 된다.
충격에 빠진 일본 국민들은 버블의 발생과 붕괴를 가져온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며 투표로 심판했다. 그 결과 전후 안정을 구가했던 자민당 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재임 기간 1년을 넘기지 못하는 수상도 여러 명 나왔다. 때문에 경제대책들도 일관성 있게 추진되지 못했고 미봉책만 남발되었다.
언론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표현으로 어려움에 처한 일본 경제를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마불사랄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처럼 전후 고도성장으로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일본 경제는 축적해둔 힘이 있었기에 이 시기를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다.
3. 연속된 경제 쇼크와 개혁의 실패
이러한 일본 경제가 1997년에 두 번째 쇼크를 경험하게 된다. 대개 1997년이라고 하면 우리 국민들은 IMF 경제위기를 많이 떠올린다. 아시아발 외환위기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에 일본도 큰 어려움에 빠졌다. 버블붕괴 후 근근
이 버티던 일본 경제가 본격적인 불황에 빠진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재무구조가 부실한 많은 한계 기업들이 도산했을 뿐 아니라 이 기업들에 대출해준 금융기관도 함께 부실해졌다. 부실화된 금융기관 때문에 추가 대출을 받지 못해 흑자도산하는 기업도 연쇄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익도 잘 내고 경영도 잘하는 회사가 단기적인 자금을 변통하지 못해 도산하고 마는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복합불황'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실물 경제와 금융 부문이 서로 엮 이면서 함께 불황을 맞았다는 뜻이다. 이 시기에 일본 경제는 전후 처음으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또 안정적이던 실업률도 5%대로 급등했다. 특히 전후 처음으로 청년들의 취업이 어려워졌는데 이때를 '제1기 취업 빙하기'라고 부른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전후 처음으로 생산 가능 인구까지 감소하기 시작한다. 15세에서 64세까지의 생산 가능 인구가 줄면서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야 인구의 경제적 효과를 누구나 다 알지만,당시는 경제 전문가조차 잘 모르는 부분이었다. 생산 가능 인구가 줄면서 경제의 부가가치 생산 능력이 떨어짐과 동시에 생산된 제품에 대한 수요마저 함께 줄어드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 경제는 본격적인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수요가 약하니 기업은 가격을 낮추고, 소비자는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구입을 미뤘다. 이 시기에 소매 시장에서는 '할인판매',가격파괴' 같은 단어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중앙은행의 기준 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인하하면서 경기를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한번 빠졌던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버블경제 붕괴 후 근근이 버티던 일본 기업과 국민은 본격적으로 경제위기를 체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를 그런대로 잘 봉합한 사람이 바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다. 20001년부터 2006년 9월까지 재임하면서 그는 부실해진 금융기관에 과감하게 공적 자금을 투입해 안정화시켰고, 경제 분야에서 다양한 구조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신자유주의 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공공 부문을 민영화했고, 비정규직 고용을 과감히 확대해 정규직 중심의 전통적인 고용 관행에 '고용 유동화'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또 복지 부분에도 메스를 들이대어 연금이나 의료, 간병 등에 개인의 부담률을 높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일본 경제는 다시 플러스 성장으로 반등했지만 문제점도 없지 않았다. 사회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다. 일본 지식인들은 양극화를 우려하는 저작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미우라 아쓰시의 《하류사회》, 다치바나키 도시아키의 《격차사회》, 야마다 마사히로의 《희망 격 차사회》 등이 대표적인 책들이다. 시민사회도 고이즈미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던 차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이 다시 한번 일본을 덮친다. 이것이 일본 경제의 세 번째 쇼크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에서 발생해 유럽으로 전이된 경제위기였지만 당시 일본도 자본주의 경제 진영의 큰 축이었기에 이 유탄을 맞았다. 2009년 일본 경제는 -5.4% 성장률을 기록하며 전후 최대의 하락 폭을 기록했다. 또 실업률도 5.5%로 급등했으며 특히 청년들의 취업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때부터 일본 청년들은 '제2의 취업 빙하기'를 경험한다.
게다가 이번에는 엔화 강세까지 겹쳐 '엔화 강세-수출 악화-수입 물가 하락-디플레이션 심화'라는 악순환에 일본 경제가 다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 국민들은 이러한 경제위기를 자민당 정권으로는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2009년 민주당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정권 심판을 단행했다. 이 역시 전후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2009년부터 2012년 연말까지 집권한 민주당은 버블경제 붕괴 뒤에 자민당이 추진해왔던 여러 경제 정책의 노선을 180도 선회하는 방식으로 경제회복을 시도했다. 공공사업 중심의 경기부양 대책을 중단했고, 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지했다. 그리고 '콘크리트에서 인간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환경과 의료, 복지 등을 중시하는 정책 기조로 전환했다. 또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에서 국민 생활의 질적인 측면을 중시하고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는 쪽으로 기조를 바꾸었다.
이를 통해 내수 경제의 일정 부분은 회복되었지만, 엔화 강세를 그대로 용인하는 우를 범했다. 그 결과 수출 기업들은 더욱 어려워졌고 수입 물가가 계속 하락함에 따라 디플레이션이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처음으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이 다른 정책에서도 미숙함을 보이자 재계와 보수 언론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몇몇 정책에 대해서는 경제산업성과 재무성, 외무성을 위시한 일부 관료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2011년 3월 동북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했고, 그 영향으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전후 최악의 재해에 민주당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여론은 더욱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리고 2012년 선거에서 아베 신조가 대승을 거두면서 정권은 다시 자민당으로 넘어갔다.
4. 아베노믹스는 왜 반쪽짜리가 되었나?
아베는 2012년 12월부터 2020년 9월까지 역대 최장기간 집권한 총리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일본경제재생본부'를 설치하고 분배 위주 정책에서 성장 위주 정책으로 경제 정책을 재선회했다. 그리고 '3개의 화살‘이라는 경제 정책을 바탕으로 아베노믹스를 시작했다. 3개의 화살이란 과감한 금융 완화와 적극적인 재정, 감세와 규제 완화 정책이었다.
그중에도 특히 '과감한 금융 완화' 정책은 2년 사이에 통화량 을 2배로 늘리는, 소위 '차원이 다른 금융 정책'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8,000엔이던 주가가 1만 5,000엔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시중에 다시 경제의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또 통화량 증가에 따른 엔저 효과로 수출 기업들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외국인 중심의 관광 산업도 활성화되었다.
아베 수상은 경기가 더욱 살아날 것이라고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2014년 4월에 소비세(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에 해당)를 인상해 경기를 일시적으로 냉각시키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후 2015년 생산성 혁신,2016년 4차 산업혁명을 중심으로 한 일본 부흥전략, 2017년 '사회 5.0' 실현을 위한 미래 투자 전략 등을 계속 발표하면서 일본 경제를 회복시켜 나갔다.
이러한 아베노믹스의 최대 수혜자는 기업들이었다. 지속적인 산업 부양책과 규제 완화, 통화 공급과 엔저 효과 등으로 기업들의 이익은 확실히 개선되었다. 더구나 주식 시장이 활황으로 돌아서고 부동산 시장이 회복되면서 소비가 일부 개선되었고, 미미하지만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기업의 경기가 회복되자 줄어만 가던 정규직 고용이 2014년부터 늘기 시작했고, 비정규직 고용도 함께 늘면서 실업률도 크게 낮아졌다. 특히 청년 취업률이 높아지자 대학가에서는 '취업 빙하기'란 단어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베노믹스는 반쪽짜리 개혁이었다. 기업을 중심으로 한 공급 사이드는 정책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지만, 가계를 중심으로 한 수요 사이드는 여전히 뒷전에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고용은 개선되었지만 실질 임금은 여전히 정체되어 시장 수요는 살아나지 못했다.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에게 임금인상을 종용했지만, 기업들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이용해 현금을 쌓아두기에 바빴다.
이런 와중에 2019년에는 미중 통상분쟁이 본격화되면서 세계 경제가 하강하기 시작했고 일본 경제도 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때 두 번이나 연기했던 소비세를 인상하자 일본 내수 경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던 일본 경제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 바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이것이 일본 경제의 네 번째 쇼크였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미증유의 사태이었기에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초기 대응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본은 일본만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더욱 더디고 혼란스러웠다. 먼저 일본은 사스나 메르스 같은 감염병 대처 경험이 없었기에 의료계에 방역 매뉴얼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게다가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자 한 정치인들 때문에 정부도 더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도쿄 올림픽은 아베 정권이 '일본 부흥의 상징'으로 줄곧 의미를 부여해온 까닭에, 일본 정부는 코로나 확진자 발견이나 상황 공유에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대유행이 일어났고 외국인의 방일을 전면적으로 금지했으며 가게들의 영업을 제한하는 긴급 조치도 발령했다. 이것이 하강하던 일본 경제에 직격탄이 되었다.
2020년 2분기에는 경제성장률이 -7.8%를 기록하며 전후 최대 하락폭을 경신했다. 아베 수상은 지병을 핑계로 급히 사임했지만、그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의 성과도 코로나 직격탄을 맞고 초라하게 막을 내린다. 버블붕괴 뒤 소위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0.8%였다. 그리고 아베노믹스 기간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0.9%를 기록했다. 겉으로는 요란했지만 그가 목표로 잡은 2% 경제성장률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결과였다.
5. "이대로라면 일본은 망한다"
아베 정권을 계승한 스가 정권(2020년 9월부터 2021 년 10월까지 재임)은 코로나 긴급사태를 다시 선언했고 감염병 대유행을 억제하면서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실시했다. 국민총생산 GDP의 15.6%에 이르는 재정투입과 28.4%에 이르는 금융지원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예서는 GDP 3.4%의 재정투입과 10.2%의 금융지원이 있었는데, 이와 비교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경기부양책인 셈이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었을까, 경기부양 효과는 미미했고 이로 말미암아 일본의 국가부채는 GDP의 240% 가까이 늘어났다.
문제는 오래도록 일본을 괴롭혀온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팬데믹 같은 전 세계적인 재난, 재해 상황에는 어려운 계층일수록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양극화가 더욱 심해졌으니 국민의 불만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불만은 정치로 향했다. 스가 정권은 1 년 만에 막을 내리고 기시다 정권이 탄생한다.
아베의 계승자에 불과한 스가와 달리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베 정권과의 차별화에 노력했다. 자민당 내의 소수 파벌에 불과 했지만 신" 주류가 된 아베파와 달리, 기시다 수상은 구주류 파벌이었다. 기시다의 구주류는 전후 미국의 안보 우산 속에서 고도 경제성장을 이끈 파벌로서, 성장기에는 주류였지만 아베 정권 출범 후에는 비주류로 전락했다. 때문에 기시다 수상은 아베 정권과 다른 정책을 펴는 데 집중했다.
특히 경제 정책에서 기시다 수상은 기업을 중시한 아베노믹스와는 차별화된 새로운 자본주의 노선을 제시했다. 아베노믹스가 기업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데는 크게 기여했지만 임금인상과 소비증가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는 반성에 근거해 새로운 경제노선을 제시한 것이다. 기시다 수상이 제시한 새로운 자본주의의 틀은 임금을 높이고 분배를 개선하면 가계의 소비가 확대되어 다시 경제성장이 가능해진다는 구조이다. 아베노믹스가 기업 주도 성장 정책이었다면 기시다는 임금 주도 성장 정책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의 새로운 경제 정책이 제대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먼저 소수 파벌의 힘을 보완하기 위해 아베 전 수상의 국장을 무리하게 강행하다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아베 암살의 계기가 된 통일교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해 지지율이 많이 하락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경제 정책을 힘 있게 추진하지 못하고 신주류의 힘에 끌려가는 형국이 되었다.
때문에 많은 전문가가 일본 경제의 앞날을 우려하고 있다. 골드만삭스의 일본 경제 애널리스트였던 일본 전문가 데이비드 엣킨슨 David Atkinsan은 《위험한 일본 경제의 미래》에서 일본 경제가 위험한 길로 들어섰다고 지적했으며,〈재팬타임스〉의 전 논설위원인 브래드 글로서먼 Brad Glosserman 역시 《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에서 일본이 피크를 지나 하강하고 있다고 했다. 또 일본의 지식인, 경영자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히토츠바시 대학의 노구치 유키오 교수와 고베대학의 얀베 유키오 교수는 이미 일본 경제가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고 경고했으며,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 회장 역시 어느 인터뷰에서 "이대로라면 일본은 망한다"라며 엄중하게 우려했다.
이와 같이 전후 펄펄 날았던 일본 경제는 외부적인 쇼크에 의해 침체에 빠졌고, 무려 30년간 헤어나오지 못했다. 플라자 합의부터 아시아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거기다 코로나19 팬데믹까지 차례로 일본 경제에 쇼크를 주었고, 이러한 충격에 대한 대응에 연이어 실패하면서 더 길고 깊은 침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경제 정책의 실패가 반복되다 보니, 도쿄대의 요시미 순야 교수 등 일본 지식인들은 "실패가 실패를 부르고 쇼크가 쇼크를 부르는 악순환 속에 일본은 계속 쇠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6. 악연의 시작, 플라자 합의
악순환의 첫 단추는 바로 플라자 합의였다. 플라자 합의는 일본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이 문제 삼았던 것은 대일 무역 적자였는데, 이것이 비단 일본만의 잘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보다 한참 전부터 미국의 제조업은 계속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미국 소비자들이 자국 제품보다 일본 제품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미국은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노력보다 금융과 같은 서비스업을 키우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런 선택의 결과로 시장에 일본 제품이 범람하게 되었고 대일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진 것이다.
물론 일본도 잘못이 있었다. '일본식 경영' 혹은 '일본 기업의 경쟁력'을 너무 심하게 자랑하고 다녔다. 하버드대나 MIT 같은 미국 유수 대학의 교수들에게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하고 경영 자료를 제공하면서, 그들을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 기업의 우월성을 홍보했다. 그 결과 미국 경영대학원에서 사용하는 교재들에 일본 기업의 성공 사례들이 넘쳐났고, 이것은 역으로 미국인의 감정을 자극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들은 부동산, 영화사 등을 사들이며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주요 건물들, 미국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영화사들이 하나둘 일본 기업 소유로 넘어갔고 이러한 행태가 결국 국민적 반감을 유발했다. 일부 산업의 노동조합이나 일부 지역의 시민들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시작했고, 때로 제품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한 것이 미국의 정치가들이었다. 그들은 엔화를 평가절상해 일본 제품의 수출을 강제적으로 차단하려 했고, 그것이 바로 플라자 합의였다.
7. 일본 기업의 팔다리를 묵어놓은 미국
그런데 일본 정부의 양보는 플라자 합의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플라자 합의 직전인 1984년에 일본에 금융 협정을 요구해 관철시켰고, 1986년에는 반도체 협정을 관철시켰다. 특히 반도체 협정은 상당히 일방적인 것이었는데, 일본 반도체 기업의 미국 수출을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해외 반도체를 수입하는 것까지도 미국이 원하는 대로 강제해 반드시 지키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제시한 반도체 수입 목표에 일본이 미달하자 1991년 제2차 반도체 협정(신반도체 협정)을 요구했다. 이 '신반도체 협정'은 일본의 해외 반도체 수입 목표를 30%까지 끌어 올린 뒤 미국 반도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반도체까지 수입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었을까? 미국이 일본 기업의 팔다리를 묶어놓은 사이에 삼성전자나 TSMC 같은 외국 반도체 기업들이 급성장했고, 이것은 결국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요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에 추진된 '미일구 조협의' 내용을 보면 미국의 압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많았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거의 내정 간섭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미국은 일본 국민들에게 저축을 줄이고 금융 투자를 더 늘리라고 하거나, 농지 규제를 풀어 토지 공급을 늘리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 또 유통 규제를 완화해 토이저러스 같은 미국 특정 업체가 일본에 쉽게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외에도 일본 기업 의 전통적인 기업 간 관계(계열 관계)나 상거래 관행까지 바꾸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런 과도한 요구들은 독립된 국가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일본은 순순히 미국의 요구를 받아주었다. 일부 관료들은 오히려 미국의 힘을 빌려서 일본을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미국 측에 몰래 자료를 넘겨주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다 받아주었던 것일까? 왜 일본의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미국의 요구에 '노 No'라고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못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물론 딩시에 일부 눈 밝은 기업가들과 지식인들은 미국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 주는 일본 정치인들과 관료들을 질타했다. 소니 창업자 중 한 사람인 모리타 아키오와 작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펴내 순종적인 일본 정치인과 관료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참고로 이 책은 일본에서 125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고 일본 정부는 1995년경에야 미국과의 교섭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이미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10년'에 진입하고 난 뒤였다.
8. 정치인들이 패전을 종전으로 둔갑시킨 이유는?
이러한 과정을 다른 각도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 바로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 교수다. 시라이 교수는 전후 일본 정치를 분석하며 '아메리칸 푸들', 즉 '미국의 충견'이 되어버린 정치 구조를 연구해 일본을 뒤흔들어 놓았다.
시라이 교수가 지적한 문제의 출발점은 태평양전쟁의 패전 처리였다. 1941년에 시작해 1945년에 끝난 태평양전쟁은 일으켜서는 안 되는 전쟁이었고, 이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이 이러한 전쟁을 일으키고 패전했다면 당연히 패전을 패전으로 순순히 인정하고 전범국으로서 그에 합당한 책임도 져야 했다.
하지만 패전 후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엉뚱하게도 패전을 '종전'이라고 규정했다. 패배한 것이 아니라 그냥 전쟁이 종료된 것이라고 자기들끼리 정한 것이다. 패전이라고 규정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하지만, 종전이라고 규정하면 책임이 애매해지거나 모면할 길이 생긴다. 일본 정치인들은 그 점을 노렸다.
우선 전쟁 책임자를 찾는다면 당시 군의 통수권자인 일본 왕이 있다. 내각을 거치치 않고 군을 직접 관할했기 때문에 일왕은 전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를 피하기 위해 패전을 종전으로 규정한 것인데, 사실 전쟁 책임자는 일왕만이 아니다. 일왕과 함께 전쟁을 이끈 군부 지도자들, 전쟁 내각의 구성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문제는 전후의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이러한 전범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A급 전범,B급 전범들이 정치 지도자들의 아버지나 친척들이었다.
어쨌거나 주요 전범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나 친척 어른이다 보니, 전후의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일왕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해방 직후에 한국의 지도층이 자신들의 친일 행각을 감추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위원회 활동을 방해한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독재 정권, 권위주의 정권에 끊임없이 충성하며 친일 청산에서 벗어난 과정과 유사하다. 한국의 친일파들이 해방 직후에 친미로 신속히 전향했던 것처럼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도 전쟁 책임에서 벗어난 뒤 신속히 친미로 돌아섰다. 전쟁 중에는 미국을 적국으로 간주하고 국민들에게 '귀축미영(귀신이나 짐승 같은 미국과 영국이라는 뜻)'이란 말로 미국에 대한 증오를 심었던 그들이, 패전 후에는 철저히 국민을 기만하며 친미주의자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냥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고 세습 정치를 통해 유력 정치가로, 또한 일본 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있다.
9. 사무라이는 어떻게 아메리칸 푸들이 되었나?
시라이 교수는 일본 정치인들이 국민을 어떻게 기만하는지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사무라이 국가'로도 일컬어졌다. 막부 시대에 장군(쇼군)을 정점으로 사무라이들이 지배층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에도 시대에는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전설의 검객이 쓴 책이 각광받기도 했고,20세기 초에는 정치인이자 사상가인 니토베 이나조가 쓴 《무사도》같은 책이 일본인의 기본 정신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이런 정신이 충만한 사무라이 국가라면 일본을 패망하게 만든 적국인 미국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복수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전후 일본은 미국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미국에 완전히 굴복하고, 미국을 철저히 따르는 노선을 선택했다. 물론 명분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면서 자신들은 경제 부흥에만 철저히 매진하는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무라이 국가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시라이 교수는 이것을 일본의 수치이자 비굴함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이러한 비굴함이 초기 경제발전에는 일정 부분 도움이 되었지만, 플라자 합의는 그 명분마저 사라지게 했다는 것이다. 플라자 합의라는 '대미 굴종'이 일본에 이익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경제발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미국에 의존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확실한 이익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부분 정당화되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플라자 합의 이후의 대미 굴종은 오히려 일본의 국익을 해치는 굴종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대미 굴종의 합리화 기반마저 완전히 파기해버렸다. 전후에 그리고 플라자 합의를 할 때만 해도 '냉전 체제'라는 양국 공통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으로서는 미국에 납작 엎드려서라도 확보해야만 하는 안보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냉전 체제가 끝난 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 에 일본은 당장이라도 미국과의 굴욕적인 관계를 끝내고 당당한 독립 국가로서 자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가들은 냉전이 끝난 후에도 대미 굴종을 계속했다. 이때는 굴종을 위한 굴종, 종속을 위한 종속만 계속되었다. 경제적 이익도, 안보적 필요도 사라졌는데 굴종의 관성만 남은 것이다. 물론 정치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대미 굴종을 문제 삼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일본 경제는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정체되었고 냉전 종식 후에 찾아온 세계화 물결에도 뒤처지게 되었다. 대미 종속을 탈피하고 세계화 물결에 올라타 전 세계 국가들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교역했더라면 이후의 경제적 충격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치인들은 경제가 늪에 빠지는 상황을 나 몰라라 한 채 계속 미국에만 의존했다. 시라이 교수는 또 한 가지 재미난 점을 지적했다. 미국에 대한 굴종의 반작용이 아시아에 대한 오만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무라이 정신과 정반대로 미국에 굴종하게 된 일본인은 정신적으 로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혼란을 정면으로 해소하기보다는 아시아에 오만을 부림으로써 우회적으로 해소하려는 것이 일본인의 정신구조라는 것이다.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종전으로 규정함으로써 일본은 한국과 중국,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전쟁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더구나 이 나라들은 전후에 일본보다 가난했기에 일본은 이들에게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하기보다는 돈으로 적당히 보상한 뒤 오히려 오만을 부리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하고 오만한 태도를 고수한다. 물론 어떤 때는 인간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사과하거나 보상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지만, 패전을 종전으로 강변하다 보면 또다시 역사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미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에 굴종하면 굴종할수록 아시아인에 대한 오만은 더욱 심해졌다고 시라이 교수는 지적했다.
10.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의 구조화'
일본 정치 지도자들의 이러한 행태는 플라자 합의 이후의 경제 정책 실패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플라자 합의 같은 외부적 충격은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일본 정부가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내놓은 경제 정책이 번번이 실패함으로써 그 자체가 장기침체의 또 다른 근본 원인이 되었다. 버블 경제의 발생과 붕괴도,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똑같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나2020년 코로나 위기 때도 동일했다.
국내 경제 정책이 연이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과 동일하게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경제 정책이 실패해 국민의 원성이 높아지면 수상은 자리를 내놓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을 지지하거나 자신의 파벌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정치가를 후임으로 앉히면 끝이다. 후임 수상이 구성 하는 내각에 자기 파벌 사람들을 집어넣고, 자신은 뒤에서 영향력 을 행사하면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 영향력이 거의 사라질 즈음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지역구를 자식에게 물려주면 된다. 패전을 종전으로 정의해 전쟁 책임에서 벗어났듯, 경제 정책의 실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가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책임의 구조화'다.
유일하게 책임을 지고 정권을 내놓았던 것이 2009년 선거였다. 계속된 경제 정책 실패에 책임을 지고 54년 만에 자민당이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정권 교체는 3년 만에 끝났고 자민당은 정권을 되찾았다. 민주당은 만년 야당이다 보니 수권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54년 만에 정권을 잡았지만 우왕좌왕하다 3년 만에 다시 내놓고 말았다. 일본 국민은 단 한 번의 기회만 준 뒤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민주당을 향해 거의 폐족에 가까운 심판을 내려버렸다. 그 결과 자민당을 견제할 정당이 사라졌고, 자민당 독주 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고 말았다. 특히 자민당은 야당을 붕괴시킬 뿐만 아니라 더불어 언론의 비판 기능도 약화시켰다. 처음에는 위안부 보도의 문제점을 들어 〈아사히 신문〉을 공격하면서, 보다 우익적인 〈산케이 신문〉 등을 우대해주었다. NHK 같은 공영 방송에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장을 앉혀 더욱 보수적인 언론 지형을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일본의 언론 자유도는 점점 더 하락했고, 자민당에 대한 비판이나 견제도 더욱 어려워졌다.
시라이 교수는 야당이 완전히 몰락하면서 형성된 2012년부터 의 자민당 독주 체제를 '2012년 체제'라고 했다. 여기서 '체제'란 여러 정권을 관통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시라이 교수는 이 시스템 속에서 무책임의 구조화가 더욱 심화되었다고 보았다.
2012년에 탄생한 아베 정권과 그 이후 정권은 사라진 대미 종속의 근거를 중국에서 찾았다. 중국을 구 소련을 대체하는 자유 진영의 새로운 경쟁자로 규정하고, 이를 대미 종속의 새로운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해 '전쟁 가능한' 국가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또한 국익과는 반대되는 노선이었다. 중국은 일본 경제에 핵심 이익을 창출해주는 중요 시장이었고, 군비 확대는 경제발전에도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이런 자민당을 견제할 야당도, 비판할 언론도 없었다. 이러니 도쿄대 요시미 교수는 "잃어버린 30년이 다시 잃어버린 40년, 50년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히토츠바시대학의 노구치 명예교수는 "일본이 곧 선진국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정권이 얼마나 무능했는지는 버블붕괴 후 역대 수상들의 재임 기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고이즈미나 아베처럼 장기 집권한 수상도 있었지만、대부분이 평균 1년 정도의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다. 그러니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경제 정책을 내놓기보다는 단기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정책만 남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 수상들이 거의 대부분 '세습 의원'이라는 점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쉽게 국회의원이 되고, 이후에도 쉽게 당선 횟수를 늘려온 수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한 수상은 거의 없었다. 적당히 재임하다가 물러나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나이가 차면 자녀에게 지역구를 물려주면서 국회의원직을 마치 가업처럼 이어간 것이다.
11. 곳곳에 부작용을 낳은 잘못된 경제 처방전
그나마 고이즈미 수상과 아베 수상은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일정 부분의 경제적 성과를 냈다. 고이즈미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년간 집권하면서 전후 최장기 호황인 '이자나미 경기(2002년부터 2008년까지 73개월의 초장기 호황)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호경기이긴 해도 너무 약한 호경기이다 보니 많은 국민이 경기가 좋아졌음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소위 '저온 호황'이었다. 특히 고이즈미 수상은 민영화와 고용 유연화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일본 사회에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우를 범했다.
아베 수상도 7년 8개월간 장기 집권하면서 초기에는 성과를 냈지만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경제상황이 나빠졌다. '아베노믹스' 라는 이름으로 그의 경제 정책을 포장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가 재임하는 동안의 경제성장률은 이전 잃어버린 20년과 비교해 별 반차이가 없었다.
특히 아베는 '제로 금리' 정책을 통해 통화량을 지속적으로 늘렸지만, 목표로 한 2% 인플레이션을 달성하지 못했다. 통화량이 팽창한 데다 저금리까지 합쳐져 엔화 환율이 지나치게 약세였는데, 이것 역시 일본 경제 곳곳에 부작용을 낳았다. 예를 들어 일부 수출 대기업은 환율 약세의 혜택을 보았지만 많은 중소기업은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 서민 가계는 생필품 가격이 상승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때문에 아베 암살 이후, 기시다 내각이 아베의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하자 많은 국민이 반대하는 일도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떠한 처방전이 제대로 된 처방전이었을까? 이에 대해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그중에서 우리에게 시사점을 줄 수 있는 2가지 원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장기침체가 버블의 발생과 붕괴로 시작되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인구 감소, 특히 생산 가능 인구의 감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소위 '인구 절벽'과 장기침체가 함께 일어났다. 이것은 한동안 일본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유였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 경제도 장기침체에 빠졌지만, 인구 충격은 오랜 기간 서서히 나타났다. 게다가 유럽은 경제 통합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충격을 국가 간 인구 이동이나 이민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완화해왔다. 하지만 일본은 인구 충격을 매우 빠른 속도로 경험하게 된 첫 선진국이었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생산 가능 인구가 급속도로 줄었고, 이것이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일본총합연구소 모타니 고스케 같은 학자들이 2010년대에 들어서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 인구 충격을 지적하자 비로소 이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차는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12. '인구 절벽'을 경험한 최초의 선진국
우리나라도 비슷한 문제를 경험하고 있기에 모타니의 지적 중에 특히 새겨들어야 할 점이 많다. 그중 하나는 인구 감소가 수요 감소를 유발하기 때문에 일본의 역대 정권들이 추진해온 공급 위주의 정책으로는 문제해결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가 기업의 영업이나 생산활동, 투자 등을 도와주더라도 인구 충격에 따른 수요 감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장기침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발상을 180도 바꾸어 수요 위주의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사회 안전망을 촘촘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주는 것이다. 특히 빈곤층과 한계 빈곤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을 두텁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안심하고 소비활동과 생산활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령자들이 생산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생산 가능 인구의 감소를 상당 부분 커버할 수 있다. 소위 생산 가능 인구의 상한선을 높여주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돈 많은 고령자에게 충분한 인센티브를 주어서 그들이 소비를 늘리도록 도와야 한다. 만약 그것이 힘들면 고령자의 자산과 소득을 소비활동 이 왕성한 자녀 세대나 손자 세대로 조기에 이전하도록 해서、젊은 세대가 더욱 적극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비슷한 방법으로 여성 경제활동 인구를 늘리는 방법이 있다. 일본 사회는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여성들을 전업주부로 묶어두거나 일을 하더라도 파트타임 잡에 머무르게 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불러내고, 또 파트타임보다는 전일제로 일하게 하면 인구 충격을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 출산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초기에 많았는데、실제로는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취업한 여성들은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고, 덕분에 출산율이 오히려 더 높아진 것이다. 따라서 정책적으로 더 많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그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 출산, 육아, 교육 등을 지원하는 복지 제도를 더욱 체계적으로 빈틈없이 갖출 수 있다면 출산율도 올라가고 생산 가능 인구도 확대되며 수요도 늘어난다. 이러한 정책이 공급 위주의 경제 정책과 맞물릴 때 경제가 장기침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모타니의 처방전이었다.
13. 총수요 확대를 위한 기시다의 새로운 자본주의
비슷한 처방을 얀베 유키오와 같은 거시경제학자들도 제시했다. 얀베 교수는 잃어버린 30년을 거시경제적으로 분석한 뒤,결국 장기침체는 총수요 부족으로 인해 지속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역대 자민당 정권은 공급 사이드 위주의 정책으로 기업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하지만 혜택을 받은 기업들은 이익만 잔뜩 쌓아두고 좀처럼 투자를 하지 않았다. 소위 '낙수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기업들은 종업원들의 임금을 거의 올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이익을 높일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들 모두가 피해를 보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종업원들은 소비를 억제하게 되고 그 결과 기업들의 매출도 함께 떨어진다. 그러면 기업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가격을 낮추지만, 소비가 한정되어 매출이 더욱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것이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고, 이 악순환이 일본 경제를 더 깊은 장기침체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아베 등 자민당 정권은 이러한 악순환을 통화량 확대나 환율 인하와 같은 공급 위주 정책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또 역사 수정주의를 통해 잘못된 방향으로 일본 국민의 자긍심을 높여 경제 외적인 방법으로 장기침체를 해결하려는 시도도 했다.
이러한 잘못된 정책의 폐해를 경험한 기시다 정권은 새로운 자본주의 노선을 가지고 장기침체에 대응하려 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임금인상을 통해 수요를 진작시키는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다. 또 수요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분배, 복지 정책도 함께 내놓았다.
하지만 30년의 시행착오 끝에 내놓은 이 새로운 노선의 정책들도 결국 자민당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베파 등의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다. 임금 주도 성장 정책이나 분배를 통한 성장 정책 같은 진보적인 정책을 보수적인 자민당 주류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시다의 새로운 자본주의 노선도 용두사미로 끝나버릴 운명이었다.
많은 학자가 장기침체에서 벗어날 처방전을 내놓았지만, 보수화된 자민당 정권의 권력 구조에서는 좋은 정책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보수 정치인들은 여전히 수출 대기업 지원 같은 낡고 오래된 정책만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경제를 개혁해야 할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고 오히려 경제의 발목을 잡으니 장기침체는 여전히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이것이 바로 이웃 나라 일본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14.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국민'이 가능한가?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으며 일본은 장기침체에 빠져들었고, 또 한 정부는 제대로 된 처방전을 내놓지 않았다. 경제가 도통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본 국민들은 의외의 선택을 하게 된다. 다시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고 소위 '각자도생'의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최근 '포기'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포기하다'라는 일본어 단어(아키라메루)는 정치에서도, 언론에서도, 기업에서도,심지어 가정에서도 자주 들린다. 이유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는 뜻의 일본어 단어는 '쇼가나이'다. 정치에 참여해 투표를 해봐도 변화가 없고, 언론이 정론을 펴며 정치를 비판해 봐도 바뀌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니 말이다. 기업의 느려 터진 의사결정은 종업원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늘지 않는 소득을 가지고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된다. 내일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은 포기한 지 오래다.
특히 일본 젊은이들의 절망이 심각하다. 정치는 이미 노인들이 장악했다. 투표율은 선거 때마다 점점 낮아지는데, 그 와중에 꼬박꼬박 투표장에 가는 사람들은 노인들이 대다수다. 그러니 자민당은 투표를 열심히 하는 층에 이익을 주는 정책에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은 투표장에 잘 오지도 않으니 그들을 위한 정책은 선거 승리에 별로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의 정치는 소위 '실버 민주주의 silver democracy'가 되었다. 노인을 위한, 노인의 정치가 된 것이다. 일본의 정치가 점점 더 보수화되는 이면에는 이러한 실버 민주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럴수록 일본의 젊은이들은 포기하고 체념한다. 끝없는 불황과 비좁은 취업문, 늘지 않는 임금에 사회 부조리마저 충만하니 아예 체념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연애도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 하고, 승진도 포기하고, 도전도 포기하고, 오로지 자신의 자그마한 행복에만 빠져들었다. 한국에도 전파되어 한동안 유행했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사실 장기침체 속 일본 젊은이들에게 먼저 나타난 사회현상이다.
그들은 편의점 도시락으로만 끼니를 때우고 돈을 벌려는 욕심도 없다. TV나 자동차 같은 비싼 내구재는 사고 싶지도, 갖고 싶지도 않다. 이성에도 관심 없고 섹스에 대한 욕구도 없다. 장기 침체 동안 일본에는 이런 젊은이들이 늘어갔다. 그중에서도 게임 등에 몰두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1990년대부터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늙은 부모가 식사를 방문 앞에 놓아두면 그것만 조용히 가져가 먹고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젊은이들이다. 이들 중 일부가 일탈해 온라인으로 마약을 거래하거나 어린이를 유괴해 집 안에 가두는 비행을 저질러서 신문 사회면을 크게 장식하기도 했다.
이러한 체념이 깊어지면 득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일까? 이제는 이런 절망이 전혀 불편하지도 않고, 오히려 체념 상태가 더욱 편안해졌다. 때문에 이러한 젊은 세대를 일본에서는 '득도 세대'라 부른다. 일본어로 '사토리'가 득도다. '득도'란 종교적 정진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일본 젊은이들이 그 정도로 체념과 절망을 타고난 천성처럼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종교적으로 득도의 경지에 이르면 행복감까지 느낀다고 하는데, 득도 세대 젊은이들 역시 부처의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온갖 번뇌 속에서도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2010년에〈뉴욕타임스〉 도쿄 지국장이 이런 질문을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던졌다.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했는데 일본의 젊은이들은 왜 저항 하지 않습니까?"
이 물음에 일본의 한 젊은 사회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항과 분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절망의 나라에서 오히려 행복합니다."
15. 일본의 새로운 대외 팽창의 시도
(1) 센카쿠 분쟁과 혐중 정서의 시작
2010년은 일본인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였다. 특히 보수 우익들에게는 '치욕의 해'이기도 했다. 먼저 2010년에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의 자리를 중국에게 내주었다. 일본은 1968년 서독을 누르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오랜 세월 동안 '탈아입구', 즉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의 일원이 되겠다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추진했다. 그런 일본이 드디어 유럽의 선두국가 서독을 누르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니, 얼마나 강한 자부심을 가졌겠는가? 중국에 세계 2위 자리를 내어준 것은 그런 일본인들의 자부심이 크게 손상되는 일이었다. 그간 일본은 아시아를 비근대적인 국가들로 치부했고, 특히 중국을 '지나'라고 비하하며 내심 낮추어 보았다.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은 침략의 대상이었고 만주국처럼 위성국가를 세워서 지배하던 국가였다. 그러던 중국에 세계 2위 자리를 빼앗긴 것은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중국은 13억 3,000만이 넘는 인구대국이 아닌가? 1억 2,000만의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던 2010년 9월, 일본에 치욕적인 일이 발생했다. 센카쿠 열도(중국명은 '다오이다오')는 중국과 영토분쟁이 있던 지역이었다. 일본은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중국은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해왔다. 다만 일본이 먼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기에 중국이 문제를 제기할 때만 양국이 부딪히는 곳이었다. 2010년 9월 7일 오전, 센카쿠 열도 주변에서 조업하던 중국 어선과 일본의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상보안청은 이를 의도적인 공무집행 방해로 간주해 중국 어선 선장을 체포했다. 이에 중국은 강력히 항의하며 선장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오히려 구속기간 연장을 발표하며 대항했다.
그러자 중국은 일본 기업인 4명을 군사관리구역 불법촬영 혐의로 구속하고, 또 전자제품과 자동차 생산에 필수적인 희토류의 대일본 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중국의 이러한 압력행사에 못 견디고 일본은 9월 24일 중국인 선장을 석방했다. 석방 이유를 묻는 기자회견에서 "일본 국민에 대한 영향과 일중 관계 등을 고려한 판단"이라고 발표했지만 일본의 완전한 굴복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이 선장을 석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영토와 주권, 중국 국민의 인권을 현저하게 침해한 것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표명한다"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일본 기업인 4명 중 3명만 석방하고 1명은 '외교 카드'로 계속 잡아두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격분해 10월 2일 도쿄에서 센카쿠 열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대규모 반중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중국 사람들도 이에 뒤질세라 시안과 청두 등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를 했다.
이러한 양국 국민의 시위는 2012년까지 계속되었다. 2012년 8월에는 '일본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연맹'에 소속된 의원 등 150여 명이 센카쿠 열도에 상륙하려 했다. 2012년 9월에는 만주사변 발발 81주년 기념일에 3,000명 이상의 중국 시위대가 베이징의 일본 대사관 진입을 시도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또 중국에서는 도요타자동차와 파나소닉 등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양국의 시위야 영토분쟁에 대한 국민감정이 표출된 것이지만, 희토류 보복에 의한 선장 석방은 2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주었다. 하나는 영토분쟁이 경제안보적 상황으로 확대된 점이다. '경제안보'란 경제를 영토분쟁과 같은 안보적 상황에 이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희토류는 산업 생산에 결정적인 전략 물자였다. 이 물자를 90% 이상 중국에 의존하는 일본 입장에서는 경제를 위해 중국에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은 이때 중국에게 당했던 방법을 2019년 우리나라 수출 보복에 그대로 써먹는다. '수출 보복'은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전략 물자인 반도체 핵심 물품의 수출을 금지하는 것으로 대응한 사건이었다. 중국이 쓴 방법을 똑같이 반복한 치졸한 행동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를 계기로 일본에 혐중 정서가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반중 정서는 그전에도 존재했지만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들은 그것을 마음속에만 묻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이처럼 굴욕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자 일본인들도 대놓고 혐중 정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 수면 아래에 있던 일본 보수 우익들도 전면에 나서기 시작 했다. 시위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SNS에 혐중 발언을 적극적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일부 식자층도 혐중을 조장하는 글이나 서적들을 스스럼없이 내놓기 시작했다.
(2) 한국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천황 발언
왜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일어날까? 이 와중에 일본에서는 동일 본 대지진이 터졌다. 2011년 3월 11일, 규모 9.1 의 강진이 발생한 것이다. 일본의 지진 관측 역사상 최고 규모를 기록한 지진이었다. 또 초대형 쓰나미까지 밀려와 동북지방 해안선을 따라 대규모 인적, 물적 피해가 더해졌다.
특히 세계 역사상 가장 심각한 원자력 사고 중 하나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까지 일어났다. 지진이 잦은 일본의 특성상 3중, 4중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했지만, 자연의 거대한 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했다. 지진으로 인한 원전 폭발 사고의 결과 발전소 일부가 파괴되어 아직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 상태다.
동일본 대지진은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에 일본 사회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충격이 제대로 수습되기도 전에 이웃 나라 한국으로부터 다시 일본을 뒤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10일에 독도를 공식 방문했던 것이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에게 독도는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지명이었다. 일본 내에서는 '다케시마'라고 불렸지만, 대부분의 일본 국민은 어디에 있는 섬인지도 잘 몰랐다. 그런 곳에 이명박 대통령이 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것이었다.
일본이 이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직접 강한 유감 성명까지 발표하며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고、이 문제로 양국 관계에 격랑이 몰아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주한 일본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기까지 했다.
그 정도에서 그쳤다면 적당히 수습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에 이명박 대통령이 기름을 또 붓는다. 그 유명한 '천황 발언‘이 나온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방문하고 며칠 뒤에 소감을 묻는 시민들의 질문에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우선 지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일왕이 독립투사들 앞에서 고개 숙여 사죄 한다면 일왕 방한도 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거기다 덧붙여 "통석의 염 뭐가 어쩌고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도 없다"고까지 말하며 쐐기를 박았다. '통석의 염'은 다름 아닌 아키히토 일왕이 1990년에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한 말이었다. 한국 대통령이 일왕을 직접 겨냥해 사죄하라는 발언을 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3) 얼어붙은 한일 관계, 반한을 넘어 혐한으로
그런데 이 발언은 이명박 정부가 그동안 보여온 일본과 일왕에 대한 태도와는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이후 노무현 정권 때와는 달리 친일적인 자세를 보였다. 2008년 4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한일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원론적으로는 천황이 한국을 방문하는 데 굳이 방문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그 직후 일왕을 방문해 한국에 초청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9년 9월 15일에는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일 강제 병합 100주년을 맞는 2010년에 일왕을 초청할 계획이라고 거듭 밝혔다. 또 불과 1달여 전에 한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GSOMIA을 비밀리에 추진하려다가 이 사실이 유출된 후 국민들의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일 군사정보포괄 보호협정을 계속해서 추진할 것임을 천명한 상태였다. 그런 이명박 정부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이 발언은 일본을 뒤흔들어 놓았다. 안 그래도 동일본 대지진으로 슬픔에 잠긴 일본인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울분을 터뜨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보수 우익에게는 또 다른 치욕으로 여겨졌다. 중국은 대국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있었지만, 한국은 자신들이 식민지로 지배까지 했던 나라가 아닌가? '한강의 기적' 등 경제적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한 수 아래의 나라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가진 일본 우익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부에서는 "앞으로 한국을 적국으로 보겠다"는 강성 발언도 나왔다.
일본 내의 이러한 반응은 한일 관계에 2가지 큰 흐름을 만들었다. 하나는 당시 일본에서 대단히 높았던 한국에 대한 친근감이 급전직하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친근감은 크게 높지 않았다. 하지만 1998년 김대중 오부치 선언 후 양국 간의 친근감은 매우 높아졌고, 한류 붐이 더해지면서 일본 국민은 한국을 좀 더 가깝게 여겼다. 이와 더불어 한일 관계도 좋아졌다. 일부에서는 '백제 시대 이후 최고의 한일 관계'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던 한일 관계가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으로 급속히 냉각되었다. 그리고 냉랭해진 분위기는 박근혜, 문재인 정권 때도 계속되었다.
또 하나의 흐름은 일본 내에 혐한 풍조가 급속히 확산된 점이었다. 사실 우리는 일본을 싫어하고 반대해도 '혐일'이라는 단어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반일' 정도로 통일해 사용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반한'을 넘어 '혐한'이라는 더욱 격한 감정을 담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혐한 감정이 확산되자 혐한을 조장하는 방송과 서적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광고판에는 혐한 기사를 실은 잡지 광고들로 가득했고, 주요 서점에는 아예 혐한 잡지와 책만을 전시해놓은 특별 코너가 생길 정도였다.
(4) "인도양,태평양을 결합해 중국을 봉쇄하자"
혐중과 혐한으로 기울어 가는 국민을 일본의 정치가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특히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이러한 정서를 조장하고 이용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런 정치인의 전형이 아베 신조였다.
아베는 이명박 대통령의 천황 발언이 있고 얼마 뒤에 집권한 수상이지만, 2006년에 1 년간 단기 집권한 적도 있었다. 이때 중국을 의식한 쿼드 전략과 인도 태평양 전략의 원형을 내놓았다. 아베는 2007년 8월에 인도를 방문해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의회에서 연설했다. 이때 '2개의 대양의 결합‘이라는 주제의 연설에서 인도양과 태평양에 면한 인도와 일본이 자유민주주의를 중시하는 가치 외교로 양국 관계를 더욱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과 인도가 미국, 호주와 함께 4개국, 즉 쿼드quad의 연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중국은 이미 2005년 전후에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 인도양 주변 국가에 대규모 항만을 건설하려는 전략을 추진해 왔다. 나중에 '진주목걸이 전략'이라고 일컬어지는 전략이었다. 인도양 주변의 전략적 거점들을 마치 진주목걸이처럼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동에서부터 남중국해로 연결되는 해로를 따라 여러 나라와 전략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국으로의 에너지 자원 루트를 안정시키려는 전략이었다. 아베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역으로 해양 세력을 규합해 중국을 봉쇄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1기 아베 정권은 단명했지만 2012년에 다시 총리로 복귀한 아베는 우선 유명무실해진 쿼드 구상을 '안보 다이아몬드' 구상으로 부활시켰다. 안보 다이아몬드 구상이란 아베의 집권 2기 안보 구상으로, 일본, 미국, 인도, 호주의 4개국을 연결할 경우 태평양과 남중국해, 인도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마름모꼴 형태가 되는 데서 착안한 구상이었다.
아베 총리는 센카쿠 열도 분쟁 이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중국해가 '중국의 호수'가 되려고 한다"라고 하며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력 증가에 위협을 느끼는 인도와 호주를 미일 안보동맹에 연결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중국을 자극했다. 그다음 해에 출범한 중국 시진핑 정부는 2013년 9월 그 유명한 '일대일로' 전략을 제시한다. 일대일로 전략에서 일대는 산시성의 시안 혹은 내몽골 자치구의 후허하오터에서 시작해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이란, 튀르키예, 우크라이나, 독일로 이어지는 육상 실크로드다. 그리고 일로는 베이징에서 시작해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몰디브, 파키스탄, 예멘, 케냐, 탄자니아, 그리스, 이탈리아를 잇는 해상 실크로드다. 이를 합한 '일대일로'는 총 49개국을 도로와 철도, 해로 등의 교통 인프라 투자로 연결해 국가 간 운송 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일대일로 전략은 기존의 진주목걸이처럼 에너지 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이들 지역의 물류와 에너지, 산업 등을 하나로 묶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 경제권을 만들겠다는 계획으로 확장된 버전이었다.
일대일로 전략에서 아프리카의 케냐는 중국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데 이 지역을 방문한 아베는 2016년 8월에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 태평양 전략 FOIR Free and Open Indo-Pacific Strategy'을 발표한다. 아베는 당시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아프리카개발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했는데, 태평양에서부터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인도 태평양 지역을 "자유와 법치,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장방'으로 규정하고, 관련국들이 국제 규범에 근거한 인프라 정비와 무역, 투자, 해양 안보 분야 등에서 협력을 추진해 나가자고 주장했다. 오늘날 외교 무대에서 일반 명사처럼 자주 사용되는 인도 태평양 전략(인태전략)이 쿼드와 안보 다이아몬드 구상을 거쳐서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다.
이후 아베는 2017년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집요하게 설득해 같은 해 1 1월에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 태평양 전략'을 양국 공동의 외교전략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아베는 트럼프를 설득해 2020년 8월 미국, 일본, 인도, 호주의 4개국으로 구성된 안보협의체를 출범할 뜻을 밝힘으로써 쿼드도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인태전략과 쿼드는 이후 바이든 행정부도 그대로 계승해 중국을 견제하는 주요 전략으로자리 잡았다.
아베는 왜 이렇게 집요하게 중국을 봉쇄하고 견제하려는 것일까? 물론 이전의 치욕을 갚고자 한 목적도 있지만, 미국의 힘을 빌려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목적도 숨어 있었다. 이는 아베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의 '미쓰야(三矢, 3개의 화살) 전략'과도 연관이 있다. 한반도에서 한국을 떼어내고 중국에서 대만을 떼어내어 이 나라들과 일본이 함께 '자유주의의 3개의 화살‘이 되자는 전략이다.
이 전략의 아베 버전이 바로 인태전략이었다.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양 세력들이 협력해 중국과 북한, 러시아의 대륙 세력들을 봉쇄하는 전략이다. 여기에 미국을 끌어들여 해양 세력의 힘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이 전략이 제대로만 작동한다면 일본은 라이벌인 중국을 누르고 아시아의 맹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5) 투키디데스 함정과 트럼프의 예정된 전쟁
아베의 생전에 그와 관련된 동영상 하나가 화제가 되었다. 2017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베 수상은 트럼프를 극진히 대접했다. 트럼프를 골프장에 초대해 친선을 도모했는데, 아베 수상이 벙커에서 크게 넘어진 것이다. 벙커 샷을 하고 난 뒤 너무 급하게 트럼프를 따라가려다가 나뒹굴고 말았다. 이 장면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일본 전역에 방영되었다. 이것은 아베가 트럼프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하려 했는지 보여 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아베는 트럼프에게 간과 쓸개를 다 빼 주면서까지 환심을 사려 했고, 그 환심 속에서 인태전략 세일즈가 성공했던 것이다. 트럼프는 사업가답게 아베가 만든 중국 포위 전략인 인태전략을 흔쾌히 사버렸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왜 일본의 인태전략을 선뜻 받아 미국의 외교전략으로 선택했을까?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중국을 WTO에 가입시켰다.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중국 경제가 성장하자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Liberal International Order'에 중국을 편입시켰던 것이다.
이 조치로 중국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으로 전 세계가 필요로 하는 범용품을 만들어 수출했다. 덕분에 미국도 큰 혜택을 누렸다. 중국이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공급해주니 미국은 인플레이션 없이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더구나 중국이 미국에 수출해서 벌어들인 외화로 다시 미국 국채를 사주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더욱 고마웠다.
하지만 중국 때문에 미국의 범용품 공장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값싼 중국 제품이 범람하자 미국의 제조업 공장들이 하나둘 경쟁력을 잃고 도산하거나 공장을 아예 해외로 옮겨버렸다. 그러자 그 기업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이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 미국 중부의 공장 지대, 즉 러스트 벨트rust belt였는데 이곳에서 일하던 백인 중산층들이 많이 몰락했다. 이들의 불만을 전략적으로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트럼프였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는 러스트 벨트 지역의 노동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예상치 못한 이변을 일으키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 트럼프에게 중국을 봉쇄하자는 아베의 인태전략은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좋은 제안이었다. 러스트 벨트 지역을 중심으로 한 주민들의 불만을 중국으로 돌린 뒤, 중국을 봉쇄하는 인태전략을 자신의 전략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유권자들도 좋아하고 지지율 유지에도 도움이 되니 트럼프가 마다할 리 없었다.
그때 재미난 책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초대 학장을 역임한 국제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쓴 《예정 된 전쟁(2017 출간)》이란 책이다. 이 책의 부제가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할 수 있는가'다.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새로 부상하는 세력이 기존의 지배 세력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위협해올 때 구조적 긴장이 극심하게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앨리슨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기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급격하게 부상하던 아테네와 이를 견제하려는 스파르타가 빚어낸 구조적 긴장 관계의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지난 500년간 세계에서 발생한 '투키디데스 함정'은 총 16차례였고, 그중 12번이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의 턱밑까지 따라왔고 그 속에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중흥(중국몽)을 선언했기 때문에 미국의 견제는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 야망을 축소한다면 이 전쟁을 피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역전쟁이나 사이버 전쟁, 해상에서의 국지적 충돌 등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트럼프가 취하는 외교적 조치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일정 부분 정당화하는 책이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주장이 미국 주류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기에 한국에도 소개되고 주목받았다.
(6) 안보를 위해 경제를 수단화 하겠다?
앨리슨의 책이 학계에서 미중 패권경쟁을 정당화해준 것이라면, 미국 정부 차원에서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새롭게 개발되었다. 바로 '경제안보 Economic Security'라는 재미난 개념이었다. '경제가 안보고 안보가 경제다'라는 개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개념이다. 경제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먹고사는 문제는 곧 죽고 사는 문제'다.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하는 수많은 죽음의 이유 중 상당수가 '먹고살기 힘들어서'가 아닌가? 그러기에 경제가 곧 안보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처음 생겨난 것도 아니다. 과거에도 이미 오랜 세월을 풍미했다. 못 먹고 못살던 시절에는 국제교역만이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이었다. 교역이 곧 안보였고, 군대를 총동원해서라도 국제교역을 지켜야만 했던 내세기 중상주의 시절도 있었다. 더 나아가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국부를 축적하려 한 19세기 제국주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현대에 접어들어 경제는 서서히 정치와 분리되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화 이후 경제 우위의 시대가 열리면서 경제와 안보를 연결하는 사고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2017년 12월, 미국 국방부가 이 개념을 들고 나왔다. 경제가 안보만큼 중요하다는 주장은 상무성이나 무역대표부가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왜 국방부가 먼저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까? 경제적 번영과 성장이 국가안보와 직결된다는 이야기는, 곧 국가안보를 위해 경제를 수단화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중국의 무역공세 때문에 미국인들은 불만이 커졌고 이것은 또한 국가의 안위까지 위협하기 때문에, 중국과의 무역을 규제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또 화웨이 같은 중국 통신장비 회사의 제품이 국가안보를 위협하기 때문에 미국 시장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논거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경제안보 개념을 이용해 트럼프 정부는 2018년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주요 수입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그리고 국가 기간망에서 중국 통신회사 제품을 모두 퇴출시켜버렸다.
경제 전문가의 눈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수입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면 어떻게 될까? 수입되는 양이 줄어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것의 대체품이 없다면 오히려 수입품의 가격만 올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미국 내에 물가상승 분위기가 있을 때 이러한 고율의 관세부과는 물가상승을 더욱 부추길 수 있는 잘못된 조치다.
때문에 2021 년에 탄생한 바이든 행정부는 무역전쟁에서 첨단 기술전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리고 '프렌드 쇼어링 friend-shoring' 혹은 '신뢰 네트워크 trust value chain'라는 개념을 가지고 자유 진영 국가들과 연합해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또한 리쇼어링 reshoring 정책을 추진해 한국 기업이나 대만 기업 등을 미국으로 강력하게 유치하기 시작했다. 필요하다면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 IRA, Inflation Reduction Act 이나 반도체 법 등을 만들어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면서까지 해외 기업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미국 우선주의'를 위한 것이다. 좋은 말로 미국 우선주의이지, 결국은 자국의 이익만 챙기겠다는 조치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들은 다른 나라의 이익을 해칠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의 자연스러운 무역 흐름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보조금을 주면 다른 나라도 보조금을 주게 된다. 그러면 보조금을 줄 수 있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세계 무역의 흐름이 왜곡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역 이론에 반하는 조치이지만, 미국은 경제안보라는 개념을 만들어 정당화하면서 밀어붙이는 중이다.
(7) "전 세계가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할 수도"
미국이 경제안보라는 단어를 만들어 자의적으로 활용하다 보니 위기에 처한 다른 국가들도 생존을 위해 경제안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 나라들에게 경제는 정말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요인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경제는 곧 안보'다. 그래서 이들은 통상외교를 강화하고 원자재나 전략물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 했다. 또 국가 산업 정책을 강화해 핵심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했다. 필요하면 보조금을 주기도 하고 산업계와 학계, 연구계가 상호협력 해 연구개발을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민간 기업에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해 특정 인력이나 첨단기술의 유출을 막았다.
이 국가들은 경제가 국가 안위에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이러한 조치들을 실행한 것이다. 미국처럼 안보를 위해 경제를 수단화한 것이 아니라 경제 자체가 너무 중요하기에 경제를 안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전자가 오염된 경제안보 개념이라면 후자야말로 진정한 경제안보 개념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보기도 전에 전 세계 경제가 난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중 무역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교역량이 크게 줄고 세계 경제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IMF의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미중 패권경쟁으로 매년 1,850조 달러의 국제교역이 감소되었다고 추정하면서 미국과 중국을 싸잡아 비난했다. 또 세계은행은 "이대로 가다가는 세계 경제 전체가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 2000년에서 2010년까지 10년간 연평균 3.5%에 달하던 세계 경제성장률이 2011년에서 2021년까지 2.6%로 추락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향후 10년간의 성장률도 2.2%로 하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바람에 한국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선진 통상국가인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의 변조에 가장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우선 순항하던 한국 경제가 2019년에는 2.2%의 낮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여기에 2020년 연초부터 코로나 팬데믹의 충격이 가세했다. 먼저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팬데믹으로 봉쇄되어 전 세계 경제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2021년에는 미국의 항만과 해운이 팬데믹 충격을 겪으면서 또 한 번 세계 경제가 크게 흔들렸다. 2022년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발생했다. 미중 패권 경쟁의 발발로 전 세계가 동아시아로 눈을 돌린 사이에 러시아가 유럽을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 탓에 세계 에너지 가격과 곡물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인플레이션을 모르고 지내던 많은 나라에서 갑자기 인플레이션의 공포가 엄습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잡고자 미국이 금리를 급격히 올리자 이번에는 고금리의 공포가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고금리에 미국의 지방 은행들이 파산했고, 그 여파가 유럽까지 미쳐 스위스의 글로벌 은행이 파산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또 국가 신용도가 낮았던 남아시아 국가 중 일부는 국가 부도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의 세 번째 대외 팽창으로 시작된 인태전략은 전 세계를 대혼란에 빠트렸다. 이러한 혼란에 한국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일본은 대 한국 전략도 따로 세우고 실행함에 따라 한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 부분은 이어지는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8) 보수 우익의 피가 끓어오르는 아베
아베는 한때 친한파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정치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가 쓴 책 《아름다운 나라로》에서도 한일 관계를 낙관하고 한일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베의 집안과 지역구를 살펴보면 보수 우익의 강한 피를 느낄 수 있다. 우선 그의 본적지와 지역구가 야마구치현이다. 야마구치현은 메이지 유신의 발흥지로 알려진 조슈 번의 지금 이름이다. 또 아베 스스로가 사상적 스승이라고까지 한 요시다 쇼인은 조슈 번 출신으로 정한론을 설파한 사람이다. 요시다 쇼인은 유신 여명기에 펴낸 저서 《유수록》에서 "국력을 키워 뺏기 쉬운 조선과 만주, 중국을 우선 복종시키고 교역에서 미국과 러시아에게 잃은 것을 조선과 만주로부터 충당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의 3대 총리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 번의 3영웅'이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전통을 아베는 이어받고 있다. 야마가타는 일본 육군의 아버지이자 군국주의의 설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특히 야마가타는 일본의 근대화 계획을 수립하면서 독일로부터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도입한 장본인이다. 주권선이란 일본의 주권이 행사되는 선으로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이고, 이익선은 주권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선으로 한반도와 대만, 사할린 등을 말한다. 이후 이익선을 지키기 위해 조선과 대만을 강제로 병합하고 주권선으로 편입했다. 또 일본의 이익선을 만주와 필리핀으로 확장시키면서 만주를 점령하고 필리핀 등 아세안 국가들을 침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되었다.
(9) 쇼와의 요괴,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꿈
또한 아베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기시는 '쇼와의 요괴'라고 불리는 정치가였다. 쇼와 시대(1926~1989년) 초기인 1936년에 만주국 정부의 산업부 차관으로 근무하다가 1941년에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 대신 및 군수성 차관으로 취임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9~1945년 사이 강제징용령으로 식민지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 와 노동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 등으로 기시 노부스케는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어 징역을 살았다. 그러나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석방되어 기사회생한다. 이때 미 군정이 취한 정책을 '역코스 reverse course'라고 하는데, 이 노선 변경 때문에 기시 같은 전범들이 석방되었다.
이후 기시는 정치에 입문해 1955년 보수 대통합을 이루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국내외의 공산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강력한 보수 단일 정당이 필요했는데 미키 부키치, 오노 반보쿠 등과 함께 자유당과 민주당을 통합해 자유민주당(현재의 자민당)을 결성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1955년 체제'였다. 이후 기시 노부스케는 이 공로로 1957년 2월 총리로 취임하는데(1957년부터 1960년까지 재임), 이때 남긴 그의 최대 업적은 I960년의 안보 개정이었다.
요시다 시게루 전임 수상 등이 구축한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개정해 일본의 '피점령 체제'를 불식한다는 것이 안보 개정의 주된 목적이었다. 이 조약의 개정은 미일 관계를 보다 '대등한 관계'로 전환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반안보 시민투쟁'이 발생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안보 개정 반대 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난 것이다. 이 격렬한 반대 투쟁 속에서 개정된 신 조약이 가까스로 체결되고 비준되었지만 이와 더불어 기시는 1960년 6월에 총리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전인 1951년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조약은 미일 양국이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 체결한 조약이었다. 그러나 체결 당시에는 일본의 방위뿐만 아니라 일본 내의 내란, 폭동 같은 혼란 사태에 미군이 임의로 출동할 수 있는 조건이 포함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기시는 이것을 개정해 신 안보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신 안보조약은 내란 출동에 관한 조항이 삭제되는 대신 미 일 공동방위가 명문화되는 등 한층 진일보한 조약이었다. 미군이 일본을 지켜주는 대신 주일 미군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자위대와 주일 미군이 공동으로 방어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당뿐 아니라 청년, 학생, 노동조합 등이 이 조약 개정을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조약을 개정하면 일본이 미국의 전쟁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는 일본의 상황에서 강한 반전여론까지 거기에 합세했다. 도쿄대 학생의 사망 사건까지 발생한 격렬한 시민 저항이었기 때문에 이 조약이 국회에서 비준되자마자 기시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기시는 전임 수상인 요시다 시게루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가진 인물이었다. 요시다는 패전 후 일본은 군대를 가질 수 없게 된 상황이니 미국이 만들어준 평화헌법을 기반으로 경제개발에만 전념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비하면 기시는 평화헌법을 개정해 독립 국가로서 재무장하는 길을 주장했다. 제국주의의 '영광‘을 잊지 못한 기시는, 전쟁을 할 수 없는 국가란 일종의 거세된 국가로 여겼다. 특히 그는 만주국의 설계자이자 일본 파시즘의 경제를 총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러한 이유로 기시는 냉전이라는 상황을 잘만 이용 하면 미국의 용인 하에 한반도와 만주로 다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공산주의의 진출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이 동남아시아와 강력히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시가 퇴임한 이후 요시다의 경제개발 노선을 계승한 이케다 하야토(I960년부터 1964년까지 재임) 총리와 사토 에이사쿠(1964년부터 1972년까지 재임) 총리 등이 연속으로 집권하면서 기시는 일본 보수의 비주류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랜 후에 기시를 계승하면서 보수의 신주류로 재등장한 것이 바로 외손자 아베였다.
아베는 외할아버지인 기시의 노선에 덧붙여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자유주의 사관'을 신봉했다. '자유주의 사관'이란 일제가 저지른 전쟁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아시아 민중을 해방하기 위해 치른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보는 역사관을 말한다. 아베는 장기침체로 의기소침해 있는 일본인들에게 역사 수정주의를 통해 자신감을 북돋으려고 했다. 과거사를 수정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고 더욱 강한 국가로 나아갈 길을 열고자 했다. 이는 일본 근대를 긍정함으로써 국가주의를 복원하고자 했던 외할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는 길이기도 했다.
(10) 한반도의 평화를 막은 치밀한 훼방꾼, 아베
사실 아베는 일본과 북한의 관계개선도 철저히 방해한 인물이었다. 2002년의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할 때 아베는 관방장관으로 수행했는데,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안이한 타협은 안 된다"며 강경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후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며 북일 국교 정상화를 방해해 자민당 간사장으로 벼락출세를 할 수 있었다.
사실 일본으로서도 북일 국교 정상화는 동북아에 있어서 마지막 숙제이었기에 고이즈미 총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베는 그곳에서 '납치자 문제'를 제기했다. 납치자 문제는 일본의 보수 우익들이 강하게 요구하는 안건 중 하나로,북한과의 관계에서 일본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논리를 뒤집어 씌우는 중요한 이슈였다. 아베는 이 이슈를 이용해 북일 국교 정상화를 막았고, 이를 발판으로 최연소 수상, 전후 세대의 첫 수상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런 아베였기에 평창 올림픽 만찬장에서만 초를 친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 남북 관계의 주요 고비 때마다 끊임없이 방해했다. 이 방해는 한반도에서만 그치지 않았고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방해공작을 펼쳤다. 이러한 내막은 후일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 (2020)》을 통해 만천하에 알려졌다. 이 부분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일이었기에 책의 내용을 인용해 조금 상세히 설명하겠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다. 헌정 사상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자 처음으로 남한에서 열린 정상회담이었다. 그 직전인 4월 18일에 아베는 플로리다주 마라라고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많은 시간을 북한문제에 할애하며 트럼프에게 사전 교육을 시켰다. 아베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o 북한과의 합의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이란과의 핵 합의와는 달리 엄격하고 실제적인 합의가 되어야 한다.
o 탄도 미사일의 경우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함께 일본에 직접 위협이 되는 중단거리 미사일까지 폐기되어야 하며 이와 함께 생화학 무기도 폐기될 필요가 있다.
o 북한은 미국의 무력행사 가능성을 가장 우려한다. 며칠 전 미국의 시리아 공습은 북한과 러시아에 많은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o 북한에 대한 최고의 협상 카드는 군사적 압박이다. 과거 김정일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했을 때 매우 당황했다.
아베는 미국이 무력행사를 포함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계속해야 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북한과의 합의에 대해서는 ICBM과 더불어 중단거리 미사일, 생화학 무기의 폐기까지 자세하게 주문해놓은 것이다.
2018년 6월 12일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담을 앞두고 아베는 5월 28일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상 간 통화를 요청한 뒤 마라라고에서 당부한 모든 요소를 재차 확인 했다. 아베는 "나는 김정은을 믿지 않으며, 비핵화와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이 필요하다. 오바마 대통령보다 더욱 강하게 나가야 한다"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전 설명한 것과는 상당히 다른 주장을 했다.
또한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야치 쇼타로 사무국장을 백악관에 파견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의 주문을 반복적으로 전달했다. 야치 국장은 3가지를 특히 강조했는데, 첫째는 북한의 핵 무기 보유 의지는 고정된 것이라는 점, 둘째는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기회는 거의 마지막이라는 점, 셋째는 일본은 6자회담에서 합의한 '행동 대 행동 quid pro quo' 빙식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행동 대 행동' 방식이란, 북한의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는 먼 미래에 배치해두는 반면, 경제적 지원은 먼저 하는 것이므로 북한에 매우 유리한 방식이다. 또한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의 한계 효용은 비핵화 조치의 한계 효용보다 더 크기 때문에 경제적 지원은 무조건 북한에 유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받아주면 안 된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었다.
그다음 해에 열린 하노이 북미회담(2019년 2월 27~28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베는 G7 정상회의에 가던 길에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에게 "북한은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 북한 정치인들은 매우 터프하고 교활하다"라고 강조하면서 북한에게 과도하게 양보하지 말도록 요청했다. 물론 아베의 이와 같은 집요한 방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결국 하노이 북미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11) 한반도 뒤에서 기지국가가 되려는 일본
하지만 아베의 방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두 달 뒤인 4월 26일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하노이 노딜을 높이 평가하면서 트럼프야말로 회담장을 박차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면서 북한에 대한 제재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시간은 미국 편이므로 절대 양보하지 말라고 다시 요청했다. 마치 확인 사살을 하듯이 아베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다시 한번 더 짓이겨 놓았다.
아베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한반도의 평화를 방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뒤에는 일본 보수 우익의 한반도관이 있다. 한반도를 분단 상태로 고착시켜 놓아야 일본의 국익이 극대화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소위 '기지국가론'이다.
기지국가론은, 한반도를 전쟁이 일어나거나 전쟁이 가능한 상태인 '전장戰場국가'로 묶어 두고 일본은 그 후방의 '기지국가'로 자리매김하자는 전략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일본의 안보도 확보하고 경제적 이익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기지국가로 변신한 일본은 그간 수많은 혜택을 누렸다. 일본이 패망했을 때만 하더라도 미국은 일본을 비군사화하고 민주국가화 하는 것이 기본 노선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먼저 비군사화 노선이 180도 전환되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러한 전환을 '역코스'라고 했다. 그 결과 일본에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가 설치되었고 해상보안청 요원이 증원되었다. 또 군국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정책들도 대거 후퇴하기 시작했다. 군국주의자 추방령이 해제되었고 전직 군 간부들의 추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베의 외할아버지인 기시를 비롯해 많은 전범이 석방되었고, 군 간부 중 일부는 새로 창설된 경찰예비대에 편입되었다. 더 나아가 공직 등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추방되었고, 노동3권이 일부 제한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일본을 동북아의 기지국가로 탈바꿈시키면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일본 경제 부활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경제는 한국전쟁으로 기사회생했다. 패전 후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실업자가 넘쳐났고 인플레이션은 극에 달했다. 특히 1949년 트루먼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된 더지 Joseph M. Dodge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초긴축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일본은 최악의 불황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 가뭄의 단비처럼 내린 것이 한국전쟁의 특수였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유엔군의 보급기지가 되었고, 경제는 호황으로 돌아섰다. 물론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시적인 경기 반동도 있었지만, 그다음 해인 1954년부터 일본 경제는 본격적인 고도 경제성장기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간 경제성장률이 해마다 10%를 능가했다.
이런 달콤한 추억 때문일까? 일본은 한반도를 어떻게든 전장 국가로 묶어두고 싶어 한다. 게다가 한국이 주도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더더욱 막아야 한다. 아베가 보수 우익의 선두에 서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집요하게 방해했던 이유다.
(12) 반공연대와 가두기 전략
일본의 보수 우익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한국을 북한으로부터 떼어 묶어두려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일본의 '가치 연대'다.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가지고 한국을 가두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면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로부터 이탈한다고 보았고, 조금이라도 북한과 대립각을 세우면 한국이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라며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일본은 겉마음과 속마음(일본어로 겉마음은 다테마에이고 속 마음은 혼네이다)이 다른 국가이다. 겉으로는 가치 공유를 내세우지만, 속마음은 한국을 북한으로부터 떼어내 반공연대 속에 잡아두려 했다. 이 또한 오랜 역사적 경위가 있는 일본의 기본 전략이다.
2022년 7월 아베가 암살되었을 때 암살범이 통일교 교도의 자녀라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통일교와 자민당의 유착관계가 일본에서 큰 이슈였다. 이때 흥미로운 사실들이 하나둘 드러났다. 아베의 외할아버지인 기시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와 교류해왔고, 그것이 아베와 통일교가 만나게 된 시작점이라는 사실도 밝혀진 것이다. 기시는 수상 퇴임 후에도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고, 이때 후원자로서 문선명과 친분을 맺었다. 그 계기는 '반공'이었다. 당시 통일교는 일본에서 교세를 크게 확장하고 있었는데 종교의 주요 가치로 반공을 표방했다. 이 가치와 통일교의 교세가 '쇼와의 요괴'라고 불리던 기시의 눈에 들어간 것이다.
또 기시는 한국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수상 퇴임 후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도 깊이 관여했다. 기시는 '대아시아주의'의 시발점이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라고 보았기에 자신의 만주국 인맥을 총동원해 박정희를 도왔다. 또 만주군 출신의 박정희도 기시의 도움을 받으며 한일 기본조약을 맺었다. 기시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한일 수교 5년째인 1970년 6월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수교훈장 광화대장'을 수훈했다.
이처럼 반공을 매개로 한 한국과 일본의 교류는, 나카소네와 전두환 시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카소네는 일본에서 '보수 우익의 중흥자'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기시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보수 방류에서 주류로 들어선 인물이었다. 나카소네는 전두환 정권에 40억 달러에 이르는 차관을 제공해줌으로써 전 정권의 기사회생을 도왔다. 차관의 조건은, 한미일 세 나라가 함께 손을 잡고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내자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나카소네는 기시와 마찬가지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와 같은 한일 간의 반공연대는 한국의 민주화 이후에 차차 약해지고 단절되었다. 반공이라는 것이 결국 독재 정권을 정당화 하는 수단이었음을 많은 국민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정치가 세습되기 때문에 반공연대가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 계승되었다. 아베와 통일교의 유착이 대를 이어 내려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13) 일본의 수출 규제와 한일 경제전쟁의 시작
2019년 7월 1 일, 일본은 대한국 수출 규제 품목을 발표했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포토레지스트와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아미드 등 3개 품목으로, 일본이 전 세계 생산량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것들이다. 한국의 수출입 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이 품목들의 대 한국 수출을 엄격히 관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 역시 겉 다르고 속 다르게 나타난 '철 지난 반공' 사건이었다.
연이어 일본은 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을 부여하는 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겠다고 발표했다. 백색 국가는 일본 정부가 안보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안보 신뢰 국가'다. 일본 제품을 수출할 때 인허가 절차 등을 우대해준다. 그래서 백색 국가에서 제외 되면 특정 제품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할 때마다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백색 국가 제외는 그만큼 한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본은 수출 규제의 표면적인 이유로 한국의 제도 불비를 들었다. 3개 품목 중의 일부가 북한으로 흘러갔다는 '북한 관련설'을 언급하거나, 일본 제품들이 한국을 경유해 중국, 이란, 시리아 등으로 우회 수출되어 무기로 전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본이 한국에 협의를 여러 번 요청했는데 한국이 제대로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출을 규제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다. 실제 이유는 한국 대 법원의 강제징용판결이었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에 일본 전범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이미 이루어졌다며 한국 정부에 시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달리 '3권 분립'이 엄격한 국가이므로 정부로서는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대해 일본은 수출 규제라는 카드를 뽑아 든 것이다.
한국의 계속된 항의에 스가 요시히데 당시 일본 관방장관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는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 수출관리 를 적절히 하려는 차원의 운용방침 재검토이며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대항조치가 아니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 까지나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른 일본의 핑계에 불과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정치적인 문제로 경제적 보복을 가한 첫 사례였다는 점이다. 70여 년간의 한일 관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는 전통적으로 '정경분리' 원칙이 견지되어왔다. 정치와 경제를 엄격히 분리해 운영하는 원칙이다. 과거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이명박 대통령 천황 발언 등으로 양국 관계가 험악해졌을 때도 경제 관계는 항상 논외였다. 자유롭게 교역하고 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여지를 항상 남겨둔 것이다. 이 원칙을 처음으로 깬 것이 일본의 수출 규제였다.
(14) 서로의 급소를 노린 한일 양국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 한국도 맞대응했다. 정부는 정부대로 대응조치를 마련하고, 국민들은 일본 제품 불매와 관광 거부 운동을 시작했다. 불매운동을 위한 '노노 재팬'이라는 웹 사이트가 만들어졌고, 사이트에는 사지 말아야 하는 일본 제품과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국산 제품까지 소개했다. 초기에는 맥주나 의류가 주요 대상이었지만 점차 자동차 같은 내구 소비재로 확산되었다. 소비자뿐만 아니라 판매자들도 직접 불매운동에 나섰다. 마트나 재래시장 등에서 일본 제품 판매 중지를 선언하고, 일부 택배 노동자들은 일본 제품의 배송을 거부하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일본 관광 거부 운동이었다. 당시 한 일 상호 관광은 매우 불균형적이었다.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연간 750만 명 정도인데 반해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300만 명 정도였다. 단순히 수치만 비교해도 한일 간 역조가 큰 상태였다. 특히 일본을 찾는 전 세계 관광객 중 한국인이 무려 25%를 차지했다. 한국 관광객은 일본의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 중소도시까지 방문하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관광 거부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반도체 관련 3개 품목 수출 규제의 또 다른 이유다. 왜 수출 규제 품목이 하필 반도체 관련 부품일까? 일본의 보수 우익 중 일부는 "한국은 반도체가 급소이므로 반도체 관련 수출규제를 해서 급소를 찔러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초기에 '타도 삼성'으로 시작해 SK하이닉스 등을 포함한 한국 반도체 타도로 확대되었다. 혐한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한국 반도체 급소론'이 일본 내에서 조용히 퍼져 나갔고, 이것을 과거사 문제로 연결한 것이 아베였다. 일부 급진적인 보수 우익들의 주장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을 되받아친 것 이 한국인들의 노노 재팬 로고, 일본 관광 거부였다.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지면서 환율도 점진적으로 약세화 되었다. 반도체와 같은 산업 육성 정책을 일본 정부가 여러 번 시도해보았지만 장기 경제침체 속에서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아베 정부도 아베노믹스의 '3개의 화살‘ 중 하나로 산업 육성 정책을 실시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아베 정부가 눈을 돌린 것이 관광 산업 육성이었다. 환율 약세로 해외 관광객이 많아지기 시작했기에 관광 입국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이 정책은 자민당의 이익과도 직결되었다. 자민당은 대도시보다 지방 중소도시에 강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지방 중소 도시는 장기 경제침체의 직격탄을 맞아 '지방 소멸'의 주요 대상이기도 했다. 이 지역에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만 있다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민당의 지지 기반을 유지할 좋은 방안도 된다. 때문에 자민당은 지방창생본부를 만들고 지방 관광 육성 정책을 강력히 시행했다. 그런 정책의 영향으로 일본 중소도시 관광이 활성화 되었고, 거기에 많이 간 사람들이 주로 한국인이었다.
한국인들은 이 점에 착목했다. 지방 관광이 일본의 급소였던 것이다.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를 급소라 여기고 찌르려 했으니 한국도 그 보복으로 지방 관광을 거부했다. 이것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한국 관광객이 발길을 끊자 지방 중소도시 자민당 의원들이 타격을 받았고, 그들은 서서히 아베 정권에 비판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권 교체의 중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이 현상이 아베 정권의 무모한 수출 규제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일 경제전쟁의 한 단면에 불과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 일본은 중국, 러시아 같은 대륙 세력을 봉쇄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2012년경부터 해왔다. 그리고 이것이 미중 패권경쟁으로 전이되면서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이 충격은 어느 정도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15) 똑똑한 다변화를 추구하는 세계 각국의 전략
2023년 5월 21 일에 열린 히로시마 G7 정상회담의 공동선언에서는 5년 동안 끌어오던 미중 패권경쟁에서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선언이 있었다. 중국과의 관계를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으로 바꾼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디커플링은 중국과의 전면적인 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하지만 디리스킹 de-risking은 리스크를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디리스킹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중요 물자 등에서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다변화 diversification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해서는 협의체를 만들어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에 중국을 적대시하는 정책에서 안정적인 관계로 전환하면서 특정 물자나 특정 행동에 대해서만 서방 선진국들이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미다. 또 바이든 대통령은 조만간 대중 관계가 해빙될 것이라고 시사했고、이후 블링컨 국무장관과 옐런 재무장관, CIA 국장 등이 중국을 방문해 관계개선을 모색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간 유럽연합 국가들이 꾸준히 문제제기한 결과였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독일의 숄츠 총리였다. 숄츠 총리는 2022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를 마치자마자 중국을 방문했다. 시진핑 주석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지나친 의존을 줄이는 "똑똑한 다변화를 추구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약 다섯 달 뒤인 2023년 3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유럽의 대중국 전략으로 디리스킹을 천명했다. "중국과의 디커플링은 가능하지 않으며 유럽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는 흑백이 아니다"라며 향후 디리스킹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한 달 뒤 중국을 방문하여 시진핑과 2차례 회담을 가진 뒤, "유럽은 미국 의존도를 줄여 대만과 관련된 미중 대립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두렵다고 우리가 미국의 추종자나 속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나아가 마크롱은 "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초강대국 간 대립이 격화되면,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시간도 재원도 확보할 수 없다"며 미국과의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했다. 프랑스는 유럽연합 국가 중 유일하게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에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유럽연합의 여러 노력 끝에 '디커플링'이 '디리스킹'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일본이었다. 히로시마 G7 의장국인 일본의 기시다 수상은 G7 공동성명을 준비하면서 G7 국가들의 움직임을 누구보다도 먼저 파악했다. 그리고 하야시 외무상을 베이징으로 급파해 친강 외교부장과의 만남을 추진했다. 이 자리에서 친강은 "일본이 악인의 앞잡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강하게 일본을 비난했지만 하야시 외무상은 "현재 일중 관계는 수많은 과제와 심각한 현안에 직면해 있는 매우 중요한 국면"이라고 규정하면서 "양국은 지역과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중요한 책임을 공유하고 있는 강대국이기도 하다"라며 한발 물러섰다.
하야시 외무상은 친중파로 일중의원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아버지도 동 의원연맹의 회장직을 맡았을 정도로 대대로 중국에 우호적인 정치인이다. 기시다는 중국과 지나치게 대립각을 세운 아베의 대중국 정책을 전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기용했고, 그 목적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시다는 7월 5일 일본무역협회 회장인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을 중국에 급파했다. 우리에게 고노 회장은 위안부와 관련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한 역사적인 '고노 담화'를 발표한 인물이다. 아시아를 중시한 그는 무역협회장 자격으로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해 중일 관계가 껄끄러울 때마다 양국 간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그는 80여 명의 기업인 방중단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해 리창 총리를 비롯한 중국 지도부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고노 회장은 "여러 가지 마찰들을 묻어두고 큰 틀에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일중 경제, 무역 협력은 양국 관계와 지역의 안정 번영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했다. 하야시 외무상과 고노 회장의 중국 방문은 2012년 이후 일본이 추진한 대중국 봉쇄 정책에서 크게 후퇴하는 움직임이었다.
(16) 디리스킹 시대,잘못된 대외 팽창의 결과
일본은 역사상 3번의 대대적인 대외 팽창을 감행했다. 그 첫 번째가 임진왜란이었다. 당시 일본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대외 팽창을 감행할 여건이 되었다. 세계 최대의 은광이 발견되었고, 조선의 은 제련기술이 도입되어 은광 개발 붐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 은을 가지고 포르투갈 상인들과 통상을 했고 그 결과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일본의 은은 전 세계 유통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고, 그 은으로 서양의 최신식 무기인 조총을 구입하고 군선도 만들었다.
특히 당시 일본에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전투를 경험 한 사무라이들이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로 하여금 조선을 침략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구한말보다는 강력했다. 신식 농법이 도입되어 농촌의 경제력도 탄탄했고, 이순신 같은 관군도 이러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활약했다. 또 명나라도 건재 했기에 왜군은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적으로는 대외 팽창의 조건을 갖추었지만 한반도와 중국의 사정을 몰랐기에 패퇴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큰 오판이었다.
일본의 두 번째 팽창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이었다. 이때도 경제력과 군사력은 대외 팽창을 충분히 뒷받침할 만큼 강력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룩했고 최신식 대포와 군함, 항공기도 보유했다. 반면 당시의 조선과 청나라는 최약체 국가였다. 대내외적 여건이 갖추어진 것으로 생각한 일본은 조선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강행했다. 하지만 미국의 굴기를 간과했다. 미국은 대외 불간섭주의를 표방했지만 미 대륙 내에서 산업혁명이 급격히 일어나며 제국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를 간과한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계속 밀리 다가 결국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으로 항복했다.
이때의 참혹한 패전으로 오랜 기간 경제발전에만 전념하던 일본이 2012년을 기점으로 또다시 대외 팽창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는 경제력이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20년간의 장기침체로 경제는 최악이었고 군사력 또한 약했다. 군사비를 GDP 대비 2%로 증액하고자 했지만 경제력이 약해 그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보수 우익들은 엉뚱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장기침체로 의기소침해진 일본 국민에게 역사 수정주의 등을 통해 자긍심을 주입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 왜곡에 문제를 제기하는 지식인과 언론을 틀어막으며 무리하게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의 보수 우익들은 미국을 끌어들였다. 워싱턴에 상주한 친일 인맥을 총동원해 트럼프를 설득했다. 공화당의 일부인 네오콘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미국이 일본의 인도 태평양 전략을 받아들였고, 민주당 정권의 바이든 행정부도 의외로 이를 계승했다. 미국 내에 들끓는 혐중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서 의외로 약화된 미국의 모습이 노출되었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뿐만 아니라 쿼드 가입국가인 인도, 전통적인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까지도 미국의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미국의 일극 패권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틈을 유럽연합 국가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유럽연합 국가들에게 중국은 최대 수입국이자 3대 수출국이다. 중국은 유럽연합에 중요한 이익선인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제의 체력이 상당히 악화된 상황에서 유럽연합 국가들에게는 중국과의 교역이 너무나 중요했다. 게다가 미국이 패권국 역할을 저버리고 자국 이기주의로 치닫자 유럽연합 국가들의 이반은 더욱 빨라졌다.
한편 의외의 동조자는 미국 기업들이었다. 미국 기업들은 자사의 이익을 위해 워싱턴 정가의 행보와 정반대로 움직였다. 워싱턴의 중국 봉쇄를 교묘하게 피해가기도 했고 정부의 디커플링 정책에 대놓고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 결과 미중 패권경쟁 하께서 미국과 중국의 교역액이 사상 최대를 기록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졌다.
국민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특히 최첨단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자본의 힘을 앞세운 기업들에 척질 수는 없다. 미국은 4년마다 투표로 정권이 교체되는 나라다. 그러한 체제에서 기업들의 정치 헌금은 대선 결과를 좌우하는 중요 요소다. 이를 아는 미국 재무부와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고 대통령이 따라 움직였다. 그 결과가 바로 2023년 5월의 히로시마 G7 공동 선언이었다. 하지만 5년 만에 디커플링이 디리스킹으로 변경되었다 해도 패권국 미국이 한번 빼든 칼을 쉽게 거두어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한동안은 디리스킹을 가지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여러 국가들이 암중모색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또한 인태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일본은 변화하는 미국을 보면서 언제까지나 자신들이 돌격대 역할만 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특히 아베파를 위시한 신주류들의 힘이 서서히 빠지면서 대 중국 정책도 수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국가 간,진영 간 대립은 격화되었고 세계 경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어설프게 나선 결과였다.
문제는 우리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