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진중권 (천년의 상상, 2020)
- 나는 내가 맞서 싸우는 그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고, 내가 위해서 싸우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한쪽의 비난이 나를 슬프게 하지도, 다른 쪽의 환호가 나를 기쁘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모두가 진정이라 우겨 말할 때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
1. 진리 이후의 시대
□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 꿈을 현실로 바꾸어 놓고 싶어하는 대중의 욕망은 이 땅을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운 곳으로 만드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선동가들은 대중이 가진 이 기술적 상상의 욕망을 고작 반동적인 목적에 사용하고 있다. 그것으로 그들은 정의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의견이 다른 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사회를 편으로 갈라 아마겟돈의 결전을 벌인다.
. 그들의 준동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아직도 선동가들이 제작한 대안적 사실이 여전히 현실의 행세를 하고 있다. 대중은 그들이 지어낸 허구를 자신의 세계로 알고 살아간다. 어렴풋 그것이 허구임을 깨달은 이들도, 아직 그 꿈에서 굳이 깨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눈을 떠 봤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비루한 현실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 실재의 위기
- 뉴스의 비판적 수용자는 사라졌다. 오늘날 대중은 자신을 콘텐츠 소비자로 이해한다. 그들이 매체에 요구하는 것은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니즈의 충족, 즉 듣기 싫은 사실이 아니라, 듣고 싶은 허구, 흥미로운 대안적 사실을 듣는 것이다.
□ 매트릭스 세계
- 나치의 괴벨스는 일찍이 “현대의 대중은 사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루한 일상에 충분히 지쳐 있다.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멋진 환상이다.”라고 얘기 한 바 있다. 그의 이상이 한국에서 실현될 모양이다.
- 사실과 허구의 자리가 뒤바뀐 곳에서 vertigo 현상이 일어난다. 대안 매체가 레거시 매체를 대체하게 되고, 멀쩡한 지식인들이 얼빠진 소리를 하고 있다.
- 장 보드리아르(1929-2007) :“오늘날 권력의 거짓말은 개별 사실을 왜곡하는 식이 아니라 아예 세계 전체를 날조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실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안보이게 됐을 뿐이다.
- 우리나라에서 역대 정권은 감추려다 실패한 비리 사건의 경우 대개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로 치부해 당사자를 도려내는 식으로 처리해왔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다르다. 그들은 부패한 자를 도려내는 대신 외려 끌어안고 그들에게 맞추어 세계를 날조하려 한다. 노골적인 선동과 자발적 동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 정권의 전략은 다분히 전체주의적이다. 보편 가치의 혼돈은 윤리와 도덕의 혼란을 넘어 시인의 감성마저 바꿔놓는다.
-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던 시인 안도현@ahndh61은 평생 연탄재를 볼 일도 없을 어느 강남 사모님을 위해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강남에 건물을 소유한 건물주다, 나도 강남에 건물을 소유해 앞으로 편히 살고 싶다,(정경심의 휴대폰 문자) 이런 꿈을 꾸는 것이 유죄의 증거라고? 대한민국 검찰은 꿈을 꾸는 것조차 범법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꿈을 꾸지 말자. 미래에 대해, 앞날에 대해, 그리고 다가올 시간에 대해.”
□ 음모론의 시대
- “이 이론은 그 어떤 유신론보다 더 원시적인 것으로 호메로스의 사회이론과 유사하다. 호메로스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올리푸스 신들이 벌이는 공모의 결과라 믿었다. 사회의 음모론은 이 유신론, 즉 신의 변덕과 의지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믿음의 한 변종이다. 그것은 거기서 신을 떼어내고 대신 이렇게 물을 때 성립한다. ‘신이 아니면 누가?’ 신의 자리는 여러 유력자 혹은 유력집단들로 채워진다.”(칼 포퍼)
- 과학을 대신하는 음모론은 인간의 의식을 과학에서 신화의 세계로 되돌려 보낸다. 다만 신화와 달리 나름 합리적 추론과 과학적 논증의 외양을 띤다. 음모론의 절반은 사실, 나머지 절반은 상상이다. 절반의 거짓이 그냥 거짓이듯이 절반의 사실도 실은 허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허구는 사실의 자격을 요구한다. 그 요구를 반박하는 것은 아주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다.
2. 팬덤의 정치
□ 팬덤 정치
- 팬덤은 자신들의 팬 객체, 즉 팬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사물과 강력한 정서적 유착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팬객체에 대한 비판은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 그 비판을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기에 팬덤은 자신의 팬객체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공격성을 드러내곤 한다.
- 노사모의 토대가 후보의 철학에 대한 이성적 지지라면, 문 팬덤의 토대는 후보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유착이다. 그러니 그를 감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들은 대통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 지지는 철회해도 사랑은 철회할 수 없는 것, 이것이 팬덤 정치다. 대통령이 국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주는 이상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 소비자 민주주의
- “정치에 있어서도 소비자 민주주의가 성립될 때 그 정치가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구매자가 따로 없기 때문에 정치의 소비자를 유권자라고 합니다. 서비스를 향유하는 사람이 서비스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유권자로서 선거와 투표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 정치가 마케팅이 되면 정당은 기업이 된다. 기업의 목적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정당이 기업이 되면 공공선은 더 이상 활동의 목적이 아니게 된다.
- 팬덤 정치도 알고 보면 이 마케팅 정치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유권자는 자신을 국가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해 공익을 기준으로 사유한다. 자신의지지 정당이 공공선을 거스르는 행위를 할 때 지지를 철회하거나지지 강도를 낮춘다. 반면 자신을 정치 서비스의 소비자로 인식하는 팬덤은 팬 객체가 공공선을 파괴해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 강도를높힌다. 소비란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소비의 사적 과정이 공적 정치과정을 결정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정당은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내가 사지도 않은 물건의 대금이 내게도 청구된다. 그래서 투표는 공적 활동이어야 하나, 정치의 마케팅화는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 바햐흐로 정치는 서비스업으로 전락하여 정치의 마케팅화를 통해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지지를 브랜드 충성도로 바꾸어 놓는다. 노무현 정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무현 브랜드가 필요한 것이다. 공화국의 이념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 게임이 된 정치
- 정치의 게임화는 민주주의를 더 생동적으로 만들어준다. 오늘의 대중은 정치의 서사를 스스로 쓰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어 정당은 그들에게 미션을 부여하여 플레이어로 고용한다. 그들에게는 별도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는다. 선거의 승리를 내 힘으로 이루어냈다는 자부심이 최고의 보상이 되는 것이다.
- 정치의 게임화는 진영논리를 강화하여 합리적인 중도층이 말살되는 결과가 나온다. 논쟁이 전쟁으로 바뀌면 이성은 격정으로 바뀌고 개인은 집단에 흡수되어 중세의 호전적인 전사로 되돌리게 된다. 정치가 게임으로 전락하여 일본에서 행해지는 닌세쇼기(人間將棋)처럼 말들이 스스로 행마하는 듯하나 사실 그들은 장기판 밖의 기사(정치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 제 이해와 별로 관계가 없고 남들의 배나 불려줄 뿐인 게임에 왜들 그렇게 광적으로 몰입하는 걸까. 맨정신으로는 현실이 견디기 힘들어서 그러는 것일까? 실제로 경제는 어려워지고 사회는 위험해지고 개인의 삶은 날로 불안해지고 있다. 적어도 게임에 몰입하는 동안에는 그 구질구질한 현실을 잊고 지낼 수 있다. 더구나 다른 놀이와는 달리 정치라는 놀이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는 절대반지(대권)를 따는 게임이 아닌가.
□ 은유와 환유의 정치
- ‘노무현의 꿈, 문재인의 운명, 조국의 사명’전사들은 개혁의 돈키호테를 도와 그의 사명을 이루려는 현대판 산초 판자들이다. 은유적 착란 속에 정의의 드라마는 신파에서 현실이 되고 조국은 졸지에 현생 노무현이 되었다.
- 그러나 은유는 사실이 아니듯이 조국은 노무현이 아니다. 노무현은 누구처럼 학벌에 집착하지 않았다. 딸이 시험을 망쳐도 수학을 못해서 그렇지 좋은 딸이라고 말했다. 누구처럼 책임을 가족에게 지우지도 않았다. 외려 가족까지 뒤집어썼다. 누구처럼 저 하나 살려고 진보를 죽이지도 않았다. 노무현은 자신이 죽어도 진보는 살아야 하기에 그 절망적 순간에 지지자들을 향해 ‘이제 나를 버리라’고 요구했다.
□ 한 입으로 두말하는 분열자들, 개인의 해체
- 구술사회에서는 현재를 살기 위해 항상 구조적 망각을 실천하는 특성이 있다. 과거와 달라 매체에 고스란히 남게 되는 디지털 구술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 한 입으로 두말할 때 정신이 분열된다. 인터넷 시대에 되돌아온 구술문화는 불가분자로서 논리적 정합적 사유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관념을 해체시키게 된다.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그들은 과거를 지우고 영원한 현재에 산다. 치열하게 현재를 살기 위해 주기적으로 구조적 망각을 수행하는 분열자들의 집단 속에서 애써 사유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개인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요즘 그들은 온통 좀비들에 둘러싸여 사는 느낌일게다.
3. 광신, 공포, 혐오
- 종교적 광신 : ‘이 세상의 신’노릇을 하는 그들
- 정치적 주술 : 왕의 목을 베라
- 목신의 오후를 깨는 파나코스 – 공포와 혐오의 정치학
- 만인의 평화를 위한 속죄양으로서 파르마코스
- 코로나 독재 : 한국식 방역의 이면, 헌법을 초월한 코로나 보안법
4. 민주당의 연성 독재
- 프레임 전쟁 : 중도층은 없다(미신)
- 선전선동 : 진리는 국가의 적이다, 가장 멍청한 이들의 머리에 맞춰라, 민주당에는 만주주의자가 없다
- 기억을 지워버린 기억의 연대 : 운동가만을 위한 위안부 운동
- 자유주의를 말살하는 민주주의 : 삼권분립의 파괴, 다수결로 환원된 민주주의
- 다수결로 환원된 민주주의는 공공선의 공화주의 이념을 파괴하고 소수 존중이라는 자유주의 원칙을 파괴한다. 이 두 가치를 포기한 민주주의는 자살한다. 기억하라 히틀러는 43.9퍼센트의 지지로 집권했다.
- 그들은 왜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 원칙 이성과 기회이성,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뻔뻔함
5.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 원한의 정치
- 짓밟힌 노무현의 꿈
- 그의 꿈은 어디로 갔을까
-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
- 주인의 도덕과 대비되는 노예의 도덕(니체) ; 핍박당한 자의 원한에서 나온 도덕, ‘저들이 악하므로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선하다’
- 노무현 시대가 왔어도 노무현이 없다
. 브레히트의 ‘오직 마지막 숨으로’
. 진보와 보수가 공유했던 관행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니다. 관행은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지막 숨’이 필요하다. 노무현은 과거를 부정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우리가 새 출발을 하도록 ‘나를 버려라’하면 ‘마지막 숨’을 선택한 것이다
. 그러나 지금 그들은 ‘마지막 숨’에서 고작 우리끼리 지켜줘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그래서 서로 비리를 덮어주고 변명해주고 이미 벌어진 일을 지우려 하는 것이다.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의 후예들은 원망을 아예 원한으로 발전시켜 자신들의 자산으로 요긴하게 써먹고 있다. 가끔은 저들의 그 원망조차 과연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 그의 마지막 숨결은 친노폐족의 과거를 미화하고 친문주류의 특권을 지키는 데 활용되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고 새 출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상황은 더 나빠졌고 새 출발은 불가능해졌다. 노무현은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외쳤으나 그들은 반칙과 특권을 세습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두 번 죽었다. 한번은 적의 손에, 한번은 친구의 손에. 적은 그의 육신을 죽였지만, 친구는 그의 정신을 죽였다.
□ 대통령의 철학
-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의 꿈은 달빛에 취한 깡패들의 조직된 폭력으로 실현되었다. 그들이 동료 시민을 해코지하고 다녀도 대통령은 말리지 않고 이 반민주적 행태를 오히려 양념이라 축성했다. 격려에 고무된 그들은 정권을 닮아갔고 급기야 나라의 로고스는 음모론으로, 에토스는 비리의 옹호로, 파토스는 싸구려 신파로 대체되었다.
- 문제는 대통령이 그동안 회피해온 대통령직의 윤리적 기능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의 정의와 상식이 무너졌다.
□ 편 가르기 정치
- 문 대통령의 배반
. 2017년 4월 민주당 경선 : 팬덤의 패악질을 경쟁을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 표현
. 신년 기자회견 : '조국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 '코로나19와 장시간 사투를 벌이며 힘들고 어려울텐데, 장기간 파업하는 의사들의 짐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시겠습니까?'
- 문재인 정권의 영상전략
. 우상이 된 대통령
. 거꾸로 가는 남한
. NL정치문화의 잔재
. 노무현과 문재인의 팬덤 차이
- 전체주의는 대중과 지도자의 직접적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인민의 일반의지는 오로지 지도자를 통해서만 대변된다. 이견을 가진 자들은 가차없이 제거된다. 문재인 정권의 영상 전략은 주로 “뭉클, 울컥”의 신파 코드로 대중과 지도자의 이 직접 결합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졸지에 문재인 보유국이 되었다.
6. 진보의 몰락
□ 진보는 왜 보수보다 뻔뻔해졌는가
- 동일자의 영겁 회귀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부친 살해와 진보의 종언
- 산업화의 추억에 갇힌 미련한 보수를 제치고 정보의 흐름에 적응한 노련한 보수가 등장하였다. 각종 비리와 성추행의 비리를 개혁이라는 레토릭으로 덮어 철저히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 이들은 벌써 정계와 관계, 방송과 신문, 시민단체와 지식인층을 망라하는 거대한 기득권 커넥션을 구축하였다. 비리가 터질 때마다 그 커넥션을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그 압도적인 헤게모니를 이용해 감시와 비판의 목소리를 순식간에 잠재워 버린다. 낡은 보수의 나쁜 모습을 업그레이드한 버전으로 체화한 것이다. 기득권을 확보한 그들은 그 커넥션을 활용해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을 자식 세대에 물려주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렇게 바꿀 것보다 지킬 게 더 많은 보수층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해한 나쁜 아버지보다 더 나쁜 아버지가 되었다. 산업화 세대는 적어도 그들에게 일자리도 얻어주고 아파트도 한 채 갖게 해주었다. 하지만 586세대는 지금 젊은이에게 일자리도 아파트도 주지 않는다. 그저 자식들에게 재산과 학벌을 물려주느라 그 검은 커넥션을 활용해 다른 젊은이들에게서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마저 빼앗아버린다.
- 결국 산업화의 서사와 함께 민주화의 서사도 파탄이 났다. 우리 세대가 아버지 세대의 전쟁 이야기에 넌더리를 낸 것처럼, 요즘 젊은이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늘어놓는 민주화서사를 냉소한다. 그 잘난 민주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 성공의 지름길은 상속과 세습이라는 것을 잘알기 때문이다. 금수저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젊은이들은 민주화의 위선을 경멸하며 민주화된 사회의 현실에 절망한다.
□ 지식인의 묘비
- 이제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는 진리의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렸다. 사회적 정치적 발언의 준거가 무너졌으니 지식인의 역할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이 상황을 지식인의 무덤이라고 묘사했다. 오늘날 지식인이 아무리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을 주장해도 그 발언은 간단히 오느 한 편의 것으로 매도당하고 만다.
- 절대적 진리는 사라졌다. 이제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된다. 이에 따라 인문학적 사유는 점차 공학적인 사유에 밀려나고 있다. 메체 철학자 빌렘 플루서에 의하면 디지털 기술은 과거 역사적 진보적 계몽적 의식을 구조적 계산적 분석적 의식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발언을 해봐야 그저 잔소리나 늘어놓는 ‘씹선비’, 사회를 제작하는 데에 아무 쓸모도 없는 ‘입(口)진보’로 여겨질 뿐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 세계를 제작해야 한다는 플루서의 요청은 언뜻 유토피아의 비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요구된다. 즉, 지식이이 세계의 제작에 참여하려면 시장이나 정치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 상황은 결국 별로 남지 않은 유기적 지식인마저 다시 기능적 지식인으로 되돌려놓고 마는 결과가 되버린다.
-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그 일이 일어났다. 시작은 김대중 정권에서 지식 기반 경제에서의 신지식인 캠페인이었다. 국민의 정부에 이르러 인문사회 계열 지식인들마저 세계를 만들겠다고 권력과 손을 잡기 시작한다. 비판을 사명으로 알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정부기관에 진출한 것도 그때부터다.
- 혁명을 외치던 386세대도 돌아보니 어느새 용케 다들 교수가 되어 있다. 수도권 웬만한 대학 교수 연봉이 1억이 넘는다. 한국에서 교수는 기능이 아니라 신분이다. 그 신분 유지를 위해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안 읽는 논문을 써가며 그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줄 궁리를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누리는 특권은 희생양인 시간강사의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해 유지된다. 이 양들의 희생에 침묵하는 데에는 진보나 보수나 차이가 없다.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은 지배층이 되었다. 그들이 조국 일가의 일을 제 문제로 느낀 것은 같은 상류층으로서 계급적 이해를 공유했기 때문이리라. 이제 그들은 자기 계급의 이해를 대변할 따름이다. 그새 획득한 권력을 가지고 그들은 이제 세계를 날조한다. 허위와 기만을 재료로 자기들만의 대안적 세계를 제작하느라 바쁘다.
□ 진보의 무덤에 침을 뱉어라
- 그들은 더 이상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해야 할 현실을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계, 언론계, 문화계 등 사회 전반에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그 막강한 영향력으로 대중을 장악해 얼마 남지 않은 비판의 목소리마저 잠재우려 한다. 자기들이 만든 세계의 허구성이 폭로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전통적 지식인은 멸종했다. 자기 계급의 구속을 초월하여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는 지식인은 적어도 계층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익집단으로서 진보는 승리하였으나, 가치집단으로서 진보는 죽었다.
- 이른바 진보적 문인들이 전직 대통령보다 호화로운 변호인단을 거느린 강남 사모님의 석방을 위해 서명운동이나 벌이고 있을 때, 돈 없고 힘없어 죽어간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은 정작 보수에 속한 어느 문인이 맡았다.
- 소설가 김훈은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글을 써왔다. 이 최후의 지식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수치심을 느낀다. 저 징그러운 진보의 무덤에 이보다 더 고상하고 우아하게 침을 뱉을 수는 없을 것이다.
□ 진보의 종언
- 박원순은 그동안 운동의 헌신성의 상징이자 진보의 순수성의 증명이었다. 그래서 그의 몰락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진보 전체의 죽음으로 느껴진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이가 하필이면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여 삶의 서사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그의 한계는 개인적인 한계가 아니다. 그의 위선은 우리 세대의 위선이고 그의 어리석음은 곧 우리세대의 어리석음이다.
- 그동안 우리 세대는 진보를 표방해온 한 세대의 위선과 어리석음이 이 사회를 폐허로 만드는 과정을 지켜봐왔다. 나 또한 그 세대에 속하기에 그들의 위선에서 나를 보았고, 그들의 어리석음이 또한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했다. 그를 보내는 것은 그와 우리가 공유하는 이 위선과 어리석음을 떠나보내는 과정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실패한 곳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그의 죽음마저 비판했어야 한다. 그의 자살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었다. 유서에서도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할 이에게는 사과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큰 삶에 비해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온 우리는 그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우리 것으로 끌어안고 그와 함께 비난을 받았어야 한다. 아울러 그의 무책임에 책임을 지기 위해 그가 버려두고 떠난 피해자를 지켜줬어야 했다.
- 하지만 진보는 그러하지 않았다. 50만이 넘는 국민들의 호소에도 진보는 그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박원순이 생전에 성추행 피해자를 변호했던 피해자중심주의 원칙은 진보는 박원순을 위해 무너뜨렸다. 이로써 그가 이 세상에 다녀간 흔적마저 지워버렸다. 그들이 치러준 장례식이 그에게는 또 다른 죽음이었다. 그를 위한답시고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평생에 걸쳐 없애려 했던 그 짓을 골라서 했다. 피해자를 무차별하게 공격함으로써 이보다 더 완벽하게 그를 죽일 수 있을까.
- 도대체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저 숭고한 사명감으로 얼마나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가 우리가 세우려는 이상세계는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이미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거꾸로 저들이 보여주는 저 광적인 열정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구축하게 될 세상의 모습을 미리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짓는 아방궁에서 나는 그저 거대한 폐허, 완벽한 파국만을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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