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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작가 정보
출생 1962년 6월 5일 / 경상북도 안동시
직업 시인
배우자 임지희2023년 사별
자녀 안은서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1987年 11月의 新川〉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 ,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수상
2015년 제7회 고산문학대상[4]
2016년 제7회 권정생창작기금[2] : 다섯 번째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2018년 제5회 동시마중 작품상[3]
2021년 5·18문학상 본상[5]
2021년 제23회 백석문학상[6]
202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저서
시집
《그대 무사한가》(1991년, 한길)
《안동소주》(1999년, 실천문학사)
《오래된 엽서》(2003년, 천년의시작)
《아배 생각》(2008년, 애지)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2017년, 실천문학사)
《안상학 시선》(2018년, 아시아)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2020년, 걷는사람)
동시집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2018년, 창비)
1. 안상학 - 진공관 앰프
< 한겨레, 안상학 시인, 2014-02-12 >
1974년,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변변한 장롱 한 짝 두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옷걸이가 필요한 옷들은 대개 벽에 걸린 횃대보 안에 갈무리해놓았다. 나머지 옷가지들은 3단 서랍장 속에, 이불은 그 위에 개켜져 있었다. 단칸방에 살다가 두 칸 방으로 옮겼으니 조금은 여유가 있었을까. 안방으로 쓰는 방엔 3단 서랍장만 한 물건이 또 하나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전축이라 불렀다.
전축은 어떤 가구 같이 통으로 생겨먹었으며, 양쪽으로는 스피커를 차고 있었고, 그 사이로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좌우로 열어젖히면 턴테이블과 진공관 앰프가 위용을 드러냈다. 거긴 나훈아도 있었고 배호도 있었다. 판이 돌아가고 노래가 나오면 진공관들은 힘겨운 불빛을 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 가계에서 최초를 장식한 전축이었다. 숟가락 하나 느는 게 겁이 났던 살림살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한 사치품이었다. 물론, 우리에겐 그랬지만 트랜지스터 전축으로 바꾼 사람들에겐 애물단지였을 것이다.
이래저래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은 새어머니와 함께 왔다. 두어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 자리에 앉은 새어머니는 미인에다 성격까지 좋았다. 5남매 중 집에 남아 있던 나를 포함한 3남매를 단박에 무장 해제시켰다. 즐겁게 밥을 먹고 함께 사교춤을 추었다. 청소도 놀이처럼 하며 즐겁게 지냈다. 전축도 한몫 거든 셈이다. 생각해보면 가난한 집에 전축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새어머니였다. 그래서였을까. 그해 8월 15일 광복절에 한 여인은 총에 맞았고, 같은 시각에 새어머니는 칼에 맞았다. 특사로 풀려난 새어머니의 옛 애인이 찾아와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 길로 우린 그 동네를 떠났고 전축은 따라나서지 않았다. 몇 장의 레코드판만 책 보따리 속에 끼어 줄래줄래 따라나섰다. 첫 번째 오디오 시스템과 맺은 인연의 전모다.
두 번째 인연은 야외 전축이었다. 1978년, 중학교 3학년이었다. 자퇴를 했다가 복학을 해서 3학년에만 두 해째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집이 싫었고 학교가 싫었다. 공부하고 담을 쌓은 적도 없지만 함께한 적도 없었다. 형제자매들의 최종 학력이 국졸인데 나 혼자 꾸역꾸역 학교에 다니는 것도 고역이었다. 가출을 결행하기로 작정하고 1, 2기분 공납금을 뭉쳐서 야외 전축을 샀다. 레코드판은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 올리비아 뉴튼 존의 〈Let Me Be There〉 따위로 마련했다. 소풍 가서 틀어놓고 고고를 추면서 신나게 놀았다. 며칠 뒤 나는 단봇짐을 쌌다. 야외 전축을 들고 청량리행 기차에 올랐다. 비가 왔다.
가출은 한 달 만에 끝났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눈물 콧물 흘리며 돌아왔다. 어쩐지 나도, 야외 전축도 무사했다. 아버지와 무관하게 사단은 이태쯤 뒤에 났다. 실수로 바늘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테이프로 고정시켜 틀어보았지만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고치려고 마음을 내어봤지만 그땐 이미 사양길이었고 건전지 값도 만만찮았다. 게다가 녹음기가 각광을 받는 시절이었다. 그 뒤 200장 정도 되던 판도 알게 모르게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1980년 여름에 우리는 그 마을을 떠나 도시 근교 마을로 이사를 갔다. 나는 차츰 음악에 목이 말랐다. 책꽂이에 꽂힌 판에서는 절대 음악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졸랐다. 당시 삼성에서 나온 저가 보급형 녹음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얼마나 졸랐던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랐다. 기르던 개 ‘루시’가 없어진 것이다. 개집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안방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담배만 피우고 계셨다. 그날 내 방 책상 위에는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녹음기를 끌어안고 ‘루시’를 부르며 좀 울었던가. 녹음기 이름이 ‘루시’가 된 사연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나는 대구에 있었다. 그 시절 자취방에는 소니의 히트작 ‘워크맨’이 있었다. 낡을 대로 낡은 작은 소리통에 의존해 음악을 들었다. 테이프로 듣는 음악도 차츰 멀어지고, 1994년 결혼할 때 마련한 전축도 시디플레이어에 밀려 이내 멀어졌다. 2000년부터 시골에서 혼자 지냈다. 그때 마련한 컴포넌트 오디오로 줄곧 음악을 들었다. 어쩐지 흥미는 떨어졌다.
2009년이었다. 언더가수 허설이 새로 낸 음반 《웃는 발톱》을 보내왔다. 컴포넌트 오디오로 들었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친한 형으로 모시는 박남준 시인 집에 놀러갔다. 박 시인은 몇천 장의 시디를 보유한 음악광이다. 앰프와 시디플레이어는 마란츠, 스피커는 제이비엘(JBL)이다. 명성이 자자한 것들이다. 거기서 허설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다. 훌륭했다. 오디오의 성능 차이가 이렇게도 음악을 죽이고 살린다니. 귀에 익지 않은 음악일수록 정도는 더했다. 내 꼭, 괜찮은 오디오를 장만하리라 그때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1년 뒤쯤 일이다. 후배 중에 오디오 마니아가 있다. 시노래패 ‘징검다리’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위대권이다. 이 친구가 내 푸념을 듣고 진공관 앰프로 구색을, 그것도 아주 싸게 맞춰주었다. 자작 1625 푸시풀 진공관 파워앰프, 쿼드 33 프리앰프, 데논 시디플레이어, 텔레풍켄 스피커 등 그야말로 ‘각국 대표’의 혼성 조합이다. ‘잡표’ 케이블로 서로 이어 앉히고 처음 음악을 틀었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음악을 아무리 크게 틀어도 주변에 뭐라 할 사람이 없다. 가끔 벗들을 불러 자랑질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늘 시대에 뒤떨어진, 유행에 뒤쳐진 기계로 음악을 들어가며 흥미를 점점 잃어갔고, 컴포넌트에 이르러서는 아예 뚝 떨어진 입맛을 다시금 살려주었다.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진공관 앰프로 음악 세계의 새로운 진경을 맛보고 있다. 나름 복고풍으로, 그것도 ‘세상의 모든 음악’ 기계를 거의 접수한 스마트폰 시대에 말이다. 스티브 잡스가 저승에서 복장 터진다고 가슴 칠지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불을 끄고 크고 작은 유리관 속 불빛들을 아련히 바라보며 음악의 묘미를 듣는다. 무슨 우주기지 같기도 하고, 오랜전 모스크바 상공에서 보았던 도시 야경 같기도 한 진공관 앰프. 그 속에서는 가끔, 한때나마, 즐겁게, 우리 집에 다녀가셨던 새엄마 얼굴과 무지막지하게 크기만 했던 가구형 전축 진공관 불빛이 섞바뀌며 겹쳐지기도 한다.
2. 영락없는 안동 촌놈 안상학 시인
< 경향신문, 안도현 우석대 교수·시인, 2017.02.01 >
경북 북부지방의 사투리는 부산이나 대구의 말투와는 확연히 다르다. “점심 먹었습니까?”가 안동과 예천 지방에서는 “점심 먹었니껴?”가 된다. 내가 유소년기에 습득한 언어가 그것이다. 아주 가끔씩 안상학 시인과 나는 그 무슨 암호 같은 그런 말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올해 설에도 연락할라이껴?” 하고 그가 물으면 “그라이시더” 하고 대답하면 된다.
명절 때 어머니가 계시는 안동으로 가서 차례를 지내고 나면 귀향한 탕아 같은 시인 몇몇이 술집으로 모인다. 오래전부터 이영광과 안상학,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흐릿한 사투리로 술잔을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일찍이 고향을 떠난 나는 그때만큼은 어설프게 경상도 사람이 된다.
안상학은 나보다 한 살 아래 후배 시인인데,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당선작 ‘1987년 11월의 신천’은 80년대의 어두운 도시 풍경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 역작이다. 그동안 다섯 권의 시집을 냈으니 아주 부지런히 시를 쓴 것은 아니다.
그는 내가 보기에 좀 떠들썩하게 잘 노는 시인이다. 안상학이 한때 전주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같은 고향 까마귀인 나도 나지만 그가 따르는 박남준 시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훈에 따르면 둘 사이가 ‘심상찮을’ 정도로 가깝다. 박남준과 안상학은 1991년에 처음 만나서 단박에 친해진 사이다. 시가 아니라 서로의 노래 때문에 한통속으로 묶였다. 그로부터 10년쯤 뒤 박남준과 내통하고 있던 충청도 주당파의 유용주, 한창훈, 이정록과 어울려 술판을 주름잡고 다녔다. 그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는 김해자, 오수연, 함순례 등도 꽤나 가까워 보인다. 그의 문단 교류는 문학보다는 술에 더 기울어진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안상학의 시업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그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안동에서 권정생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6년 넘게 일했다. 선생님이 타계하시기 전, 2007년에 그는 서울로 이사를 하기 위해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선생님은 서울행을 말리셨다.
“서울은 뭐 할라고 가노. 그냥 촌에 어디 밭 한 뙈기 사서 컨테이너 놓고 글 쓰면서 살면 되지. 어디 밭이나 한번 알아봐라.”
“제가 무슨 돈이 있어서 밭을 사니껴. 더 늦기 전에 다른 데 가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짐도 다 쌌어요. 방도 구해 놨고요.”
그러자 선생님은 벽에 걸린 서류꽂이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출판사에서 인세로 받은 자기앞수표 100만원이 들어 있었다. 권 선생님은 서울 가서 살림살이 장만하는 데 보태라고 쥐여주었으나 안상학은 받아들 수가 없었다. 실랑이를 하던 끝에 선생님이 말했다.
“그러면 내 볼에 뽀뽀나 한번 해주면 되잖나.”
안상학은 선생님을 안고 소리가 나게 볼에 입을 맞춰드렸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권정생 선생은 운명하셨고, 안상학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고 추모 사업을 하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작년에 그는 다섯 번째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로 제7회 권정생창작기금을 받았다.
“권 선생님이 내게 밭뙈기 사라고 상금을 쥐여주신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파요.”
안상학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이 <안동소주>다. 그래서 그는 ‘안동소주 시인’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시집에는 그의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그쳤다./ 달구지 하나 없는 화전민으로 살다가/ 지게 지고 안동으로 이사 나온 뒤/ 아버지의 인생은 손수레 바퀴였다./ 채소장수에서 술배달꾼으로 옮겨갔을 땐/ 아버지의 인생은 짐실이 자전거 바퀴였다.”
그의 아버지는 꽤나 낙천적이고 성실한 분이었다고 한다. 입만 떼면 주위 사람들이 배를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으니 입담 또한 상당한 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번 찾아온 가난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안상학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상처를 하고 병구완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빚만 잔뜩 얻은 채로 줄곧 가난에 허덕였다. 개똥밭에 소똥 구르듯 하며 자식들이 성장했을 때는 난데없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5년간 자리보전하다가 세상을 떴다.
안상학은 술을 즐기면서 술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의외로 어린 시절에는 늘 우울해 보이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생활통지표에 그런 내용의 기록이 6년간 이어졌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막내를 낳은 어머니는 돌아서서 병을 얻고 3년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짐작이 간다. 생활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등 시절 줄곧 장래희망이 화가였다고 하니 믿을 수 없지만 그가 가끔 붓글씨를 쓰는 것을 보면 아주 사기는 아닌 것 같긴 하다.
그는 명리학에도 관심이 많다. 시도 그렇지만 명리에 눈을 돌린 것도 십대 시절이다. 사는 게 뭔지, 나는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다가 사주 명리 서적에도 자연 손이 가더라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아는 눈치다. 그는 자신을 자연의 일부라고 본다. 낮과 밤, 절기와 계절의 순환에 기대 인생의 모든 과정을 파악한다. 그는 내게 경고한 적도 있다. 이젠 문학에만 온전히 귀의하라고. 과욕을 버리라고.
안상학은 어느 글에선가 고향을 얼레로 표현한 적이 있다. 까마득한 창공을 나는 연은 저 혼자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은 얼레에 묶여 있다. 고향을 떠나서 사는 삶도 마찬가지여서 쉬고 싶을 때면 얼레에 감겨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그는 입버릇처럼 고향이라는 곳은 살면 떠나고 싶고, 떠나면 돌아가 살고 싶은 곳이라고 한다.
안상학의 시에는 그런 애증의 고향 사람들과 풍경, 정서가 도처에 녹아 있다. 아마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직을 그만두면 그는 또 안동 어디 주막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가끔 나도 거기 등장하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딸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그에게 한마디 던져주고 싶다.
“마이 마시더라도 아프지만 마시더!”
3. 여섯번째 시집 낸 '시인' 안상학 "30년 넘게 시 붙잡고 살았는데…나, 시인 맞나?"
< 영남일보, 이춘호, 2020-10-23 >
아버지는 두 '어매' 줄초상으로 오열했다
안동탁주합동회사서 술 배달하면서 연명
술기운에 영웅행세, 다음날 숙취로 '개털'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편지는 복음이었다
영화감상회서 만난 참지식인 6명 덕분에
언행일치적 삶의 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시대와의 불화'가 없으면 공연히 시를 적을 이유도 없다고 믿으며 우리 삶의 변방스러움의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 어떻게 상처를 입어가는가를 34년째 6권의 시집으로 아로새기고 있는 안동 토박이 안상학 시인. 벽에 걸린 글씨는 그와 2003년 인연을 맺은 서예가 이호영의 작품으로 그의 시 '안동소주'를 '안동바람체'로 적어 선물했다.
세상이란? 자본과 자신 사이 아닐까. 하늘 아래 구두깔창처럼 세상이란 게 누워있지만, 하늘 앞에선 도무지 그 모든 게 무상하다. 그런 생각을 한 시절도 있으나, 그 생각은 얼마나 덜 여물고 무책임한 인식인가?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를 붙들고 낮술 한 추렴하면서 그만의 삶의 이야기를 경청해봐라. 우주보다 더 넓고 깊은 곡절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수직, 어떤 이는 수평을 이야기한다. 저 수직과 수평이 서로를 대지처럼 품어줬다면 돈 때문에 자살하는 자들도 없었으리라.
나는 안동에 사는 안상학이다. 30년 이상 시를 붙들고 있는데 아직 내 이름 뒤에 시인이란 두 글자를 붙여도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시인이 된 뒤부터 사는 지금 이 집은 모르긴 해도 세상에서 가장 후미진 자리 같다. 내 단칸집 뒤 언덕배기가 가을물에 젖는다. 삽상한 바람, 초롱한 햇살 앞에 내 손바닥을 책처럼 펼쳐본다. 가는 길, 굵은 길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일상이 어쩜 일생보다 더 가파른 절벽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세월은 내게 모두 세 줄기 어매(어머니)를 안겨준 모양이다.
첫 어매는 34세 때,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3년간 긴 와병 끝에 돌아가셨다. 긴 병 수발 탓에 조금 모였나 싶던 재산도 바닥나버렸다. 빚을 안은 채 셋방살이가 시작됐고 보다 못한 할머니가 3남매를 보듬어야만 했다. 그런 어느 날, 새어매가 봄볕처럼 왔다. 너무나 다정다감하고 살가운 분이었다. 삶은 감자를 챙겨 영호루로 소풍도 갔다. 가족사진은 한사코 찍지 않으셨다. 미구에 닥칠 액운을 감지한 모양이다. 우릴 만난 지 1년도 안 돼 육영수 여사가 8·15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던 그날 비슷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줄초상을 감당 못해 무덤가에서 오열하는 아버지. 어린 나는 세상에 저런 슬픔도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두 어매가 지자 우리도 몰락해버렸다. 한때 화전민이었다가 나름 풋풋한 가정을 일궜던 아버지는 낙담일로를 걷는다. 안동탁주합동회사 술 배달부로 연명했다. 경덕중 시절 나는 무의미한 공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에게 "자퇴하고 술 배달을 하고 싶다"고 했다. 놀랍게도 아버지가 허락했다. 오죽했으면….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안동 곳곳에 술을 날랐다.
서울·대구·포항에서 10여년 객지생활을 했다. 1978년 생애 첫 서울로의 가출. 친구와 술기운에 잠시 '영웅'이 될 수 있었지만 홀로 남은 숙취 난만한 아침이면 나는 다시 '개털'이었다. 달빛은 만인에게 고루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 슬픔과 고독을 독점할 수도 없었다. 다시 장착된 쓰나미급 외로움이 급습할 때쯤 한 통의 편지가 '복음'처럼 다가왔다.
안상학의 모든 시에는 유난히 외로움이 짙게 깔려 있다. 외로움을 아는 인간은 그 소중함도 안다. 결코 외로움을 떨쳐 내려는 무모한 짓은 말아야 한다. 고독을 지켜나가는 것 그게 시를 쓰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권정생. 내겐 반전 드라마 같은 분이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란 두 편의 동화로 유명해진 그는 앎과 행이 일치하는 분이었다. 일직면 조탑리 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 근처 움집에 사셨던 그와 실과 바늘 같은 세월을 보낸다. 내 인생의 첫 반전은 안동문화회관에서 기획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감상회 때 만난 참지식인 때문이다. 권정생·전우익·이오덕·권종대·정호경·이현주였다. 내 나이 24세 되던 해였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한때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2007~2008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2008~2014), 2016년에는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다.
안동의 지성사는 특이한 세 개의 단층을 갖고 있다. 유학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주운동가다. 그동안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 거유(巨儒)에게만 경도된 것도 사실이다. 이상룡, 이육사 등 독립운동가와 병행해 한국 민주·농민·한글·환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 바로 저 6인방이었고 그들의 언행일치적 삶의 내공을 가까운 거리에서 익힐 수 있었던 것 같다. 권정생과 전우익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보법으로 우주의 끝을 겨냥한 안목을 가진 농사꾼이자 생활 철학자였다. 전우익은 1993년 베스트셀러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란 책을 통해 황금만능에 편승한 자본주의의 횡포를 일갈하며 '같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언어민중주의자·민족주의자로 한글의 미래를 누구보다 걱정한 이오덕, 그는 바른 우리말을 통해 바른 한국인의 삶을 겨냥한 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초대·2대 의장을 역임한 영덕 출신의 농민운동가 권종대의 삶에 빚을 진 것 같아 그의 평전을 쓰기도 했다. 조상을 생각하는 시월 상달만 되면 나는 내 맘의 향불을 켜 저 양심들을 위해 안동막걸리로 헌주를 한다.
4.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 살았으니 : 안상학,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걷는사람, 2020)
< 대학지성 In&Out ,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2020.11.01 >
안상학의 시를 오랫동안 읽어온 독자로서 이번에 출간된 신작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다른 독자들도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유하고 싶은 시집이다. 도무지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울 때, 납덩어리처럼 가라앉은 마음의 상태를 극복하기 어려울 때, 이를테면 삶의 무상감이 너무 생생해져버릴 때, 나는 이 시집을 읽고 골똘히 시인의 마음과 내 마음을 두 개의 거울처럼 서로 마주 비추어 보았다.
그러면서 시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한 편의 시가 그것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되비추어, 불가해 보이는 고통을 안으로 다스려 빛나게 하는지를. 기쁨 앞에서보다 아픔과 슬픔 안에서, 마음과 마음을 껴안은 시적 교감이 가능해지는지를, 안상학의 시는 서늘하게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시집의 표지를 열면 시인은 자신이 “허망처럼 빠져드는 그런 바닥”에 놓여 있다고 고백하는데, 그것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바닥”(「바닥행」)으로도 표현된다. 그 바닥의 정동(affects)은 「대서」에서, “가지를 뜨지 못하는 새”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불볕 더운 날, 나는 상자(桑柘)나무 가지에 앉아서 울고 있는 새를 생각한다. 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가지가 퉁겨 올라 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다는 그 나무를 생각한다. 가지를 뜨지 못하는 새, 나도 그 어떤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것일까. 뒤통수가 섬뜩한 날 자꾸만 비지땀이 흐른다.(「대서」 부분)”
위의 시에서 “새”는 시적 자아이며, “상자(桑柘)나무”=뽕나무는 시인을 규정하고 있는 삶이다. 새는 삶의 규정력을 거슬러 초월하고자 하지만, 번번이 삶이 “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다”는 진술은, 그것을 불가능케 만들었던 삶의 가혹함을 환기시킨다. 그 결과로 시적 자아는 스스로를 “가지를 뜨지 못하는 새”, 그러니까 초월을 가능케 하는 날개의 기능이 마비된 새와 같은 처지라는, 비관적 자기인식을 보여준다.
“나도 그 어떤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것일까”라는 자문은 시인의 것이지만, 시집을 읽어나가면서 독자인 나 역시 단순한 중력 이상의 삶의 끈질긴 경험적 인력(引力)이, 새의 비상을 불가능케 하는 외부적 억압인 것만은 아니고,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나”의 마음을 쓰는 역사이기도 하다는 전환적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다는 것은 삶을 규정짓는 개인적 체험 속에서 시적 자아가 끝없이 울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울음의 체험이 말할 수 없이 깊어질 때, 그것을 시인은 “바닥”이라고 말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떠오름 혹은 초월의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저 마음의 어두운 심연을 의미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시란 마음이 쓰는, 혹은 마음에 대해 쓰는 역사이다.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에서 안상학은 그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억제해 왔던, 스스로의 마음이 써내려 간 역사를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고백하고 있다. 특히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되어있는 시들은 마음이 써내려 간 시인의 역사에 있어 가히 ‘절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가운데 「생명선에 서서」, 「북녘 거처」, 「안동식혜」는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어떤 이의 초상이 한 편의 ‘단편 서사시’처럼 표현된 작품으로, 마음을 쓰는 역사라는 서정시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작품들이다.
「안동식혜」에서 시인은 “일찍이 어매 없이 자란 나는 당연히 우리 집 식혜 맛을 알지 못해서” “내 그리움은 구름재 너머 맏어매 집을 기웃거리곤” 했다고 고백한다. 이 유년기의 아픈 기억은 안동식혜의 생생한 묘사 속에서 돌연 ‘활기’를 뿜어낸다.
“차례 음식상 물리고 나면 한 보시기 담겨 나오던 고것, 살얼음 사각대는 맑고 발그레 싹싹한, 생강과 고춧가루와 엿지름을 한데 훌 버무려 걸러 짜낸 물에 뽀얀 찹쌀과 노리끼리한 차좁쌀로 쪄낸 밥알 사이사이 깍뚝썰기를 한 무꾸 조각들이 서성이는, 그 위에 채를 친 밤과 땅콩 몇 낱 고명으로 올린, 고소, 시원, 달콤, 매콤 얼콤한 그 맛은(...)”(「안동식혜」 부분)
“어매 없이 자란 나”의 고통을 직정적으로 서술했다면, 이 시는 흔한 자기 연민에 빠졌을 것이나, 시인은 반대로 “맏어매 집”에서 먹었던 안동식혜의 맛을 공감각적 이미지의 활기를 통해 묘사한다. “고소, 시원, 달콤, 매콤, 얼콤”한 생생한 혀의 감각들은 “어매 없이 자란 나”의 허기를 낙천적으로 달랬던 시인의 마음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손맛의 주인이 어매가 아니고 맏어매여서 다행한 일”이라는 시인의 역설적인 긍정 역시,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을 가을 갈대처럼 서걱거리게 만든다.
「북녘거처」는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하고 물은 후에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의 “북녘거처”를 회상한다. 시인의 가출은 “세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으로부터의 반항적 도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타고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을 들고 떠나온 소년. 청량리역에 도착해 지금도 있는 미주아파트에서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 준 라면 한 끼 훌쩍”거리고,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에서 한 달을 지냈지만, 아버지의 편지 한 장을 받고는 다시 귀향하게 되었다는 회상.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당시의 “불알친구는 십 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아배도 오래전 소식 없고/ 누이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인데, 오직 시인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 가며”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이 다 늦은 세월 속의 가출의 성격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써 왔던 시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내 삶의 가장 먼 그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다 늦은 가출에의 욕망은 회복할 수 없는 원체험의 장소로 회귀하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제로(zero) 상태에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모순적 열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마음의 출가랄까? 그것은 가능한, 그러나 불가능한 욕망이다. 남는 것은 마음의 가출이 만들어낸 마음의 무늬와 그 간절한 흔적의 역사가 아닐지.
「생명선에 서서」는 그야말로 시로 쓰는 마음의 역사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지나간다”는 표현의 반복을 통해, 시인의 연대기적 삶을 계기적으로 분절시켰던 ‘사건화된 장면’들이 시간의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는 역전적 시간 구성을 통해, 장면과 장면을 몽타주 수법으로 편집하면서, 기억과 기억 사이를 빠르게 “지나간다.”
“딸내미가 환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다 지나간다(...) 딸내미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가 있다 지나간다/ 나는 나로 살겠다고 다짐하던 몽골초원 자작나무 지나간다/ 권정생 선생이 살아나고 나는 서울이다 지나간다(...)/ 아버지가 술 배달을 하고 있다 나는 모른 척 지나간다/ 시를 접고 공사판에서 오비끼를 나르는 나를 지나가고/ 없는 아내가 있다가 사라진다 지나간다(...)/새새어머니의 빗자루가 지나가고 새엄마가 칼을 맞고 있다/ 지나간다 엄마 같던 새엄마가 햇감자를 쪄 주던 1974년 생일날, 지나간다/ 무덤에서 나온 엄마가 병원에 누워있다 지나간다(「생명선에 서서」 부분)”
이렇게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그 길을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서/ 나는 나를 다시 이순의 언저리에 세워본다”. 제목에서의 “생명선”이라는 표현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로서, 시인이 자신의 “이순 언저리”에 대한 현재적 인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지나온 사건들과 장소들은 모순적 정념들이 잡거(雜居)하고 있는 삶 자체이다. 즉 그 속에는 “떠나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돌아오는 것들”이 있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그늘진 것들”이 있는가 하면 “햇살바른 것들”이 있고, “절망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희망하는 것들”도 인접해 있다.
이것은 삶이 충일한 모순의 복합체라는 것을 시인이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의 회상적 감각과 인식 속에서, 그것에 불가피하게 혹은 필연적으로 삼투되어 있는 모순을 객관화된 시선으로 관조할 수 있는 회상적 거리가 확보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생명선”에 선다는 것의 성숙한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안상학의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지나온 날들을 모두 ‘어제’로 부르는 고비 사막에서의 경험과 인식을 쓴 시 「고비의 시간」을 표제로 한 시집이다. 이때 “고비”는 물리적 장소와 마음의 역학 모두에 대한 중의적 표현이다. “모든 지나간 날들과 아직 오지 않은 나날들을 어제와 내일로 셈”할 수 있는 압축적 인식을, 회상적 정념 속에서 유려하게 소환하는 이 시집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 살았으니, 어제와 내일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맞춤한 한 몸이 되었구나. 차가운 이 가을에 즐비한 절창을 음미할 수 있어 좋구나. 훌륭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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