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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작가 정보
출생 1962년 6월 5일 / 경상북도 안동시
직업 시인
배우자 임지희2023년 사별
자녀 안은서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1987年 11月의 新川〉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 ,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수상
2015년 제7회 고산문학대상[4]
2016년 제7회 권정생창작기금[2] : 다섯 번째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2018년 제5회 동시마중 작품상[3]
2021년 5·18문학상 본상[5]
2021년 제23회 백석문학상[6]
202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저서

 

시집
《그대 무사한가》(1991년, 한길)
《안동소주》(1999년, 실천문학사)
《오래된 엽서》(2003년, 천년의시작)
《아배 생각》(2008년, 애지)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2017년, 실천문학사)
《안상학 시선》(2018년, 아시아)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2020년, 걷는사람)

 

동시집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2018년, 창비)

 

 


1.  안상학 - 진공관 앰프

 

< 한겨레, 안상학 시인, 2014-02-12  >

 


1974년,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변변한 장롱 한 짝 두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옷걸이가 필요한 옷들은 대개 벽에 걸린 횃대보 안에 갈무리해놓았다. 나머지 옷가지들은 3단 서랍장 속에, 이불은 그 위에 개켜져 있었다. 단칸방에 살다가 두 칸 방으로 옮겼으니 조금은 여유가 있었을까. 안방으로 쓰는 방엔 3단 서랍장만 한 물건이 또 하나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전축이라 불렀다.

전축은 어떤 가구 같이 통으로 생겨먹었으며, 양쪽으로는 스피커를 차고 있었고, 그 사이로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좌우로 열어젖히면 턴테이블과 진공관 앰프가 위용을 드러냈다. 거긴 나훈아도 있었고 배호도 있었다. 판이 돌아가고 노래가 나오면 진공관들은 힘겨운 불빛을 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 가계에서 최초를 장식한 전축이었다. 숟가락 하나 느는 게 겁이 났던 살림살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한 사치품이었다. 물론, 우리에겐 그랬지만 트랜지스터 전축으로 바꾼 사람들에겐 애물단지였을 것이다.

이래저래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은 새어머니와 함께 왔다. 두어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 자리에 앉은 새어머니는 미인에다 성격까지 좋았다. 5남매 중 집에 남아 있던 나를 포함한 3남매를 단박에 무장 해제시켰다. 즐겁게 밥을 먹고 함께 사교춤을 추었다. 청소도 놀이처럼 하며 즐겁게 지냈다. 전축도 한몫 거든 셈이다. 생각해보면 가난한 집에 전축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새어머니였다. 그래서였을까. 그해 8월 15일 광복절에 한 여인은 총에 맞았고, 같은 시각에 새어머니는 칼에 맞았다. 특사로 풀려난 새어머니의 옛 애인이 찾아와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 길로 우린 그 동네를 떠났고 전축은 따라나서지 않았다. 몇 장의 레코드판만 책 보따리 속에 끼어 줄래줄래 따라나섰다. 첫 번째 오디오 시스템과 맺은 인연의 전모다.

두 번째 인연은 야외 전축이었다. 1978년, 중학교 3학년이었다. 자퇴를 했다가 복학을 해서 3학년에만 두 해째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집이 싫었고 학교가 싫었다. 공부하고 담을 쌓은 적도 없지만 함께한 적도 없었다. 형제자매들의 최종 학력이 국졸인데 나 혼자 꾸역꾸역 학교에 다니는 것도 고역이었다. 가출을 결행하기로 작정하고 1, 2기분 공납금을 뭉쳐서 야외 전축을 샀다. 레코드판은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 올리비아 뉴튼 존의 〈Let Me Be There〉 따위로 마련했다. 소풍 가서 틀어놓고 고고를 추면서 신나게 놀았다. 며칠 뒤 나는 단봇짐을 쌌다. 야외 전축을 들고 청량리행 기차에 올랐다. 비가 왔다.

가출은 한 달 만에 끝났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눈물 콧물 흘리며 돌아왔다. 어쩐지 나도, 야외 전축도 무사했다. 아버지와 무관하게 사단은 이태쯤 뒤에 났다. 실수로 바늘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테이프로 고정시켜 틀어보았지만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고치려고 마음을 내어봤지만 그땐 이미 사양길이었고 건전지 값도 만만찮았다. 게다가 녹음기가 각광을 받는 시절이었다. 그 뒤 200장 정도 되던 판도 알게 모르게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1980년 여름에 우리는 그 마을을 떠나 도시 근교 마을로 이사를 갔다. 나는 차츰 음악에 목이 말랐다. 책꽂이에 꽂힌 판에서는 절대 음악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졸랐다. 당시 삼성에서 나온 저가 보급형 녹음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얼마나 졸랐던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랐다. 기르던 개 ‘루시’가 없어진 것이다. 개집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안방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담배만 피우고 계셨다. 그날 내 방 책상 위에는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녹음기를 끌어안고 ‘루시’를 부르며 좀 울었던가. 녹음기 이름이 ‘루시’가 된 사연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나는 대구에 있었다. 그 시절 자취방에는 소니의 히트작 ‘워크맨’이 있었다. 낡을 대로 낡은 작은 소리통에 의존해 음악을 들었다. 테이프로 듣는 음악도 차츰 멀어지고, 1994년 결혼할 때 마련한 전축도 시디플레이어에 밀려 이내 멀어졌다. 2000년부터 시골에서 혼자 지냈다. 그때 마련한 컴포넌트 오디오로 줄곧 음악을 들었다. 어쩐지 흥미는 떨어졌다.

2009년이었다. 언더가수 허설이 새로 낸 음반 《웃는 발톱》을 보내왔다. 컴포넌트 오디오로 들었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친한 형으로 모시는 박남준 시인 집에 놀러갔다. 박 시인은 몇천 장의 시디를 보유한 음악광이다. 앰프와 시디플레이어는 마란츠, 스피커는 제이비엘(JBL)이다. 명성이 자자한 것들이다. 거기서 허설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다. 훌륭했다. 오디오의 성능 차이가 이렇게도 음악을 죽이고 살린다니. 귀에 익지 않은 음악일수록 정도는 더했다. 내 꼭, 괜찮은 오디오를 장만하리라 그때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1년 뒤쯤 일이다. 후배 중에 오디오 마니아가 있다. 시노래패 ‘징검다리’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위대권이다. 이 친구가 내 푸념을 듣고 진공관 앰프로 구색을, 그것도 아주 싸게 맞춰주었다. 자작 1625 푸시풀 진공관 파워앰프, 쿼드 33 프리앰프, 데논 시디플레이어, 텔레풍켄 스피커 등 그야말로 ‘각국 대표’의 혼성 조합이다. ‘잡표’ 케이블로 서로 이어 앉히고 처음 음악을 틀었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음악을 아무리 크게 틀어도 주변에 뭐라 할 사람이 없다. 가끔 벗들을 불러 자랑질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늘 시대에 뒤떨어진, 유행에 뒤쳐진 기계로 음악을 들어가며 흥미를 점점 잃어갔고, 컴포넌트에 이르러서는 아예 뚝 떨어진 입맛을 다시금 살려주었다.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진공관 앰프로 음악 세계의 새로운 진경을 맛보고 있다. 나름 복고풍으로, 그것도 ‘세상의 모든 음악’ 기계를 거의 접수한 스마트폰 시대에 말이다. 스티브 잡스가 저승에서 복장 터진다고 가슴 칠지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불을 끄고 크고 작은 유리관 속 불빛들을 아련히 바라보며 음악의 묘미를 듣는다. 무슨 우주기지 같기도 하고, 오랜전 모스크바 상공에서 보았던 도시 야경 같기도 한 진공관 앰프. 그 속에서는 가끔, 한때나마, 즐겁게, 우리 집에 다녀가셨던 새엄마 얼굴과 무지막지하게 크기만 했던 가구형 전축 진공관 불빛이 섞바뀌며 겹쳐지기도 한다.

 

 


2. 영락없는 안동 촌놈 안상학 시인


< 경향신문, 안도현 우석대 교수·시인, 2017.02.01 >

 

경북 북부지방의 사투리는 부산이나 대구의 말투와는 확연히 다르다. “점심 먹었습니까?”가 안동과 예천 지방에서는 “점심 먹었니껴?”가 된다. 내가 유소년기에 습득한 언어가 그것이다. 아주 가끔씩 안상학 시인과 나는 그 무슨 암호 같은 그런 말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올해 설에도 연락할라이껴?” 하고 그가 물으면 “그라이시더” 하고 대답하면 된다.

명절 때 어머니가 계시는 안동으로 가서 차례를 지내고 나면 귀향한 탕아 같은 시인 몇몇이 술집으로 모인다. 오래전부터 이영광과 안상학,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흐릿한 사투리로 술잔을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일찍이 고향을 떠난 나는 그때만큼은 어설프게 경상도 사람이 된다.

안상학은 나보다 한 살 아래 후배 시인인데,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당선작 ‘1987년 11월의 신천’은 80년대의 어두운 도시 풍경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 역작이다. 그동안 다섯 권의 시집을 냈으니 아주 부지런히 시를 쓴 것은 아니다.

그는 내가 보기에 좀 떠들썩하게 잘 노는 시인이다. 안상학이 한때 전주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같은 고향 까마귀인 나도 나지만 그가 따르는 박남준 시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훈에 따르면 둘 사이가 ‘심상찮을’ 정도로 가깝다. 박남준과 안상학은 1991년에 처음 만나서 단박에 친해진 사이다. 시가 아니라 서로의 노래 때문에 한통속으로 묶였다. 그로부터 10년쯤 뒤 박남준과 내통하고 있던 충청도 주당파의 유용주, 한창훈, 이정록과 어울려 술판을 주름잡고 다녔다. 그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는 김해자, 오수연, 함순례 등도 꽤나 가까워 보인다. 그의 문단 교류는 문학보다는 술에 더 기울어진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안상학의 시업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그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안동에서 권정생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6년 넘게 일했다. 선생님이 타계하시기 전, 2007년에 그는 서울로 이사를 하기 위해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선생님은 서울행을 말리셨다.

“서울은 뭐 할라고 가노. 그냥 촌에 어디 밭 한 뙈기 사서 컨테이너 놓고 글 쓰면서 살면 되지. 어디 밭이나 한번 알아봐라.”

“제가 무슨 돈이 있어서 밭을 사니껴. 더 늦기 전에 다른 데 가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짐도 다 쌌어요. 방도 구해 놨고요.”

그러자 선생님은 벽에 걸린 서류꽂이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출판사에서 인세로 받은 자기앞수표 100만원이 들어 있었다. 권 선생님은 서울 가서 살림살이 장만하는 데 보태라고 쥐여주었으나 안상학은 받아들 수가 없었다. 실랑이를 하던 끝에 선생님이 말했다.

“그러면 내 볼에 뽀뽀나 한번 해주면 되잖나.”

안상학은 선생님을 안고 소리가 나게 볼에 입을 맞춰드렸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권정생 선생은 운명하셨고, 안상학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고 추모 사업을 하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작년에 그는 다섯 번째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로 제7회 권정생창작기금을 받았다.

“권 선생님이 내게 밭뙈기 사라고 상금을 쥐여주신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파요.”

안상학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이 <안동소주>다. 그래서 그는 ‘안동소주 시인’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시집에는 그의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그쳤다./ 달구지 하나 없는 화전민으로 살다가/ 지게 지고 안동으로 이사 나온 뒤/ 아버지의 인생은 손수레 바퀴였다./ 채소장수에서 술배달꾼으로 옮겨갔을 땐/ 아버지의 인생은 짐실이 자전거 바퀴였다.”

그의 아버지는 꽤나 낙천적이고 성실한 분이었다고 한다. 입만 떼면 주위 사람들이 배를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으니 입담 또한 상당한 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번 찾아온 가난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안상학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상처를 하고 병구완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빚만 잔뜩 얻은 채로 줄곧 가난에 허덕였다. 개똥밭에 소똥 구르듯 하며 자식들이 성장했을 때는 난데없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5년간 자리보전하다가 세상을 떴다.

안상학은 술을 즐기면서 술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의외로 어린 시절에는 늘 우울해 보이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생활통지표에 그런 내용의 기록이 6년간 이어졌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막내를 낳은 어머니는 돌아서서 병을 얻고 3년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짐작이 간다. 생활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등 시절 줄곧 장래희망이 화가였다고 하니 믿을 수 없지만 그가 가끔 붓글씨를 쓰는 것을 보면 아주 사기는 아닌 것 같긴 하다.

그는 명리학에도 관심이 많다. 시도 그렇지만 명리에 눈을 돌린 것도 십대 시절이다. 사는 게 뭔지, 나는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다가 사주 명리 서적에도 자연 손이 가더라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아는 눈치다. 그는 자신을 자연의 일부라고 본다. 낮과 밤, 절기와 계절의 순환에 기대 인생의 모든 과정을 파악한다. 그는 내게 경고한 적도 있다. 이젠 문학에만 온전히 귀의하라고. 과욕을 버리라고.

안상학은 어느 글에선가 고향을 얼레로 표현한 적이 있다. 까마득한 창공을 나는 연은 저 혼자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은 얼레에 묶여 있다. 고향을 떠나서 사는 삶도 마찬가지여서 쉬고 싶을 때면 얼레에 감겨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그는 입버릇처럼 고향이라는 곳은 살면 떠나고 싶고, 떠나면 돌아가 살고 싶은 곳이라고 한다.

안상학의 시에는 그런 애증의 고향 사람들과 풍경, 정서가 도처에 녹아 있다. 아마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직을 그만두면 그는 또 안동 어디 주막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가끔 나도 거기 등장하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딸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그에게 한마디 던져주고 싶다.

“마이 마시더라도 아프지만 마시더!”

 

 


3. 여섯번째 시집 낸 '시인' 안상학 "30년 넘게 시 붙잡고 살았는데…나, 시인 맞나?"


< 영남일보, 이춘호,  2020-10-23   >

 


아버지는 두 '어매' 줄초상으로 오열했다
안동탁주합동회사서 술 배달하면서 연명
술기운에 영웅행세, 다음날 숙취로 '개털'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편지는 복음이었다
영화감상회서 만난 참지식인 6명 덕분에
언행일치적 삶의 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시대와의 불화'가 없으면 공연히 시를 적을 이유도 없다고 믿으며 우리 삶의 변방스러움의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 어떻게 상처를 입어가는가를 34년째 6권의 시집으로 아로새기고 있는 안동 토박이 안상학 시인. 벽에 걸린 글씨는 그와 2003년 인연을 맺은 서예가 이호영의 작품으로 그의 시 '안동소주'를 '안동바람체'로 적어 선물했다.


세상이란? 자본과 자신 사이 아닐까. 하늘 아래 구두깔창처럼 세상이란 게 누워있지만, 하늘 앞에선 도무지 그 모든 게 무상하다. 그런 생각을 한 시절도 있으나, 그 생각은 얼마나 덜 여물고 무책임한 인식인가?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를 붙들고 낮술 한 추렴하면서 그만의 삶의 이야기를 경청해봐라. 우주보다 더 넓고 깊은 곡절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수직, 어떤 이는 수평을 이야기한다. 저 수직과 수평이 서로를 대지처럼 품어줬다면 돈 때문에 자살하는 자들도 없었으리라.

나는 안동에 사는 안상학이다. 30년 이상 시를 붙들고 있는데 아직 내 이름 뒤에 시인이란 두 글자를 붙여도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시인이 된 뒤부터 사는 지금 이 집은 모르긴 해도 세상에서 가장 후미진 자리 같다. 내 단칸집 뒤 언덕배기가 가을물에 젖는다. 삽상한 바람, 초롱한 햇살 앞에 내 손바닥을 책처럼 펼쳐본다. 가는 길, 굵은 길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일상이 어쩜 일생보다 더 가파른 절벽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세월은 내게 모두 세 줄기 어매(어머니)를 안겨준 모양이다.

첫 어매는 34세 때,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3년간 긴 와병 끝에 돌아가셨다. 긴 병 수발 탓에 조금 모였나 싶던 재산도 바닥나버렸다. 빚을 안은 채 셋방살이가 시작됐고 보다 못한 할머니가 3남매를 보듬어야만 했다. 그런 어느 날, 새어매가 봄볕처럼 왔다. 너무나 다정다감하고 살가운 분이었다. 삶은 감자를 챙겨 영호루로 소풍도 갔다. 가족사진은 한사코 찍지 않으셨다. 미구에 닥칠 액운을 감지한 모양이다. 우릴 만난 지 1년도 안 돼 육영수 여사가 8·15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던 그날 비슷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줄초상을 감당 못해 무덤가에서 오열하는 아버지. 어린 나는 세상에 저런 슬픔도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두 어매가 지자 우리도 몰락해버렸다. 한때 화전민이었다가 나름 풋풋한 가정을 일궜던 아버지는 낙담일로를 걷는다. 안동탁주합동회사 술 배달부로 연명했다. 경덕중 시절 나는 무의미한 공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에게 "자퇴하고 술 배달을 하고 싶다"고 했다. 놀랍게도 아버지가 허락했다. 오죽했으면….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안동 곳곳에 술을 날랐다.

서울·대구·포항에서 10여년 객지생활을 했다. 1978년 생애 첫 서울로의 가출. 친구와 술기운에 잠시 '영웅'이 될 수 있었지만 홀로 남은 숙취 난만한 아침이면 나는 다시 '개털'이었다. 달빛은 만인에게 고루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 슬픔과 고독을 독점할 수도 없었다. 다시 장착된 쓰나미급 외로움이 급습할 때쯤 한 통의 편지가 '복음'처럼 다가왔다.

안상학의 모든 시에는 유난히 외로움이 짙게 깔려 있다. 외로움을 아는 인간은 그 소중함도 안다. 결코 외로움을 떨쳐 내려는 무모한 짓은 말아야 한다. 고독을 지켜나가는 것 그게 시를 쓰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권정생. 내겐 반전 드라마 같은 분이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란 두 편의 동화로 유명해진 그는 앎과 행이 일치하는 분이었다. 일직면 조탑리 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 근처 움집에 사셨던 그와 실과 바늘 같은 세월을 보낸다. 내 인생의 첫 반전은 안동문화회관에서 기획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감상회 때 만난 참지식인 때문이다. 권정생·전우익·이오덕·권종대·정호경·이현주였다. 내 나이 24세 되던 해였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한때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2007~2008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2008~2014), 2016년에는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다.

안동의 지성사는 특이한 세 개의 단층을 갖고 있다. 유학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주운동가다. 그동안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 거유(巨儒)에게만 경도된 것도 사실이다. 이상룡, 이육사 등 독립운동가와 병행해 한국 민주·농민·한글·환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 바로 저 6인방이었고 그들의 언행일치적 삶의 내공을 가까운 거리에서 익힐 수 있었던 것 같다. 권정생과 전우익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보법으로 우주의 끝을 겨냥한 안목을 가진 농사꾼이자 생활 철학자였다. 전우익은 1993년 베스트셀러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란 책을 통해 황금만능에 편승한 자본주의의 횡포를 일갈하며 '같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언어민중주의자·민족주의자로 한글의 미래를 누구보다 걱정한 이오덕, 그는 바른 우리말을 통해 바른 한국인의 삶을 겨냥한 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초대·2대 의장을 역임한 영덕 출신의 농민운동가 권종대의 삶에 빚을 진 것 같아 그의 평전을 쓰기도 했다. 조상을 생각하는 시월 상달만 되면 나는 내 맘의 향불을 켜 저 양심들을 위해 안동막걸리로 헌주를 한다.


4.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 살았으니 :  안상학,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걷는사람, 2020)


< 대학지성 In&Out ,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2020.11.01 >

 


안상학의 시를 오랫동안 읽어온 독자로서 이번에 출간된 신작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다른 독자들도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유하고 싶은 시집이다. 도무지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울 때, 납덩어리처럼 가라앉은 마음의 상태를 극복하기 어려울 때, 이를테면 삶의 무상감이 너무 생생해져버릴 때, 나는 이 시집을 읽고 골똘히 시인의 마음과 내 마음을 두 개의 거울처럼 서로 마주 비추어 보았다.

그러면서 시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한 편의 시가 그것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되비추어, 불가해 보이는 고통을 안으로 다스려 빛나게 하는지를. 기쁨 앞에서보다 아픔과 슬픔 안에서, 마음과 마음을 껴안은 시적 교감이 가능해지는지를, 안상학의 시는 서늘하게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시집의 표지를 열면 시인은 자신이 “허망처럼 빠져드는 그런 바닥”에 놓여 있다고 고백하는데, 그것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바닥”(「바닥행」)으로도 표현된다. 그 바닥의 정동(affects)은 「대서」에서, “가지를 뜨지 못하는 새”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불볕 더운 날, 나는 상자(桑柘)나무 가지에 앉아서 울고 있는 새를 생각한다. 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가지가 퉁겨 올라 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다는 그 나무를 생각한다. 가지를 뜨지 못하는 새, 나도 그 어떤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것일까. 뒤통수가 섬뜩한 날 자꾸만 비지땀이 흐른다.(「대서」 부분)”

위의 시에서 “새”는 시적 자아이며, “상자(桑柘)나무”=뽕나무는 시인을 규정하고 있는 삶이다. 새는 삶의 규정력을 거슬러 초월하고자 하지만, 번번이 삶이 “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다”는 진술은, 그것을 불가능케 만들었던 삶의 가혹함을 환기시킨다. 그 결과로 시적 자아는 스스로를 “가지를 뜨지 못하는 새”, 그러니까 초월을 가능케 하는 날개의 기능이 마비된 새와 같은 처지라는, 비관적 자기인식을 보여준다.
 
“나도 그 어떤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것일까”라는 자문은 시인의 것이지만, 시집을 읽어나가면서 독자인 나 역시 단순한 중력 이상의 삶의 끈질긴 경험적 인력(引力)이, 새의 비상을 불가능케 하는 외부적 억압인 것만은 아니고,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나”의 마음을 쓰는 역사이기도 하다는 전환적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다는 것은 삶을 규정짓는 개인적 체험 속에서 시적 자아가 끝없이 울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울음의 체험이 말할 수 없이 깊어질 때, 그것을 시인은 “바닥”이라고 말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떠오름 혹은 초월의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저 마음의 어두운 심연을 의미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시란 마음이 쓰는, 혹은 마음에 대해 쓰는 역사이다.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에서 안상학은 그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억제해 왔던, 스스로의 마음이 써내려 간 역사를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고백하고 있다. 특히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되어있는 시들은 마음이 써내려 간 시인의 역사에 있어 가히 ‘절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가운데 「생명선에 서서」, 「북녘 거처」, 「안동식혜」는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어떤 이의 초상이 한 편의 ‘단편 서사시’처럼 표현된 작품으로, 마음을 쓰는 역사라는 서정시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작품들이다.
 
「안동식혜」에서 시인은 “일찍이 어매 없이 자란 나는 당연히 우리 집 식혜 맛을 알지 못해서” “내 그리움은 구름재 너머 맏어매 집을 기웃거리곤” 했다고 고백한다. 이 유년기의 아픈 기억은 안동식혜의 생생한 묘사 속에서 돌연 ‘활기’를 뿜어낸다.

“차례 음식상 물리고 나면 한 보시기 담겨 나오던 고것, 살얼음 사각대는 맑고 발그레 싹싹한, 생강과 고춧가루와 엿지름을 한데 훌 버무려 걸러 짜낸 물에 뽀얀 찹쌀과 노리끼리한 차좁쌀로 쪄낸 밥알 사이사이 깍뚝썰기를 한 무꾸 조각들이 서성이는, 그 위에 채를 친 밤과 땅콩 몇 낱 고명으로 올린, 고소, 시원, 달콤, 매콤 얼콤한 그 맛은(...)”(「안동식혜」 부분) 

“어매 없이 자란 나”의 고통을 직정적으로 서술했다면, 이 시는 흔한 자기 연민에 빠졌을 것이나, 시인은 반대로 “맏어매 집”에서 먹었던 안동식혜의 맛을 공감각적 이미지의 활기를 통해 묘사한다. “고소, 시원, 달콤, 매콤, 얼콤”한 생생한 혀의 감각들은 “어매 없이 자란 나”의 허기를 낙천적으로 달랬던 시인의 마음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손맛의 주인이 어매가 아니고 맏어매여서 다행한 일”이라는 시인의 역설적인 긍정 역시,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을 가을 갈대처럼 서걱거리게 만든다.
 
「북녘거처」는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하고 물은 후에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의 “북녘거처”를 회상한다. 시인의 가출은 “세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으로부터의 반항적 도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타고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을 들고 떠나온 소년. 청량리역에 도착해 지금도 있는 미주아파트에서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 준 라면 한 끼 훌쩍”거리고,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에서 한 달을 지냈지만, 아버지의 편지 한 장을 받고는 다시 귀향하게 되었다는 회상.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당시의 “불알친구는 십 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아배도 오래전 소식 없고/ 누이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인데, 오직 시인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 가며”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이 다 늦은 세월 속의 가출의 성격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써 왔던 시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내 삶의 가장 먼 그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다 늦은 가출에의 욕망은 회복할 수 없는 원체험의 장소로 회귀하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제로(zero) 상태에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모순적 열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마음의 출가랄까? 그것은 가능한, 그러나 불가능한 욕망이다. 남는 것은 마음의 가출이 만들어낸 마음의 무늬와 그 간절한 흔적의 역사가 아닐지.
 
「생명선에 서서」는 그야말로 시로 쓰는 마음의 역사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지나간다”는 표현의 반복을 통해, 시인의 연대기적 삶을 계기적으로 분절시켰던 ‘사건화된 장면’들이 시간의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는 역전적 시간 구성을 통해, 장면과 장면을 몽타주 수법으로 편집하면서, 기억과 기억 사이를 빠르게 “지나간다.”

“딸내미가 환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다 지나간다(...) 딸내미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가 있다 지나간다/ 나는 나로 살겠다고 다짐하던 몽골초원 자작나무 지나간다/ 권정생 선생이 살아나고 나는 서울이다 지나간다(...)/ 아버지가 술 배달을 하고 있다 나는 모른 척 지나간다/ 시를 접고 공사판에서 오비끼를 나르는 나를 지나가고/ 없는 아내가 있다가 사라진다 지나간다(...)/새새어머니의 빗자루가 지나가고 새엄마가 칼을 맞고 있다/ 지나간다 엄마 같던 새엄마가 햇감자를 쪄 주던 1974년 생일날, 지나간다/ 무덤에서 나온 엄마가 병원에 누워있다 지나간다(「생명선에 서서」 부분)” 

이렇게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그 길을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서/ 나는 나를 다시 이순의 언저리에 세워본다”. 제목에서의 “생명선”이라는 표현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로서, 시인이 자신의 “이순 언저리”에 대한 현재적 인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지나온 사건들과 장소들은 모순적 정념들이 잡거(雜居)하고 있는 삶 자체이다. 즉 그 속에는 “떠나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돌아오는 것들”이 있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그늘진 것들”이 있는가 하면 “햇살바른 것들”이 있고, “절망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희망하는 것들”도 인접해 있다. 
 
이것은 삶이 충일한 모순의 복합체라는 것을 시인이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의 회상적 감각과 인식 속에서, 그것에 불가피하게 혹은 필연적으로 삼투되어 있는 모순을 객관화된 시선으로 관조할 수 있는 회상적 거리가 확보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생명선”에 선다는 것의 성숙한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안상학의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지나온 날들을 모두 ‘어제’로 부르는 고비 사막에서의 경험과 인식을 쓴 시 「고비의 시간」을 표제로 한 시집이다. 이때 “고비”는 물리적 장소와 마음의 역학 모두에 대한 중의적 표현이다. “모든 지나간 날들과 아직 오지 않은 나날들을 어제와 내일로 셈”할 수 있는 압축적 인식을, 회상적 정념 속에서 유려하게 소환하는 이 시집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 살았으니, 어제와 내일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맞춤한 한 몸이 되었구나. 차가운 이 가을에 즐비한 절창을 음미할 수 있어 좋구나. 훌륭한 시집이다.

1.

세상은 왜 시인을 필요로 하는가: 시인의 시정신

 

 

<피렌체의 식탁, 최광임 시인, 2023.12.25 >

 


[2023년의 책] #7. 이재훈 시집 《돌이 천둥이다》


《돌이 천둥이다》,이재훈 지음, 아시아, 2023

 

이재훈 시인은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 《생물학적인 눈물》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시적 세계를 확장해온 시인이라고 평가받는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꿈을 유령화하고 분배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갖도록 유혹’하는 마법 같은 함정이 있다. 개인은 그 치명적인 유혹에 빠져 자발적 무한경쟁 속으로 뛰어든다. 세상은 감성보다 이성을 우대하고 가치보다 물리적 합리성을 존중한다. 기계적인 세상은 인간에게서 느림의 여유를 앗아가고 유희를 박제시켰다.

이런 세상에 내박쳐진 이재훈 시인은(혹은, 시의 주인공들인 돌들은) “자본주의에서 남은 것은 두려움밖에 없습니다.”, “몸부림치는 작은 사람들만 허다하죠.”(「볼트」)라고 말한다. 얼결에 세계의 함정에 빠졌으나 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들을 땅 위의 하고많은 ‘돌’에 비유한다.

이재훈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돌이 천둥이다》는 자신의 언어를 내주어 우리 사회 돌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 ‘돌’들의 말을 받아 적은 공수*이다. “위대한 말은 꿈을 나눠 갖는 것”(「돌의 재난사」)이라는 게 이재훈의 시정신이다.

*공수: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을 대신 해주는 영매의 말.

이 땅의 돌들은 “평생 구르는 노동”을 통해 “몸을 벼리는 일”과 “침묵”하는 일을 가장 잘한다. 그런데도 이 돌들이 가난한 것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고 게으르기 때문이며 인맥이 없기 때문이라는 모종의 문화를 조장하여 “이 땅의 온갖 죄를 돌에게 담당시”키고 “던지고 차고 묻고 깼다.”(「눈물로 돌을 만든다」)

헤겔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이 땅 돌들의 노동으로 축적된다. 그러나 이 돌들이 뭉쳐 거대한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게 될 때 주인이라고 여기던 자본주의는 지배력과 자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주인의 자본을 축적하는 실질적 주체는 돌들의 평생 구르는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한 까닭이다. 자크 아탈리도 자본주의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시민단체나 비영리단체 또는 NGO 등을 통해서 관계 위주 경제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라고 한다. 관계의 경제가 세계 총생산량의 20% 이상을 차지했을 때 자본주의의 힘은 빠지게 될 것이다.

이재훈 시인은 말한다. “세상은 늘 크고 강한 것들만 원했”으나, “정작 강한 자는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녹색우주」)이며, “사라지지 않을 물과” “사라지지 않을 공기와 나무” 그리고 “저물녘과 새벽만 바뀌지 않는다.”라는 것을 아는 이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이 땅의 돌들이다.

시는 영혼이 상한 사람들이 읽는 것이라고 이재훈 시인은 말한다. 시 또한 기쁨보다 슬픔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슬퍼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시인은 “눈물의 사제”가 되어 곡비가 되어 시를 공수해야 한다. 세상에 시인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시를 좋아하지 않고 시인을 돌로 여기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가장 경계하고 무시하는 ‘가치’를 시인이 세이렌처럼 노래해서다. 노래에 빠진 사람들이 이성보다 감성을 되살리고 유희하는 인간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현재 우울증 환자가 2018년과 비교해 30% 급증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우울증을 치료하지 못한다. 그럴수록 시인은 지상의 돌들의 슬픔을 목놓아 운다.

 


 


2.

이재훈 시인의 『돌이 천둥이다』, K-포엣 시리즈 서른다섯 번째로 발간 

하종기 기자


이재훈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돌이 천둥이다』가 K-포엣 시리즈 서른다섯 번째 출간됐다. 이재훈 시인은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그동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 『생물학적인 눈물』 등의 시집을 펴냈고,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현대시작품상, 한국서정시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재훈 시인하면 떠오르는 게 신화적 상상력이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를 ‘거울’처럼 보여주면서, 그런 현실을 살아 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들의 이면을 알레고리화해서 보여주곤 했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선택한 ‘거울’은 돌이다. 수록된 작품들 속에서 돌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등장한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돌. 주인이 없는 돌. 천시하는 돌. 숭배하는 돌. 버리고 모으고 감추고 숨기는 돌”을 오래 매만진 이재훈 시인. 아주 작고 사소한 것, 그래서 어쩌면 소외될 수 있는 것에서 번쩍이는 시원을 발견해내는 힘이 공감과 실감을 자아낸다. 그런 발견의 안쪽에는 세계의 근원과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태도가 깔려있다. 

〈시인 노트〉와 〈시인 에세이〉를 통해 시인은 어떻게 해서 돌과 만나게 되었는지, 돌에 대한 접근 방법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언술한다. 시를 실제로 읽게 되면 “돌에 대한 상상력”이 “시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고 머물면서 시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사소하게만 보였던 돌 속에도 어떤 비밀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발굴하는 일에 시인은 여러 날을 탕진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이재훈 시인은 “이 세계의 시스템에서 배제되거나 낙오된 상태”인 존재들, “침묵하는 존재들”에게 귀를 달아주고 입을 열어주었다. 그들의 슬픔을 헤아리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오은 시인은 같은 맥락으로 “이재훈의 시편에서 돌은 약자를 대변하는 존재”이다라고 말했다. 

여기 돌을 정성껏 어루만진 시, 돌에 생명을 불어넣은 시가 있다. 『돌이 천둥이다』를 통해 독자들은 오랜만에 돌처럼 단단한 시와 만나게 될 것이다. 

한편, 아시아 출판사는 2012년부터 근현대 대표 작가를 총망라한 최초의 한영대역선집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2014년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K-픽션〉 시리즈를 출간하며 한국 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안도현, 백석, 허수경을 시작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시편을 모아 영문으로 번역하고 출간하여, 해외 온라인 서점에서 판매가 이루어지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한국소설과 한국시가 세계적으로 뻗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한국 문학의 저변확대가 이루어지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 김남조 시인 별세

 

<조선일보, 이영관 기자,  2023.10.10. >

 


  

 
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힌 김남조(96) 시인이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이자, 1000여 편의 시를 쓰며 펜을 놓지 않았던 영원한 현역. 그는 3년 전 낸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에서 “나는 시인 아니다. 시를 구걸하는 사람이다. 백기 들고 항복 항복이라며 굴복한 일 여러 번”이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시 ‘사랑, 된다’에선 한평생 씨름했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이즈음에 이르렀다/ …사랑 된다/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된다 다 된다’.

고인은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는 작품으로 차갑게 식은 한국 사회에 온기를 불어넣어 왔다.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후쿠오카 규슈여고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도중인 1950년 연합신문에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시작으로, 열아홉 권의 시집과 다수의 산문집, 평론집 등을 냈다. 

 

초기 작품에선 인간성과 생명력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한국 사회의 상처를 보듬는 한편, 산업화 이후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실존적 고민을 작품에 소환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시인은 후기 작품에 이르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랑을 작품에 표현했다. 모윤숙(1909~1990), 노천명(1911~1957)의 뒤를 이어 한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문을 연 시인으로 평가받으면서도, 특히 ‘사랑의 시인’으로 불렸던 이유다. 숙명여대에서 문학을 가르쳤고,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여류문학인회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은관문화훈장(1998), 만해대상(2007) 등을 받으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시인은 생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으나, 6·25전쟁을 거치며 형제가 모두 죽었다. 아버지도 어린 시절 사망,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10대에 폐결핵에 걸리며 가톨릭 신앙에 눈을 떴다. 결혼도 절망적 삶을 바꾸지 못했다. 종교 조각 분야의 거장 김세중(1928~1986) 서울대 미술대 교수와 결혼했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로 네 자식을 홀로 돌봐야 했다. 노년에는 심장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치료받았다. 그럼에도 “노년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숨 쉬는 일이 위대하고 가슴 벅차게 느껴진다”고 말했던 시인이다. 열일곱 번째 시집 ‘심장이 아프다’(2013)에 수록된 시 ‘혈서’에선 자신의 시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은밀한 혈서 몇 줄은/ 누구의 가슴에나 필연 있으리/ …사람의 음성은/ 핏자국보다 선명하기에’. 90이 넘은 나이에도 펜을 놓지 않으며, 작품을 끊임없이 발표한 힘의 근원이 엿보이는 대목.

그의 시는 기도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종교적 경건함을 노래하며, 수많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며 노래한 ‘편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고 노래한 ‘설일’(雪日)을 비롯해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진 시편이 다수다.

생의 말년에 주목한 것은 ‘자연’이다. 그는 시집 ‘심장이 아프다’에서 “모든 사람, 모든 동식물까지가 심장으로 숨 쉬며 살고 있는 이 범연한 현실이 새삼 장하고 아름다워 기이한 전율로 치받으니, 나의 외경과 감동을 아니 고할 수 없다”라고 썼다.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돌이켜보며 말했다.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심장이 아프다’ 중에서). 그는 2020년 마지막 시집을 낸 뒤 본지 인터뷰에선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전부가 아니고 시를 읽는 것도 중요하니 못다 읽은 책을 읽고, 못다 들은 음악 들으면서, 좀 헐렁하게, 얼마 남지 않은 생일수록 그 신비를 다양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싶다”라고 했다. 이제 그는 또 다른 생의 신비를 찾아 떠났을 것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유족으로 딸인 김정아 가천대 불문과 명예교수, 아들인 김녕 김세중미술관장·김석 디자이너·김범 설치미술가. 발인은 12일이다. (02)3010-2000

1.  심훈

 


沈熏 (본명 심대섭 沈大燮)


출생 : 1901년 10월 23일 (대한제국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사망 : 1936년 9월 16일(34세)
직업 : 독립운동가,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 배우, 영화 감독, 각본가
학력 :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세인트 존스 대학교 철학과 중퇴
          중화민국 저장성 항저우 저장 대학교 극문학과 중퇴
경력 :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부장
종교 : 유교 → 개신교(감리회)
활동기간 : 1924년 ~ 1936년
장르 :  소설, 시, 영화 각본

심훈(沈熏, 1901년 10월 23일 ~ 1936년 9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시인, 언론인, 배우, 영화 감독, 각본가로 본명은 심대섭(沈大燮)이다. 경기도 과천군에서 3남 1녀 중 삼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아명으로 삼보(三保)나 삼준(三俊)을 사용하였다. 친일 성격을 띠었던 가족들과는 달리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로 인해 감옥에 투옥되고 학교선 퇴학 처분이 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잠시 체류하기도 했으며,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를 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서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할 때에는 장편 소설 《상록수》를 집필해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장티푸스에 사망하였다.

생애


1901년 경기도 과천군(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심훈의 집안은 '친일적 시류에 순응하는 전통적인 양반 가문 출신의 중산지주 계급'으로, 심훈의 두 형은 친일파였고, 심훈의 첫번째 부인은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청풍군 이해승(淸豐君 李海昇)의 누이 이해영(李海映)이었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던 심훈은 4학년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3월 5일 남대문 학생시위에서 구속되어 8개월형을 받아 투옥되었고, 학교에서도 퇴학 처분을 받으면서 집안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대학
이듬해 1920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세인트 존스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21년 결국 중퇴한 뒤, 중국 항저우로 가서 저장 대학교 극문학과로 재입학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듬해 1922년에 중퇴하고, 극문회를 조직하였다. 중국에 망명하는 동안 베이징에서 신채호와 이회영 등과 교우하며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부르짖었다.

1924년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은 《동아일보》에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1926년에는 《탈회》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언론 운동단체 철필구락부가 언론옹호발표회를 계기로 일제로부터 해산 처분을 받고 (철필 구락부 사건), 심훈 역시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했다. 같은해 순종이 서거하자 지난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독립 운동이 발발할 것이라 예감하고 《시대일보》에 '통곡 속에서'라는 이름의 시를 게재하였다. 심훈 선생의 예견대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하고, 식민지 현실을 다루는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집필,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상영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에서 '동방', '불사조' 등의 소설을 연재하다가 일제의 게재 중지 조치로 연재를 중단하게 된다. 이 당시 심훈의 대표작이기도 한 《그날이 오면》은 3·1운동 기념일에 발표된 시로, 원래는 시집으로 발간될 예정이었지만 일제의 검열로 인해 출판이 거절당하기도 했다.

1935년 《동아일보》가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하고, 창간 15주년을 맞아 농촌과 어촌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 소설을 공모하였다. 심훈은 충남 당진에 머물며 장조카 심재영(沈載英)의 야학 운동과 공동경작회 활동을 소재로 삼아 장편 《상록수》를 공모하였고 바로 당선되었다. 당선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해 농촌 학생들의 교육을 도우기도 했다. 심훈은 《상록수》를 영화화하고자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단행본 출간을 목표로 집필에 몰두하던 중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심훈 작가가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과 하는 뜻은 최은희, 허장강 배우 등이 출연한 영화로 신상옥 감독이 만들었다.

사회주의 문학활동 참여


1922년 고향인 조선에 돌아온 후에 후에 카프로 통합하는 염군사에서 활동했고, 1925년에 카프에 가입하였다.
사후
1949년에 시집 《그 날이 오면》, 1952년에 《심훈집》 7권과 1996년에 《심훈 전집》 3권을 출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는 일본 제국의 검열로 중단돼 미완성 작품으로 남음
2005년 7월 경기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기로 결정
심훈가의 장손인 심천보 씨가 심훈 선생 관련 유품 등 가문유물 414점을 당진시에 2013년 7월 16일 기증. 당진시에서는 2014년 3월, 심훈기념관을 준공하였다. 


1977년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첫 시작된심훈상록문화제는 심훈 선생을 기리는 복합문화예술 행사로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사)심훈상록문화제 집행위원회'가 현재 충남 당진시의 후원을 받아 그 정신을 이어지고 있다.


심훈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1997년 심훈문학상 제정을 시작으로 당진의 ‘(사)심훈선생기념사업회’와 ‘계간 아시아’가 공동주관하며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다. 2015년에는 심훈문학대상을 제정하여 기성 작가를 대상으로 문학 업적과 발전 공로를 치하하는 등 각계 각층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2.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11〉 심훈
“상록수 정신이 한국 근대화 이끌어”


< 월간조선,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015년 11월호 >

 

 
주로 밤에만 글을 썼는데 당시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남포등 아래에서 집필했다. 斗酒不辭여서 기자시절, 안 가 본 술집이 없을 정도였고 취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월급이 항상 부족했고 항상 가난에 쪼들렸다고 한다.

⊙ 장편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은 장조카 심재영
⊙ 경성방송국 아나운서 시절, 일본 천황과 관련한 구절을 고의로 삭제
⊙ ‌심훈의 큰형(友燮)은 春園의 《무정》에 나오는 ‘기자 신우선’의 실제 모델
⊙ 둘째형(明燮)은 감리교 목사로 6·25 당시 납북당해

 
  심훈(沈熏·본명 大燮·1901~1936)은 짧은 생애 동안 시와 소설, 산문, 영화평을 쓴 문필가이자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였으며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쓰고 각색·연출한 무성영화 〈먼동이 틀 때〉(1927년)를 제작한 영화감독이었다. 또 1926년 이경손 감독의 흑백영화 〈장한몽〉에서 여주인공 심순애를 못 잊는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로 출연하기도 한 전방위 예술인이었다.
 
  그는 한국 농촌계몽운동의 시작을 알린 장편소설 《상록수》를 탈고한 후 영화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장질부사(장티부스)로 사망했다. 고열의 감기증세를 앓다가 인삼을 달여 먹은 것이 장질부사로 변해 경성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했으나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숨을 거뒀다.
 
  두 형(심우섭, 심명섭)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한 후 경기도 용인의 선영에 안장됐다가 충남 당진군 ‘필경사(筆耕舍·충청남도 지정기념물 107호)’ 옆으로 이장했다.
 
  ‘밭 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글을 쓰겠다’는 뜻의 필경사는 심훈이 장조카 심재영(沈載英·1912~1995·심훈의 큰형인 심우섭의 장남)이 살던 충남 당진시 송악면 부곡리에 내려가 손수 지은 집이다. 심재영은 《상록수》에 등장하는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심훈이 이름 붙인 필경사에서 장편 《상록수》를 55일 만에 탈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작품은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문예작품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뽑혀 9월 10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 연재됐다. 그러고 보니, 《상록수》가 쓰인 지 올해로 꼭 80년이 된다.
 
  기자는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후손을 만나고 작품배경이 되는 현장을 둘러보았다. 당진 부곡리는 동쪽으로 아산만이 있고, 서쪽으로는 송악산이 보이는 곳이다. 심훈 선생이 살던 시절엔 필경사 앞으로 쪽빛 바다가 넘실댔겠지만 지금은 바다를 메워 건립한 국가산업단지(부곡공단)가 시야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곡리(《상록수》 배경으로 등장하는 ‘한곡리’ 마을의 비참한 농촌이 바로 당진 부곡리다)가 80년 만에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청송심씨 안효공파의 26세손이자 심훈의 장조카 심재영의 아들 천보(天輔·76)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40여 년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4년 전 귀향했다. 심훈의 유품 등 414점을 당진시에 기증, 필경사 인근에 심훈기념관이 세워졌다. 심천보씨의 말이다.
 
  “1930년 5월, 열아홉 되던 아버지(심재영)께서 당진 부곡리에 정착해 야학과 공동경작회(共同耕作會)로 농촌운동을 이끄셨어요. 또 서울에서 가난에 지치고, 항일작가로서 길이 막힌 심훈 선생을 당진으로 오게 하셔서 삶을 재정비하게 도와드렸습니다.
 
  서울 태생(노량진)인 심훈은 1932년 충남 당진으로 내려와 소설 《영원의 미소》와 《황공의 최후》 《상록수》 등을 썼다. 심훈에게 당진은 문학 산실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선친이 부곡리에 처음 왔을 때 방에 종이로 도배한 집이 5~6호밖에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배하지 않은 집이 대여섯 집에 불과할 정도로 생활수준이 나아졌다고 합니다. 농촌계몽운동에의 헌신을 담은 《상록수》가 일제 강점기 전국 곳곳의 수많은 젊은이에게 내 나라, 내 고장을 지키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길을 일깨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충남 당진과 《상록수》, 그리고 조카 심재영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는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심훈이 신문기자 시절(1928~1931) 문자보급운동의 전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농림학교 학생 박동혁과 여자신학교 학생 채영신은 ‘○○일보사 주최 학생계몽운동 귀환 보고회’ 석상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여기서 ○○일보가 바로 《조선일보》다.
 
  두 사람은 연인의 감정과 동지적 결속을 느끼며 학교를 자퇴하고 박동혁은 한곡리로, 채영신은 청석골로 내려가 야학과 조합을 설립해 일제 강점기 농촌현실을 고발하고 고리대금업자와 일제의 간섭 등 부조리와 맞선다. 작품 말미에 박동혁은 일경에 수감돼 있는 동안 채영신은 과로로 쓰러져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끝까지 싸워 달라’는 그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며 한곡리로 돌아왔을 때 박동혁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농우회관 낙성식 때 심은 상록수였다.
 
  —《상록수》에서 박동혁의 모델이라는 심재영 선생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지는 1912년생인데 서울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당진에 내려온 뒤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었어요. 경성공립농업학교(서울시립대 전신)를 나왔는데 농업학교에 진학하신 이유도 심훈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1923년경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 선생이 우리집(서울 노량진) 행랑채에서 살던 조준기(趙俊基)라는 친구 분과 대화하시는 걸 우연히 듣게 됐는데, 말씀 속에 ‘농업학교를 나와서 농업과 농촌을 위해 일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아버지는 오래도록 그 말씀이 마음에 남아 경농(경성농업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농촌계몽운동의 뜻을 세워 당진에 내려와 야학당을 세우셨죠. 아버지는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좇지 않고 바보처럼 살아서 후세에 빛을 남겼다고 생각해요.”
 
  1930년 심재영이 경농을 나와 충남 당진에 정착하자 이듬해 심재영의 조부모인 심상정·해평윤씨 부부가 내려왔고 한 해 뒤에 심훈 내외 역시 당진을 찾았다.
 
  “아버지 말씀이 심훈 선생과 어린 시절, 한집에 오래 살았고 아버지를 무척 귀여워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빈털터리셨던 심훈 선생은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서울에서 실직하고 어렵게 사셨어요. 아버지가 ‘시골로 내려오시라’고 권하니 세간도 없이 갓난아이와 부인만 데리고 당장 오셨다고 합니다.”
 
  당진에 정착한 심훈은 조카 심재영의 집에서 소설 《영혼의 미소》(1933년 7월부터 34년 1월까지)와 《직녀성》(1934년 3월부터 35년 2월까지)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고 《상록수》도 완성했다. 또 심훈의 3남(재건·재광·재호) 중 둘째와 셋째가 당진에서 태어났다.
 
  —심훈과 심재영 두 분 사이는 어땠나요.
 
  계속된 심천보씨의 증언이다.
 
  “11살 차이였는데 어린 시절 한집에서 나서 자랐으니 가까운 사이였겠죠. 심훈 선생은 조카들을 사랑했는데 아버지의 동생(沈載雄)이 일찍 돌아가시자 시 〈비오는 밤〉과 〈웅의 무덤에서〉를 쓰셨어요. 그만큼 조카를 사랑했던 겁니다.”
 
 
  두주불사에 항상 가난에 쪼들려
 

  심훈은 심재영이 이끄는 부곡리 ‘공동경작회’ 회원과 가까이 지내면서 피폐한 농촌현실을 직접 경험했다. 그래서 조카를 주인공으로 해 쓴 소설이 《상록수》였다.
 
  “심훈 선생이 《상록수》를 쓸 당시 소설 제목을 두고 고민을 했는데 하루는 아버지 심재영에게 ‘상록수, 상청수, 해당화, 여명 중에서 어느 제목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상록수의 어감이 좋고 농촌은 녹색이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는데 심훈 선생도 같은 생각이었대요.”
 
  —당시 농촌현실은 어땠나요. 공동경작회는 무슨 일을 했죠.
 
  “아버지가 부곡리에 처음 왔을 때, 지주 겸 자작농이 전체 1할 정도였고 자작 겸 소작농이 2할, 나머지 7할이 순 소작농이었다고 합니다. 또 문맹이 8할, 소학교 취학률이 3할, 가옥은 거의 초가였고 1년 농사를 지어 그해 1년 동안 식량을 마련할 수 있는 자급농가는 겨우 2할 정도였다고 해요. 아버지는 당시 상황을 ‘한마디로 비참 그것이었다’고 표현하셨지요.
 
  아버지는 부곡리 청년 12명과 함께 공동경작회를 만들었는데 소작답을 약간 얻고 간석지(干潟地)도 개간했어요. 회원 모두 함께 일하고 함께 봉사하는 조직이었지요. 매년 수입을 저축해 3년 후에는 자작답이 2400평, 소작답이 2400평이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 말기, 마을 청년들이 강제 징용으로 떠나게 되고 양곡 공출로 식량 사정이 악화돼 운영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일제의 압력으로 결국 10년 만에 해산하고 말았다.
 
  —《상록수》의 기본 골격인 박동혁과 채영신의 러브스토리는 어떻게 해서 나왔나요.
 
  소설 속 ‘박동혁’의 실제 모델이 심재영이라면, ‘채영신’의 실제 인물이 최용신이다. 최용신(1909~1935)은 YWCA의 농촌 파견교사로 임명되어 1931년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현재의 안산시 본오동)에서 농촌 아이들을 가르치며 문맹퇴치운동을 펼치다 사망한 인물이다. 과로사로 26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사실이 알려지자 1000여 명의 조문객이 찾아와 함께 슬퍼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심훈 선생은 《상록수》의 여자주인공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해요. 하루는 신문기사에 난 최용신의 안타까운 사연을 읽고서 아버지를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재영아, 됐다! 찾았다!’고요. 실제로 최용신이 살던 마을도 2~3번 찾아가고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구상한 겁니다. 소설 속 박동혁과 채영신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동지였지만 실제 인물인 심재영과 최용신은 전혀 모르는 사이입니다.”
 
  심훈 문중에 따르면, 생전 심훈은 항상 두꺼운 수첩과 만년필을 들고 다니며 글 쓰는 데 소재가 될 만한 것은 모두 기록했다고 전한다. 주로 밤에만 글을 썼는데 당시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남포등 아래에서 집필했다. 두주불사(斗酒不辭)여서 기자시절, 안 가 본 술집이 없을 정도였고 취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월급이 항상 부족했고 항상 가난에 쪼들렸다고 한다.
 
  심천보씨의 말이다.
 
  “심훈 선생은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입학했다가 3·1 만세사건의 학생 주동자로 몰려 학교에서 퇴학, 옥고를 치렀어요. 그때 어머니(해평윤씨)에게 쓴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 글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 나이에 죽음과 삶의 길을 헤아리는 지혜의 글을 쓴다는 게 놀랍습니다. 출옥 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해 연극단체를 조직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했는데 월급도 나오기 전에 술을 마셔 버려 생활고를 겪었다고 합니다. 큰형 심우섭이 근무하던 경성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입사했는데 자꾸 저항을 해서… 오갈 데가 없으니 당진으로 내려온 것이죠.”
 
  —저항을 했다는 말씀은….
 
  “일본에 저항했다는 것이죠. 큰형 심우섭이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나 해라’고 취직시켜 줘도 자꾸 사상관계로….”
 
  《조선일보》 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1930년대〉에 따르면,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근무할 때 일본 천황과 관련된 구절을 고의로 빼먹어 방송국을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영화감독 沈熏 : 〈먼동이 틀 때〉는 조선 名畵 5위

 
  시인이자 소설가, 신문기자였던 심훈은 영화배우로도 출연한 적이 있고 무성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해 주목을 받았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활(日活) 촬영소의 무라타미노루(村田實) 감독 밑에서 6개월 동안 영화수업을 받았다. 당시 일본영화 〈춘희〉에 단역으로 출연, 한국인 최초로 일본영화에 출연했다는 기록도 있다.
 
  심훈은 귀국 후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서울대 박정희 연구교수에 따르면 ‘조선영화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숏(shot) 안에서 카메라를 이동해 촬영하는 팬(pan·좌우돌림) 기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학예부 안석주는 ‘우리가 모든 조선영화를 불살라 버린다면 이 영화를 남겨 놓는 데 과히 부끄럽지 않다’(《조선일보》 1929년 1월27일자)고 평가했을 정도다.
 
  《조선일보》 제1회 영화제(1938년)에서 실시한 ‘조선 명화(名畵)의 추천투표’ 결과, 무성영화 부문에서 2810표를 얻어 5위를 차지했다. 1위는 〈아리랑 전편(前篇)〉(4947표)이었다.
 
  3000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먼동이 틀 때〉는 5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1926년 개봉한 나운규의 〈아리랑〉이 1200원의 제작비로 15만명의 관객을 모은 것과 비교하면 흥행 면에서 사실상 실패했다. 이후 심훈은 영화감독을 접고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심훈家의 엇갈린 운명
 

  —심훈 선생은 가족 중에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나요.
 
  “제게 증조모가 되는, 선생의 어머니인 해평윤씨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증조모는 지혜롭고 차분한 분이었어요. 반면 증조부는 대머리에다 다혈질이었어요.
 
  증조모는 제가 열일곱 때 돌아가셨는데 어린 시절 저와 한방에서 지냈죠. 맛난 것이 생기면 장롱 속에 숨겨 뒀다가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꺼내 주시곤 했는데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젊은 시절, 당신께서 아들 3형제를 낳아 꽃방석에 앉을 거라 생각하셨다고요. 왜냐면 우섭·명섭·대섭(심훈) 아들 3형제 모두 똑똑하고 잘났으니까요. 그런데 셋째가 옥살이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가장 먼저 세상을 뜨고, 둘째는 납북당해 소식을 모르고… 아들 셋 모두가 구설수에 올랐으니까요. 증조모께서는 ‘내가 무슨 얼굴로 밖에 나다닐 수 있냐’며 평생을 두문불출하셨습니다.”
 
  심훈의 어머니 해평윤씨는 지혜롭고 인자한 여성이었다. 서울 은로보통학교 교장과 신북면장을 지낸 남편 심상정(沈相珽)이 중풍으로 쓰러지자 얼굴 한 번 구김이 없이 묵묵히 병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 윤현구는 조선 말 3대 문장가로 꼽히는 윤희구(尹喜求·1867~1927)의 막내로 시·문·화(詩文畵)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문중에 따르면, 윤씨 어머니는 덕망이 있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목소리가 낭랑해 시조를 읊으면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였고 친척들의 모임에 윤씨의 시조 읊기가 반드시 들어 있었다.

1935년 8월 13일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문예작품 현상공모에 심훈의 《상록수》가 당선작에 선정되었다.


  심훈의 큰형이자 심재영의 아버지인 심우섭(沈友燮·1890~1948)은 경성 휘문의숙 1회 졸업생으로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총무과, 문서과 등 다양한 부서에서 일했고 경성방송국 한국어방송 과장,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이사, 동민회(同民會) 이사도 역임했다. 동민회는 1924년 4월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사상이나 사회주의 이념을 비판하고 내선융화 등을 선전하기 위해 조직된 친일단체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한 심우섭은 당시 한국인 가운데 가장 많이 조선총독과 만났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문재(文才)도 있어, 1914년부터 1919년까지 《매일신보》에 신소설 《형제》 《산중화(山中花)》 《주(酒)》 등을 연재해 심훈보다 먼저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심천보씨는 조부 심우섭을 이렇게 평가했다.
 
  “심우섭 할아버지는 최남선, 이광수, 진학문, 이상협 같은 분들과 친한 사이였고 춘원 이광수의 소설 《무정》 속 ‘신문기자 신우선’의 실제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한국방송70년사》(1997)를 보면, 마흔다섯 무렵인 1935년 경성방송국 3대 제2방송과장으로 계실 때 아나운서에게 우리말의 정확한 발음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아나운서는 전문학교나 대학 출신이 대부분이었지만 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우지 못해 발음의 잘잘못을 가리지 못했다고 해요. 예를 들어 고기압을 일본말같이 ‘고오기압’이라고 길게 읽고 ‘고기압’이라고 짧게 읽을 줄 몰랐다는 겁니다.”
 
  둘째 심원섭(沈元燮)은 일찍 남편과 사별해 홀로 살았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조카 심재영이 있는 충남 당진에서 평생을 살다가 말년에 서울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셋째 심명섭(沈明燮·1898~?)은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졸업한 뒤 감리교 목사가 됐다. 1937년 《기독신문사》 이사를 지냈고 38년부터 41년까지 경성 중앙교회 담임목사, 42년에는 감리신학교 부교장이 됐다.
 
  심명섭은 해방 후 기독교교육협회 부총무를 맡아 활동하다 6·25 때 납북돼 생사를 알 수 없다. 또 심명섭이 낳은 2남2녀의 자녀도 지금까지 소식이 끊어진 상태다. 당시 두 아들(재철, 재천)은 서울대생이었고 두 사위 중 한 명은 서울대 교수였다고 한다. 문중에 따르면, 심명섭의 자녀들과 사위들이 북한에 생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심훈이 충남 당진에 내려와 ‘필경사’를 짓기 전까지 장조카 심재영의 사랑채에 머물렀다.   문중 관계자의 말이다.
 
  “심훈 선생과 심재영 선생은 애국적 인물이자 이른바 ‘상록수 정신’을 이 땅에 퍼지게 한 지사입니다. 2000년 8월 15일 김대중 정부는 심훈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어요.
 
  반면 심훈의 형인 심우섭과 심명섭은 당대 뛰어난 인물이자 선각자들이었지만 친일이라는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또한 일부 심훈가의 후손들 중 북한에 사는 분도 있어요.
 
  집안 내에 자랑스러움과 비극, 아픔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식민지와 해방, 전쟁과 분단을 겪은 우리 민족의 고단한 현실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심훈 4남매의 관계는 어땠을까. 심천보씨가 말을 받았다.
 
  “막내(심훈)는 재주가 있었지만 큰형님(심우섭)을 굉장히 어려워했다고 합니다. 심우섭은 성격이 불같은 데다 장손이어서 동생들이 꼼짝도 못했다고 해요. 원섭·명섭 남매는 여성이고 목사여서 성격이 차분했다고 합니다.”
 
  심훈가에 따르면, 심훈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엄숙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다정다감하고 장난기가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심훈이 《조선일보》 학예부 동료인 안석주와 함께 길을 걷다가 일본 순경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순경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신사 두 사람이 걷고 있어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한참 가다가 또 그러고, 또 그러고 했으나 어찌나 동작이 날쌘지 끝내 잡지 못했다.
 
 
  두 번의 결혼과 후손들 
 
  심훈은 두 번 결혼했다. 순종의 가까운 친척이자 한일병탄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 왕족으로 대우받아 후작(侯爵)이 된 이해승(李海昇)의 여동생과 1917년 결혼했다. 처음엔 아내의 이름이 없어 심훈이 직접 해영(海暎)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고 신문물을 배우게 하려고 아내를 진명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이해영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별거하고 끝내 헤어졌다. 그리고 1930년 열아홉의 무희(舞姬)인 안정옥(安貞玉)과 혼인한다. 심훈과 안정옥은 나이 차가 11살이나 됐다. 심훈가 관계자의 말이다.
 
  “심훈과 이해영이 6~ 7년 가까이 살았다고 하는데 아기를 낳지 못해 별거하다 끝내 이혼을 하셨어요. 서울 명륜동에 살았는데 이혼 후에도 친척들이 명절에 인사드리러 찾아뵙곤 했어요. 호적에는 정리가 됐다지만 이전처럼 집안 할머니로 모셨어요. 6·25 때는 당진으로 피란을 왔습니다. 이해영 할머니는 조카 둘을 친자식처럼 키웠는데 모두 자수성가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서울대병원 신장내과 교수가 되었어요.”
 
  심훈의 둘째 아내 안정옥은 무용가 최승희가 후계자로 삼으려 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고 근화여학교(덕성여대 전신)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다고 한다. 안정옥은 아들 셋을 낳았다. 장남 재건(在健)은 1932년, 차남 재광(在光)은 1934년, 삼남 재호(在昊)는 1936년에 태어났다.
 
  장남 재건은 서울 휘문고를 다니다 6·25 때 행방불명이 됐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봤다는 이가 있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심훈가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북으로 갔다. 북한 체제에 저항해 나중 어려운 삶을 살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차남 재광은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해양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삼남 재호는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미국으로 이주했다.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충남 당진은 심훈과 상록수의 고장으로 기세를 올리고 있다. 1977년부터 지금까지 ‘심훈상록문화제’를 열고 있고 작년 9월 ‘심훈기념관’을 개관했다. 또한 심훈의 문학정신을 연구하기 위해 지난 9월 ‘심훈문학연구소(소장 최원식)’가 문을 열었다. 심천보씨가 심훈문학연구소 이사장을 맡았다. 그의 말이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와 중앙대 방현석 교수가 중심이 돼 박사급 연구자들이 심포지엄을 열고, 학술지 발간, 심훈 연구자들에게 경제적 지원도 할 생각이 있어요. 심훈문학 연구의 국제화를 실현하기 위해 연구자 교류네트워크와 창의적 미래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심훈문학교실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심훈과 심재영 선생 같은 선각자는 세상에 없지만 그분의 상록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인간 상록수’들이 한국농촌운동의 모델이 되어 조국 근대화를 이뤄 냈으니까요.”

위로받을 곳 하나 없는 세상… 詩라는 등불을 켠다
만해문예대상 천양희 시인

 

 

< 조선일보, 이영관 기자,  2023.08.03.  >

 

 


“어두운 길을 멀리 비추는 등대 불빛이 만해 시인의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그 정신을 기억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천양희 시인은 “만해 시인의 시를 읽으며 수없이 감탄했다. 시 ‘님의 침묵’에서 ‘님’에 대한 해석 중 ‘가치 있는 모든 존재’라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시는 사치가 아닌 가치라고 생각한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  


2023년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천양희(81) 시인은 수상 소식을 듣자 ‘등대’가 떠올랐다고 한다. 몇 년 전, 어두운 길을 뚫고 봤던 등대다. “길이 보이지 않아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등대는 우뚝 서서 뱃길을 멀리 비추고 있었어요. 그 등대가 시 ‘알 수 없어요’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고 했던 만해 시인의 푸른 정신이 아닐까 싶어요.” 시인은 이번 수상이 “혼란한 이 시대에 시인의 역할이 무엇인가 묻는 것 같다”라며 “물질에는 눈이 밝으면서 정신을 잃고 있는 요즘, 만해 시인처럼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을 켜고 싶다”라고 했다.

천양희는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전업 시인의 삶을 고수해 왔다. “생활이 궁핍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이 시대가 정신적으로 궁핍한데, 물질의 만족 때문에 정신의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이유. 이화여대 국문과에 다니며 이른 나이에 등단했지만, 첫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을 내기까지 18년이 걸렸다. 폐결핵과 가족 문제를 비롯한 육신의 고통이 그를 세상과 시에서 멀어지게 했다.

시인은 44년 전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일화를 들려줬다. 세상을 등질 생각으로 전북 부안의 직소폭포에 갔었다고 한다. “눈을 감고 몇 시간을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너는 죽을 만큼 살았느냐’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고, 폭포 소리만 요란했습니다. 죽을 만큼 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시 살기로 했죠.” 그가 대표작으로 꼽는 시 ‘직소포에 들다’가 그렇게 탄생했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絶唱(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직소포에 들다’ 일부)

시인은 초기 작품에선 절망 속 인간의 실존을 그려냈지만, 여섯 번째 시집 ‘마음의 수수밭’(1994)부터 희망의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상처를 꽃으로 피우는 게 내 시의 주제”라고 말하는 그는 고통의 세월에서 희망을 길어 올린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중략)/ 절벽을 오르니, 千佛山(천불산)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마음의 수수밭’ 일부) 시인은 지금까지 아홉 권의 시집을 냈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비롯한 상을 다수 받으며 작품 세계를 인정받았다. 2017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천양희는 시인이란 직업을 ‘자연을 쓰는 서기’에 비유한다. “자연은 많은 생명을 품고 있어요. 그걸 받아쓰는 게 시라고 생각합니다.” 쓰는 과정은 치열하다. 그는 “적막이라는 무서운 짐승을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고독하게 준비를 한다”라며 “종이의 모서리가 절벽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 절벽에서 안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며 시를 짓는다”라고 했다. “시인은 끊임없이 위기 의식을 가지며, 새로워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 쓰기는 제게 괴로운 기쁨입니다.”

시인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비틀려 있다. 펜으로 글씨를 눌러 쓰는 탓에 관절염이 생겼다. “통증이 심해 항상 파스를 바릅니다. 손가락을 보며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생각해요. 더 구부러져도 좋으니까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 이번 수상 소감을 우체국에 가서 ‘빠른 등기’로 기자에게 부쳤다. “시집 수백권을 보낼 때도 일일이 손으로 주소를 쓰는데, 우체국 사람들이 감탄하더군요. 내 손으로 써도 되는데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디지털 사회는 전자 사막 같습니다. 위로받을 곳 하나 없지만, 시가 ‘오아시스’가 될 수 있어요.”

시인은 “상을 받는 기쁨이 크지만, 기뻐할 수만은 없는 슬픔이 함께 느껴진다”라고 했다. “폭우, 폭염으로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봤습니다. 이 시대에 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커요. 시로 사람들의 마음을 빚어서, 마음을 살리는 게 시인의 일이겠지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만해대상은 만해 한용운(1879~ 1944) 선생의 삶과 그가 꾸었던 꿈을 기리는 상이다. 2023만해대상 시상식은 만해축전(8월 11~14일) 기간인 8월 12일 오후 2시 강원도 인제읍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다. 만해축전은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강원도, 인제군, 동국대 그리고 조선일보사가 공동주최한다.

딸의 첫 출판기념회… 글 모르는 엄마는 20일간 글자 외워 방명록을 썼다
시인 신달자

 

<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 이영관 기자, 2023.05.23>

 


신달자 시인이 19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의 애장품 ‘어머니의 방명록’과 등불에 대해 설명했다. 

 


올해는 대한민국 수립 75주년이다. 이 기간 신생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보물(寶物)을 발굴한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도 개인의 기억과 현대사의 한 장면이 깃들어 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연극배우 손숙, 영화인 신영균, 만화가 이현세에 이어 시인 신달자의 ‘보물’ 이야기를 들어본다.

신달자(80)는 최근 17번째 시집을 낸 현역 시인이다. 부모는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에서 ‘통달할 달’(達) 자를 이름에 붙였으나, 그와 반대로 살았다. 남편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24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동시에 쓰러진 시어머니까지 병간호를 해야 했다. 세 딸을 혼자 키우며 악착같이 살아야 했던 그 모습이 산업화 시기 어려운 삶을 살았던 모두의 인생과 닮았다.

 


글 모르던 어머니의 50년 전 방명록

경기도 성남시 심곡동에 집을 짓고 딸 셋과 함께 사는 시인을 자택에서 최근 만났다. 그는 50년 전 어머니가 자신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에 찾아와 적은 방명록을 액자에 넣어 간직해 왔다. 그에겐 “무엇을 줘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신달자 시인이 50년 전 어머니가 쓴 방명록을 품에 안고 있다. 그는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남편이 쓰러져 고생하는 제 걱정을 했다”며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어머니 무덤에 찾아갔다”고 했다.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기뿜이다/ 73년 12월 18일’. 방명록은 글이라기 보다는 그림에 가까웠다. 

 

하나의 선을 두 번에 나눠 그었거나 받침을 쓰고 지운 흔적, 오타가 곳곳에 보였다. 글 모르던 시인의 어머니가 20일 동안 외워 쓴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에게 말로 불러줘 글을 쓰게 한 다음 베꼈다고 한다. 1910년에 태어난 시인의 어머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남자만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열다섯에 장손집 며느리가 돼, 1남 6녀를 낳았다. 해방 이후에도 글공부를 못하고 집안 살림에 온 힘을 바쳤다.

해방 직후 한국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문맹 퇴치’였다. 1945년 문맹률은 약 78%. 정부는 ‘문맹 퇴치 5개년 계획’을 세워 1954년부터 성인을 대상으로 문해교육을 실시했다. 꾸준한 노력으로 이후 문맹률은 낮아졌고, 문맹이란 말이 생소한 지금에 이르게 됐다.

“내가 글을 알면 책을 열 권도 넘게 쓸 텐데.” 시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이 말을 평생 했다고 한다. 다섯 번째 딸인 시인을 부산의 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낸 것은 어머니의 의지였다. 아들 못 낳아 구박받아도, 딸들은 공부하길 바랐다. “어머니는 결혼 잘하라는 말은 안 했어요. 그저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요.” 시인의 어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한글을 방명록에 쓰고 약 5년 뒤 생을 마감했다. 시인의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였다.

시인은 “어머니는 딸들이 잘되는 걸 본 적 없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예전엔 사람이 죽으면 어머니들이 ‘속 터져서 죽었다’고 많이 말했는데, 자기 인생을 제대로 못 살고 답답했던 것 아닐까요. 어머니는 글은 못 써도 자기 감정을 잘 표현했던 사람이었어요.

 


‘불조심’하며 켰던 등잔

시인의 집 곳곳에는 등잔이 흩어져 있다. 한 곳에 모으니 30여 개에 달했다. 무늬와 모양이 화려한 것부터, 심지 구멍이 두 개인 등잔까지. 그중에서 ‘불조심’이란 글씨가 쓰인 등잔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항상 ‘불조심’ 하던 때가 있었어요. 플래카드도, 책받침도 ‘불조심’이라고 적힌 것들이 많았죠.”

시인은 “6·25 전쟁 때는 양초 가격을 달라는 대로 줘야 해서, 촛불을 거의 켜지 못했다. 다른 의미의 ‘불조심’이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전쟁이 터지자 거창에 살던 시인의 가족은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등잔 하나에 의지해 가족 20여 명이 한집에 숨어 살았다. “이미 죽어 있는 사람들을 지나 뒷산으로 갔어요. 언덕 위에선 제가 살던 동네가 불에 타는 걸 봤습니다. 몇 년 지나 마을로 돌아왔고, 또 사회는 흘러가더군요. 결혼도 하고… 이렇게 험난한 전쟁 이후에도 인간에게는 사랑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쟁 이후 한국인들의 삶은 ‘불조심’과 같았다. 먹고사는 문제 속에서, 불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아끼고 조심해야 했다. 자신을 위한 삶은 생각할 수 없었다. 시인도 마찬가지. 1964년 월간 여성 신인여류문학상으로 등단했고, 1972년 현대문학에서 재등단했다.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77년, 남편이 쓰러졌다. 막내딸이 두 살이었다.

“1976년 살던 집이 90평 부지에 50평 정원이 있었는데, 260만원이었어요. 근데 남편이 병원에 들어간 첫해에만 1000만원 빚이 생겼습니다. 갚을 수 없는 돈이었죠.” 세 딸을 키우며 살기 위해 글을 쓰고 밤새워 공부했다. 소설, 에세이 등을 가리지 않고 책 수십권을 냈다. ‘백치애인’을 비롯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빚을 갚았다. 같은 기간 숙명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마쳤다.

1990년대 말이 되자, 숨 가쁘게 달려온 시인의 눈에 등잔 하나가 들어왔다. 20여 년 전 사뒀다가 집 구석에 버려뒀던 것. 심지는 까만데, 먼지를 닦아보니 색이 뽀얬다. “등잔에 불을 켜 보니 제 자신이 추웠다는 걸 깨달았어요. 인간이었는지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었죠. 모두의 삶이 그랬을 겁니다.” 1999년 ‘등잔’이란 시는 그렇게 나왔다.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면/ 아직은 여자인 그 몸’ (‘등잔’ 일부)

 


박목월 “내 대표작은 오늘 밤에 쓸끼다”

시인을 버티게 한 것은 동료 문인들이었다. 그의 집에는 한국 현대사와 함께해 온 시집 수십권이 있다. 고(故) 박목월(1916~1978) 시인은 신달자 시인이 재등단할 때 가르쳤던 선생이자, 인생의 나침반이었다. “박목월 시인에게 ‘선생님 대표작이 나그네이지요’라고 물으니 ‘내 대표작은 오늘 밤에 쓸끼다’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모두 밤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누구는 대표작을 쓰고, 누구는 아닐 수도 있는 거죠.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써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1985년 고(故) 박재삼(1933~1997) 시인에게 선물받은 백자 역시 그의 집에 40년 가까이 보관돼 있다. 한 전시회에 내놓은 것을 갖고 싶다 하니, 박 시인이 공짜로 내어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시인은 갈수록 아픈 곳이 많다. 4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달 동안 누워 지냈고, 최근엔 폐에 난 결절을 떼내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여든 살 시인은 지금 시대와 문학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잘살면 잘살수록 우리는 문을 닫습니다. 예전엔 전을 구워도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는데, 지금은 자기만 알고 살다 보니 속이 헛헛하고 외로울 수밖에요. 

 

서로에게 ‘오늘 힘들었지’라고 말 한마디 건네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요. 문학이 그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선시가 현대시에 끼친 영향 

 

 

< 불교평론, 박규리 시인, 2022.11.29  >

 


 
선시란 무엇인가. 선시란 ‘진리의 깨달음이 담겨 있는 시’ ‘깨달음의 노래’로서 그 기원은 불교 경전의 게송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전의 내용이 함축 요약된 선시가 지닌 함의는 매우 깊고 광대하다. 그래서 선시는 일반 시와는 다르게 무언가 어렵고 모호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언어개념으로는 깨달음을 이룬 붓다나 선사들의 시를 이해하고 공감하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깊이 있는 지혜와 사유로 통찰한다면 선시 속에는 무궁무진한 진리의 가르침이 오롯이 함축되어 있으며, 나아가 그 진리의 가르침은 세속에 사는 우리의 실존적인 삶과 둘이 아닌 하나로 원융하게 합일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선시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은 곧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를 배우고 체득할 수 있는 최고의 공부이자 수행이 될 수 있다.

선시는 선적(禪的) 사유로 형상화된 시다. 

경전에 기원을 둔 전통적 게송과 당대 선종의 개창과 함께 발달한 선시는 ‘시’보다는 ‘선’을 우위에 두면서, 진리와 깨달음을 전하는 중요한 방편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이후 선사들은 시에 선의 요의를 담아 오도의 체험이나 경지를 표현하는 한편, 시인들은 선의 이치와 묘리를 받아들여 시 창작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선시는 기본적으로 격외시(格外詩)라 할 수 있다. 격외시란 세간의 척도로 고체화된 일체의 언어 규정과 격식을 초월한 선시를 말한다. 깨달음은 얻은 자의 시는 본질적으로 최상승의 도리, 즉 제일의(第一義)의 진실상 세계를 읊고 있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모든 선시는 격외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형식과 격식을 벗어나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선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성의 관념과 통상적 언어논리를 초월하여 세상의 이치를 상징하는 시 역시 충분히 선시적 표상이 된다. 선적(禪的) 사유와 맞닿아진 시적(詩的) 표현에서 생로병사, 희로애락 인간사의 면면이 드러날 때 광의적 개념으로서 선은 우리의 일상사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때 선과 시는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관계가 된다. 그래서 비록 불교나 선 사상에 기반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때로 우리는 가슴 뭉클한 무상(無常)과 공성(空性)으로서의 나와 일체 존재의 정체성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붓다의 직접적인 전언에서뿐만 아니라 피어나는 꽃 한 송이에서도,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해 지는 노을에서도, 진창을 기어가는 한 마리 벌레 속에서도 우리는 생의 무상함과 무아(無我)에의 전존재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선의 미덕은 이렇게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며 광대무변하게 확장되는 데 있다. 이 부분이야말로 선과 시의 접합점이자 무한한 영속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선시의 형성은 고려 중엽 무의자 혜심으로부터 시작되어 고려 말 태고보우, 나옹혜근, 백운경한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후 조선을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선시는 수많은 승려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우리나라 현대시에도 선적 사유와 시적 표현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 이러한 시들은 승속을 넘나들며 한국 문단을 풍요롭게 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들의 시에서 우주적 존재의 실상과 궁극적 삶의 진리를 찾아내는 재미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근대 불교와 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만해 한용운을 들 수 있다. 아래는 만해의 시다.  

 
따슨 볕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 한용운 〈춘화(春畫) 1〉
  

만해 한용운은 일제 강점기 때 승려요 독립운동가이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만해의 중심사상은 이 세상의 혼돈과 무명의 고통을 진리적 깨달음과 둘로 보지 않는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에서 비롯되고 있다. 만해에게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바로 이 고통 가득한 삶의 진창에서 피워 올려진 꽃임을 지혜로 간파한 인식 세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따스한 봄날 《유마경》을 읽는다. 그때 흩날리는 봄꽃이 글자를 가린다. 그러나 그 꽃들이 《유마경》에서 전하는 공(空)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구태여 글자에서 다시 길을 찾을 필요는 없다. 

《유마경》은 세속을 떠나지 않고도 대승의 보살도를 성취한 유마힐의 가르침이 담긴 대승불교의 진수를 보여주는 경전으로 꼽힌다. 반야바라밀을 일상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유마는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등의 일체 분별을 떠난 철저한 무집착과 공 사상을 설파한다. 극락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로 가득한 번뇌망상만 벗어나면 이곳이 바로 극락이요, 깨달음의 자리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각은 언어 문자나 사변적 희론이 아닌, 실존의 삶 속에서 증득해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춘화(春畫) 1〉은 그렇게 철저한 공 사상, 반야 사상에 기반하면서도 한가롭고 고고한 정취가 마치 피안인 듯 가득한 선시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바람을 가지고 산다. 그것을 꿈이라고도 한다. 꿈이 있기에 고단한 현재를 견뎌내고, 꿈이 있기에 발목 접힌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낸다. 그러나 꿈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꿈이 있는가 하면, 나의 욕망은 모두 떨쳐버리고 오직 너를 위해 살고자 하는 꿈도 있다.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를 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 한용운 〈나의 꿈〉

 

〈나의 꿈〉에서 ‘님’이란 사바세계에서 욕망과 사랑과 이별과 죽음의 파고를 건너는 불특정 다수의 모든 이들을 의미한다. 만해의 시에는 거의 다 타자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타자들은 대개 ‘당신’ ‘님’ ‘벗’과 같은 주로 이인칭 대명사로 표현되고 있다. 

시는 시인의 정신과 마음의 거울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시 속에는 시인의 감정 상태와 세계관이 녹아 있다. 따라서 시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행간에 숨겨진 시인의 마음을 제대로 간파하고 공감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 만해는 나의 꿈은 ‘나는 사라지고 너만 남는 것’이라 한다. 그것도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를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라도 되겠다는 것이다. 이 시에는 애초부터 ‘나’라는 인식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고통받는 이유를 사람들이 ‘자기[ego, ātman]’라는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원하지 않은 나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그로 인해 끝없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는 실체, 너라는 실체란 원래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아(無我)’요, ‘공(空)의 체득’이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이 순간 ‘작용’은 하고 있지만 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바른 사유로 깨달을 때 우리는 곧바로 무상, 고, 무아의 고통을 여의게 된다. 나아가 서로가 서로에게 집착 없는 마음으로 함께 의지하고 공존하면서 무한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메커니즘을 한용운은 〈나의 꿈〉이라는 단 한 편의 시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당신이 새벽 그늘에 산보를 할 때면 나는 작은 별이 되어 당신을 지키고, 당신이 여름날 낮잠에 들 때면 덥지 마시라고 시원한 바람이 되고, 고요한 가을밤에 책을 읽을 때면 작은 귀뚜라미라도 되어 적적할 당신을 위해 울음 울겠다는, 자신의 전존재를 다 버린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꿈이다. 이 이상 어떤 지고의 꿈이 더 있을 터인가. 

다음은 조지훈이 월정사에 머무를 때 쓴 시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 조지훈 〈고사(古寺) 1〉

 
조지훈은 혜화전문학교에서 불교를 만난 이후 오대산 월정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강사를 지냈다. 조지훈은 〈고사(古寺) 1〉에 대해 “이 시는 선사상에서 피어난 것이거니와 …… 시는 생명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요, 대상을 내적 생명에서 감수하는 것이므로 모두 하나의 범생명(汎生命) 또는 범신론(汎神論)의 세계에 절로 통하게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해설하였다. 

오래된 절에 어린 상좌가 예불인지 기도인지 드리던 중에 목탁을 치다 말고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은 웃으시는데 멀리 서역에선 노을이 지고 목련도 함께 진다. 오래된 절, 부처님, 어린 스님, 서역 만리길, 눈부시게 지는 노을, 스러지는 모란……, 이렇듯 멀고 가깝고, 같은 듯 다른 것들이 사실은 다 하나다. 깨우친 부처도 못 깨우친 중생도, 보이는 이곳도 보이지 않는 저곳도, 붉게 지는 노을이나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모란이나, 다 무상의 법칙에 따라 생멸하는 같은 존재다. 모두 다 공(空)하고 무아(無我)이다. 

위의 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선적 깊이는 깊다. 선시는 화려한 언어나 파격적인 비유, 상징에만 있지 않다. 선시 궁극의 목적은 우리의 상대적 분별의식과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세상의 실상을 바로 보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사 1〉은 모든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닌 평등한 존재라는 지극한 선적 사유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폭의 그림처럼 고즈넉하게 ‘시’로 ‘법’을 세웠으니 그 이상의 무슨 사족이 필요할 것인가.

다음은 설악 조오현의 선시다. 

 
나는 부처를 팔고
그대는 몸을 팔고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고……
밤마다 물 위로 달이 지나가지만
마음 머무르지 않고 그림자 남기지 않는도다

— 조오현 〈절간 이야기 25〉

 
설악 조오현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일생 출가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출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속세의 고통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절간 이야기 25〉는 첫 행부터 파격적이다. 출가자인 ‘나는 부처를 팔고’ 중생인 ‘그대는 몸을’ 판다는 1행과 2행은 그 표현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도리어 우리에게 더 큰 충격과 경이를 준다. 사실 스님으로서 스스로 ‘부처를 판다’고 선언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우리에겐 마치 창부나 노예처럼 몸을 팔며 살고 있다고 한다. 뒤통수가 얼얼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대개 사람들은 선과 행복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무엇이 바르고 그른 것이며, 무엇이 선이고 악이며, 무엇이 행과 불행인가.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지 못한 채 오욕락 속에서 사는 우리이기에 아무리 살아내도 숱한 얼룩과 깊은 상처만 가득할지 모른다.

무상의 법칙에서 보자면 일체 만물에는 차별이 없다. 그저 우리의 끝 간 데 없는 분별심으로 선과 악, 극락과 지옥, 남과 여, 귀와 천 등을 나누고 차별하며 그로 인해 무량한 고통을 서로 주고받을 뿐이다. 이와 같은 착각을 바로잡고 제법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불이적 사고관이다. 따라서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나와 세상의 존재 이유를 규명하는 근원적 통찰이자,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해탈문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불이법에 대하여 완전한 체득이 있는 자는 달빛이 물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 하나 남지 않듯이, 이 세상 어디를 뒹굴어도 마음엔 고통 한 점 없다. 이 경지가 바로 설악 조오현이 이룬 세계다. 이렇게 조오현 선시 〈절간이야기 25〉의 저 두 행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며 삶의 본질을, 존재의 실상을 냉혹하게 돌아보게 한다.

설악 조오현의 다음 시 는 아무렇지 않게 서술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래서 그 담담함이 주는 진실과 슬픔은 배가 된다. 

 
그날 저녁은 유별나게 물이 붉다붉다 싶더니만
밀물 때나 썰물 때나 파도 위에 떠 살던 
그 늙은 어부가 그만 다음 날은 보이지 않네

— 조오현 〈인천만 낙조〉


이 시를 보며 생사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이 몇이나 될 것인가. ‘밀물 때나 썰물 때나 파도 위에 떠 살던’ 이는 비단 늙은 어부만이 아니다. 인생의 파고에 떠밀리면서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고 ‘떠 사는’ 존재가 우리다. 게다가 그 끝은 행복이나 평화가 아니라, 오직 ‘죽음’뿐이라는 당연한 귀납을 알면서도 밀물에나 썰물에나 한 점 꽃잎처럼 떠서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 인생이다. 진실은 때로 잔인하다. 어떤 달콤한 말도, 거짓 희망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진실이다. 내 인생에 유난히 바닷물이 붉은 저녁, 문득 그만 다음 날은 보이지 않는 때가 내게도 손님처럼 올 것이기에.

아래는 이승훈의 〈연꽃 옆에〉라는 시다. 한 존재는 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다. 이 시는 그 연기적 상호작용으로 구현되는 것이 바로 나의 실체이며 인생임을 노래하고 있다.  

 
연꽃 옆에 물고기 있고 물고기
옆에 게도 있고 거북이도 있고
거북이가 한 세상이네 거북이 
옆에 개구리도 있네. 바람 자면
바람이 그대로 거북이 바람이
그대로 물고기 저 물고기 하늘
을 나는 물고기 연꽃과 연꽃 
사이에 한 세상이 있네.

— 이승훈 〈연꽃 옆에〉


이승훈은 《금강경》을 만난 이후 평생 ‘선(禪)과 아방가르드 정신’을 추구하며 현대적 선시를 개척하는 데 앞장선 시인이다. ‘시의 본질은 없고 절대적 가치도 없다’는 그의 선언은, 우리의 실체는 절대적 자아[ego]가 없는 무아적(無我的) 존재이며, 따라서 모든 개체는 연기적 작용만 있을 뿐 절대적 가치는 없다는 ‘선’에서 전하는 가르침과 합일된다. 

그는 1990년대 말 자아 탐구와 소멸에 관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를 거쳐 새로운 시학을 모색하였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금강경》의 “아상(我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若菩薩 有我… 卽非菩薩)”라는 구절을 접하며 인식의 대전환을 맞게 된다. 이를 계기로 40여 년 동안 자신이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아상 즉 아견(我見), 아집(我執), 아만(我慢) 등의 그릇된 집착에 빠져 있었음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된다. 

이후 이승훈은 자신의 시 세계를 선과 아방가르드에 접합하면서 진정한 현대 선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한다. 기존의 형식과 관념, 유파들을 부정하며 지시적, 묘사적 기능은 가능한 배제한 선적(禪的) 은유와 상징을 차용하면서 선시의 전형을 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 〈연꽃 옆에〉는 기존의 의미적 행 가르기를 의도적으로 타파하면서 각각의 단어들을 저마다 자유롭게 춤추게 하고 있다. 

연꽃 옆에는 물고기가 있고, 물고기 옆에는 게가 있고, 거북이가 있고, 그 옆에는 개구리가 있다. 그러다 바람이 그치면 바람이 거북이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하늘을 나는 물고기가 된다. 그렇게 연꽃과 연꽃 사이에 한 세상이 피고 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그치므로 이것이 그친다는 연기법의 시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연기적 진리기제 속에서는 나는 너이며, 너는 곧 나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더불어 존재하기에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렇듯 나에 대한 집착이 다 사라진 무아에의 자각으로 온 세상과 하나로 담담히 승화되는 시가 〈연꽃 옆에〉다. 

다음은 이성선의 시집 《절정의 노래》에 실려 있는 〈대작〉이다. 

평생 설악산을 사랑하여 설악산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이성선은 강원도에서 태어나 고향 고성에 있는 동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숭실대에서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이성선의 시는 말년에 이르면 시의 형식적 길이가 대폭 짧아지는 대신 여백의 미를 듬뿍 살린 선시 경향이 두드러진다. 첫 시집 《시인의 병풍》을 시작으로 2000년 선시집 《우주가 내 몸에 손을 얹었다》를 마지막으로 홀연히 이승을 떠난 시인은 본인의 뜻에 따라 현재 백담사 계곡에 유해가 뿌려져 있다. 
 

술잔 마주 놓고 서로 건네며
산과 취하여 앉았다가
저물어 그를 껴안고 울다가 
  
품속에서 한 송이 꽃을 꺼내 들고
바라보고 웃느니 바라보고 웃느니.

— 이성선 〈대작〉

대작이란 누군가와 마주 대하며 술 마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성선과 대작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산’이다. 아마도 설악산이 아닐까 유추가 가능한 부분이다. 시인은 산과 마주하여 술잔을 건네며 산과 함께 취한다. 저물도록 대취하여 산을 껴안고 울기까지 한다. 그러다 문득 품속에서 ‘한 송이 꽃’을 꺼내 들고 웃고 웃는다. 

이 짧은 시에는 놀라운 반전이 들어 있다. 1연에는 한 폭의 인간사의 슬픔이 가득한데, 2연에는 부처님과 가섭존자의 염화미소가 오버랩되는 또 한 폭의 경이로운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마음 나눌 사람 하나 없는 허망하고 외로운 세상이기에 시인은 차라리 산과 대작하며 취해 운다. 무상한 삶에 대한 관조가 얼마나 깊기에 그것을 나눌 사람조차 없는 것일까. 때로 우리도 자신의 깊은 속뜻을 다 나눌 사람 찾기가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삶이란 더욱 외롭고 고독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만이 가진 보배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명안의 시인은 진즉 허망함 속에 허망하지 않은 이치를 알고 있다. 또 그 허망함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삶의 유일한 가치임도 또렷이 알고 있다. 바로 시인이 품속에서 꺼낸 한 송이 꽃, 그것이 바로 시인이 이룩한 정신이요, 스스로 빚어 만든 깨달음의 보배다. 

선종에서는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말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진 이심전심의 가르침을 선의 시작으로 본다. 영산회상의 법좌에 오르신 부처님께서 꽃가지 하나를 들고 말없이 대중을 둘러보는데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였으나, 오직 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로 답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진실한 법은 말로 다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서로 상응함으로써 온전히 전해진다. 말이 아닌 상대의 눈빛이나 몸짓에서 도리어 이심전심으로 깊은 속뜻이 더 잘 전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시인에게는 그 꽃을 들어 보일 사람조차 없는 듯하다. 산과 대작하며 취해 울다가 가슴속 꽃 한 송이 꺼내 들고 바라보며 홀로 웃고 또 홀로 웃을 뿐이니.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 이승훈 〈문답법을 버리다〉

 
이 시는 이승훈이 작고하기 2년 전인 1999년에 출간한 시집 《산시(山詩)》에 수록된 시다. 한 마디로 이 시는 말년에 이른 이승훈의 경지가 어디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산에 와서 문답을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산’은 당연히 물질적인 산이 아니라 정신적인 ‘산’을 의미한다. 현세를 차안((此岸)이라 한다면, 정신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것을 피안(彼岸)이라 한다. 미혹과 번뇌의 세계에서 생사유전하는 것이 차안이라면, 번뇌의 흐름을 넘어 깨달음에 이른 상태가 피안이다. 

미혹의 중생 세계는 분별심과 탐심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따라서 중생의 언어체계로는 세계의 실상과 진리상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어떤 언어도 사물이나 일체의 실상 그 자체를 명확하게 지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의 세계를 전하는 데에 사실상 ‘언어’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선에서는 말로는 진실을 다 전하지 못하므로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다. 

그렇다. 진실은 언어나 문답마저 다 끊어진 그곳에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길 없는 길, 말 없는 말, 생각 없는 생각, 해탈 없는 해탈, 번뇌 없는 번뇌처럼……, 아무리 글로 표현해도 그 뜻을 전할 길은 아득하다. 그래서일까. 온전한 진리의 세계, 피안의 세계에 든 노시인은 마침내 그곳에서 말과 언어마저 모두 버린다. 그리곤 그저 나무나 바라보다가, 구름이나 쳐다보다가, 말없이 길을 간다. 그러면서 일갈한다. ‘여기 들면 말은 똥’이라고! 

다음은 송기원의 시집 《절정의 노래》에 실린 시이다. 

 
마침내 보았단 말이지?
누구도 보지 못한 캄캄한 나락에서
기어이 너만은 보았단 말이지?
돌아보면 이승과 저승이 함께 먼데
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끝끝내 너만은 보았단 말이지?
오늘 밤도 벌판 가득히 
망초꽃 흐드러지는데. 

— 송기원 〈망초꽃〉

송기원의 생애는 한마디로 파란만장하다. 시인으로 소설가로 민주투사로 야인의 구도자로, 한평생을 탕아처럼 탕진한 그는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이 경지에 들어섰다. 억압된 본능과 금지된 욕망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파괴의 욕구와 광기 어린 영감으로 들끓던 작가로서의 젊은 시절을 보내던 그는 어느덧 생도 사도 아닌 이곳까지 천연덕스럽게 든 것이다.

욕계의 세계에서 자아를 폐기하는 것, 폐인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죽음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행위는, 이 세계에서 제 본래의 꼴[本性]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진정성 있는 실현의 길일지도 모른다. 그 험난한 길에 송기원이 있었다. 

1990년대 들어 국선도와 단전호흡을 거쳐 명상의 길로 들어선 송기원은 그때부터 이미 세상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인도 뒷골목과 히말라야 언저리, 계룡산 무문관과 미얀마 명상센터 등에서 속세의 경계를 넘는 구도를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가변적이며 부질없는가를, 한 개인이 상정한 초월적 삶의 목표라는 건 또 얼마나 불확정적이며 허망한 것인가를 본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광활한 우주 속을 떠도는 먼지처럼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 시는 그런 여정 속에서 그려진 시인의 마음이다. ‘마침내 보았단 말이지? 누구도 보지 못한 캄캄한 나락에서 기어이 너만은 보았단 말이지?’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캄캄한 삶의 나락에서 도리어 삶의 진실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사람이 있다. 이 시의 해설은 영가현각 선사의 오도가인 《증도가》에서 찾을 수 있다. 

무지의 잠에서 깨어 보니

 원래부터 모든 것 나에게 있었네

 꿈속에선 지옥도 있고 고통도 있었으나

 꿈 깨고 보니 한 구슬 빛뿐이네.” 

시인이 이승과 저승을 넘어 그 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도달하여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지의 잠에서 “꿈 깨고 보니 한 구슬 빛뿐”인 것처럼, 그의 벌판에도 그저 원래부터 있었던 ‘망초꽃 하얗게 흐드러지’고 있을 뿐인가. 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도달한, 꿈 깬 그곳도 바로 오늘 밤 이곳이리니.  

다음은 송기원의 같은 시집에 실린 시다. 

 
일찍이 한소식 하여
스무 살에 큰스님 되었다는 조실스님
고로롱 팔십이 되도록까지
눈빛 사나는 운수납자(雲水衲子)들에게
딱 한 마디만 가르치네. 
“공부헐 것 없다아.”
오늘도 뼈만 앙상한 갈퀴손을 저어보이네.
“공부헐 것 없어어.”
조실 앞에 피어 있는 어떤 나비난초인들
갈퀴손 손짓보다 가벼우랴. 

— 송기원 〈나비난초〉


일찍이 도를 이룬 조실스님의 가르침은 딱 한 마디다. ‘공부할 것 없다!’ 

선에서는 부처가 되려 하고, 도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또 하나의 욕심으로 보았다. 깨달음이란 지금 가진 것 외에 또 어떤 것을 더 가져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순간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 시를 보면 떠오르는 선시가 있다. 태고보우 선사의 〈지나는 구름(過雲)〉이다. 


평생토록 자유로워
구하는 것 없으니 어딜 가나 편안하네
천하에 가득하나 그 행위는 자취 없어
오늘도 예전처럼 푸른 산에 누워 있네.

(平生行止大無端 是處無求是處安
  行滿天下沒蹤跡 今日依然臥碧山)

 
진리를 깨치고 난 후, 이른바 한 소식 한 후의 마음은 어딜 가나 편안하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니 마음의 구속 따윈 없다. 비록 ‘행위’는 있어도 그 행위에 대한 집착과 욕망은 다 사라진 지 오래이니, 어제나 오늘이나 푸른 산 위에서 노닐 듯 한가하고 자유롭다. 

송기원의 이 시는 특별히 서슬 푸른 ‘운수납자’, 수행자들에게 들려주는 시다. 비록 물욕은 떠났다 하더라도 도를 구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욕심마저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드러난 삶은 깨끗하고 청빈할지라도 반드시 도를 ‘배워 이루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조차 다른 이름의 탐심이기 때문이다.  

중국 선종의 사상적 개창자라 할 수 있는 육조혜능 선사는 그 어떤 대상에도 무착(無着)과 무주(無住)와 무상(無相)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였다. 이 삼무(三無) 사상은 이후 오늘날까지 선종의 기치를 관통하는 중요한 핵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만큼 선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 어떤 양변에도 머무르지 않는 철저한 무집착과 불이의 마음이다. 

그래서 조실스님은 오가는 수행자들에게 딱 한 마디만 가르친다. 공부하지 말라고. 아니, 공부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놓으라고 한다. 부처 되겠다는 욕심과 집착이 사실의 너의 진실상을 깨우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물질이든 배움이든 지고의 사랑이든 위대한 정신이든 그 어떤 것에든 욕심을 부리는 순간, 자신의 본래면목과는 멀어진다고, 깡마른 갈퀴손을 하염없이 저어 보인다.

조실 앞에 피어 가볍게 하늘거리는 나비난초보다, 무게도 잴 수 없는 저 허공보다, 탐욕과 욕망을 다 버린 한 인간의 공(空)한 갈퀴손이 저리 가볍고 가볍다. 

 
지금까지 선과 진리에 대한 깊은 사유에 입각한 뛰어난 현대시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반드시 불교나 선적 사유로 창작되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선의 지평과 맞닿아 있는 시들도 있다. 나아가 독자 스스로 우주의 진리와 감흥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떤 시라도 그 속에서 선을 만날 수 있다. 사실 글은 읽는 이에 의해 완성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읽는 사람의 안목에 따라 선시도 일반시가 될 수 있으며, 평범한 시도 놀라운 선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대한 자연의 변화에서부터 한 마리 풀벌레에 이르기까지 유정물과 무정물을 막론하고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무상하며 무아이며 연기적 존재로서 세상에 가득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것들이 살아가고 죽어가는 모든 과정, 그 속에서 파도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우리의 희로애락 자체가 다 진리요, 깨달음의 현현일 뿐이다. 

다만 이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반조와 명안의 지혜가 필요할 뿐, 선은 부처요, 자연이요, 몸이요, 꽃이요, 갈퀴손이다. 이처럼 한 편의 시에서 우주의 전언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선이요, 진리의 체득이요, 나아가 시를 선적(禪的)으로 읽는 재미다.  

아래는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미당 서정주의 대표작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국화 옆에서〉

 
미당 서정주의 시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우리말을 가장 능수능란하고 아름답게 구사하는 시인이며, 우리 민족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찬사가 있지만,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다녔던 그의 사상 저변에는 불교적인 인식도 깔려 있다. 그러나 미당은 불교적 사유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보다는 민족적 정서와 서정적 미학을 더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화 옆에서〉는 불교적, 선적 사유로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시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 속에는 붓다가 깨달은 핵심 진리기제 중 하나인 ‘연기관(緣起觀)’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연기란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변화를 의미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으며,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나와 타자 간의 관계 즉 현상계의 모든 존재 형태와 법칙을 말한다. 이러한 연기적 인식은 인드라망처럼 연결된 세상과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통해 나와 타자를 분별함으로써 발생되는 나만을 위한 소욕에서 벗어나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평등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만든다. 

이 시에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많은 것들이 동원되고 있다.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나도 잠 못 든다. 이 얼마나 절묘한 연기적 사유인가. 꽃 한 송이는 그저 혼자 핀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힘을 모으고, 또 그 꽃이 피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의 사랑마저 더해져 마침내 핀 것이다. 그러므로 소쩍새가 꽃이요, 천둥이 꽃이요, 무서리가 꽃이며, 마침내 내가 꽃이라는 거대한 연기법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기적 사고는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소중함과 대자대비의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게 한다.

이것이 바로 ‘선(禪)으로 시(詩) 읽기’라 할 수 있다. 선적으로 확장된 시 읽기는 시를 더욱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자타불이의 소중한 깨달음에까지 이르게 해준다. 이렇게 선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보고 듣고 인식이 닿는 모든 것에 두루 펼쳐져 있으며, 선시는 오늘날까지 알게 모르게 현대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시인과 독자의 정신을 향기롭게 하고 있다. ■

 

박규리 


시인. 동국대 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1995년 《민족예술》로 등단.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와 학술서 《경허 선시 연구》 외 논문 다수. 제비꽃서민시인상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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